성탄과 별

해방과 구원은 성서 이야기의 두 핵심이다. 히브리족속의 탈애굽과 예수의 십자가는 두 핵심 이야기를 대변하는 사건들이다. 나머지 무수한 이야기들을 단지 두 핵심 이야기를 위한 치장으로 내칠 수는 없겠다만, 무게가 처짐에는 틀림없다.

예수 탄생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십자가와 부활에 닿지않는 예수 탄생 이야기는 큰 뜻이 없다.

<그 분은 그 옛날 호숫가에서 그분을 알지 못했던 사람들에게 찾아가셨던 것처럼, 우리에게도 이름이 없는, 알지 못하는 분으로 찾아 오신다. 그분은 우리에게 “나를 따르라!”고 똑같이 말씀을 하시며, 우리 시대에 그분이 성취하셔야 할 과제를 우리에게 정해 주신다. 그리고 순종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들이 현명한 사람이건 단순한 사람이건 간에, 그분의 제자로 살기 위해 거치게 될 수고와 갈등, 고난 속에 그분 자신을 계시하시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신비로써, 그들은 자신들의 경험 속에서 그분이 누구인지를 배우게 된다.> – 알버트 슈바이처(Albert Schweitzer, 역사적 예수의 탐구에서)의 말이다.

<예수가, 아마도 처음이자 유일하게, 성전의 화려함에 맞서서 그 합법적 브로커 기능을 브로커 없는 하나님의 나라(unbrokered kingdom of God)의 이름으로 상징적으로 파괴하였다는 사실은 분명해 보인다.> -우리 시대의 신학자 존 도미닉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 역사적 예수에서)이 만난 예수의 모습이다.

십자가와 부활이 전적으로 믿는 이들 개인 신앙고백에 닿아 있듯이, 예수 탄생의 뜻 역시 온 세상 각 사람들과 신이 그 어떤 브로커 없이도 만나는 지점 곧 오늘 여기에서 세워진다.

2018년 성탄 전날 아침에 빌어보는 기도이다. “곤고한 모든 이들의 가슴에 한 점 별빛으로 찾아오소서. 별빛에 크기와 상관없이 오신 당신으로 인해 오늘, 여기에서 누리는 삶의 뜻을 찾게 하소서.”

그 마음으로 가게 손님들에게 편지를 띄운다.

12-24

이제 2017년도 딱 한 주간을 남겨 놓았습니다. 지나간 한 해 동안 있었던 여러 일들을 생각해봅니다. 사람 사는 일이 늘 그렇듯 꼭 즐겁고 기쁜 일들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여느 해처럼 때론 아프고 슬프고, 화나고 짜증나는 일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해를 돌아볼수록 커지는 것은 감사입니다. 특별히 제 세탁소를 통해 만난 당신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 감사의 마음으로 크리스마스 전 날 아침에  제가 좋아하는 시 한편을 당신과 나누고 싶어 띄웁니다.

겨울 길을 간다

–       이해인

봄 여름 데리고
호화롭던 숲
가을과 함께 서서히 옷을 벗으면
텅 빈 해질녘에
겨울이 오는 소리

문득 창을 열면
흰 눈 덮인 오솔길
어둠은 더욱 깊고 아는 이 하나 없다
별 없는 겨울 숲을
아는 이 하나 없다

먼 길에 목마른
가난의 행복 고운 별 하나
가슴에 묻고
겨울 숲길을 간다.

화사한 봄도 아니고, 호사스런 여름도 아니고, 풍성한 가을도 아닌 텅 빈 겨울에 흰 눈 덮힌 오솔길을 걷는 시인은 올해 73살의 카톨릭 수녀입니다. 그녀는 아는 이 하나없이 별 빛조차 없는 어두운 겨울 숲길을 걷고 있습니다.

보통 사람들의 눈으로 바라보면 겨울 길을 걷고 있는 시인은 불쌍하고 안타깝게 보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저 같은 보통 사람들에게 놀라운 반전을 선포합니다. 자신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그녀가 행복한 까닭은 <가난의 행복 고운 별 하나/ 가슴에 묻고/ 겨울 숲길을> 걷고 있기 때문이랍니다. 그녀가 가슴에 품은 별이란 종교적 고백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곰곰이 따져보면 저 같은 보통사람들 누구에게라도 그 별 하나 묻을 가슴이 있는 한 ‘행복을 가져다 주는 고운 별’ 같은 사람 하나쯤을 있지 않을까요?

이제 한 주간 남은 2017년의 당신의 시간들이 고운 별들로 반짝이는 길이 되시길 빕니다.

당신의 세탁소에서


The year 2017 has just one week left now. I’m thinking back over various things that happened this year. As is of the case with life, not all of them were happy and pleasant. Just like other years, some of them were painful, sad, upsetting or irritating. However, as I’m looking back over the year, what becomes bigger is gratitude. Especially, I am grateful to you who I got to know through my cleaners.

With the gratitude in mind, I would like to share with you one of my favorite poems on this morning one day before Christmas.

Walking on a winter path

– Hae-in Lee

Along with spring and summer
Woods which was dazzled,
When they take off clothes slowly with autumn,
Desolate at sunset
The sounds of winter coming are whistling around.

When I open the window casually,
On the snow-covered footpath,
Darkness becomes deeper and no one who I know is there.
In the winter woods without stars
There is no one that I know.

Thirsty from a long journey
Happiness of poverty, a beautiful star
Burying in my heart,
I’m walking on a winter footpath in the woods.

Not in cheery spring, not in dazzling summer nor in abundant fall, but in desolate winter, the poet who is walking on the snow-covered footpath is a Catholic nun at the age of 73. She is walking on the dark winter footpath in the woods without stars.

If we look at her with the eyes of ordinary people, the poet may look pitiful and sad. But, she declares the reversal which is shocking to ordinary people like me. She says that she is a happy person.

The reason why she is happy is because she is walking <on a winter footpath in the woods/Burying in my heart/Happiness of poverty, a beautiful star>. The star which she buries in her heart may mean religious confession.

But, thinking it over deeply, to all the ordinary people like me, if we have a heart to bury that star in, I think that we must have at least one person who is like a beautiful star which brings happiness to us. Don’t you think so?

I wish that the last week of 2017 will be like a path sparkling with beautiful stars to you.

From your cleaners.

벗과 멋 그리고 삶과 오늘

두어 주 전 일이다. 동네 벗에게 전화를 받았다. 나이 들어가며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나비 넥타이가 썩 잘 어울리는 친구다. 나이에 어울리게 외모나 내면으로 제 멋을 풍기는 친구들을 보면 참 좋다. 나 또한 흉내라도 내는 시늉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비 넥타이야 애초 나와는 무관한 액서사리이어서 온전히 그의 멋으로 치부할 수 있지만, 그의 색스폰 연주에 이르면 부러움이 인다. 나이 들어 불기 시작한 모양인데 그 소리가 제법이다. 게으른 나는 차마 흉내조차 내지 못할 그만의 멋이다.

그런 그가 전화를 통해 내게 제안을 하나 했다. 친구와 내가 적을 두고 있는 교회 창립 예배 순서에 자신이 색스폰을 연주하는데 시 한 수 읊어 보라는 것이었다. 그의 제안은 여러모로 가당치 않은 것이어서 애초 나는 저어했다. 하여 그냥 웃고 넘기려 했었다.

그러다, 오늘 그의 섹스폰 연주에 맞추어 소리내어 시 한 수 읊어본다. 연습으로.

피조물, 죄인, 참 사람 이해를 위한 구원, 구원의 확장, 삶과 죽음, 감사 그리고 오늘 등등을 곱씹어 보면서….

자기 멋 맘껏 누리며 나이 들어가는 벗에게 고마움을.


오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동쪽에 있는 에덴이라는 곳에 동산을 마련하시고 당신께서 빚어 만드신 사람을 그리로 데려다가 살게 하셨다.)

한 처음 하늘 문 열어
사람 하나 세우셨다.
이름 지어 아담 곧 사람
이내 사람을 부르는 소리
–  여호와 하나님께서 아담을 부르셨다. “사람아! 너 어디 있느냐?”
사람은 떨며 대답했다.
–  알몸을 드러내기가 두려워 숨었습니다.

그날 이후
여호와께서 단 한 순간도 쉬지 않으신 일
사람 사랑
가죽옷 입혀 놓은
사람을 향한 사랑

(에케 호모(Ecce homo)
–  빌라도는 사람들에게 예수를 가리켜 보이며 “보라! 이 사람이다” 하고 말하였다.)

사람들은 강퍅하였다.
수천 년 부끄럽고 두려운 세월
여호와, 참다 참다 참다 참 사람 하나 내린다. 이 땅에

(그는 메마른 땅에 뿌리를 박고 가까스로 돋아난 햇순이라고나 할까? 늠름한 풍채도, 멋진 모습도 그에게는 없었다. 눈길을 끌 만한 볼품도 없었다.)

모가지 뻣뻣한 사람들이 그를 향해 쏘아 날리는
멸시와 퇴박
도살장으로 끌려 가는 어린 양처럼
가만히 서서 털을 깎이는 어미 양처럼 결코
입을 열지 않았던 사람
온갖 굴욕을 받으면서도 입 한번 열지 않고 참았던 사람
참 사람
예수

온 몸 온 맘
삶으로
죽음으로
마침내 다시 사심으로
여호와를 알게 한 사람
사람 사랑을 고백케 한 참 사람

삶과 앎
바로 사람
그 사람들이 모인 곳

1979년 여름 어느 날
이 사람을 보라!
그 소리에 끌려 모인 사람들
이름하여 델라웨어 한인 감리교회

여호와는 우리에게 이미 보여주셨다.
한 처음을
한 사람을
서른 여덟 해에 담긴 태초와 오늘까지의 세월을

2017년 이 곳은 새 하늘과 새 땅
사람들이 부르기 전에 여호와께서 응답하시고
사람들이 말하기 전에 여호와께서 들으시는 세상

세우는 자
세움을 받는 자
마음 문 열어 박수 치는 자
모두 사람이 되어
참 사람이 되어

감사하므로 살아있는 오늘을 느끼는
나 너
우리
마침내
참 사람

2016년 성탄에

새 식구를 맞고, 또 다른 가족이 하늘나라로 떠나는 길을  배웅하노라 지난 두어 달 동안 몸과 마음이 조금 분주했었다. 눈과 귀는 열려있어 미국이나 한국의 숱한 뉴스들은 저절로 내게 들어와 생각의 분주함을 더했다.

지나간 내 삶이 그랬듯, 습관처럼 생각의 분주함을 떨치려 성서를 손에 들곤 하였다. 2016년을 보내는 이 시간속에서 성서는 내게 이렇게 응답했다. 우리는 신의 은혜와 은총을 소유하고 마냥 누리는 존재가 아니라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 속에서 신의 은총을 그냥 겸허히 받아 드리는 존재라는 것이다. 어떤 처지와 환경에 놓여 있든간에, 신 앞에서 사람(존재)이 존귀할 수 밖에 없는 까닭이다.

그 맘으로 가게 손님들에게 성탄편지를 띄웠다. 누구랄 것도 없이 모두 귀한 모습으로 2017년 새 희망을 맞자고…


2016년 마지막 일요일이자 성탄절입니다.

올 한해 어떻게 보내셨는지요? 저도 지나간 올 한 해의 삶을 되돌아봅니다. 당신 덕분에 세탁소도 잘 운영되었으며, 제 개인적인 삶이나 가정 일들도 그럭저럭 잘 꾸려 온 것 같답니다. 그러나 곰곰히 다시 따져보면 아쉽고, 부족하거나 모자란 것들이 너무나 많답니다.

그런 생각으로 선택해 읽은 책의 제목은 <완벽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사랑>입니다.

한국의 불교 스님인 혜민이 쓴 책인데, 이 사람의 이력이 재미있답니다. 한국에서 태어나 고등학교를 마친 후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에서 종교학을 공부한 후 하버드 대학교에서 종교학 석사, 프린스턴에서 종교학 박사를 마친 뒤, 매사추세츠 주의 Hampshire College에서 7년간 종교학 교수로 있다가 한국으로 돌아가 스님이 되었답니다. 현재는 가족을 먼저 보낸 분들, 암 진단을 받으신 분들, 장애인 아이를 기르고 있는 부모들, 힘든 취업 준비생들, 유산의 아픔이 있으신 분들 등등을 위한 무료 치유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는 베스트셀러 작가이기도 합니다.

혜민 스님은 그의 책 <완벽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사랑>에 이런 말들을 기록하고 있답니다.

<완벽하진 않아도 85퍼센트 정도 괜찮다 싶으면 넘기고 다음 일을 하세요. 완벽하게 한다고 한없이 붙잡고 있는 거, 좋은 거 아닙니다. 왜냐하면 완벽이라는 것은 내 생각 안에서만 완벽한 거니까요.>

<오랫동안 원하던 것을 성취하고 나면 두고두고 행복할 것 같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아요. 막상 성취하고 나면 잠시의 행복감 뒤에 허탈의 파도가 밀려오고, 성공 후 새로운 상황이 만들어낸 생각지도 못한 후폭풍이 몰려와요. 그러니 지금의 과정을 즐겨요. 삶에 완성이란 없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의 책을 읽는 이들에게 이런 당부를 합니다.

<지금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분들 행복해지시길, 건강해지시길, 편안해지시길. 어디를 가시든 항상 보호 받으시길. 자신의 존귀함을 잊지 않으시길.>

성탄절 아침에 불교 스님의 말로 인사 드리는 것이 다소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도 있지만, 비록 결코 완벽할 수는 없는 존재일지라도 우리 스스로의 존귀함을 일깨워 주는 점에서는 다 통한다는 마음으로 인사 드립니다.

Merry Christmas & Happy Holidays!

당신의 세탁소에서


 

It’s the last Sunday of 2016 and Christmas Day.

How has this year been to you? I’m also trying to look back on my life this year. Thanks to you, I think that I have been able to manage to run the cleaners as well as my personal life and my family well enough. However, brooding over things in this year more thoroughly, I feel that many things are lacking and that this year leaves me much to be desired.

With that thought, I chose and read a book whose title was “Love for Imperfect Things (완벽하지 않은 것들에 대한 사랑).”

It was written by a Korean Buddhist monk, Hyemin, who has a very interesting career. After graduating from a high school in Korea, he studied the science of religion at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in Berkeley, received a master’s degree in the science of religion from Harvard, and a Ph.D. from Princeton. After that, he taught at Hampshire College in Massachusetts as a professor in the science of religion for seven years. Then, he returned to Korea and became a Buddhist monk. At present, he is running a free special healing program for unfortunate people, such as bereaved families, people with cancer, parents with handicapped children, jobseekers in difficult situations, women with the ordeal of miscarriage, and so on. He is also a best-selling author.

He said the followings in his book, “Love for Imperfect Things”:

<If you think that it is 85% fine, if not perfect, move to the next work and do it. To hold on to something forever to make it perfect is not good. That’s because to be perfect really means to be perfect only within your own perspective.>

<Though you may think that you would be happy for a long time if you accomplish what you have wanted for so long, that is nowhere near the truth. Once you have accomplished it, you would face a wave of letdown after a brief feeling of happiness. You would confront the unexpected backlash which a new situation after the success will cause. So enjoy the process at the present time. It seems to me that there is no completion in life.>

And, he made wishes for the readers of his book:

<I wish for all of those who are reading this book to be happy, healthy, and comfortable, and to be protected wherever you may go, and not to forget the nobility of yourself.>

It may look inappropriate to greet you with a Buddhist monk’s words on Christmas morning. But, I’m doing so with the thought that Christianity and Buddhism have something in common: they enlighten us that though we can never be perfect, we are still precious.

Merry Christmas & Happy Holidays!

From your cleaners.

 

기도를…

넋두리 – 쓰기 싫었고 쓰기 힘들었던 글입니다. 세월호 참사 2주기를 맞으면서 지역 동포사회 교회들이 함께 기도할 있었으면 좋겠다는 제안이 있었고, 그런 소망을 교회에 전달해 보자는 의견이 필라세사모 모임에서 나왔었습니다. 그런 뜻을 교회에 전달하는 편지작성이 어찌어찌 몫이 되었습니다.

솔직히 벽에다 대고 이야기하는 기분이어서 힘들었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들어 주신다는 믿음과 한사람, 단  한 교회만이라도 함께 주었으면 하는 기도로 것입니다.


 

기도 부탁 드립니다.

우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셨던 수난과 고난을 되새기는 기간에 귀 교회와 목사님께 기도해 주십사는 부탁의 말씀을 올립니다.

무엇보다 먼저, 수난과 고난을 딛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첫 징표를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기쁨과 하나님의 은총이 목사님과 교회위에 충만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저희는 필라델피아 인근에 살면서 두해 전 이맘 때 한국에서 일어났던 세월호 참사를 기억하며, 그 유가족들을 위해 기도를 끊이지 않고 있는 필라세사모(‘세월호를 잊지 않는 필라델피아 사람들’의 약칭입니다.)에 속한 기독교인들입니다.

photo_2016-03-12_20-18-42세월호 참사와 유가족들에 대한 서로 다른 수많은 소문들이 있습니다. 무엇보다 2년이라는 세월은 늘 오늘의 문제로 바쁜 사람들에게 잊기에 충분한 시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명한 것은  “아직도 아픔을 안고 울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저희들은 “아직도 아픔을 안고 울고 있는 사람들”을 향한 세상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기 보다는  <나는 전능하신 분께 말씀드리고 싶고, 하나님께 내 마음을 다 털어놓고 싶다.>고 한 욥의 고백처럼 지금 울고 있는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합니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저희들처럼 그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두해 전 4월 16일 전혀 예기치 못했던 사고로 자식과 가족을 잃기 전까지 말입니다. 물론 사건과 사고로 인해 자식이나 가족을 잃은 사람들이 그들 뿐만이 아닙니다.

저희들은 지난 두해 동안 유가족들이 지내온 모습들을 통해 비슷한 경험을 했던 여느 사람들과 다른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네들은 그들이 겪은 비극적 상황속에서도 하늘을 향해 주먹을 쳐들며 항거하거나 원망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그들은 자신들이 겪은 그리고 지속적으로 이어져가는 아픈 경험에도 불구하고 체념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세월호 유가족들은 이어지는 아픔속에서도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희망은 믿는 우리들에게 성서적 언어로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그의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공의로 가난한 자를 심판하며 정직으로 세상의 겸손한 자를 판단할 것이며 그의 입의 막대기로 세상을 치며 그의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며,  공의로 그의 허리띠를 삼으며 성실로 그의 몸의 띠를 삼으리라.- 이사야 11:3-5>

<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 계시록 21: 3-4>

바로 그들이 희망하는 세상의 모습입니다.

목사님과 교회가 드리는 기도와 행하시는 하나님의 사업들이 많고 소중함을 잘 알고 있는 저희들이 드리는 소망이 있습니다.

오는 4월 16일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지 두해 째 되는 날입니다. 그리고 이튿날은 주일입니다.

원컨대 바로 그 주일(4/17)에 자식과 가족을 잃은 슬픔을 이어가지만,  하늘을 향한 원망이나 항거, 또는 삶의 체념 대신에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세월호 유가족들을 위하여 귀 교회가 함께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희망으로 지금 울고 있는 사람들 – 바로 세월호 유가족들 위해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필라세사모 기독인들이 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세월호 사건 및 세월호 유가족들에 대한 소식을 원하시면 전화 000-000-0000, 또는 이메일 [email protected] 주시면 자료들을 보내 드립니다.

도대체 하나님 나라는 어디에?

2015년 9월의 마지막날 밤입니다.

지난 두어 달여 좀 정신적으로 혼돈스런 시간들을 보냈다는 생각이 드는 밤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개인적인 삶이야 지극히 일상적인 것이었지만, 마음 한구석엔 딱히 무어라고 찝어 말하기 어려운 허전함이 이어졌답니다.

엊저녁에 문득 든 생각이었는데, 그 허전함이란 어떤 간극(間隙) 사이에서 헤매다 결국 어느 쪽에도 가까이 못하고 하루해를 보내고 난 뒤끝에 만난 느낌 같은 것었습니다.

일테면 지난 주간에 미국을 방문해서 넓게는 세계적으로, 좁게는 한국내 또는 한인들 사이에 뉴스가 되었던 인물들이 있었지요. 프란치스코 천주교황, 중국의 시진핑 주석과 한국의 박근혜 대통령들입니다.

그이들에 대한 뉴스들을 보면서 느끼는 허전함과 제 일상의 허전함 사이에는 별반 큰 거리나 간격이 놓여 있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엊저녁 그런 생각의 끈을 잡게된 까닭은 화장실에 앉아 펴든 천상병 시인의 시 탓이었습니다. ‘새’라는 부제가 붙은 ‘그날은’이라는 시였습니다.

<이젠 몇 년이었는가 / 아이론 밑 와이셔츠같이 / 당한 그날은……

이젠 몇 년이었는가 / 무서운 집 뒷창가에 여름 곤충 한 마리 / 땀 흘리는 나에게 악수를 청한 그날은……

내 살과 뼈는 알고 있다. / 진실과 고통 / 그 어느 쪽이 강자인가를……

내 마음 하늘 / 한편 가에서 / 새는 소스라치게 날개 편다.>

SAM_4693천상 시인이었던 천상병이 1967년에 있었던 이른바 ‘동백림사건’이라는 관제 간첩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당시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호된 곤욕을 치른 날들을 되살려 쓴 시입니다. 그가 떠난지도 오래 되었거니와 그에게 ‘다리미(아이론)에 눌린 와이셔츠’같은 고통을 주었던 박정희가 죽은 지도 오래되었습니다.

그리고 2015년 오늘 박정희의 딸이 대통령이 되어 유엔에서 ‘새마을 운동’ 마케팅을 했다는 뉴스를 보면서 든 허전함 – 그런 느낌들이 지난 두어달 간 저를 누르고 있었던듯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 끝 모습에 연연해 뉴스들을 양산해 내는 이른바 언론과 종교에서 오는 허전함도 비슷한 것들이었고요.

지난달 중국 전승절 기념 행사 이후 시진핑의 방미에 이르기까지의 국제외교는 한국식으로 따지면  보수 수꼴인Donald Trump 와  종북 좌빨인Bernie Sanders에 대한 갈채만큼이나 어지럽고 현란함에서 오는 허전함이랄 수도 있겠고요.

아무튼 개인적으로나  이웃들과 손을 맞잡고 고민을 하거나 궁극으로는 허전함을 털고 사는 것 처럼 살아보자는 것이 모두의 꿈일 것이므로, 일테면 그것을 예수쟁이인 내가 ‘하나님 나라’라고 이름지어 부른다고 하여도 과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내 삶속에서 만날 수만 있다면, 삶의 허전함과 혼돈스러움을 느끼지 않거나 최소한 극소화할 수는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는 것입니다.

역사적 예수그리고 9월의 마지막 밤, 존 도미닉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의 생각을 꺼내 읽어 보는 것입니다.

존 도미닉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은 “지중해 지역의 한 유대인 농부의 생애”라는 부제가 달린 그의 유명한 저서 “역사적 예수(The Historical Jesus)”의 한국어판(2000년) 서문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로마의 평화”와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개혁을 통해 세계 경제가 붐을 일으키고, 식민지 총독의 통치 아래서 부자들과 대지주들은 토지 매입과 임대, 대부업을 통해 전례 없는 재물을 축적하는 마당에, 성전의 제사장들과 학자들은 민중의 굶주림과 고통, 질병을 외면한 채, 그 원인이 개인적 죄에있다고 가르치며, 브로커 노릇을 하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식민지 상황에서 역사적 예수가 물었던 질문은 “유태인들의 하나님의 정의 공의는 어디에 있는가? 하나님 나라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질문은 여전히 오늘날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유효한 질문이며, 특히 경제적 불평등과 생태계 파괴, 종교문화적 소외가 더욱 심화되고 있는 오늘날의 세계화 과정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현실적합성을 갖는 질문입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질문은 2015년 오늘을 사는 누군가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말입니다.

그는 이 방대한 저서에서 “브로커들이 판 치는 세상”에서 “그 브로커들을 위한 체제와 그 체제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싸우다” 마침내 “브로커 없는 나라를 꿈꾸며 결국 그런 세상을 만든 이”가 예수라는 증언을 입증하노라 애씁니다.

그리고 그는 그 책의 후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기독교는 예수의 의미를 가능한한 분명하게 정의하려고 시도했을 때, 예수가 ‘전적으로 하나님’(wholly God)이며 ‘전적으로 인간’(wholly man)이라고 정의했는데, 이것은 다시 말해서 예수 자신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중보자 없이 임재하신 분(unmediated presence of the divine to the human)이었다는 말이다.>

“하나님 나라를  절절히 간구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미 하나님 나라를 누리고 있다”는 선언입니다. 진정 예수쟁이라면 말입니다. 아니 바로 그렇게 믿고, 그렇게 행동하고 산다면 말입니다.

그것은 아직 저는 “아니”라는 말인 동시에, 제게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재했다(있다)”라는 말입니다.

제가 하기에 따라 말입니다.

9월의 마지막 날에….

털며……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딱 일주일 전 이 시간쯤이었습니다. “사람이 스스로 사람답게 살며, 이웃을 사람으로 여기며 사는 세상”을 꿈꾸며 살아온 필라에 사시는 김경지선생께서 전화를 주셨답니다.

35주년 5.18을 맞아 조촐한 간담회를 개최하려고 준비 중인데, 광주항쟁을 기념하면서 4.16 세월호 참사와 기독교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참석하겠노라고 응답드리고나서 이런 저런 뉴스들과 자료들을 뒤적이고 있었답니다. 그러다 제 눈에 들어 온 말들입니다.

“하나님이 (세월호를) 공연히 이렇게 침몰시킨 게 아닙니다. 나라가 침몰하려고 하니 하나님께서 대한민국은 그래선 안 되니, 이 어린 학생들, 이 꽃다운 애들을 침몰시키면서 국민들에게 기회를 준 것입니다.”

“가난한 집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경주 불국사로 가면 될 일이지, 왜 제주도로 배를 타고 가다 이런 사단이 빚어졌는지 모르겠다.”

이른바 기독교인들이 했던 말들 입니다. 그것도 자칭타칭 기독교계 지도자들이라고 하는 목사들이 한 말들입니다.

해당 기사들을 훑어 보다가 든 생각이랍니다. 과연 이런 생각들이 그들만의 것일까하는 것이었습니다.

세월호라는 이름은 분명 잊혀져가는 사건, 또는 잊혀져야만 하는 사건이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대다수일 것입니다.

처음 사건이 일어났을 때만 하더라도 안타까움, 동정하는 마음, 웬지 그냥 아리고 슬픈 마음으로 눈물을 찍어내고, “어떻게 이런 일이….”하던 이들도 이젠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 그게 언제적 일이냐고?”, “제네들은 뭘 더 바라는거야?”, “그건 지나간 일이고 우리들이 이젠 살아야지!”, “아니 누가 그때 제주도를 가라 그랬냐고?”, “저게 아무래도  종북 빨갱이들이 뒤에 있을게야…” 등등등

누가 하는 소리냐고요? 바로 믿는 분들이 하시는 말씀들이랍니다.

11050688_392090650982606_5665019593049397144_n아마 이 순간에도 유가족  이호진씨 부녀는 광화문을 향한 삼보일배 고된 여정을 계속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제 거의 다달았다는 생각으로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을 터입니다. 그러나 그들 부녀가 광화문광장에 도달한다하여도 세상은 크게 변하지 않았을 것이고, 변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이 살고 있는 현실입니다.

세월호 유가족들과 실종자 가족들, 그리고 그들의 외침에 귀 기울이고 있는 이들이 함께 소리쳐 외치는 함성은 “진실규명”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소원인 “진실규명”은 시간이 갈수록 잡기 어려운 길목으로 들어서는 듯합니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진실규명”은 비록 아무 것도 밝혀진 것이 없는 지금 보고 듣고자하는 이들에게는 이미 진실에 다가서고 있다고 믿습니다.

다만 진실보다 거짓에 익숙한 삶을 살아 온 공동체가 진실을 말하는 이들을 조롱하고, 멸시하고, 능멸하는 사회가 너무 오래 지속되어 왔기 때문에 이번에도 또 그렇게 그들의 외침은 스러져 갈 것이라는 생각들이 지배적인 것처럼 보일 뿐입니다.

저는 그런 생각 끝에서 희망을 보았답니다.

바로 바울이 이야기했던 “우는 사람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 15)는 명령에 따라 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넓고 깊게 연대해 나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저는 아직도 예수쟁이로 남아 있답니다.

사고(事故) 그리고…

WireAP_e63875bb4502421b80264aebafe516fd_16x9_992지난 화요일 제가 사는 곳에서 가까운 필라델피아 인근에서 열차사고가 있었답니다. Amtrak 열차 탈선 사고라고 이미 널리 알려진 사건입니다.

워싱톤과 뉴욕을 오가는 이 열차편을 저도 종종 이용한답니다. 특히 뉴욕 맨하턴에 볼 일이 있는 경우에 제가 즐겨 이용하는 열차편이랍니다.

제가 사는 곳에서 뉴욕 맨하턴 펜스테이트 역까지 주말 편도요금이 백불 내외이니 서비스에 비해서는 좀 비싼편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거리로는 서울서 대구사이는 좀 못되고, 서울서 전주 구간쯤 될듯하니 비싼편이지요.

몇년전에 KTX를 타 본 경험에 비추어 본다면 비싸고, 서비스와 속도 모든 면에서 한참 아래질이라고도 말씀드릴 수 있답니다.

Grayhound 버스를 이용하면 약 반값에 뉴욕을 오르내릴 수 있지만 아무래도 쾌적한 것은 열차편이랍니다.

차를 끌고 가는 경우 고속도로 이용료와 뉴욕 통과비, 제가 사는 델라웨어 다리 통행료에 더해 개스비, 그리고 악명높은 맨하턴의  주차비등 합치면 Grayhound와 열차비의 중간쯤 경비가 든답니다.

그러니 혼자가는 경우에는 버스가 가장 싸고 열차가 좀 비싼 편이지만 운전하지 않는 장점을 더한다면 아무래도 열차가 제일 낫기에
그걸 이용하는 편이랍니다.

바로 그 열차가 탈선을 해서 8명이 죽고 많은 사람들이 다쳤답니다.

문제는 제가 종종 이용한다는 사실보다는 이젠 뉴욕 맨하탄에서 일하는 제 딸아이가 사용하는 제 일순위 교통수단이라는 것입니다.

그래 아무래도 이 사건 사고 뉴스에 촉각을 세우고 지낸 한주간이었답니다.

연관뉴스들과 사고의 경위, Amtrak 및 정부의 대응 등에 대한 기사들을 놓치지 않고 보는 것이지요.

만일 같은 사고라도 서부나 중부지역에서 있었다면 “음, 이런 일이 있었군”하고 지나칠 법하겠지만 이건 거의 바로 제 일이기 때문에 관심이 높아진 것이지요.

초기에 과속(급커브 길에서 거의 두배에 가까운 속도)운행이 사고의 원인이었다는 보도에서부터 오늘은 어떤 방해물이 운전 구간에
있었다는 보도도 있답니다.

19세기 철도 운영체계가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미국의 철도 운영방식에 대한 비판기사도 있고, 국가가 지원해 주는 사기업 형태의 열차 운행 시스템에 대한 해부기사도 있고, 각 기사마다 저마다의 이견들이 넘쳐나는 댓글들이 있답니다.

그런 기사나 글들을보면서 확인할 수 있는 것 한가지는 적어도 같은 공동체에 살고 있구나하는 것이랍니다. 의견은 서로 다르지만 사고 원인을 찾아내고, 해법을 찾자는데는 이견이 없는 것같은 분위기 때문이랍니다.

엇비슷한 사고를 경험하면서 국가공동체 안에서 적을 만들어서 책임을 회피하려는 모습을 보이는  것보다는 그래도 낫다는 생각이 드는 까닭이랍니다.

시집 한권

thumb_14286857716135지난 주일 시집 한권을 받았답니다. 텍사스 킬린(Killeen)에서 목회를 하시는 임찬순 목사님의 시집 <바람의 노래, 목자의 노래>입니다.

시집을 손에 잡은 게 참 오랜만입니다. 책장을 주욱 훑어보니 최근에 돈주고  시집을 산 게 거의 삼년전 일입니다. 시를 잊고 산 것입니다.

말씀이 참 어눌하신 임목사님의 시집은 제게 삼년 이상의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제 인생에서 삼년이주는 의미는 여러가지랍니다. 어릴적 군대 삼년에서부터 최근 삼년에 이르기까지…

아무렴 예수의 목회생활 삼년보다 제 삼년이 귀중한 것을요.

삼년만에 손에 쥔 시집에 그 시간의 뜻을 담아 한마디 한마디 시어들을 곱씹으며 넘기고 있답니다.

그의 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꺽이는게 길이다.

꺽여서 뻗는게 길이다.

이리저리 구불구불

가는게 길이다.

그래 그래 길이다.

ㄱ 처럼 구부러지게

ㅣ 처럼 이렇게 곧게

ㄹ 로 구불구불

가는 게 길이다.

–         <길이 참된 삶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에서

누군가에게는 삼년의 길일 터이고, 누군가에는 백년의 길이 될 그 시간들에 대한 그의 노래입니다.

그리고, 그리고…

그가 그의 시에 대해 말하고 있는 변(辯)에 이르면 그를 존경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에 이른답니다.

<민족의 전진과 고난의 현장에서 한글은 하늘의 뜻과 경륜을 전해주는 통로였다. 성경은 한글을 통해 말하기 시작했다. 그 한글을 갈고 닦고 시를 쓰는 일은 거룩한 성업이다.

유대인의 고난의 역사에서 랍비의 역할은 너무나 지대했다. 이처럼 한민족이 세계로 흩어지면서 세계화의 시대를 살아가는 지금, 목회자의 역할은 미미한 것 같지만 실상은 너무도 지극히 크고 중요하다.

우리들은 돈으로 살지 않고 말씀으로 산다. 사상으로 산다. 꿈으로 산다. 상상력으로 산다.

목회자들은 한민족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꿈을 꾸게 하는 일을 감당해야 한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내뿜어주는 아주 은은한 향내로 세상은 늘 정화되고 있다는 믿음으로. 그 분에게 감사를.

 

참 나쁜 놈들 – 1

조선의 오보, 오도가 아닌 계획된 조작보도를 보며

지난 4일(한국시간) 자칭 일등신문인 조선일보는”해양수산부의 세월호 시행령을 철회하라고 주장하던 이석태 세월호 특조위원장 등 일부 특조위 위원들이 정부 안을 수용하기로 합의한 것으로 확인됐다”며 “오는 6일 시행령이 국무회의 의결을 거치면 특조위가 정식으로 출범하게 된다”는 보도를 하였습니다. 더하여 이 보도는”유족들과 지난 주말 대화를 거쳐 정부안을 받아들이기로 입장을 바꾼 것으로 알려졌다”고 덧붙였습니다.

제가 이 기사를 본 것은 포털 다음을 통해서였습니다. 아침에 습관으로 눈을 떠서 yahoo로는 미국 뉴스를 포탈 다음으로는 한국뉴스들의 제목들을 훑어본답니다.

조선일보라는 생각을 미처 못하고 “결국 이렇게 끌려가고 마나?”하는 생각으로 일터로  나갔답니다. 가게에서 아침에 해야할 일들을 마치고 다시 이에 대한 연관뉴스를 검색해 보았답니다.

같은 날 저녁(한국시간) 오마이뉴스에는 이런 제목의 뉴스가 올라와 있었습니다.

-이석태 “정부안수용?” <조선>의 오도… 개정안 낼 것- 이라는 제목이었습니다.

기사의 내용인즉 조선일보의 보도는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먼저 특조위원장인 이석태변호사는 “정부 시행령의 문제점을 설명해주긴 했으나, 유가족과 정부안을 수용하기로 협의한 적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보도는 <특조위도 이날 오후 5시 17분께 긴급 보도자료를 내고 “특조위 위원장을 비롯하여 특조위원들은 정부안을 수용하기로 합의한 적이 전혀 없다”며 “정부 시행령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하여 공포되면 시행령으로서의 효력은 발생하겠지만, 특조위는 더욱 강력하게 시행령 개정 운동을 펼쳐나갈 것”이라고 밝혔다.>고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시간 온라인 조선일보에서는 해당 기사를 찾을 수가 없답니다. 그 신문에서 세월호에 대한 기사를 검색해보면 <’장관급 공무원’신분으로 광화문에서 농성하는 세월호 특조위원장…>, <세월호 시위주도 외부단체 ‘제2의 5.18… 100만 대군 만들어야> 등 매우 부정적 의미의 제목들을 단 기사들이 눈에 뜨인답니다.

자! 이쯤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조선일보의 최초보도인 “세월호 특조위가 정부안을 수용하기로 합의했고, 유가족들도 동의했다”는 사실이 오보일까?하는 것입니다. 단언컨대 이 보도는 미리 조선일보가 계산하고 던진 의도된 조작보도입니다.

조선일보 및 그들과 배포를 맞춰 협력관계로 기생하거나 공생하는 세력들은 이미 이 의도된 조작보도로 얻을 것은  다 얻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늘 그래왔듯이 말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만드는 정보 소비자들에게 이미 최상의 뉴스를 제공한 것이고, 그들이 연출하는 의도는 백프로 성공한 것입니다.

조중동을 비롯한 종편방송들 나아가 그들과 얼기설기 이어진 망으로 엮여있는 각종 sns 및 카톡 등등의 정보 공유 수단으로만 뉴스를 접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합의와 동의”라는 말이 각인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들의 머리속에는 “다 합의하고 동의해 놓고는… 하여간 돈에 환장한 사람들과 좌빨들 때문에…”라는 이제껏 자신들의 생각들이 옳았다는 확신만이 자리잡을 것입니다.

이렇게 조선일보 등에 속거나, 속여야만 생존 가능한 한인들의 숫자가 최소치로 잡아도 50%가 넘고… 많게는… 글쎄요? “자신의 삶에 불필요한 것들이 끼여드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 보고 느끼는 것에 불편한 것들이 싫은 사람들, 나하나 아니 조금 넓혀서 내 가족 먹고 살면 그만인 사람들”까지 합친다면 족히 80-90%는 되지 않을까요?

이쯤 다시 되돌려볼까요.

분명 조선일보는 의도된 거짓말을 “뉴스”라는 이름으로 내보냈습니다. 이걸 좋게말해 오보 또는 오도라고 점잖게 왈 진보라는 매체가 보도를 합니다.

단지 시간이 하루지났을 뿐인데 조선일보는 “언제 내가 그랬느냐?”며 슬그머니 다른 주머니를 풀어 놓습니다. 그리고 남는 것은 “다 합의하고 동의했데메?”라는 소리들 뿐입니다.

오늘 2015년 한인사회의 현실입니다.

pedagogy우리세대 이른바 운동권들의 필독서 가운데 파울로 프레이리의 페다고지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문맹률이 아주 높았던 1960-70년대 브라질 및 남미, 아프리카의 삶을 고민하던 파울로 프레이리가 세상에 던졌던 물음이자 해법이었습니다.

그의 물음과 해법이 문명의 2015년 바로 오늘, 문맹율 거의 0%에 육박하는 한인사회에 그대로 유효하다는 서글픈 생각들에 빠져있답니다.

정리대는데로다시 잇겠습니다.

소수라고?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아 해외에서 살고있는 한인들 가운데 뜻이 엇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 전세계 동시 추모행사를 벌이고 있는 주간입니다.

이 행사에 함께하는 사람들을  숫자나 퍼센티지로  따지자면 아마 한반도 남북으로 나누어져 사는 사람들을 비롯하여 전세계에 퍼져사는 전체 한인인구 가운데 지극히 작은, 어쩌면 무시해도 좋을만큼의 숫자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제 필라델피아 외곽 Ambler에 있는 작은 교회당에서 모인 필라델피아모임도 그 중 하나랍니다.

필라델피아를 중심으로 가까운 남부 뉴저지와 델라웨어주까지 포함하는 지역에 살고 있는 한인수는  비록 고무줄 통계이기는 하기만 대충 4만명 정도로 가늠하곤 한답니다.

그 4만여명 가운데 약 50여명이 함께 한 모임이었답니다. 그야말로 그냥 무시해도 좋은 숫자랍니다.

 숫자 생각을 하다보니 딱 대비되는 것이 있답니다. 한국시간 4월 16일에 세월호 참사 일주기를 추모하기 위해 시청앞에 모였던 사람들의 숫자랍니다. 5만명 정도(주최측 추산)라고 하더군요.

오천만 가운데 오만, 사만 가운데 오십명. 얼추 비슷한 대비지요.

아마 전세계 동시추모대회라고 이름을 붙인 이 행사에  참여한 한인들은 그지역에 사시는 분들 숫자 대비 얼추 비슷한 정도의 사람들일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그냥 무시해도 좋은 숫자라는 말씀입니다.

막말로 한줌거리도 안되는 사람들이 저마다 사는 곳에서 모여 “전세계 동시 추모…”운운하는 행사였답니다.

어제 필라델피아 추모행사에 참여했던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아도 정말 무시해도 좋을만큼 적은 사람들이 자기들만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처럼 보였답니다.

우선 어제 있었던 필라델피아 행사를 잠시 소개드리지요.

조촐하지만 정성드려 차린 제단에 헌화를 하며 묵념을 하므로 “내가 왜 여기 와 있을까”하는 물음에 대한 자답(自答)을 얻는  것으로 행사를 시작했답니다.

그리고 무용안무가 김정웅씨가 만든 세월호 참사 무용극과 추모단편 영화를 함께 보았답니다. 특별히 안무가 김정웅씨가 “이웃의 아픔을 온몸으로 듣고  가슴으로 공감하는” 몸동작을 생활화하자는 설명에  몸치인 저도 저절로  동작을 따라하고  있었답니다.

여러 순서들 가운데 제 생각으로 이 날의 하일라이트는 손정례님의 춤입니다. 한풀이 춤이었답니다. 이 동네에서는 알려진 고수(鼓手)인 정세영선생의 장고와 추임새에 맟추어 풀어낸 손정례선생님의 춤사위는 단연 이 행사의 으뜸이었답니다.

0416152020

그녀의 나이 올해 아흔이랍니다.

그리고…

참가한 이들이 저마다 모임에 참여하게 된 까닭과 생각들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답니다.

“ ‘제발 이젠 그만해라! 그거 왜 하냐?’하는 소리를 들으며 여기 왔습니다. 제 양심의 소리 때문에…”

“목사입니다. 목사여서 부끄럽습니다. 교회가 이 시대의 아픔에 동참하지 못하는 모습에 부끄럽습니다. 그 부끄러움을 안고 살고자 합니다.”

“아주 평범한 가정주부였습니다. 제가 이런 모임에 참석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젠 이런 모임에 함께하지 않고는 우리 아이들을 바로 바라보는 것이 부끄러울 것 같습니다.”

“늘 떠나온 모국이 잘 되기만을 바랍니다. 그래서 이런 모임을 주관하곤 합니다. 그런데 우린 늘 소수여서 마음이 아픔니다.”

“왜? 우리는 역사를 정리하지 못하고 살아왔는지 그게 아픔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정리하지 못하면 우리 한인들의 미래가 고난에 빠질까봐, 행여라도 단절되지 않을까 그런 염려가 있습니다.”

등등의 이야기가 이어졌습니다.

아픔을 함께 나누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린 소수라는 절박한 소리를 느낄 수 있었답니다.

그런데 저는 바로 그 지점에서 희망을 보았답니다.

“소수” – 바로 우리들은 적은 숫자라는 데에서 희망을 본 것이랍니다.

무릇 역사란 소수의 사람들이 이웃사람들을 생각하며 확장시켜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수이기 때문에 당해야만 했던 모든 아픔과 수모와 천덕을 이겨내면서 말입니다.

그 힘은 “그 길을 걷는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기쁨”에서 온답니다.

그 “기쁨”은 바로 소수만이 누리는 축복이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