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놈들 – 5

<1940년대의 남부조선에서 볼셰비키, 멘셰비키는 물론, 아나키스트, 사회민주당, 자유주의자, 일부의 크리스천, 일부의 불교도, 일부의 공맹교인, 일부의 천도교인, 그리고 주장 중등학교 이상의 학생들로서 사회적 환경으로나 나이로나 아직 확고한 정치적 이데올로기가 잡힌 것이 아니요, 단지 추잡한 것과 부정사악한 것과 불의한 것을 싫어하고, 아름다운 것과 바르고 참된 것과 정의를 동경 추구하는 청소년들, 그 밖에도 XXX과 XXXX당의 정치노선을 따르지 않는 모든 양심적이요 애국적인 사람들(그리고 차경석의 보천교나 전해룡의 백백교도 혹은 거기에 편입이 될 가능성이 있다) 이런 사람을 통틀어 빨갱이라고 불렀느니라.>

1948년 ‘문장’지에 실린 채만식의 소설 <도야지>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이 대목은 작자 채만식이 멀지 않은 장래에 사어사전(死語辭典)으로 갈 “빨갱이”라는 말에 대해 이런 주석이 달리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표현한 것입니다.

1948년에 작가 채만식이 느꼈던 “빨갱이”에 대한 모습입니다. 그런고 <불원한 장래(그리 멀지 않은 미래)>에 이 “빨갱이”라는 말은 사라질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문태석은 스스로를 “빨갱이”라고 부르기를 즐깁니다. 그 까닭은 <인격이 고상한 애국자요, 지방의 덕망가요, 실업계의 중진이요, 그리고 독실한 신자인 동시에 교회의 최대한 보호자>인 그의 아버지 문영환을 비롯한 그의 가족들과 주변 인물들의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주인공 문태석이 본 그의 아버지와 가족들 그리고 그 주변 인물들의 실제 모습은 고매함과는 거리가 전혀 닿지 않는 곳에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이런 부친 문영환, 이런 모친 최씨부인, 이런 누이 명자, 그리고 그들을 둘러싸고 드나드는 온갖 종류의 인물들, 그 누구 한 사람에서도 구역이 나도록 불쾌한 반감을 느끼지 아니하는 인물이 없었다. 항차 그들이 그들답게 빚어내는 분위기란 정히 견디기 어려울 만큼 탁하고 추하고 불순스럽고 한 것이었다.>

그야말로 <도야지> 곧 오직 자기 뱃속 채우려는 탐욕만 가득한 돼지새끼들이었을 뿐입니다.

1948년으로부터 자그마치 66년이 흐른 2014년 오늘날 대한민국과 한인사회에서 쓰이는 “종북”이라는 말을 채만식의 사어사전(死語辭典)속에 있는 “빨갱이”에 대입해보면 그저 딱 들어 맞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빨갱이란 공산당을 일컫는 비속어입니다. 공산당이란 공산주의를 실현코자 하는 강령을 내건 정당을 말합니다. 이론상 공산주의가 사람들이 만들 수 있는 거의 최상의 체제인 것은 틀림없지만 실제 그런 체제란 실현 가능성이 없는 허망한 것임은 이미 밝혀진 일입니다.

사실 공산주의란 종교의 영역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기독교의 역사를 보면 익히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이른바 마르크스 – 레닌주의(ML)를 주창했던 레닌이 말하는 공산주의는 종교성을 빼놓고는 이룰 수 없는 세상입니다. 레닌은 <사회주의는 ‘각자로부터는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도 능력에 따라’ 분배하는 낮은 단계의 공산주의라고 일 뿐이고 진짜 공산주의는 ‘각자로부터는 능력에 따라, 각자에게는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높은 단계의 공산주의>라고 합니다.

레닌이 말한 사회주의는 얼핏 실현 가능한 사람들의 세상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말한 “필요에 따라 분배”하는 세상 곧 그런 공산주의 사회란 사람들의 세상에서는 결코 오지 못할 세상입니다.

“필요”라고 하는 욕망을 다스릴 수 있다면 그건 이미 사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이 직접 개입하는 세상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허망한 그야말로 이론일 뿐입니다.

이즈음 복지국가로 나아가는 북유럽 국가 모델들은 이런 인간의 한계를 인식한 결과물들일 것입니다.

이쯤, 성서 출애굽기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온 회중은 이 광야에서 또 모세와 아론에게 투덜거렸다. “차라리 이집트 땅에서 야훼의 손에 맞아 죽느니만 못하다. 너희는 거기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빵을 배불리 먹던 우리를 이 광야로 데리고 나와 모조리 굶겨 죽일 작정이냐?” 그러자 야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내가 하늘에서 너희에게 먹을 것을 내려줄 터이니, 백성들은 날마다 나가서 하루 먹을 것만 거두어들이게 하여라. 이렇게 하여 이 백성이 나의 지시를 따르는지 따르지 않는지 시험해 보리라. 여섯째 날 거두어들인 것으로 음식을 차려보면 다른 날 거두어들인 것의 곱절이 되리라.> – 출애굽기 16 : 2-5, 공동번역성서에서

잘 알려진 ‘만나’ 이야기입니다. 애굽을 탈출한 히브리족들이 광야에서 먹었던 음식입니다. 물론 신이 내려 준 은총이라고 고백하는 히브리족들의 신앙입니다. 이 이야기에는 공평함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그 공동체 안에 있는 누구나가 남녀노소, 빈부, 지식이나 경륜, 높고 낮은 지위 등 어떤 차별도 없이 똑같은 질의 음식을 자신의 양에 맞게 먹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성서는 신이 <실험해 보리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 실험이란 바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필요라고 하는 욕망”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신의 실험에 인간은 아주 쉽게 걸려듭니다. 필요의 양을 자신의 욕망에 맞춘 것이지요. 내일이라는 염려를 없애려는 욕망, 남보다 더 가지려는 욕망을 막바로 들어냅니다. 그러자 신은 이런 인간들을 향해 그 욕망을 원천봉쇄하는 선택을 합니다.

이튿날이면 만나를 없애고, 욕심으로 쌓아 둔 것은 썩어 못 먹게하는 일이었습니다. 신의 개입으로 이루어진 공평한 세상에 대한 경험입니다.

신약시대를 연 초대교회의 모습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성령이라는 신의 개입으로 만들어진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그들 가운데 가난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땅이나 집을 가진 사람들이 그것을 팔아서 그 돈을 사도들 앞에 가져다 놓고 저마다 쓸 만큼 나누어 받았기 때문이다.> – 사도행전 4 : 34 -35, 공동번역성서에서

“쓸 만큼” – 필요의 크기 곧 욕망의 크기를 신의 개입으로 제어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세상이었습니다.

소련의 멸망과 함께 공산주의는 실패했다는 말들도 하지만, 실제 사전적 의미로써 공산주의란 인류 유사이래 극히 제한된 신앙 공동체 이외에는 이루어져 본 적이 없는 결코 국가라는 이름으로는 이룰 수 없는 그저 허망한 이론일 뿐입니다.

더더우기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부르는 북은 공산주의와는 아무런 연관도 없는 곳입니다. 사회주의헌법(社會主義憲法)으로 부르는 그들의 헌법에서 조차 ‘공산주의’라는 말을 완전히 삭제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해방이후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북한이 변해 온 모습을 돌아보면 그래도 그나마 북한이 남한보다 잘 살고 우위에 있었던 때는 북이 공산주의라는 명분을 버리지 않았을 때입니다.

북한이 남한보다 뒤쳐지기 시작한 무렵은 바로 그들이 공산주의라는 명분을 버리고 주체사상이라는 사이비 종교로 갈아타기 시작한 때였습니다.

남쪽의 박정희가 “헌법상의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정지할 수 있는 권한”을 움켜쥐는 긴급조치 1호가 공포됐던 1974년에 북의 김일성은 마치 성서의 십계명처럼 “당의 유일사상체계확립의 10대 원칙”이라는 것을 공포합니다.

1.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혁명사상으로 온 사회를 일색화하기 위하여 몸바쳐투쟁하여야 한다.

2.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를 충성으로 높이 우러러모셔야 한다.

3.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권위를 절대화하여야 한다.

4.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혁명사상을 신념으로 삼고 수령님의 교시를 신조화하여야 한다.

5.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교시 집행에서 무조건성의 원칙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

6.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를 중심으로 하는 전당의 사상의지적 통일과 혁명적 단결을 강화하여야 한다.

7.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를 따라배워 공산주의 풍모와 혁명적 사업방법, 인민적 사업작풍을 소유하여야 한다.

8.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안겨주신 정치적 생명을 귀중히 간직하며 수령님의 크나큰 정치적 신임과 배려에 높은 정치적 자각과 기술로써 충성으로 보답하여야 한다.

9.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유일적 령도밑에 전당, 전국, 전군이 한결같이 움직이는 강한 조직규률을 세워야 한다.

10.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개척하신 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끝까지 계승하며 완성하여 나가야 한다.

남쪽에서 박정희 신화를 만들어가던 무렵 북은 이미 김일성이 신의 반열에 오른 것입니다.

이미 공산주의와는 전혀 관계없는 김씨왕조가 싹트면서 북은 남쪽보다 뒤쳐지면서 그 간격이 점점 벌어지게됩니다.

The Economist Intelligence Unit이 발표한 2012년 민주주의 지수를 보면 현실을 볼 수 있습니다. 남한은 20위, 북한은 167위 입니다. 조사대상국은 167개국입니다. 북한이 전세계 조사 대상국에서 꼴찌인 셈입니다. 물론 이 조사의 객관성에 대해 의문을 제시하는 분들도 있을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은 지상천국”이라고 믿는 신자들도 있을 것입니다.

index

이제 “그 놈들”을 알아보기 전에 “그 신자들”에 대해 먼저 알아보기로 합니다.

오늘 글을 맺기 전 느끼는 안타까움 하나는 저 조사 결과보다 2014년 남한 역시 훨씬 후퇴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놈들 – 4

저물어가는 2014년과 함께 역사에 기록될 이름을 꼽으라면 아마 이슬람국가(IS) 또는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국가(ISIL), 이라크 시리아 이슬람 국가(ISIS) 등으로 불리우는 반문화적, 반인륜적 미치광이 집단이 첫순위에 오르지 않겠나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인류의 역사를 무려 1400여년 전으로 돌리고자 하는, 가히 정신나간 사람들이 종교와 신앙의 이름으로 올 한해동안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파리목숨처럼 여겨 죽인 집단입니다.

헤즈볼라나 알 카에다 같은 기존의 테러집단들과는 궤를 달리하며 국가를 참칭하고 있지만 지구상 어느나라도 그들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는 형국입니다. 그럴수밖에 없는 것이 그들의 적은 그들 이외의 전 세계이기 때문입니다.

오죽했으면 “ISIL이 전 세계를 하나되게 하였다”라는 말이 다 나왔겠습니까.

중동 지방을 근거로 하는 테러집단들이 최우선의 적으로 삼는 미국,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을 비롯하여 러시아, 중국은 물론이거니와 터키, 이란, 이라크, 사우디 아라비아, 시리아 정부군과 시리아 반군, 쿠르드족, 기독교인에 나아가 공산주의자 심지어 헤즈볼라, 알 카에다까지 몽땅 그들의 적들이랍니다.

분명 제 정신이 아닌 집단이거니와 전 세계를 적으로 만들고 사람들을 죽이는 집단이기에, 전세계가 힘을 모으면 금방이라도 이들을 지구상에서 쓸어버릴 수 있겠건만 상황은 그리 녹녹치 않아 보입니다.

미국정부만 하더라도 이들과의 싸움이 최소 3년은 걸릴 것으로 예상을 한다는데 아마 지난 경험치로 본다면 그보다 더 많은 시간을 전 세계는 이들과의 싸움으로 시간을 보낼 듯 합니다.

그런데 알수없는 일은 이 미치광이 집단과 함께 하려는 젊은이들이 미국, 유럽, 아시아, 중동 등 가히 전세계에서 몰려드는 현상입니다. 그리고 이런 현상은 지금도 꾸준히 현재진형형으로 지속되고 있는 것이지요. 일본, 중국은 물론 한국의 젊은이들 가운데 그런 친구들이 있을 수도 있다는 말이 다 나올 정도이니 말입니다.

누가, 왜, 무엇 때문에 이들 젊은이들로 하여금 희대의 미치광이 집단의 품으로 자신들의 삶을 내던지게 할까요?

도대체 왜? 멀쩡하게 잘 자라서 이제 막 인생을 시작하는 때인 젊은이들이 이런 반인륜적, 반문화적인 집단으로 스스로 발길을 재촉하여 함께 할까요?

여러 다양한 설명들과 해석들이 분분할 수 있겠지만 저는 두가지로 생각해 본답니다. 첫째는 ISIL로 향하는 젊은이들이 보고 자란 환경이고 두번째는 잘못된 믿음 곧 종교입니다.

첫번 째, 젊은이들이 보고 자란 환경이란 현재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서 자신의 모습이나 자기 가족들의 모습이 주류가 아니라는 소외감 탓이라는 뜻입니다. 나아가 자신들이 현재 속해 있는 사회에서는 결코 그 소외감을 해결할 수 없다는 생각에서 만난 잘못된 종교가 두번 째 이유라는 생각입니다.

이렇게 멀쩡한 자신들의 삶을 돌이킬 수 없는 막장으로 스스로 밀어넣는 젊은이들의 뒤에는 바로 미치광이 집단을 이끌어가는 바로 “그 놈들”이 있습니다.

오늘자 한국 뉴스를 보면서 미치광이 집단 ISIL과 그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한반도 남쪽에서 재현되고 있다는 생각을 해본답니다.

연합<‘종북 논란’을 빚고 있는 재미동포 신은미씨와 황선 전 민주노동당 부대변인이 전북 익산에서 토크 콘서트를 열었으나 한 관객이 인화물질에 불을 붙인 뒤 투척하는 바람에 관객들이 대피하는 소동이 벌어졌다.>

오늘자 연합뉴스가 전한 기사 한 대목입니다.

재미동포 신은미씨와 황선 전 민주노동당 부대변인이이 남한 전국을 돌며 벌이는 토크 콘서트의 주제는 “평화와 통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연합뉴스를 비롯한 뉴스매체들은 <‘종북 논란’을 빚고 있는> 토크 콘서트로 의도적인 믿음을 독자들에게 심어줍니다.

그리고 이제 조만간 <‘종북 논란’을 빚고 있는>에서 <…을 빚고 있는>이라는 말이 사라질 것이고, <논란>이라는 말도 사라질 것입니다. 늘 그래왔듯 말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의 머리 속에 <종북>이라는 말만 남기게 이들의 교묘함은 작동할 것입니다.

이렇게 거의 일상화된 습관에 이어 마침내 18살 젊은 아이가 폭발물을 투척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입니다.

ISIL이 인류의 역사를 1400여년 전으로 돌리고자고자 하는 것과 ISIL 다음으로 전 인류적, 전 세계적 왕따가 된 북한을 쫓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요?

종북(從北)이라는 딱지가 과연 2014년 한반도 남쪽 대한민국이나 전세계 한인사회에서 가당키나 한 주술일까요?

그 18살짜리 고등학생에게 “인화물질에 불을 붙인 뒤 투척하”도록 사이비 믿음을 심어준 “그 놈들”은 과연 누구일까요?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 하나는 바로 박정희의 공로입니다. 저는 이 점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대한민국에 이바지한 큰 공로를 높히 기린답니다. 다름아닌 철저한 총기류 규제입니다.

총을 들고 쿠테타에 성공했던 박정희는 총기류 규제만큼은 정말 철저했습니다. 자유당 시절만해도 심심치 않게 있었던 총기사고가 박정희 통치기간 이래 오늘날까지 대한민국에서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세계에서 손꼽히는 안전한 나라가 된 까닭은 모두 박정희의 공이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18살 아이가 총기류 대신에 “인화물질에 불을 붙인 뒤 투척”할 수 밖에 없었던 일도 저는 순전히 박정희의 공이라고 생각한답니다.

박정희 부부 모두 총기류 사고로 세상을 뜬 일은 안타까운 아이러니지만…

그 놈들 – 3

제3세계 발전 수단으로서의 사회주의 실패는 보다 산업화된 국가들의 발전만큼이나 서구 맑시즘에 일대 타격이 되었다. 맑시즘이 사라진 뒤 중국은 자본주의적 경제기업 형태를 도입하게 되었고 급속한 경제발전 시기에 돌입했다. 아프리카와 그 밖의 사회주의 사회는 무너졌고, 나중에는 쿠바의 사회개혁이 아무리 성공했을지라도 그것이 소련의 대규모 경제원조에 의한 것임이 분명해졌다. 아마도 가장 중요한 것은 극동 지역 ‘호랑이들’의 급속한 발전이 제3세계 국가들도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만 그리고 자본주의적 준거틀 내에서만 급격한 성공적 발전을 이룰 수 있을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 것일게다. – 앤소니 기든스(Anthony Giddens)의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Beyond Left And Right)에서

제 가게에서 바느질 일을 20년 넘게 도와주고 있는 Lou 아주머니는 제 또래의 라오스 출신 이민자입니다. 그녀의 남편은 배관공으로 일하다가 몇 해 전에 은퇴를 했고 저와 친하게 지낸답니다. 제 가게나 집 배관 시설에 문제가 발생하면 자기 일처럼 도와주는 친구랍니다. 아직 담배를 끊지 못해서 Lou 아주머니의 눈총을 받고 사는 사내랍니다.

이들 부부의 집에는 커다란 사진 하나가 거실에서 손님을 맞는답니다. Lou 아주머니의 시아버지 곧 전직 배관공인 Ban의 아버지입니다. 사진속 인물은 마치 일본식 정장을 했던 고종임금 모습같답니다. 어깨에 술이 달린 제복에 가슴에는 각종 훈장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모습이랍니다.

Lou 아주머니의 시아버지는 1975년 라오스에 오늘날의 “라오 인민 민주공화국”이라는 공산정권이 들어서기 전 라오스왕정 시대에 총리급 고관이었다고 합니다. 라오스가 공산화된 후, 망명하듯 전 가족이 미국 이민을 왔다고 합니다.

그런 Lou 아주머니는 격년에 한번씩 고국 라오스를 방문한답니다. 그녀의 고국방문이 가까와지면 저희 부부가 하는 일이 하나 있답니다. 바로 제 가게 손님들이 맡기고 찾아가지 않는 옷들을 정리하는 일이랍니다. 상태가 어떻든 입을만한 것이면 어떤 종류의 옷이든 이민백으로 하나 가득 Lou 아주머니의 여행 짐이 된답니다. 라오스에 있는 친지들에게는 아주 좋은 선물이 된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즈음 한국에 사는 이들은 Lou 아주머니가 가지고 가는 옷들을 보면 쓰레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옷들일 겝니다.

벌써 지지난 해던가, 고국 방문을 마치고 돌아 온 Lou 아주머니가 저희 부부에게 물었던 말이 있답니다. “아니 김씨 부부는 왜 그 잘 사는 한국을 떠나서 여기서 살아요?”하는 물음이었답니다.

그녀의 귀국 길에 탄 비행기가 인천공항에 중간 기착을 했던 모양입니다. 공항 바깥에 나가지도 않았지만 한국은 엄청 잘 사는 나라라는 그녀의 이야기였습니다.

“아니 김씨 부부는 왜 그렇게 잘 사는 한국을 떠나서 여기서 살아요?”라는 Lou 아주머니의 질문은 그녀의 입장에서 던질 수 있는 아주 자연스러운 것일겝니다. 아마 누구라도 그녀의 입장이라면 던질 수 있는 질문일 것입니다.

우리 세대는 “양키 고 홈”하면 빨갱이가 되는 세상에서 자랐습니다. 아니 그런 말조차 몰랐다는 것이 보다 정확할 것입니다. “깁 미 껌”, “깁 미 쬬꼬렛”이라는 말이 친근했던 세대입니다. 미국에서 건너 온 옥수수로 만든 옥수수 빵과 딱딱하게 돌덩이같은 우유 덩어리를 배급받아 먹으며 학교를 다녔던 세대입니다.

미국하면 천국 다음으로 좋은 나라쯤으로 알던 세대입니다.

제가 십수년 전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의 일입니다. 친구 하나가 일찌감치 회사를 그만 두고 서울 인근 외곽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답니다. 자신이 스스로 무공해 농법으로 농사를 지으며 당시 유행이었던 주말농장을 분양해서 나누는 그런 농장을 일구고 있었습니다.

연좌제그 농장을 방문했을 때 제 친구의 아버님께서 밭을 일구고 계셨답니다. 제가 인사를 드리자 반가히 맞아 주시던 친구 아버님께서 하시던 말씀이었습니다. “그려, 미국 시민 되었지! 높아졌네 높아졌어 미국 시민 높은 것이여, 아무렴!”

친구 아버님은 6.25 한국전쟁 부역자로 낙인 찍혀 평생을 사시다 이젠 돌아가신 분이랍니다. 장남이자 제 친구의 형님이신 이는 참 사람 좋고 자상하신 분이었는데(그 이도 이젠 칠순이겠다는 생각을 하니 참 세월 빠릅니다.) 사범대학을 나와 학교 발령을 기다리다가 연좌제에 걸려 꿈을 접고 사셨답니다.

Lou 아주머니의 종한(從韓), 제 친구 아버님의 종미(從美)적 발언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들의 경험과 ‘좀 더 잘 사는 곳’에 대한 동경(憧憬)은 지극히 사람다운 자연스러운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환경이 거꾸로 되었을 때, 일테면 라오스와 미국의 형편이 뒤바꿨을 때나, 한국과 미국의 형편이 뒤바꿨을 때도 이것이 자연스런 일이 될까요?

그렇게 뒤바뀐 환경에서도 종한(從韓) 또는 종미(從美)적 발언이나 사고가 가능할까요? 물론 가능한 일입니다. 아주 예외적인 경우에 한한 것이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대세는 가능 이전에 미친 짓으로 이해하는 것이 정상일 겝니다.

이른바 종북(從北)은 바로 그 지점에 있답니다.

  • 계속 이어집니다.

 

찌라시와 어떤 예언

<박대통령 “찌라시에 나라 흔들”> – 온라인 한국일보의 기사에 달려있는 작은 제목입니다. 그 기사의 큰 제목은 <朴, 찌라시·애국심 키워드로 결백 호소.. 의혹 본질엔 함구>였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이 7일 청와대에서 새누리당 지도부 및 당 소속 예산결산특위 위원들과 가진 오찬 회동을 보도한 기사입니다.

이날 박근혜대통령은 모인 이들과 함께 점심식사를 시작하기 전,후에 짧게 글을 읽은 모양입니다. 그런데 그가 읽는 글 속에는 ‘나라’라는 단어는 15번, ‘대한민국’은 3번, ‘국민’은 19번 씩을 사용했다는 기사였습니다.

나라,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말들을 자주 읽어 내려가면서 스스로 “오직 나라가 잘 되게 하는(일에 빠져)…”, “일생을 나라 걱정을 하며 살았다”는 생각에 도취되어 국민(아마 그녀는 백성이라고 생각할 듯하지만)들이 이런 자신의 애국심을 믿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있었던 듯(아니면 연출자의 뜻이었던 듯)합니다.

어쩌면 그런 믿음에 스스로 빠져 있는지도 모를 일이지요.

찌라시전후 사정이야 어떠하던 그 기사가 제 마음에 꺼림직한 까닭은 “찌라시”라는 말 때문이었답니다. 저희 세대쯤만 하여도 익히 아는 일본말입니다. 바로 ‘ちらし(散らし)’입니다. 일반적으로 어떤 광고를 위해 뿌려지는 인쇄물을 일컫습니다. 선전지, 광고지를 뜻하는 일본 말입니다.

무려 ‘나라’, ‘대한민국’, ‘국민’에 빠져 사시는 대통령이 했다는 말이라 제겐 참 난감하게 들렸답니다. 그이나 저는 거의 같은 세대이거니와 해방후 세대랍니다. 대한민국의 대통령이라는 엄중한 직책을 맡고있는 그이가 쓰기에는 참 부적절한 낱말이거니와 그이나 저나 일본말이 그리 입에 베지 않은 세대이기 때문에 그 놀라움이 컷답니다.

물론 그이가 5개 국어인가 6개 국어인가를 능숙하게 사용한다는 떠도는 소문이 사실이라 아무 때나 자기 나름의 적절한 외국어를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는 문득 그이의 아버지 시절이 떠올랐답니다. 저는 그이의 아버지 시대에 교육을 받고 자랐기 때문이랍니다.

그러니까 1974년의 일이랍니다. 제가 대학교 3학년 때의 일입니다. 아마 박근혜대통령이 대학을 졸업했던 해일 것입니다. 그해 정월달에 이웃 일본국의 수상이었던 다나까 가꾸에이(田中角榮)는 동남아 5개국 친선방문 길에 나섭니다. 그리고 그의 마지막 방문지였던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에서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봉변을 당합니다. 일본대사관 앞에 게양된 일장기가 끌어내려지고 찢겨지고 짓밟히고 불태워지는가 하면 일제 자동차들을 불태우는 반일 시위대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그는 호텔방에서 꼼작없이 갇혀있다가 귀국을 하게됩니다.

1974년 1월 한국에서는 당시 대통령이었던 박정희에게 “헌법상의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잠정적으로 정지할 수 있는 권한”을 주는 긴급조치 1호가 발동했습니다. 바로 박근혜씨의 아버지가 모든 국민의 자유과 권리를 제 멋대로 쥐락펴락할 수 있는 권한을 쥔 것이랍니다. 이후 5년 동안 박정희와 국민 사이의 관계는 그렇게 설정되었고, 바로 그 시절에 박근혜 현 대한민국 대통령은 이른바 영부인 역할을 대행하며 국민에 대해 배웠답니다.

아무튼 그 해 1월 동남아 5개국 순방을 마치고 귀국한 다나까수상은 국회에서 대정부 질문을 받게됩니다. 인도네시아에서 겪었던 반일데모를 잊지 못했던 다나까는 만만한 게 한반도 남한 정부였던지 이런 말을 쏟아냅니다.

“과거 한일사이에 합방시대가 길었지만 그 후 한국이나 다른 나라 사람들의 의견을 종합해 볼 때 긴 합방 역사 속에 한민족 마음 가운데 심어 놓은 것은 일본의 휼륭한 교육제도였다.  ….역시 경제적인 것보다 정신적인 것을 국민생활 가운데 뿌리를 박게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이번 동남아 순방길에서 절실히 느꼈다.”

그 당시 한국인들의 공분을 자아낸 이른바 다나까 망언이라는 것이데, 애처롭게도 그 공분을 오늘까지 가슴에 간직하고 사는 한국인들은 거의 없는 듯합니다. 오히려 다나까의 말이 옳다는 이들이 현재 대한민국을 이끌고 가는 듯하다는 생각이 결코 과한 것이 아닌 현실입니다. 다나까는 40년 전에 망언을 한 것이 아니라, 예언을 한 셈인 것 같습니다.

박근혜 대통령의 “찌라시” 발언이 가져다 준 생각들입니다.

그날 밥상머리에서는 각하(閣下)라는 호칭도 이어졌다는 보도입니다. 집권당 원내대표라는 이의 입에서 연이어 나온 호칭이라고 하는데, 그게  일본 국왕이 임명한 문무관리들을 부르던 말인지는 알기나 하는지 모를 일입니다.

그 놈들 – 1

비록 라디오가 뒷전으로 물러앉은 세상이 되었지만 여전히 음악애호가들을 위한 FM방송이나 최근 유행하는 팟캐스트같은 신종 라디오의 위세는 여전합니다. 그렇다하더라도 제 어린 시절의 진공관 라디오가 누렸던 위세에 비하면 많이 퇴락한 셈입니다.

김일, 장영철 등이 나오는 프로레슬링을 보노라고 동네 유일하게 흑백 텔레비가 있었던 쌍둥이네 집으로 몰려갔던 제 또래 아이들과 제 어린 시절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서울 신촌이었답니다.

진공관 라디오그 무렵 대세는 라디오였습니다. 초등학교 입학 무렵에 알지도 못하고 들었던 라디오 연속극 ‘현해탄은 알고 있다’의 주인공 아로운은 아직도 제 기억에 남아있답니다. 한명숙, 현미, 이금희, 위키리, 최희준에 이어 배호까지 다 이 라디오를 통해 섭렵하였습니다. 장소팔, 고춘자에 이어 구봉서, 곽규석,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떳어도…’의 서영춘 까지도 아무렴 라디오였답니다. 아직 트랜지스터가 나오기 전, 진공관 라디오였답니다.

그 무렵부터 제가 대학생이 되고 군대를 갔다오고 미국으로 이민을 온 이후까지 라디오를 지킨 프로그램이 하나 있답니다. <김삿갓 북한 방랑기>라는 5분 드라마랍니다.

제 또래치고 이 라디오 프로그램 들어보지 못한 사람은 아마 거의 없을 듯합니다. 제 머리가 굵어지고 트랜지스터 라디오 시대가 된 이후로는 거의 들어보지 못했지만, 1960년대만 하여도 ‘두만강 푸른 물에…’에 함께 아주 귀에 익은 방송이었답니다.

내용은 거의 엇비슷해서 지옥같은 북한 인민들의 삶을 고발(?)하고 풍자하는 것이었습니다. 굶주리면서 천리마운동이라는 노동에 혹사 당하고 공산당 압제에 신음하는 북의 인민들의 모습을 김삿갓이라는 인물이 고발하고 풍자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아마도 제 또래나 이즈음 한국 뉴스에 종종 등장하는 어버이연합에 속한 분들과 같은 세대 사람의 기억속에는 이 방송이 심어준 북한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깊이 남아 있을겝니다.

그리고 이제 2014년 스마트폰 전성시대에 서서 그 때를 돌아봅니다. 1960년대 일인당 GNP가 북한은 325달러, 남한은 94달러였답니다. 거의 3.5배가 차이가 났답니다. 바로 <김삿갓 북한 방랑기>라는 드라마가 시작하던 무렵 이야기입니다.

게다가 그 무렵만해도 북은 지금과 달리 어느 정도 분배에 있어서 평등이 이루어졌던 시절이었고, 남한은 부(富)의 쏠림 현상이 오늘과 못지 않았으므로 보통의 북의 인민과 남의 국민을 대비해 본다면 당시 <김삿갓 북한 방랑기>의 방송내용은 명백한 허위였습니다.

거짓이거나 말거나 남에서 살았던 저와 같은 사람들은 북은 사람살 곳이 못된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답니다.

제가 “때려잡자 김일성”을 외치며 군생활을 할 때인 1970년대 중반까지도 북이 남쪽보다 경제력에서 앞서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또한 그 무렵 전방부대 중대장이나 대대장의 월북소식이 쉬쉬하며 장병들 사이에 떠돌았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다 남북의 경제적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에 들어와서 입니다.

그리고 2014년 현재 기준으로 본다면 남한은 1인당 소득 28,739달러, 경제 규모는 1조 4,400억 달러인 반면에 북한은 1인당 소득 506달러, 경제 규모는 2012년 기준 123억 달러랍니다. 도저히 서로를 비교할 수 없는 차이의 수치입니다.

더 알기 쉽게 설명하면 2011년 한 해 북한 전체 예산은 2020억원이었는데, 2014년 남한의 종로구 한해 예산은 2980억원이었답니다. 정말 비교할 걸 비교해야지 비교가 안되는 수준이랍니다.

진공관 라디오 시대였던 1960년대에 3.5배 앞서있던 북한이 2014년 스마트폰 시대에 이르러 남한의 1/40의 수준이 된 것입니다.

지나간 50년의 과정이 이랬니? 저랬니?하며 따져 볼 이유도 없이 2014년 오늘 “돈이 최고의 가치가 된” 남에 사는 국민들 가운데 북의 인민을 부러워 하거나 북의 지배체제를 받들거나 찬양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가 있을까요? 만일 있다면 그건 정말 정신나간 사람들이 아닐까요?

일테면 나보다 3.5배나 잘 살던 사람이었는데 50년이 흐른 후 보니 내가 그 사람보다 40배나 잘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도 그 사람의 지금의 삶을 부러워한다? 도대체 말이 됩니까? ‘돈이 최고’라고 생각하며 살아온 사람들에게 말입니다.

아무리 상식을 뛰어넘어 생각을 해보아도 남한 국민들 가운데 그런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은 ‘종북(從北)주의자’들은 차고 넘친다는 말씀입니다. 남한에서도, 이곳 이민자들의 동포사회에서도 말입니다.

심지어 이곳에서 뿌리내리고자 이민 온 미국 동포 중에 신은미라는 분도 종북주의자라고 하는 뉴스를 보았답니다. 그 이가 북을 다녀온 모양이고, 거기에서 사람사는 모습들을 ‘오마이 뉴스’라는 남한 정부가 허락한 매체에 기고를 했고, 그 글을 즐겨 읽은 이들이 제법되었고, 그래 책도 내고  토크 컨서트라는 행사도 한 모양입니다.

오마이 뉴스에 기고한 그이의 글을 읽어보니 2014년을 스마트폰 전성시대로 사는 그이는 당연히 스마트폰으로 찍은 북의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었답니다. 그곳에서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말입니다.

그런데 이미 선진국의 문턱에 들었다고 생각한 남한의 정부 당국과 1960대로 살아가려는 일부 세력들은 신은미씨가 진공관 라디오시대의 <김삿갓 북한 방랑기>와 다른 이야기를 한다고 종북주의자라고 한답니다.

2014년 이 문명의 시대, 선진조국 대한민국에서 진공관 라디오 시대로 살고자 하는 놈들은 도대체 누구일까요?

백성이 소외감을 느끼면…

포박자세상은 참 빠르게 많은 것들이 변했고, 변하고 있고, 변할 것입니다.

그런데 문득 생각을 멈추고, 변(變)하지 않고 정지(停止)하고 있는 것들을 따져 보기로 한다면 그 역시 엄청나게 많거니와 어쩜 그렇게 예나 지금이나 똑같을까 하는 물음을 지울 수 없답니다.

뚱딴지같은 소리라고 여길 줄 모르지만 정말 변하지 않는 것들 가운데 하나는 바로 사람이 아닐까합니다.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이 여전히 유효한 세상살이를 보며 해 보는 말입니다.

그 사람들이 함께 모여사는 세상 역시 전혀 변함이 없는 것을 보노라면 깜작깜작 놀랄 때가 있답니다.

어느 사회건 신과 사람 사이에서 브로커 노릇을 하며 사기를 일삼는 종교 브로커들이 늘 있어왔다는 종교적 무변화 곧 정지상태는 이어져 왔고요.

인류사에 있어 가진 자와 못가진 자의 갈등이 없었던 때는 어느 사회든 단 한차례도 없었다는 무변화가 있을 것이고요.

이런 저런 이유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꾸 사람들의 생각에서 점점 뒷전으로 밀려가는 듯한 세월호 집단 생수장 사건 초기에 있었던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물음 역시 곰곰히 따져보면 인류 역사 이래 변하지 않고 사람들이 계속 던져 온 질문이랍니다.

어쩌면 이런 변하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에 대한 변하지 않고 계속되는 질문으로 하여 사람들의 역사는 발전해 나왔고, 발전해 가고 있고, 발전해 나갈 것입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기원전 기원후를 따질 것도 없이 오늘날에 똑같이 품고있는 “국가란 무엇인가?”에 대한 물음에 대한 옛날 사람들의 생각을 곱씹어봅니다.

“도시국가의 상태는 개인의 몸과 아주 닮아있다. 일테면, 우리들의 손가락 하나가 상처를 입으면 몸 전체가 고통을 느끼듯이, 제대로된 국가는 이러한 유기체와 아주 흡사하다. 국민 가운데 어느 누구든 고통을 당하면 국민 전체는 그것이 마치 자기의 것인양 느낄 것이고, 국민 개개인의 즐거움이나 고통은 국민 전체의 그것이 될 것이다.” – 플라톤의 국가론

국가는 마치 하나의 선박이나 살아있는 유기체와도 같다. 그 일부의 와해는 전체의 보전에 치명적인 붕괴 요인이다. – 플라톤의 법률

인간의 몸은 국가를 상징하는 바와 같다. – 중략 – 정신(精神)은 제왕(帝王)과 상응하고, 피는 신하와 기(氣)는 백성과 상응한다. 이러한 까닭에 자신의 몸을 자제할 수 있는 이는 한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수 있다. 백성을 사랑하므로써 국가에 화평을 가져올 수 있고, 자신의 기를 함양함으로써 자신의 몸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백성이 소외감을 느끼면 국가는 와해, 붕괴될 것이고, 기가 다하면 사람의 신체는 생명을 유지하지 못할 것이다. – 포박자(抱朴子)

도대체 뭐가 다를까?

지금으로부터 155년 전인 1860년 5월에 한양 땅에서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강화도령으로 잘 알려진 조선조 철종임금 11년차에 일어난 일입니다.

포도대장을 지낸 신명순의 집에 낯선 중년의 여인이 스며듭니다. 여인의 이름은 주례, 당시 나이 쉰 네살이었습니다. 여인은 그 때 열 세살이었던 아들을 데리고 신명순의 집을 침입합니다. 가슴에는 단도(短刀)를 품고 있었다고 합니다.

마침 신명순은 큰 사랑방에서 아우와 함께 담소중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신명순의 나이는 예순 둘. 주례라는 여인이 단도를 꺼내들고 신명순을 향해 달려들었으나 신명순 형제의 힘에 맥없이 저지당했습니다. 열 세살 어린 아이도 그냥 얼어버렸고요.

아우성 소리에 신명순의 하인들이 달려들어 여인과 아이를 포박하고 포도청으로 끌고 갔답니다.

그리고 포도청에서 공초한 내용은 이렇답니다.

“지난해 오월에 제(주례) 맏아들이 병들어 죽고 작은 아들 회종이 지난해 팔월에 무슨 일인지 우포도청에 잡혀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열흘도 못되어 죽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제 아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몰랐습니다. 저는 그저 몇 달 동안 마음이 저리고 뼈가 삭아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귀하거나 천한거나 다 같은 것입니다.

이 달은 제 맏아들이 죽은 달이요, 둘째 아들의 생일이 낀 달입니다. 도대체 제 작은 아들이 왜 죽었는지를 알고 싶은 생각에 정신이 나가 포도대장 집을 들이닥치게 되었습니다.”

여인 주례는 이 일로 하여 목을 잘리는 형벌로 세상을 마감했습니다. 열 세살 막내는 귀양길에 올랐고요.

그리고 155년이 흘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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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세월동안 아낙 주례같은 삶을 살다가 간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요?

세월호 집단 생수장 사건이 일어난 지도 6개월이 지나 이백일을 맞는답니다.

이즈음은 ‘종북’이라는 신종 효수(梟首)놀음이 유행의 도를 넘은지라.

155년전과 오늘의 다름은 무엇일까요?

리영희 – 그의 되살아남

“괴로움으로 엮어진 만 7년간의 군대생활은 1957년 8월 16일 육군소령으로서의 진급명령과 제대비 8천 원이 덧붙여진 223848 군번의 예편통지서를 받아든 것으로 그 지루했던 막을 내렸다.

1950년 8월 16일 입대했을 때 스물 두 살이던 철부지 젊은이는 스물 여덟 살의 고민하는 청년으로 변해 있었다.

이북에서 내려온 한 청년으로서 이 나라와 사회가 요구하는 모든 의무에 거의 무조건 맹목적으로 순응하고 복종하던 개체의 내면에서는, 이제는 거의 모든 것을 회의하고 질문하고, 허위와 가식으로 가려진 진실된 가치를 밝혀내어, 진실 이외의 그 무엇에 대해서도 충성을 거부하는 종교같은 신념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그 자신은 그 변화를 분명히 자각하지 못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그에게 있어서 코페르니쿠스적 대전환이고 하나의 되살아남이었다. 되살아난 그 후의 삶은 그에게 많은 고난과 시련을 안겨줄 것이 분명했지만 그의 삶은 그 변화로 말미암아 충족될 것이었다.”

리영희작고하신 리영희선생님께서 1984년에 쓰신 ‘전장과 인간’이라는 글의 마지막 한 부분입니다. 자신의 6.25 전쟁체험을 자전적으로 엮은 글입니다. 선생께서는 이 자전적 이야기에서 줄곧 “나”라는 화자(話者)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전개해 나갑니다. 그러다 글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글의 화자를 “그”라고 객관화 시킵니다.

그 시점부터 리영희선생님의 삶은 “나”라는 자기 중심적 삶에서 “그”라는 공동체적 삶으로 바뀝니다. 그 공동체를 정의하여 리선생님은 “민족도 아니요, 국가도 아니다”하셨습니다. 그는 “진실을 찾는 공동체” 안에 자신을 객관화시켰습니다.

그 이후 그가 걸어온 언론인과 학자로서의 길은 바로 그런 자기 객관화의 삶이었습니다.

같은 시대의 인물로 청암(靑巖) 송건호(宋建鎬)선생님이 계십니다. 한겨레신문 초대사장을 지내신 분입니다. 그 역시 자신을 민족과 민중 속에서 객관화 시키기 전까지는 철저히 “자기중심적인 삶”에 빠져있었다는 고백을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두 분 모두 편안하게 많은 것 누리시며 사시다 가셨을 수도 있는 분들이셨습니다. 그러나 두 분 모두 스스로 고난의 짐을 메고 사시다 가셨습니다.

리영희선생님은 평북출신의 피난민이었습니다.

이즈음 70여년 전 서북청년단 흉내내기에 빠진 미친놈들 뉴스를 보다가 떠올려본 두 분 선생님 이야기였습니다.

리선생님께서 ‘전장과 인간’이라는 글에 남기신 이야기 하나 더 소개 드립니다.

“동물적 생존본능에 있어서는 지식이나 교양이라는 것이 그 후 경험하고 목격하게 된 무식한 사병들이나 형무소의 파렴치 잡범들과 별로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정말 쓸쓸한 심정이었다. – 중략 – 이런 동물화된 인간군의 상태는 그 현실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설명을 해도 소용이 없으리라.”

이즈음 세월호 집단 수장사건의 처리과정 모습은 바로 이런 “동물적 생존본능”이 “집단 이기주의”로 발전한 한 양태일 것입니다.

혹자는 리영희선생님나 송건호선생님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실패로 규정하기도 할 것입니다. 거의 광기에 빠져있는 이즘 세태로 보자면 분명 실패로 규정지으려 할 것입니다.

그러나 리영희선생님께서 하신 말씀의 경지에 이르고보면, 그 즐거움이 여간하지 않다는 것은 이미 맛본 사람들만의 몫입니다.

바로 이 말씀입니다.

“되살아난 그 후의 삶은 그에게 많은 고난과 시련을 안겨줄 것이 분명했지만 그의 삶은 그 변화로 말미암아 충족될 것이었다”

이런 충족하고 만족한 삶을 꿈꾸며 자유하는 삶을 누리는 이들이 많아지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행간(行間)을 읽어야 하는 세상

오늘  뉴스들을 훑다보니 북의 김정은에 대한 이런 저런 소문들이 눈에 뜨이는군요. 그가 거의 지난 한달동안(29일) 세상사람들 눈에 뜨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에 대한 이런저런 소문은 중국발과 이슬람지역발로 무성하게 퍼져 나간다고 합니다. 소문인즉은 북에 쿠테타가 일어나 그가 감금되었다든가 아주 죽었다든가에서부터 심장질환으로 쓰러져 살아도 이미 죽은 목숨이라는 등등의 내용이랍니다.

이런 소문에 남과 북은 함구이고, 중국은 유언비어라며 강력한 부인을 했고, 미국은 아는바 없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는 뉴스입니다.

뉴스라인에서 모습을 감춘 김정은에 대한 궁금증이 만들어낸 뉴스들입니다. 허기사 젊은 친구가 그 땅에 사는 제 또래들과는 걸맞지 않게 비대한 모습으로 우스꽝스럽게 뒤뚱거리며 걷는 뉴스를 볼 때면 “저 친구 곧 쓰러질 것 같네”라는 생각이 들곤 하였습니다만, 모를 일이거니와 워낙 숨기는 것을 좋아하는 곳이니 그 진실을 누가 알겠습니까?

북의 그(권력자)들이 만들어낸 유언비어성 뉴스들이라는 생각입니다.

남쪽이라고 별로 크게 다른 것은 없는 것 같습니다.

이른바 “대통령의 7시간에 대한 진실”입니다. 각종 유언비어가 꼬리를 물었고 역시 국제적 뉴스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늘 선진화를 부르짖으며 세계 열 몇 번째를 꼽기 좋아하는 자칭 민주주의 국가 수장인 대통령의 시뻘건 대낮 근무시간 7시간 행방이 오리무중이라는 뉴스였지요. 그러다보니 각가지 차마 입에 담기 부끄러운 유언비어들이 난무한 것입니다.

이 역시 남쪽의 그(권력자)들이 만들어낸 유언비어성 뉴스들일겝니다.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일까? 김정은은 29일 동안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중일까? 박근혜는 그날 7시간 동안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이럴 때 우리는 “소문과 뉴스의 행간(行間)을 읽어야 한다”는 말을 쓰고는 합니다.

행간을 읽어야 하는 세상은 불행한 곳입니다. 떳떳하지 못한 세상이지요. 이른바 자유하는 세상이 아닌 것이지요.

제가 청년이었던 1970년대야말로 “행간을 읽어야만 하는 시대”였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답니다. 그렇게 착각하며 살아온 것이지요. 여전히 행간을 읽어야만 하는 세월인 것을 잊고 산 것 뿐이지요.

신라 48대 임금인 경문왕 때 이야기라니 약 1100년 이전의 이야기입니다.

“…왕위에 오르자 왕의 귀가 갑자기 길어져서 당나귀 귀처럼 됐다. 왕후와 궁전의 일하는 사람들 모두가 이를 알지 못했지만 오직 복두(幞頭-관리가 쓰는 모자)만드는 사람만이 그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는 평생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지 않다가 죽을 때가 돼서야 도림사 대나무 숲으로 들어가 소리치기를 ´임금의 귀는 당나귀 귀와 같다´고 했다.

그 후에 바람이 불면 대나무가 소리를 내어 ´임금의 귀는 당나귀 귀와 같다´ 하였다. 왕이 이것을 싫어하여 곧 대나무를 베어버리고 산수유를 심었더니 바람이 불면 ´임금 귀가 길다네´하는 소리가 났다….”

우리들이 익히 잘 알고있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옛날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왕의 귀가 당나귀 귀처럼 되다´는 당나귀는 미련한 짐승을, 귀는 쇠귀에 경 읽기처럼 무능한 경문왕에게 진실이 들리지 않음을 의미한다고 하지요. 재해와 반란으로 곤궁한 백성들을 헤아리지 않고 대규모 부역동원과 같은 미련한 정책을 강행했다는 뜻이라고 합니다.

또한 ´복두´는 왕의 무능과 미련함을 감추는 허위의 상징이요 ´대나무 숲을 베었다´ 함은 여론의 탄압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권력은 늘 힘으로 민심을 통제하려 한다는 옛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오늘도 여전히 유효한 일이기도 하고요.

행간문제는 최소한 “행간을 읽을 수 있도록”이라도 판을 깔아 주어야 할 이른바 언론들이, 북에는 군사적 힘에 남에는 돈의 힘에 묶여 그저 제 잇속 차리기에 바쁘다보니 그나마도 어려워진 세상입니다.

1,100여년이 흘렀어도 여전히 북은 인민이 남은 시민들이 행간이라도 찾아 읽어야 하는 한반도입니다만 여전히 사랑해야만 할 모국이랍니다.

시간여행 – 서북청년단

주일 아침, 시간여행을 해봅니다.

인터넷 한겨레에 실린 ‘한영수-서울모던타임즈’ 소개 글을 통해 해보는 여행입니다.

한영수문화재단이 사진집 ‘한영수-서울모던타임즈’를 출간했다는 소식과 함께 사진작가 한영수(1933-1999)가 담은 1950∼60년대 서울 모습을 소개하고 있었습니다.

사진을 통해 제 유년과 소년시절을 추억해 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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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속 냇가가 모래내는 아니지만 제 유년의 모래내도 이런 풍경이었답니다. 어머니와 동네 아낙들은 잿물을 끓여 빨래를 삶아 냇가에서 두드려 헹구어 풀밭에 널어 말리곤 했답니다. 코흘리개 우리들은 땅을 파고 놀거나 삶은 감자 하나가 주는 행복을 만끽하곤 하였습니다.

5©한영수,서울1956-1963

달구지, 버스, 전차, 시발택시, 그리고 강한 두 다리가 동시에 도로에 놓인 사진은 그 시절 문안(사대문안)에서 흔히 볼 수 있던 풍경이었습니다.

8©한영수,서울1956-1963

그리고 중학교 때까지 타고 다녔던 전차에 대한 추억도 있답니다.

시간여행이 여기까지였으면 행복했을텐데…

선우휘의 테러리스트로 이어진 여행으로하여 주일 아침 기분을 상하고 말았답니다.

2014년 오늘 서울 한복판에 등장했다는 ‘서북청년단’ 사진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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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그마치 시간을 70년이나 돌려놓는 이런 황당한 일이 실제 2014년 현실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이 정말 믿기기 않는 일입니다.

오늘날 조선일보의 모습을 공고히한 김대중(조선일보의), 유근일, 조갑제 이전에 그 터를 닦아놓은 이로 선우휘가 있습니다.

그가 쓴 소설 테러리스트가 발표되었던 것은 1956년이었습니다. 선우휘에 대한 평가는 여러가지지만 그가 극단의 반공주의자였음에는 별 이론이 없습니다.

이른바 서북청년단은 해방공간에서 반공기치의 선봉대였습니다. 전후(한국전쟁후) 남쪽에서 공산주의자들을 찾아 볼 수 없게 되자 서북청년단에 속했던 사람들의 목표가 사라집니다. 소설 테러리스트는 그런 류의 청년 세 사람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옛날 서북청년단 전성기 때를 그리워하며 살아가는 인물과 정치깡패로 변신하는 인물 그리고 끝내 목표를 잃고 방황하는 인물들입니다.

철저한 반공주의자였던 선우휘조차 달갑지 않게 생각했던 단체가 바로 서북청년단입니다.

실제 서북청년단에 몸담았던 그 시절의 청춘들은 대부분 권력자들의 소모품으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바로 역사적 사실입니다.

2014년 9월, 서북청년단 글자를 가슴과 등판에 새기고 1950년대로 살아가려는 한심한 인간들에게 소모품이란 말이 가까이 닿지는 않겠지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