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심(票心) 그리고 어떤 대통령

한곳에서 오래 장사를 하다보니 단골손님들의 세대가 바뀌어 갑니다. 아주 오래 전 단골들 가운데는 세상 뜨신 분들도 많거니와, 오랜 단골 손님들은 이제 거의 은퇴를 했거나 준비를 하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젠 결혼한 아들 딸들의 옷을 들고 손주들과 함께 가게를 들어서는 손님들도 제법 된답니다.

세월이 그렇게 흐른 것이지요.

그 세월 덕에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서로 나누고 지내는 손님들이 제법 된답니다. 특히 장성한 아이들 이야기와 은퇴 이후 삶에 대한 이야기는 단골 메뉴랍니다.

반면에 웬만해서는 꺼려하며 꺼내지 않는 이야기 주제도 있답니다. 바로 정치  이야기입니다. 종종 이런 주제의 화제를 꺼네는 손님들도 있지만 제가 좀 피하는 편이랍니다. 구태여 꺼내서 제게 득될 것이 없다는 장사속도 있겠지만 자칫 논쟁의 빌미를 만들 여지가 있기 때문이랍니다.

제가 사는 곳은 비교적 민주당세가 강한 곳이어서 주지사와 상원의원은 늘 민주당 몫이랍니다. 그러나 아주 보수적인 측면이 강한 곳이기도 하답니다. 손님들의 약 80%가 백인 중하층에 속하는 사람들인데 제 또래 손님들은 아주 보수성향이 강하답니다.

그런데 이쯤해서 가만히 돌이켜보니 손님들이나 저나 거리낌없이 이야기하면서 웃던 정치인이 한사람 있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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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기억하실만한 이름입니다. 바로 세라 페일린(Sarah Louise Palin)입니다. 2008년에 있었던 제 44대 미국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부통령 후보였던 인물입니다.(페일린이 방한했던 적이 있었다는 사실은 오늘 그녀의 사진을 검색하다 안 일이랍니다.)

당시 제 가게 손님들이 그녀에 대해 했던 말들이 아직도 기억난답니다.

“그 여자는 하와이가 아프리카에 있는 나라 이름인줄 알걸!”, “아마 그 여자가 너를 보면 북한에서 왔다고 할걸!”, “영어 알파벳을 다 쓸줄이나 알까 모르지?” 등등 이었답니다.

무지, 무식에 뻔뻔함의 대명사처럼 그녀의 이름이 회자되곤 했었답니다.

당시 공화당에서는 비교적 고령인 72살의 존 매케인(John Sidney McCain III)이 대통령후보였고, 민주당 오바마 현 대통령이 후보였지요. 민주당내 경선에서 패배한 힐러리 클린턴에게 쏠렸던 표심 특히 여성표심을 좀 잡아보겠다고 공화당이 내민 깜작 카드였는데 결과는 대실패였답니다.

그녀가 낙선한 선거 이후에도 한때 제법 메스콤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은 든든한 뒷배경이 되어준 이른바 “티파티(Tea party)”라고 하는 극우 강경파 때문이었답니다.

이 티파티라고 지칭되는 공화당네 극우 강경파들은 오바마라고 하면 거의 치를 떠는 수준이랍니다. 특히 오바마가 내세운 의료개혁법안인 오바마케어는 나라 망치는 주범으로 여긴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재미있는 현상을 볼 수 있답니다.

저희 가게 손님들 가운데 페일린을 비웃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바마케어에 비난의 화살을 날린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네들은 공화당내 강경보스 그룹인 티파티 세력이나 운동에는 비판적이랍니다.

제가 사는 동네에 세라 페일린(Sarah Louise Palin)에 필적할만한 티타티(Tea party) 그룹의 샛별이었던 여성 정치인이 있었답니다. 크리스틴 오도넬(Christine Therese O’Donnell)이라는 여성입니다.

그녀는 오바마대통령의 러닝 메이드로 부통령이 된 이 곳 출신 상원이었던 Joe Biden의 의원자리를 놓고 2010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로 나섰답니다. 그때 그녀의 뒷배경이 된 것은 극우 보수 강경세력인 타파티와 극우 방송매체인 Fox News였답니다. 그녀는 일약 전국적인 인물로 부상했었답니다.

그러나 선거 결과는 당시 민주당 후보였던Chris Coons에게 57% 와 40%라는 현격한 차이로 상원의원 자리를 내어주고 만답니다.

오바마케어라는 의료개혁법으로 자신들의 주머니에서 돈이 나가는 것은 싫어하지만, 그 법안을 빌미로 한 극우 강경세력도 반대하는 이곳 표심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지요.

자신들의 이득과 손실에는 민감하지만 극우나 극좌의 강경한 변화에는 거부감을 나타내는 표심의 일반적인 현상은 아마 제가 사는 동네에 국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티파티를 등에 업고 오는 2016년 대선 공화당 후보로 나선 테드 크루즈(Rafael Edward Ted Cruz)가 어떤 결과를 얻을지도 궁금하거니와, 세라 페일린(Sarah Louise Palin)과 참 흡사하다는 느낌을 같는 얼굴마담이 통치하는 어느 나라가 겹지기도해서 몇자 적어보는 것인데….

2008년 선거에서 공화당원조차 메케인과 페일린조에게 표를 던지지 못했던 까닭으로 고령의 메케인이 사고를 당했을 경우 페일린이 대통령이 되는 것은 도저히 못봐준다는 심리가 작동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답니다.

자기나라 말로 자기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듯한 대통령을 보면서 든 생각들이랍니다.

이제 초상(初喪)입니다.

sewol22“내가 왜 수학여행을 와서, 내가 왜 세월호를 타서 , 나는 꿈이 있는데, 나는 살고 싶은데…”

침몰후 바다속으로 잠겨가는 배안에서 열일곱살 사내아이가 외쳤던  절규입니다. 고등학교 이학년이었던 김동혁군의 꿈은 그렇게 그의 절규와 함께 수장(水葬)되었습니다. 그때, 거기에 함께 있었던 305명 가운데 살아 뭍으로 돌아온 사람은 단 사람도 없습니다. 그 중 아홉명은 아직도 바다속에서 잠겨있건만 벌써 일년이 흘렀습니다.

예전 우리 조상들은 사람이 죽고난 후 일년이 지나면 소상(小祥)이라는 의례를 치루었습니다. 소상이라고 말할 때 쓰이는 상(祥)은 죽었다는 뜻으로 쓰는 상(喪)이 아니라 상서롭다는 뜻의 상자를 썻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 다시 봄이 되었으니 이제 슬퍼하는 마음을 잊고 좋은 계절을 맞으라는 뜻입니다. 슬픔에 겨워 식음을 전폐하던 세월을 접고 이제 새로운 세상을 맞으라는 뜻의 의례였습니다. 물론 이제는 거의 잊혀진 옛풍습일 뿐입니다.

이미 옛것이 되어 모두에게 잊혀진 이 풍습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들 바로 세월호 유가족들과 실종자 가족들입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들과 기둥이자 삶의 의미였던 가족들을 잃고 난 일년맞이가 그들에겐 다시 초상(初喪)이 되었습니다.

2015년 4월 16일을 맞이하는 세월호 유가족들과 실종자가족들은 다시 상복을 입고 삭발을 했습니다. 슬픔을 잊는 때가 아니라 슬픔에 아픔을 더하는 일년맞이입니다.

2014년 4월 16일, 봄이 흐드러진 제주의 풍광 대신 진도 앞바다 추운 겨울보다 차디찬 바다물 속으로 잠겨가며 외쳤던 김동혁군의 절규는 2015년 4월 16일 그의 어머니 김성실님의 소리가 되어 우리를 향해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어떻게 진상규명을 할지 이야기하는 사람은 한명도 없다. 하나같이 다하는 이야기는 추모와 기억 뿐이다.”

2015년 4월 16일, 여기 필라델피아에서는 김동혁군과 305명의 넋을 추모하지 않으려합니다. 아직 그들이 소리치며 절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왜 수학여행을 와서, 내가 왜 세월호를 타서 , 나는 꿈이 있는데, 나는 살고 싶은데…”

그들이 아직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아직 꿈을 꾸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오늘 삼보일배의 느린 걸음으로 광화문광장으로 향해 나아가는 그들의 아버지들과 누이들과 함께, 오늘도 봄이 가득한 안산과 광화문광장 그리고 삶의 현장에서 그들의 꿈으로 사는 어머니들과 오라비들와 함께 숨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잊지 않으려합니다.

“우리는 외칠 것입니다. 하나 하나 떨어져 나가 단 한사람이 남더라도 외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돌이 되어 외칠 것입니다. 끝까지 단 한사람만이라도 남아 있기만 하다면 그 순간까지 부디 우리들을 잊지 말아 주십시요. 기억해 주십시요. 그것만이 우리들의 소망입니다. 그 바램으로 여기 필라델피아까지 우리들이 온 까닭입니다.”

그렇게 우리들의 가슴에 잊지못할 당부를 남겨놓고 다시 상복을 차려입은 김동혁군의 어머니를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진실의 반대말은 거짓이 아니라 망각 곧 잊어버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진실을 지키기 위해 잊지 않을 것입니다. 잊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아픔과 슬픔의 진실 규명을 위해 작은 노력이나마 게을리하지 않을 것입니다.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며 온몸, 온힘을 다해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들의 꿈을 위하여 손톱이 다 빠지고 손가락이 까맣게 타토록 절규했던 넋들을 기리는 일은 바로 이제부터 우리들이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2015년 4월 16일, 이제 초상입니다.

416 참사 1주기 전세계 해외동포 동시 추모 집회 from SESAMO on Vimeo.

나라 망할 짓 하는 놈들을 보며 마땅히 일어야 할 자각(自覺)

“100년 전 이 나라가 망했다는 사실은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그 사실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지금도 나라 망칠 짓을 태연하게 저지르고 있는 사람들이 있고, 따져보면 100년 전보다도 더 심한 상황이다. 조선 망국이 근대화를 위한 좋은 기회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까지 있지 않은가. 망국의 의미를 철저하게 인식하는 것이 정신적 광복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망국<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의 저자인 역사학자 김기협의 말입니다.

온라인 매체 프레시안에 게제되었던  그의 글  <해방일기>는 제가 즐겨찾던 글이기도 하였습니다. 매체 프레시안과 그 곳에 게제되는 컬럼들을 제가 다 흔쾌히 받아 들이지는 못하지만, 조중동이나 한겨레, 경향, 오마이 역시 그 언저리에 있다는 생각이고 보면 깨우침과 생각은 늘 제 몫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무튼 역사학자 김기협의 노력은 평가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는 20세기 초에 일어났던 조선 망국의 요인을 두가지로 적시합니다.

권력의 공공성 상실이 첫째요, 도덕 정치의 상실이 두번 째라는 것입니다.

그가 적시했던 조선 망국의 요인 두가지는 망국 이후 일제 식민지와 분단의 역사를 거쳐 오늘에 이르게까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견고해져서 ‘엽기적 수준’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그의 주장에 딱히 겨룰만한 반론을 찾지 못하고 있답니다.

그의 말입니다.

” 한국인들, 특히 엘리트 계층 한국인들의 도덕성 수준이 20세기에 들어와 형편없이 떨어진 것은 국가가 망하고 이민족의 악질적 지배를 받은 때문이었다. 그런데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밑바닥에서 헤매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지금 우리는 엽기적 수준으로 부도덕한 정치-경제 시스템에 빠져 있다. 앞장서서 문제를 드러내고 있는 몇몇 사람만 처리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무능한 진보보다 부패한 보수가 낫다’, 도덕성이야 어쨌든 경제를 살릴 능력만 있으면 된다’는 국민의 사고방식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그의 책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에서

나라 망할 짓들만 골라서 자행하는 놈들이 교활하게 목청만 높이는데 그 소리에 고개 끄덕이는 주권자들이 늘 과반(過半)에 육박하는 현실을 보면 그가 옳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이른바 엘리트들의 타락이 비단 우리 한인들에게만 국한된 일도 아니거니와 그가 말하는 ‘국민적 사고방식’에 대한 자각의 역사가 일천함에 비한다면 그 변화의 속도는 빠르다는 낙천적 생각이 앞선 까닭은 바로 세월호 유가족들 때문이랍니다.

세월호 참사 일주년을 맞으며 삼배 일보의 느린 걸음이지만 쉼없이 목표를 향해 전진해 나가는 이호진 부녀와 연대의 끈을 결코 놓지 않는 유가족들의 모습은 가히 지난 백여년 이래 처음 경험하는 자각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들이 치룰 가장 혹독한 대가

“만약 국가가 윤리적 제 목적을 실현키 위한 집단이 아니거나 도덕적 근거에 의해 결집되어 있지 않다면 , 그것은 ‘고속도로상의 대규모 강도떼’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다.” – 죠지 세이빈(George Holland Sabine)의 ‘정치사상사’에서

약 일년 전 많은 이들에게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안겨주었던 참담한 사고가 있었습니다. 무릇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게 마련이듯, 그 사고 역시 원인과 결과가  분명 존재할 것입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사고로 인해 삼백 명이 넘는 사망자가 있었다는 결과 이외에는 명확한 원인과 사고 과정에서 일어난 일들에 대한 규명, 결과에 대한 처리 및 정리 등이 전혀 이루어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일년여의 시간이 지나가는 사이, 많은 이들의 기억속에서 이 사건은 잊혀져 가기 시작했고, 아직도 그 이야기를 하느냐는 사람들도 있거니와, ‘이젠 지겨우니 제발 그만해라, 니들 혹시 종북 아니냐?’라고 묻는 사람들도 있는 형국입니다.

바로 세월호 참사 이야기입니다.

오늘자 한겨레신문은 “4·16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특위)”의 조직·예산안 처리를 한달 넘게 미뤄오던 정부가 조직 규모를 특위 쪽 요청안보다 대폭 축소한 최종안을 특위 쪽에 제시한 것으로 26일 확인됐다”는 보도를 전하고 있습니다.

국가가 세월호 참사에 대한 원인과 결과를 조사하고 추후 유사한 사건으로부터 국민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만들기로 하고 구성한 ‘특별조사위원회’를 정부가 축소하고자 애쓰고 있다는 보도입니다.

“4•16 세월호참사 특별조사위원회(특위)”는 올 1월부터 일년이라는 기한을 정해 놓고 활동하는 한시적인 기구입니다. 그런데 집권 여당과 정부는 이런 저런 핑계거리로 이미 3개월이라는 기한을 흘려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제 위원회 기구를 축소하고 예산을 삭감하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지난해 4월 이 참사가 일어났을 때 많은 이들이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가졌던 까닭은 그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 참사를 풀어나가는 정부의 불합리, 부정직, 무책임한 행태 때문이었습니다.

아파하는 이들의 소리와 원한 맺힌 이들의 원성에 귀 기울이고, 불합리하고 부정직하고 무책임한 이들의 책임을 묻는 것이 사람사는 일의 기본이라고 생각한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자연적인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모든 법 위에 존재하는 자연법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100여년 전 사람인 키케로(시세로, Marcus Tullius Cicero)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cicerobustb“시공을 초월해서 만인을 결집시키는 영구 불변하고 단일한 법이 존재할 뿐이며, 또한 이 자연법의 제정자이며, 해석자이며, 후견인인 인간의 공통된 주인이며 지배자인 신이 존재할 뿐이다. 이 자연법을 어기는 인간은 보다 나은 자신을 포기하는 것이며, 인간의 진정한 본질을 부인함으로써 비단 그가 이른바 모든 처벌을 피할 수  있었다 할지라도 가장 혹독한 죄과를 치러야 할 것이다. “– 키케로의 <공화국론(On the Commonweath)>에서

자연법을 어기는 이들에게 가장 혹독한 죄과를 치루게 하는 첫 번째 일은 바로 잊지 않는 일일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삼배일보 중인 이호진씨가 그의 페이스북에 공유한 동영상 하나를 보면서 떠올려 본 생각이랍니다. 한국사회 언론문제로 종편들과 조중동, 공중파 TV 등을 많이들 이야기하는데 정말 문제는 한겨레, 경향과 오마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랍니다. 어느 곳에서도 한 젊은이의 물음과  얼버무리는 김무성에 대해 전하지 않고 있는 것은 왜일까라는 물음 때문입니다.

그 동영상 함께 나눕니다.

인간 – 믿음의 시작

성서를 새롭게 다시 읽고 있는 중입니다.통독을 전제로 창세기부터 주욱 읽어나가기로 맘을 먹었는데, 참 오랜만의 일입니다. 살아오면서 성서통독을 몇차례 한 적이 있습니다. 제 필요에 의해서거나 그 일 밖에는 다른 할 일이 없었을 때, 그리고 성서에서 해답을 찾지 않으면 희망이 보이지 않았을 때, 통독을 한 경험이 있습니다.

젊어 한 때는 밥먹고 자는 일 이외에는 성서만 들고 있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성서와 예수”가 헛것이라면 제 지나온 삶도 헛것이라는 생각으로 다시 성서를 손에 들었답니다.

몇 장 넘기자마자 제 생각을 놓지 못하게하는 구절을 만났답니다. 바로 이 구절입니다.

<셋도 아들을 얻고 이름을 에노스라고 지어 불렀다. 그 때 에노스가 비로소 야훼의 이름을 불러 예배하였다.> -창세기 4장 26절(공동번역)

제가 헛것을 믿고 살지는 않았다는 생각을 첫번 째로 확인시켜주는 구절이랍니다.

사실 문자로만 읽어 나가면 창세기는 앞뒤가  맞지않는 이야기들이 많답니다. “야훼 하나님께서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때였다.”(창세기 2장 4절)라고 시작하는 두번 째 창조 이야기에서 이미 여러번 “야훼”라는 이름이 나온답니다. 그러니 그로부터(창조때로 부터) 시간이 지난 에노스 때에 이르러 “비로소 야훼의 이름을 불러 예배하였”다는 말은 좀 생뚱 맞기도 하답니다.

물론 “야훼”라는 신의 이름은 알았지만 그 때까지는 이름을 부르지도 않았고, 예배를 드리지도 않았다고 한다면 뭐 그럴 수도 있겠다고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겠지만 말입니다.

에노스의 아버지인 셋은 아담이 낳은 세번 째 자식입니다.

아담이 셋보다 먼저 낳은 자식들 둘의 이름은 그 유명한 카인과 아벨입니다.

010잘 알려진 이야기처럼 카인은 자신의 친동생인 아벨을 쳐죽입니다. 단지 신이 자신의 제사는 외면하고 동생의 제사만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 그리 했다고 합니다.  성서는 왜 신이 카인의 제사는 거부하고 아벨의 제사는 받아드렸는지 명쾌히 말하지 않습니다.  다만 카인에게 (제사를 받아 드리지 않아 치민) 화를 나무랄 뿐입니다.  “카인의 제사를  받아드리지 않은 까닭은 이러저러하다”는 설명도 없이 그저 불공평한 것에 화를 내는 카인만을 나무라는지  카인의 입장에서만 본다면 신은 참 불공평합니다.

그러나 아벨의 입장에서 본다면 불공평한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죽어서도 천추의 한이 풀리지 않을 일이었습니다.

“왜, 아무 까닭도 없이 형의 제사는 받지 않고 내 제사만 받아 들여서 형에게 맞아 죽어야만 했는지?” 아마 죽어서도 풀리지 않았을 숙제였을 것입니다.

자! 여기까지 성서이야기를 잠시 멈추고 우리들이 살아가는 오늘을 돌아봅니다.

특별한 이유나 까닭도 없이 자신이나 자신이 속한 집단이 하는 일들이 거부당하거나 무시당하는 일들을 찾아 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또한 아무 까닭도 없이 불이익을 당하거나 목숨을 잃는 일들도 사람 사는 세상에서는 비일비재하기 마련입니다.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든 쉽게 일어날 수도 있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핵심은 바로 폭력(살인)과 비열함(잡아뗌, 뻔뻔함, 몰염치, 부끄러움을 모름)입니다.

<야훼께서 카인에게 물으셨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카인은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하고 잡아떼며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 창 4 : 9, 공동번역

바로 이 지점입니다.

전후 사정을 보아 신은 카인이 행한 일을 몰랐을리 만무하지만 묻습니다. 그 물음에 대한 카인의 응답이었습니다.

카인은 아담의 장자였습니다.

성서이야기의 흐름은 카인에게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맥없이 죽은 아벨에게서 시작 된다는 선언이  바로 창세기4장 26절에 나오는 구절이라는 생각을 해보는 것입니다.

<셋도 아들을 얻고 이름을 에노스라고 지어 불렀다. 그 때 에노스가 비로소 야훼의 이름을 불러 예배하였다.>

야훼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예배를 시작하면서 시작하는 성서이야기는 정말 아무 까닭없이 맥없이 형에게 맞아죽은 아벨의 피가 땅에서 외치는 소리를 듣고 나온 새로운 생명체 셋(신이 아벨 대신 아담에게 허락한 세째 아들)의 대물림인 에노스로부터 시작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에노스’란 ‘연약한 존재’, ‘죽을 수밖에 없는 유한한 존재’라는 바로 “인간”이라는 뜻이랍니다.

성서가 말하는 신 “야훼 하나님”은 바로 “자신이 인간임을 깨닫는 바로 그 순간 그 곳에서 부터” 일하신다는 깨달음이랍니다.

“권력과 폭력”을 휘두르기 일삼고 “ 잡아뗌”에 능숙한 이들과, 오늘 아무 까닭없이 무시당하거나 목숨을 잃기까지 하는 지경에 다다른 사람들에게,  그리고 많은 경우에 저처럼  이 두가지 경우가 공존하는 보통사람들에게  새롭게 다가가야 마땅할 창세기 이야기랍니다.

만남 – 잊지 않을께

지난 3월 8일 필라델피아를 방문했던 세월호 유가족 동혁엄마 김성실님과 경빈엄마 전인숙님이 남긴 말입니다.

9<저희마음에 들어와 주십시오. 그리고 침묵하지 말고 노란리본으로 외쳐주십시오.

우리에게 직접 물어봐주십시오. 홈페이지에도 자주 들어와서 힘을 내라고 해주시고, 광화문과 팽목항과 분향소를 잘 지켜내서 온국민이 원하는 것이 진실이 되도록 힘을 합해주십시오.

잘못된 것을 바로 잡을수 있는 국민정신을 회복하도록 해외에서도 많이 알려주십시오.>

 

 

 

 

종교 – 그 모를 일에 대하여

“2030세대의 종교 이탈 등에 따라 10년 전에 비해 전체적으로 우리나라 종교인 비율이 전체 인구의 54%에서 50%로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 오늘자(2월 12일) 한겨레 온라인판에 실린 “젊은층 이탈로 ‘종교 인구’ 비율 줄어”라는 제목의 기사 첫 문장입니다.

갤럽 면접조사 보고서를 인용한 이 기사에서 특히 20대 젊은이들의 종교 이탈율이 크게 늘어 지난 10년 사이 45%에서 31%로 급감하였다고 합니다.

예수쟁이를 자처하는 제가 “참 잘된 일이다.”라고 한다면 모순일 수 있겠습니다만, 솔직히 마음 한구석에 있는 “참 좋은 현상이다”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답니다.

비단 교회 뿐만 아니더라도 널려 있을 문창극이나 황교안류 등의 인간들이 신이나 종교의 이름으로 나불거리는 말들을 젊은이들이 듣지 않는 게 좋겠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친일논설선집“하나님의 뜻” 또는 “신의 뜻”이나 성불(成佛) 등을 팔아 제 뱃속과 잇속 챙기는 일에 이골난 곳에 젊은이들이 서성거리지 않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을까 하는, 어찌 보면 좀 슬프고 아픈 생각이랍니다.

돌아가신 임종국(林鍾國)선생이 남기신 <친일논설선집(親日論說選集)>에 나오는 일제하 종교인들의 발언들이 2015년 오늘에도 여전한 종교라면 차라리 일탈하는 편이 나을 것도 같답니다.

약 70 – 80년 전 한국의 이른바 종교 지도자들이 한 말들이랍니다.

안용백(유교, 조선 총독부 학무국 편집과) – “일본과 우리가 혈연적으로 가깝고 글과 말과 관습이 비슷함이 유교의 진흥에 큰 힘이 되므로 내선일체에 총력을 기하자.”

이돈화(천도교 신파) – “성전(聖戰) 완수를 위한 고행이야말로 진정 내세의 행복을 얻는 것”

권상로(불교, 혜화전문 교수) – “신(新)체제에 협력하여 총본산의 강력한 지휘 아래 총진군하는 것이 바로 모든 중생이 성불하는 길”

이석규(시천교) – “’황도(皇道)’기 바로 동학에서 말하는 세계 개조이니 이 천기를 잃지 말고 동학 대중을 황민화 하자”

신흥우(기독교, 배제 중학교 교장) – “예수님은 ‘그 나라를 사랑하라’고 가르쳤으니 우리는 나라를 사랑해야 할 것인데, 조선을 사랑한다는 것은 일본제국을 사랑하는 것이며, 또한 일본제국의 충실한 신민으로서만 가능한 일”

정인과(기독교, 조선장로회 교육총무) – “기독교가 국책에 순응하여 구미의존성을 극복하고, 외국선교기관을 철수시켜 ‘일본적’ 기독교로 탈바꿈해야 한다.”

심명섭(기독교,조선감리교단 본부 주사) – “전시에 가장 필요한 사상의 통일과 신념의 강화를 위해 국책에 순응하는 진정한 신앙운동을 전개하자.”

최태용(기독교, 복음교회 감독) – “조선을 일본에 넘긴 것은 신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을 섬기듯이 일본국가를 섬겨야 한다.”

임종국선생이 이 책에서 하신 말씀은 오늘날 종교라는 이름으로 제 잇속과 뱃속 불리우는 이들에게 그대로 적용되는 듯 합니다.

“친일은 90% 이상이 침략 논리의 복창(復唱)이었다. 하지만 태반 이상의 친일자들이 그것을 복창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들은 진심으로 동양평화를 믿었고, 황도조선을 예찬하였다. 태반 이상의 친일이 강제적 피동이 아니라 능동이었고, 가식(假飾)이 아니라 진정이었다는 것, 친일의 민족사적 문제점이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종교가 제 정신 차리지 못하면 떠나는 것이 신께 가까이 가는 길인지도 모를 일입니다.

참 먼 옛날 이야기 하나

옛날 옛날 고려적 이야기보다도 더 먼 옛날 이야기 하나 드립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2700여년 전 이야기랍니다.

유럽역사에서 그리스가 막 주인공이 되려던 때였고, 성서 이야기로 따지면 다윗이 만든 나라가 남북으로 갈렸다가 북쪽 이스라엘이 아시리아에게 멸망을 당하던 무렵의 이야기랍니다. 한반도 역사로 치자면 아직 단군임금이 세운 고조선 시대 쯤의 일이랍니다.

참 먼 옛날 이야기지요.

이 때 중국은 춘추전국시대였답니다. 진시황제가 천하를 통일하기 전에 여러나라들이 각축을 벌렸던 시대이거니와 중국의 생각 곧 사상들이 마구 일어나던 시대이기도 하답니다.

그 무렵 초(楚)나라에 화(和)씨라는 사람이 형산(荊山)이라는 산에서 큰 박옥(璞玉: 아직 다듬지 않은 구슬의 원석原石)을 캐냈답니다. 화씨는 귀한 물건이므로 임금께 바쳐야겠다는 생각으로 당시 임금이었던 여(麗)왕에게 이 박옥을 드렸답니다.

여(麗)왕은 이게 진짜 보물인가 아닌가 알아보려고 궁전에 있는 보석장이에게 물었답니다. 그랬더니 그 보석장이는 “이건 보석이 아니라 그냥 돌입니다.”라는 진단을 왕에게 올렸답니다. 화가 난 왕은 임금을 놀렸다는 이유로 화씨의 왼쪽 발을 잘라버려답니다.

여왕이 죽고난 뒤 그 뒤를 이어 무(武)왕이 왕위에 올랐답니다. 화씨는 다시 박옥을 무왕에게 받쳤답니다. 무왕 역시 궁전의 보삭장이에게 감정을 시켰고 보석장이는 똑같이 그냥 돌일 뿐이라는 감정을 내렸답니다. 화가 치민 무왕은 이번에는 화씨의 오른발을 잘라버렸답니다.

무왕이 죽고난 뒤 문(文)왕이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말 문왕에 귀에 이상한 소문이 들렸습니다. 형산(荊山)이라는 산에서 두 발이 잘린 사내가 밤낮으로 피를 토하며 울고 있다는 소문이었습니다.

왕은 신하들에게 두 발이 없는 사람이 그 사내 뿐만이 아니거늘 무슨 일인지 자초지종를 알아오라고 시켰답니다.

사내가 울고있는 사연을 들은 신하가 문왕에게 한 말이랍니다. “화씨라는 사내이온데 두 발이 잘려 없어진 것이 슬퍼서 우는 게 아니라 보배를 가지고 돌이라 하고, 곧은 사내를 가지고 거짓말장이라고 하는 것이 슬퍼서 피를 토하며 울고 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은 문왕은 화씨의 박옥을 다듬어 보라고 보석장이에게 명령했더니 그야말로 세상에서 보기드문 보옥(寶玉)이 나왔다고 합니다.

한비자중국 고전인 한비자(韓非子)에 나오는 이야기랍니다.

흔히 우리들이 “옥(玉) 석(石)을 구분 못한다.”고 하는 말의 유래입니다. 보물인지 돌인지를 구분 못한다는 말입니다.

화씨는 두 발을 잘린 이후 그의 옳은 판단을 인정받았지만 화(和)씨 이래 2700여 년 동안 두 발, 두 손, 두 다리, 두 팔 아니 단 하나 밖에 없는 모가지 잘리우면서도 “돌이 아니라 보석”이라는 주장을 펴다 끝내 인정받지 못하고 떠난 사람들은 셀 수 없이 많을 것입니다.

문득 역사의 발전이란 바로 그런 이들의 피거름 위에서 피어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드는 저녁입니다.

옥(玉: 진실)을 주었더니 옥(玉: 진실)을 석(石: 거짓)이라고 우기며 옥을 준 사람(진실을 말한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일들이 어찌 그리 오늘날에도 여전한지요.

아님 말고?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미국내에서는 성인이라면 누구나 합법적으로 총기를 구입하여 소지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합법적인 범위 안에서 사용할 수도 있고요.(대부분의 주에서 라이플이나 샷건은 18살 이상, 권총은 21살 이상이면 구입할 수 있답니다.)

제 세탁소 손님들 가운데도 각종 총기류 자랑을 하는 손님들이 더러 있답니다.

그러다보니 총기류 사고에 대한 각종 사고들이 종종 일어나곤 한답니다. 강절도 등의 범죄행각은 물론이고 크고 작은 사람들 사이의 다툼 끝에 총기류를 사용하는 사고 소식들을 심심치 않게 듣곤 한답니다.

이즈음에는 좀 숫자가 줄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많은 미국내 한인 이민자들이 자영업을 합니다. 특히 동네 코너 스토아들 곧 구멍가게를 운영하는 한인들이 많답니다. 이런 자영업자들을 상대로 하여 총기류를 이용한 강절도 사건들이 잊을만 하면 일어난답니다. 물론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겠습니다만 제가 알기로도 정말 많은 이들이 한번쯤은 경험했을 일이랍니다.

비교적 안전하다는 세탁소에도 이런 일들이 종종 일어난답니다. 저는 직접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제가 운영하던 세탁소에서 종원업이 당한 경우는 있었답니다.

오래 전에 저희 동네를 떠난 이 가운데 한 해에 세번이나 권총 강도를 당한 사람이 있답니다. 당시 30대로 혈기 왕성했던 친구인데 권총 앞에서는 맥을 쓸 수 없었답니다. 생각할수록 당한 일에 분을 풀 수 없었던 이 친구는 끝내 권총을 하나 사서 늘 지니고 다녔답니다.

그렇게 권총을 몸에 품고 다니던 이 친구가 어느날 권총도 팔고 가게도 팔아 이 동네를 떳답니다.

그 때 그 친구가 했던 말이랍니다.

“총 가지고 있으니 꼭 누군가를 죽일 것 같아요. 강절도가 문제가 아니예요. 구멍가게에 잔도둑놈들이 많거든요. 근데 이놈들이 훔치다 걸리면 그냥 웃으며 장난이라고 하면 그만이예요. 그걸 잡았다고 경찰이 제 편 들어주는 것도 아니고요. 제가 화를 내면 놀려요. 장난 가지고 왜 그러냐고? 거기다 욕까지 듣고 나면 제 손이 저절로 권총으로 가요. 그러다 언제간 꼭 누군가를 죽일 것 같더라고요. 그래 다 털고 떠나는거죠.”

어제 한국 연합뉴스에 <정쟁으로 시작해 무죄로 끝난 ‘사초 실종’ 사건>이라는 뉴스를 보면서 떠올린 오래 전 우리 동네를 떠난 이의 소리였답니다.

연합뉴스 제목부터가 어쩜 그렇게 ‘아님 말고’식인지 권총에 손이 저절로 갔다는 그 친구의 심정을 떠올려 본답니다.

정쟁(政爭)으로 시작했다는 말이 애초 그른 말이라는 말씀이지요. 이건 서로간에 다툰 문제가 아니라 어느 한 쪽이 도둑도 강도도 아닌 시민들을 상대로 사기를 친 사건이라는 말씀입니다.

회의록혹시 이 사건의 중심인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전문”(전문 읽기)을 읽어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꼭 한번 읽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아마 누구라도 한글을 제대로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정말 상식적인 시민 수준의 사람이라면 1시간에서 길게 2시간 정도 투자하시면 읽을 수 있는 분량인데, 읽고 나면 정말 손이 권총으로 가는 느낌을 받을 수 밖에 없답니다.

읽고나면 당시 노무현 대한민국 대통령과 김정일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 두 사람이 각자 자기가 처한 위치에서 각자의 통치 영역에 대해 얼마나 치열한 자기 고민 위에 서있는지를 알 수 있답니다.

특히 노무현대통령이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민족통합에 대한 아주 작은 주춧돌 하나를 얹기 위해 치열하게 자신의 생각을 펼쳐내는 모습을 읽을 수 있답니다.

정말 아무 선입견없이 그 대화록을 읽는 사람이면 누구나가 저처럼 느낄 수 밖에 없는 기록이랍니다.

그런데 그걸 다 세상에 들어내 놓고도 자신있게 큰 소리로 사기를 치고, 그 사기가 먹히는 세상이니 권총에 손이 가는 사람만 미칠 지경에 이르는 것입니다.

오늘도 “아님 말고”라고 뻔뻔스런 웃음을 날리는 이들을 보면서 이어진 생각 하나.

누구나 다 그렇게 총팔고 가게 팔고 동네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끝내 총에 손이 닿아 그 뻔뻔스런 얼굴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이들도 있다는 생각 말입니다.

금요일엔 돌아오렴

<시간은 흘러가다가도 다시 그날로 붙들려간다

학생들은 3박 4일의 수학여행을 마치고 금요일에 돌아오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배에 갇힌 일반인 승객들과 더불어 끝내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것은 남겨진 가족들이 가닿을 수 없는 수백개의 금요일에 관한 기록이다.>

금요일엔 돌아오렴416 세월호 참사 시민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대표 김순천, 이하 작가기록단)이 지난해 4월 16일 세월호 참사 직후부터 12월까지 단원고 희생학생 유가족들과 동고동락하며 그중 부모 열세명을 인터뷰하여 펴낸 책 <금요일엔 돌아오렴>에 대한 출판사 서평입니다.

<시간은 흘러가다가도 다시 그날로 붙들려간다>라는 말이 절규로 들리기도 하고, 사명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딱히 <시간은 흘러가다가도 다시 그날로 붙들려간다>는 명제에 사로잡혀 뉴스를 훑은 것이 아니건만 생각은 자꾸 그리로 몰려갑니다.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 ‘박종철 사건’ 은폐 검사… 당시 고문치사 수사 축소·은폐> – 오늘자(2/2) 온라인 경향신문 머릿기사 제목입니다. “책상을 탁!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던 사건이요,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사건입니다.

한국 현대사에 있어 하나의 전환점으로 기록될만한 사건인 셈입니다. 그 사건의 한가운데서 진실을 은폐하여 자신의 직무를 유기했던 자가 세월이 흘러 대법관 후보자로 이름을 올렸다는 뉴스를 보며 도대체 우리들에게 30여년의 세월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또한 오늘자 오마이뉴스에는 <10월 10일 10시에 태어난 아이가 ‘종북’의 증거라고?>라는 제목의 기사가 머리기사들 가운데 하나로 올라와 있습니다.

“‘통일콘서트’를 열었다는 이유 등으로 구속된 황선 희망정치연구포럼 대표가 구속영장 실질심사에서 겪은 일과 앞으로 진행될 재판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담은 글을 남편인 윤기진씨에게 편지로 보내왔다. <오마이뉴스>는 황선 대표가 윤기진씨에게 보내온 편지 내용을 몇 편에 걸쳐 싣는다.”

이 기사를 싣는 까닭을 설명해주는 편집자의 글입니다.

그리고 이 기사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한편, 피의자는 2005. 10. 10. 북한 조선노동당 창건일을 기해 임신 중인 자식을 북한에서 출산할 목적으로 ‘아리랑 축전’ 관람을 빙자, 방북하여 북한 평양산원에서 자녀를 출산 후 소위 통일둥이 ‘윤겨레’라 이름 짓고, 같은 해 10. 25. 판문점을 통해 귀환함으로써 종북인사들로부터 ‘통일전사’란 칭송을 받았다.”

국가보안법으로 황선씨를 구속기소한 검찰측 기록입니다. 사실 제가 이 기사를 클릭했던 까닭은 10월 10일 10시라는 숫자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제 딸아이가 태어난 월 일 시(月日時)이기 때문입니다.

구속된 황선이라는 이는 10월 10일 10시에(시간은 오전인지 오후인지를 명확히 기록치 않아 모르지만 글의 흐름상 저녁시간인 듯) 한반도 북쪽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방문했던 10여년 전 바로 그 시간쯤 바로 그곳 평양에서 딸을 낳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당시엔 한반도 남쪽 대한민국 정부가 여행허가를 내주어 약 4천여명 가량이 그 가을에 북을 방문했다고 합니다. 황선씨는 그 중 한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제 아내는 그보다 십오여년 전 10월 10일 오전 10시쯤 이곳 미국 델라웨어에서 딸아이를 낳았답니다.

제 아내가 그 때나 지금이나 10월 10일은 제 딸아이의 생일일 뿐 조선노동당 창건일인 줄은 모르듯이, 아마 황선씨도 10월 10일은 그녀의 딸 생일일 뿐일 것입니다.

저나 제 아내가 그해 10월 10일에 제 딸아이가 이곳 델라웨어에서 세상에 나오도록 한 것이 아니듯이, 황선씨 역시 그 때 그 시간 평양에서 자신의 딸을 낳으려고 계획하고 그렇게 실행했다는 말 자체는 도저히 성립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1987년 “책상을 탁!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는 경찰의 발표를 진실로 만들려는 검사가 2015년 대한민국의 대법관이 되려는 현실로 본다면, 아마 황선씨도 자신의 주도면밀한 계획에 따라 그 때 거기에서 출산할 수 있는 능력보유자가 될 수있다는 것이 그리 낯선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대한민국 검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말입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가다가도 다시 그날로 붙들려간다>는 사실을 명확히 정리해 주는 글이 있습니다.

오늘자 조선일보에 실린 그 유명한(?) <김대중컬럼>입니다. 제목이 <‘對北’에 올인하는 ‘박근혜 외교’>라는 글입니다.

그는 이글을 통해 미, 중 일 등 강대국들과의 적절한 외교가 우선인데 그를 도외시하고 박근혜정부가 통일에 매달려 대북관계에 우선순위를 두는 것은 매우 염려스럽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가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속내는 바로 <종북장사>를 하는 조선일보를 방해하지 말라는 것이랍니다.

바로 이 대목들입니다.

<대통령이 철도·도로·특구(特區) 개발 등 대북 사업을 계속 언급하고 남북 대화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이면 내각과 장관들은 대통령의 의중을 따라가기 마련이고, 그것이 최근 박 대통령의 외교 현장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민족’이라는 명제에 이끌려 자신의 이념적 스펙트럼을 넓혀 보이려는 감상(感想)이 작용한 ‘통일’이라면 위험하기까지 하다.>

금요일에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을 잊어서는 절대 아니되는 까닭입니다. <시간은 흘러가다가도 다시 그날로 붙들려>가는 경험을 후대에게 물려주지 않으려면, 지금 살아있는 자들이 잊지 말아야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