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줄 알아야

16개 일본을 대표하는 주요 역사 관련 학술단체들이 과거 종군위안부에 대한 아베 총리로 대변되는 일본 정부 입장과는 상반된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고 합니다.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이번 성명은 지난 6일 세계 역사학자 187명이 “역사학자들은 일본군이 여성들의 이송이나 위안소 관리에 관여했음을 증명하는 수많은 자료를 발굴해왔다”는 성명을 낸 데 이어 위안부 문제를 왜곡하려는 아베 정부의 시도에 강력한 경고가 될 전망”이라고 합니다.

또한 한겨레는 이 보도에서 세 곳(일본정부, 서구학자들, 일본 역사단체)의 입장을 도표로 정리 소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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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다른 입장의 주요 핵심은 “강제성 여부”입니다. 여성들을 본인들의 의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끌고가 성노예화 했다는 것이 이번 역사학회 성명의 주 내용입니다. 반면 아베를 위시한 일본정부의 입장은 일부 강제성은 있어지만 국가가 개입했던 사건이 아니라 인신매매라는 (어느 사회에서나 있을 수 있는) 사회악으로 규정하는 것입니다.

비교대상에는 빠져있지만 일부 한국내 보수우익을 자처하는 인간들 가운데는 “자발적 의사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강제성 여부”와 “자발적 여부”에 대한 생각들을 하다보니 일군의 여성들 이름이 떠오릅니다. 일제 식민통치 말엽에 실로 자발적으로 앞장서서 일제에 아부협력했던 사람들입니다.

모윤숙(시인), 임영신(교육, 정치가, 중앙여자대학(중앙대학교의 전신) 설립자), 박순천(교육, 정치가), 박인덕(교육, 언론인, 인덕대힉교 설립자), 김활란(교육, 언론인, 이화여대 총장), 노천명(시인, 언론인), 이숙종(교육자, 성신여자대학 설립자), 배상명(교육자, 상명대학 설립자) 등이 바로 그들입니다.

그들이 주축이 되어1942년 1월 5일 친일협력을 위한 단체를 만들었으니 그 이름은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朝鮮臨戰保國團 婦人隊)>였습니다.

이 부인대는 바로 전해인 1941년10월 21일에 결성된 조선임전보국단(朝鮮臨戰保國團) 산하 여성단체였습니다.

이 단체의 설립 취지문에 따르면, 반도민중(조선민)은 특별지원병 외에 병역에 복무할 명예를 가지지 못하므로 무한한 황은(일본천황)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기 위해 국민운동의 강력한 하나의 기관으로 설립되었다고 천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들은 강령을 통해 1.황도정신 선양과 사상의 통일, 2.전시체제의 국민생활 쇄신, 3.국민 모두의 노동보국, 4.국가우선의 원칙하에 저축, 생산, 공출 등에 협력, 5.국방사상의 보급 등을 내세우며 해방직전까지 일제에 자발적 충성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들(조선임전보국단원) 대부분이 해방후 대한민국의 주인공들이 됩니다. 해방후 부통령까지 지낸 김성수를 비롯해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들 본인 및 그의 후손들은 대한민국 각 분야에 이른바 엘리트층을 이루며 대한민국 사회를 좌지우지하는 세력이 됩니다.

또한 자유당이래 오늘날 새누리에 이르기까지, 한국 민주당 이래 오늘날 새정치민주연합의 주도 세력들 역시 이들에서 비롯된 세력들입니다.

조선임전보국단 상임이사였던 김용주(金龍周)의 아들이 새누리당 현대표인 김무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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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임전보국단원들은 해방 직전까지만해도 서슬 퍼렇게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을 외치며 황국신민(皇國臣民)이 되어야만 한다고 목청 높이던 자들입니다. 외세에 의탁해서 그 앞잡이가 되거나 하수인이 되어 민족의 이익을 팔아먹고, 동포들을 먹이 삼아 살찌우고 영달을 누리던 자들이었습니다.

해방 – 그로부터 70년이 흐른 오늘.

그 조선임전보국단원가운데 중심인물이었던 김용주(金龍周)의 아들 김무성에게 한마디 던진 노건호를 향해 내뱉는 말들이 정말 가관입니다.

그 가운데 으뜸이 바로 “예의(禮儀)” 운운 아닐까합니다.

구태여 고 노무현대통령을 끌어 들이지 않아도, 일본 역사학회의 성명 앞에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까닭입니다.

바른 사회로 나가는 전제 – 피케티 이야기를 들으며

모처럼 맞는 연휴 아침, 토마 피케티 (Thomas Piketty)의 이야기를 들어봅니다.

그는 철저한 자료검증과 정보의 공유를 전제한 후 역사에 대한 믿음을 이야기합니다. 전쟁이나 혁명이 아닌 체제내에서의 건강한 변혁이 담보되는 사회로 나갈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비단 그의 경제이론이 아니더라도 우리들이 귀 기울여 들어야만 할 충고라는 생각입니다.

0:12 오늘 밤 여기에 와서 정말 좋습니다.

0:13 저는 소득과 부의 분배에 관한 역사를 지난 15년간 연구했습니다. 역사적인 증거에서 나온 재미있는 교훈은 정말 장기적으로는 자본이익율이 경제성장율을 초과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부가 높이 집중되게 합니다. 부의 무한한 집중이 아니라 r 과 g 사이의 격차가 더 커지고 부의 불평등 수준이 큰 쪽을 사회가 직면합니다.

0:48 그래서 이것이 제가 오늘 이야기할 주요 힘입니다. 하지만 소득과 부의 분배 역학에서 이것이 유일하게 중요한 힘이 아니라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소득과 부의 분배의 장기적인 역학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다른 힘이 많이 있습니다. 또한 아직도 많은 데이터를 모아야 합니다. 우리가 알던 것보다 오늘날 조금 더 알지만 아직도 조금 밖에 모르고 거기엔 서로 다른 과정이 많이 있습니다. 경제, 사회, 정치를 좀더 연구해야 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단순한 이 힘에 초점을 맞추지만 다른 중요한 힘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닙니다.

1:27 제가 보여드릴 데이터의 대부분은 온라인으로 이용가능한 세계 최고 소득자 데이터베이스에서 찾았습니다. 이것은 불평등에 관해 존재하는 가장 큰 데이터베이스이고 수십 개 국가에서 30명 이상의 학자들이 노력한 결과입니다. 이 데이터베이스에서 나온 사실 몇 가지를 보여드린 뒤에 g 보다 큰 r 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사실 하나는 소득 불평등의 순서가 지난 세기동안 미국와 유럽 사이에 크게 뒤집어졌습니다. 1900, 1910년 당시의 소득 불평등은 실제로 유럽이 미국보다 더 높았는데 그 반면 오늘날은 미국이 더 높아요 그래서 명확하게 말하겠습니다. 여기에 대한 주요한 설명은 g 보다 큰 r 이 아닙니다. 그것은 기술에 대한 수요와 공급의 변화, 교육과 기술 사이의 경쟁, 세계화, 미국 안에서 기술에 대한 좀더 평등하지 않은 접근인데 아주 좋은 최고 대학이 있지만 교육 체계의 하위권은 그다지 좋지 않아서 기술에 대한 아주 불공평한 접근이 있고 미국의 최고 매니저에 대한 보상이 전례없이 상승해서 교육만으로 해명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많은 것들이 진행중이지만 오늘 이것에 관해서는 많이 말하지 않겠습니다. 부의 불평등에 초점을 맞추고 싶으니까요.

2:47 소득 불평등에 관해 아주 간단한 지표를 보여드리죠. 이것은 상위 10%로 가는 총소득의 점유율입니다. 보시다시피 1세기 전에는 유럽에서는 45 – 50% 사이였는데 미국에서는 40%를 약간 넘어섰죠. 그래서 유럽이 좀더 불평등했어요. 그 뒤에 20세기 초반에 급작스런 감소가 일어났고 최근에 들어와서 미국이 유럽보다 더 불평등하게 되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이 제가 방금 얘기했던 첫번째 사실입니다. 자, 두번째 사실은 부의 불평등과 좀더 관련이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부의 불평등은 항상 소득의 불평등보다 훨씬 높고 부의 불평등 또한 최근에 들어서 증가했지만 1세기 전에 비하면 오늘날은 덜 극단적입니다. 소득에 대비한 부의 총량은 1차 세계 대전, 대공황, 2차 세계 대전 때문에 일어난 엄청난 충격에서 이제는 회복되었습니다.

3:49 이제 2개의 그래프를 보면서 2번 사실과 3번 사실을 설명하겠습니다. 우선 부의 불평등 수준을 보면 상위 10%의 부자들이 가진 총재산의 점유율인데 소득 불평등에 관해 미국와 유럽 사이에 있었던 비슷한 역전을 볼 수 있습니다. 1세기 전에는 부의 집중이 미국보다 유럽에서 더 높았지만 지금은 반대입니다. 하지만 2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첫째, 부의 불평등의 일반적인 수준은 늘 소득의 불평등보다 높았습니다. 소득 불평등에 대해 상위 10%의 점유율은 총소득의 30 – 50% 사이였지만 반면에 부에 관해서 점유율은 늘 60 – 90% 사이임을 기억하세요. 자, 그게 1번 사실이고 다음에 위해서 아주 중요합니다. 부의 집중은 항상 소득의 집중보다 훨씬 더 높습니다.

4:47 2번 사실은 최근에 일어난 부의 불평등 상승은 1910년대로 돌아가기에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커다란 차이는 부의 불평등은 아직도 엄청 크고 전체적인 부의 60, 70%가 상위10%에게 가지만 좋은 소식이라면 실제로 1세기 전보다는 낫습니다. 그때는 유럽에서 90%의 부가 상위 10%한테 갔습니다. 오늘날 여러분이 가진 것은 제가 중간 40%라고 부르는데 상위 10%도 아니고 하위 50%도 아닌 사람들로서 전체적인 부, 국부의 20 – 30%를 소유하는 부의 중산층입니다. 반면에 그들은 1세기 전에는 가난했죠. 그때는 기본적으로 부의 중산층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중요한 변화이고 비록 부의 총량은 회복되었지만 부의 불평등이 1차 세계 대전 이전 수준까지 완전히 회복되지 않았음을 보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좋습니까? 이것이 소득에 대비한 부의 총량이고 보시다시피 특히 유럽에서는 1차 세계 대전 이전수준으로 거의 돌아갔습니다. 그래서 이 이야기에는 2가지 다른 부분이 있습니다. 하나는 우리가 축적ㅎㄴ 부의 총량과 관련이 있고 물론 많은 부를 축적하는데는 잘못된 것이 없어요. 특히 부가 좀더 분산되고 덜 집중되었다면 말입니다. 우리가 정말로 초점을 맞추고 싶은 것은 부의 불평등의 장기적 진화이고 미래에 일어날 일입니다. 1차 세계 대전까지 부의 불평등이 아주 높았던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고 그게 더 높은 수준으로 상승한다면 미래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요?

6:31 미래에 관해 몇 가지를 설명하고 추측을 해보죠. 우선 왜 부가 소득보다 더 많이 집중이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가장 좋은 모델은 역동적이고 왕조적인 모델로서 개인은 장기적인 목표를 가지고 온갖 목적으로 부를 쌓습니다. 사람들이 자기 수명이 다할 동안만 부를 축적한다면 늙어서 소비할 수 있으려면 부의 불평등 수준은 소득의 불평등 수준과 어느 정도 비례해야 합니다. 부의 불평등이 소득의 불평등보다 훨씬 심한 이유를 단순한 수명 모델로 설명하기는 아주 어렵기 때문에 사람들이 다른 목적으로 부를 축적하는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보통 그들은 부를 다음 세대, 자식들에게 물려주기를 원하거나 부와 함께 오는 명성이나 권력 때문에 부를 축적하고 싶어합니다. 그래서 데이터에서 보는 것을 설명하려면 수명 이상으로 축적하는 다른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자, 부의 축적에 관한 역동적 모델의 커다란 계층에서 상속을 목적으로 부를 축적하는 동기를 가지며 온갖 종류의 복합적 충격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가족은 자식수가 엄청 많아서 부가 나눠질 것입니다. 어떤 가족은 자식이 적습니다. 자본수익율에 대한 충격도 있습니다. 어떤 가족은 엄청난 자본이익을 얻습니다. 어떤 가족은 투자에 실패합니다. 그래서 부의 과정에는 늘 어떤 유동성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올라가고 어떤 사람들은 내려갑니다. 중요한 점은 어떤 모델에서나 그런 충격의 변동에 대해 부의 불평등에 대한 평형상태는 급격하게 증가는 r – g의 함수입니다. 직감적으로 자본이익율과 경제성장율 사이의 차이가 중요한 까닭은 초기의 부의 불평등이 보다 큰 r – g를 가지고 더 빨리 가속될 것이기 때문이죠. 간단한 예를 보죠. r 이 5%이고 g 가 1%일 때 부자는 자산의 1/5만 재투자하면 그들의 부는 경제 규모만큼 빨리 증가합니다. 그래서 더 큰 재산을 만들고 영속시키기 쉽습니다. 왜냐하면 세금을 안 낸다고 가정하고 4/5를 소비할 수 있고 1/5만 재투자하면 되니까요. 물론 어떤 가족은 그보다 더 소비하겠지만 어떤 가족은 덜 소비할 것이고 분배에 어떤 유동성은 있지만 평균적으로 1/5만 재투자하면 되고 그래서 높은 부의 불평등이 지속되는 이유입니다.

9:11 이제 r 이 g 보다 항상 크다는 말을 듣고 놀라지 마세요. 왜냐하면 사실 이것이 인류역사상 늘 일어났기 때문이죠. 그리고 이것은 단순한 이유에서 누구한테라도 아주 명확합니다. 성장은 인류 역사의 대부분에서 0%에 가까웠기 때문이죠. 성장은 어쩌면 0.1, 0.2, 0.3% 였지만 인구증가율과 1인당 생산량은 아주 느렸고 그 반면에 자본수익율은 물론 0%가 아니었습니다. 산업혁명 이전의 사회에서 전통적인 형태의 자산이었던 토지 자산에 대해서는 보통 5%였습니다. 제인 오스틴의 독자라면 아시겠죠. 천 파운드의 연간 소독을 원한다면 자산의 가치가 2만 파운드가 되어야만 2만의 5%가 천이 되죠.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이것은 사회의 근간이었고 g 보다 큰 r 때문에 부와 자산을 가진 사람들이 자본 수익으로 살면서 자기 자신의 생존만을 걱정하는게 아니라 살면서 다른 일도 할 수 있었습니다.

10:21 자, 제가 한 역사 연구에서 중요한 결론은 근대의 산업성장은 기대한 만큼 기본적인 사실을 바꾸지 못했습니다. 물론 산업혁명에 따른 성장율은 보통 0에서 1 – 2%로 올랐지만 그와 동시에 자본수익율도 올라서 둘 사이의 격차는 정말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20세기 동안 아주 독특한 사건들이 일어났습니다. 첫째, 1914년과 1945년의 전쟁 충격으로 아주 낮은 수익율이 일어났고 대공황 시기에 부의 파괴, 물가 상승, 파산이 일어나 이 모든 것들이 민간 자본수익율을 1914년과 1945년 사이에 아주 낮은 수준으로 감소시켰습니다. 그뒤에 전쟁이 끝난 뒤 부분적으로는 재건 때문에 비정상적으로 높은 성장율이 있었습니다. 알다시피 독일, 프랑스, 일본에서 1950년과 1980년 사이에 5%의 성장율을 보였는데 주로 재건 때문이었고 또한 베이비 붐 효과에 따른 아주 큰 인구증가 때문입니다. 자, 분명 그것은 오래가지는 않고 최소한 인구 증가는 앞으로 감소할 것이고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상의 예상은 장기적 성장은 4 – 5%라기 보다는 1 – 2%에 가깝다는 것이죠. 이것을 보시면 최고의 예상치로서 세계 GDP 성장율과 자본수익율, 평균적인 자본수익율입니다. 보시다시피 인류역사의 대부분 동안 성장율은 아주 작았고 수익율보다 훨씬 낮았습니다. 그리고 20세기 동안 인구가 정말 증가하고 전쟁이 끝난 뒤에 더 높았고 재건 과정이 성장을 가져왔고 수익율과 작은 차이를 보였습니다. 여기서 저는 UN의 인구예측을 사용하는데 물론 확실하지 않습니다. 미래에 많은 아이들이 생길 수도 있고 성장율이 더 높을 수도 있겠지만 지금부터는 이것들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예상이고 이에 따르면 세계적인 성장은 감소하고 수익율과 차이는 증가할 것입니다.

12:37 자, 20세기 동안 일어난 또다른 특이한 사건은 제가 말했듯이 파괴, 자본의 과세로 이것은 세전 수익율입니다. 이것은 세후 수익율이고 파괴 이후에 그 때문에 파괴 이후 세후 평균수익율이 아주 오랫동안 성장율을 밑돌았습니다. 하지만 파괴가 없었다면 과세가 없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겠죠. 그래서 수익율과 성장 사이의 균형은 아주 많은 요소에 의존하며 이런 요소를 예측하기는 어렵습니다. 기술과 자본집약형 기법의 개발. 오늘날 경제에서 자본집약이 가장 심한 부문은 부동산 부문, 주택, 에너지 부문이지만 미래에는 수많은 부문에서 많은 로보트를 사용하게 되고 오늘날에 비해 총자산의 점유율이 더 커질 수도 있습니다. 자, 우리는 이것에서 아주 멀리 있고 지금부터 부동산 부문, 에너지 부문에서 일어나는 일은 총자산과 자산 분배에 대해서 훨씬 더 중요합니다.

13:44 또다른 중요한 문제는 자산 관리에서 규모의 효과, 금융의 복잡성, 금융의 자유화 등으로 대규모 자산의 경우 더 큰 수익율을 얻기가 쉬습니다. 이것은 특히 억만장자, 대규모의 자본기부에 강하게 나타납니다. 예를 하나 드리자면 이것은 1987-2013년 사이에 포브스지의 억만장자 순위에서 나왔는데 최상위 부자들은 물가상승을 윗돌며 해마다 6, 7%로 상승하는 반면 세계 평균 소득, 세계 평균 부는 해마다 2%만 상승했습니다. 여러분은 같은 결과를 큰 대학기금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최초 기금이 클수록 수익율도 큽니다.

14:33 이제 어떻게 할 수 있을까요? 첫째는 제가 생각하기로 경제의 투명성이 더 필요합니다. 우리는 세계적인 부의 역학을 아주 조금 알고 있고 국제적으로 은행 정보를 공유할 필요가 있습니다. 금융 자신의 국제적인 등록제도, 자산과세에 대한 협력도 필요합니다. 자산과세에 적은 세율을 적용해도 정보를 만들 수 있고 그래서 우리가 관찰한 실상에 정책을 적용해갈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까지는 조세피난처에 대항한 싸움과 정보의 자동공유가 우리를 이방향으로 가게 합니다. 이제 부를 재분배하는 다른 방법이 있는데 사용해 볼 수 있습니다. 물가 상승이죠. 세법을 고치는 것보다 돈을 찍어내는게 훨씬 쉽기에 매력적입니다. 하지만 때로 돈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릅니다. 이게 문제입니다. 강제 몰수도 아주 매력적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지나치게 부를 가졌다고 느끼면 강제 몰수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부의 역학을 조정하는데 아주 효율적인 방법은 아닙니다. 전쟁은 훨씬 덜 효율적인 방법이고 그래서 저는 누진과세를 선호합니다. 하지만 물론 역사는 (웃음) 역사는 스스로 최선책을 만들어 이런 모든 것들이 합쳐져 관여하겠죠.

15:45 감사합니다.

15:47 (박수)

15:49 브루노: 토마 피케티. 감사합니다.

15:54 토마, 2 – 3가지 질문을 하고 싶군요. 데이터를 잘 사용한게 놀랍지만 기본적으로 당신이 제안하는 것은 부의 집중이 늘어나는 것은 자본주의가 갖는 자연스런 성향인데 그대로 내버려둔다면 시스템 자체를 위협할지도 모르니까 당신이 제안하는 것은 우리가 방금 본 것인 누진과세등을 포함해서 부를 재분배하는 정책을 만들 필요가 있다는 것이죠. 현재의 정치 상황에서 그런 것들이 얼마나 현실적입니까? 그것들이 정책으로 실시될 것 같습니까?

16:29 토마: 글쎄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면 소득, 부와 과세의 역사는 놀라움으로 가득합니다. 저는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또는 일어나지 않을 것인가를 안다고 해도 크게 놀라지 않습니다. 1세기 전에 많은 사람들이 누진소득세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거라고 말했지만 그렇게 되었죠. 심지어 5년 전에는 많은 사람들이 은행 비밀주의는 스위스에서 영원할거라고 말했지만 스위스는 세계의 다른 나라에 비해 너무 큰 힘을 가졌다고 봤고 그러다가 갑자기 스위스 은행에 미국이 경제제제를 가했고 큰 변화가 일어났죠. 지금 우리는 경제의 투명성을 향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정치적으로 잘 조절하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미국과 EU가 조약을 맺으면 세계 GDP의 절반이 해당되고 경제의 투명성을 개선하는데 세계 GDP의 절반으로 충분하지 않다면 다국적 기업의 이익에 최소한의 과세를 부과하는 건 어떨까요? 이런 것들은 기술적으로 어렵지않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이런 질문에 보다 실용적으로 접근하고 경제의 불투명성으로 이득을 얻는 사람들에게 적당한 제재를 한다면 개선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7:45 브루노: 당신의 관점에 반대하는 주장의 하나는 경제적 불평등은 자본주의의 모습일뿐만 아니라 실제로 그 엔진 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그래서 불평등을 낮추려고 조치를 하면 그와 동시에 성장을 낮추게 되죠. 그에 대해서 어떻게 답하겠습니까?

18:00 토마: 예, 불평등은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불평등은 어느 정도 혁신과 성장에 실제로 도움이 됩니다. 문제는 어느 정도인가이죠. 불평등이 너무 극단으로 가면 성장에 쓸모가 없게 되고 나빠질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시간이 흐름에 따라 불평등이 훨씬 더 가속화되고 유동성이 낮아지니까요. 예를 들면, 우리가 19세기에서 1차 세계 대전까지 거의 모든 유럽 국가에서 겪었던 부의 집중은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부의 집중은 비극적인 사건과 정치 변화의 조합으로 파괴되었고 이것은 성장을 막지는 못했습니다. 또한 극단적인 불평등은 민주주의 기관에 나쁠 수 있습니다. 정치적인 목소리에 아주 불평등한 접근을 만든다면 말이죠. 미국에서 민간자금의 영향력은 지금 우려할 상황입니다. 그래서 1차 세계 대전 이전의 불평등과 같은 그런 극단으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습니다. 중산층이 국부를 적절하게 점유하는 것은 성장에 나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실제로 공평성과 효율성에 모두 도움이 됩니다.

19:13 브루노: 제가 초반에 당신이 쓴 책이 비판되었다고 말했습니다. 당신의 데이터 일부가 비판받았습니다. 데이터의 선택이 비판받았습니다. 당신의 입장을 설명하려고 데이터를 선별했다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답하겠습니까?

19:25 토니: 자, 이 책이 토론에 자극을 주게 되어서 아주 좋습니다. 그런 목적도 있습니다. 보세요. 제가 모든 데이터를 자세한 계산과 함께 모두 온라인에 올린 이유는 우리가 이것에 관해서 열리고 투명한 토론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우려점에 대해 하나씩 대답을 했습니다. 제가 오늘 이책을 다시 쓴다면 저는 실제로 이렇게 결론내릴 겁니다. 부의 불평등 상승은 특히 미국에서 제가 책에서 보고한 것보다 실제로 더 높습니다. 사에즈와 주크먼이 한 최근의 연구는 새로운 데이터를 보여주는데 책을 쓸 때는 없었지만 미국에서 부의 집중은 제가 책을 썼을 때보다 더 많이 상승했습니다. 앞으로 다른 데이터도 나오겠죠. 일부는 다른 방향으로 갈테구요. 보세요. 우리는 거의 매주 세계 최고 소득 데이터베이스를 새롭게 올리고 있고 앞으로 계속 그렇게 할 것입니다. 특히 발전도상국에 관해서도 말이죠. 이 데이터를 모으는 과정에 참여하고 싶은 모든 분을 환영합니다. 사실 부의 역학에 관해 투명성이 충분하지 않다는데 저도 동의를 하고 더 나은 데이터를 갖는 좋은 방법은 적은 세율로 자산 과세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이렇게 중요한 진화에 동의하고 우리가 관찰한 실상에 정책을 적용할 수 있습니다. 과세는 지식의 원천이고 그게 지금 가장 필요합니다.

20:52 브루노: 토마 피케티, 고맙습니다.

20:54 감사합니다. 토마: 감사합니다. (박수)

변종(變種)

한동안 소식이 뜸하던 버지니아 촌동네에서 살고 있는 후배가 전화를 주었답니다.

언제나 목소리가 경쾌한 친구랍니다.

정초에 덕담을 나누고는 처음입니다. 한달동안 한국을 방문하고 돌아왔다는 인사였습니다.

763458_6거의 십년 만에 나선 고국방문길이었다고 합니다.

“야, 변해 변해 어떻게 그렇게 많이 변할 수가 있수? 정말 많이 변했습디다.”라며 이어진 변한 한국의 모습을 들었답니다.

물론 후배의 주관적 시각으로 본 변화겠지만 말입니다.

후배는 이야기 끝무렵에 이런 매듭을 지었답니다.

“형, 내 생각엔 말유, 종(種)이 변했더라고 종(種)이…. 변종(變種)이라니까!”

후배는 이 이민의땅에 정착하기 전 한국의 제법 유수한 언론사에서 일했답니다. 왈 기자출신이랍니다. 출입처도 제법 짱짱한 곳들을
돌다가 데스크에 앉을만 할 때 뜻한바(?) 있어 여기 주저 앉은 친구랍니다.

여기서는 반농사꾼으로 도닦고 살며 이제 은퇴를 저울질하고 있는 친구랍니다.

이번 방문길에서 옛직장 동료들을 비롯하여 정관계에 있는 친구들과 법조계 지인들을 두루 만나보았다고 합니다.

그의 말입니다.

“형, 우리도 더러운 짓 많이하고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요즘 좀 나간데는 애들 정말 더럽데, 부끄러운 줄 모르더라고. 우린 그래도 부끄러운 줄은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아주 다 대놓고야.  너무 뻔뻔해. 아무튼 변종이라니까!”

“형도 걔 알지. 그 중 좀 나은 애 말야! 걔가 그러더라고 자기도 아는데 방법이 없다고말이지.”

“우리네야 떠나와 사니까 안보면 그만이지만…. 거기 살았다면 술독에 빠졌거나 미쳤거나… 뭐 솔직하자면 그들처럼 살겠지? “

“여기서 종종  형 목소리나 듣고 삽시다.”

전화를 끊고 종일 먹먹한 느낌으로 보낸 하루랍니다.

후배때문인지 후배의 말 때문인지 뭔지모를 아픔으로 말입니다.

세월호 – 역사와 성서에게 묻다

신구약 성서에는 각기 전체 이야기에 큰 기둥이 되는 사건들이 하나씩있습니다.구약에서는 출애굽사건이요, 신약에서는 십자가 사건입니다. 출애굽사건은 해방에 대한 이야기이고, 십자가사건는 구원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을 신앙고백이라고 말합니다. 성서는 바로 신앙고백서이고 그 고백서의 핵심은 바로 해방과 구원 이야기다라는 전제를 바탕으로하면서 제 발제를 시작하겠습니다.

출애굽 또는 탈애굽이라는 해방사건이 노예들이었던 고대 히브리인들에게 있었던 역사적, 신앙적 경험이었던 것처럼, 우리 한민족에게는 70년 전에 일제 식민지에서 벗어난 해방의 역사적 경험이 있습니다. 피지배민족이라는 사슬에서 벗어난지 올해로 70년이 되었지만, 그 역사적 경험을 민족 공동체가 깊게 되새기는 시도는 아직도 여전히 부족하거나 오히려 되새기는 일이 금기시되는 지경에 있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1945년 해방이후 한반도에서는 무수한 사건 사고들이 이어져왔습니다. 이런 사건 사고들은 비단 한반도 남북에 국한되어 일어나는 것은 아니고 역사이래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인류공동체 겪어 온 경험들입니다.

다만 각 민족 또는 국가 공동체들이 자신들이 당한 사건이나 사고들을 어떻게 정리하고 넘어가느냐는 것은 각기 다릅니다.

오늘 저는 우리들의 경험들 곧 1945년 이래 한반도 남쪽에서 일어났던 사건 사고들을 아주 간략하게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여러 사건 사고들 가운데 자연재해 등의 천재 이런 것들은 제외하고 국가권력을 비롯한 공권력이 직간접적으로 연관되어 일어났던 굵직한 사건들을 몇가지 꺼내어 짚어보고자 합니다. 사건이나 사고는 연도순으로 짚어봅니다.

우선 제주 4.3사건을 들수 있겠습니다. 미군정 치하였던1948년 4월 3일부터 시작해서 대한민국정부 치하인1954년 9월 21일까지 제주도에서 일어났던 사건입니다. 이렇게 약 6년 동안 이어져온 제주 4.3사건 또는 제주항쟁에서 약 3만에서 8만명으로 추정되는 제주도민이 학살당한 사건입니다. 당시 제주도민 7-8명당 1명 꼴로 죽임을 당한 사건입니다.

대한민국 정부는이 사건 개시일로부터  약 55년이 지난 2003년 10월에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원수로서 처음으로 사과를 하고, 2005년에는 국가 차원에서 최초로 4.3사건에 대한 공식적인 사과를 했습니다. 그러나 지난해 총리후보였던 문창극이 4.3폭동이라고 규정하는 등 현 집권세력 및 동조세력들은 이 사건을 좌익 빨갱이들을 토벌한 사건으로 만들려고 여전히 애쓰고 있습니다.

다음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일어났던 보도연맹 학살 사건을 들수 있겠습니다. 국민보도연맹(정식 명칭은 국민보호선도연맹)은 남한 내 공산주의 세력 약화를 위해 과거 좌익에 몸담았다가 전향한 사람들을 가입시켜 만든 단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1949년에 이 단체를 만들면서 관료들이 실적을 높이기 위해 마구잡이 또는 강제로 양민들을 이 단체에 가입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러자 국가는 이 단체에 속한 사람들은 과거 전력 때문에 북에 동조할 염려가 있다면서 산골작이로 이들을 끌고가 무차별 학살을 자행합니다. 이 사건으로 학살당한 사람 수는 적게는 6만에서 많게는 60만에 이른다는 설들이 있는데, 대략 20만 추정설이 강한 설득력을 얻고 있습니다.

이 역시 노무현대통령이 2008년 1월 24일 울산 국민 보도연맹 사건을 비롯한 과거 국가권력의 불법 행위에 대해 포괄적으로 사과하였지만, “보도연맹”이라는 말 자체가 여전히 금기시되는 사회라는 것이 오늘의 솔직한 모습일 것입니다.

다음은 역시 전쟁 중에 일어났던 국민방위군 사건을 들 수 있겠습니다.

전쟁이 일어나고 한때 압록강까지 진출했던 국군과 유엔군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를 합니다. 이른바 1.4후퇴입니다. 이때 국가는 다시 적의 지배지역이 될 곳에 사는 장정들을 적들에게 뺏기지 않을 목적으로 만 17살 이상 40살 이하의 장정을 제2국민병에 편입한 뒤 제2국민병 중 학생이 아닌 자는 지원에 의해 국민방위군에 편입한다는 것을 골자로 한 ‘국민방위군 설치법안’을 만듭니다.

그리고 전국에서 해당 연령층에 있는 사내들을 징집합니다. 문제는 이들을 수용할 시설도 식량도 의복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동원된 장정들은 2인당 한명꼴로 가마니 한장을 지급받은 채 무조건 각자 알아서 부산에 집결하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한겨울 추위, 전쟁통에서, 제대로 먹지도 입지도 못한 이들 국민방위군 총수 50만명 가운데 약 20%의 10만명이 굶어죽거나 얼어죽은 사건입니다.

훗날 이 사건이 세상에 들어나면서 국회조사단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국민방위군을 위한 국가 예산 대부분인 당시돈 50-60억이 국민방위군 재정을 실질적으로 총괄한 부사령관 윤익헌 등 당시 국가 권력자들의 손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이렇게 죽어 간 사람들 가운데 정부가 인정한 사망자수는 꼴랑 331명입니다.

그리고1970년 4월 8일에 일어났던 와우아파트 붕괴사건과 이듬해인 1971년 8월 10일 전라도 광주가 아닌 경기도 광주에서 일어났던 광주대단지 대봉기사건입니다.

이 사건들은 개발독재 시절 국가권력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것들입니다.

1960대 서울은 경제성장으로 인해 전국에서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올라온 사람들로 인해 짧은 시간에 인구가 급격히 늘어났던 시절이었습니다. 늘어나는 인구에 비해 그들이 살 집들 곧 주택은 턱없이 모자랐습니다. 그러다보니 서울에는 하꼬방이라고 불렀던 무허가 판자집들이 넘쳐났습니다. 청계천 일대를 비롯하여 정동을 중심으로 한 신문로 일대 등 서울 곳곳에 하꼬방들이 즐비했습니다.

그즈음 당시 대통령 박정희는 “판자집 좀 정리해 보라”는 명령을 내리고, 블도저시장이라는 닉네임이 갖고 있던 그의 충복 김현옥 서울시장 은 이른바 시민아파트라는 새로운 주거공간과 신도시 건설에 앞장서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시민 또는 국민이라는 사람들에게 초점을 맞춘 건설사업이 아니라 권력자의 입맛에 맞는 사업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마구잡이 사업이었습니다.

당시 세워진 시민 아파트들 대부분이 서울에 있는 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그 이유를 설명하는 김현옥 당시 서울시장의 말은 이 사건들을 압축적으로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높은데 있어야 청와대에서 잘 보일 것 아니냐?”라는 말입니다.

6개월만에 세워진 5층 아파트가 완공된지 5개월만에 주저 앉았는데 나중에 조사해보니 철근 70개를 써야하는 기둥에 철근 5개를 썻다는 것이 밝혀졌답니다. 아무튼 이 사고로 33명이 죽고 40여명이 크게 다쳤답니다. 제 고향이 신촌이라 이 사건에 대해 할말이 많지만 일던 여기서 접고요.

광주대단지 봉기사건으로 넘어갑니다.

무허가 판자촌 해결에 봉착한 당시 박정희 정부는 일부 무허가 주택은 개량해서 허가 주택으로 양성화하고 나머지는 새로운 주택단지를 세워 무허가 주민들을 이주시킨다는 계획을 세우고 경기도 광주에 대단지 주거 공간을 만든다고 공표를 합니다.

주로 청계천과 서울역 부근에 거주하던 빈민층 10만여명에게 “다시는 서울에 돌아오지 않는다는 각서에 서명하면 광주에서 살 집을 마련해 준다”는 약속을 하고 이들을 경기도 광주로 이주시킵니다.

문제는 10만명이 이사를 한 광주에는 도로, 교통, 시장 등이 거의 전무한 상태였습니다. 좀 더 간단히 설명을 드리자면 떵 몇 평을 주고 여기서 살되 각자 알아서 살아라는  지경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휘발유를 부어 불을 붙인 사건이 일어납니다. 이주를 권유하면서 평당 당시 돈 200원에 주기로 한 땅을 8000원에서 16000원씩을 내라고 국가 공권력이 강제한 것입니다. 국가의 사기질에 불이 붙었습니다. 자그마치 약속보다 40배에서 80배를 요구한 것입니다.

대봉기가 일어났습니다. 약 6만여명이 시위를 하면서 경찰 차량을 포함한 약 22대의 차량에 불을 지르는 등 대규모 항거가 일어납니다. 이들이 “서울로…”라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당시 서울시장 양택식이 사과하고  이들의 요구를 다 들어 주기로 하고 사흘만에  이 봉기는 막을 내립니다.

그러나 이 사건의 주동자 22명은 “폭동을 일으킨 주범들”로 낙인 찍히고 맙니다.

이 사건은 이후에 일어난 부마항쟁, 광주항쟁 등 민중항쟁의 한 표본이 되기도 하는데 현재 많은 진보인사들 가운데도 이 사건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리고 1980년 5월 18일 광주항쟁이 일어납니다. 아니 일어난 게 아니라 일으킵니다, 누가 국가권력이. 이 부븐은 제가 건너 뜁니다.

자, 다음은 성수대교 붕괴 사건과 삼풍백화점 사건입니다. 이게 어떻게 국가 권력과 상관이 있느냐고 물으신다면 1994년 10월 21일 서울시간 아침 7시 48분경에 일어났던 성수대교 붕괴사건은 전세계사에서 보기드문  안전불감증에 걸린  국가권력을 대변하는 사건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듬해인 1995년 6월 29일에 일어난 단군 이래 최대의 참사라고 일컬어지는 삼풍백화점 붕괴 사건 역시 이에 맞닿아 있습니다.

이 두 사건 이후 실시된 정부의 안전 평가 실시 결과를 보겠습니다. 정부의 발표입니다.

  1. 전체 고층 건물의 1/7(약 15%)은 개축이 필요한 사태이다.
  2. 전체 건물의 80%는 크게 수리할 부분이 있다
  3. 한국내 전체 건물의 2%만이 안전한 상태이다.

1995년 지금으로부터 20년 전에 있었던  진단입니다.

그리고 이제 세월호입니다.

세월호 사건은 해방후 겪었던 모든 사건들을 축약해서 드러낸 사건입니다.

2014년 4월 16일 대한민국 진도 서해앞바다 에 배가 가라 앉았고 이내 탑승했던 모든 사람들이 바로 구출되었다는 뉴스에서부터, 건국이래 최대의 구조 작업이 펼쳐지고 있다는 뉴스가 이어졌지만 단 하나의 생명체가 구출되었다는 보도는 없었습니다.

이제껏 되돌아보았던 사건들의 공통점입니다. 국가권력과 공권력이 주도했거나 책임과 의무를 방기했기 때문에 일어났던 사건들입니다. 그리고 결코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왜 그랬지?”라고 묻는 사람들은 불순분자, 좌빨, 종북 등등으로 불온의 낙인을 찍어 버립니다. 그리고 국민, 시민들에게 그 사건을 빨리 잊어버리라고 종용합니다.

2015년 오늘까지 자그마치 70년을 이어져온 것입니다. 역사를 되새겨 곱씹을 줄 모르는 공동체의 아픔입니다.

이제 다시 성서로 돌아갑니다.

저는 해방과 구원이라고 말씀드렸고, 그것은 신앙적 고백이라고 정의했습니다.

해방과 구원의주인공은 누구입니까? 신이라고요? 아닙니다. 바로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 지금 노예인 상태, 억눌린 상태, 억압받은 상태 바로 우리말로 이야기하자면 한을 품은 상태에 놓인 사람이 바로 주인공입니다.

바로 성서가 말하는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이 가난한 사람들에 정의는 시대에 따라 많이 달라집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 강단에서 이 가난한 자들에 대한 황당한 정의들이 난무하는 뉴스들을 보곤합니다. 실제로 가난한 자들이란 바로 부자들이라는 논리입니다. 부자들이 누리는 부와 권력 때문에 사람들에게 까닭없이 지탄받고 소외되고 미움을 받기 때문에 그들이야말로 진짜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황당하다고요?

저는 어제 한국의 경향신문에서 “국민들이 박근혜 대통령을 역사의 피해자가 되게 하고 있다.”라고 시작되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이 말은 새누리당 한 중진의원이 한 말이랍니다. 바로 부자가 가난한 사람이다라고 우기는 한 전형입니다.

해방은 노예, 피압박, 억압, 굴종 등의 상태에서 풀려나오는 것입니다. 구원은 죄의 상태 곧 죄인에서 자유인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는 이렇게 해방과 구원을 바라는 사람들을 일컬어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때 예수가 말한 가난한 사람들이란 바로 그들이 처한 물질적, 도덕적, 정신적 그리고 무엇보다 사회정치적 상황에서 가진자, 권력자와 그에 기생하는 사람들로부터 경멸받고, 손가락질 받고, 불온시 당하면서도 그것을 당연한 일로 받아드리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교육자이자, 철학자이며 사회운동가였던 파울로 프레이리는 이렇게 억눌리고, 불온시 당하며 그것이 당연한 일로 받아드리며 사는 사람들에게 삶의 희망을 내세 곧 죽음 이후의 세상에다 촛점을 맞우는 종교를 강력히 비판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이 스스로 해방되고 구원받는 바로 한풀이하는 세상을 만들어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1960, 70년대 브라질과 남미 민중들이 스스로 께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대다수가 문맹자였던 농민과 빈민들에게 문해교육 곧 글을 깨우치는 교육에 전념했습니다.

혹자는 2015년 문맹률 0%에 가까운 한민족에게 파울로 프레이리가 무슨 뚱딴지냐고 하실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바로 이 지점입니다. 대한민국 국민들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흩어져 사는 한민족들의 문맹율은 0%에 수렴하고있지만 문해력, 곧 어떤 글을 이해하는 능력은 현재 OECD 국가들 중에 꼴지라는 것입니다.

자신, 또는 자기가 속한 집단이나 지역에게 유리하고, 편리한 것들만 이해하는 것입니다. 보고 듣기에 불편한 것들은 전혀 이해하려 하지 않습니다. 아주 간단하고 간편하게 불온으로 찍어 버리면 그만입니다. 분단 상황은 이들에게 아주 유용하고 중요한 도구가 됩니다.

권력자들은 이런 상황을 아주 적절히 이용합니다. 남북대화록을 마구 까댈 수 있었던 까닭이나, 앞뒤 논리가 맞지않고 심지어 허위사실까지 적시했던 헌법재판소의 정당해산 판결문을 다 까서 공개하는게 거림낌이 없는 만용들은 바로 읽지 않고, 듣지 않고, 이해하지 못하고, 아니 이해하지 않으려하는 민, 곧 국민, 시민, 민중의 속성을 잘 이용하는 권력자들의 횡포입니다.

이제 제 발제를 마치려합니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희망을 보아야합니다. 해방 이후 숱한 사건과 사고들을 겪어오면서, 피해자 가족들이 이렇게 끈질기게 자발적으로 가난의 상태에서 해방되고 구원 받고자 했던 전례가 없습니다. 바로 세월호 유가족 및 실종자 가족들이 지난 일년 동안 줄기차게 목청높게 외쳐온 진실규명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희망을 보아야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투쟁과 외침에 귀기울이고, 이해하려는 해외동포들의 연계작업 바로 우리들에게서 희망을 보아야합니다.

감사합니다.

자료 – 아베 일본 수상 미 상ㆍ하원 합동연설 전문

<희망의 동맹을 향해>

의장, 부통령, 상원의원, 하원의원 여러분, 외빈과 모든 분들, 1957년 6월 일본 총리로서 이 연단에 선 저의 할아버지 기시 노부스케는 다음과 같이 말하며 연설을 시작했습니다.

“일본이 세계의 자유주의국가와 연대하고 있는 것은 민주주의의 원칙과 이상을 확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후 58년 이번에는 상하양원합동회의에 일본 총리로서 처음 연설할 기회를 얻은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초청에 감사드립니다.

말씀 드리고 싶은 것은 많습니다. 그렇지만 ‘필리버스트(의사진행방해)’를 하려는 의도도 능력도 없습니다. 여러분을 앞에 두고 가슴 속을 오가는 것은 일본이 대사로 맞은 위대한 의회 동료들의 이름입니다.

마이크 맨스필드, 월터 먼데일, 톰 폴리 그리고 하워드 베이커. 민주주의의 빛나는 챔피언을 대사로 보내주신 것을 일본 국민을 대표해 감사드립니다. 캐롤라인 케네디 대사도 미국 민주주의의 전통을 몸으로 보여주시는 분입니다. 대사의 활약에 감사드립니다.

우리들이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대니얼 이노우에 상원의원이 여기에 오시지 못한 것입니다. 일본계 미국인의 영예와 그 성공을 온몸으로 상징하시는 분이셨습니다.

미국과

저 개인과 미국과의 만남은 캘리포니아에서 지낸 학생시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집에 살게 해준 것은 캐서린 델프랜시아 부인입니다. 남편을 잃은 부인이었습니다. 돌아가신 남편에 대해 그는 언제나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게리 쿠퍼 보다 남자다웠다구요”라고. 마음에서부터 그렇게 믿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청중석에 저의 아내 아키에가 있습니다. 그녀가 평소 저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는 일부러 묻지 않으려고 합니다. 델프랜시아 부인의 이탈리아 요리는 세계 제일입니다. 그녀는 밝은 성격과 친절함으로 많은 사람을 끌어당겼습니다. 그 사람들이 정말 다양했구요. “미국은 대단한 나라다.” 놀랐습니다.

뒤에 철강회사에 취직한 저는 뉴욕에서 근무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상하관계에 얽매이지 않는 실력제일주의. 지위나 나이차에 관계 없이 의견으로 다투고 올바른 관점이라면 주저 없이 채용한다. 이 문화에 중독된 때문인지, 결국 정치인이 된 뒤 대선배 정치인들에게서 아베는 건방지다는 말을 많이도 들었습니다.

미국민주주의와 일본

저의 이름은 “에이브”가 아닙니다. 미국 분에게서 가끔 그렇게 불리면 기분이 나쁘지는 않습니다.

민주정치의 기초를, 일본인은 근대화를 시작해 이 분, 게티스버그 연설의 유명한 한 대목에서 찾아왔기 때문입니다. 농민, 목수의 자식이 대통령이 될 수 있는 그런 나라가 있다는 것은 19세기 후반의 일본을 민주주의에 눈뜨게 만들었습니다.

일본에게 미국과의 만남은 즉 민주주의와의 조우였습니다. 만남은 150년 이상 전으로 거슬러올라가 세월을 지나오고 있습니다.

제2차대전 기념물

얼마 전에 저는 제2차대전 기념물이 있는 곳을 방문했습니다.

신전을 연상케하는 평온한 장소였습니다. 귀를 때린 것은 분수의, 물이 부서지는 소리뿐. 한쪽에 프리덤 워터라는 것이 있고 벽면에는 금색의 4,000개를 넘는 별이 심어져 있었습니다.

그 별 하나하나가 쓰러진 병사 100명분의 생명을 나타낸다고 들었을 때 저는 전율을 느꼈습니다.

금색의 별은 자유를 지킨 대가로서 자랑할 상징임에 틀림 없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런 일이 없었다면 행복한 인생을 보냈을 미국 젊은이의 고통과 슬픔이 깃들어 있습니다. 가족에 대한 사랑도.

진주만, 바탄 코레히도르, 산호해…. 기념물에 새겨진 전쟁터의 이름이 마음을 가로질러, 저는 미국 젊은이의 잃어버린 꿈, 미래를 생각했습니다.

역사라는 것은 정말 되돌릴 수 없는 가혹한 것입니다. 저는 깊은 회오(悔悟 deep repentance)를 가슴에 안고 잠시 그 자리에 서서 묵념을 올렸습니다.

친애하는 여러 벗들이시여, 일본과 일본국민을 대표해 지난 전쟁에 쓰러진 미국의 여러분들의 영혼에 깊이 머리 숙여 절을 올립니다. 영원한 애도를 올립니다.

과거의 적, 오늘의

여러분, 지금 청중석에 로런스 스노든 해병대 중장이 앉아계십니다.

70년 전 2월 23세의 해병대 대위로 중대를 이끌고 이오지마에 상륙한 분입니다.

최근에 중장은 이오지마에서 열린 미일합동위령제에 자주 참석하셨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오지마에는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간 적이 없고 간 것도 아니다. 그 엄숙한 목적은 쌍방의 전사자를 추도해 영예를 높이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한 분 더 중장의 옆에 있는 것은 신도 요시타카 의원. 과거 저의 내각에서 각료를 지낸 분입니다만 이 분의 할아버지야말로 그 용맹스러움이 지금도 전해지는 구리바야시 다다미치 대장ㆍ이오지마수비대 사령관이었습니다.

이것을 역사의 기적이라고 부르지 않는다면 무엇을 그렇게 불러야만 하겠습니까. 치열하게 싸운 적이 마음의 유대가 이어지는 친구가 되었습니다. 스노든 중장, 화해의 노력을 존경스럽게 생각합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미국과 전후 일본

전후 일본은 지난 대전에 대한 통절한 반성(deep remorse)을 가슴에 안고 새로 걷기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행동이 아시아 여러 국민에게 고통을 준 사실에서 눈을 돌려서는 안 됩니다. 이 점에 대한 생각은 역대 총리와 전혀 다른 것이 없습니다.

아시아의 발전에 최선을 다해 기여하고 지역의 평화와 번영을 위해 힘을 아껴서는 안 됩니다.

스스로 자신을 타이르며 걸어왔습니다. 그 발걸음을 저는 자랑으로 생각합니다.

초토화된 일본에 아이들이 마실 우유, 몸에 걸칠 스웨터가 매달 미국의 시민에게서 도착했습니다. 염소도 2,036마리가 왔습니다. 미국이 자국의 시장을 열어젖혀, 세계경제에 자유를 필요로 해 키워온 전략경제시스템에 따라 가장 이른 시기에 최대의 이익을 본 것은 일본입니다.

그리고 1980년대 이후 한국이, 대만이, 아세안(동남아국가연합) 각국이 드디어 중국이 일어섭니다.

이번에는 일본도, 자본과 기술을 헌신적으로 쏟아 그들의 성장을 뒷받침했습니다. 한편 미국에서 일본은 외국으로서는 2위, 영국 다음 숫자의 고용을 만들어냈습니다.

TPP

이렇게 미국이 이어서 일본이 키운 것은 번영입니다. 그리고 번영이야말로 평화의 못자리입니다.

일본과 미국이 이끌어 사정이 다른 아시아태평양 각국에 어떤 나라의 자의적인 생각에도 좌우되지 않는 공정하고 역동적이고 지속가능한 시장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는 태평양 시장에서 가혹한 노동이나 환경에 대한 부담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지적재산을 거저 얻을 수 있어서도 안 됩니다. 이를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대신 자유, 민주주의, 법의 지배, 우리들이 추구하는 공통의 가치를 세계에 확산시키고 뿌리내려가야 합니다.

그것이야말로 바로 환태평양경제협력체협정(TPP)이 하려는 것입니다.

게다가 TPP에는 단순한 경제적 이익을 넘어선 장기적인 안전보장상의 큰 의의가 있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경제규모에서 세계의 40%, 무역량에서 세계의 3분의 1을 점하는 하나의 원에, 우리들의 아이들이나 손자를 위해 영속적인 ‘평화와 번영의 지역’을 만들어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미일간의 협상은 출구가 이미 보이고 있습니다. 미국과 일본의 리더십으로 TPP를 함께 달성해갑시다.

강한 일본으로, 개혁만 있을

실은…. 지금이라서 말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20년도 더 전에 GATT(관세무역일반협정) 농업분야 협상 때입니다. 혈기방장한 젊은 의원이었던 저는 농업 개방에 반대하는 입장으로 농가의 대표와 함께 국회 앞에서 항의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 20년 일본 농업은 쇠퇴했습니다. 농민의 평균 연령은 10살이 더 높아져 지금은 66세를 넘었습니다. 일본의 농업은 기로에 있습니다. 살아 남으려면 지금 변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들은 오랫동안 계속 해온 농업정책의 대개혁에 마주 서있습니다.

60년이나 변하지 않고 온 농업협동조합의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겠습니다. 세계 표준에 따라 기업형 거버넌스를 강화하겠습니다. 의료, 에너지 등의 분야에서 바위와 같은 강고한 규제를 저 자신이 창끝이 되어 비집고 열어 왔습니다. 인구감소를 반전시키기 위해서는 무엇이라도 할 생각입니다. 여성에 힘을 실어 더 활약하도록 하기 위해 예로부터의 관습을 고치려고 하고 있습니다.

일본은 지금 ‘퀀텀 립(양자적 도약)’의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친애하는 상원, 하원의원 여러분 부디 일본에 와서 개혁의 정신과 속도를 되찾은 새로운 일본을 봐주십시오. 일본은 어떤 개혁으로부터도 도망가지 않습니다. 오로지 앞만을 보고 구조개혁을 추진하겠습니다. 그 길 이외에 길은 없습니다. 확신하고 있습니다.

전후세계의 평화와 일본의 선택

친애하는 동료 여러분, 전후세계의 평화와 안전은 미국의 리더십 없이는 있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되돌아볼 때 제가 마음으로부터 좋았다고 생각한 것은 과거 일본이 명확한 길을 선택했다는 것입니다.

그 길이야말로, 서두에 조부의 말에 있었던 것처럼 미국과 한 편이 되어 서방세계의 일원이 되는 선택 이외에는 없었습니다.

일본은 미국 그리고 뜻을 같이 하는 여러 민주주의국가와 함께 결국 냉전에서 승리했습니다. 그 길이 일본을 성장시켰고 번영시켰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길밖에 없습니다.

지역을 위한 동맹의 임무

우리들은 아시아태평양지역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미국의 ‘리밸런스(재균형)’를 지지합니다.

철두철미하게 지지한다는 것을 여기서 분명히 말하겠습니다.

일본은 호주, 인도와 전략적인 관계를 강화했습니다. 아세안 각국이나 한국과 다방면에 걸친 협력을 심화해왔습니다.

미일동맹을 기축으로 이들 동료가 더해지면 우리들의 지역은 한층 더 안정됩니다. 일본은 미래의 전략적 거점의 하나로 기대되는 괌기지 정비사업에 28억달러까지 자금협력을 실시하겠습니다.

아시아의 바다에 대해 제가 말하는 세 가지 원칙을 여기서 강조하고 싶습니다.

첫째, 국가가 무언가를 주장할 때는 국제법에 기초해서 할 것. 둘째, 무력이나 위협은 자기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사용하지 않을 것. 그리고 셋째로 분쟁의 해결은 어디까지나 평화적인 수단에 따를 것. 태평양에서 인도양에 걸친 넓은 바다를 자유롭게 법의 지배가 관철되는 평화의 바다로 만들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를 위해서도 미일동맹을 강화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우리들은 그 책임이 있습니다. 일본은 지금 안보법제를 충실하게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실현하는 날에 일본은 위기의 정도에 따라 빈틈없는 대응을 한층 더 잘 할 수 있게 됩니다.

그 법 정비에 따라 자위대와 미국의 협력관계가 강화되고 미일동맹은 한층 더 견고해집니다. 그것은 지역의 평화를 위해 확실한 억지력을 가져올 것입니다. 전후 처음 있는 대개혁입니다. 오는 여름까지 달성하겠습니다.

여기서 여러분에게 보고드릴 게 있습니다.

그저께 케리 국무장관, 카터 국방장관은 우리들의 기시다 외무장관, 나가타니 방위장관과 만나 협의를 했습니다.

지금 말씀 드린 법정비를 전제로 해서 미일이 가진 힘을 잘 모을 수 있도록 하는 체제가 만들어졌습니다. 한층 확실한 평화를 구축하기 위해 필요한 체제입니다.

그것은 바로 미일방위협력의 새 가이드라인일 수 밖에 없습니다.

어제 오바마 대통령과 저는 그 의의에 대해 서로 인식을 같이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은 진정으로 역사적인 문서에 합의한 것입니다.

일본이 들어올린 새로운 깃발

1990년 초 일본 자위대는 페르시아만에서 기뢰 제거 작업을 맡았습니다. 그 후 인도양에서는 테러리스트나 무기 거래를 차단하는 해상작전을 10년에 걸쳐 지원했습니다. 그 사이 5만명에 이르는 자위대원이 인도적인 지원이나 평화유지활동에 종사했습니다. 캄보디아, 골란고원, 이라크, 아이티와 남수단 같은 나라나 지역에서입니다.

이런 실적을 바탕으로 일본은 세계평화와 안전을 위해 지금까지 이상으로 책임을 다해가겠습니다.

그렇게 결의합니다. 그를 위해 필요한 법안의 통과를 오는 여름까지 반드시 실현하겠습니다.

국가안전보장에 더해 인간의 안전보장을 확실하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 일본의 변함 없는 신념입니다.

사람 한 명 한 명에게 교육의 기회를 보장하고 의료를 제공하고 자립할 기회를 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분쟁 속에서 언제나 상처 받는 것은 여성이었습니다. 우리들의 시대에서는 참으로 여성의 인권이 침해되지 않는 세상을 실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위대원이 쌓아온 실적과 원조 관계자들이 꾸준히 계속해온 노력, 그 양쪽의 축적은 지금 우리들에게 새로운 자기상을 부여해주었습니다. 이제 우리들이 들어올리는 깃발은 ‘국제협조주의에 바탕한 적극적평화주의’라는 깃발입니다.

반복하겠습니다. ‘국제협조주의에 바탕한 적극적평화주의’야말로 일본의 미래를 이끌고 나갈 깃발의 표시가 될 것입니다. 테러리스트, 전염병, 자연재해, 기후변동…. 미일동맹은 이런 새로운 문제에 함께 대처해나가는 시대를 맞았습니다.

미일동맹은 미국사 전체의 4분의 1 이상에 걸치는 기간 계속된 견고함과 깊은 신뢰와 우정으로 맺어진 동맹입니다.

자유세계 제1, 제2의 민주주의 대국을 맺는 동맹, 그 앞에 새롭게 이유를 붙이는 것 전혀 불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언제나 법의 지배, 인권 그리고 자유를 존중하고 가치관을 함께 하는 관계입니다.

미래를 향한 희망

아직 고등학생이었을 때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캐롤 킹의 곡에 저는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낙담했을 때, 곤란했을 때…. 눈을 감고 날 생각해. 저는 갑니다. 아무리 어두운 밤이더라도 밝혀주기 위해 당신 곁으로 갈게요.”

2011년 3월 11일 일본에 가장 어두운 밤이 왔습니다. 일본의 동북 지방을 지진과 쓰나미, 원전사고가 덮친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였습니다.

미군은 전례가 없는 규모로 구난작전을 전개해주었습니다.

참으로 많은 미국인 여러분이 동북의 아이들에게 지원의 손을 내밀어 주었습니다. 우리들은 친구가 있었습니다. 재난을 당한 사람들과 함께 눈물을 흘려주었습니다. 그리고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것을 전해주었습니다.

희망입니다.

미국이 세계에 전해준 가장 훌륭한 자산, 그것은 옛날에도 지금도 미래도 희망이었고, 희망이고, 희망이지 않으면 안 됩니다.

미국 국민을 대표하는 여러분. 우리들의 동맹을 ‘희망의 동맹’이라고 부릅시다.

미국과 일본, 힘을 합해 세계를 한층 더 좋은 곳으로 만들어가지 않겠습니까. 희망의 동맹. 함께 한다면 반드시 가능합니다.

감사합니다. abe

(영문)

<Toward an Alliance of Hope>

Mr. Speaker, Mr. Vice President, distinguished members of the Senate and the House, distinguished guests, ladies and gentlemen. Back in June, 1957, Nobusuke Kishi, my grandfather, standing right here, as Prime Minister of Japan, began his address, by saying, and I quote,

“It is because of our strong belief in democratic principles and ideals that Japan associates her self with the free nations of the world.”

58 years have passed. Today, I am honored to stand here as the first Japanese Prime Minister ever to address your joint meeting. I extend my heartfelt gratitude to you for inviting me.

I have lots of things to tell you. But I am here with no ability, nor the intention, … to filibuster.

As I stand in front of you today, the names of your distinguished colleagues that Japan welcomed as your ambassadors come back to me: the honorable Mike Mansfield, Walter Mondale, Tom Foley, and Howard Baker.

On behalf of the Japanese people, thank you so very much for sending us such shining champions of democracy.

Ambassador Caroline Kennedy also embodies the tradition of American democracy. Thank you so much, Ambassador Kennedy, for all the dynamic work you have done for all of us.

We all miss Senator Daniel Inouye, who symbolized the honor and achievements of Japanese-Americans.

America and I

Ladies and gentlemen, my first encounter with America goes back to my days as a student, when I spent a spell in California.

A lady named Catherine Del Francia let me live in her house.

She was a widow, and always spoke of her late husband saying, “You know, he was much more handsome than Gary Cooper.” She meant it. She really did.

 

In the gallery, you see, my wife, Akie, is there. I don’t dare ask what she says about me.

Mrs. Del Francia’s Italian cooking was simply out of this world. She was cheerful, and so kind, as to let lots and lots of people stop by at her house.

They were so perse. I was amazed and said to myself, “America is an awesome country.”

Later, I took a job at a steelmaker, and I was given the chance to work in New York.

Here in the U.S. rank and hierarchy are neither here nor there. People advance based on merit. When you discuss things you don’t pay much attention to who is junior or senior. You just choose the best idea, no matter who the idea was from.

This culture intoxicated me.

So much so, after I got elected as a member of the House, some of the old guard in my party would say, “hey, you’re so cheeky, Abe.”

American Democracy and Japan

As for my family name, it is not “Eighb.”

Some Americans do call me that every now and then, but I don’t take offense.

That’s because, ladies and gentlemen, the Japanese, ever since they started modernization, have seen the very foundation for democracy in that famous line in the Gettysburg Address.

The son of a farmer-carpenter can become the President… The fact that such a country existed woke up the Japanese of the late 19th century to democracy.

For Japan, our encounter with America was also our encounter with democracy. And that was more than 150 years ago, giving us a mature history together.

World War II Memorial

Before coming over here, I was at the World War II Memorial. It was a place of peace and calm that struck me as a sanctuary. The air was filled with the sound of water breaking in the fountains.

In one corner stands the Freedom Wall. More than 4,000 gold stars shine on the wall.

I gasped with surprise to hear that each star represents the lives of 100 fallen soldiers.

I believe those gold stars are a proud symbol of the sacrifices in defending freedom. But in those gold stars, we also find the pain, sorrow, and love for family of young Americans who otherwise would have lived happy lives.

Pearl Harbor, Bataan Corregidor, Coral Sea…. The battles engraved at the Memorial crossed my mind, and I reflected upon the lost dreams and lost futures of those young Americans.

History is harsh. What is done cannot be undone.

With deep repentance in my heart, I stood there in silent prayers for some time.

My dear friends, on behalf of Japan and the Japanese people, I offer with profound respect my eternal condolences to the souls of all American people that were lost during World War II.

Late Enemy, Present Friend

Ladies and gentlemen, in the gallery today is Lt. Gen. Lawrence Snowden.

Seventy years ago in February, he landed on Ioto, or the island of Iwo Jima, as a captain in command of a company. In recent years, General Snowden has often participated in the memorial services held jointly by Japan and the U.S. on Ioto.

He said, and I quote, “We didn’t and don’t go to Iwo Jima to celebrate victory, but for the solemn purpose to pay tribute to and honor those who lost their lives on both sides.”

Next to General Snowden sits Diet Member Yoshitaka Shindo, who is a former member of my Cabinet. His grandfather, General Tadamichi Kuribayashi, whose valor we remember even today, was the commander of the Japanese garrison during the Battle of Iwo Jima.

What should we call this, if not a miracle of history?

Enemies that had fought each other so fiercely have become friends bonded in spirit.

To General Snowden, I say that I pay tribute to your efforts for reconciliation. Thank you so very much.

America and Post-War Japan

Post war, we started out on our path bearing in mind feelings of deep remorse over the war. Our actions brought suffering to the peoples in Asian countries. We must not avert our eyes from that. I will uphold the views expressed by the previous prime ministers in this regard.

We must all the more contribute in every respect to the development of Asia. We must spare no effort in working for the peace and prosperity of the region.

Reminding ourselves of all that, we have come all this way. I am proud of this path we have taken.

70 years ago, Japan had been reduced to ashes.

Then came each and every month from the citizens of the United States gifts to Japan like milk for our children and warm sweaters, and even goats. Yes, from America, 2,036 goats came to Japan.

And it was Japan that received the biggest benefit from the very beginning by the post-war economic system that the U.S. had fostered by opening up its own market and calling for a liberal world economy.

Later on, from the 1980’s, we saw the rise of the Republic of Korea, Taiwan, the ASEAN countries, and before long, China as well.

This time, Japan too devotedly poured in capital and technologies to support their growths.

Meanwhile in the U.S., Japan created more employment than any other foreign nation but one, coming second only to the U.K.

TPP

In this way, prosperity was fostered first by the U.S., and second by Japan. And prosperity is nothing less than the seedbed for peace.

Involving countries in Asia-Pacific whose backgrounds vary, the U.S. and Japan must take the lead. We must take the lead to build a market?

that is fair, dynamic, sustainable, and is also free from the arbitrary intentions of any nation.

In the Pacific market, we cannot overlook sweat shops or burdens on the environment. Nor can we simply allow free riders on intellectual property.

No. Instead, we can spread our shared values around the world and have them take root: the rule of law, democracy, and freedom.?

That is exactly what the TPP is all about.

Furthermore, the TPP goes far beyond just economic benefits. It is also about our security. Long-term, its strategic value is awesome. We should never forget that.

The TPP covers an area that accounts for 40 per cent of the world economy, and one third of global trade. We must turn the area into a region for lasting peace and prosperity.

That is for the sake of our children and our children’s children. As for U.S.-Japan negotiations, the goal is near. Let us bring the TPP to a successful conclusion through our joint leadership.

Reforms for a Stronger Japan

As a matter of fact, I have something I can tell you now.

It was about 20 years ago. The GATT negotiations for agriculture were going on.

I was much younger, and like a ball of fire, and opposed to opening Japan’s agricultural market. I even joined farmers’ representatives in a rally in front of the Parliament.

However, Japan’s agriculture has gone into decline over these last 20 years. The average age of our farmers has gone up by 10 years and is now more than 66 years old.

Japan’s agriculture is at a crossroads. In order for it to survive, it has to change now.

We are bringing great reforms toward the agriculture policy that’s been in place for decades. We are also bringing sweeping reforms to our agricultural cooperatives that have not changed in 60 long years.

Corporate governance in Japan is now fully in line with global standards, because we made it stronger.

Rock-solid regulations are being broken in such sectors as medicine and energy. And I am the spearhead.

To turn around our depopulation, I am determined to do whatever it takes. We are changing some of our old habits to empower women so they can get more actively engaged in all walks of life.

In short, Japan is right in the middle of a quantum leap.

My dear members of the Congress, please do come and see the new Japan, where we have regained our spirit of reform and our sense of speed.

Japan will not run away from any reforms. We keep our eyes only on the road ahead and push forward with structural reforms.

That’s TINA: There Is No Alternative. And there is no doubt about it whatsoever.

Post War Peace and Japan’s Choice

My dear colleagues, the peace and security of the post-war world was not possible without American leadership.

Looking back, it makes me happy all the time that Japan of years past made the right decision.

As I told you at the outset, citing my grandfather, that decision was to choose a path.

That’s the path for Japan to ally itself with the U.S., and to go forward as a member of the Western world.

In the end, together with the U.S. and other like-minded democracies, we won the Cold War.

That’s the path that made Japan grow and prosper. And even today, there is no alternative.

The Alliance: its Mission for the Region

My dear colleagues, we support the “rebalancing” by the U.S. in order to enhance the peace and security of the Asia-Pacific region.

And I will state clearly. We will support the U.S. effort first, last, and throughout.

Japan has deepened its strategic relations with Australia and India. We are enhancing our cooperation across many fields with the countries of ASEAN and the Republic of Korea.

Adding those partners to the central pillar that is the U.S.-Japan alliance, our region will get stable remarkably more.

Now, Japan will provide up to 2.8 billion dollars in assistance to help improve U.S. bases in Guam, which will gain strategic significance even more in the future.

As regards the state of Asian waters, let me underscore here my three principles.

First, states shall make their claims based on international law.

Second, they shall not use force or coercion to drive their claims.

And third, to settle disputes, any disputes, they shall do so by peaceful means.

We must make the vast seas stretching from the Pacific to the Indian Oceans seas of peace and freedom, where all follow the rule of law.

For that very reason we must fortify the U.S.-Japan alliance. That is our responsibility.

Now, let me tell you.

In Japan we are working hard to enhance the legislative foundations for our security.

Once in place, Japan will be much more able to provide a seamless response for all levels of crisis.

 

These enhanced legislative foundations should make the cooperation between the U.S. military and Japan’s Self Defense Forces even stronger, and the alliance still more solid, providing credible deterrence for the peace in the region.?

This reform is the first of its kind and a sweeping one in our post-war history. We will achieve this by this coming summer.

Now, I have something to share with you.

The day before yesterday Secretaries Kerry and Carter met our Foreign Minister Kishida and Defense Minister Nakatani for consultations.

As a result, we now have a new framework. A framework to better put together the forces of the U.S. and Japan.

A framework that is in line with the legislative attempts going on in Japan.

That is what’s necessary to build peace, more reliable peace in the region. And that is namely the new Defense Cooperation Guidelines.

Yesterday, President Obama and I fully agreed on the significance of these Guidelines.

Ladies and gentlemen, we agreed on a document that is historic.

Japan’s New Banner

In the early 1990s, in the Persian Gulf Japan’s Self-Defense Forces swept away sea mines.

For 10 years in the Indian Ocean, Japanese Self-Defense Forces supported your operation to stop the flow of terrorists and arms.

Meanwhile in Cambodia, the Golan Heights, Iraq, Haiti, and South Sudan, members of our Self-Defense Forces provided humanitarian support and peace keeping operations. Their number amounts to 50,000.

Based on this track record, we are resolved to take yet more responsibility for the peace and stability in the world.

It is for that purpose we are determined to enact all necessary bills by this coming summer. And we will do exactly that.

We must make sure human security will be preserved in addition to national security. That’s our belief, firm and solid.

We must do our best so that every inpidual gets education, medical support, and an opportunity to rise to be self-reliant.

Armed conflicts have always made women suffer the most. In our age, we must realize the kind of world where finally women are free from human rights abuses.

Our servicemen and women have made substantial accomplishments. So have our aid workers who have worked so steadily.

Their combined sum has given us a new self-identity.

That’s why we now hold up high a new banner that is “proactive contribution to peace based on the principle of international cooperation.”

Let me repeat. “Proactive contribution to peace based on the principle of international cooperation” should lead Japan along its road for the future.

Problems we face include terrorism, infectious diseases, natural disasters and climate change.

The time has come for the U.S.-Japan alliance to face up to and jointly tackle those challenges that are new.

After all our alliance has lasted more than a quarter of the entire history of the United States.

It is an alliance that is sturdy, bound in trust and friendship, deep between us.

No new concept should ever be necessary for the alliance that connects us, the biggest and the second biggest democratic powers in the free world, in working together.

Always, it is an alliance that cherishes our shared values of the rule of law, respect for human rights and freedom.

Hope for the future

When I was young in high school and listened to the radio, there was a song that flew out and shook my heart.

It was a song by Carol King.

“When you’re down and troubled, …close your eyes and think of me, and I’ll be there to brighten up even your darkest night.”

And that day, March 11, 2011, a big quake, a tsunami, and a nuclear accident hit the northeastern part of Japan.

The darkest night fell upon Japan.

But it was then we saw the U.S. armed forces rushing to Japan to the rescue at a scale never seen or heard before.

Lots and lots of people from all corners of the U.S. extended the hand of assistance to the children in the disaster areas.

Yes, we’ve got a friend in you.

Together with the victims you shed tears. You gave us something, something very, very precious.

That was hope, hope for the future.

Ladies and gentlemen, the finest asset the U.S. has to give to the world was hope, is hope, will be, and must always be hope.

Distinguished representatives of the citizens of the United States, let us call the U.S.-Japan alliance, an alliance of hope.

Let the two of us, America and Japan, join our hands together and do our best to make the world a better, a much better, place to live.

Alliance of hope …. Together, we can make a difference.

Thank you so much.

참 나쁜 놈들 – 1

조선의 오보, 오도가 아닌 계획된 조작보도를 보며

지난 4일(한국시간) 자칭 일등신문인 조선일보는”해양수산부의 세월호 시행령을 철회하라고 주장하던 이석태 세월호 특조위원장 등 일부 특조위 위원들이 정부 안을 수용하기로 합의한 것으로 확인됐다”며 “오는 6일 시행령이 국무회의 의결을 거치면 특조위가 정식으로 출범하게 된다”는 보도를 하였습니다. 더하여 이 보도는”유족들과 지난 주말 대화를 거쳐 정부안을 받아들이기로 입장을 바꾼 것으로 알려졌다”고 덧붙였습니다.

제가 이 기사를 본 것은 포털 다음을 통해서였습니다. 아침에 습관으로 눈을 떠서 yahoo로는 미국 뉴스를 포탈 다음으로는 한국뉴스들의 제목들을 훑어본답니다.

조선일보라는 생각을 미처 못하고 “결국 이렇게 끌려가고 마나?”하는 생각으로 일터로  나갔답니다. 가게에서 아침에 해야할 일들을 마치고 다시 이에 대한 연관뉴스를 검색해 보았답니다.

같은 날 저녁(한국시간) 오마이뉴스에는 이런 제목의 뉴스가 올라와 있었습니다.

-이석태 “정부안수용?” <조선>의 오도… 개정안 낼 것- 이라는 제목이었습니다.

기사의 내용인즉 조선일보의 보도는 전혀 사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먼저 특조위원장인 이석태변호사는 “정부 시행령의 문제점을 설명해주긴 했으나, 유가족과 정부안을 수용하기로 협의한 적은 없다”고 잘라 말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이 보도는 <특조위도 이날 오후 5시 17분께 긴급 보도자료를 내고 “특조위 위원장을 비롯하여 특조위원들은 정부안을 수용하기로 합의한 적이 전혀 없다”며 “정부 시행령안이 국무회의를 통과하여 공포되면 시행령으로서의 효력은 발생하겠지만, 특조위는 더욱 강력하게 시행령 개정 운동을 펼쳐나갈 것”이라고 밝혔다.>고 전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글을 쓰고 있는 이 시간 온라인 조선일보에서는 해당 기사를 찾을 수가 없답니다. 그 신문에서 세월호에 대한 기사를 검색해보면 <’장관급 공무원’신분으로 광화문에서 농성하는 세월호 특조위원장…>, <세월호 시위주도 외부단체 ‘제2의 5.18… 100만 대군 만들어야> 등 매우 부정적 의미의 제목들을 단 기사들이 눈에 뜨인답니다.

자! 이쯤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조선일보의 최초보도인 “세월호 특조위가 정부안을 수용하기로 합의했고, 유가족들도 동의했다”는 사실이 오보일까?하는 것입니다. 단언컨대 이 보도는 미리 조선일보가 계산하고 던진 의도된 조작보도입니다.

조선일보 및 그들과 배포를 맞춰 협력관계로 기생하거나 공생하는 세력들은 이미 이 의도된 조작보도로 얻을 것은  다 얻었다고 생각하고 있을 것입니다. 늘 그래왔듯이 말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만드는 정보 소비자들에게 이미 최상의 뉴스를 제공한 것이고, 그들이 연출하는 의도는 백프로 성공한 것입니다.

조중동을 비롯한 종편방송들 나아가 그들과 얼기설기 이어진 망으로 엮여있는 각종 sns 및 카톡 등등의 정보 공유 수단으로만 뉴스를 접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합의와 동의”라는 말이 각인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그들의 머리속에는 “다 합의하고 동의해 놓고는… 하여간 돈에 환장한 사람들과 좌빨들 때문에…”라는 이제껏 자신들의 생각들이 옳았다는 확신만이 자리잡을 것입니다.

이렇게 조선일보 등에 속거나, 속여야만 생존 가능한 한인들의 숫자가 최소치로 잡아도 50%가 넘고… 많게는… 글쎄요? “자신의 삶에 불필요한 것들이 끼여드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 보고 느끼는 것에 불편한 것들이 싫은 사람들, 나하나 아니 조금 넓혀서 내 가족 먹고 살면 그만인 사람들”까지 합친다면 족히 80-90%는 되지 않을까요?

이쯤 다시 되돌려볼까요.

분명 조선일보는 의도된 거짓말을 “뉴스”라는 이름으로 내보냈습니다. 이걸 좋게말해 오보 또는 오도라고 점잖게 왈 진보라는 매체가 보도를 합니다.

단지 시간이 하루지났을 뿐인데 조선일보는 “언제 내가 그랬느냐?”며 슬그머니 다른 주머니를 풀어 놓습니다. 그리고 남는 것은 “다 합의하고 동의했데메?”라는 소리들 뿐입니다.

오늘 2015년 한인사회의 현실입니다.

pedagogy우리세대 이른바 운동권들의 필독서 가운데 파울로 프레이리의 페다고지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문맹률이 아주 높았던 1960-70년대 브라질 및 남미, 아프리카의 삶을 고민하던 파울로 프레이리가 세상에 던졌던 물음이자 해법이었습니다.

그의 물음과 해법이 문명의 2015년 바로 오늘, 문맹율 거의 0%에 육박하는 한인사회에 그대로 유효하다는 서글픈 생각들에 빠져있답니다.

정리대는데로다시 잇겠습니다.

역사(歷史)에 – 아베(安倍晋三)를 보며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미국 공식방문을 마치고 돌아갔습니다. 그는 이번 방문길에서 많은 것들을 얻고 돌아갔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미일 방위협력지침(가이드라인) 개정으로 미일동맹을 강화하고, 미국을 발판으로 하여 자위대의 영역을 전세계로 확대했다고 합니다.

반면에 국방예산 삭감으로 고민하던 미국은  일본의 경제와 군사력을 이용해 떠오르는 강국 중국을 견제할 수 있게 된 것에 반색하는 기조라고 합니다.

이런 미일 양국의 새로운 밀월에 질세라 중국과 러시아가 손잡고 합동 군사훈련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일본총리로서는 처음으로 미국 상하원 합동연설을 한 아베에게 쏠렸던 관심 가운데 하나였던 과거사 및 위안부 문제 등 과거 일본군국주의 행위에 대한 사죄는 없었습니다.

미일양국 모두 힘(미일동맹)과 돈(환태평양 경제 동반자 협정, TPP – Trans-Pacific Strategic Economic Partnership) 앞에서 만족한 모양새입니다.

70년 전 전범국가(戰犯國家)였던 일본이 당시 승전국이었던 미국을 발판삼아 세계 특히 동양의 주인공으로 나선 셈입니다.

아베를 중심으로한 미일중러에 대한 기사들을 보면서 그 강대국들 한복판에 있는 한반도 남북이 아린 모습으로 떠오릅니다.

이번 방문 길에서 아베는 미국 정계와 재계의 뜨거운 환대를 받았습니다. 미국의 이러한 환대를 보면서 일본이 패망한 전범국의 나락으로 떨어지기 딱 40여년 전에 일본찬가를 불렀던 미국인과 영국인의 글을 떠올립니다.

지난 반세기의 사건을 샅샅이 인식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다음 사실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즉 어떤 기독교국가라고  할지라도 일본만큼 과거의 오류를 선뜻 인정하고 온갖 문명의 기술에 대하여 가르침을 구하고 외교에 있어서 그렇게도 솔직하고  온건하며 전쟁에 있어서 그렇게도 기사적이고  인도적인 국가는 없을 것이다. – 동경제국대학 교수였던 영국인 Basil Hall Chamberlain이 쓴 책 <일본문물, Things Japanese,1905>에서

제국(帝國)은 변하였다. 서유렵인들이 300백년 걸려 이룩한 것을 일본은 30년 동안에 이룩하였다. 일본은 우리가 지금까지 유럽에 독특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여러가지 소질들 – 즉 조직을 만드는 힘, 세부에 대한 관심, 철저한 도야(陶冶), 위대하고도 원대한 목표를 향한 참을성 있는 노력 등 – 을 높은 수준으로 갖추고 있음을 실증하였다. – 미국신학자 George William Knox가 쓴 <동양의 정신, The spirit of the Orient, 1906)에서

“헤겔은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이나 인물은 두번 반복된다고 했다. 그러나 그가 빠뜨린 것이 있다. 첫번째는 비극으로, 두번째는 희극으로 반복된다.”는 유명한 마르크스의 말이 있습니다만 마르크스 역시 빠뜨린 것이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역사란 희비극 반복의 연속이다.”라는 생각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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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비록 여기 살아도…

지금으로부터 110년 전인 1905년 7월 27일 일본 도쿄에서 미국 육군성 (오늘날의 국방부) 장관인 윌리엄 테프트(William Howard Taft)와 일본수상 가쓰라 다로(桂太郞)는 오랜 시간 밀담을 나눕니다.

그 밀담이 공개된 것은 그로부터 약 20년이 흐른 뒤인 1924년의 일입니다.

이른바 가쓰라-데프트 조약(Taft–Katsura Agreement)입니다.

당시 가쓰라가 한 말 가운데 이런 말들이 있었습니다.

 “한국이 일본과 러시아가 벌인 전쟁의 직접적 원인이 됐다”

 “한국 문제의 완전한 해결이 전쟁의 논리적 결과이며, 이는 일본에 실로 중대한 문제”

  “만약 전쟁 이후에도 (아무런 조치 없이) 한국에 맡긴다면 한국은 또다시 다른 국가들과 협정이나 조약을 맺어 전쟁 이전과 같은 복잡한 상황을 재발시킬 것이므로 일본은 이러한 상황의 재발 가능성을 막기 위해 모종의 확실한(definite)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

1904년 에서 1905년 사이에 있었던 러시아와 일본과의 전쟁은 한국 때문에 일어난 것인데, 문제는 바로 한국에게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한국에게 외교권(주권)을 쥐어주면 또 다시 이런 전쟁이 일어날 수 있으니 이 참에 확실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한국을 일본의 식민지화하는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같은 해인1905년 11월 17일 대한제국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제국 주한 공사 하야시 곤스케가 상호 날인란 제2차 한일협약(第二次韓日協約) 곧 을사늑약(乙巳勒約)이 맺어지자 당시 세계에서 제일 먼저 한국과 외교적 관계를 단절한 나라는 바로 미국이었습니다.

IE001825061_STD그로부터 110년이 흐른 오늘날까지 미국과 일본 바라기로 사는 대한민국의 엘리트에게는 이번 아베 신조 일본 수상과 오바마 미국 대통령 행정부가 합의한 미일방위협력 지침이 쌍수를 들어 환영할만한 일일 터이고, 그 때나 지금이나 미일 양국은 대한민국 주권을 존중하는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 일이라고 거품을 물겠지만, 머지않은 날에 일본 자위대 제복을 입은 아이들이 명동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이 떠오르는 것이 비단 나 혼자뿐일까?라는 생각으로…

답답한 밤

볼티모아(Baltimore)는 제가 사는 곳에서 시속  70마일로 달려 한시간 조금 넘는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오늘 폭동이 일어났다는 뉴스가 실시간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지난해 미주리주 Ferguson 에서 일어났던 백인 경찰에 의한 흑인 소년 사살 사건 이후 계속되어온 유사 사건들 가운데 하나인 흑인청년 Freddie Gray 장례식이 있었던 오늘 오전, 장례식 이후의 일어난 항의 시위대들이 폭도로 변해 상가를 탈취하고 경찰 차량등을 불태우는폭동으로 번졌다는 소식입니다.

각종 온라인 뉴스들은 실시간 영상으로 이 사건을 보도하고 있습니다.

답답한 마음으로 실시간 영상들을 보면서 더 끔직한 뉴스가 눈에 들어왔답니다.

미국을 방문중인 일본 수상 아베 일행들과미 행정부가  1997년 미일 양국 사이에 맺었던   “미일 방위협력 지침(The defense cooperation agreement)” 에서 한층 강화된 새로운 협력지침 가이드라인에 상호합의했다는 소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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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 합의에 양국 모두 환영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미국군대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일본군(자위대)이 함께 갈 수 있고, 일본군(자위대)이 작전하는 곳은 미군이 지원할 수 있다는 내용이랍니다.

70년 전 전승국과 패전국 사이였던 두 적국들이 탄탄한 동맹관계가 되었음을 선포한 것입니다.

이차대전 이후 미국의 점령지였던 일본은 1950년 일어난 한국전쟁으로 인해 체결되고 발효되었다고 볼 수도 있는 1951년 이른바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 의거하여  미군 점령지역에서 벗어나 독립국가가 됩니다.

그리고 이후 일본은 미국의 영향 속에 스스로를 편입시키는 안보법 체계를 구축하면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리고 이제  패권에 힘이 딸리는 미국을 등에 업고 옛날의 영화를 다시 누리려 하고 있는 것입니다.

좀더 찬찬히 들여볼 일입니다만, 오늘의 뉴스를 보자니 남한은 일본과 미국에 북한은 중국에 가일층 종속으로 달려가고 있는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냥 답답한 밤입니다.

역사는 과거사가 아니라 미래사 – 헤리만의 교훈

미국방문길에 오른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오는 29일 미국 상하원에서 행할 연설에 많은 이들의 관심이 모여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종전 70주년을 맞으면서 적대적으로 승전국과 패전국 관계였던 미일 양국이 이제는 상호 돈독한 우방이 되어 만나는 행사에서 가장 주목을 받고 있는 관점은 바로 “과거사 문제” 입니다.

과거 제국주의 일본이 저지른 각종 만행을 인정하고 그 국가 행위에 대한 사죄와 사과를 기대하는 이들이 많겠지만 현재로선 그럴 가능성은 거의 없어보입니다.

한국과 중국이 제 아무리 목청을 높여도 미일 양국이 눈앞에 놓인 중국을 향한 동맹관계와 경제 동반자로써의 상호 이해관계 앞에서는 속수무책일 확률이 높기 때문입니다.

중국이야 자기나라의 이해와 아시아 종주국으로써 패권을 차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과거사 문제를 계속 꺼집어 내겠지만, 어정쩡한 것은 언제나 그렇듯 대한민국이 아닐까합니다.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방미 뉴스를 보면서, 미일 양국과 특히 대한민국을 생각하다가 떠오른 인물 한사람을 소개해 볼까합니다.

William_Averell_Harriman에버렐 헤리만(William Averell Harriman, 1891-1986)입니다. 그는 살아생전 미국 외교정책 전문가들 사이에서 “현자(賢者, The  Wise Men)”로 불리었던 사람입니다.

헤리만의 아버지는 조선과 만주의 철도건설을 도맡았던 대재벌이었고, 헤리만 자신은 투르먼(Truman) 대통령 아래에서 상무장관,  48대 뉴욕 주지사, 1952년과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후보로 나서기도 했었습니다.

그는 또한 은행업을 비롯한 투자, 부동산업 등에서도 성공을 거둔 뛰어난 사업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저를 비롯한 동시대의 한국인들에게 그의 이름이 낯설지 않은 까닭은 그가 베트남전쟁 말기에 미국과 월맹 사이에 있었던 휴전협정에서 미국 수석대표를 지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1969년, 그가  휴전협정 수석 대표직을 사임하는 기자회견장에서 남긴 말은  2015년 오늘 미일 양국의 지도자들은 물론이거니와 대한민국인들이 한번 곱씹어도 좋은 명언입니다.

그의 말입니다.

<월맹(북베트남)이나 월남(남베트남)의 민족해방전선의 지도자들 가운데는  과거 프랑스 식민에 식민권력에 앞장섰거나 협력한 인물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 대부분은 식민정권의 권력이나 행정 그리고 군대에 대항해서 민족해방과 독립투쟁을 평생 동안 해온 사람들이다.

그와는 반대로 월남(남베트남)의 정부, 군대, 종교, 사회, 문화 등 각 분야의 지도층 인물들은 해방후 국토가 분단되기 이전에 프랑스 식민권력의 관리였거나 군대의 장교 또는 하사관으로서 자기 동포와 적대적 입장에 서있던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남북베트남의 대중들이 어느 쪽을 더 존경하고 신뢰할 것인가? 어느 쪽 지도자들이 진정으로 베트남의 재중과 민족을 위해 행동할 것인가? 이에대한 답변은 자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는 “베트남 전쟁은 이미 진 전쟁”이라고 선언합니다.

역사란 과거사와 오늘과 미래사가 단절되어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과거사가 곧 현재사이자 미래사가 된다는 충고입니다.

아베 신조의 방미 행보를 보면서 곱씹어도 좋을 헤리만의 교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