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여행을 끝내며- 황금시대

부일이와 정일이 아버님 최창한장로님께서는 까까머리 고등학생이었던 우리들에게 ‘Golden Age(황금시대)’라는 말을 즐겨 하셨다. 십대 나이야 말로 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멋진 시절이므로 알차게 보내야만 한다는 당신의 속 깊은 충고를 담아 내신 말씀이었다. 허긴 그 나이에 그 충고가 귀에 들어오기나 했었겠냐마는.

이제 노년의 초입에 이르러 대현교회 최장로님의 충언의 말씀을 내 것으로 만들어 본다. 바야흐로 내가 서 있는 오늘이야말로 나에겐 ‘Golden Age(황금시대)’가 아닐런지.

여느 해 추수감사절이면 나는 음식하기에 바빴었다. 허나 오늘은 어릴 적 추석 같은 명절이면 어머니가 차려 준 명절상 즐기며 놀 듯, 아이들이 차려 준 감사절 만찬을 즐겼다. 사라진 부모님 자리를 손주뻘 아이들이 채워주었고, 우리 세대는 이제 손 움직이지 않는 처지가 되었다.

허나 혼자 있어 좋은 시간들, 혼자 있어 즐기는 시간들, 혼자 있어 감사한 시간들을 누리는 오늘이야말로 진정 삶의  ‘Golden Age(황금시대)’가 아닐런지.

이 황금시대를 구가할 수 있는 힘의 첫째 원천은 아내다. 돌이켜보면 역사 이래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전쟁회수가 천 번을 넘는다고 한다만, 우리 내외가 이제껏 싸운 회수를 따진다면 족히 그 몇 곱을 될 터. 그 숱한 전투속에 쌓인 것은 미움이 아니라 적과 아군을 넘어선 굳건한 전우애, 바로 그 사랑.

그 사랑의 결실인 우리들의 가족들. 이번 여행 중 두 처남 내외가 베풀어준 가족 사랑에 대한 기쁨과 감사도 꼭 기억해야 할 추억이다.

아내와 연을 맺어 여기까지 오게 된 길목 길목들을 따라 쫓다 보면 그 끝에 서 있는 담장이 넝쿨 뒤덮인 곳, 바로 신촌 대현교회이다.

이젠 넉넉한 맏형이 되어 계신 송영길 형님, 교회의 기둥이 된 김석수, 박성규, 안희주, 김난애 장로님들, 늙막에 들어선 우리들에게 믿음이 함께 하는 새로운 길을 바라 보라고 새 길눈 열어 주신 홍길복 목사님, 그리고 차리기 결코 쉽지 않은 잔치자리 기꺼이 마련해 주신  대현교회 최영태 목사님과 당회원 여러분들께 머리 숙여 속 깊은 감사를.

언제나 꿈속에서 들어도 반가운 병덕, 종석, 종민, 용철, 응복, 성식, 경애, 경자, 영숙, 경희 그 아스라히 언제나 그리운 얼굴들, 멀리 남쪽 진주에서 올라와 긴 이야기 나누지도 못하고 헤어진 병훈이…. 그저 만나 고마움으로.

길환이, 영환이…

그리고 규복이. 그저 끝없는 고마움으로.

우리 모두의 황금시대를 위하여!

2023년 가을에.

시간여행 -5, 함께

옛 벗들과 함께 나섰던 강화 나들이는 우연히 따라 나서게 된 까닭도 있거니와 이번 여행의 마지막 일정이기도 하여 많은 여정(旅情)을 쌓은 하룻길이었다.

그 하룻길 나들이 길잡이를 자처한 김환조목사와 강화 지킴이 송가감리교회 고재석목사님과 그의 부인이자 동역자인 우리들의 옛 친구 손명희사모 그리고 아직도 예전 십대 청춘을 구가하며 사는 듯한 차용철형님 그 모두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어린 시절 교회생활을 함께 했던 친구들이 몇 십 년이 흐른 뒤, 노년의 초입에 들어선 마당에 우연치 않게 만나 하룻길 나들이를 함께 하는 경험을 나눈다는 것은 그리 흔치 않은 일일 터. 바로 그날 우리들이 누린 은총이었다.

강화에 들어서서 첫 번 째 치룬 행사는 <강화 기독교 역사 기념관> 방문이었는데, 기념관 안내와 전시장 해설을 맡아 주신 이의 지나친 친절로 인해 ‘아뿔사! 혹시 오늘 하루는…’하는 염려가 그득히 밀려 왔었다. 허나 고재석목사님으로 하여 내 염려는 다행히 기우에 그쳤다. 지나친 친절은 기념관에서 끝났음으로.

기념관에서 내가 담고 온 두가지 <신학지남 (神學指南)>과 , <죽산(竹山) 조봉암>이었다. 한국 초기 기독교 역사 속, 당시 일천했던 신학 토대의 발판을 자처했던 <신학지남 (神學指南)>의 정신을 오늘의 한국교회와 이민교회가 잇고 있을까?하는 물음을 담고 왔거니와, 조봉암선생이 성공회 신자였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는 것, 그이에 대한 설명이 너무나도 자의적 또는 작의적이었다는 안내자에 대한 아쉬움도 함께.

역사 기념관 빡센(?) 공부를 마치고 이어진 송가 감리교회 고재석 목사님과 오랜 시간을 한국여성의 전화와 함께 사람 평등 운동과 사모 사역을 함께 해 온 손연희사모의 그 날 그들이 말하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느낌으로 담으며 즐긴 강화 여행이었다.   

멋진 카페와 진한 국물의 꽃게탕과 오래 전 추억들을 추려 꾸민 곳에서 이어진 끝 모를 지난 이야기와 오늘을 살아가는 이야기들로 이어진 하루였다.

내게 아주 특별한 경험, 바로 김환조목사의 축도였다. 환조는 늘 밝고 활기 찬 후배인데,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야말로 배꼽이 빠질 정도로 웃음이 이어지게 마련이었다. 허나 그 웃음 뒷끝은 늘 쌉쌀하게 무언가 꼭 곱씹어야 마땅한 뒷끝이 남아 있곤 했다. 그가 목사가 되었고 오늘도 여전히 환조답게 목회를 이어가고 있다.  그날 송가 감리교회에서 엣 친구들과 송가 감리교회를 위해 드린 비나리는 내게 진한 감동이 되어 남아 있다. 김환조목사님을 위하여!

그리고 속히 유물이 되어야 할 망향대 또는 전망대 이야기.

그야말로 손에 잡힐 듯 가까운 땅 북한과 멀리 남쪽 일산의 아파트 촌을 번갈아 바라보며 드려본 기도, 우연히 어느날 문득 여기서 저기까지 이어진 산들이 하나가 되기를… 아님, 내 믿음의 언어인 그의 섭리로.

이번 시간여행길에서 만난 산들은 그저 아름답고 부드러웠다. 한국의 산세이다. 거의 팔십년 가깝도록 아직도 꿈 같은 일이다만, 백두에서 한라까지 그 아름답고 부드러운 산들이 이어 달리는 세상을 아마…

내 어릴 적 대현교회 친구들 몇몇은 할머니 또는 아버지 따라 이북 사투리를 쓰곤 했다. 이즈음도 아내는 종종 “엄마 친척들 만나러 한 번 갈 수 있으려나?’하는 꿈 같은 이야기를 하곤 한다.

이쯤 이제 노회한 노인이 된 나는 기도를 바꾼다.  “정말 산들이 이어지는 게 어려운 일이라면, 반도의 모든 산들에게 벙커와 교통호 없는고요한 평화를…”

그렇게 함께.

시간여행 – 4, 변화에

변화는 늘 놀라운 것이지만, 내가 적응하지 못할 때는 그저 불편함 뿐이다. 그런 불편함이 자꾸 쌓인다는 것은 내가 늙어간다는 표징일게다. 하여 애를 쓰는 편이다. 변화로 인한 불편함을 최소화 하려는 노력을 최대화 시키는 애씀인데, 그런 모습에 스스로 ‘쯔쯔쯔’ 혀 찰 때가 자꾸 늘어간다. 그럴 때면 스스로 위로하는 한마디, ‘내 노력이 모자란 것이 아니라, 변화가 너무 빨라서…’

서울은 내가 쉽게 적응하기엔 지나치게 많이 변했다. 십 삼 년 만에 나섰던 나들이였는데, 그 변화의 폭은 내 가늠 이상이어서 불편함 보다 먼저 다가선 것은 놀라움이었다.

무엇보다 먼저 다가선 놀라움은 사람들이 건네는 말소리들 크기와 억양이 매우 작고 부드러워진 변화에서 왔다. 지하철이나 버스, 식당이나 거리에서 사람들의 말소리는 분명 내 기억 속 서울사람들의 그것이 아니었다. 이웃에 대한 배려에서 온 듯한 이런 변화는 실로 큰 놀라움이었다. 솔직히 뉴스 속에서 만났던 서울소식들은 매우 거칠게 소리 높은 소음처럼 다가오곤 했었는데, 실제 사람들의 말소리들은 부드럽고 온유했다. 그게 참 좋았다.

지하철 친절한 안내 방송도 좋았는데, ‘발빠짐 주의’나 ‘나빠짐 주의’, ‘하차입니다.’라는 경고 등은 외국어처럼 매우 낯설었다. (불편함, 놀라움이라는 말을 쓰다보니 생각난…)

그 보다 큰 놀라움을 느낀 것은 어디를 가나 잘 꾸며진 조경(造景)을 바라보면서 였다. 얼핏 쉽게 잔상으로 남게 되는 풍경들, 일테면 아파트 공화국이니 콘크리트 공화국이니 하는 말들을 잘 치장해 주는 놀라운 변화는 내겐 실로 경이롭게 다가왔다. 놀랍게 변한 종로통 뒷골목 직장인들의 점심시간 풍경과 그들의 여유로운 걸음걸이를 만끽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잘 꾸민 조경 때문이었다. 돌아와 내 가게 손님들에게 자랑할 요량으로  조경과 자연 사진들을 제법 많이 찍었다.  

또 다른 놀라움은 딱 두 시간 오분이 걸린 서울과 속초 간의 거리였다. 아주 오래 전 고등학교 친구들하고 북평해수욕장에서 놀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그 때 청량리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밤새워 거의 열시간 넘게 달려 닿던 곳이었다. 터널 예순 세 개로 이루워 졌다는 서울 속초간 도로를 달린 일은 내게 완벽한 시간여행 경험이었다. 아내와 단 둘이 맞았던 속도 앞바다 해돋이 풍경은 우리들의 내일로 품고.

그 동창들을 거의 오십 년 만에 만났다. 졸업사진을 떠올리며 옛 이야기를 나눈 몇 몇은 졸업 후 처음이었으니 만 오십 이년이다. 동창회를 이끄는 친구가 말하길, 졸업 동기들 중 1/4이 먼저 이 세상길 떳고, 1/4 정도는 연락 두절, 1/4 정도는 연락은 닿지만 모임에는 나오지 않고, 나머지 1/4이 이런저런 모임으로 연과 끈을 맺고 늦은 시간들을 함께 걷고 있단다.

실로 오십 년만의 변화인데, 또 다른 놀라움 하나는 바로 모두가 별로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함께 한 동창들 중 몇몇은 그 옛날 북평 해수욕장에서 같이 놀았던 친구들이었는데, 그들은 물론 다른 친구들도 떠들고 즐기는 동안 변하지 않은 옛모습 그대로 둘러 앉았었다.

그랬다. 해 아래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만, 분명 변하지 않는 것들도 있다.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으련다. 바로 나다. 내 마음에 따라.

느긋하게 맞는 추수감사절 아침이다. 해마다 Thanksgiving, 이 맘 때면 읊조려보는 시 한 편이 있다. 언제부터 인지 잘 모르겠으나, 이젠 철들 때도 되지 않았나는 생각이 들었던 내 나이 환갑 전후일게다. Shel Silverstein이 읊은 관점(Point Of View)의 첫째 연이다.

<추수감사절 만찬은 슬프고 고맙지 않다/ 성탄절 만찬은 어둡고 슬프다/ 잠시 생각을 멈추고/ 칠면조의 관점으로 만찬 식탁을 바라본다면.

Thanksgiving dinner’s sad and thankless/ Christmas dinner’s dark and blue/ When you stop and try to see it/ From the turkey’s point of view.>

2013년 추수감사절 아침, 돌아볼수록 그저 감사한 일 하나 꼽는다. 살아오며 보아 온 숱한 변화들 또는 기억조차 못하는 나의 변화들 나아가 옹고집으로 변치 않는 모습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관점의 잣대가 비록 어설프고 부끄러움 투성이지만 예수라는 잣대, 성서라는 잣대라는 믿음을 잊지 않았다는 감사이다.

큰고개(대현) 언덕 옛 친구들이 일깨워 준 감사이다.

<시간여행 – 3, 희망에>

겨울시간은 해가 너무 짧다. 오랜만에 늦잠을 즐기며 느긋하게 시작한 탓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하루 해가 너무 짧다. 여행 전, 미처 다 심지 못했던 히야신스, 무스카리, 알리움 등 구근들을 묻고,  뜰을 가득 덮은 낙엽들을 거두고 난 뒤, 아버지와 함께 잠시 시간을 보내고 온 것 뿐인데 벌써 어두워졌다. 그 짧은 하루, 봄을 기다리며 가꿀 수 있는 오늘에 감사하며.

신촌 대현교회 고등부 3학년 때 일이다. 따져보니 52년 전 일이다. 그 때 우리들을 가르쳐 주신 선생님들 가운데 박대위, 이열모 선생님이 계셨다. 두 분 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계셨다. 이열모 선생님은 우리 고3  남학생들을 위해 이런 기도를 하셨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아이들이 장차 이 나라의 꿈입니다. 헌데 지금은 고3입니다. 열심히 공부할 때 입니다. 이 녀석들이 공부하다가 쓸데없이 바지 속으로 손 넣고 장난치는 유혹을 이기게 해주시고….”

박대위선생님은 제2한강교와 절두산이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양옥에 살고 계셨는데, 당시 우리에게 지나치듯 이런 말씀을 던져 주셨었다. “집에 앉아 멋진 한강 풍경을 내려다 보다가 정신이 번쩍 들 때가 있단다. 과연 내가 지금 여기에서 이런 사치를 누리며 사는 일이 옳은 것인가?하는 물음 때문이지!”

그 시절 참 좋은 선생님들 덕에 크게 엇나가지 않고 이 나이에 여기서 요만큼 이나마 살고 있는 것에 그저 감사다.

박대위 선생님은 내 대학시설 총장이셨던 박대선총장의 동생이셨다.

그리고 내 친구이자 동지인 김규복목사. 대학시절, 박대선총장 사퇴운동부터 박정희 유신 철폐, 전두환 타도 투쟁에 이르기까지 나보다 늘 한발 앞서서 나아갔던 벗, 김규복 목사를 독수리다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이민 보따리를 꾸리고 있을 때 그는 대전 대화동에서 빈민과 노동자들을 위한 교회를 세웠었다.

독수리다방은 이름만 이어져 올 뿐, 옛 모습이라곤 다방안 사진 속에만 남아 있었다.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이 불편한 걸음으로 다방 안으로 들어섰다. 만 36년 만에 만난 내 오랜 벗 김규복목사였다. 그는 오래전에 겪은 고문 후유증으로 파킨슨병을 앓고 있었다.

우린 짧은 시간 손을 꼭 맞잡았고, 부둥켜 안았을 뿐 긴 말은 나누지 못했다. 그와 그의 아내는 오늘도 옛 모습 그대로, 비록 많이 변한 세상일지라도 여전히 바닥 삶을 살아가는 이들과 함께 하시는 신과 함께 일 하고 있다.

살며 이런 벗 하나 사귀고 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가 누린 은총은 족하다.

목사님 다음에 장로님 이야기.

어느 날 우리 내외는 ‘이것 한 번 먹고 가자!’라는 계획을 세웠었다.  그 저녁에  박성규 장로내외가 초대해 준 저녁식사 자리는 바로 우리가 먹고 싶어했던 그 요리 전문점이었다. 아무렴! 장로님 기도발은 나 같은 얼치기 예수쟁이 보다 세긴 센 모양이었다.

교회 후배이자 대학 후배인 박장로- 일년 터울 후배라긴 보단 그저 친구일 뿐- 그와 함께 공유했던 사람들과 시간들을 되새기며 삶의 아쉬움과 감사함을 조근조근 나눈 참 좋은 시간이었다. 두 내외에게 감사를.

옛날 동쪽 끝인 워커힐 언덕에서  옛날 서쪽 끝 신촌까지 오가며 아직도 한결 같은 모습으로 교회를 지키고 있는 그의 모습에 경외를.

이번 여행에서 꼭 가 보고, 아니 꼭 가 보아야 할 곳이 있었다. 세 곳이었는데 모두 서울 시청 부근 이었다.

그렇게 시청앞으로 가는 지하철을 기다리다 보게 된 시 한 편이었다.

지금 내가 사는 곳에서 함께 삶의 길을 걷고 있는 친구들이 서울 나들이를 하면 반드시 찾게 되는 세 곳이다. 바로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의 추모와 기억 공간 그리고 윤석열로 대변되는 사람을 계층화 시키는 세력 타도를 외치는 현장이었다.

그렇게 찾아 나선 시청앞 광장에서 나는 절망했었다. 옛 시청 건물인 서울도서관 옥상과 아내와의 추억이 쌓여 있는 정동 세실극장 옥상에서 바라본 토요일 오후 시청앞 광장 풍경은 대한민국 정치 뉴스처럼 절망적이었다.

광장 북쪽 광화문 방면을 점령한 내 또래 이른바 태극기 부대와 남쪽 남대문을 향해 모인 무리들 모두 확성기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 어마어마한 소음은 내겐 너무 낯설었다.

확성기로는 절대 역사를 바꾸지 못한다. 웅웅거리는 거대한 침묵의 함성 소리, 바로 지축을 흔드는 민중의 함성이라야 새 세상 열리는 법이다.

멀리 갈 것 없다. 80년 서울역 광장, 87년 시청앞 광장, 2016년 청계광장. 내가 아는 한 모두 확성기가 아니었다. 아직 갈 길 먼 듯 하다만….

허나 나는 그저 희망적이다.

내 친구 김규복과 박성규 같은 굳건한 바닥 단단히 다져 하나하나 반듯하게 세워 이어가려는 이제 칠십 노인들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하여 희망으로.

바라건대 더불어 함께 사랑하며 살아가는 세상을 향한 희망으로.

이 희망! 내가 내 고향 대현교회에서 배운 믿음이다.

시간여행 – 2, 우연(偶然) 또는…

돌아볼수록 신기한 일이다. 치밀한 계획은 커녕 어설픈 밑그림 조차 없이 엄벙덤벙 여기까지 왔건만, 지금 내가 누리는 삶은 온통 감사해야 마땅하다. 오늘 가게 손님 한분이 내게 건넨 말이다. “당신 얼굴이 참 편해 보여요. 휴가를 통해 넉넉한 쉼을 즐기신 것 같아요.”

  1. 고모님을 뵙고 온 지 겨우 한 나절 정도 시간이 지났을 새벽이었다. 사촌동생이 ‘어머님께서 떠나셨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튿날 아침 고모님을 모신 빈소를 찾았다.

문상을 마친 우리 내외에게 동생이 말했다. “저쪽으로 가시죠”. 동생을 쫓아 따라간 곳은 이웃한 빈소였다. 그곳엔 동생의 부인 제수씨가 상복을 입고 서 있었다.

그랬다. 사촌 동생 내외는 몇 시간 사이로 함께 떠나신 ‘어머니와 장모’ 또는 ‘어머니와 시어머니’의 장례를 함께 치루고 있었다.

2. 여행을 떠나기 전 우리 내외는 얼기설기 어설픈 계획을 세웠었다. 만나야 할 사람들, 가보고 싶은 곳들, 먹고 싶은 것들을 나열한 그저 낙서 비슷한 계획이었다. 어찌어찌 그 어설픈 계획대로 시간을 보냈다만, 전혀 이루지 못한 것들도 있거니와 반면에 전혀 계획치 않았던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곤지암 제법 깊은 산골에서 지낸 하루 밤은 전혀 계획치 않았던 우연이었다, 허나 그 우연이 우리 내외에게 베푼 여유로운 쉼은 오래 기억될 듯하다.

아내가 친구를 만나러 곤지암을 간다고 했다. 늦은 시간이었다. 나는 곤지암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 찾아보니 우리들이 묵었던 숙소에서 제법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전철을 타고 늦은 시간에 아내 혼자 거기까지 오가는 것이 무리다 싶어 함께 가기로 했다. 그렇게 나섰던 길인데 하루 밤을 거기에 묵게 되었다.

잠자리에 매우 예민한 내가 숙박업소 이외에 누군가의 집에서 하루 밤 묵은 일은 거의 몇 십년 만의 일이었다. 그 밤의 편안함과 이튿날 아침 누렸던 그 상큼함은 오래 간직될 듯. 아내의 오랜 친구 내외에게 깊은 감사를. 우연하게 누린 곤지암의 하루 밤에.

3. 내겐 나이 터울이 크게 뜬 사촌동생이 있다. 계획에 없던 일이었는데 그 동생을 만났다. 처음 만난 동생의 남편 곧 내 매제는 내 여행길 피로를 싹 가시게 하는 참 좋은 인상이었다. 동생 내외와 초등학교를 다니는 두 조카들을 보며 나는 마냥 사람 좋은 웃음을 닫을 수 없었다. 동생 내외가 우리 내외 서울 구경을 시켜주다 내려준 곳이 명동입구였다. 아하! 그렇게 우연치 않게 옛 젊음의 거리 명동을 아내와 팔짱 끼고 걸었다. 참으로 우연한 일이었다. 몇 십년 만에.

4. 따지고보니 신촌 대현교회 홍목사님을 비롯한 옛 친구들을  만나게 된 일도 그저 우연이었다. 우리 내외가 계획한 일은 하나도 없었다. 어찌어찌 하다보니, 이 나이에  누린 큰 복이었다. 그야말로 우연하게.

돌아볼수록 신기한 일 투성이다. 어찌보면 삶은 우연의 연속이다.

돌아와 생각하니 이젠 그 우연들의 뜻을 새겨야 마땅할 나이가 되었다.

어쩜 이제야 믿음의 첫걸음 내딛고 있는 게 아닐런지.

우연 또는…

은총에

<아우슈비츠에 갇힌 유대인 집단이 신을 재판에 회부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들은 신을 잔혹함과 배신으로 기소했다. – 중략- 그들은 신의 유죄를 선고하고 사형을 선고했다. 랍비가 신의 유죄와 사형 선고문을 발표했다. 그런 후 눈을 들어 재판이 끝났다고 말했다. “이제 저녁기도 시간입니다.”> – 카렌 암스트롱의 <신의 역사>에서


노동절은 공식적으로 여름이 끝나는 날. 그 공식적이라는 말을 비웃듯 따가운 햇살이 내려 쪼이는 기록적 더위가 이어진 연휴였다.

여러날 찔끔찔끔 책장을 넘기던 카렌 암스트롱의 <신의 역사> 정독를 마치며 연휴를 보냈다. <축의 시대>, <마음의 진보>에 이어 읽은 그녀의 세 번째 책인데 이번에도 진하게 남는 말 한마디 ‘compassion’이다. 역자는 이를 ‘동정심’이라고 했다만 카렌이 그 말에 담고 있는 의도는 사랑, 자비, 공감, 연민 등등의 말을 녹여내어 쓴 말 같다.

읽다가 혼자 실없이 낄낄거린 대목이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제 머릿속 생각의 크기만한 신을 믿고 산다.”는 이젠 굳어진 내 고집을 더욱 공고히 한 것이었는데 바로 이 대목이다. -<아일랜드의 사도 성 패트릭의 유명한 기도문 구절. ‘신이 내 머리와 내 이해 안에 있게 하소서.”>


올해 팔순인 카렌 암스트롱과 비슷한 연배의 내 선생이자 신앙의 선배이며 내 삶 속에서 만난 숱한 인연들 가운데 묵직한 끈으로 이어진 이가 있다. 호주에 계신 홍길복목사님이다. 무엇보다 사십 년 함께 살아 온 아내와의 연을 맺게 된 탓(또는 덕?)의 빌미를 제공한 이가 그였으며, 비록 그와 함께 했던 시간은 참으로 짧았지만 그로 인해 내 삶에서 가장 행복했던 신앙의 선생들을 만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이 들어 가며 꾸는 꿈이 하나 있었다. 사오 십 년 전, 아내와 내 친구들이 십대 이십대 였던 나이에 삼십 대 청년이었던 홍목사의 설교를 들었던 시절을 다시 재현해 보는 꿈이었다. 그저 단지 꿈일 뿐이었다. 다들 그렇겠지만 나 또한 그 때의 신과는 사뭇 다른 신과 이야기하며 지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그는 호주에 나는 미국 시골에 아내와 내 친구들 역시 고향 신촌을 다 떠나 있을 터. 그저 꾸어 보는 꿈이었다. 이른바 헛 꿈.

아직은 그런대로 정정하게 누워 계신다만 아흔 일곱 아버지 덕에 먼 길 나들이 나설 엄두가 나질 않았는데 이런저런 연유로 서울 나들이를 작심한 것은 몇 주 전일이었다. 그리고 아마 그 이틀 후 였을 게다. 홍목사의 서울 나들이에 맞추어 옛날 그 친구들이 고향 신촌 그 교회에서 함께 예배를 드린다는 소식을 접했다. 아뿔사! 우리 내외 일정과는 맞지 않았다. 목사님과 우리 내외 일정이 겹치는 시간은 단 이틀 뿐이었다. 목사님께 아쉬움을 전하는 소식을 드리자 그가 전해 온 말이었다. “이틀 중 시간 조율해서 서울서 한번 만납시다.어쩜 이제 부터의 만남이란 늘 마지막일지도 모르니까 말이죠.”

그리고 오늘 아침 아직 신촌을 지키고 있는 옛 친구가 전해 온 말. ‘교회와 여러 삶의 사정으로 인해 홍목사님을 모시고 드리는 예배는 일정이 바뀌었다.’는 소식. 그 바뀐 일정은 바로 목사님과 우리 내외 일정이 겹치는 이틀 중 하루.


해가 따갑고 뜨거워도 여름은 이미 아니다. 가을 볕이다. 그 볕에 이틀 간 널어 둔 호박이 정말 잘 말랐다.

  • 작고 마른 모습이야 타고 난 것, 그게 내 삶을 버텨 준 또 하나의 힘이었는 지도 모를 일이고. 그래도 머리카락은 까매서 그 또한 누리는 복이다 했는데… 엊저녁 느긋한 마음으로 거울 앞에 서니 며칠 사이(?) 반백이로세.
  • 제 아무리 백세 시대 운운해도 이젠 신의 은총을 곱씹어야 할 나이.  ‘compassion’과 함께. 무릇 “사랑, 자비, 공감, 연민, 동정심”이란 함(행위)이 뒤따라야 한다는 …

바른 늙음을 위하여. 은총에.

호랑이를 위하여

오랜만에 소설을 읽었다. 제법 두꺼운 장편소설이었는데, 어제 오후에 첫 장을 넘긴 후 오늘 아침 책장을 덮기까지 손을 놓지 못하고 단숨에 읽어 내린 <작은 땅의 야수들, 영문 원제는 Beasts of a Little Land>이다.

소설의 저자 김주혜(Juhea Kim)는 내 아들 녀석보다 어린 이민 1.5세란다.

책 말미에 남긴 작가의 말이다. <… 아무런 인정이나 대가를 받지도, 기대하지도 않고 오직 조국의 독립에 일조한 나의 할아버지. 그리고 그와 같은 무명의 독립운동가들이 이 책의 시초다.>

소설은 1917년 부터  1964년에 이르는 세월, 일제강점기와 해방 후 박정희 집권 초기에 이르기 까지 혹독한 시절을 야수처럼 살아낸 주인공들의 이야기들을 평양, 경성, 상해, 제주 등을 배경으로 그려내고 있다.

내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겪어 낸 세월이었고, 1964년이면 내가 신문을 읽을 만큼 머리가 굵어졌던 때이기도 하니 오늘에 이르기까지 가히 백 년 넘는 세월을 소설과 함께 하루 밤에 겪어낸 기분이었다.

주인공 옥희의 독백을 통해 만나게 되는 젊은 작가의 삶과 죽음에 대한 시각은 늙막에 내가 겨우 붙든 것이어서 부끄러웠다.

<어쩌면 사람은, 그가 살아 있다고 생각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때에야 비로소 죽는 것인지도 모른다.>

<삶은 견딜 만한 것이다. 시간이 모든 것을 잊게 해주기 때문에. 그래도 삶은 살아 볼 만한 것이다. 사랑이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주기 때문에.>

소설을 관통하고 있는 거대한 배경은 바로 호랑이다. 작가가 그리고 있는 호랑이의 모습이다.

<우리가 호랑이를 볼 수 있는 건 호랑이가 기꺼이 제 모습을 드러내고 싶어 할 때 뿐이고, 그 이전에는 어림도 없는 소리죠.>

<상처입은 호랑이는 건강한 호랑이보다 훨씬 더 위험하다고요. 호랑이들은 영물이라 복수심을 품을 줄 압니다. 불의와 정의를 기억할 만큼 영리하고, 공격을 받아 다치면 상대를 죽일 기세로 덤빈답니다>

작가가 단 한번도 드러내지 않은 말이다만. 이야기를 읽는 내내 ‘민중’이라는 말이 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거니와 바로 호랑이야 말로 민중의 모습이 아닐런지.

비록 한반도에서 더는 볼 수 없다는 호랑이이지만, 정의와 불의를 가늠하고,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에서는 더할 나위없이 온순하지만, 불의를 향해서는 누구도 막지 못할 용맹을 자랑하는 민중의 모습으로 온 세계에 퍼져 사는 사람들에게서 작가는 호랑이를 만난 것은 아닐까?

젊은 작가 김주혜를 통해 나는 역사의 진보를 또 다시 굳게 믿는다.

<나는 마침내 바다와 하나였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 주인공 옥희의 말이다.

  • 제주 앞 바다 – 한반도의 열린 미래의 문이 되어야 마땅할 물을 2023년 오늘 더럽히고 있는 놈들에게 한 소리 지르고자  오후에 필라델피아 아트 뮤지엄(Philadelphia Museum of Art) 계단에 서서 외치다. “Stop! Fukushima nuclear wastewater”
  • 그 계단에 서서 또 외치다. “윤석열 탄핵! 김건희 구속!” – ‘참 가지 가지 한다.’는 욕도 아까운 백년 묵은 적폐들을 향하여!
  • 필라 하늘을 가로질러, 태평양과 대서양을 거쳐 한반도에 이르기까지 뜻을 같이 하는 모든 민중들이 포효하는 호랑이 큰 울음으로.

다시 오월에

저마다 잊지 못하고 기억하는 날들이 있을게다. 자신과 가족들의 기념일부터 자신만의 특별한 경험을 잊지 못하는 날들, 아니면 이런저런 공휴일들까지 평범한 여느 날과는 다른 날들 말이다.

내 경우엔 나와 가족들의 기념일들을 제외하고 남는 특별한 날들로는 오래된 햇수로 따져 , 7월 4일, 10월 17일, 10월 26일, 5월 18일, 4월 16일 그리고 10월 29일 등이다.

1972년 7월 4일, 대학 일학년 첫 방학을 맞은 나는 아버지의 고향인 경기도 용인군 포곡면 유운리 작은 할아버지 댁에서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통해 이른바 7.4 남북 공동선언 소식을 들었었다. 그 무렵부터 내 아버지의 고향에서 전통은 사라지고, 돈(돈錢과 돈豚)이 모두를 삼켜 버렸다.

그해 10월 17일은 박정희 유신이 선포된 날로 당시 대학 일학년 이었던 내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던 날이었다. 학교 앞은 바리케이드를 치고 기관단총을 앞세운 군인들이 차지하고 있었고 그렇게 내 대학 일년이 끝나던 날이었다.

몇 해가 지난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밀실에서 죽고 내 스무 시절 젊은 인생은 또 한번 바뀌었다. 다니던 학교에서 쫓겨나 다소 엉뚱하게 신학 공부를 하며 작은 출판사를 하고 있던 나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 대학 마지막 학년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80년 5월 18일,  다시 학교로 부터 도망하는 세월이 시작되었고, 그 잊지 못할 오월항쟁과 참사를 건너 건너 그 당시 이른바 유언비어를 통해 들으며 몸을 떨었고, 이내 잊지 못할 치도곤을 당했었다.

한참 후 환갑 지난 나이가 된 2014년 4월 16일, 삼백명이 넘는 시퍼렇게 젊은 아이들이 산 채로 바다에 수장되는 모습을 멀리 이 미국 땅에서 생중계로 바라보는 충격을 겪었다.

지난해 10월 29일은 아무리 생각해도 믿을 수가 없다. 이태원은 내 어릴 적 추억들이 묻혀 있는 곳이다. 한남동 외가와 막내 이모의 신혼방 이태원은 외사촌들과 뛰며 놀던 곳이었다. 참사가 일어난 골목의 면적과 그 안에 있었던 사람들의 숫자는 내가 도저히 이해 불가능한 것이었다.

하여 내가 잊지 못하는 날들이 되었다.

따져보니 내가 한국에서 살았던 날들보다 여기서 산 날들이 훨씬 많다만, 내가 잊지 못하는 날들은 모두 한국에서 있었던 날들이다. 어쩌랴! 점점 더 그리 되는 것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점점 더 이해 불가능한 사회로 빠져드는 듯한 이즈음의 한국사회를 바로 알아보고자 몇 권 읽고 있는 책들 중 하나, 검사 진혜원이 쓴 책 <진실과 정의에 대한 성찰>에서 건진 한마디.

진혜원 역시 인용한 말이다만, ”종교란 인간이 자신의 본성을 반영하는 방법이고, 신은 인간의 자기의식일 뿐”이라는 사회학자 루트비히 포이어마흐의 깨달음.

원컨대 조금씩 조금씩, 한걸음 한걸음씩 만이라도 사람다운 본성을 찾는 믿음과 이념과 시대정신을 갈구하는 사회로 나아가기를, 이왕에 만드는 신이라면 이웃과 더불어 함께 사는 신상을 만드는 사회가 되어지기를 비는 마음으로.

다시 맞는 5월 18일에.

기다림

먹고 사는 일과 좋아서 하는 일을 차이는 사뭇 크다. 먹고 사는 일에서 오는 피로는 쉽게 오는 법이지만, 좋아서 하는 일일 땐 그 느낌이 더디거니와 때론 그 피로 조차 좋을 때도 있다.

날 좋은 휴일, 땀 흘리며 뜰 일을 하는 날이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한 주 내내 가게 일에 치어 ‘아이고 좀 쉬자!’ 했다가도, 쉬는 날 잔디와 잡풀 깍고 꽃나무 가꾸며 땀 흘리리다 보면 이 나이에 내가 누리는 행복에 그저 감사가 넘쳐나곤 한다.

수선화는 이미 지고 튜립도 끝물이다. 글라디올러스 등 여름 화초들이 꽃망울을 머금고 있다. 어느새 봄이 기울고 여름으로 들어서고 있다.

꽃망울을 한참 들여다보다 떠 오른 말,  ‘기다림’ 이었다.

그리고 보니 ‘미세스 킴 라이락’이라는 이름에 홀려 심었던 라이락 꽃이 올해 활짝 피었다. 아내는 자기 이름에 자신의 성씨인 ‘이(Lee)’을 미들 네임으로 쓴다만, 통상 ‘미세스 킴’으로 불리운다. 삼년 만에 핀 꽃인데 따져보면 큰 기다림도 아니다. 우리들이 살아 온 세월에 비한다면.

산다는 것은 무릇 기다림의 연속 아닐까?

저녁 나절 텔방 친구들의 소식, <친일파 매국노 윤석열 탄핵 촉구>모임 안내였다.  화초나 꽃나무나 텃밭 채마 가꾸는 일은 늘 잡초와의 싸움이 가장 큰 일이다. 그 싸움을 잘 이겨내며 기다리는 일이 사람사는 일이고 역사 아닐까?

‘어쩌다 거의 광기(狂氣)에 사로잡힌 윤석열 무리들이 권력을 행사하는 지경까지 이르렀을까?’하는 물음에 내가 스스로 내려보는 답, “쯔쯔,,, 제 때 잡풀 뽑아내 버리지 못한 까닭…”

허나 사람살이 이어 온 이야기들, 곧 역사를 되돌아 볼 양이면 이내 깨닫게 되는 사실인 동시에 진실 하나, 기다림으로 꽃망울 품고 사는 이들이 꾸는 꿈으로 시간은 이어진다는…

이 나이에 함께 꿈을 꾸는 벗들과 연을 맺고 살 수 있음에 그저 감사하며 <친일파 매국노 윤석열 탄핵 촉구>모임에 함께 할 일이다.

먹고사는 일이 아니라 좋아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므로.

사랑 그리고 예수쟁이에

성실한 교인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다만 스스로 예수쟁이라고 여기며 사는 내게 매우 강력한 매혹적 언어로 다가온 책, <포기할 수 없는 약속>을 받아 들고 책장을 넘기는 저녁이다. 사실 원제보다는 부제가 내 맘을 끌었었다. <세월호, 그 곁에 남은 그리스도인들의 이야기>가 그것이다.

34년째 안산 화정교회 목사로 살아오며 4.16목공소에서 세월호 엄마 아빠들과 일하는 것을 좋아한다는 박인환 목사는 ‘하나님이 물으신다면’이라는 글에 이런 경험담을 남기고 있다.

<”목사가 왜 이런 정치적인 일을 하느냐?”며 눈을 부라리는 장로도 만났고, “박목사, 아직도 세월호야? 이거 언제까지 하려고 그래 목사가 목회 해야지”라고 책망하는 선배 목사도 만났다. 서명을 받아 달라는 나의 부탁에 “세월호 가족들이 정치세력과 야합해서 돈을 더 많이 받으려고 그런다는데…”라며 곤란해 하는 후배 목사들도 여럿  보았다.”>

아직도 세월호와 함께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몇 번 쯤은 엇비슷한 질문을 받아보지 않았을까?

성서한국 사회선교사인 박득훈이 소개해 주는 윤후명의 시 <사랑의 길>을 몇 번이나 곱씹으며 읊조려 본다.

<먼 길을 가야만 한다./ 말하자면 어젯밤에도/ 은하수를 건너온 것이다./ 갈 길은 늘 아득하다./ 몸에 별똥별을 맞으며 우주를 건너야 한다./ 그게 사랑이다./ 언젠가 사라질 때까지/ 그게 사랑이다.>

그리고 동혁이 엄마 김성실의 기도다.

<그렇게 살기로 했다./ 인간의 소관이 아닌 일에 자책하며 분노하던 것에서 돌아서/ 그동안 멈췄던 사랑을 다시 해보기로 했다./ 악쓰고 우느라 돌보지 않았던 남은 가족들을 돌보기로 했다./ 여전히 우리는 진실을 알아야 하고 현실은 답답하지만/ 잃었던 웃음을 되찾기로 했다>

그래! 사랑이다.

포기할 수 없는 약속을 믿으며 손 맞잡고 때론 어깨 걸고 울고 웃으며 늘 아득한 먼 길 걸어가는 그게 사랑이다. 가다가 비록 스러지는 별똥별 하나 되더라도.

사랑 그리고 예수쟁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