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덕담에

평생 동남아 선교 사역을 이어 오신 아니 지금도 이어 가고 계신 허춘중 목사님께서 제 가족 사진을 보시곤 덕담 한마디를 얹혀 주셨다. ‘두 분 옛날 70년대 모습이 있군요.’라고.

내가 그리 살지 못한 탓 때문일 터이지만, 젊었을 때 잠시라도 함께 했던 이들이 오롯이 한길, 외길을 변치 않고 걸어가며 늙어가는 모습을 보거나 듣노라면 그저 존경의 맘이 앞서곤 한다.

그이가 말한 ‘70년대’라는 말에 꽂혀 오늘 뜰 일을 하는 내내 내 스물 무렵이었던 70년대를 생각하며 잡초를 뽑고 꽃을 심었다. 신촌과 종로 5가, 서소문 거리과 골목을 헤매면서.

1970년대와 오늘 2020년대, 참 많이 변했다.

그 무엇보다 내 자신이 엄청 많이 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옛날 그나마 푸르고 맑았던 우리 내외의 70년대 모습을 기억해 주시는 허목사님께 감사를.

70년대나 칠십 대 나이 오늘이나 <세상엔 사랑이 가득한 것 같지만 우린 여전히 외롭고 허전합니다.>, <사랑, 친절, 섬김의 본질과 순수성을 잃어버>린 현실 속에서 늘 깨어 살아가야 한다고 깨우쳐 주시는 호주의 홍길복 목사님.

세상 모든 것 다 변해도 <바닥이 하늘인 세상>에 대한 믿음은 변치 않을 것이라고 오늘도 외치고 사는 내 참 벗, 대전 대화동의 김규복목사님.

필라델피아에서 80년 광주를 알리기 시작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월호 가족, 이태원 가족들과 이 땅의 이민자들을 생각하며 사람사랑, 이웃사랑을 외치며 사는 김경지선생을 비롯한 오늘 이 땅의 내 친구들.

어느덧 우리 세대도 저무는 때를 맞는다만….

비록 오락가락 비틀거리며 살아온 나이지만, 변치 않고 오직 신에 대한 믿음, 사람살이 올곧은 방향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온 이들과 생각을 나누고 살아온 것만으로도 그저 감사 뿐.

두어 주 전 작은 텃밭에 마구 뿌려 둔 상추 싹이 트기 시작했다. 꽃보다 아름답다던가? 새 싹을 바라 보노라면 늘 설렌다.

70년 대처럼. 암만, 화단엔 가을 국화도 새 싹이 올라오거늘, 내일에 대한 설렘만은…

여행, 그 후

이따금 내 마음이 아주 편안함을 느낄 때가 있다. 이런 저런 잡다한 잡념도 없고, 이렇게 저렇게 얽힌 걱정들도 없이 나아가 세상사에 대한 공연한 분노도 없이, 말 그대로 텅 빈 편안함을 느낄 때 말이다. 이럴 때면 무언가 해 내야 한다는 욕심조차 일지 않는다.

그야말로 이따금 맛보는 순간들인데, 그런 순간들을 꼽아보니 내 일터인 세탁소에서 내가 일에 빠져 있을 때가 첫째요, 손에 든 책에 빠져 들 때가 둘째 그리곤 뜰에 나가 앉아 새소리 바람소리 들을 때 그런 순간들을 맞았던 듯 하다.

그런 순간들을 누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면 절로 우러나는 마음은 바로 감사다. 이젠 이따금에서 종종으로 그런 순간들을 맞이하곤 하는데 아마 이게 나이 들어 늙어가는 징조일게다.

어제 오늘, 이틀 저녁 내게 그런 편안함을 누리게 해 준 책, 시인이자 미술평론가이며 <아트인문학>강연으로 이름 값이 꽤나 높다는 김태진과 전자공학을 하고 사진 석사를 마치고 미술예술학 박사를 수료했다는 사진작가 백승휴가 함께 쓴 <아트인문학 여행, – 이탈리아를 거닐며 르네상스 천재들의 사유를 배우다.>이다.

이 책을 읽게 된 까닭이다.

한 석주 전쯤 짧은 이태리 여행을 다녀왔다는 소식을 호주에 계신 내 스승께 전했더니만 그가 내게 했던 말이었다.

<지난해 10월 인문학여행 때는 33명의 인문학친구들과 같이 “아는 것 만큼 보인다”라는 주제를 가지고 여러 권의 책을 소개했었는데 그 중에 인상 깊은 책, 두 권을 소개할게요. 시간 될 때 천천히 한번 읽어보세요.  1. 아트 인문학 –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법, 김태진지음, 카시오페아, 2. 아트 인문학 – 틀 밖에서 생각하는 법, 김태진지음, 카시오페아>>

성정 급한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그 책들을 검색하였는데, 내 눈에 딱 들어온 것은 그 두 권 이전에 <아트인문학 여행, – 이탈리아를 거닐며 르네상스 천재들의 사유를 배우다.>였다.

그렇게 나는 전문가들의 안내를 받으며 내 짧았던 이태리 여행을 다시 곱씹어 천천히 음미하며 다시 걷는 그야말로 편안한 시간여행을 즐겼던 것이다.

실제 여행 중에 내가 보고 느낀 것은 한 시대를 지배하는 돈과 종교라는 권력과 그 시대를 이름없이 살았던  나와 같은 사람들이었다. 이 책은 그 시대를 지배했던 권력자들도 아니고 아직 문자보다는 그림으로 세상사를 읽는 게 편했던 나 같은 사람들도 아닌, 그 시대의 천재적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책이다.

피렌체의 브루넬레스키와 보티첼리, 밀라노의 다빈치, 로마의 미켈란젤로, 베네치아의 티치아노 등 당시 천재들의 삶과 그들의 예술적 작품을 소개하는데, 그 방면엔 아주 캄캄한 내 귀를 솔깃하게 만드는 이야기와 사진으로 나를 홀렸다. 아주 편안하게.

읽으며 내가 밑 줄 쳤던 몇 개 문장들이다.


<(그림에는) 더 이상 종교에 지배 당하지 않겠다는 예술가의 선언이 담긴 것이다…… 그림 속에는 등장 인물이 오직 신앙의 증거로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추울 땐 춥다고 하고, 의구심이 들 땐 의심하고, 괴로울 땐 오열한다.>- 피렌체의 화가 마사초의 그림 설명하며

<사람들은 높은 산과 바다의 거센 파도와 넓게 흐르는 강과 별들을 보며 놀란다. 그러나 정작 스스로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 르네상스 시대를 연 시인이라고 평가받는 이태리 시인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읽다가 크게 깨달음을 얻은 문장이란다.

<“모든 대리석 안에는 조각상이 깃들어 있다. 조각가의 임무는 그 현상을 드러나게 하는 것 뿐.”, “가장 고심해야 할 점은 엄청난 양의 노동과 땀으로 작품을 제작해야 하지만 작품이 완성된 뒤에는 마치 일순간에 매우 손쉽게 만들어진 듯이 보여야 한다는 점이다.”, “예술이 존재하는 한 예술은 세월을 초월하는 아름다움을 간직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예술을 더욱 완전하게 만들 것이다. >– 미켈란젤로가 한 말들이란다.

“나는 신과 인간에게 죄를 지었다. 주어진 재능에 걸맞은 작품을 만들지 못하고 낭비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 이건 레오나르도 다빈치 말이고.

<바라보다는 ‘바라다’와 ‘보다’의 합성어이다. 바라보는 건 그냥 보는 곳이 아니라 간절한 바람으로 보는 것이다.> 사진작가 백승휴가 말하는 사진찍기에 대하여


내가 이 나이에 옛 천재들을 흉내낼 까닭도 없거니와 오늘날의 권력자나 천재들에게도 마찬가지 일 터.

다만 나보다 먼저 이 세상을 살다간 이들이 경외하던 신 앞에, 내가 내게 솔직한 모습으로 한 번 서 보는 일, 한 번 흉내라도 내야 하지 않을까? 이젠.

미켈란젤로의 말, “모든 대리석 안에는 조각상이 깃들어 있다. 조각가의 임무는 그 현상을 드러나게 하는 것 뿐.”  – 신에 내게 던진 대리석은 바로 나였고, 그 대리석을 조각하는 조각가도 나였을 터이니.

자신없는 지난 모습들은 말고 다만 그 앞에 서는 오늘 만이라도… 편안하게.

여행, 그 후에.

아버지의 덕담(德談)

새해 인사드리러 갔더니 아버지는 한 밤중이셨다. 아내와 나는 한 동안 아버지가 깨어나시길 기다렸다. 점심 식사 나올 시간이 다가와 아무래도 잠을 깨워 드려야겠다는 생각에 “아버지, 저희들 왔어요.” 몇 번을 큰소리로 똑 같은 말을 외친 뒤에야 아버지는 눈가리개를 벗으시며 떠지지 않는 눈을 조금 여셨다. 그리곤 “워러, 워러”를 찾으셨다. 요양원 직원일 줄로 알았나 보았다. 아버지에게 물을 건네며 나는 조금 더 큰 소리로 “아니, 우리 왔다니까!” 더하여 아내가 높은 소리로 물었다. “아버님, 저 모르세요?”그제야 잠에서 깨어나신 아버지가 환한 미소 얼굴에 담으며 하신 말씀. ‘에이! 내가 너희들을 모르면… 정말 가야지!’

그리고 이어지던 아버지의 꿈 이야기.

“너희들 마침 잘 왔다. 이건 아주 심각한 얘기다. 꿈 이야기가 아니야! 내가 실제로 겪은 얘기야. 잘 들어라! 먼저 궁금해서 내가 물어볼 게 있어요. 니들 솔직히 대답해야 한다.”

여기까지는 이즈음 아버지가 나를 볼 때마다 먼저 입을 떼시는 도입부로 대체로 내 귀에 익은 대사다. 대개 이 다음을 잇는 아버지의 대사는 당신의 손자 손녀 특히 내 딸아이의 근황이 궁금하셔서 이어지는 내용이었다. 이 대사에 대한 내 응답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한울네는 애기 나서, 한나네는 일이 있어 오늘은 못 와요. 다들 잘 살아요.’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달라도 아주 달랐다.

“너희들 이거 알어?  그거 그거 … 통일이 어떻게 됐니?…. 이거 이거 꿈 이야기 아니야! 내가 직접 본거야. 통일이 됐어 통일이. 그 잔치 자리에 내가 초대를 받았어. 내가 그 세상 보고 왔는데 천국이야 천국! 잔치자리에 산해진미가 차려졌는데 어찌나 정갈하고 맛있던지 내가 하루에 여섯 끼씩을 먹었어. 여섯 끼를. 거긴 가난한 사람들도 왕처럼 살어, 모두가 왕처럼. 이거 꿈 이야기 아니다. 내가 직접 보고 온거야!”

아버지는 똑 같은 이야기를 세번 반복하셨는데, 단 한 단어만 계속 바꿔 쓰셨다. 바로 ‘천국’이었다. 처음 이야기에선 ‘천국’이 두 번째는 ‘극락’으로 세번 째는 ‘파라다이스’로 바뀌었다.

그리고 덧붙이셨던 말씀. “내가 왜 그 자리에 초대됐는 지는 아직도 모르겠어. 왜 나를 초대했는지? 나를 초대했던 사람은….정씨였어, 정씨.” 나는 속으로만 아버지에게 응답했었다. ‘계룡산 정도령이었나 보다.’고.

아마 아버지는 신년 첫 날 꿈자리에서 아버지가 생각하시는 모든 하늘나라를 두루 다 돌아보셨나 보다.

그 이야기를 이제 봄이 오면 만 아흔 여덟, 옛 우리 나이로 치면 아흔 아홉 이른바 백수(白壽)를 맞으시는 아버지가 우리 자식들에게 던지시는 새해 덕담으로 받았다. ‘올 한 해 좋은 세상 누리며 살아라!’는 축복으로.

이윽고 나온 아버지의 점심 식탁. 곱게 으깬 닭 요리 한 줌과 우유 반 팩, 요거트 반 컵쯤을 맛나게 오래 즐기시던 아버지가 숟가락 내려 놓으시며 하시는 말씀. “됐다. 고맙다. 이제 가라”

*** 새해 꿈꾸는 한가지. 가게에서 일하는 시간도 좀 많이 줄이고 나 혼자 즐기는 시간을 더 많이 누렸으면 하는 꿈. 그 꿈으로 오늘 혼자 즐긴 일. 말린 나물 불려 나물을 무친 일. 도라지, 취나물, 무말랭이, 말린 호박, 시래기 등.

정월 대보름 나물 무치는 일은 한 해의 풍요와 건강을 위한 비나리였다든가? 나물무침을 딱히 음력 정월 대보름에만 해야 하는 일은 아닐 터. 무릇 기도란 언제 어디서나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법.

그저 내가 아는 이름과 얼굴들 하나 하나 떠올려 보며 올 한 해 넉넉한 풍요와 건강을 누리는 한 해가 되길 비는 마음으로. 그렇게 나 혼자 즐겨보는…

아버지의 덕담을 받아.

살아남기

성탄 연휴 책 한 권 읽으며 보냈다. 비엣 타인 응우옌(Viet Thanh Nguyen)이 쓴 장편소설 ‘동조자(The Sympathizer)’다.

나는 베트남에 가본 적도 없고, 베트남 역사에 대해 깊은 지식도 없다. 다만 베트남 통일에 대한 관심이 조금 있는 편이어서 지난 세기 베트남이 겪은 세월에 대한 이야기들은 제법 읽었다 할 수도 있다. 특히 월남이라고 부르던 남베트남이 망한 1975년 4월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또렷하다.

그 무렵 아직 열혈청년이었던 나는 베트남식 통일에 대한 막연한 기대도 있었다. 그 때 나는 논산 훈련소 수용연대에 있었다. 보통 징집된 병력들은 그곳에서 사나흘쯤 대기하다가  피복과 장비들을 수령한 후 훈련소로 가기 마련이었는데, 나는 그 곳에서 꽉찬 한 달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입대할 때 입었던 옷을 한 달 동안 입고 있었으니 그 옷이 오죽했으랴!. 나중에 그 옷을 받아든 어머니는 한참을 우셨단다. 나는 그곳에서 몇 차례 보안사의 심문을 받았었다. 하여 그 사월과 오월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이즈음 내 가게와 인접한 네일 샵의 주인인 리와 종업원 피터와는 가깝게 인사하며 지낸다. 모두 사십 대 베트남계 미국인들이다. 내가 나이들었다고 ‘썰, 썰(Sir)’이라고 부르는 그들에게 그냥 ‘영’이라고 하라고 했더니 요사이는 ‘미스터 김’으로 고정 되었다.

여기까지가 베트남 하면 내가 떠올릴 수 있는 생각의 전부다.

소설 ‘동조자’는 분명 베트남과 베트남인들의 이야기인데, 소설은 내게 전혀 낯설지 않은 내 아버지 세대와 내 세대 나아가 내 아이들 세대의 이야기처럼 다가왔다.

소설의 첫 문장이다.

<나는 스파이, 고정간첩, CIA 비밀요원, 두 얼굴의 남자입니다. 아마 그리 놀랄 일도 아니겠지만 , 두 마음의 남자이기도 합니다.>

프랑스인 신부(神父)를 아버지로 십대 초반 어린 나이 베트남 여인(?)을 엄마로 하여 태어난  주인공 ‘나’는 이야기 내내 이런 모습을 유지한다. 두 얼굴의 남자, 두 마음의 남자로.

이야기의 무대는 1975년 남베트남 패망 또는 베트남 통일 시점부터 1979년 사이 베트남과 미국, 필리핀, 태국 등이다.

그런데 전혀 낯설지 않게 우리들의 이야기로 다가온다. 다만 시점은 뒤죽박죽인 채로. 마치 1920년 이후 오늘까지 어쩌면 우리들의 미래까지 겹쳐지는 한반도를 무대로 한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읽으며 포스트잇을 붙여 기억하고픈 대목들 중 몇 개.

<비극은 옳음과 그름이 아니라 옳음과 옳음 사이의 갈등이었고, 이것은 역사에 참여하고 싶은 우리 중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딜레마였습니다.>

<나는 흰색이 단순히 순수나 순결과 관련된 색상만은 아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애도와 죽음의 표시이기고 했습니다.>

<심문은 정신적인 것이 맨 먼저이고, 육체적인 것은 그 다음이야. 여러분은 신체의 멍이나 어떤 흔적을 남길 필요조차 없어. 언뜻 납득이 잘 안되는 소리처럼 들리지, 안 그래? 하지만 사실이야. 우리는 실험실에서 그걸 입증하느라 지금껏 수백만 달러를 썼어.> – CIA 미국 고문관의 말

<그들은 나한테는 예쁘지 않았지만, 그녀에게는 예뻤습니다.>

<내가 그의 아픈 곳을, 양심이라는 명치를 쳤고, 그곳은 모든 이상주의자가 상처 입기 쉬운 부분이었으니까요. 이상주의자를 무력하게 만들기는 쉽습니다. 이상주의자에게 자신이 선택한 특별한 전투의 최전방에 가 있지 않은 이유를 묻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결코 잊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결코 잊을 수 없다는 사실 자체였습니다.>

<대개 우리가 스스로를 보는 방식과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보는 방식이 똑같지 않은데도, 우리는 거울에 비친 우리의 모습이 진짜로 우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 문장.  <우리는 우리의 죽음을 걸고, 이 한가지 약속을 지킬 것을 맹세한다. 우리는 살아남을 것이다!>

그리고 몇 해 전 먼저 세상 뜨신 장광선선생을 떠올리게 한 대목.

<여러분께 제 ‘아메리칸 드림’이 무엇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아메리칸 드림’은 죽기 전에 내가 태어난 땅을 보는 것, 다시 한번 떠이닌(서울 아님 내 장모의 고향 정주, 그도 아님 장선생의 고향 장흥)에 있는 우리 집안 정원의 나무에서 잘 익은 감을 맛보는 것입니다. 제 ‘아메리칸 드림’은 조부모님의 무덤에서 향을 피울 수 있게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 그토록 아름다운 우리 나라가 마침내 평온해지고 총성이 환호성에 가려 들리지 않게 될 때 온 나라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제 ‘아메리칸 드림’은…… 전쟁에 대해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남자 아이들과 여자 아이들이 큰소리로 웃으며 노는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책장을 덮고 바라 본 하늘은 2023년 성탄을 안고 저물고 있었다.

자그마치 2023년이 지났는데 얼마나 더 가야할까? 내가 볼 수 있는 세상은 어디까지일까?

이쯤 왈 예수쟁이로서 자답(自答). ‘우리는 살아남을 것’이 아니라 ‘살아남아 이어가는 우리들을’ 믿기에.

또 다시 희망찬 새해를!

  • 좋은 때 좋은 책 읽게 깨워 주신 내 오랜 스승에게 감사를.
  • 2024년에 박찬욱감독이 영화화한 ‘동조자’가 나온다 하니 뜻 맞는 이들과 함께 이 책과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좋을 듯.

숨쉼

겨울비 내리면 어머니가 하시던 말씀. “얘야, 얼마나 감사하냐! 이게 눈이 아닌게. 눈 오면 그저 걱정 아니냐? 너희들 장사 걱정, 미끄러운 길 운전 걱정. 그저 이 비가 감사다.”

연 이틀 비가 제법 내렸다. 쏟아지는 빗길에 필라 오가는 길, 아직 나는 괜찮다. 걱정은 어제 갓난 아이 안고 퇴원해 집으로 돌아갈 아들 며느리 걱정이었다. 참 운도 좋아라. 퇴원 한 시간 전쯤 비가 뚝 그쳤다. 그래 해본 어머니 흉내. “얘들아, 얼마나 감사하냐?”

오늘 이른 아침, 서울 사는 어릴 적 친구가 안부를 물었다. “너 사는 곳 인근에 비가 많이 왔다고 하는데 괜찮냐?”. 고마운 마음 우스개로 답했다. “비는 제법 왔지만, 숨 잘 쉬고 있다.”고.

오후엔 의사의 권유에 따라 병원 침대에 한 시간 반 여 누워 있었다. ‘큰 문제는 아닌 것 같지만 MRI 테스트를 해 보는 게 좋겠다’하여 예약해 둔 검사였다.

‘숨 들이 쉬고, 멈추고…내쉬고…’ 반복되는 명령에 따르며 누워 있던 긴 시간 동안 간만에 숨쉬기 명상을 하며 스쳐 지나간 생각 하나.

한 동안 집에서 가까운 퀘이커 모임에 함께 했던 때가 있었다. 그땐 내게 딱 안성맞춤인 종교모임 이었다. 번잡스럽지 않은 예배의식과 친교, 명상을 통해 내 숨소리 들으며 신을 찾는 시간들, 평화를 갈구하는 이들, 그런 것들이 참 좋았었다.

삶에 단순함을 추구하며 가족을 중시하고 비폭력과 평화를 갈구하되 그 모든 행위를 내 자신의 삶 속에서 이루어 나가자는 그 모임에 한껏 빠졌던 때가 있었다.

그런 생각하며 따르던 명령.  ‘숨 들이 쉬고, 멈추고…내쉬고…’

그래 그저 감사다. 아직은 누구의 명령 받지 않고 내가 느낄 틈도 없이 스스로 쉬어지는 숨을 누리고 산다는 감사다. 숨을 쉬는 감사다.

게다가 가족들이 있고, 아직은 기억해 주는 누군가가 있고. 숨쉼의 기쁨을 누리고 있고.

바야흐로 가히 은총의 계절이다.

MRI 검사 통에 누워 잠시 도튼 흉내 내던 날.

숨쉼의 감사를 일깨워 준 내 오랜 친구에게.

이야기

가을비일까? 겨울비일까? 비에 젖어 처진 잎들이 아직 가지에 달려 있는 것을 보면 가을인데, 이웃집 앞뜰은 이미 성탄인 것을 보면 겨울인 듯도 싶고… 을씨년스런 11월 마지막 일요일도 저문다.

몇 주 전 서울에서 여성 성가 합창곡 악보책을 구한다고 교보문고를 찾았던 아내를 따라 나섰다가 손에 넣어 들고 온 책,  로버트 알터(Robert Alter)가 쓴 <성서의 이야기 기술 The Art of Biblical Narrative>에 빠져 하루를 보냈다.

흔히 구약이라 부르는 히브리성경을 문학비평적으로 해석한 책이라고 하는데, 그냥 나 같은 얼치기도 쉽게 빠져 술술 읽을 수 있는 독자 친화적(?)인 책이다.

번역자는 제목에만 ‘이야기’라고 했을 뿐 본문에서는 ‘내러티브(Narrative)’로 일관되게 사용하면서 친절하게 그렇게 번역한 까닭까지 옮긴이의 말을 통해 강조하고 있다만 나는 그저 줄기차게 ‘성서이야기’로 읽었다.

저자  로버트 알터(Robert Alter)가 히브리성서의 문학비평적 해석이라는 학문적인 노력을 지속한 까닭을 설명하는 대목이다.

<성서 이야기는 인간이 시간이라는 매개체 속에서 변화를 거듭해가며 하나님을 직면하면서 살아야 하고 다른 인간들과 끊임없이 그리고 복합적으로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기본적 인식을 구현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인간들이란

<성서의 작가들이 그들의 기술을 통해서 알고자 한 것은 분열된 의식을 가진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의 의미이다. 형제를 사랑하지만 미워할 때가 더 많은 존재, 아버지를 원망하고 업신여기기도 하지만 또한 자녀로서 깊은 존경심을 가지는 존재, 형편 없는 무지와 불완전한 앎 사이에서 비틀거리는 존재, 격렬하게 스스로의 독립을 주장하지만 신이 계획한 사건들 속에서 붙잡혀 사는 존재, 외적으로 확고한 성품이지만 내적으로는 탐욕, 야망, 질투, 욕망, 경건, 용기, 열정, 그리고 그 이상의 것들을 품은 불안정한 소용돌이 같은 존재가 인간이다.> 라고 말한다.

이런 인간들과 신과의 관계를 보다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 히브리성서(구약)의 문학비평적 접근이 필요함을 강조하는 이 책의 마지막 문단이다.

<히브리 성서의 작가들은 살아 있는 듯한 인물과 행동을 기교 있게 그려내면서 분명히 즐거움을 느꼈고, 그 결과 수백 세대에 걸친 독자들에게 사라지지 않는 즐거움을 줄 자료를 만들었다. 그러나 상상력이 풍부한 이 놀이의 기쁨에는 한편 거대한 영적 절박함이 배어 있다. 성서의 작가들은 복잡하고 때로는 매혹적인, 종종 격렬하게 개성을 고집하는 인물들을 만들어냈다. 그 이유는 각각의 남녀가 하나님을 영접하거나 무시하고, 하나님에게 응답하거나 저항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띠는 것이 고질적인 인간의 개성이기 때문이다. 이후의 종교적 전통은 우리로 하여금 대체로 성서를 즐기기보다 심각하게 대하도록 만들었다. 그러나 역설적인 진리는 성서의 이야기를 좀 더 온전히 이야기로서 즐기는 법을 배울 때 그들이 우리에게 하나님과 인간, 그리고 위험할 정도로 중요한 역사의 영역에 대해서 말하고자 했던 바를 보다 분명하게 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긴 이야기를 몇 개 문장으로 소개하는 일은 무지, 무엄한 일이 되겠다만 손에 들면 놓지 못할 만큼 흥미로운 책이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구약 성서 속  많은 이야기들과 인물들을 나는 성서를 읽기 전 아주 어릴 적에 이야기로 전해 들었다. 유, 소년기에 들었던 그 이야기 속 인물들과 사건들은 머리 굵어진 후 성서를 읽거나, 나름 이런저런 학문적 또는 신앙적 해설서를 읽으며, 나아가 내 삶의 경험과 이웃들의  경험 속에 투영된 모습들을 통해 끊임없이 여러 모습으로 변하며 내게 다가왔다.

저자 알터(Alter)의  말마따나 수백세대를 이어져 온 이야기를 이제 저물어 가는 서녘에 서서 내 이야기로 되뇌어 본다.

마침 오늘 아침, 오랜 옛 벗이 우리들의 어릴 적 옛날 사진 몇 장을 이번 한국 방문을 계기로 만들어진 단톡방에 올려 놓아 내 되뇌임을 도와 주었다.

그렇게 다시 떠올려보는 몇 주 전 한국방문 때 들었던 홍길복목사의 설교 제목과 성서 본문이다.

그날의 설교 제목은 <목표 다시 가다듬기>였는데 영어로는 <Rebuilding our Final Goal>라고 되어 있었다. 이제와 곰곰 생각해보니 <목표 다시 가다듬기>와 <Rebuilding our Final Goal>는 하나로 연결되어야 마땅한 것이었다. 일테면 ‘마지막목표 바로 세우기’정도로.

그날의 성서 본문이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빌립보서 1:20-21>

그렇다. 내게 주어진 <시간>이라는 축복을 깨달을 나이가 되었다. 이제 내 이야기가 성서 이야기가 되어야 하고, 성서 이야기가 내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비단 내게만 부여된 축복은 아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려는 모든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은총이다.

이쯤 을씨년스럽던 11월 마지막 일요일은 내게 감사다. 다가오는 성탄도. 다시 맞는 겨울도.

시간여행을 끝내며- 황금시대

부일이와 정일이 아버님 최창한장로님께서는 까까머리 고등학생이었던 우리들에게 ‘Golden Age(황금시대)’라는 말을 즐겨 하셨다. 십대 나이야 말로 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멋진 시절이므로 알차게 보내야만 한다는 당신의 속 깊은 충고를 담아 내신 말씀이었다. 허긴 그 나이에 그 충고가 귀에 들어오기나 했었겠냐마는.

이제 노년의 초입에 이르러 대현교회 최장로님의 충언의 말씀을 내 것으로 만들어 본다. 바야흐로 내가 서 있는 오늘이야말로 나에겐 ‘Golden Age(황금시대)’가 아닐런지.

여느 해 추수감사절이면 나는 음식하기에 바빴었다. 허나 오늘은 어릴 적 추석 같은 명절이면 어머니가 차려 준 명절상 즐기며 놀 듯, 아이들이 차려 준 감사절 만찬을 즐겼다. 사라진 부모님 자리를 손주뻘 아이들이 채워주었고, 우리 세대는 이제 손 움직이지 않는 처지가 되었다.

허나 혼자 있어 좋은 시간들, 혼자 있어 즐기는 시간들, 혼자 있어 감사한 시간들을 누리는 오늘이야말로 진정 삶의  ‘Golden Age(황금시대)’가 아닐런지.

이 황금시대를 구가할 수 있는 힘의 첫째 원천은 아내다. 돌이켜보면 역사 이래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전쟁회수가 천 번을 넘는다고 한다만, 우리 내외가 이제껏 싸운 회수를 따진다면 족히 그 몇 곱을 될 터. 그 숱한 전투속에 쌓인 것은 미움이 아니라 적과 아군을 넘어선 굳건한 전우애, 바로 그 사랑.

그 사랑의 결실인 우리들의 가족들. 이번 여행 중 두 처남 내외가 베풀어준 가족 사랑에 대한 기쁨과 감사도 꼭 기억해야 할 추억이다.

아내와 연을 맺어 여기까지 오게 된 길목 길목들을 따라 쫓다 보면 그 끝에 서 있는 담장이 넝쿨 뒤덮인 곳, 바로 신촌 대현교회이다.

이젠 넉넉한 맏형이 되어 계신 송영길 형님, 교회의 기둥이 된 김석수, 박성규, 안희주, 김난애 장로님들, 늙막에 들어선 우리들에게 믿음이 함께 하는 새로운 길을 바라 보라고 새 길눈 열어 주신 홍길복 목사님, 그리고 차리기 결코 쉽지 않은 잔치자리 기꺼이 마련해 주신  대현교회 최영태 목사님과 당회원 여러분들께 머리 숙여 속 깊은 감사를.

언제나 꿈속에서 들어도 반가운 병덕, 종석, 종민, 용철, 응복, 성식, 경애, 경자, 영숙, 경희 그 아스라히 언제나 그리운 얼굴들, 멀리 남쪽 진주에서 올라와 긴 이야기 나누지도 못하고 헤어진 병훈이…. 그저 만나 고마움으로.

길환이, 영환이…

그리고 규복이. 그저 끝없는 고마움으로.

우리 모두의 황금시대를 위하여!

2023년 가을에.

시간여행 -5, 함께

옛 벗들과 함께 나섰던 강화 나들이는 우연히 따라 나서게 된 까닭도 있거니와 이번 여행의 마지막 일정이기도 하여 많은 여정(旅情)을 쌓은 하룻길이었다.

그 하룻길 나들이 길잡이를 자처한 김환조목사와 강화 지킴이 송가감리교회 고재석목사님과 그의 부인이자 동역자인 우리들의 옛 친구 손명희사모 그리고 아직도 예전 십대 청춘을 구가하며 사는 듯한 차용철형님 그 모두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어린 시절 교회생활을 함께 했던 친구들이 몇 십 년이 흐른 뒤, 노년의 초입에 들어선 마당에 우연치 않게 만나 하룻길 나들이를 함께 하는 경험을 나눈다는 것은 그리 흔치 않은 일일 터. 바로 그날 우리들이 누린 은총이었다.

강화에 들어서서 첫 번 째 치룬 행사는 <강화 기독교 역사 기념관> 방문이었는데, 기념관 안내와 전시장 해설을 맡아 주신 이의 지나친 친절로 인해 ‘아뿔사! 혹시 오늘 하루는…’하는 염려가 그득히 밀려 왔었다. 허나 고재석목사님으로 하여 내 염려는 다행히 기우에 그쳤다. 지나친 친절은 기념관에서 끝났음으로.

기념관에서 내가 담고 온 두가지 <신학지남 (神學指南)>과 , <죽산(竹山) 조봉암>이었다. 한국 초기 기독교 역사 속, 당시 일천했던 신학 토대의 발판을 자처했던 <신학지남 (神學指南)>의 정신을 오늘의 한국교회와 이민교회가 잇고 있을까?하는 물음을 담고 왔거니와, 조봉암선생이 성공회 신자였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는 것, 그이에 대한 설명이 너무나도 자의적 또는 작의적이었다는 안내자에 대한 아쉬움도 함께.

역사 기념관 빡센(?) 공부를 마치고 이어진 송가 감리교회 고재석 목사님과 오랜 시간을 한국여성의 전화와 함께 사람 평등 운동과 사모 사역을 함께 해 온 손연희사모의 그 날 그들이 말하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느낌으로 담으며 즐긴 강화 여행이었다.   

멋진 카페와 진한 국물의 꽃게탕과 오래 전 추억들을 추려 꾸민 곳에서 이어진 끝 모를 지난 이야기와 오늘을 살아가는 이야기들로 이어진 하루였다.

내게 아주 특별한 경험, 바로 김환조목사의 축도였다. 환조는 늘 밝고 활기 찬 후배인데, 그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야말로 배꼽이 빠질 정도로 웃음이 이어지게 마련이었다. 허나 그 웃음 뒷끝은 늘 쌉쌀하게 무언가 꼭 곱씹어야 마땅한 뒷끝이 남아 있곤 했다. 그가 목사가 되었고 오늘도 여전히 환조답게 목회를 이어가고 있다.  그날 송가 감리교회에서 엣 친구들과 송가 감리교회를 위해 드린 비나리는 내게 진한 감동이 되어 남아 있다. 김환조목사님을 위하여!

그리고 속히 유물이 되어야 할 망향대 또는 전망대 이야기.

그야말로 손에 잡힐 듯 가까운 땅 북한과 멀리 남쪽 일산의 아파트 촌을 번갈아 바라보며 드려본 기도, 우연히 어느날 문득 여기서 저기까지 이어진 산들이 하나가 되기를… 아님, 내 믿음의 언어인 그의 섭리로.

이번 시간여행길에서 만난 산들은 그저 아름답고 부드러웠다. 한국의 산세이다. 거의 팔십년 가깝도록 아직도 꿈 같은 일이다만, 백두에서 한라까지 그 아름답고 부드러운 산들이 이어 달리는 세상을 아마…

내 어릴 적 대현교회 친구들 몇몇은 할머니 또는 아버지 따라 이북 사투리를 쓰곤 했다. 이즈음도 아내는 종종 “엄마 친척들 만나러 한 번 갈 수 있으려나?’하는 꿈 같은 이야기를 하곤 한다.

이쯤 이제 노회한 노인이 된 나는 기도를 바꾼다.  “정말 산들이 이어지는 게 어려운 일이라면, 반도의 모든 산들에게 벙커와 교통호 없는고요한 평화를…”

그렇게 함께.

시간여행 – 4, 변화에

변화는 늘 놀라운 것이지만, 내가 적응하지 못할 때는 그저 불편함 뿐이다. 그런 불편함이 자꾸 쌓인다는 것은 내가 늙어간다는 표징일게다. 하여 애를 쓰는 편이다. 변화로 인한 불편함을 최소화 하려는 노력을 최대화 시키는 애씀인데, 그런 모습에 스스로 ‘쯔쯔쯔’ 혀 찰 때가 자꾸 늘어간다. 그럴 때면 스스로 위로하는 한마디, ‘내 노력이 모자란 것이 아니라, 변화가 너무 빨라서…’

서울은 내가 쉽게 적응하기엔 지나치게 많이 변했다. 십 삼 년 만에 나섰던 나들이였는데, 그 변화의 폭은 내 가늠 이상이어서 불편함 보다 먼저 다가선 것은 놀라움이었다.

무엇보다 먼저 다가선 놀라움은 사람들이 건네는 말소리들 크기와 억양이 매우 작고 부드러워진 변화에서 왔다. 지하철이나 버스, 식당이나 거리에서 사람들의 말소리는 분명 내 기억 속 서울사람들의 그것이 아니었다. 이웃에 대한 배려에서 온 듯한 이런 변화는 실로 큰 놀라움이었다. 솔직히 뉴스 속에서 만났던 서울소식들은 매우 거칠게 소리 높은 소음처럼 다가오곤 했었는데, 실제 사람들의 말소리들은 부드럽고 온유했다. 그게 참 좋았다.

지하철 친절한 안내 방송도 좋았는데, ‘발빠짐 주의’나 ‘나빠짐 주의’, ‘하차입니다.’라는 경고 등은 외국어처럼 매우 낯설었다. (불편함, 놀라움이라는 말을 쓰다보니 생각난…)

그 보다 큰 놀라움을 느낀 것은 어디를 가나 잘 꾸며진 조경(造景)을 바라보면서 였다. 얼핏 쉽게 잔상으로 남게 되는 풍경들, 일테면 아파트 공화국이니 콘크리트 공화국이니 하는 말들을 잘 치장해 주는 놀라운 변화는 내겐 실로 경이롭게 다가왔다. 놀랍게 변한 종로통 뒷골목 직장인들의 점심시간 풍경과 그들의 여유로운 걸음걸이를 만끽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잘 꾸민 조경 때문이었다. 돌아와 내 가게 손님들에게 자랑할 요량으로  조경과 자연 사진들을 제법 많이 찍었다.  

또 다른 놀라움은 딱 두 시간 오분이 걸린 서울과 속초 간의 거리였다. 아주 오래 전 고등학교 친구들하고 북평해수욕장에서 놀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그 때 청량리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밤새워 거의 열시간 넘게 달려 닿던 곳이었다. 터널 예순 세 개로 이루워 졌다는 서울 속초간 도로를 달린 일은 내게 완벽한 시간여행 경험이었다. 아내와 단 둘이 맞았던 속도 앞바다 해돋이 풍경은 우리들의 내일로 품고.

그 동창들을 거의 오십 년 만에 만났다. 졸업사진을 떠올리며 옛 이야기를 나눈 몇 몇은 졸업 후 처음이었으니 만 오십 이년이다. 동창회를 이끄는 친구가 말하길, 졸업 동기들 중 1/4이 먼저 이 세상길 떳고, 1/4 정도는 연락 두절, 1/4 정도는 연락은 닿지만 모임에는 나오지 않고, 나머지 1/4이 이런저런 모임으로 연과 끈을 맺고 늦은 시간들을 함께 걷고 있단다.

실로 오십 년만의 변화인데, 또 다른 놀라움 하나는 바로 모두가 별로 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함께 한 동창들 중 몇몇은 그 옛날 북평 해수욕장에서 같이 놀았던 친구들이었는데, 그들은 물론 다른 친구들도 떠들고 즐기는 동안 변하지 않은 옛모습 그대로 둘러 앉았었다.

그랬다. 해 아래 변하지 않는 것이 어디 있으랴만, 분명 변하지 않는 것들도 있다.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으련다. 바로 나다. 내 마음에 따라.

느긋하게 맞는 추수감사절 아침이다. 해마다 Thanksgiving, 이 맘 때면 읊조려보는 시 한 편이 있다. 언제부터 인지 잘 모르겠으나, 이젠 철들 때도 되지 않았나는 생각이 들었던 내 나이 환갑 전후일게다. Shel Silverstein이 읊은 관점(Point Of View)의 첫째 연이다.

<추수감사절 만찬은 슬프고 고맙지 않다/ 성탄절 만찬은 어둡고 슬프다/ 잠시 생각을 멈추고/ 칠면조의 관점으로 만찬 식탁을 바라본다면.

Thanksgiving dinner’s sad and thankless/ Christmas dinner’s dark and blue/ When you stop and try to see it/ From the turkey’s point of view.>

2013년 추수감사절 아침, 돌아볼수록 그저 감사한 일 하나 꼽는다. 살아오며 보아 온 숱한 변화들 또는 기억조차 못하는 나의 변화들 나아가 옹고집으로 변치 않는 모습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관점의 잣대가 비록 어설프고 부끄러움 투성이지만 예수라는 잣대, 성서라는 잣대라는 믿음을 잊지 않았다는 감사이다.

큰고개(대현) 언덕 옛 친구들이 일깨워 준 감사이다.

<시간여행 – 3, 희망에>

겨울시간은 해가 너무 짧다. 오랜만에 늦잠을 즐기며 느긋하게 시작한 탓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하루 해가 너무 짧다. 여행 전, 미처 다 심지 못했던 히야신스, 무스카리, 알리움 등 구근들을 묻고,  뜰을 가득 덮은 낙엽들을 거두고 난 뒤, 아버지와 함께 잠시 시간을 보내고 온 것 뿐인데 벌써 어두워졌다. 그 짧은 하루, 봄을 기다리며 가꿀 수 있는 오늘에 감사하며.

신촌 대현교회 고등부 3학년 때 일이다. 따져보니 52년 전 일이다. 그 때 우리들을 가르쳐 주신 선생님들 가운데 박대위, 이열모 선생님이 계셨다. 두 분 다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계셨다. 이열모 선생님은 우리 고3  남학생들을 위해 이런 기도를 하셨었다. “하나님 아버지, 이 아이들이 장차 이 나라의 꿈입니다. 헌데 지금은 고3입니다. 열심히 공부할 때 입니다. 이 녀석들이 공부하다가 쓸데없이 바지 속으로 손 넣고 장난치는 유혹을 이기게 해주시고….”

박대위선생님은 제2한강교와 절두산이 내려다보이는 전망 좋은 양옥에 살고 계셨는데, 당시 우리에게 지나치듯 이런 말씀을 던져 주셨었다. “집에 앉아 멋진 한강 풍경을 내려다 보다가 정신이 번쩍 들 때가 있단다. 과연 내가 지금 여기에서 이런 사치를 누리며 사는 일이 옳은 것인가?하는 물음 때문이지!”

그 시절 참 좋은 선생님들 덕에 크게 엇나가지 않고 이 나이에 여기서 요만큼 이나마 살고 있는 것에 그저 감사다.

박대위 선생님은 내 대학시설 총장이셨던 박대선총장의 동생이셨다.

그리고 내 친구이자 동지인 김규복목사. 대학시절, 박대선총장 사퇴운동부터 박정희 유신 철폐, 전두환 타도 투쟁에 이르기까지 나보다 늘 한발 앞서서 나아갔던 벗, 김규복 목사를 독수리다방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이민 보따리를 꾸리고 있을 때 그는 대전 대화동에서 빈민과 노동자들을 위한 교회를 세웠었다.

독수리다방은 이름만 이어져 올 뿐, 옛 모습이라곤 다방안 사진 속에만 남아 있었다.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이 불편한 걸음으로 다방 안으로 들어섰다. 만 36년 만에 만난 내 오랜 벗 김규복목사였다. 그는 오래전에 겪은 고문 후유증으로 파킨슨병을 앓고 있었다.

우린 짧은 시간 손을 꼭 맞잡았고, 부둥켜 안았을 뿐 긴 말은 나누지 못했다. 그와 그의 아내는 오늘도 옛 모습 그대로, 비록 많이 변한 세상일지라도 여전히 바닥 삶을 살아가는 이들과 함께 하시는 신과 함께 일 하고 있다.

살며 이런 벗 하나 사귀고 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가 누린 은총은 족하다.

목사님 다음에 장로님 이야기.

어느 날 우리 내외는 ‘이것 한 번 먹고 가자!’라는 계획을 세웠었다.  그 저녁에  박성규 장로내외가 초대해 준 저녁식사 자리는 바로 우리가 먹고 싶어했던 그 요리 전문점이었다. 아무렴! 장로님 기도발은 나 같은 얼치기 예수쟁이 보다 세긴 센 모양이었다.

교회 후배이자 대학 후배인 박장로- 일년 터울 후배라긴 보단 그저 친구일 뿐- 그와 함께 공유했던 사람들과 시간들을 되새기며 삶의 아쉬움과 감사함을 조근조근 나눈 참 좋은 시간이었다. 두 내외에게 감사를.

옛날 동쪽 끝인 워커힐 언덕에서  옛날 서쪽 끝 신촌까지 오가며 아직도 한결 같은 모습으로 교회를 지키고 있는 그의 모습에 경외를.

이번 여행에서 꼭 가 보고, 아니 꼭 가 보아야 할 곳이 있었다. 세 곳이었는데 모두 서울 시청 부근 이었다.

그렇게 시청앞으로 가는 지하철을 기다리다 보게 된 시 한 편이었다.

지금 내가 사는 곳에서 함께 삶의 길을 걷고 있는 친구들이 서울 나들이를 하면 반드시 찾게 되는 세 곳이다. 바로 세월호와 이태원 참사 희생자들의 추모와 기억 공간 그리고 윤석열로 대변되는 사람을 계층화 시키는 세력 타도를 외치는 현장이었다.

그렇게 찾아 나선 시청앞 광장에서 나는 절망했었다. 옛 시청 건물인 서울도서관 옥상과 아내와의 추억이 쌓여 있는 정동 세실극장 옥상에서 바라본 토요일 오후 시청앞 광장 풍경은 대한민국 정치 뉴스처럼 절망적이었다.

광장 북쪽 광화문 방면을 점령한 내 또래 이른바 태극기 부대와 남쪽 남대문을 향해 모인 무리들 모두 확성기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 어마어마한 소음은 내겐 너무 낯설었다.

확성기로는 절대 역사를 바꾸지 못한다. 웅웅거리는 거대한 침묵의 함성 소리, 바로 지축을 흔드는 민중의 함성이라야 새 세상 열리는 법이다.

멀리 갈 것 없다. 80년 서울역 광장, 87년 시청앞 광장, 2016년 청계광장. 내가 아는 한 모두 확성기가 아니었다. 아직 갈 길 먼 듯 하다만….

허나 나는 그저 희망적이다.

내 친구 김규복과 박성규 같은 굳건한 바닥 단단히 다져 하나하나 반듯하게 세워 이어가려는 이제 칠십 노인들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하여 희망으로.

바라건대 더불어 함께 사랑하며 살아가는 세상을 향한 희망으로.

이 희망! 내가 내 고향 대현교회에서 배운 믿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