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움을 넘어서

일본의 교과서 왜곡파동으로 시끄럽다.

일본 문제가 불거질 때면 등장하는 반일 구호와 현수막, 탑골공원의 궐기대회 사진과 함께 온통 반일 민족주의자들 뿐이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면 언제 그랬나 싶게 모두가 잠잠하다. 그러고 또 다시 애국적 저널리즘과 프랭카드, 반 세기 동안의 반복다.

이 점 일본도 마찬가지다. 적당히 눈치보며 과거를 정당화하다가 세 불리하면 슬그머니 꼬리를 뺀다. 그러다 가시 보수 우익을 앞세워 과거 찬양의 목청을 높인다. 때린 자의 부끄러움과 맞은 자의 부끄러움을 진정 헤아리지 못한 탓이다.

긴 역사의 눈으로 볼 때 먼저 그 부끄러움을 청산하고 이겨내는 민족이 앞설 것이다.  가해의 역사를 기록한 민족이 그 부끄러움을 청산하지 못하면 역사에서 사라져 버린다. 피해의 역사를 가진 민족이 그 부끄러움을 깨닫지 못하면 그 또한 맥이 끊긴다. 그것이 역사의 교훈이요, 종교적 역사관이다.

한민족의 역사를 훑다보면 일본 식민지 35년(일제 36년 – 이것 부터 고쳐야 한다. 만 35년에서 열 나흘이 빠지는 기간이다)보다 더 험난했던 세월이 있었다.

남도석성

고려 후기 13세기에 있었던 몽고족의 침략기간이 바로 그 때였다.

1206년 징키스칸이 몽골국가를 일으킨 후 그와 그의 군대가 지난 가는 곳마다 피바다를 이루었다. 징키스칸의 아들이 전장에서 죽자 그 지역 주민을 단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죽였다는 기록이 있고보면 그 잔인함이 오죽했으랴!

징키스칸의 아들 오코타이가 태종왕이 된 직후인 1231년, 장수 살레타이를 앞세워 한반도를 유린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1273년 4월 김통정 이하 70여명의 삼별초군이 제주도에서 최후의 항쟁으로 전멸하기까지 여섯 차례에 걸친 몽골군의 침략은 한반도 전체를 유린한 일대 사건이었다. 그리고 14세기 초 몽골족이 세운 원(元)나라가 망하기까지 100여년 간 한반도는 처참하였다.

(한반도의 역사보다 이스라엘 역사에 박식한 기독교인들은 바벨론 시대의 유대를 상상하면 될 것이다.) 고려인들 특히 가진 것 없었던 백성들과 천민들은 목숨이 다하도록 몽골족과 맞서 싸웠다. 당시 무신정권의 권력층들이 강화도로 피신하여 제 뱃속 차리기에 여념이 없어 그 곳에서도 권력다툼으로 나날을 보냈 때 그 정권 아래서 핍박받던 백성들은 목숨을 마다치않고  침략자들에게 대항하여 싸웠다.

삼별초 – 권력의 호위병들이었던 그들이 민족의 초병이 되어 마지막 한사람까지 침략자에게 대항하다가 죽은 역사는 세계사에 보기 드문 기록이다.

그 시절 가장 큰 피해자는 여성들이었다. 잔인한 적들과의 긴 싸움으로 많은 반도의 고려 여인들이 몽골인들에게 성을 유린 당하였다. 이것은 전쟁의 아픔 중 가장 큰 것이었다. 살아남은  자들의 가정마다 파괴될 상처였다.

도대체 제 몫을 못했던 당시 임금들 가운데 그나마 원종(元宗)임금이 왕 노릇 한 번 하였다.

“호수만복(湖水滿服) – 커다란 연못을 파고 “이 물에 몸을 씻으면 모든 더러움이 깨끗해 진다.”라고 선언한 임금의 명령으로 많은 여성들과 가정이 살아 남았다는 역사적 사실은 얼마나 거룩하기까지 한가?

그것은 종교다. 그것은 역사다.

요단강 강물에 흠뻑 담갔다 나온 몸이 깨끗해졌다는 믿음, 세례수 한 방울 머리에 떨어짐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믿음이 종교이듯, 더러워진 몸 연못에 들어갔다 나옴으로 깨끗해졌다는 사회적 약속, 또는 믿음 그것이 새 힘을 낳는다. 그것이 부끄러움을 털어 버리는 일이다. 제 부끄러움을 알고 털어버리는 의식, 그것이야말로 부끄러움을 넘어서는 일이다.

한국이든, 일본이든 먼저 하는 자가 이긴다. 민족뿐 아니다. 장삼이사(張三李四) – 평범하게 이 땅을 살아 갈 우리도 마찬가지다.

*** 오늘의 사족

2001년 3월 22일의 글이다.

얼핏 세상은 완전히 거꾸로 흐르는 느낌이다. 2013년 이즈음엔. 숨기고 감추고 뻔뻔하게 덧칠하는 세력들이 더욱 판치는 세상인 듯 하다. 모든 세(勢)들이 그리로 모이는 듯 하다.

그러나 아니다!

무릇 역사는 긴 호흡으로 보아야한다.

쌀값이 얼마인고?

묻노니 ‘스님, 불법(佛法)의 참 뜻이 무엇입니까?’ 답하노니 ‘요즈음 여릉(廬陵)의 쌀값이 얼마나 하는고? 중국 선불교의 고승 청원(靑原)행사선사(行思禪師)의 선문답(禪問答)이다.

행사스님(? – AD740)은 달마대사로 부터 시작된 중국 선종(禪宗)을 크게 꽃피운 제6조 혜능조사(慧能祖師)의 제자로서 남악스님과 더불어 선종사의 초석을 놓은 거목이다.

그에게 어느날 신회(神會)라는 스님이 와서 묻는다. ‘불법대의(佛法大意) 곧 부처님의 참 뜻이 무엇입니까?’ 이에 대한 행사스님의 답은 그야말로 엉뚱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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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음 여릉의 쌀값이 얼마나 하는고?’ 일컬어 <여릉의 쌀값>이라는 유명한 화두(話頭)이다.

행사스님이 계셨던 청원사로 들어 오려면 거쳐야 했던 여릉지방은 당시 쌀이 많이 나는 중국의 곡창지대이었다. 부처님의 길을 묻는 제자에게 한 대답  ‘여릉의 쌀값’은 곧 그 쌀이 존재하는 곳 바로 그 곳에 부처의 길이 있다는 뜻이다.

쌀은 예나 지금이나 대표적인 일상용품이다. 쌀값의 오르내림에 따라 울고 웃는 그 일상성을 되묻는 것으로 답을 대신한 행사스님의 큰 뜻은 바로 일상적인 것 속에 부처의 길, 불법의 참 뜻이 있다는 것이었다.

현실세계를 벗어나 이상적인 불법을 찾아 헤매는 제자에게 일상생활을 살아가는 구체적인 삶 속에서 불법의 참 뜻을 찾아 보라고 설파하시는 행사스님 말씀은 오늘을 곱씹게 한다.

도(道)란 원래 평상적 일상속에 두루 존재한다는 것이 동양사상이다. 노장(老莊)에선 이를 ‘도재평상(道在平常)’이라고 한다. 먹고, 마시고, 심지어 싸고 눕는 그 일상속에 도가 있다는 말이다.

예수는 삼년간 그의 공생애를 사는 동안 병든 자를 고치는 기적들을 많이 행하였다. 예수 당시의 병자는 몸이 아픈 사람 이전에 신으로 부터 저주받은 사람들로 사회로 부터 버림받은  자들이었다. 눈먼 자, 문둥병자, 정신질환자, 십지어 곰배팔, 절뚝발이까지  육체적 결함은 곧 신의 저주나 신 또는 조상의 죄의 댓가때문이라고 당시의 사람들은 믿고 있었다.

예수의 기적은 병고침 뿐만 아니라 신의 저주에 대한 거부, 나악 죄로부터의 해방까지 선포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교훈은 병 고치는 기적 이후에 한 예수의 행태이다.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마가복음 8:26)”

벳새다의 눈먼 자를 고치신 예수께서는 그를 집으로 보냈다는 이야기이다.

‘눈을 떳으니 나와 함께 가자’, ‘눈을 떳으니 이젠 천국으로 가자’, ‘눈을 떳으니 이제 나를 위한 전도만 하라’가 아니라 ‘집으로 보냈다’는 것이다. 곧 일상성으로 돌려 보냈다는 것이다.

자! 이제 기적에 의해 눈을 뜬 이는 집으로 돌아가 보이지 않았을 때의 그 답답함과 죄 때문이라는 속박에서 해방되었다. 그러나 그는 밝게 보이는 세상을 통해  새로운 도전과 번민을 맞게 되었을 것이다.

바로 그 고뇌가 뒤따르는 일상성의 회복이야말로 ‘하나님 나라’로 가는 지름길이었기에 예수께서 그리 명령하시지 않았을까?

지난 해 말 통계에 따르면 미국에 거의 3,000여개의 이르는 한인 교회들이 있다고 한다.

천주교 성당이나 불교사찰은 포함되지 않았으니 그 수가 또 얼마나 될지?

많을수록 좋다는데 자꾸자꾸 세우면 또 어떠하리.

다만 오늘, 여기, 이 땅의 삶을 업수이 여기는 믿음, 교회나 사찰이 오늘의 삶에서 동떨어져 안주하는 방주로 여기는 믿음, 평상심(平常心)과 분리된 열광만이 믿음이라는 독선만은 말았으면 하는 생각으로…

묻노니, 여보!  20파운드 쌀값이 얼마지?

 

*** 오늘의 사족

2001년 3월 15일에 쓴 글인데 어쩜 오늘도 그대로 유효한지…

일상성을 버린 믿음이란 무릇 공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