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愛國)에

재작년 아흔 다섯의 나이로 세상을 뜬 Russell W. Peterson은 DuPont회사에서 오랫동안 근무하였고 1970대초 공화당원으로 내가 살고있는 델라웨어 주지사를 역임한 바 있다. 그는 과학자이자, 정치가인 동시에 시민운동가이며 환경론자이다. 오랜 공화당원 생활을 접고 민주당원으로 그가 당적을 바꾼 것은 1996년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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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나이 여든 셋에 백 쪽도 채 안 되는 작은 책자를 출간하며 제목을 <애국자들이여, 궐기하라!(Patriots, Stand Up!)”>라고 하였다.

 

책의 제목만큼이나 책의 내용이 직정(直情)적이다. 당시 부시행정부에 대한 그의 비판과 독설, 그리고 애국민임을 자처하는 미국인들에 보내는 그의 충언을 읽으면 그가 팔순 노인은 커녕 스무 살 팔팔한 젊음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까지 한다.

 

그는 9.11참사 이후 불어닥친 미국내의 애국주의가 아주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지적한다. 비뚤어진 애국심과 애국주의의 선동으로 미국은 처음 국가를 건설하며 꿈꾸었던 참되고 큰 미국정신을 잃어 버리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선두에 부시행정부로 대변되는 극우 보수 공화당원들이 앞장서고 있다고 비난한다. 부시행정부가 이라크와의 전쟁을 시작하며 내걸었던 전쟁의 당위성 일곱 가지들 일테면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 보유, 알 카에다 조직과의 연계, 우라늄생산을 위한 시설 보유, 독가스로 수천 명의 인명 살상, 우라늄의 대량 유입, 생화학 무기 생산을 위한 연구 시설 보유, 미국의 안전 위협 등의 모든 전쟁 이유들은 단지 구실이었을 뿐 모두가 거짓으로 판명되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그는 지금이야말로 참다운 애국주의의 개념을 바로 세워야 할 때이며, 생각있는 미국인들이 이 운동에 앞장 설 것을 주문한다. 그는 진정한 애국심과 애국주의는 미국의 첫 정신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주창한다.

 

들어라! 선조들이 어렵게 지켜온 미국인들의 삶의 방식 곧 자유와 정의를 구가하는 생활 양식을 버리라고 주문하는 오늘날 극단주의 지도자들을 향해 이 미국이 울고 있는 통곡의 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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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이어 러쎌은 주창한다.

 

애국자들이여, 궐기하라! 수 세대 동안 싸워 이룩한 이 위대한 국가의 명예를 위하여! 법 아래서 누릴 수 있는 자유와 정의를 구가하는 이 땅의 삶을 위하여! 전 세계 민중들의 꿈을 집중시켰던 식민주의, 노예제도, 파시즘, 공산주의와의 대결을 통해 이룩해온 이 땅을 위해! U.N.헌장과 권리장전, 독립선언서에 명시된 우리들의 기본적 권리들을 위해! 궐기하라!”

 

팔순 노인이 치켜든 열정적 반 부시의 깃발에도 불구하고 당시 미국민의 거의 반수는 부시행정부의 지지층들이었다.

 

애국의 길은 생각에 따라 차이가 날 수도 있다. 가는 길이 다를 수도 있다.

다만 함께 공유해야만 하는 것이 있다. 인류 보편적인 가치 곧 자유와 평등 그리고 정의아래 상식적인 보편의 가치의 기반 위에 서서 부르짖는 애국이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 기반을 상실한 채 애국을 호도하는 세력은 타도의 대상이며 실로 애국자들이 궐기해야만 하는 세상인 것이다.

 

어찌 미국 뿐이랴!

보편 상식적인 가치를 따져 애국을 논해야만 한다.

 

어느 은퇴목사의 회고 – 마지막 글

네가 믿는다는 말을 하려거든

 

이 제목 연재글의 마지막입니다.

 

둘째로 이민목회와 디아스포라 선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지금, 여기에서 재현하는 작업이다.

 

기독교는 십자가와 부활의 종교이고 기독교 신학의 절정은 십자가와 부활에 있다. 십자가와 부활 이라고 하는 이 연속적 사건에서 십자가는 인간이 져야 할 몫이고 부활은 하나님이 이루실 몫이다. 교회와 목사들과 신자들이 해야 할 일은 각자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말 없이 묵묵히 지고 가는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십자가를 지고 죽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을 다시 살리시는 일은 오직 하나님이 하실 일이다. 십자가는 그리스도 자신과 그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정체성이다.

 

한국 교회와 디아스포라 교회를 포함한 오늘날 그리스도 교회의 신학적 위기 중 하나는 십자가 없는 부활 만을 연속적으로 선포하는 어리석음에 있다. 부활은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와 함께 십자기를 지고 죽은 사람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최종적 은총이다. 그러으로 하나님이 이루실 부활의 역사에 대해서는 하나님께 맡기고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책임인 십자가를 지는 일에 대해서 좀 더 치열하게 말하고 적극적으로 행동 해야 한다.

 

위에서 예화로 제시한 몇 가지 이민목회의 경험담들이 가르쳐주는 교훈의 두번째 핵심은 바로 이 십자가 목회와 십자가 선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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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개척한 이 모든 사람들, 이 모든 노련한 믿음의 대가들이 우리를 응원하고 있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까? 그들이 열어 놓은 길을 따라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뜻입니다. 달려가십시오. 절대로 멈추지 마십시오! 영적으로 군살이 붙어도 안되고, 몸에 기생하는 죄가 있어서도 안됩니다. 오직 예수만 바라보십시오. 그분은 우리가 참여한 이 경주를 시작하고 또 완주하신 분입니다. 그분이 어떻게 하셨는지 배우십시오. 그분은 앞에 있는 것, 곧 하나님 안에서 그리고 하나님과 함께 결승점을 지나는 기쁨에서 눈을 떼지 않으셨기에, 달려가는 길에서 무엇을 만나든, 심지어 십자가와 수치 까지도 참으실 수 있었습니다. 이제 그분은 하나님의 오른편 영광의 자리에 앉아 계십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시들해 지거든, 그분의 이야기를 하나하나 되새기고, 그분이 참아내신 적대 행위의 긴 목록들을 살펴보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의 영혼에 새로운 힘이 솟구칠 것입니다!” (히브리서 12:1-3 유지 피터슨의 번역 메시지)

 

이 텍스트 가운데 이민 목회와 디아스포라 선교에 대한 십자가 신학의 핵심적 개념들 다             음과 같은 단어들로 설명 되고 있다.

 

길, 개척, 경주, 달려감, 결승점, 예수, 십자가, 수치, 참음, 적대행위, 영광, 새로운 힘 – 히브리서는 이런 것들이 바로 십자가 신학에 대한 주요 개념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지난 날 내가 호주에서 이민목회자로 살아온 33년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오직 참고 살아온 일생이라 할 수 있다. 나는 목회란 인내의 경주요, 인생이란 누가 더 잘 참나, “참기 내기”의 시합 이라고 믿어왔다. 나는 설혹 내가 아무리 잘 참는다 하더라도 예수님 만큼은 참지 못한다고 생각하면서 참았다. 예수의 인내가 내 인내의 사표이다. 나는 한 때 너무나 억울해서 자살을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죽음으로 나의 억울함을 증명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죽지 않았고 지금까지 살아있다. 오직 목회란 배신에 대한 신뢰요, 미움에 대한 용서요, 억울함에 대한 사랑이라고 믿고 그냥 묵묵히 참아왔다. 젊은 날, 철 없었던 학생 시절, 부모님의 가숨에 못을 박고, 잘난 척하고 의로운 척 하면서 선생님들과 선배들에게 함부로 막 말을 하며 대들었던 벌들을 지금 그냥 그대로 다 받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 하면서 이민목회자의 길을 걸어왔다.

 

그러나 주변을 돌아보면 나의 인내란 실로 아무 것도 아니다. 나는 적어도 배 부르고 등 따습게 살아온 사람이 아닌가! 아이들 학교 보내고, 아플 때 병원 가고, 먹고 입고 사는 데 있어서는 큰 고난 없이 지내온 사람이 이제 와서 무슨 고생이니, 억울함이니 하면서 인내 운운 할 자격이 있을까? 우리 주변에는 일차적 삶의 문제 조차도 해결 받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불안하게 살아가는 목사들과 가정이 적지 않게 많이 있다. 영주권 없이 불안한 신분 상태로 살아가는 목사들이 한 둘이 아니다. 청소하는 목사, 막 노동하는 목사, 택시 운전하는 목사, 타일을 붙이는 목사, 김씨, 이씨, 박씨 라고 불리 우며 험한 일을 하는 목사들도 많이 있다. 그러면서도 주일이 되면 또 다시 몇 명 되지도 않는 교인들을 앞에 놓고 기도하며 찬송하고 설교하는 목사들이 우리 주변에는 많이 있다는 말이다.

 

목사 부인들의 삶은 어떤가? 공장에 다니는 사모님, 남의 가게에서 일 하는 사모님, 하숙을 치는 사모님, 시도 없고 때도 없이 밥상 차리고, 아이들 학교 데려다 주고, 데려오면서 택시 운전사 보다도 더 고달프게 살아가는 사모들이 얼마인가?  그러다가 몸은 병들고,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암 세포가 온 몸에 퍼지고, 집을 나갔다가 변사체가 되어 돌아오고, 그러면서도 허구한날 남편 뒷바라지에 여념 없이, 심방하고, 상담하고, 전도하며, 욕이란 욕은 다 먹어가면서 동서남북으로 뛰어 다니는 목사 부인들 ! 이들이야말로 가정부나 식모나 아줌마 측에도 들지 못하는 빗 좋은 사모들이 아닌가? 출발과 과정은 어찌 되었든 오늘 이민자들에게 주어진 고난의 현장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인내를 바라보며 참으면서 사람들과 함께, 사람들과 하나가 되어, 십자가의 길을 걷는 디아스포라 목회자들과 선교사들과 그들의 가정에 진실로 은혜와 축복이 가득 하기를 기도한다. 

 

원래 목사의 길이란 죽음으로서 생명의 길을 선택한 사람들의 행로 이긴 하지만 이민목회자의 길은 더더욱 죽기로 결심한 사람들 만이 가는 길이다. 이 땅에서는 아예 죽기로 작정을 하고 저 세상에서나 잘 살아보기로 마음 먹은 사람들이 떠난 선교 여행이 이민목회자의 길이다.

 

여기서도 대접받고 저기서도 대접 받는 것은 불공평한 일이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출세한 사람들, 이 땅에서 존경 받고 잘 사는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가서도 또 똑같은 대접을 받게 된다면 이는 결코 예수의 길이라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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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과 인내를 거치지 않고도 그리스도인이 되는 길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라 가는 것이요, 그의 제자로써 목회자와 선교사가 된다는 것은 그의 스승 예수를 따라 골고다의 길, 십자가의 길을 걷는 것이다. 십자가 없이는 부활도 없고, 고난 없이는 영광도 없고, 죽음 없이는 생명도 없다는 점을 분명히 하는 것이 기독교이다. 고난과 죽음은 그 자체로써 이미 충분한 가치와 의미를 지닌 예수의 길이다. 설혹 고난 이후에 주어지는 상급이 없다 하더라도 고난은 고난 그 자체 만으로도 이미 값지고 위대한 하나님의 은혜요, 축복이다. 이것이 바로 고난의 신비요, 우리가 참고 인내 해야 할 진정한 이유이다.

 

어느 은퇴목사의 회고 -4

<떠남, 버림 그리고 만남>

호주에서 33년간 이민목회를 정리하시고 은퇴하신 홍길복목사의 글 연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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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스토리들이 주는 의미

 

이제는 위에서 나누어 본 몇 가지 이야기들을 통하여 이들 이민 목회와 디아스포라 선교의 경험담이 주는 의미를 살펴보고 그에 대한 신학적 반성(Theological Reflection)을 해야 할 차례다. 두가지 교훈이 있다고 보는데 이는 모두 다 기독론과 관계된다. 기독교란 결국 예수에 대한 이해와 해석과 고백이요, 그렇게 깨닫게 된 그 예수를 주와 그리스도로 믿고 따라가는 삶이기 때문이다.

 

첫째로 이민목회와 디아스포라 선교는 그리스도의 화육사건(The Incarnation )의 연속적 재현이다. 이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하나님의 도성인신 사건을 기억하고 회상하며, 더 나아가 그리스도를 따라, 그와 더불어, 그가 가신 길을 따라가는 행동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기독론을 끊임 없이 연습하는 과정이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자기 자신을 생각 하셨던 방식으로 여러분도 자기 자신을 생각 하십시오. 그 분은 하나님과 동등한 지위에 계셨으나 스스로를 높이지 않으셨고, 그 지위의 이익을 고집 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조금도 고집하지 않으셨습니다! 때가 되자, 그 분은 하나님과 동등한 특권을 버리시고, 종의 지위를 취하셔서, 사람이 되셨습니다! 그 분은 사람이 되셔서 사람으로 사셨습니다. 그것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자신을 낮추는 과정이었습니다. 그 분은 특권을 주장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사심 없이 순종하며 사셨고, 사심없이 순종하며 죽으셨습니다. 그것도 가장 참혹하게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빌립보서 2: 5-8, 유진 피터슨의 신약 번역 “메시지”)

 

예수의 성육신 사건은 행위의 변형이 아니라 존재의 변화이다. 이는 겸손하게 행동 하신것이 아니라 겸손한 인간이 되신 본질적 변화를 의미한다. 그야말로 두잉(doing)이 아니라 비잉(being)의 문제이다. 하나님은 진짜로 사람이 되셨지, 사람이 되신 것처럼 가면을 쓰고 찿아 오신 분이 아니다. 이 하나님이 하나님 되심을 포기하고 참 사람이 되신 사건이야 말로 기독교 신앙과 신학의 모든 것을 아우르는 본질이고 핵심이다. 

 

그런 각도에서 이민자들과 이민교회는 예수를 다시 설명하고 기독론을 재해석한다.

 

이민자들에게 있어서 예수는 누구인가? 우리에게 있어서 예수는 이민자다. 그는 하늘에서 땅으로 이민을 왔다. 뿐만 아니라 예수는 베들레헴을 떠나 에굽에 가서 피난 살이를 했다. 그는 여권도 비자도 없이 불법체류자로 살았다. 그는 이천 년전에 이미 보트 피플(boat people)로 국경을 넘어간 불법 입국자였다. 그의 고국 이스라엘로 돌아온 후 그는 나사렛 사람이 되었다. 자신이 태어난 출생지와는 전혀 상관 없는 땅에서 <나사렛 사람>이라는 칭호를 받으며 주변인간, 변두리 사람으로 사셨다. 그는 한번도 의사 결정의 중심부에 들어가지 못했다. 버려진 땅에서 잊혀진 사람과 함께 정치적 억압과 경제적 수탈 가운데서 고난의 시대를 사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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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이민사건은 하나님의 <떠남>과 <버림>으로 시작이 되었다. 그는 높고 높은 하늘 보좌를 <떠나> 낮고 천한 인간 역사 속으로 들어 오셨다. 동시에 그는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을 <버리고> 사람이 되셨다. 그리하여 <떠남>과 <버림>은 하나님의 구원역사와 기독교 선교의 본질이 되었다.

 

떠나지도 않고 버리지도 않은 교회는 아직 교회가 아니다. 아직도 여전히 자기 땅에 머물러 있는 사람들은 진정한 예수의 제자라고 할 수 없다. 성서는 모두 것을 버리고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에덴을 떠나고 시날 평지를 떠나고 갈데아 우르를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로 부터 시작이 되어 그랄과 불레셋을 떠나고 다시 하란과 가나안을 떠나고 마침내는 애굽을 떠난 사람들의 떠나고, 버리는 이야기가 이어진다. 나라 잃은 유대인들은 조국을 떠나 이역에서 포로의 삶을 살았으며 나그네와 행인이 되었다. 디아스포라 유대인은 유대인의 정체성이며 심볼이다. 신약시대의 제자들은 부모와 이웃, 형제와 친구들을 떠나면서 배와 그물, 전통과 관습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갔다. 일세기 그리스도인들은 환란과 핍박 가운데서 동서남북으로 흩어져 죽음의 행진을 계속했다.  그들의 흩어짐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넓히는 촉매와 출발점이 되었다.

 

하지만 오늘날 한국교회는 아직 떠날 준비 조차도 되어 있질 않다. 그러니 버린다는 것은 생각도 할 수 없다. 한국의 크리스챤들은 하늘에서 내려온 경험도 없이 하늘로 올라 갈 생각을 하고 있다. 죽지도 않고 부활을 노래하는 것은 헛되고 우스운 일이며, 버리지도 않고 얻겠다고 하는 발상은 어리석은 일이다. 다행히도 오대양 육대주에 흩어진 디아스포라 코리안들은 일단 지리적으로나마 떠난 사람들이다. 이제 그들에게 숙제로 주어진 요구 사항은 이 지리적 떠남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정신적 이별과 함께 영적인 순례의 길을 걷는 일이다.

 

하늘을 떠나 땅으로 오신 하나님은 이제 사람들과 <하나>가 되었다. <떠남>과 <버림> 다음에는 새로운 <만남>이 있어야 한다. 땅으로 내려오신 하나님은 흙과 먼지로 만들어진 인간들을 만나 주셨고 그 인간들과 하나가 되었다. 더 이상 하나님은 하나님이 아니라 온전한 사람이 되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그 말씀이 살과 피가 되어 우리가 사는 곳으로 오셨다” (요한복음서 1:14절, 개역 개정판과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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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목회는 조국과 함께 그 땅에서 맺어졌던 모든 과거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일체의 전통과 습관, 문화와 역사를<떠남> <버림>으로 시작되어,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관계를 맺음으로 꽃피어 진다. 하지만 몸은 떠났지만 생각과 마음은 여전히 경상도와 전라도, 강원도와 충청도 그 어느 곳에 붙박이처럼 박혀 꿈적도 하지 않는 이민자들과 이민 목회자들이 많이 있다. 아직도 나를 이 땅으로 부르신 하나님의 음성은 듣지 못하고 혹시 한국의 어느 교회에서 나를 불러주지나 않을까 하면서 기웃거리는 사람은 아직 떠나지도 않았고 버리지도 않은 사람들이다.

 

오늘날 이민목회와 디아스포라 선교를 포함한 모든 인간의 선교행위는 아직도 1세기의 가현설(Docetism)을 넘어서지 못한채 표류하고 있다. 세상은 교회가 생각하는 것처럼 어수룩하지 않다. 우리가 정말로 가난한지, 아니면 그냥 가난한 척 하고 있는지, 교회가 진짜로 세상을 섬기고 사랑하는지, 아니면 그냥 겉으로만 섬기고 사랑하는 척 하는지, 목사들이 참으로 겸손한지, 아니면 그냥 내숭을 떠는지, 훤히 우리들의 속을 다 들여다 보고 있다.

 

몸에 밴 권위주의적 생각과 습관에 매여 목사랍시고 손가락으로 지시만하고, 물질에 눈이 어두워 높은 연봉과 좋은 사택, 좋은 자동차에만 관심을 갖고, 삼박자 축복을 포함한 기복주의 신앙에 젖에 아무나 보고 축복한다며 자신을 무슨 축복의 통로 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이 새로운 선교의 현장에 적합한 사람이 못된다. 이민목회는 나라 떠나 찢기고 상처 투성이인 이민자들과 하나가 되어 그들 가운데서 그들과 함께 생각과 삶을 같이 하고 동고동락하는 동화작업이다. 목사나 선교사는 목자이고 신도나 교민들은 양 이라고 생각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며 이는 개혁 신학이 아니라 카톨릭적 발상이다.

 

목사는 그리스도의 대행자가 아니라 그의 보살핌을 받아야 할 양이다. 인간은 모두가 다 하나님의 양이고 오직 예수만이 목자이다.

 

어느 은퇴목사의 회고 – 3

이야기 여섯 – “목사동무란 우리 당서기 동무하고 비슷한 사람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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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호주에도 탈북 동포들을 위시하여 북한에서 온 사람들이 꾀 많이 있는 편이지만 20년 전에는 그렇질 않았다. 그런데 마침 북한의 국가 대표 운동선수를 지낸 분이 어찌어찌 해서 호주에 와 우리 교회 근처에 정착하게 되었다.

처음 그이는 스스로 자유를 찿아 망명을 해 오긴 했지만 자본주의, 자유의 땅에서 홀로서기가 그리 쉽게 보이질 않았다. “도대체 국가란 뭘 하는 뎁니까? 집도 자기가 구해야 하고 직장도 스스로 찿아야 하니 참 답답 합니다” 그는 호주에서 사는 것에 불만이 싸이기 시작했다.

배급도 없고 배치나 조직도 없이 모든 일을 자신이 알아서 스스로 해야 한다는 것은 여간한 훈련이 없이는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유에 대한 경험이 없는 사람은 아무리 큰 자유를 주어도 그것을 누릴 수가 없다.

그는 교회라는 말 자체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교회란 북녘에서는 듣지도 못했고 보지도 못한 곳 이라고 했다. 그래도 교인들이 여러모로 친절하게 대해 주니 사람들을 따라서 몇 달 동안 꾸준히 교회에 나와 예배에 참석했다.

그러던 어느날 교회에서 점심을 먹는데 그는 이렇게 말 했다. “목사님, 그 동안 목사가 뭐 하는 사람인가 했더니 이젠 알겠습니다. 목사 동무는 우리네 당 서기 동무 하고 똑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군요”

호주에서의 이민목회는 일일이 찿아가지 않고서도 한 자리에서 거의 모든 세계인들을 다만날 수 있는 기회이다. 호주는 그야말로 인종과 국경, 언어와 문화, 사상과 종교의 전시장이기 때문이다. 북한에 가지 않고서도 많은 북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고 그들과 함께 복음을 나눌 수 있다. 지난날 공산주의 체제 속에서 사회주의 사상의 세례를 받은 이들에게 기독교는 여러가지 측면에서 용이하게 접근하여 가장 평이하게 복음과 기독교를 이해시킬 수 있는 교회사적 역사와 경험을 지니고 있다. 비슷한 목적에 다른 방법론을 적용해 보도록 그들을 설득 할 수 있는 장점 또한 우리 교회는 지니고 있지 않는가 말이다. “목사 동무는 우리네 당 서가 동무 하고 비슷한 사람이군요” 이 한마디는 참으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은 말이다.

뿐만 아니라 호주 이민교회는 미국 이민교회와는 또 다른 각도에서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갖고 있다. 이는 흔히 말하는 북한선교나 북한의 복음화 차원이 아니라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적 이념과 자본주의 혹은 시장경제적 사상을 결합 하거나 넘어서는 역사의 새로운 지향(Aufheben)을 주도 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이 우리네 디아스포라 한인교회에게는 주어져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호주는 미국식 자본주의 와는 일정한 거리가 있다. 동시에 호주는 사회주의적 경제구조를 퍽 많이 채용하고 있다. 호주에 있는 디아스포라 한인교회는 직접 조국의 평화와 통일을 위해서 일할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장차 통일된 조국의 정치와 경제체제에 있어서 제 3의 대안을 제시하기 위해 고민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고 본다.

선교의 궁극적 목표 중 하나는 결국 개개인의 구원 뿐 만이 아니라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나가는 데 있다. 세계에 흩어진 디아스포라 한인교회의 존재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은 왜 우리 한인들을 디아스포라로 부르시고 또 목사들을 당서기 동무 비슷하게 만드셨을까, 생각 해 보면 멀고 깊은 하나님의 신비와 계획이 보이는 듯 하다.

이야기 일곱 – “당신은 독재자야!”  “당신은 바람 난 목사야 !”

벌써 15년도 더 된 이야기 이지만 당시 나는 전에 있던 교회에서 회오리 바람에 휩싸였다. 나는 이미 그 교회에서 18년이나 목회하던 중 이었다. 지난 날 한국에서 정치적 장기집권과 유신체제를 비난하고 싸우다가 감옥에 갔던 내가 그 대통령과 비슷한 기간을 한 교회에서 보냈다. 초창기 교민사회는 교회를 돌보는 일 이외에도 할 일이 참 많았고 또 교민들의 수는 날로 증가 하던 때 였으니까 나열식으로 말하자면 나 역시도 그 대통령 처럼 여러가지 퍽 많은 일을 하긴 했다. 그러나 그런 행사나 프로그램은 하나도 중요한 일들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나는 권위주의적 교단이나 신비적이고 은사중심적 교회 출신이 아니라 비교적 개방적인 신학과 민주적 교회 행정 체제 속에서 훈련 받아온 사람으로써 이미 한 교회에 너무 오래 있었다.

갈등과 고민 중에 있던 나에게 드디어 한 사람이 전면에 나타났다. 그는 제직회원이 아니면서도 수시로 제직회에 참석하여 소란을 피웠다. 긴 과정을 다 쓸 수는 없으나 나는 여러가지 신앙적이면서 또 합법적인 절차와 과정을 통하여 그 사람을 교회에서 출교 조처 했다. 그러자 그이는 더 거칠게 나왔다. “홍목사, 당신은 독재자야! 이제 우리교회를 떠나!” 그는 나를 불러내어 싸우자고 했다. 경찰에 고발도 하고 교단의 주 총회에 진정도 했다.

나와 그리 관계가 좋지 못했던 교민 신문에서는 나에게 여자문제가 있다고 소설 같은 기사를 만들어 길게 글을 썻다. 터무니 없는 일이지만 때때로 소문은 진실 보다 더 무서운 힘을 발휘한다. 나와 교회가 소속된 호주연합교회의 시드니 노회가 나서서 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조사를 했다. 나를 포함하여 신문에 보도된 사람들을 불러 두 달이나 조사를 한 후 “홍목사에게는 아무런 성적인 비행이 없었다”고 확인하고 공문을 보내어서 그 사실을 교회에 공고 했다.

그러나 사실 여부를 떠나 나와 우리 가정은 이미 커다란 상처를 입었다. 나는 계속하여 그 교회에서 목회 할 힘을 잃었다. 대다수의 교인들이 나를 이해하고 지지 한다 하더라도 적극적으로 나를 반대하는 사람 한 명을 상대하는 것이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교인을 이길 수 있는 목사는 하나도 없다. 나는 노회에 사임서를 보내고 환송예배를 드리면서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한 교회에서의 18년 목회를 마무리 했다.독재자가 따로 이겠나? 18년이나 한 교회에 있었으면 그 자체가 이미 독재인 것을!

그 일을 경험 하면서 나는 두가지 교훈을 받았다.

하나는 교만하면 망한다는 성서적 진리를 확인한 것이다. 나 자신이 평생을 가르치고 배워 온 진리를 그제서야 몸으로 깨달았다. 사실 나는 겉으로는 늘 웃으며 상냥한 척 했지만 속으로는 교만한 사람이었다. 시드니에는 교회도 많고 목사도 참 많이 있지만 속으로는 우리 교회가 최고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렇게 된 것은 모두 다 내가 열심히 하고 잘 해서 그리 된 것 이라는 마음이 자라를 잡고 있었다. 시드니에는 이미 수 백 명의 목사들이 있지만 나 만큼 보수적이며 복음적인 배경을 지니고 또 좋은 대학과 신학교에서 정상적으로 공부한 후 목사가 된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은근히 속으로는 허세를 떨었다. 늘 겉으로는 겸손한 척 하고 모든 것이 다 주님의 은혜라고 그럴싸하게 말은 하면서도 진짜 속으로는 참 교만했다. 하나님은 나의 교만을 무너뜨리기 위하여 나에 아주 특별한 훈련을 시키셨다.  지금 나는 이 세상에는 아무리 나이가 어리고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나보다 못한 목사는 한 사람도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동시에 나는 그 사건을 통하여 “그 어떠한 경우에도 사람을 믿어서는 안된다, 오직 하나님 만 신뢰해야 한다”는 교훈을 받았다.

인생과 신앙의 가장 기본적 진리를 목사 된지 25년이 넘어서야 다시 배웠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나는 바보 중에 진짜 바보다. 교인을 포함하여 인간이란 그 어떤 경우에도 결코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목회에 있어서 교인은 사랑의 대상이지 신뢰의 대상은 아니다. 그런데 여기에 또한 갈등이 있다. 목회란 하나님을 믿음과 동시에 끊임 없이 사람과 사람 사이에 믿음과 신뢰를 쌓아가는 훈련인데 교인을 믿어서는 안된다니 이 무슨 어불성설인가 말이다. 하지만 이것이 목회의 갈등이고 목회의 예술이다. 믿어서는 안되는 인간을 믿어야 하고 그 믿음으로 인하여 넘어지게 되고 또 상처와 생채기가 생긴다 하더라도 그래도 믿어 볼려고 하는 기나긴 여정이 목회자가 가야 할 길이다.

“믿을까? 말까?” 나는 지금도 절대로 사람을 믿지 않으리라 하면서도 오늘도 그 인간을 믿음으로, 이미 예정된 실패의 길을 걷고 있다. 행복과 불행은 분명하게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지질 않는다. 행복 속에도 불행이 있고 불행 속에도 행복이 있다. 믿음과 불신 역시도 꼭 두 가지로 갈라지지는 않는다. 신뢰 속에도 회의가 있고 의심 가운데도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목회와 선교, 인생과 역사는 이런 갈등 속에서 이어지는 모순이요, 갈등이다.

어느 은퇴목사의 회고 – 2

호주 시드니우리교회에서 32년 6개월 동안의 이민 목회를 마치시고 은퇴하신 홍길복목사님의 글 <호주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 목회 이야기> 가운데 제 3장에 있는 “나의 이민 목회 이야기” 두번 째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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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 셋 – “선생님, 한대 피우시지요”

아주머니는 벌써 몇 달 째 교회에 나오는데 아저씨는 아직 교회에 출석 하지 않는 가정을 방문 하게 되었다. 집에 가 보니 마침 그 자리에는 주인 아저씨를 비롯하여 두어 분의 친구들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서로 통성명을 한 다음 자리를 잡고 앉자 그 댁 주인 아저씨가 선듯 앞 주머니에서 담배 갑을 꺼내더니 그 중 한 개비를 빼내어 내밀면서 아주 자연스럽게 말 했다. “선생님, 한 대 피우시지요” 나는 순간적으로 잠시 당황 했고 “저는 담배를 피지 않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러자 분위기는 약간 썰렁해 지고 말았다.

아마도 그 아저씨는 보통 한국 목사들은 천주교회의 신부들이나 서구 목사들과는 달리 전통적으로 담배를 피지 않는다는 점을 잘 모르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후 생각 해 보니 나 역시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우리 나라에서는 당시 처음 만난 사람들 사이 에서는 우선 담배부터 권하는 것이 하나의 습관이요, 또 인간 관계에서 친밀도를 높이는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전혀 몰랐던 것이다.

교인들은 목사를 모르고 목사들은 교인들을 모른다. 교회는 세상을 모르고 세상은 교회를 모른다.

모르는 사람들이 피차 간에 오해를 줄이고 가까워지는 방법은 서로서로 자신의 무지와 한계를 인정하고 상대방을 이해하고 용납 하려고 하는 마음 가짐이라고 본다. 목회나 선교란 세상과 교회가 서로를 이해해 가는 하나의 과정이다. 교회나 목사는 이 세상을 다 알고 이 세상은 늘 교화 되어야 만 할 대상이라고 여겨서는 안될 것이다. 목회나 선교는 끊임없이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 지는 훈련이기 때문이다.

하기야 이와는 다른 각도에서 나는 처음 호주에 왔을 때 같이 한 교회당을 사용하는 호주 목사님에게 실수했던 경험이 있다. 그 목사님은 예배가 끝난 후 예배당 입구에 서서 성도들과 악수를 할 때 마다 우선 담뱃불 부터 붙여 입에 물고서 인사를 하는 것이었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어느 주일 예배 후 나는 차를 마시면서 그 목사님께 한국교회에서는 보통 목사들은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고 이야기 했다. 그러자 그 이는 아주 정색을 하면서 담배는 자기의 가장 좋은 친구이며 기호라고 하며 몹씨 언짢아 했다.

세상이란 나와 다른 생각을 하고 또 나와는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다. 교회든 세상이든 다양한 사람들의 다양한 생각과 다양한 삶의 모습 때문에 모든 것은 아름답고 풍성해 진다. 모든 목회나 선교는 주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받기도 하고, 가르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기도 하는 상부상조요, 상호교류 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 넷 – “목사님이 요즈엔 날 사랑하지 안챦아요 !”

교우 가운데 늦게 아들을 낳은 댁에서 토요일 오후에 돌잔치를 할려고 했다.

날짜와 시간과 장소를 정하고 목사에게 구역식구들 모두를 초청하고 싶은데 좀 연락을 해 달라고 했다. 나는 즉시 담당 구역장에게 이야기를 전하고 꼭 구역식구들 모두에게 연락을 해서 많이 오셔서 축하해 드리도록 부탁을 드렸다. 그 여자 집사 구역장은 그리하겠다고 대답을 했고 주일예배 후 다시 확인도 했다.

그 주말 오후 우리부부와 다른 부교역자 부부가 함께 시간을 맞추어 그 댁에 도착 했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장로님 부부 두 가정과 그 여자 구역장 만 와 있었다. 구역식구들은 한 분도 오질 않았다. 한 2-30분이나 기다렸다. 당황도 되었고 좀 이상한 생각도 들었지만 그냥 예배를 드린 후 구역장 되는 그 여자 집사에게 물었다. “집사님, 왜 구역식구들이 한 분도 못 오셨나요? 혹시 연락을 못하셨나요?”

그러자 그이는 갑자기 눈가를 적시면서 이렇게 말했다. “요즘 목사님과 사모님이 나를 사랑하지 안챦아요!”

이민자들을 포함하여 인간이란 거의가 다 크고 작은 상처를 지니고 인생길을 걸어 간다. 사람은 밥만 먹고 사는 존재가 아니다. 동서남북, 남녀노소, 빈부, 유무식을 막론하고 인간은 사랑을 받아야만 살 수 있다. 관심, 배려, 이해, 동정, 나눔, 대화, 베품과 같은 여러가지 형태로 표현 되는 사랑이 바로 목회요, 선교다. 목회와 선교는 사랑 이상도, 사랑 이하도 아니다. 특히 나라 떠나 이역에 와서 사는 사람들은 더욱 더 사랑에 허기진 사람들이다. 목회와 선교는 영원한 사랑의 연습이다. 사랑으로 했는데도 안되는 일은 정말로 안되는 일이다.

목회와 선교를 포함한 일체의 인간역사는 사랑으로 하면 반듯이 이루어 지게 되어있다. 만약 우리에게 아직도 그 무엇인가 이루어 내지 못한 일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아직도 충분히 사랑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랑이란 죽고 싶도록 억울한 일도 넘어서고, 일체의 분노와 슬픔과 쓰라림도 지나서 그냥 말 없이 희생하고 죽는 일 이기 때문이다. 죽었는데도 안되는 일은 정말 안되는 일이다. 그러데 나는 아직도 죽지 않고 살아 있지 않는가!

모든 살아 있는 선교사들과 목회자들은 아직도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요, 그들이 전하는 복음의 주체이신 예수가 누구인지를 제대로 모르면서 선교사와 목사가 된 사람들이다.

“목사님이 요즘은 나를 사랑하지 안챦아요!” 자주 생각나는 말이다.

이야기 다섯 – “목사님, 명예박사 학위 하나 드리고 싶습니다”

호주에서의 이민목회가 한 15년쯤 되었고 내 나이 막 50 이 넘었을 무렵 한국에서 한 후배 목사가 찿아왔다.  이름은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던 사람이었고 그가 번역한 책도 한 권 가지고 있었다.

그는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미국의 어느 신학대학에서 나에게 명예신학박사 학위를 줄려고 한다면서 그 학교에 장학금 조로 약간의 도네이션을 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선듯 기분 좋은 생각도 들었지만 나는 그럴만한 사람이 못 된다고 하면서 사양을 했다. 그는 나를 추켜세우면서 목사님은 넉넉히 명예박사를 받을 만한 자격이 있고도 남는다고 하며 한편으로는 그 신학교에 대해서도 믿음을 줄려고 여러가지 좋은 이야기를 했다. 하지만 나는 좀 더 생각 해보고 기도 해 본 다음에 다시 연락을 하겠다고 했다.

그가 돌아 간 다음 나는 진정으로 나를 아끼고 평소 나를 많이 후원해 주는 내 멘토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그는 정말 잘 했다고 나를 칭찬하고 그 목사나 그 신학대학은 모두가 다 그런 식으로 학위를 남발하는 엉터리라고 하면서 그런 학교에서의 학위는 훗날 오히려 나에게 큰 불명예가 될 것 이라고 했다.

목회나 선교나 그 무엇이든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큰 바탕이 되는 것은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며 자신의 한계와 부족을 인정하고 겸손하게 살아가는 것임을 어찌 모르랴!

물질과 명예를 탐하고 잘난 척 하다가 결국은 잘못 되어지는 경우가 어디 정치계 뿐이겠는가? 목사 안수식은 죽을 때 까지 종으로 살겠다고 하는 “평생 노예 서약식”과 마찬가지 이다. 목사직이 무슨 대단히 높은 자리인줄 알고 가문의 영광 운운 하는 이들은 뭘 모르는 사람이다. 서글프게도 가짜 박사 중에는 신학박사가 제일 많다고 한다. 목사들 만큼 명예를 탐하고 권력을 따라 움직이는 이들이 어디 있겠나 싶을 정도이다. 예수는 목사도 아니었고 선교사도 아니었다. 그는 초등학교도 다닌 적이 없었고 학위 같은 것은 생각조차도 해 본 적이 없었는데 오늘의 교회와 목사들은 명예와 권력의 노예가 되어가고 있다.

오래 전에 평양에 가서 조선 그리스도교회의 지도자들을 만나고 봉수교회를 방문했던 적이 있었다. 그 때 그 곳에서 만난 이들은 말 할 때 마다 나를 “홍박사님, 홍 박사님!” 하고 불렀다.  참 민망 했다. 그래서 내가 “아, 저는 박사가 못 된 목사입니다” 하고 말하자 그 때 지금은 돌아가신 강영섭 목사님이 말했다. “남조선 목사님중에도 박사 아닌 목사가 다 있습니까? 참 이상한 목사님 이군요” 사람의 마음이란 참 묘한 것이어서 이럴 땐 나도 박사학위를 딸걸 하는 생각이 한 순간 들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리 생각질 않는다. 돈과 여자 그리고 명예와 권력은 한국이나 호주, 목회자나 선교사, 그 어떤 시대, 그 어떤 자리도 구별 하질 않고 찿아 오는 유혹자요 함정이다.

어느 은퇴목사의 회고 – 1

사는 게 바빠 잊고 지내다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나 이름만으로도 푸근해 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더더군다나 그런 이들의 반가운 소식을 접하다보면 “아하, 내가 잊고 지낸 이렇게 좋은 사람들과 시절들이 있었지…”하는 생각에 오늘 바로 이 순간이  참 귀하다는 것을 느끼곤 하는 것이지요.

호주에서 은퇴 소식을 전해 오신 홍길복목사님께서는 저희 부부가 결코 잊지 못하는 참 좋은 신앙의 길잡이자 선생이요, 형님이요 오빠요, 삶의 벗이라고 할 수 있는 분이시랍니다.

저희 부부가 열심히 연애에 빠져 있었을 때, 저희 부부를 손바닥처럼 들여다 보고 계셨던 분이랍니다.

그런데 참 33년을 뵙지 못했답니다. 참 송구한 일이지요.

그 분에 대한 이야기는 언젠가 또 다시 쓰기로 하고요. 오늘은 홍목사님께서 은퇴 소식을 전하시면서 주신 글  <호주 한인 디아스포라 교회 목회 이야기( My Ministerial Stories of Korean Diaspora Church in Australia)>를 몇 번이나 읽다가 단 한 분이라도 함께 나누어 읽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소개 드리려합니다.

꽤 긴 글 가운데 홍목사님의 호주 목회 이야기 부분을 발췌하여 앞으로 서너차례 연재해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3.          나의 이민 목회 이야기           –  홍길복 (시드니 우리교회  은퇴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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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6월, 나와 우리가족이 호주에 도착 했을 당시 우리가 가지고 온 짐 속에는 포크와 나이프가 있었다. 우리는 이 곳에 와서도 한국 음식을 먹을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 하지 못했다. 그만큼 우리는 호주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었고 우리에게 있어서 이 땅은 그져 모든 면에서 미지의 세계였을 뿐이다. 120년 전 죠셉 헨리 데이비스가 미지의 땅, 조선에 왔던 것과 같이 우리 역시도 미지의 땅 호주에 왔다. 정말 우리는 선교사처럼 이 곳에 도착했다. 생각도 준비도 마음의 태세도 여느 선교사들과 다를 바가 없이 우리는 이 땅으로 던져졌다.

우리 가족은 호주에 오자마자 시드니에서 서쪽으로 약 4천 킬로미터도 더 되는 퍼스(Perth)라는 곳으로 옮겨졌다. 그 곳에서 한 6개월을 머무는 동안 우리는 한편 공부를 준비하면서 한인교회를 개척했다. 그 곳에는 주로 광산 지역을 중심 하여 일하며 살아가는 한국 사람들이 약 3-40세대쯤 살고 있었다. 그 교회가 지금의 “서부호주한인교회” 이다. 우리는 그 곳에서 참 좋은 학습 기간을 보냈고 또 적지 않은 훈련을 했다.

그러다가 그 해 말 우리는 다시 시드니로 왔다. 평신도들 몇몇이 이전에 자신들이 다니던 “시드니 한인 연합 교회”를 떠나 새로이 교회를 설립하고 목회자를 찿고 있었는데 우리 가족을 호주로 초청한 죤 브라운 목사께서 우리를 그 교회에 소개 하였다. 그 교회가 지금은 32년의 역사를 지닌 “시드니 제일 교회”이다. 나는 이 교회에서 1998년 12월 까지 만 18년을 목회했다.

1973년 월남 전쟁이 끝나기 이전 까지는 시드니에 사는 우리 교민이 모두 3-40 세대 정도라고 알려졌고 1974년에 와서야 처음으로 한인교회가 시작 되었는데, 내가 시드니제일교회에 부임 할 당시 벌써 시드니에는 약 2천 여명의 한인들과  5개의 한인교회가 세워져 있었다.

1999년 1월부터 나는 시드니 제일교회를 떠난 사람들이 중심이 되어 설립한 “시드니 우리교회”로 부터 부름을 받고 지금 까지 만 14년 동안 이 교회를 섬겨 왔으며 오는 12월 은퇴를 앞에 두고 있다. 정말 커다란 격세지감을 갖게 된다. 그 동안 우리 한인 사회는 약 7만 명 정도의 영주하는 교민들과 4-5만 명을 넘나드는 각종 단기 체류자들을 포함하여 10-12만 정도의 커다란 공동체로 변화 되었다. 한인교회도 250개 를 넘어 300개에 이르게 되었고 각종 선교단체를 비롯하여 기독교 언론과 유관 단체들이 수 없이 많이 생기고 또 살아지기도 한다.

지난 날 들을 돌이켜보면 대한 예수교 장로회 통합측 출신의 목사로써는 처음 시드니에 와서 지난 30 여 년을 이 땅에서 살아오며 목회 해 온 나로써는 결코 적지 않은 종류의 다양한 인생살이와 목회 현장들을 경험해 왔다. 그리고 더 나아가 지난 날의 그런 경험들이 만들어 준 더 깊은 생각과 사고, 교훈과 철학, 그리고 인생의 지혜와 통찰이 지금은 나의 삶을 더욱 풍성하게 해 주고 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은혜요, 나를 둘러 싼 다른 사람들의 도움과 협력 이라고 생각 하며 오직 감사 할 뿐이다.

그 동안 호주 이민목회를 통하여 애기세례를 포함하여 세례와 입교 예식을 베푼 사람은 모두 819명이다. 156번의 결혼예식, 52번의 장례식, 1300여 번의 주일 낯 예배 설교, 8천 번을 넘어서는 심방,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기도회와 성경공부, 1650여 회에 이르는 상담과 1200번이나 되는 각종 회의 참석과 인도가 나의 목회일지에 남겨있다. 하지만 나는 이런 통계 자료 자체는 그리 중요한 이야기 거리가 될 수 없다고 본다. 오히려 나는 여기에서 내가 지난날에 경험 했던 목회 이야기들을 써 봄으로 좀 더 다듬어진 선교행위로써의 이민목회의 의미를 생각 해 보려고 한다.

 

이야기 하나 – “목사님, 콩나물 한 봉지만 사다 주세요”

할머니 신도 한 분에게 오늘 낯에 심방을 가겠노라고 전화를 드렸다. “ 목사님, 미안 하지만 심방 오시는 길에 한국 식품점에 좀 들려서 콩나물 한 봉지만 사다 주세요”  “예, 그렇게 하지요. 콩나물 말고 또 다른 필요한 것은 더 없으세요?” 요즘은 할머니나 할아버지들도 버스나 기차를 타시고 이곳 저곳 잘 다니시지만 초창기 한인 사회는 그렇질 못했다.

한인 공동체가 정착되어 가는 과정에서 이민교회는 전통적인 교회의 기능 이외에도 여러가지 사회 봉사적인 일들을 감당 해야 만 했다. 처음 오신 이민자나 방문자들을 맞아주고 바래다 드리기 위하여 수시로 공항에 드나드는 일은 필수적인 과제였다. 이민성을 찿아가 비자문제를 안내해 주고 아이들 학교에 입학시키느라 선생님을 찿아 가는 것도 목사의 일 이었다.

운전 면허증 시험을 치루도록 공부를 시키고 시험장으로 데려가고 통역을 해주는 일은 요즘 같아서는 운전학원이 하는 일이지만 30년 전에는 이 모든 것이 다 목회활동 이었다. 집을 얻는 일이나 차를 사는 일을 포함하여 할머니 혼자 사시는 분들을 위하여 쌀과 라면, 콩나물과 두부를 사다 드리는 심부름은 매우 중요하고 즐거운 사역 중 하나 였다.

1981년 5월 어버이날, 시드니에서는 처음으로 교민 사회 전체를 수소문하고 연락해서 38명의 할아버지와 할머니들을 시내 쎈테니얼 팤으로 모시고 가서 경로잔치를 열었다. 교회에 다니시든 성당에 다니시든 절에 다니시든 아무 상관없이 그 때 교회는 그렇게 하는 것이 이민자들을 섬기는 하나님의 선교 라고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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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둘 – “아저씨 되게 말 잘 하네요”

처음 퍼스에 가서 막 교회를 개척 할 때 였다. 하루는 주일 예배 후 모두들 둘러앉아 점심을 먹는데 한 20대 초반의 아가씨가 말했다. “아저씨, 아저씨는 어쩜 그렇게도 말을 잘 하세요?” 같은 테이블에 앉아서 식사하던 이들은 모두들 그 아가씨를 쳐다 보았다. 좀 이상하다는 반응이었다. 아무리 나이 어린 사람 이라 하더라도 목사를 아저씨 라 하고 설교를 말 잘한다고 하는 것이 어딘가 좀 이상하게 들렸기 때문 이었다. 하지만 차츰 이야기를 하다 보니 그 아가씨는 그 날 난생 처음으로 교회라는 데를 와 보았고 예배하는 자리에 참석 한 젊은이 였다.

그것도 나라 떠나 이역만리 호주에 유학 와 학교에서 만난 사람의 안내를 통하여 한국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이 있으니 한번 가보라고 해서 찿아 온 것이 교회였다. 보통 교회 다니는 이들은 세상에 아직도 교회에 대해서 그렇게도 모르는 사람이 다 있을까 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질 않다. 이 세상에는 기독교 이외에도 참으로 많은 종교들이 있고 또 그 어떤 종교에 대해서든 전혀 관심을 갖지 않고 한 평생을 살아가는 이들도 부지기수 이다.

인간이란 주로 끼리끼리 모여서 살아서 그렇지 기독교인들이 조금만 눈을 크게 뜨고 그들의 울타리 밖을 내다 본다면, 바다에는 물 반, 고기 반 이라고 하듯이, 한국과 같은 아시아 문화권에서 살아온 이들 중에는 죽을 때 까지 교회라고는 한번도 안가 보고, 목사라고 하는 사람은 한번도 만나보지 못하고 살아가는 이들이 참 많이 있다.

목사는 그냥 아저씨가 되고 목사 부인은 사모가 아니라 그냥 아줌마가 되는 것이 하늘 보좌를 떠나 사람의 아들이 되신 예수의 모습을 비슷하게 나마 재현 해 보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본래 예수께서는 평범하게 하셨던 말씀을 교회는 꼭 설교라고 하는 종교적 언어로 바꾸어야만 직성이 풀리겠는가? 선교행위로 써의 이민목회가 주는 반성이 적지 않게 많이 있다.

부끄러움을 넘어서

일본의 교과서 왜곡파동으로 시끄럽다.

일본 문제가 불거질 때면 등장하는 반일 구호와 현수막, 탑골공원의 궐기대회 사진과 함께 온통 반일 민족주의자들 뿐이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면 언제 그랬나 싶게 모두가 잠잠하다. 그러고 또 다시 애국적 저널리즘과 프랭카드, 반 세기 동안의 반복다.

이 점 일본도 마찬가지다. 적당히 눈치보며 과거를 정당화하다가 세 불리하면 슬그머니 꼬리를 뺀다. 그러다 가시 보수 우익을 앞세워 과거 찬양의 목청을 높인다. 때린 자의 부끄러움과 맞은 자의 부끄러움을 진정 헤아리지 못한 탓이다.

긴 역사의 눈으로 볼 때 먼저 그 부끄러움을 청산하고 이겨내는 민족이 앞설 것이다.  가해의 역사를 기록한 민족이 그 부끄러움을 청산하지 못하면 역사에서 사라져 버린다. 피해의 역사를 가진 민족이 그 부끄러움을 깨닫지 못하면 그 또한 맥이 끊긴다. 그것이 역사의 교훈이요, 종교적 역사관이다.

한민족의 역사를 훑다보면 일본 식민지 35년(일제 36년 – 이것 부터 고쳐야 한다. 만 35년에서 열 나흘이 빠지는 기간이다)보다 더 험난했던 세월이 있었다.

남도석성

고려 후기 13세기에 있었던 몽고족의 침략기간이 바로 그 때였다.

1206년 징키스칸이 몽골국가를 일으킨 후 그와 그의 군대가 지난 가는 곳마다 피바다를 이루었다. 징키스칸의 아들이 전장에서 죽자 그 지역 주민을 단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죽였다는 기록이 있고보면 그 잔인함이 오죽했으랴!

징키스칸의 아들 오코타이가 태종왕이 된 직후인 1231년, 장수 살레타이를 앞세워 한반도를 유린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1273년 4월 김통정 이하 70여명의 삼별초군이 제주도에서 최후의 항쟁으로 전멸하기까지 여섯 차례에 걸친 몽골군의 침략은 한반도 전체를 유린한 일대 사건이었다. 그리고 14세기 초 몽골족이 세운 원(元)나라가 망하기까지 100여년 간 한반도는 처참하였다.

(한반도의 역사보다 이스라엘 역사에 박식한 기독교인들은 바벨론 시대의 유대를 상상하면 될 것이다.) 고려인들 특히 가진 것 없었던 백성들과 천민들은 목숨이 다하도록 몽골족과 맞서 싸웠다. 당시 무신정권의 권력층들이 강화도로 피신하여 제 뱃속 차리기에 여념이 없어 그 곳에서도 권력다툼으로 나날을 보냈 때 그 정권 아래서 핍박받던 백성들은 목숨을 마다치않고  침략자들에게 대항하여 싸웠다.

삼별초 – 권력의 호위병들이었던 그들이 민족의 초병이 되어 마지막 한사람까지 침략자에게 대항하다가 죽은 역사는 세계사에 보기 드문 기록이다.

그 시절 가장 큰 피해자는 여성들이었다. 잔인한 적들과의 긴 싸움으로 많은 반도의 고려 여인들이 몽골인들에게 성을 유린 당하였다. 이것은 전쟁의 아픔 중 가장 큰 것이었다. 살아남은  자들의 가정마다 파괴될 상처였다.

도대체 제 몫을 못했던 당시 임금들 가운데 그나마 원종(元宗)임금이 왕 노릇 한 번 하였다.

“호수만복(湖水滿服) – 커다란 연못을 파고 “이 물에 몸을 씻으면 모든 더러움이 깨끗해 진다.”라고 선언한 임금의 명령으로 많은 여성들과 가정이 살아 남았다는 역사적 사실은 얼마나 거룩하기까지 한가?

그것은 종교다. 그것은 역사다.

요단강 강물에 흠뻑 담갔다 나온 몸이 깨끗해졌다는 믿음, 세례수 한 방울 머리에 떨어짐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믿음이 종교이듯, 더러워진 몸 연못에 들어갔다 나옴으로 깨끗해졌다는 사회적 약속, 또는 믿음 그것이 새 힘을 낳는다. 그것이 부끄러움을 털어 버리는 일이다. 제 부끄러움을 알고 털어버리는 의식, 그것이야말로 부끄러움을 넘어서는 일이다.

한국이든, 일본이든 먼저 하는 자가 이긴다. 민족뿐 아니다. 장삼이사(張三李四) – 평범하게 이 땅을 살아 갈 우리도 마찬가지다.

*** 오늘의 사족

2001년 3월 22일의 글이다.

얼핏 세상은 완전히 거꾸로 흐르는 느낌이다. 2013년 이즈음엔. 숨기고 감추고 뻔뻔하게 덧칠하는 세력들이 더욱 판치는 세상인 듯 하다. 모든 세(勢)들이 그리로 모이는 듯 하다.

그러나 아니다!

무릇 역사는 긴 호흡으로 보아야한다.

쌀값이 얼마인고?

묻노니 ‘스님, 불법(佛法)의 참 뜻이 무엇입니까?’ 답하노니 ‘요즈음 여릉(廬陵)의 쌀값이 얼마나 하는고? 중국 선불교의 고승 청원(靑原)행사선사(行思禪師)의 선문답(禪問答)이다.

행사스님(? – AD740)은 달마대사로 부터 시작된 중국 선종(禪宗)을 크게 꽃피운 제6조 혜능조사(慧能祖師)의 제자로서 남악스님과 더불어 선종사의 초석을 놓은 거목이다.

그에게 어느날 신회(神會)라는 스님이 와서 묻는다. ‘불법대의(佛法大意) 곧 부처님의 참 뜻이 무엇입니까?’ 이에 대한 행사스님의 답은 그야말로 엉뚱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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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음 여릉의 쌀값이 얼마나 하는고?’ 일컬어 <여릉의 쌀값>이라는 유명한 화두(話頭)이다.

행사스님이 계셨던 청원사로 들어 오려면 거쳐야 했던 여릉지방은 당시 쌀이 많이 나는 중국의 곡창지대이었다. 부처님의 길을 묻는 제자에게 한 대답  ‘여릉의 쌀값’은 곧 그 쌀이 존재하는 곳 바로 그 곳에 부처의 길이 있다는 뜻이다.

쌀은 예나 지금이나 대표적인 일상용품이다. 쌀값의 오르내림에 따라 울고 웃는 그 일상성을 되묻는 것으로 답을 대신한 행사스님의 큰 뜻은 바로 일상적인 것 속에 부처의 길, 불법의 참 뜻이 있다는 것이었다.

현실세계를 벗어나 이상적인 불법을 찾아 헤매는 제자에게 일상생활을 살아가는 구체적인 삶 속에서 불법의 참 뜻을 찾아 보라고 설파하시는 행사스님 말씀은 오늘을 곱씹게 한다.

도(道)란 원래 평상적 일상속에 두루 존재한다는 것이 동양사상이다. 노장(老莊)에선 이를 ‘도재평상(道在平常)’이라고 한다. 먹고, 마시고, 심지어 싸고 눕는 그 일상속에 도가 있다는 말이다.

예수는 삼년간 그의 공생애를 사는 동안 병든 자를 고치는 기적들을 많이 행하였다. 예수 당시의 병자는 몸이 아픈 사람 이전에 신으로 부터 저주받은 사람들로 사회로 부터 버림받은  자들이었다. 눈먼 자, 문둥병자, 정신질환자, 십지어 곰배팔, 절뚝발이까지  육체적 결함은 곧 신의 저주나 신 또는 조상의 죄의 댓가때문이라고 당시의 사람들은 믿고 있었다.

예수의 기적은 병고침 뿐만 아니라 신의 저주에 대한 거부, 나악 죄로부터의 해방까지 선포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교훈은 병 고치는 기적 이후에 한 예수의 행태이다.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마가복음 8:26)”

벳새다의 눈먼 자를 고치신 예수께서는 그를 집으로 보냈다는 이야기이다.

‘눈을 떳으니 나와 함께 가자’, ‘눈을 떳으니 이젠 천국으로 가자’, ‘눈을 떳으니 이제 나를 위한 전도만 하라’가 아니라 ‘집으로 보냈다’는 것이다. 곧 일상성으로 돌려 보냈다는 것이다.

자! 이제 기적에 의해 눈을 뜬 이는 집으로 돌아가 보이지 않았을 때의 그 답답함과 죄 때문이라는 속박에서 해방되었다. 그러나 그는 밝게 보이는 세상을 통해  새로운 도전과 번민을 맞게 되었을 것이다.

바로 그 고뇌가 뒤따르는 일상성의 회복이야말로 ‘하나님 나라’로 가는 지름길이었기에 예수께서 그리 명령하시지 않았을까?

지난 해 말 통계에 따르면 미국에 거의 3,000여개의 이르는 한인 교회들이 있다고 한다.

천주교 성당이나 불교사찰은 포함되지 않았으니 그 수가 또 얼마나 될지?

많을수록 좋다는데 자꾸자꾸 세우면 또 어떠하리.

다만 오늘, 여기, 이 땅의 삶을 업수이 여기는 믿음, 교회나 사찰이 오늘의 삶에서 동떨어져 안주하는 방주로 여기는 믿음, 평상심(平常心)과 분리된 열광만이 믿음이라는 독선만은 말았으면 하는 생각으로…

묻노니, 여보!  20파운드 쌀값이 얼마지?

 

*** 오늘의 사족

2001년 3월 15일에 쓴 글인데 어쩜 오늘도 그대로 유효한지…

일상성을 버린 믿음이란 무릇 공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