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Francis교황이 오늘 워싱톤 앤두류 공항에 도착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가 처음으로 밟는 미국 땅에도 그가 꾸어온 평생의 꿈인 “가난한 자들을 위한 교회”가 넘쳐나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영상 뉴스를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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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을 맞이하는 공항 모습에서 “왜 교황이 미국 땅을 밟았는가?”하는 답을 볼 수 있었습니다. 미국의 의전적 응대를 통해서였습니다. 오바마 대통령 내외와 두 딸들, 바이든 부통령 내외와 가족들이 교황을 맞는 모습은 교황이 필라델피아에서 열리는 세계가족대회(the World Meeting of Families)에 참석하는 뜻을 극대화 시킨performance였습니다.

아이들을 대하는 따듯한 교황의 모습을 보면서 지난 해 여름, 한국에서 보였던 교황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아이들을 잃고 애통해하는 세월호 가족들을 위로하던 교황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잇달은 생각입니다.

세계가족대회(the World Meeting of Families)와 교황(Pope)이라는 말들에 들어있는 몇 개의 명사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가치는 어떤 것일까 하는 생각입니다. 세계, 대회, 가족, 교황들 가운데 말입니다.

그런 생각 끝에 떠올린 천상병님의 시 하나입니다.


아버지의 감상

  • 천상병

청명한 연휴의 오후

가난한 아버지는

오래간만에 딸의 손목을 잡고

싱싱한 가로수 맡을 거닌다.

 

사람들은 모두 교외로 나가고

거리는 몹시도 한산한데

가끔 야외복차림의 가족을 태운

차가 질주한다.

 

갑자기

아스팔트 위에

떨어지는 햇살이

눈이 부시다.

“너 아이스크림 사주련?”

“괜찮아,아버지”

조그마한 딸의 손이

아버지 손아귀에서 꼼지락거린다.

아, 행복이 있다면

행복을 손에 잡을 수만 있다면

그것은 꼭

이 뭉클한 작은 손과 같을 것이다.

영화 “다이빙 벨”을 권하며

기독교 신학에 있어 미국의 위치는 그리 내세울 정도가 못됩니다. 물론 신학자들의 명성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지요. 그런 가운데 몇몇 명함을 내놓을만한 분들 가운데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 : 1892. 6. 21.- 1971. 6. 1.)가 있습니다.

그는 그가 쓴 책  <인간의 본성과 운명, The nature and destiny of man>에서 “교만(pride)”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답니다.

<사람의 교만(pride)에는 네가지 측면이 있는데 첫째는 권력의 교만, 둘째는 지적인 교만, 셋째는 도덕적 교만, 넷째는 종교적 교만>이라고 한 것이랍니다.

이즈음 제가 느끼는 사회적 현상은 바로 이런 교만들이 극에 달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답니다.

특히 저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드러내는 교만 가운데 하나이지요. 자신이 알고 있는 또는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것들만 진리라고 생각하는 교만으로 하여 남의 의견이나 남의 생각은 듣지 않으려하는 태도야말로 니버가 말한 교만의 집합체가 아닐까 한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지만 그 교만에 빠지지 않으려고 한가지 사건을 이해하려고 할 때, 일테면 똑 같은 하나의 사건을 보도하는 조중동과 한겨레, 경향, 오마이 때로는 일베와 고발뉴스 등을두루 살핀 뒤에 제 생각을 가름한답니다.

이 땅의 뉴스도 마찬가지랍니다. Fox 와 Washington Post와 함께 NewYork Times와 CNN과 동네 뉴스를 보고 나서야  생각을 가름하곤 하는 것이지요.

세월호 참사에 대해 “아직도?”라고 묻는 분들을 위하여, 니버목사가 적시한 교만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한번쯤 보시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동영상 하나 소개 드립니다.

보시기 전과 후의 생각에 차이가 없어도, 아니 본래 생각하셨던 “그래서 왜 아직도인데?” 하셔도, 저는 절대 그게 교만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니버목사가 말한 교만의 가장 큰 문제이자 죄란 듣지 않고 보지 않고 자신에게 갇힌 상태를 말한답니다. 그래 한번 보시라는 뜻으로 권해 드린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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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호를 다룬 <다이빙 벨>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다 보시고 난 후, “좌파들이 꾸며 만든 이야기”라고 하셔도 저는 당신의 생각을 존중할 것이랍니다.

아름다운 사람들에게

어제 필라델피에 있는 작은 교회당 Ambler Mennonite Church에서는 서른여명의 한인들이 둥그렇게 둘러 앉아 약 세시간여에 걸쳐 도란도란 서로의 가슴에 쌓였던 말들을 풀어 내었답니다.

그들 가운데는 필라 인근에서 뿐만 아니라 멀리 뉴욕, 뉴저지에서 오신 분들도 있었답니다. 그렇게 둘러앉아 이어진 이야기들은 정해진 시간만 아니었다면 밤조차 새울만한 분위기였답니다.

그 가운데 한분께서 하셨던 말씀입니다.

“이번 주초에 버지니아에서 있었던 TV 생방송중에 일어난 총기사건은 이 땅에 사는 모든 미국인들에게 엄청난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그 방송국이 커버하는 지역의 시청자들은 실시간으로 그 사건의 현장을 지켜보았으며, 모든 미국인들이 그 사건 현장의 영상을 볼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 뉴스를 보며 이런 생각을 했었습니다. 모든 국민들이 실시간으로 300명이 넘는 사람의 생명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그것도 여러날 서서히 죽어가는 모습을 생중계로 지켜보았던 것입니다.

비록 500일이 지났다고 하지만 그 충격적인 모습의 잔상은 제게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엊저녁에 필라세사모가 주최한 모임 “세월호 참사 500일 추모행사” 자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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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오늘8월의 마지막  주일 아침입니다. 멀리 500일을 돌아볼 것도 없이 8월 한달 동안의 뉴스 타임라인들을 되돌려 훑어봅니다.

사람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현장들에 대한 이야기는 세계 곳곳에서 하루 한시도 건너 뛰지 않고 어김없이 이어진 한달이었습니다.

더더군다나 다른 사람의 인격과 존엄을 “나” 또는 “우리”라는 개인이나 집단의 이해관계에 따라 짓밟고 망가트리고, 온갖 수모를 가하는 현장들은 오늘 이 시간에도 도처에서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보내는 2015년 8월 한달 내내 “사람 곁에 사람 곁에 사람”이 있는 세상을 꿈꾸며 애를 끓이고 도전하며 기도하는 무엇보다 작은 것 하나라도 그 일을 위해 실천하며 살고자하는 정말 평범한 사람들은 넘쳐난다는 사실을 기억합니다.

그런 평범한 모든 이들에게 온몸으로 드리는 박수와 함께 드리는 글입니다.


 

8-30

팔월 마지막 주일 아침입니다. 하루 남은 팔월의 달력을 보면서 이름이 팔월(August)인 소년 이야기를 드립니다.

이미 읽어서 잘 알고 계신 분들도 많겠지만 R.J. Palacio가 쓴  동화소설  Wonder의 주인공 이름입니다. 이미 뉴욕 타임즈 선정 베스트셀러였고 2015년 마크 트웨인 상을 비롯한 여러 수상도 한 이 책은 한국에서도 번역되어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답니다. 한국에서는 “아름다운 아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되었답니다.

소설의 주인공인 10살짜리 August는 자기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내 이름은August고요, 제 생김새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답니다. 제 생김새에 대해 당신이 어떤 생각을 하시든 그보다 추한 모습일 것이기 때문이랍니다.”

선천적 안면기형으로 태어난  August는 열살이 되기까지 스물 일곱번이나 수술을 받았지만 누구나 그의 얼굴을 본 사람이면 악몽을 꿀만큼 기이한 얼굴을 지닌 소년이랍니다. 하지만  얼굴 생김새를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지극히 평범한 10살짜리 아이랍니다.

이 소설은  열살짜리 August가 보통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 처음으로 들어가서 일년 동안 벌어지는 일들을 그리고 있습니다.

단지 얼굴이 이상하게 생겼다는 이유만으로 August를 평가하는 사람들의 편견과 학교아이들의 끈질긴 괴롭힘들을 불굴의 의지와 가족의 사랑, 친절을 베푸는 친구의 우정으로 극복하는 이야기랍니다.

이야기의 끝부분에 이르러 August는 이런 독백을 한답니다. “누구나 다 기립박수를 받을만 하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 세상을 헤쳐나가며 극복하기 때문에…”

팔월을 보내면서 이 달에도 여전히 듣고 볼 수밖에 없었던 슬프고, 아프고, 안타까운 세상소식들이 많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밝고 아름답고 희망찬 9월을 맞는 우리 모두에게 스스로 보내는 기립박수를 보낼 수 있는 하루가 되시길 빕니다.

It is the morning of the last Sunday in August. Looking at the calendar of August which has just one more day, I would like to share with you a story about a boy named August.

As many of you may know well, it is the name of the main character in the children’s novel, “Wonder,” written by R. J. Palacio. It was a number one book on the New York Times Best Seller List and it won several awards, including the 2015 Mark Twain Award. It was translated and published with a title, “아름다운 아이 (A Beautiful Child)” in Korea. It was loved by many people in Korea, too.

August, the main character and ten-year-old boy, introduces himself like this:

“My name is August. I won’t describe what I look like. Whatever you’re thinking, it’s probably worse.”

August was born with a rare medical facial deformity. Even after twenty-seven surgical operations, his face still looks strange enough to make those who see his face have a nightmare. However, except for his appearance, he is normal like any other ten-year-old kid in every respect.

This novel describes what August, who had been homeschooled until then, experienced during the first year at a prep school.

It is a story about how August overcomes the prejudice and distress due only to his facial deformity with his own unyielding will, love and support from his family, and warm friendship.

Almost at the end, August said to himself, “Everyone deserves a standing ovation because we all overcometh the world.”

I wish that all of us will give a standing ovation to ourselves as we enter September with a cheerful and bright mind, even though we could not avoid many sad, agonizing and deplorable incidents and news around us and in the world in August.

from Young Kim

아니, 아직도?

‘세살버릇 여든간다.’, ‘천성은 못고친다.’는 말들은 사람의 성품이나 습관이 쉽게 바뀌지 않음을 표현한 예들이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어릴 때부터 지녔던 못된 습관들과 성품들이 몸에 베어서 버리지 못하는 것들이 있다. 허나 예외없는 법칙이 없듯, 나이들면서 변하고 바뀐 것들도 있다. 일테면 ‘옳고 그름을 다투는 일’보다는 ‘같고 다른 것을 구별하는 일’을 우선하는 버릇들은 나이들어 바뀐 아주 좋은 예이다.

젊어서는 사물이나 사건 또는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을 ‘옳고, 그름’이라는 잣대에 두었다면(물론 그 판단대로 살지도 못했지만) 인생의 어느 지점을 지나면서부터인지 나도 모르게 그 판단기준을 ‘같고, 다름’에 두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옳다, 그르다’의 기준으로 세상사를 바라보면 삶의 긴장감에서 오는 맛을 느낄 수 있지만, 자칫 삶의 여유를 놓칠 수도 있다. 반면에 ‘같다, 다르다’의 기준으로 세상사를 바라보면 삶이 품을 수있는 여유를 한껏 넓힐 수는 있지만, 자칫 삶의 가치를 잃을 수도 있다.

어느덧 나이들어 ‘세상사 다 좋은 게 좋은거지라며 사니 참 편하더라’는 말이다. 이런 늘늘한 내 삶의 여유를 깨트린 것은 바로 바뀌었다고 생각했던 내 성품이었는데, “세월호 참사 500일 추모행사” 포스터를 보는 순간이었다.

미루어 짐작컨대 필라 인근에 사는 한인들중 이 포스터를 보는 순간 “아니, 아직도 세월호?”하시는 이들이 태반을 넘어 대다수를 차지하지 않을까싶다. “그게 언제적 이야긴데… 책임질 사람들 다 책임졌고… 보상금 다 주었고… 그만큼 국가가 애썻고… 더더군다나 놀러가다가 일어났던 사건인데… 그만큼 했으면…”이라는 말끝에 “이래저래 사는 일도 바쁜데… 아니, 아직도 세월호?” 라는 모습은 어찌보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헤드뉴스를 장식하는 기사들이 하루도 아닌 시간에 따라 바뀌는 세상에서 500일이나 지난 사건, 빨리 잊혀지기를 바라는 어둡고 아픈 사건을 구태여 자꾸 꺼집어내는 것은 분명 피곤한 일이므로 그 당연함에는 설득력도 더해진다.

그런데 바로 그 지점에서 “만일, 만일에  책임져야 할 사람들이 하나도 책임을 지지 않았고, 국가가 배보상금을 한푼도 주지 않았고, 국가는 사고원인과 책임을 감추기에 급급했고, 사고의 원인은 물론 책임자를 가리는 일을 방해했고, 향후 유사한 사건사고를 대비하자는 목소리마저 외면했다면…” 그게 언제적 이야기냐고 반문해서는 안되는 바로 오늘의 문제가 될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나름 삶을 늘 성서에 묻고사는 예수쟁이라고 내세우며 살고 있는 처지이므로 바로 이 지점에서 던져지는 질문으로하여,  “세월호 참사 500일 추모행사”에 한번 기웃거려 보려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가족을 잃은 아픔을 안고 사는 이들의 삶은 원상회복되어야 마땅한 일임에도 그들의 신음소리가 외면받고, 그들의 삶이 소외받는 처지로 내몰리는 지경은 바로 성서가 말하는 죄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무릇 사람들의 생각은 다르거나 같을 수도 있거니와 처지와 환경에 따라 옳고 그름의 기준은 바뀔 수도 있다. 그러나 소외되었다고 아픔을 호소하는 소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주는 일은 옳고 그름이나 같고 다름을 떠나 사람이기에 당연히 흉내라도 내보아야 마땅한 일일 것이다. 나아가 소외되는 현장에 사람이 있는 한 “아니, 아직도?”라는 물음 보다는 “아니 어떻게?”라는 물음이 우선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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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애자들에게는 천국이 없다?

제가 사는 곳에서 남쪽으로 약 90마일 떨어진 곳에  Rehoboth Beach라는 델라웨어주에서는 유명한 해변 도시가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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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곳에 All Saints Episcopal Church라는 성공회 교회당이 있다고 합니다. 거기에서 일어난 일이 오늘 뉴스화 되었답니다.

사건인즉은 예배에 참석한 이들이 세워둔 차량들에 혐오 광고물들이 꽂혀 있어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는 것입니다.

예배 참석자들의 차량에 꽂아놓은 세쪽 짜리 광고물은 이런 제목으로 시작되었답니다. “동성애자들을 위한 천국은 없다.( No heaven for homos)”라고 말입니다.

이 사건 수사에 나선 경찰의 공식적인 입장은 혐오범죄는 아니고 불법 부착 광고물 유포 혐의로 벌금형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해당 교회 입장은 이것과 판이합니다.

이 교회 교구목사인 Max J. Wolf목사는 “비록 경찰이 그렇게 이야기할지라도, 이러한 행위는 우리 교인들을 향한 명백한 혐오 범죄이고 매우 심각한 일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이런 일이 일어나게된 까닭은 이 성공회당은 레스비안, 게이, 양성애자, 성전환자 모두에게 신은 평등하다며 교회문을 활짝열었기 때문이랍니다.

솔직히 제 개인적인 느낌으로 레스비안, 게이, 양성애자, 성전환자라고 하면 불편한 것은 사실입니다. 이따금 제 가게 손님들 가운데 노골적으로 그런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는 분들도 있고, 그렇게 보이는 분들도 더러 있답니다.

그네들을 바라보는 제 시각은 “참 다르다.”, “왜 저렇게 되었을까?”하는 것일 뿐 그들이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더더우기나 성서적인 신이 그들을 차별한다는 발상은 제도화된 교회의 자기방어적 차원에서 비롯된 것일 뿐입니다.

제가 아직은 무교회주의자가 아니라 교회를 존중하는 예수쟁이로 남아있는 까닭은 All Saints Episcopal Church같은 교회가 곳곳에 널려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교회 – 그 씁쓸함

세월호의 아픔을 잊지 않고, 여전히 아파하는 유가족 및 실종자 가족들을 위로하며, 오늘 여기에서 세월호 같은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빌어 보자는 마음으로 함께 모여 꾸준히 의견을 나누는 작은 모임이 있습니다. 필라델피아를 중심으로 인근에 사는 뜻맞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우리는 그 모임의 이름을 “세월호를 기억하는 필라델피아 사람들의 모임(약칭, 필라 세사모)이라고 부른답니다.

그 중 몇 사람들이 매주 한차례 온라인에서 만나 “인권”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토론하기 시작한 지 한달이 지났습니다.

세월호 참사를 인권문제의 시각으로 바라보아야만 하는 까닭을 찾아보고자 시작한 토론모임입니다.

매주 주제를 정하고 그 주제에 대한 발제가 있은 후 자유토론이 이어지는 방식으로 진행되는데 한시간 남짓으로 시작한 모임이  이젠 2시간 30분 동안 이어지는 모임으로 뜨거워졌답니다.

지난 시간 동안 ‘인권이란 무엇인가?’, ‘왜 인권을 말하는가?’, ‘유럽 인권사’, ‘동양 인권사’, ‘미국 인권사’ 등을 두루 훑어 보았고 이제 ‘한국 인권사’로 넘어가고 있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발제자들이 열성적으로 준비하고 있어서 새로 배우고 느끼는 것들이 참 많답니다.

지난 주에는 미국인권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상당 시간을 미국내 인권보호 증진에 크게 기여한 미 연방대법원의 중요한 인권판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답니다. 그리고 이민으로 이 땅을 살아가는 우리 재미 한인동포들의 인권문제에 대한 이야기들도 제법 심도있는 이야기를 나누었답니다.

미연방대법원이 때론 자신을 임명한 대통령의 의도와 어긋나는 판결도 하고 (아이젠하위 대통령과 워렌 대법원장), 국민감정에 반대되는 판결도 소신 있게 내놓기(아히만 판결-성조기보호법 위헌 판결) 도 할 수 있었던 밑바탕에는 소수자 보호라는 큰 논리가 있었고, 그 논리를 지탱해 주는 기반에는 시민들의  지지가 있었다는 사실도 이야기했답니다.

최근에 있었던 동성결혼 합법화 판결은 바로 이런  소수자 보호라는 논리에 기반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판결을 내린 미 연방대법원 법관 가운데 한 사람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Ruth Bader Ginsburg, 82)대법관이  이 주 초에 한국을 방문했었습니다.

그녀의 방한 일정 중에는 한국내 1호 동성 부부인 김조광수(영화감독)·김승환(영화사 대표) 부부와 트렌스젠더 연예인 하리수씨 그리고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 등 국내 대표적인 성 소수자들과 만찬 간담회가 있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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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성소수자들과 미국 연방대법관의 만남 방한중인 미국 연방대법관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가운데)가 4일 저녁 서울 용산미군기지에서 성소수자인 김조광수-김승환 부부와 하리수, 임태훈 군인권센터 소장을 만나 만찬을 했다. 만찬을 마친 김조광수 감독과 임태훈 소장은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사진과 만찬 내용을 공개했다. – 출처 오마이뉴스

이런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Ruth Bader Ginsburg, 82)대법관의  방한 행보에 발끈한 곳은 한국 기독교계였다고 합니다.

<38개 교단 협의체인 한국교회연합(대표회장 양병희 목사)은 지난  5일 <미국 긴즈버그 대법관의 방한 행보에 우려한다>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내고, “그가 한국에 와서까지 동성결혼 합법화를 주장하며 소송 중인 김조광수-김승환씨를 만나고 트랜스젠더를 초청해 격려하는 등의 행보를 하고 있는 것은 한국의 법질서와 윤리가치에 혼란을 줄 수 있는 정치적 행동이므로 삼가야 한다”고 비판했다.>고 오마이뉴스는 전하고 있었답니다.

또한 이 기사에 따르면

<한국교회언론회(대표 유만석 목사) 역시 이날 <미국은 한국에서 받아들일 수 없는 방종과 타락의 성문화를 강요하는가?>라는 논평을 통해, ‘긴즈버그 미 대법관은 동성애 전도사인가?’라며 “노골적인 성소수자 지지활동과 법조인들에 대한 소수자 보호 인권운동 강연은 법관들의 성윤리 의식마저 왜곡시키지 않을까 염려된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한국교회언론회는 “미국이 우리의 우방국가요, 혈맹이지만, 받아들일 수 없는 가치와 문화가 있고, 공유할 수 없는 문화와 가치도 있다”며, “긴즈버그 대법관에게 충고한다. 대한민국에서는 어떤 이유로도 동성애 조장 확산과 동성결혼 합법화를 위한 강연을 중지해주기 바란다. 미국의 타락한 가치를 대한민국에 강요하지 말라!”고 강하게 비판했다.>고도 합니다.

요약하자면 이들의 주장은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이 한국의 성소수자를 만난 것은 “한국의 법질서와 윤리가치에 혼란을 줄 수 있는 정치적 행동”이요 “방종과 타락의 성문화를 강요”한 행위라는 것입니다.

딱히 그들의 언사가 조목조목 따질 가치는 없는 것이지만, 적어도 “오늘날 한(인)국사회의 ‘ 법질서와 윤리’는 무엇인지?”, “’방종과 타락의 성문화’가 만연한 곳은 과연 어디인지?”를 따져 묻는 일과, 한국교회가 과연 그러한 질문을 던질만한 수준에 있는지를 먼저 돌아보아야 할 일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은 “법이 있기 전에 삶이 있었고, 그 삶에는 하나님의 뜻이 먼저 있었다”는 성서적 가르침과는 너무나 먼 곳에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비단 구약성서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저 유명한 예수의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마가 2: 27)”라는 선언은 바로 사람살이의 삶을 보호하는 가치가 최우선이라는외침입니다.

이때 보호할 가치가 있는 삶이란 약한 자, 가난한 자, 소수자의 몫이라고 성서는 단언하고 있습니다.

과연 오늘날 한국교회가 이런 자명한 성서의 선언에 얼마나 부합된 모습으로 신앞에 서 있는지 먼저 물어야 할 것입니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대법관의  방한 행보에 발끈했다는 한국 기독교계의 대응을 보면서 한국교회의 비성서적 모습을 또 다시 확인한 듯하여  씁쓸하답니다.

사탄(마귀)에 대하여

한국 뉴스들은 한 일주일만 보지 않으면 그 일주일 사이 전혀 딴 이야기들로 바뀌여집니다. 일주일 전 즈음에 세상 뒤바뀔 것 같은 뉴스들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른채 늘 새로운 놀랄거리들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

국정원의 해킹, 박근령의 망언, 김무성이 미국에 와서 떤 주접들만 하여도 이게 일주일 사이에 감추어 질만한 뉴스거리들이 아니건만 어느새 숨어 버린 느낌입니다.

박근령 부부의 또라이 짓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니 접기로 하더라도,  국정원의 해킹 사건과 김무성의 주접질은 한국내 한인들 및 재외 한인 동포들의 미래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도 있기에 지속적인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국정원 해킹 사건을 들여다 보노라면 ”devilangel1004”라는 국정원 요원의 아이디가 눈에 뜨입니다.

국정원의 해명에 따르면 이 아이디는 죽은 임아무개 국정원 직원의 것이라고 하지만, 이 시각 현재까지 이 문제에 관심을 갖고 추적하는 이들의 주장에 따르면 국정원내 해킹관련 업무 종사자 다수가 사용했던 아이디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바로 국정원이라는 집단 아이디라는 것입니다.

아무튼 그 이름이 아주 독특합니다. “마귀(devil)천사(angel)천사(1004)”라는 이름에 대한 느낌 말입니다. 마귀면 마귀고 천사이지 마귀천사는 뭐며, 천사를 두번 강조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제가 의과적 상식이 전무해서 모를 일이지만 일종의 정신분열적 증상을 엿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자기 정체성의 상실이지요. “내가 하는 짓은 마귀 짓일지라도, 나의 진짜 정체는 천사”라는 말도 안되는 자기 정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요?

마귀(devil)니 천사(angel)니 하는 이름들이 자주 나오는 책이 있습니다. 바로 성서입니다.

성서의 많은 이야기들 가운데 예수가 공생애를 시작하기 전에 광야에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는 장면은  아주 잘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마태복음 4장 1-10절에 있는 이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The Holy Spirit led Jesus into the desert, so that the devil could test him.)>

예수가 마귀에게 시험을 받는데 그 일은 성령(The Holy Spirit)이 그렇게 했다는 것입니다.

한편 마가복음 8장 33절에는 예수가 제자들에게 자신이 이제 곧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게 될 것임을 미리 고지하자 “죽는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라고 항변하는 베드로를 향해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사탄아,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또한 요한복음 6장 70절에는 예수가 그의 열두 제자들 가운데 한 사람 곧 가롯유다가 자기를 로마에 팔아넘길 것이라는 예고를 하며 이렇게 말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위에서 든 세가지 예를 다시 살펴보면 마귀와 사탄은 어떤 제삼의 실체로 등장하지 않습니다. 바로 사람이 마귀이고 사탄입니다.

예수를 마귀에게 끌고 갔던 성령이 움직었던 곳은 바로 예수의 마음 속이었습니다. 예수가 베드로를 향해 ‘사탄’이라고 명명한 까닭은 바로 베드로의 생각이었습니다. 가롯유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라는 실체가 바로 마귀였습니다.

적어도 예수 이야기에 나오는 사탄과 마귀의 실체는 사람의 마음이요 생각이라는 말입니다.

성서 이야기를 보면 마귀의 우두머리가 사탄입니다. 사탄의 그리스 어원은 동사인 ‘반대한다’, ‘분열시키다’의 명사형이라고 합니다.

바로 사람과 사람사이, 신과 사람사이를 이간질하고, 분열 시키는 마음, 생각, 또는 사람들의 행태가 사탄이라는 말입니다.

해킹(hacking)이란 남의 것을 몰래 들여다보는 행위요, 도둑질입니다. 이 일의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은 불신이요, 사람과 사람 사이를 가르는 일입니다. 바로 사탄 마귀의 일입니다. 그래 devil이라는 이름은 적절한 것인데 뒤에 천사, 천사를 갖다 붙인 것으로 보아 자신들이 하는 일에 대한 회의는 있었던 듯한 측은함도 묻어납니다.

x9788991799684그런데 김무성에 이르면 악질입니다. 악질 마귀입니다. 바로 사탄입니다.

“진보 좌파의 준동으로 인해 대한민국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 걱정”, “새누리당이 진보 좌파가 준동 못 하도록 노력하겠다”

제 욕심 하나 차리겠다고 사람들을 이간질하여 나라를 절단내고, 국민들을 가르는 말들을 서슴치 않는 것입니다. 그런 김무성이 다음 대통령 선호도 1위라는 기사를 보고 있노라면 사탄 전성시대라는 암울한 생각이 들기도 한답니다.

그러나 사탄이니 마귀니라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아직 끝나지 않은 성서 이야기는 ‘사탄 전성시대 같은 갈릴리”로 예수가 먼저 가 있겠다는 약속으로 희망을 준답니다.

박래군을 생각함

오늘 한 사내가 오늘까지 살아온 삶과 그가 오늘 겪고 있는 모습을 읽으며 제 가슴 속에 커다란 돌멩이가 하나 달렸습니다.

사내의 이름 박래군입니다.  그는 지난 4월에 있었던 세월호 추모집회에서 불법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한국시간으로 어제 구속 수감되었습니다. 그에 대한 기사들을 훑어본 바에 따르면 이번이 열 두번 째 겪는 일인 듯합니다.

제가 세월호참사에 대한 관심을 갖고 뉴스들을 찾아 읽고는 했지만 박래군이라는 이름이 낯설었던 까닭은 이른바 ‘운동’이나 ‘운동가’들에 대한 관심은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세월호 국민대책회의 공동위원장이자 4.16 연대 상임 운영위원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구속되었다는 뉴스를 보면서 현 대한민국 정권이 그들의 예정대로 세월호참사 마무리 작업 수순에 들어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박래군이 누굴까?’하는 궁금증이 일었답니다. 그래 그와 관련된 뉴스들을 검색해 보았답니다.

우선 눈에 먼저 뜨인 것은 그가 지난 달 어느 야외집회에서 박근혜대통령을 향해 막말을 늘어놓았다는 기사였습니다.

지난 6월 22일자 TV 조선의 “뉴스특급 730”이라는 프로그램에서는  <세월호 대책위 “박근혜 마약?” 발언 파문>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세월호대책회의 박래군 공동운영위원장이 “청와대를 압수수색해 마약 했는지 안 했는지, 한 번 확인해봤으면 좋겠다”,  “대통령이 세월호 당일 ‘피부미용, 성형수술 등을 하느라고 보톡스 맞고 있던 것 아니냐. 보톡스 맞으면 당장 움직이지 못하니까 7시간 동안 그렇게 하고 있었던 것 아닌가’하는 의혹도 있다”,  “청와대 곳곳을 다 뒤져서 마약이 있는지 없는지, 보톡스 했는지 안 했는지,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등등의 말을 했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설혹 그런 의심과 밝히고 싶은  굴뚝 같은 마음이 있다하더라도 그래도 대통령인데 좀 과했다는 생각과 함께 그의 구속 사유에는  “괘씸죄”도 한 몫 했겠다는 생각이 더해졌답니다.

그냥 그쯤해서 “자기 과시형 운동권 사내”쯤으로 치부하고 그에 대한 관심을 끄려고 했었답니다. 그런데 그의 이력이 그에 대한 검색을 더하게 만들었답니다.

참으로 몹쓸 학연이나 지연이 그에 대한 관심의 끈을 잇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이력을 보니 저와 같은 대학 같은 학과가 적혀 있었습니다. 게다가 제가 졸업하던 그 해에 그는 입학을 했다고 합니다. 저에게 딱 10년 후배인 셈입니다.

그리고 제가 이민 보따리를 꾸리던 그 때 그는 본격적으로 운동을 업(?)으로 삼기 시작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에 대한 제 관심은 급격히 높아졌답니다. 그래 낮일을 제끼고서 그에 대한 본격적인 검색에 들어갔답니다.

그리고 하루해를 접는 이 시간, 박래군 생각에 가슴에 돌덩어리 하나 메고 있습니다. 그 묵직한 아픔은 그가 살아온 지난 30년 세월 때문이 아니라 그가 어제 영어(囹圄)의 몸이 되면서 남긴 말에 그의 30년이 오롯이 녹아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구속되더라도 416연대는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안전사회 건설 목표를 향해 변함없이 국민과 함께 행동 할 것”이라는 그의 말속에는 그가 30년 인권운동에 몸바쳐왔던 생각과 꿈과 희망이 담겨 있었습니다.

박래군다음은 지난 2012년 11월에 한림 국제대학원 정치경영연구소에서 그와 대담한 내용들 가운데 발췌해 소개드리는 박래군의 생각들입니다. 당시 대담 제목은 “별 11개 단 이 사람, 인생 제2막에서 던진 돌직구”입니다.

그의 생각들을 곱씹으며 동시대를 가슴으로 안고 살아온 한 사내에게 빚진 마음으로 무거운 밤입니다.

“운동권 진영에서 가장 큰 문제가 정파적인 문제다. 이런 것들이 자꾸 운동을 왜곡시키고 대중들의 참여를 막고 그들의 자발성이 분출되는 것을 막는 것 같다. 정파가 종파화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하는데 지금은 그런 식으로 가면서 우리가 갖고 있는 역량을 결집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라며 대중과 유리된 채 정파 이익 중심의 운동을 전개하는 운동권의 모습에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나는 지금 인생의 제2막을 살고 있다. 소설가가 되려는 꿈을 갖고 대학에 들어가서 소설을 썼던 것까지가 제1막이다. 그다음은 원치 않는 운동권이 되어 운동을 사는 게 제2막이다. 2막을 60살까지 살려고 한다. 제3막의 삶은 1막에서 못 이룬 소설가의 꿈을 이루는 것이다.”

“운동을 하다 보면 내가 주인공이라는 생각을 하기 쉽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나는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거지 운동의 주체는 당사자들이 돼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의 성과도 그 사람들이 가져가는 게 맞고 패배도 그들의 질 수 있어야 한다.”

“인권운동하면서 나도 모르게 어느 정파에 속해있기도 했는데 그게 참 별 볼일 없다는 생각을 했다. 예를 들어 유가협에서 장례를 치르는데 NL열사면 내가 NL이 아니라고 해서 안 갈 것인가? 그렇지 않은 거다. 그 죽음 앞에서 내 입장에서 다르다고 하더라도 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파적인 것을 내려놓자고 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진보적 인권운동론을 주창하는 사람이다. 인권을 가지고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 청춘은 그런 중에서도 되게 더럽다.(웃음) 소설가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대학에 들어갔기 때문에 1학년 때는 학생운동 이런 것은 일절 무시하고 소설 쓰고 술만 마셨다.(웃음) 그때가 참 행복했던 것 같다. 그런데 악마의 손길에 의해(웃음) 운동권이 되었고 그 뒤로는 정말 치열하게 살았다. 한 1년 동안 학생운동을 하다가 이제는 재밌게 운동하나 보다 하다가 강제징집을 당했고, 일주일 동안 서대문경찰서에서 두들겨 맞고 그날로 강원도 양구에 있는 훈련소 가서 또 두들겨 맞았다. 맷집이 약했으면 벌써 죽었을 것이다.(웃음)”

“프랑스 철학자 자끄 랑시에르가 ‘이 사회의 주류가 아닌 비주류, 소수의 사람들이 하는 것이 진짜 정치지 주류가 하는 것은 지배’라고 얘기를 했는데 참 똑똑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진짜 정치란 누군가를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갈등들을 조절하고 자기 권리를 못 찾고 있는 사람들로 주체가 되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면 내가 하는 인권운동은 아주 훌륭한 정치라고 생각한다. 이런 훌륭한 정치를 30년 이상 해온 것이니까 정치에 미련이 있겠는가.(웃음)”

“1998년 ‘양지마을 사건’이라고 큰 이슈가 되었던 일이 있었다. 충남 연기군에 한 부랑인 수용시설이 있었는데 진짜 감옥보다 더한 비참한 곳이었다. 거기에서 탈출했던 어떤 한 사람의 얘기를 듣고 일주일 동안 조사를 해서 당시 국민회의 이성재 의원과 몇몇 단체와 함께 그곳에 쳐들어가 거기에 갇혀 있었던 300여 명이 되는 사람들을 전부 해방시켰다. 그 사건이 터지고 언론에는 ‘노예의 섬’이라고 해서 기사화되었고 우리는 거기서 나온 사람들을 위해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대행해주기도 했다. 그런데 이 사람들 상당수가 가족들에게 버림받는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이 사회복지시설은 죽어도 가기 싫다고 해서 더 이상 손 쓸 수 있는 부분이 없었다. 나중에 수소문 해보면 이들 대부분은 노숙인이 되어버리거나 죽어 있었다. 이 일을 겪으면서 ‘과연 무엇이 잘못됐나’ 고민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모든 것을 대행해서 언론에 폭로도 하고 소송도 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옆에서 돕고 그들이 스스로 이 문제를 풀도록 했으면 그 사람들이 이후 노숙자가 되고 알콜중독자가 되어 거리에서 죽어가는 일이 없지 않았겠느냐 하는 생각을 했다. 인권센터를 통해 대리하는 운동이 아니라, 피해자가 스스로 주체로 서게 하는 인권운동과 사람들이 차분히 인권에 대해서 공부하면서 자기의 권리를 찾아가는 길을 밟아갈 수 있는 대중적 기반의 모델을 만들어 가고 싶다.”

“독재 정권 때는 억울하다는 생각조차도 못 했었고, 조금 상황이 나아졌을 때는 억울하지만 어떻게 해볼 수 없으니까 그냥 지나쳤던 것이 지금은 사람들의 의식이 좀 높아져서 자신이 인권을 침해당한 것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하고 소송까지 가는 경우들이 꽤 있다. 그런데 이것들이 굉장히 이기적으로 수용되어 있다.

‘이기적으로 수용되어 있다’는 말은…

‘내 인권피해에 대해서는 참을 수 없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이 인권침해를 당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그것을 굳이 뛰어들어서 휘말려? 송사에 휘말릴 수도 있는데?’ 하면서 문제제기를 안 한다는 거다. 이렇듯 인권문제가 철저하게 개인화 되어 있고 이기적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운동진영에도 존재한다.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매일 욕하는 것이 ‘평소에는 남의 인권에 대해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너네 해고당하면 인권운동 찾느냐?’라는 것이다. 인권운동이라는 것은 일종의 ‘품앗이’라고 할 수 있는데 평소에 정말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들과 연대하고 공감하고 같이 싸울 줄 알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 특히 IMF 이후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던 연대의 가치들이 철저하게 깨져 나갔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 진보운동이 엄청난 패배를 하고 있다고 본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나라 자살률이 OECD 1위고 범죄율도 엄청나게 높아지고 있지 않나. 사람들이 옆에서 죽어나가는 대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있다. 내 일이 아니기도 하고, 이런 일들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웃음)”

박래군  – 그의 말처럼 이제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안전사회 건설 목표를 향해 변함없”는 길을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박래군을 생각하며…

묻는 이들에게 길이…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과거를 되풀이하게 마련이다. (Those who do not remember the past are condemned to repeat it.)” – 미국의철학자이자 시인이었던 조지 산타야나(George Santayana)가 한 말입니다.

또한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씀으로 오늘을 사는 우리들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나아가 선생은 “우리나라에 부처가 들어오면, 한국의 부처가 되지 못하고 부처의 한국이 된다. 우리나라에 공자가 들어오면, 한국을 위한 공자가 되지 못하고 공자를 위한 한국이 된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오면, 한국을 위한 예수가 아니고 예수를 위한 한국이 되니 이것이 어쩐 일이냐. 이것도 정신이라면 정신인데 이것은 노예정신이다.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려거든 역사를 읽을 것이 다른 사람에게 나라를 사랑하게 하려거든 역사를 읽게 할 것이다.”라는 교훈으로 늘 역사에게 오늘을 묻고 내일을 설계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E. H. Carr(Edward Hallett Carr)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이며, 역사적 사실은 역사가가 과거의 어떠한 사실을 역사적 사실로 선택할 때 존재할 수 있다.”라고 명징한 대답을 내민 바 있습니다.

저는 이즈음 뜻이 맞는 몇몇 사람들과 역사공부를 함께 하려고 시간을 좀 내고 있습니다. 조금 뜬금없는 일이기도 합니다만 어떤 계기가 있었습니다.

4-16a세월호참사 일주기를 넘어가는 시점에서 결성된  4.16연대가 ‘이젠 인권을 이야기 할 때’라며 제안한 “존엄과 안전에 관한 4.16 인권선언” 때문이었습니다. 처음 뉴스에서 이에 대한 기사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은 바로 “뜬금없이 이게 뭐지?”라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사람 살아가는 모든 모습들을 다 담아낼 수 있는 엄청난 크기의 그릇에 “세월호”를 주어담는다는 게 적절한 것인가?라는 스스로의 물음 때문이었습니다.

가뜩이나 시간이 흐르면서 “세월호”라는 말조차 피로감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이즈음에 이런 접근이 과연 옳은 것일까?라는 질문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습관처럼 이런 물음을 들고 성서에게 물었습니다. 그리고 성서가 제가 준 응답은 에스겔(에제키엘) 34장에 있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야훼께서 나에게 말씀을 내리셨다.

“너 사람아,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내 말을 전하여라. 목자들에게 그들을 쳐서 이르는 내 말을 전하여라.”

 ‘주 야훼가 말한다. 망하리라. 양을 돌보아야 할 몸으로 제 몸만 돌보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아! 너희가 젖이나 짜 먹고 양털을 깎아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 먹으면서 양을 돌볼 생각은 않는구나. 약한 것은 잘 먹여 힘을 돋구워 주어야 하고 아픈 것은 고쳐 주어야 하며 상처입은 것은 싸매 주어야 하고 길 잃고 헤매는 것은 찾아 데려 와야 할 터인데, 그러지 아니하고 그들을 다만 못살게 굴었을 뿐이다.

양들은 목자가 없어서 흩어져 온갖 야수에게 잡아 먹히며 뿔뿔이 흩어졌구나. 내 양떼는 산과 높은 언덕들을 이리저리 헤매고 있다. 내 양떼가 온 세상에 흩어졌는데 찾아 다니는 목자 하나 없다.

그러니 목자들아, 이 야훼의 말을 들어라. 내가 맹세한다. 나의 양떼는 마구 잡혀 갔고, 나의 양떼는 목자가 없어서 들짐승에게 찢겼다. 그런데도 내가 세운 목자들은 나의 양떼를 찾아 다니지 않았다. 제 배만 불리고 양떼는 먹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목자들아, 이 야훼의 말을 들어라.

주 야훼가 말한다. 목자라는 것들은 나의 눈밖에 났다. 나는 목자라는 것들을 해고시키고 내 양떼를 그 손에서 찾아 내리라. 그들이 다시는 목자로서 내 양떼를 기르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내 양떼를 그들의 입에서 빼내어 잡아 먹히지 않게 하리라.

주 야훼가 말한다. 보아라. 나의 양떼는 내가 찾아 보고 내가 돌보리라.’> – 에스겔 34 : 1 – 11, 공동번역

바로 “존엄과 안전 지대에서 내 팽개쳐져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위로이자, 그렇게 “사람들을 내 팽개친 권력자들”에 대한 응징의 소리였습니다. 나아가 신의 직접통치를 선언하는 대목입니다.

신앙의 눈으로 본 응답이었답니다.

그리고 이제  사람 살아온 모습 곧 역사에 묻기로 한 것입니다.

혼자 역사 앞에 서서 묻기보다는 여럿이 함께하는 일이 좋겠다는 생각으로 평소 뜻이 엇비슷한 이들과 함께 나선 일입니다.

어디까지가서 어떤 응답을 얻을런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행여 헛수고가 되도라도 뜻을 새길 수는 잇겠다는 생각입니다.

‘인권’이라는 큰 그릇 속에서 지금은 눈에 잘 띄지도 않는 세월호에 얽힌 피맺히고 한맺힌 소리들이지만 언젠가 그 그릇을 꽉 채워 세상을 향한 큰 울림이 되는 날을 그리며 역사에 묻고자하는 것입니다.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함이요, 미래를 열기 위함이요, 세월호를 역사적 사실로 남기기 위해서입니다.

세월호 – 다시 성서에게 묻는다

예수는 그의 짧았던 공생애를 통해 하나님나라에 대한 이야기들을 남겼습니다. 그는 그가 말한 이야기만 남겼던 것이 아니라 일(행위)을 통해서 하나님나라에 대한 모습을 실천으로 보여주었습니다. 바로 그가 행했던 여러 기적들과 치유 행위들 그리고 용서의 행위들이 바로 그런 일들입니다.

예수는 눈먼 자의 눈을 뜨게하고, 귀먼 자의 귀를 열어주었습니다. 누워 자리보존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곧 죽어가는 이를 일으켜 세웠고, 죄(간음)로 인해 사람들의 돌팔매에 맞아죽울 지경에 처한 여인을 용서하며 살리기도 했습니다.

성서는 이러한 예수의 일하심을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상세히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서가 끝내 침묵하고 우리들에게 말하지 않는 것들이 있습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한다면 성서가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침묵한 것들입니다.

눈과 귀가 멀고, 병으로 고통받거나 심지어  자신의 행위로 인해 죽음 앞에 놓인 이들의 아픔과 고통을 치유하고 용서하는 일을 하면서도, 그 아픔과 고통들의 원인이 무엇인지 또는 거기에 담긴 신의 뜻이 무엇인지 이론적이고 논리적인 설명 따위는 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러한 아픔과 고통과 어려움에 처한 이들에 대해 도덕적이거나 종교적인 어떤 평가에 대해서도 일체 묵언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예수가 병고침이나 기적 또는 용서의 행위를 내렸던 사람들은 모두 당시의 관습으로 보아 죄인들이었습니다. 정상적인 사회에서 격리, 소외되어 버림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좀 더 거센 표현을 하자면 사람 대접을 받을 수 없는 마치 짐승이나 물건 대접을 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자! 이쯤에서 이야기를 멈추고 한가지 정리를 합니다.

4-16예수 이야기와 얽혔던 사람들 모두 지금은 없습니다. 다 죽었다는 말입니다. 바로 “그 때” 다 죽었습니다. 긴 역사의 눈으로 보면 병을 고쳐서 좀 더 살았든, 돌팔매에 맞아 죽는 일을 피해 좀 더 살았든, 아니면 그 당시에 배 두드리며 떵떵 거리며 살았든 모두 찰라를 살다 죽었습니다.

성서가 말하는 기적과 용서의 핵심은 바로 이 지점에 있습니다.

사람이 겪는 아픔 가운데 가장 기본적인 아픔은 사람이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하는 아픔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또는 소수의 사람들이) 사람들(또는 다수의 사람들)에게 왕따돌림을 당해 소외되는 바로 그 지점에서 예수의 일하심이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의 삶이란  “사람이 사람다운 대접을 받지 못하는 사회”를 기적으로 치유로 용서로 “사람이 사람답게 더불어 함께 사는 사회”로 바꾸고자 했던 것이라고 성서는 우리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이천년을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이제 고작 일년이 갓 지난 세월호의 아픔을 겪고 있는 이들이 <인권>을 말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명해야만 할 성서적 물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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