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기, 그리고 희망에

‘김민기선생을 추모하는 사람들이 모여 함께 부르는 작은 음악회’에 왕복 세시간 운전을 하며 다녀왔다.  정말 조촐하게 작은 음악회였지만, 집으로 내려오는 길에 내가 누린 소망은 밝았고, 희열은 매우 컸다.

노래 부르는 이들을 쫓아 따라 입을 떼며 옛 생각들이 마구 스쳐 지나 갔었다. ‘검푸른 바닷가에….’ 그 친구를 따라 부르며 내 스무살 언저리 친구들 얼굴들이 스쳐 지나갔고, ‘금관의 예수’를 따라 부르며 종로 오가 기독교회관를 드나들던 내 청년 시절 한 때의 벗들을 떠올렸으며, 노래극 ‘공장의 불빛’ 가운데 ‘이 세상 어딘가에…’를 읊조리면서는 동일방직과 YH공장 사십 수년 전 당시 내 또래 누이들의 고통스럽던 모습들을 떠올렸었다.

‘철망 앞에서’와 ‘천리길’을 이젠 잘 나오지 않는 목청을 뽑아 따라 부르면서는 이 이민의 땅에서 조국 통일과 평화를 위해 삶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바치다 떠나신 필라 우리 친구들의 어른 장광선선생도 떠올렸었다.

‘아름다운 사람’들은 이즈음도 우리 내외가 하루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곧잘 함께 흥얼거리는 노래여서 정말 좋았다.

언제나 흥에 넘치는 아내도 한 곡을 택해 불렀다. ‘그 사이’였다. 김민기선생이 1972년도 만든 노래이니 내가 대학 입학을 했던 해이며, 유신 계엄이 일어난 때였다.

그 사이 – 1972년에서 2024년, 자그마치 52년 이라는 세월의 간격 사이엔 숱한 사건들과 변화가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1979년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꿈을 찾다가 스러지며 그래도 ‘손 놓치지 말고 파도와 싸우’자던 동일방직 YH 그 누이들 뒤를 이어 일어난 부마항쟁 끝에 박정희 유신독재는 끝이 났었다. 그 때 누이들의 참담했던 기록들을 아현동 굴레방다리 아주 작고 초라했던 내 출판사에 작은 책자로 펴낸 기억도 떠올랐다.

그리고 1987년 그 뜨거웠던 여름, ‘아침이슬’로 뒤덮여진 신촌에서 시청앞까지 뚜벅뚜벅 걸었던 날도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왔다.

순간 솔직한 생각도 스쳐 지나갔다. 1979년 그때처럼 전두환 독재가 그리 무너질 지는 몰랐었다.

그랬다. 8.15 광복, 4.19 며칠 후 이승만의 몰락, 박정희의 비참한 죽음, 전두환 그 비굴한 끝을 당시 그 시대 대부분의 사람들은 몰랐었다. 언제나 그랬듯 몰락의 징후들은 차고 넘쳤지만, 세상을 덮고 있는 권력과 비굴한 아부꾼들과 무지한 맹종자들과 하루 입에 풀칠하기 바쁜 사람들이거나 제 살 길에 바쁜 사람들에겐 그 날이 그리 빨리 올지는 몰랐었다.

오늘도 마찬가지다. 정말 많은 것들이 좋아지고 밝아졌다만, 권력에 이르면 그 어떤 분야의 권력이든 이승만이래 문재인정권까지 모든 정권에서 보아왔던 비겁, 비열, 무지, 무능, 사악 나아가 반통일, 반평화, 친일을 넘어 숭일  매국 정신으로 똘똘 뭉쳐진 놈들의 세상처럼 다가오곤 한다. 한국 뉴스들이.

허나 역사의 반동들이 기세를 마음껏 부리는 세상을 바라보니 그 끝과 몰락이 눈에 보인다. 숱한 징후들이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하여 그 사이 – 별거 크게 변한 것 없다. 사람 같은 정말 아름다운 사람들이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 곧 올게다.

김민기선생이 꿈꾸던 내일의 아이들을 위한 꿈에 무대가 펼쳐지는 세상이 말이다. 그래서 희망이다.

오늘 그 작은 음악회로 새로운 추억을 만들어 준 필라의 아름다운 친구들에게 감사를 보내며.

감사에

<감사에>

장례예배와 하관예배 손님들 접대를 마치고 돌아와 맞는 저녁입니다. 왔던 아이들도 다 제 자리로 돌아갔습니다. 마치 한 열흘 동안 먼 여행을 끝나고 돌아와 앉아 있는 느낌입니다. 이젠 다 말라 없어진 줄 알았던 눈물이었는데, 얼핏 들리는듯한 아버지 목소리에 주르르 흘리는 눈물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어제 밤 장례 예식에서 손님들에게 드린 제 인사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드리고 싶은 말씀, 감사입니다.

이 더위속에 저희 아버님께서 하늘나라 가시는 길에 함께 해 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이 예식을 준비하여 주신 델라웨어 한인 감리교회와 정범구목사님 그리고 교우 여러분들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특별히 멀리 타 주, 타 도시에서 함께 해 주신 분들께 송구함과 함께 드릴 수 있는 말씀 그저 감사 뿐입니다.

부활의 믿음 위에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먼저 떠나가신 이들의 삶은 살아있는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다시 살아나곤 합니다. 저희 자식들에게 아름다운 모습으로 기억될 수 있도록 제 아버님의 마지막 순간들을 고요하고 평안케 해 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총에 드리고 싶은 말, 역시 그저 감사, 감사, 감사 뿐입니다.

아버님 연세 만 아흔 여덞이셨습니다. 옛 우리 나이로는 아흔 아홉입니다. 이걸 옛날 어르신들은 백수(白壽)라고 했습니다. 백살에 한 살 못 미치는 나이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말입니다. 이즈음 백세시대라는 유행에 걸맞게 장수하셨습니다. 아버님은 타고나신 치아들을 거의 다 그대로 간직하고 떠나셨습니다. 떠나시기 얼마 전 까지만 해도 안경없이 웬만한 글들을 다 읽으셨습니다.

게다가 돌아가신 병명이 없으십니다. 앓고 계시던 병이 하나도 없으셨다는 말입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사람의 나이를 다 사시고 아주 평온하신 모습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하여 또 감사입니다.

이것 하나 또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사년 전 먼저 떠나신 제 어머님과는 일흔 세해, 자그마치 칠십 삼년을 함께 사셨답니다.

그 어머님께서 저 하늘에서 지금 아버님께 재촉하신답니다. “이 양반아! 끝났으면 빨리 오시지 뭘 그리 꾸물거리시나?” 그 어머니 말씀에 제 아버님 지금 마음이 매우 바쁘다십니다.

하여 제 이야기 짧게 끝내겠습니다.

아버님의 어린 시절은 참으로 불우하셨습니다. 열살에 어머니 곧 제 할머니를 여의고, 열 여덟에 일본 탄광 노동자로 끌려 갔었고, 스물 다섯에 한국전쟁에 참전한 군인이 되어 전투중에 다리에 부상을 입은 상이군인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럼에도 블구하고 제 아버님은 그저 감사함으로 자신의 삶을 사랑했고, 자신의 삶을 하나님께 감사했던 분이셨습니다.

아들인 제가 제 아버지를 기억하는 단 한가지를 꼽으라면 “정말 착하게 사셨다”는 말일겝니다.

그렇게 저희 일가를 이루셨습니다. 하여 또 감사입니다.

제 이야기를 마치기 전 그런 아버지를 제가 새길 수 있게 해준 여자들에 대한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첫째는 제 어머님이십니다. 일찍 돌아가신 제 할머니의 빈 자리를 73년 그 긴 오랜 시간을 채우셨던 사람, 바로 제 어머님이셨습니다.

둘째는 제 세 누이들과 제 아내입니다. 제 어머님 마지막 삼 년, 그리고 어머님 먼저 가시고 아버지 홀로 지내셨던 사 년 세월을 제 아버지가 ‘정말 착하게’ 지낼 수 있게 옴 몸과 맘을 다해 함께 했던 제 누이들에게 정말 깊은 감사를 보냅니다. 특별히 제 누님의 노고가 정말 컸습니다. 막내 동생의 헌신은 늘 제 기대 이상이어서 그 고마운 마음의 크기가 참 큽니다. 아마 남편인 최준용 장로의 기도가 셌던 모양입니다. 멀리 살아서 늘 안타까운 마음으로 함께 했던 둘째에게도 똑같은 고마움을 보냅니다. 아내와 매형의 헌신과 기도 역시 빼놓을 수 없는 고마움 목록들 입니다.

그 무엇보다도 아버지께서 가르치고 남겨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총에 대한 믿음으로,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여러분들과 함께 보내는 오늘, 바로 이 시간이 정말 감사합니다. 오래 기억할 것입니다.

이만 감사의 말씀을 접으면서…. 마치 제 아버님께서 부르시는 노래 같은 시 하나 읊으렵니다.

귀천(歸天)

          – 천상병 –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가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 생각지도 않게 아버지의 삶을 기리는 공훈증서를 우리 가족이 살고 있는 New Castle County Executive(카운티 행정관이니 군수라고 할까요)명의로 보내와 감사 목록을 하나 더했습니다.

** 오늘 하관예배 즈음에 100% 비가 그것도 폭우가 내릴 것이라는 예보는 보기 좋게 빗나가 제 감사의 크기를 한층 높게 쌓을 수 있었습니다.

*** 얼굴을 마주 대했거나, 목소리로 또는 글로, 이렇게 저렇게 얽힌 소셜 미디어를 통해 위로와 조의를 전해주신 모든 분들에게 한없는 감사를 드립니다.

초여름 하루

하루는 늘 길거나 짧다. 또는 매우 더디거나 너무 빠르다. 모두 하루의 길이나 속도를 재는 내 잣대가 변덕스러운 탓이다.

하여 이젠 제법 노회해진 나는 하루를 시간의 흐름으로 느끼지 않으려 애쓰는 편이다.

그저 늘 쳇바퀴 속을 도는 일상에서 아주 작고 순간적인 느낌으로나마 단 한가지라도 마음 속에 이는 감사함 하나 붙든 하루면 족하다는 생각인데, 그조차 참 쉽지 않다.

그럼에도 오늘 같은 하루는 그저 감사가 넘치는 날이다.

아들 내외가 차려준 밥상으로 넉넉히 배 채우고, 맑은 눈빛만 마주쳐도 그저 좋은 손녀 안고 놀다 돌아오는 길, 아내와 둘이 마른 바람 그득한 초여름 공원 길 걸으며 보낸 하루 – 내 변덕이 끼어 들 틈이 없는 하루다.

걷다 땀 식히려 주문한 맥주 이름이 “Victory Summer Love”였다.

뒷뜰에 고추 모종 몇 개 심은지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고추가 달렸다. 나리와 다알리아가 꽃망울 품은 여름이다. 여름 사랑 품는데 나이가 뭔 상관이랴!

*** 고작 120쪽에 불과한 책을 두 주 째 손에서 놓치 못하고 틈나면 곱씹고 있다. 게다가 저자는 에세이라고 했건만 쉽게 책장을 넘길 수가 없다. 곱씹어 읽을수록 이즈음 뉴스들을 보면 답답해지기 일쑤인 마음을 잘 다스려 준다. 독일의 저명한 심리학자라는 아르노 그륀의 <복종에 반대한다>이다. <누구에게도 지배받지 않는 온전한 삶을 위해>라는 부제가 달렸다.

저자는 모든 분야의 권력 앞에 복종해 온 인류 또는 개인의 어두운 역사를 이야기하며, 그 복종의 원인과 의미를 설명한다. 그는 근본적으로 낙관적이다. “역사상 가장 잔혹한 범죄들은 항상 (권력에 대한) 복종으로 저질러졌”지만, 역사는 분명 사람들이 “복종을 반대”하는 방향으로 전진해 나아 간단다. 이 책의 마지막 문장이다. “용기와 관심, 열린 생각이야말로 복종을 물리칠 수 있는 힘이다.

거짓 앞에서(나 자신이 저지르는 거짓을 포함하여) 복종하지 않는 삶을 위해 기도해 주시는 멀리 홍목사님과 이어진 연대로 그 기도에 응답하려는 옛 벗들이 있어 나도 낙관주의에 빠져 보련다.

날씨에

똑 같은 일을 삼 십 수년 동안 이어오다 보면 대충 이골이 나도 단단히 나게 마련일 터입니다만, 해마다 맞는 첫 더위는 제겐 여전히 낯설고 일터의 하루는 몹시 길답니다. 제 일터의 환경은 예전에 비한다면 그야말로 쾌적하기 그지 없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바뀌었습니다만, 여전히 보일러 스팀 열기에 끈끈하게 습도 높은 첫더위의 후끈한 바깥 바람이 들어와 함께 노는 날의 세탁소 하루 일은 늘 그냥 처음 겪는 일인 듯 하답니다.

며칠 동안 이어지던 비가 그치고 난 뒤 찾아 온 첫더위를 또 그렇게 맞았답니다.

이런 날이면 혼자 중얼거려보는 말이 있답니다.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할 사람 같소’

어느새 아주 오래 전 일이 되었습니다. 이강백이라는 떠오르는 신예 극작가가 있었습니다.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할 사람 같소’는 그의 작품 제목입니다. 그 제목의 연극 구경을 했던 날의 기억을 아직도 담고 있답니다. 솔직히 연극의 내용은 이젠 전혀 떠오르지 않습니다.

정동 세실극장이었습니다. 연극이 끝나고 극장을 나서자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습니다. 비닐 우산을 받쳐들었지만 겨우 머리나 적시지 않는 지경이었습니다. 그렇게 정동에서 신촌까지 걸었었답니다. 제 곁에는 그 무렵 막 연애를 시작했던 아내가 있었답니다. 78년도였으니  그 사이 마흔 여섯 해가 흘러가 버렸습니다.

변덕스럽기가 날씨만 한 것이 어디 있겠느냐고들 하곤 합니다만, 따져 보면 그 보다 더 변덕스러웠던 게 제 삶의 걸음걸이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뜰에 나와 앉아 오늘 하루와 지나간 시간들을 돌아보게 하는 저녁바람은 아직은 시원합니다. 첫더위 타고 장미꽃이 활짝 피기 시작했습니다.

날씨에 따라 변하는 아름다움도 있습니다.

허나 이젠 날씨에 따라 변하지 않는 것들을 꼽고 쫓는 때에 이른 나이가 되었습니다. 신(神)에 대한 경외와 사랑, 사람 사랑, 내게 주어진 시간과 삶에 대한 사랑 그리고 그 모든 것에 이어지는 감사들.

24년 첫 더위에.

아쉬움과 고마움

홍길복목사님 – 기억컨대 그와 함께 했던 시간은 고작 두 해 남짓이 모두다. 그것도 내 스물도 저물던 시절이었으니 사십 수 년 전 일이다. 그 후 오랜 시간 그는 호주에서 나는 미국 시골에서 살며 딱 두 번을 만났었다. 십 수년 전 내가 사는 가까운 곳에서 그리고 지난 해 서울에서였는데, 두 번 다 그저 밥 한끼 나누는 아주 짧은 만남이었다.

홍길복목사님 – 그는 내 신앙의 인도자요, 인생의 선생인 동시에 늙막에 신 앞에 다가서는 날들을 준비하는 정신적 길 벗이다.

홍길복목사님 – 내 어리고 젊었던 시절, 성서와 예수에 대한 숙제를 던져 주셨던 그는, 지난 세월 비록 서로 만나지는 못할지 언정 끊임없이 나를 깨우게 해 주셨다. 그의 설교문을 보내주거나 생각의 단편들을 전해오거나 지난 십여 년 동안은 그가 이끌어 온 <시드니 인문학교실> 강의안을 보내주어 나를 깨웠다. 그 강의안으로 내가 사는 곳에서 함께 하는 친구들의 생각의 지평을 넓히고 믿음의 뿌리를 깊이 내릴 수 있게 하셨다.

홍길복목사님 – 그가 엊그제 설교문을 보내어 또 나를 깨웠다. <삶의 후회조차 감사할 때>라며.

그가 설교문을 보내주시면서 덧붙인 말씀이다. < 첨부한 설교문은 오는 주일 시드니우리교회 목사님이 출타를 하면서 설교를 부탁하시길래 준비한 것인데, 돌이켜보니 마침 이즈음이 제가 목사안수 받은지 50년이 되어서 그에 따른 소회를 써 본 것입니다. 인생이란, 목회란, 관계란 모두가 다 아쉬움과 고마움으로 남는 것이군요.>

그저 홍목사님께 감사한 마음으로 단 한 사람에게 만이라도 하나님 앞에선 그의 고뇌와 감사를 나눌 수 있다면 하는 생각으로. 그의 허락도 없이 여기에….


<홍길복의 목사안수 50년 감사예배 설교>

  • 2024년 5월 19일 , 시드니 우리교회

오늘의 말씀 : 시편 116편 12절 -14절

오늘의 제목 : 지난 날을 되돌아 보니 – 아쉬움과 고마움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총과 평강이 여러분 한분 한분에게 넘쳐나시길 기원합니다.

앞에서 예배순서에 따라 맡으신 분이 읽어주신 성경말씀 이지만 표준새번역으로 다시 한번 더 읽겠습니다. <주께서 나에게 베푸신 모든 은혜를, 내가 무엇으로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주의 이름을 부르겠습니다. 주님께 맹새한 것은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다 이행하겠습니다.> 이 시편 116편은 누가 지은 것인지 그 작자는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시의 주제는 아주 분명합니다. 개인적으로든, 아니면 민족적으로든 <죽다가 살아난 사람의 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난 후에 고백한 시>로써, 죽음으로 부터 다시 생명을 얻은 이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이 시편 116편을 주석적으로 설명하지는 않겠습니다. 다만 오스트랄리아에서 살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 시가 이 땅 호주에서 어떻게 처음 읽혀졌던지를 말씀드린 후 저 개인적 간증의 말씀을 나누고자합니다.

먼저 역사 이야기입니다.

1783년 미국은 영국과의 독립전쟁에서 승리하여 영국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나 독립국가가 되었습니다. 거대한 식민지 북미 대륙을 잃어버린 영국은 마침 몇해전인 1770년에 James Cook이 발견하여 영국의 식민지라고 선포해 두었던 남태평양의 거대한 섬 나라 호주를 미국을 대신 할 만한 새로운 식민지로 여겼습니다. 산업혁명 후 넘처나는 사회문제로 범죄는 증가하였고 죄수들을 수용할 시설은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마침내 영국정부는 새로운 땅, 미지의 남쪽 나라인 호주를 그들 나라에 있던 Wales주를 대신할수 있는 곳이라 생각하여 <남쪽에 있는 새로운 Wales주>라는 뜻으로 New South Wales주라 이름 붙여서 이곳으로 죄수들을 실어 보내기로 했습니다.

영국은 1787년 5월 13일 런던 남쪽에 있는 항구도시, Portsmouth에서 군함 2척, 화물선 3척, 그리고 수인선 6척, 총 11척의 선단을 꾸려 군인들, 죄수들, 자유 이주자들을 섞어 호주로 보냈습니다. 이를 가르쳐 역사는 <The First Fleet, 제 1차 선단>이라고 부릅니다. 자료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지만 이 1차 선단에는 죄수들 789명을 포함하여 군인들과 자유 이주자들을 합해서 모두 1420명이 승선하였는데 그만 그 긴 항해 중, 배에서 사망한 사람이 48명이나 생겨서 시드니에 도착한 인원은 모두 1372명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해가 바뀌어, 이듬해, 1788년 1월 26일이 되었습니다. The First Fleet는 2만 5천 km, 250일에 걸친 긴 항해 끝에 마침내 Sydney Cove, 시드니 내항에 도착했습니다. 그리하여 지금 우리들은 이날, 1월 26일을 Australia Day, 호주 건국기념일로 지키고 있는데, 과연 이날이  호주의 <건국 기념일, Australia Day>가 맞는냐? 하는 데는 적지 않은 반론도 있습니다. 본래 호주는 주인 없는 빈 땅이 아니라, 원주민들이 50여만명이나 터를 잡고 수 만년을 살아왔던 주인이 분명한 땅이니, 이날 1월 26일은 Australia Day가 아니라 <오스트랄리아 침략의 날, Australia Invasion Day>가 아니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여기에서는 그런 이야기를 더 나누지 못하겠습니다. 그것은 오늘의 주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시다싶이 The First Fleet를 이끌고 온 선장 겸, 초대 New South Wales 주총독은 Arthur Phillip이었고, 그 때 그들과 함께 온 군목은 영국 성공회 신부, Anglican Chaplin, Richard Johnson 목사였습니다. 그들이 시드니 항구에 닺을 내린 1월 26일은 토요일이었고 그 다음 날인 1월 27일은 주일이었지만 그들은 예배를 드릴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배를 접안하고, 짐을 내리는 등 그들이 이 미지의 땅 시드니에 상륙 하는 데는 시간이 많이걸렸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이들 The First Fleet를 타고 온 사람들이 이 땅 오스트랄리아에서 맞이한 첫번째 주일은 한 주일 후인 2월 3일이었습니다. 1788년 2월 3일 주일 아침, Richard Johnson 목사님은 Circular Quay에서 한 불록 떨어진 지금의 Bridge Street 앞 Macquarie Park 에서 10시가 되자 예배 시간을 알리는 북을 울렸습니다. 사람들은 모여들었습니다. 항해사들과 군인들, 남녀 수인들과 아이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Aborigine들의 땅, 기독교와 그 예배의식이라고는 단 한번도 본적이 없고, 접해 본 일도 없는 신비의 땅에서 처음으로 기독교식 예배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참 안탑갑게도 1788년 2월 3일 아침 10시 – 호주 땅에서 하나님께 드린 첫 예배때 불렀던 찬송이나 드린 기도문이나 전하신 설교 말씀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유일하게 남아있는 자료는 바로 그날 봉독했던 성경말씀입니다. – 시편 116편 12절로 14절 –

<주께서 나에게 베푸신 모든 은혜를, 내가 무엇으로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구원의 잔을 들고 주의 이름을 부르겠습니다. 주님께 맹세한 것은 모든 백성이 보는 앞에서 다 이행하겠습니다.> 이는 오스트랄리아 땅에서 처음으로 읽혀진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50일에 걸쳐 25000Km나 되는 죽음의 항해길에서 버리지 아니하시고 살려주시어 육지에 발을 딪게 해주시고 새로운 꿈과 가능성과 희망을 주신 주님을 찬양하고 감사드리는 이 진솔한 고백과 노래가, 저는 이 땅, 이 호주의 모든 오고 오는 세대와 다민족들의 주제가가 된다고 믿습니다. <주께서 나에게 베풀어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무엇으로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 내가 구원의 잔을 높이 들고 주의 이름을 부르겠습니다. 주님께 맹세한 것은 이제 이후 이땅에서 다 지켜 이행하겠습니다.>

이 말씀을 가슴에 새기면서 이제 부터는 부족한 저의 고백과 간증을 나누고저 합니다. 지난 5월 8일은 제가 목사로 안수를 받고 이 직분을 받은지 꼭 50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1968년 일반대학을 거쳐, 1972년 장로회신학대학을 졸업한 저는, 1973년 서울 신촌에 있는 대현교회에 전도사로 부름을 받았는데 감사하게도 그 교회가 저를 서울 서노회에 부목사로 청원해 주셔서 1974년 5월 8일, 수색교회에서 열린 제 10회 서울 서노회에서 목사로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후 저는 대현교회에서 만 6년을 부목사로 일하다가 1980년 6월 호주 Uniting Church 세계선교부 총무 변조은목사님의 초청을 받아 이곳으로 왔습니다.

처음 저희는 Uniting Church, West Australia Synod에서 사택과 자동차 등을 마련해 주셔서 서부 호주 퍼스에서 한 6개월을 머물면서 간단한 영어도 익히고 자동차 운전면허도 따는 등 호주 정착을 준비하면서 퍼스에 처음으로 한인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 때 퍼스에서 함께 <서부호주 한인교회>를 일구어 온 사람 중에는 지난 44년을 함께 해온 남정율집사님이 지금까지도 저희 곁에 계십니다. 6개월 이라는 짧은 기간을 퍼스에서 지낸 후 저희는 1980년 12월 시드니에서 막 시작된 <시드니 제일교회>의 초청을 받아 목회와 삶의 자리를 이곳 시드니로 옮겨 1998년 말까지 18년을 그 교회에서 사역한 후, 1999년 1월 부터는 <시드니 우리교회>로 옮겨 14년을 목회하다가 2012년 말 모든 일선목회에서 은퇴하였습니다.

이제 부터는 염치도 없이 뻔뻔하게 부끄러운 이야기는 쏙 빼버리고 제 자랑을 좀 늘어놓겠습니다. 호주에서의 세 교회에서 목회사역을 하는 동안 저는 호주 Uniting Church와 해외한인장로교회의 총회나 노회를 비롯하여 한인교회교역자회 등 여러 섬김의 자리에서 일하기도했고, SCD 한국어 학부와 모스크바 장신대, 인도네시아 신학교 등 국내외 몇몇 신학교육기관에서 가르키기도 했습니다. 저의 목회 기록에 의하면 저는 지난 이민목회 33년 동안 919명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170번의 결혼식, 67번의 장례식, 1500번 이상의 주일 예배 인도와 설교, 약 9000번의 심방, 1600회 이상의 상담, 그리고 1200회 이상의 각종회의를 주제하기도 했고 또 참석했습니다. 수많은 기도회와 성경공부 인도, 오페라 하우스에서의 선교 음악제를 비롯한 많은 행사와 이벤트들, 일일히 세기도 힘든 부흥회, 초청설교, 신학 특강, 세미나, 선교지 방문, 초기 2년 동안 진행한 SBS 방송, 300개가 넘는 각종 칼럼과 기고문들, 그리고 7권의 책을 출판을 했습니다. 무엇 보다도 저는 이민목회 33년을 통하여 줄기차게 예수를 재해석하는 작업에 몰두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이민자로 풀어 왔습니다. <이민자 예수>라는 책도 쓰고, 설교도 하고, 강의도 하고, 세미나도 하면서 그야말로 기를 써왔습니다. 장신대 최윤배교수는 그의 저서 <조직신학입문>에서 홍길복을 남태평양을 중심한 디아스포라 신학과 실천의 한 모델로 길게 서술하기도하고 이를 장신대에서 가르치기도 했습니다.

자, 그런데, 이렇게 자화자찬하며 잘 차려 놓은 진열장 처럼 길게 늘어놓은 허풍과 허세가 진정 하나님 앞에서 인간 홍길복, 목사 홍길복의 정직한 모습일까요? 아닙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젠 목사가 된지 반세기, 50년이나 되지 않습니까? 주님 앞에 설 날도 점점 가까와 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젠 좀 솔직해질 만한 때가 되었다고 봅니다. 많이 부끄럽기는해도, 그래도 이젠 좀더 자신에 대해서는 정직해지고, 하나님 앞에서는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하며 무릎 꿇고 항복하는 인간이 되어야 겠다고 생각합니다. 이 나이가 되어 지난 날을 돌아보며, 홍길복이 살아온 인생과 목회자의 길을 회상해 보니, 하나는 <후회>요 다른 하나는 <감사>입니다. <아쉬움>과 <고마움>이 교차 됩니다.

먼저 부끄러운 이야기부터 드립니다.

50년전, 1974년 5월 8일, 목사 안수를 받던 자리에서 저는 참 많이, 정말, 아주 많이 울었습니다. 뜨거운 감격과 함께 제 가슴 속에는 처절한 다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 주께서 가신 길, 십자가의 길, 사랑과 섬김과 희생의 길, 저도 잘 따라 가겠습니다> 눈물로 약속하고, 가슴으로 다짐하고, 기도로 맹세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저는 그 때의 약속과 다짐과 기도를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 <실패한 인간이요, 실패한 목회자입니다>

성공이란 무엇입니까? 누가 세워준 것이든, 아니면 자기가 스스로 세운 것이든, 출발 할 때, 처음 시작할 때 세웠던 목표와 꿈과 이상을 이루었으면, 그것은 성공한 것이고, 끝내 그걸 이루어 내지 못했다면 그건 실패한 것입니다. <돈 많이 벌겠다>고 목표를 세웠는데 돈을 많이 벌었으면 성공한 것이고, 돈을 많이 못 벌었으면 그건 실패한 것입니다. <권력을 잡아서 출세하겠다>라고 목표를 세웠는데 그렇게 했으면 그것은 성공한 것이고 끝내 그걸 이루지 못했다면 그건 실패한 것입니다. <아내와 아이들을 사랑하면서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이 내 인생의 꿈>이라고 목표를 세웠었는데 그걸 이루었으면 그건 성공한 인생이고 이루지 못했으면 그건 실패한 인생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사람을 사랑하고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이 되겠다. The Man for Others! 꼭 주님 가신 길을 따라가리라!> 목사로 안수 받을 때, 저는 그렇게 인생과 목회의 목표를 세웠던 사람이었는데 끝내 그걸 이루어 내지 못했습니다. 저는 50년 전, <예수님께서 가신 길, 사랑과 섬김과 희생의 길을 따라 가리라> 결심하고 목사가 되었는데 끝까지 그 길을 따라가지 못했습니다. 저는 처음 출발할 때 세웠던 목표를 제대로 이루지 못하고 어영구영 헛된 것들만 바라보면서 50년의 세월을 흘러 보내고 말았습니다. 세속적이며 직업적 종교인으로써 기능적인 능력은 어느 정도 있었을지 모르지만 부르신 소명에는 끝까지 충성하지 못했고, 다짐했던 목표에는 이르지 못한 실패한 목사입니다.

목회란 일생을 통하여 쉬임없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일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목회란 사실 사랑 이상도 아니고 사랑 이하도 아닙니다. 목화란 사랑의 연습이고, 사랑의 실천이며, 사랑의 확대 재생산입니다. 목사라는 사람은 평생을 통하여 예수의 사랑을 증거하고, 자신의 삶으로 그 예수의 사랑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목사는 사랑을 주어야 할 의무만 있지, 사랑을 받을 권리는 처음부터 없는 사람입니다. 타인의 아픔과 고통, 다른 사람의 비극과 슬픔을 덜어주는 일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여기지 않는 사람은 목회자가 될수도 없고 또 되어서도 않됩니다. 억울하게 죽으리라 각오한 사람만이 가는 길이 목회자의 길입니다. 목회자의 모델인 예수님이 그리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저는 인간의 영혼을 구원하고 사랑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자본주의 시장경제 구조 속에서 교인들의 숫자를 늘리고 교회를 성장시켜 성공한 목사라는 말을 듣고 싶었던 사람입니다. 공동묘지에 숫자가 늘어났다고 해서 그걸 성장이라고 말해서는 않되는데, 저는 교회 크게 하고, 세례 많이 주고, 행사 많이 하고, 설교 잘 하고, 책쓰고, 방송하고, 부흥회 인도하고, 교회를 양적으로 크게 만들면 그게 성공이요, 성장이요, 잘난 것인 줄로 알았습니다. 후배 목사들이 <목사님, 목사님은 목회에 성공하셨습니다. 존경합니다> 그리 말하는 것을 잘못 알아들었던 사람입니다.

저는 늘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섬기려 오신 예수님을 따라간다>고 말은 하면서도, 권위주의적 생각에 사로잡혀 대접을 받는데만 익숙했고 남에게 시키는데만 능숙한 사람이었습니다.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옳으니라>는 말씀을 생활 속에서 실천하기는 커녕, 일년에 몇번 장로님들과 주일하교 어린이들 몇몇을 강대상 앞으로 불러내어 발을 씻어주며 <세족식>을 하는 것이 마치 예수님의 삶을 따라가는 것인 양 착각했습니다. 저는 가난하고 불쌍한 사람들을 사랑하고 돌보아주며 발을 씻어주라는 실천적 교훈을 종교적 의식, 종교적 Liturgy로 바꾸어 놓고 세족식을 하는 것이 진짜로 사랑을 실천하는 삶인 양 저 자신을 속여 온 위선자입니다. 지난날 저의 목회는 고객관리라는 차원을 넘어서지 못했습니다. 사랑으로 하지 않고 의무로 한 일은 결코 목회라고 이름 할 수 없습니다.

이 지구상에 단 한 사람의 가난하고, 병들고, 아파하는 사람이 남아 있다 하더라도 사실은 그것 까지도 목사의 책임입니다. 목사는 사랑에 대하여 무한 책임을 진 사람을 부르는 다른 이름입니다. <예수 믿으라>는 <말>이 아니라 사랑의 구체적 <실천>을 통하여 사람들이 감동을 받아 예수님께 나아와 주님을 영접토록 이끄는 것이 바른 목회인데 <세속적 방법으로 거룩한 일을 하려고 한 사람>이 바로 저였습니다.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고 죽으셔서 나를 구원해 주신 주님의 사랑이 너무나 놀랍고 감격스러워서 나 또한 주님 가신 길 따르리라 눈물로 다짐하고 50년 전에 목사가 되어 사랑과 섬김의 길을 걷기로 다짐하고 목사로 안수를 받았는데, 아 ! 글쎄 말입니다. 지금 와서 지나 온 길을 되돌아 보니 저는 그져 그 예수님을 이용하여 월급 받아 잘먹고 잘살면서, 칭찬받고, 이름 내면서 <목사님, 목사님> 소리 들으면서 살아온 그렇고 그런 인간이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말씀을 마치기 전에 저에게는 꼭 드려야만 할 마지막 한 말씀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감사의 말씀입니다.

가깝게는 하늘나라에 가 계신 저의 양가의 부모님들부터 제 아내와 아이들과 동생들과 일가와 친척들에게 빚진 것은 말로 다 할수가 없습니다. 수 많은 동역자들과 친구들과 선후배 신학도들, 더불어 이 인생길과 신앙의 길을 함께 동행해 주신 여러분 한분 한분에게 무엇이라고, 또 어떻게 감사를 드려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한국과 호주에서 지난 80여년을 함께 동고동락 해주신 분들, 50년 전 목사로 안수 받도록 이끌어 주셨던 대현교회의 옛 어른들과 오래된 친구들로 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허물 많고 부족한 것 투성이인 저를 감싸 주시고 손잡아주신 서부호주 한인교회, 시드니 제일교회, 그리고 시드니 우리교회의 여러 교우들과 은목회 식구들과 인문학 친구들을 포함한 많은 호주 디아스포라 이민자들과 동역자들에게 저는 죽어도 결코 다 갚을수 없는 은혜와 사랑의 빚을 진 사람입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정말 온 몸이 다 입이 되어도 말 가지고서는 다 감사드릴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 모든 감사와 함께, 아니 이 모든 것을 넘어서서 가장 크고 뜨겁고 드리는 감사는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입니다.

이제는 사실 성공이나 성취만이 아니라 실패와 부끄러움 까지도 감사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제 깨닫습니다. 인생이란 <목회이든, 학문이든, 사업이든, 정치이든, 봉사이든, 그 무엇이든간에 사람의 계획과 의지대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인생이란 살고 싶다고 해서 살수있는 것도 아니고, 죽고 싶다고 해서 죽을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세상에서 벌어지는 일체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섭리와 계획, 하나님의 뜻과 인도하심에 달려있습니다. 뒤늦긴 하지만 이제라도 이것을 깨달아 알게 해 주신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인생 최대의 깨우침은 인생의 성공과 실패를 넘어서서 주어진 삶의 일체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하면서 살다가, 감사하면서 죽는 것>입니다.

죽음의 때, 마침의 순간이 점점 가까워 오는데도 불구하고 아직도 감사가 인생 최대의 의무요, 동시에 승리인줄을 모른다면 그는 참 슬픈 사람입니다. 오늘 저는 이를 깨우쳐 주신 주님께 감사하면서 말씀을 마칠려고 합니다. 마치 25000Km, 250일, 길고 긴 항해 끝에 시드니에 도착하여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에 구원의 잔을   높이 들어 감사의 노래를 불렀던 Richard Johnson목사님 처럼, 저도 지난 50년 목회 길과, 80년  인생길을 한결같이 옆에 계셔 주시고, 인내로 참아주시고 붙잡아 주신 주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인생의 실패와 갈등 까지도 진솔하게 고백하게 해 주신 주님, 지난 날 목회의 아쉬움을 넘어, 그 때는 그렇게 잘못했지만 이제라도, 죽기 전에, 그걸 깨달아 알게 해 주시어 그것 까지도 감사로 승화 할수 있게 해 주시는 주님께 온 몸과 마음을 다하여 찬양하고 감사드리며 영광을 돌립니다. 그래서 236년 전 Johnson 목사님이 이 땅 호주 시드니에서 처음으로 읽으셨던 그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 여기에서, 저는 저 자신의 영혼의 고백으로 주님께 올립니다

<주께서 저에게 베풀어 주신 모든 은혜를 제가 무엇으로 다 갚을수가 있겠습니까? 오직 구원의 잔을 높이 들고 주님의 이름을 부를 뿐입니다. 그리고 남은 인생길에서나마 지난날 주님께 다짐했던 서원을 갚아드리도록 힘을 다 하겠습니다. 할렐루야! 아멘. 감사합니다.>     

사람답게

편안하던 마음이 세상뉴스와 마주하면 뒤죽박죽 엉망이 되곤 한다. 특히나 내가 알고 이해하고 있던 말들이 전혀 다르게 쓰이고 있는 소식들을 듣고 보노라면 참담한 마음으로 뉴스들의 속내를 파보곤 한다.

그런 오늘을 사는 답답한 마음으로 손에 든 책이었다. 독일의 철학자 미하엘 슈미트 살로몬(Michael Schmidt Solomon)이 쓴 <어리석은 자에게 권력을 주지마라>이다.

책장을 넘기자마자 사람에 대한 저자의 사뭇 도전적인 단언적 주장을 만나게 된다.

<우리는 인간의 특별함을 드러내기 위해 우리 자신에게 얼마나 화려한 별칭을 부여했던가. 호모 압스콘디투스Homo absconditus(신비적 인간), 호모 에스테티쿠스Homo aestheticus(미학적 인간), 호모 크레아토르Homo creator(창조적 인간), 호모 이노바토르Homo innovator(독창적 인간), 호모 루덴스Homo ludens(유희적 인간),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화자찬의 절정이자 고상한 우리 인간류를 공식적으로 지칭하는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현명한 인간)가 있다. 별로 유감스럽게 여기지 않는다면 호모 사피엔스라는 말은 역사를 통틀어 가장 재미있는 농담일 것이다.>

<인간에게 훨씬 적절한 명칭은 호모 사피엔스보다 호모 데멘스 Homo demes, 즉 광기의 인간이다.>

이어지는 그의 인간의 하찮음을 증명하려는 듯한 이야기들은 조금 불편할 수도 있다. 나처럼 교회 마당에서 뛰놀며 자란 이들에겐 더욱 그러할 듯.

그러나 그가 풀어내는 광기 서린 인간들이 만들어 냈던 지난 사람살이 이야기들에 빠져 들다 보면 밑줄 긋지 않는 문장이 몇 개 되지 않을 정도로 취하게 된다.

그가 광기 서린 인간들의 어리석음으로 사람다움을 잃어버린 분야의 첫 번째로 꼽은 것은 종교다.

그는 신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악행은 인간이 범하는 온갖 병폐 중에서도 가장 고질적인 망상이라고 단언하다. 그가 예시로 들은 여러 종교적 광기들은 내가 살아오면서 익히 듣고 보고 배운 사실들이다.

그 다음은 경제, 곧 소비지상주의 시대의 권력이 된 자본시장에서 나타나는 인간들의 광기, 곧 어리석음이다.

이어지는 광기서린 인간들의 어리석음은 문화, 교육 분야로 이어진다.

그리고 이런 인간들의 광기, 인간들의 어리석음이 절정을 이루는 곳이 정치라고 그는 말한다.

<우리가 지금까지 관찰했던 모든 형태의 바보 같은 짓, 이를테면 어리석은 종교, 어리석은 생태행위, 어리석은 경제행위가 정치의 영역에서 모든 것을 총망라하는 메가톤급 어리석음, 즉 어리석은 정치 행위로 통합되기 때문이다.>고 한다.

이런 어리석은 정치 행위로 나타나는 결과에 대한 그의 고언이다. <씁쓸한 사실은 민주주의의 모든 권력과 어리석음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라고.

그러나 그는 결코 희망을 잃지 않는다. 호모 데멘스 Homo demes, 즉 광기의 인간을 벗어나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 곧 현명한 인간이 되는 길이 있다고 제시한다.

바로 어리석은 자들에게 종교, 경제, 문화 교육, 정치에 이르기까지 권력을 내어 주지 않기 위해서 <도덕적 분개가 아니라 문화적 어리석음으로부터의 탈피>를 외치고 실천하는 일이다.

그는 이런 일들에 대해 낙관하는 이유로  “지성의 목소리는 낮지만,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 주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쉬지 않는다. 수없이 퇴짜를 맞은 뒤, 마침내 지성은 자신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하는 데 성공한다. 이것이 인류의 미래를 낙관할 수 있는 몇 가지 이유 중 하나다.”라는 프로이드의 성찰을 소개한다.

또한 <이제는 완전히 어리석은 자에게 조종간을 넘겨주는 행위가 무책임한 일이 될 정도로 인류의 행보는 문화적으로 진보했고, 과학기술과 국제화를 통해 거침없이 나아가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어리석은 자들의 권력을 깨뜨릴 수 있는 제반 조건을 마련해야 한다!>라고 권한다.

책을 덮으며 답답했던 마음들이 많이 사라졌다. 살아 숨쉬는 한, 어리석음을 벗어나 사람답게 살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들이 참 많다는 생각으로.

– *역자인 김현정이 번역한 책들 제목에 혹하여 몇 권을 주문하다.

이른 봄과 늦은 봄 사이를 가르는 비가 온종일 내리는 주일에.

어느 덕담에

평생 동남아 선교 사역을 이어 오신 아니 지금도 이어 가고 계신 허춘중 목사님께서 제 가족 사진을 보시곤 덕담 한마디를 얹혀 주셨다. ‘두 분 옛날 70년대 모습이 있군요.’라고.

내가 그리 살지 못한 탓 때문일 터이지만, 젊었을 때 잠시라도 함께 했던 이들이 오롯이 한길, 외길을 변치 않고 걸어가며 늙어가는 모습을 보거나 듣노라면 그저 존경의 맘이 앞서곤 한다.

그이가 말한 ‘70년대’라는 말에 꽂혀 오늘 뜰 일을 하는 내내 내 스물 무렵이었던 70년대를 생각하며 잡초를 뽑고 꽃을 심었다. 신촌과 종로 5가, 서소문 거리과 골목을 헤매면서.

1970년대와 오늘 2020년대, 참 많이 변했다.

그 무엇보다 내 자신이 엄청 많이 변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옛날 그나마 푸르고 맑았던 우리 내외의 70년대 모습을 기억해 주시는 허목사님께 감사를.

70년대나 칠십 대 나이 오늘이나 <세상엔 사랑이 가득한 것 같지만 우린 여전히 외롭고 허전합니다.>, <사랑, 친절, 섬김의 본질과 순수성을 잃어버>린 현실 속에서 늘 깨어 살아가야 한다고 깨우쳐 주시는 호주의 홍길복 목사님.

세상 모든 것 다 변해도 <바닥이 하늘인 세상>에 대한 믿음은 변치 않을 것이라고 오늘도 외치고 사는 내 참 벗, 대전 대화동의 김규복목사님.

필라델피아에서 80년 광주를 알리기 시작으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세월호 가족, 이태원 가족들과 이 땅의 이민자들을 생각하며 사람사랑, 이웃사랑을 외치며 사는 김경지선생을 비롯한 오늘 이 땅의 내 친구들.

어느덧 우리 세대도 저무는 때를 맞는다만….

비록 오락가락 비틀거리며 살아온 나이지만, 변치 않고 오직 신에 대한 믿음, 사람살이 올곧은 방향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온 이들과 생각을 나누고 살아온 것만으로도 그저 감사 뿐.

두어 주 전 작은 텃밭에 마구 뿌려 둔 상추 싹이 트기 시작했다. 꽃보다 아름답다던가? 새 싹을 바라 보노라면 늘 설렌다.

70년 대처럼. 암만, 화단엔 가을 국화도 새 싹이 올라오거늘, 내일에 대한 설렘만은…

여행, 그 후

이따금 내 마음이 아주 편안함을 느낄 때가 있다. 이런 저런 잡다한 잡념도 없고, 이렇게 저렇게 얽힌 걱정들도 없이 나아가 세상사에 대한 공연한 분노도 없이, 말 그대로 텅 빈 편안함을 느낄 때 말이다. 이럴 때면 무언가 해 내야 한다는 욕심조차 일지 않는다.

그야말로 이따금 맛보는 순간들인데, 그런 순간들을 꼽아보니 내 일터인 세탁소에서 내가 일에 빠져 있을 때가 첫째요, 손에 든 책에 빠져 들 때가 둘째 그리곤 뜰에 나가 앉아 새소리 바람소리 들을 때 그런 순간들을 맞았던 듯 하다.

그런 순간들을 누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면 절로 우러나는 마음은 바로 감사다. 이젠 이따금에서 종종으로 그런 순간들을 맞이하곤 하는데 아마 이게 나이 들어 늙어가는 징조일게다.

어제 오늘, 이틀 저녁 내게 그런 편안함을 누리게 해 준 책, 시인이자 미술평론가이며 <아트인문학>강연으로 이름 값이 꽤나 높다는 김태진과 전자공학을 하고 사진 석사를 마치고 미술예술학 박사를 수료했다는 사진작가 백승휴가 함께 쓴 <아트인문학 여행, – 이탈리아를 거닐며 르네상스 천재들의 사유를 배우다.>이다.

이 책을 읽게 된 까닭이다.

한 석주 전쯤 짧은 이태리 여행을 다녀왔다는 소식을 호주에 계신 내 스승께 전했더니만 그가 내게 했던 말이었다.

<지난해 10월 인문학여행 때는 33명의 인문학친구들과 같이 “아는 것 만큼 보인다”라는 주제를 가지고 여러 권의 책을 소개했었는데 그 중에 인상 깊은 책, 두 권을 소개할게요. 시간 될 때 천천히 한번 읽어보세요.  1. 아트 인문학 –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법, 김태진지음, 카시오페아, 2. 아트 인문학 – 틀 밖에서 생각하는 법, 김태진지음, 카시오페아>>

성정 급한 나는 그 말을 듣자마자 그 책들을 검색하였는데, 내 눈에 딱 들어온 것은 그 두 권 이전에 <아트인문학 여행, – 이탈리아를 거닐며 르네상스 천재들의 사유를 배우다.>였다.

그렇게 나는 전문가들의 안내를 받으며 내 짧았던 이태리 여행을 다시 곱씹어 천천히 음미하며 다시 걷는 그야말로 편안한 시간여행을 즐겼던 것이다.

실제 여행 중에 내가 보고 느낀 것은 한 시대를 지배하는 돈과 종교라는 권력과 그 시대를 이름없이 살았던  나와 같은 사람들이었다. 이 책은 그 시대를 지배했던 권력자들도 아니고 아직 문자보다는 그림으로 세상사를 읽는 게 편했던 나 같은 사람들도 아닌, 그 시대의 천재적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책이다.

피렌체의 브루넬레스키와 보티첼리, 밀라노의 다빈치, 로마의 미켈란젤로, 베네치아의 티치아노 등 당시 천재들의 삶과 그들의 예술적 작품을 소개하는데, 그 방면엔 아주 캄캄한 내 귀를 솔깃하게 만드는 이야기와 사진으로 나를 홀렸다. 아주 편안하게.

읽으며 내가 밑 줄 쳤던 몇 개 문장들이다.


<(그림에는) 더 이상 종교에 지배 당하지 않겠다는 예술가의 선언이 담긴 것이다…… 그림 속에는 등장 인물이 오직 신앙의 증거로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추울 땐 춥다고 하고, 의구심이 들 땐 의심하고, 괴로울 땐 오열한다.>- 피렌체의 화가 마사초의 그림 설명하며

<사람들은 높은 산과 바다의 거센 파도와 넓게 흐르는 강과 별들을 보며 놀란다. 그러나 정작 스스로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 – 르네상스 시대를 연 시인이라고 평가받는 이태리 시인 프란체스코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을 읽다가 크게 깨달음을 얻은 문장이란다.

<“모든 대리석 안에는 조각상이 깃들어 있다. 조각가의 임무는 그 현상을 드러나게 하는 것 뿐.”, “가장 고심해야 할 점은 엄청난 양의 노동과 땀으로 작품을 제작해야 하지만 작품이 완성된 뒤에는 마치 일순간에 매우 손쉽게 만들어진 듯이 보여야 한다는 점이다.”, “예술이 존재하는 한 예술은 세월을 초월하는 아름다움을 간직할 수 있다. ….그러므로 나는 예술을 더욱 완전하게 만들 것이다. >– 미켈란젤로가 한 말들이란다.

“나는 신과 인간에게 죄를 지었다. 주어진 재능에 걸맞은 작품을 만들지 못하고 낭비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 이건 레오나르도 다빈치 말이고.

<바라보다는 ‘바라다’와 ‘보다’의 합성어이다. 바라보는 건 그냥 보는 곳이 아니라 간절한 바람으로 보는 것이다.> 사진작가 백승휴가 말하는 사진찍기에 대하여


내가 이 나이에 옛 천재들을 흉내낼 까닭도 없거니와 오늘날의 권력자나 천재들에게도 마찬가지 일 터.

다만 나보다 먼저 이 세상을 살다간 이들이 경외하던 신 앞에, 내가 내게 솔직한 모습으로 한 번 서 보는 일, 한 번 흉내라도 내야 하지 않을까? 이젠.

미켈란젤로의 말, “모든 대리석 안에는 조각상이 깃들어 있다. 조각가의 임무는 그 현상을 드러나게 하는 것 뿐.”  – 신에 내게 던진 대리석은 바로 나였고, 그 대리석을 조각하는 조각가도 나였을 터이니.

자신없는 지난 모습들은 말고 다만 그 앞에 서는 오늘 만이라도… 편안하게.

여행, 그 후에.

아버지의 덕담(德談)

새해 인사드리러 갔더니 아버지는 한 밤중이셨다. 아내와 나는 한 동안 아버지가 깨어나시길 기다렸다. 점심 식사 나올 시간이 다가와 아무래도 잠을 깨워 드려야겠다는 생각에 “아버지, 저희들 왔어요.” 몇 번을 큰소리로 똑 같은 말을 외친 뒤에야 아버지는 눈가리개를 벗으시며 떠지지 않는 눈을 조금 여셨다. 그리곤 “워러, 워러”를 찾으셨다. 요양원 직원일 줄로 알았나 보았다. 아버지에게 물을 건네며 나는 조금 더 큰 소리로 “아니, 우리 왔다니까!” 더하여 아내가 높은 소리로 물었다. “아버님, 저 모르세요?”그제야 잠에서 깨어나신 아버지가 환한 미소 얼굴에 담으며 하신 말씀. ‘에이! 내가 너희들을 모르면… 정말 가야지!’

그리고 이어지던 아버지의 꿈 이야기.

“너희들 마침 잘 왔다. 이건 아주 심각한 얘기다. 꿈 이야기가 아니야! 내가 실제로 겪은 얘기야. 잘 들어라! 먼저 궁금해서 내가 물어볼 게 있어요. 니들 솔직히 대답해야 한다.”

여기까지는 이즈음 아버지가 나를 볼 때마다 먼저 입을 떼시는 도입부로 대체로 내 귀에 익은 대사다. 대개 이 다음을 잇는 아버지의 대사는 당신의 손자 손녀 특히 내 딸아이의 근황이 궁금하셔서 이어지는 내용이었다. 이 대사에 대한 내 응답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한울네는 애기 나서, 한나네는 일이 있어 오늘은 못 와요. 다들 잘 살아요.’

그런데 오늘은 달랐다. 달라도 아주 달랐다.

“너희들 이거 알어?  그거 그거 … 통일이 어떻게 됐니?…. 이거 이거 꿈 이야기 아니야! 내가 직접 본거야. 통일이 됐어 통일이. 그 잔치 자리에 내가 초대를 받았어. 내가 그 세상 보고 왔는데 천국이야 천국! 잔치자리에 산해진미가 차려졌는데 어찌나 정갈하고 맛있던지 내가 하루에 여섯 끼씩을 먹었어. 여섯 끼를. 거긴 가난한 사람들도 왕처럼 살어, 모두가 왕처럼. 이거 꿈 이야기 아니다. 내가 직접 보고 온거야!”

아버지는 똑 같은 이야기를 세번 반복하셨는데, 단 한 단어만 계속 바꿔 쓰셨다. 바로 ‘천국’이었다. 처음 이야기에선 ‘천국’이 두 번째는 ‘극락’으로 세번 째는 ‘파라다이스’로 바뀌었다.

그리고 덧붙이셨던 말씀. “내가 왜 그 자리에 초대됐는 지는 아직도 모르겠어. 왜 나를 초대했는지? 나를 초대했던 사람은….정씨였어, 정씨.” 나는 속으로만 아버지에게 응답했었다. ‘계룡산 정도령이었나 보다.’고.

아마 아버지는 신년 첫 날 꿈자리에서 아버지가 생각하시는 모든 하늘나라를 두루 다 돌아보셨나 보다.

그 이야기를 이제 봄이 오면 만 아흔 여덟, 옛 우리 나이로 치면 아흔 아홉 이른바 백수(白壽)를 맞으시는 아버지가 우리 자식들에게 던지시는 새해 덕담으로 받았다. ‘올 한 해 좋은 세상 누리며 살아라!’는 축복으로.

이윽고 나온 아버지의 점심 식탁. 곱게 으깬 닭 요리 한 줌과 우유 반 팩, 요거트 반 컵쯤을 맛나게 오래 즐기시던 아버지가 숟가락 내려 놓으시며 하시는 말씀. “됐다. 고맙다. 이제 가라”

*** 새해 꿈꾸는 한가지. 가게에서 일하는 시간도 좀 많이 줄이고 나 혼자 즐기는 시간을 더 많이 누렸으면 하는 꿈. 그 꿈으로 오늘 혼자 즐긴 일. 말린 나물 불려 나물을 무친 일. 도라지, 취나물, 무말랭이, 말린 호박, 시래기 등.

정월 대보름 나물 무치는 일은 한 해의 풍요와 건강을 위한 비나리였다든가? 나물무침을 딱히 음력 정월 대보름에만 해야 하는 일은 아닐 터. 무릇 기도란 언제 어디서나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법.

그저 내가 아는 이름과 얼굴들 하나 하나 떠올려 보며 올 한 해 넉넉한 풍요와 건강을 누리는 한 해가 되길 비는 마음으로. 그렇게 나 혼자 즐겨보는…

아버지의 덕담을 받아.

살아남기

성탄 연휴 책 한 권 읽으며 보냈다. 비엣 타인 응우옌(Viet Thanh Nguyen)이 쓴 장편소설 ‘동조자(The Sympathizer)’다.

나는 베트남에 가본 적도 없고, 베트남 역사에 대해 깊은 지식도 없다. 다만 베트남 통일에 대한 관심이 조금 있는 편이어서 지난 세기 베트남이 겪은 세월에 대한 이야기들은 제법 읽었다 할 수도 있다. 특히 월남이라고 부르던 남베트남이 망한 1975년 4월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또렷하다.

그 무렵 아직 열혈청년이었던 나는 베트남식 통일에 대한 막연한 기대도 있었다. 그 때 나는 논산 훈련소 수용연대에 있었다. 보통 징집된 병력들은 그곳에서 사나흘쯤 대기하다가  피복과 장비들을 수령한 후 훈련소로 가기 마련이었는데, 나는 그 곳에서 꽉찬 한 달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입대할 때 입었던 옷을 한 달 동안 입고 있었으니 그 옷이 오죽했으랴!. 나중에 그 옷을 받아든 어머니는 한참을 우셨단다. 나는 그곳에서 몇 차례 보안사의 심문을 받았었다. 하여 그 사월과 오월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이즈음 내 가게와 인접한 네일 샵의 주인인 리와 종업원 피터와는 가깝게 인사하며 지낸다. 모두 사십 대 베트남계 미국인들이다. 내가 나이들었다고 ‘썰, 썰(Sir)’이라고 부르는 그들에게 그냥 ‘영’이라고 하라고 했더니 요사이는 ‘미스터 김’으로 고정 되었다.

여기까지가 베트남 하면 내가 떠올릴 수 있는 생각의 전부다.

소설 ‘동조자’는 분명 베트남과 베트남인들의 이야기인데, 소설은 내게 전혀 낯설지 않은 내 아버지 세대와 내 세대 나아가 내 아이들 세대의 이야기처럼 다가왔다.

소설의 첫 문장이다.

<나는 스파이, 고정간첩, CIA 비밀요원, 두 얼굴의 남자입니다. 아마 그리 놀랄 일도 아니겠지만 , 두 마음의 남자이기도 합니다.>

프랑스인 신부(神父)를 아버지로 십대 초반 어린 나이 베트남 여인(?)을 엄마로 하여 태어난  주인공 ‘나’는 이야기 내내 이런 모습을 유지한다. 두 얼굴의 남자, 두 마음의 남자로.

이야기의 무대는 1975년 남베트남 패망 또는 베트남 통일 시점부터 1979년 사이 베트남과 미국, 필리핀, 태국 등이다.

그런데 전혀 낯설지 않게 우리들의 이야기로 다가온다. 다만 시점은 뒤죽박죽인 채로. 마치 1920년 이후 오늘까지 어쩌면 우리들의 미래까지 겹쳐지는 한반도를 무대로 한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읽으며 포스트잇을 붙여 기억하고픈 대목들 중 몇 개.

<비극은 옳음과 그름이 아니라 옳음과 옳음 사이의 갈등이었고, 이것은 역사에 참여하고 싶은 우리 중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딜레마였습니다.>

<나는 흰색이 단순히 순수나 순결과 관련된 색상만은 아님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애도와 죽음의 표시이기고 했습니다.>

<심문은 정신적인 것이 맨 먼저이고, 육체적인 것은 그 다음이야. 여러분은 신체의 멍이나 어떤 흔적을 남길 필요조차 없어. 언뜻 납득이 잘 안되는 소리처럼 들리지, 안 그래? 하지만 사실이야. 우리는 실험실에서 그걸 입증하느라 지금껏 수백만 달러를 썼어.> – CIA 미국 고문관의 말

<그들은 나한테는 예쁘지 않았지만, 그녀에게는 예뻤습니다.>

<내가 그의 아픈 곳을, 양심이라는 명치를 쳤고, 그곳은 모든 이상주의자가 상처 입기 쉬운 부분이었으니까요. 이상주의자를 무력하게 만들기는 쉽습니다. 이상주의자에게 자신이 선택한 특별한 전투의 최전방에 가 있지 않은 이유를 묻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결코 잊을 수 없는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결코 잊을 수 없다는 사실 자체였습니다.>

<대개 우리가 스스로를 보는 방식과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보는 방식이 똑같지 않은데도, 우리는 거울에 비친 우리의 모습이 진짜로 우리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 문장.  <우리는 우리의 죽음을 걸고, 이 한가지 약속을 지킬 것을 맹세한다. 우리는 살아남을 것이다!>

그리고 몇 해 전 먼저 세상 뜨신 장광선선생을 떠올리게 한 대목.

<여러분께 제 ‘아메리칸 드림’이 무엇인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제 ‘아메리칸 드림’은 죽기 전에 내가 태어난 땅을 보는 것, 다시 한번 떠이닌(서울 아님 내 장모의 고향 정주, 그도 아님 장선생의 고향 장흥)에 있는 우리 집안 정원의 나무에서 잘 익은 감을 맛보는 것입니다. 제 ‘아메리칸 드림’은 조부모님의 무덤에서 향을 피울 수 있게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 그토록 아름다운 우리 나라가 마침내 평온해지고 총성이 환호성에 가려 들리지 않게 될 때 온 나라를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제 ‘아메리칸 드림’은…… 전쟁에 대해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남자 아이들과 여자 아이들이 큰소리로 웃으며 노는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책장을 덮고 바라 본 하늘은 2023년 성탄을 안고 저물고 있었다.

자그마치 2023년이 지났는데 얼마나 더 가야할까? 내가 볼 수 있는 세상은 어디까지일까?

이쯤 왈 예수쟁이로서 자답(自答). ‘우리는 살아남을 것’이 아니라 ‘살아남아 이어가는 우리들을’ 믿기에.

또 다시 희망찬 새해를!

  • 좋은 때 좋은 책 읽게 깨워 주신 내 오랜 스승에게 감사를.
  • 2024년에 박찬욱감독이 영화화한 ‘동조자’가 나온다 하니 뜻 맞는 이들과 함께 이 책과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보면 좋을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