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 단상(斷想) 4 – 변하는 사회상

태평양전쟁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10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둘째 이야기    광복 70년 (光復七十年)

광복 70년을 뒤돌아보니 한국 사회 전반에 걸쳐 변하지 않은 것이 없을 정도로 세상은 달라졌다. 크게는 정치, 경제, 사회, 군사 등, … 국토(國土)와 민족의 분단(分斷) 이라는 소용돌이와, 작게는 일반 서민들의 살림살이에 이르기까지, 그   속에서 사람들의 마음과 세태(世態)도 많이 변했다.

8.15해방의 감격도 채 가시기 전에, 뜻밖에 몰아쳐온 국토분단의 비극, 그런 것에 더하여 동족(同族)끼리 서로 가슴에 총뿌리를 겨눠야 했던 6.25동란(動亂)의 대혼란기를 격었다. 그 뿐만 아니고, 4.19 혁명과 5.16쿠데타 등 정국의 큰 분기점을 이어오는 동안 사람의 마음과 세태가 변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돌이켜보니, 해방과 더불어 밀물처럼 쏟아져들어온 서구문명(西歐文明) 과 사상(思想)은 사람들의 의식구조와 생활풍습 등에 큰 변화를 일으켰 고, 예로부터 전해져온 한민족(韓民族)의 윤리(倫理)와 도덕(道德)의 가치관 등을 뒤바꾸어 놓았다.

서구문명(西歐文明)과 사상(思想)을 잘못 인식하여 맹목적으로 모방 하고 오도(誤導)한 나머지 방종에 가까운 자유주의사상(自由主義思想) 이 만연되 나가고 있었다. 특히 전란(戰亂)의 소용돌이와 끝없이 계속 되는 정국(政局)의 심한 변화를 겪어오는 동안 소박하기 그지없던 민심(民心)과 세태(世態)가 각박하고 메말라졌다.

광복70년 — 이제 구세대(舊世代)들은 반성의 기회로, 신세대(新世代) 들은 지난 과거를 거울삼아 새로운 지표(指標)와 <삶>의 가치관(價値觀) 를 설정해야 할 시기를 맞은 것 같다.

8.15해방 후 그 땅에서 있었던 사회풍조(社會風潮)의 단면(斷面)들을 간추려 이야기 해 보기로 한다.

그러한 시대를 겪지못한 사람들에게는 공상과학소설인 TIME MACHINE에 나오는 것과 같은‘과거와 미래의 시간 여행을 한다는 공상적 기계를   타보는 것이다.’라고 하면 될 것이다.

첫째로 미군들이 그 땅에 들어온 다음, 양(洋)자가 붙은 말이 꽤 쓰이게 되었다.

8.15 당시에는 신문이나 잡지 등 인쇄물에 쓰인 글짜가 오늘날 쓰이고 있는 그러한 것과는 달랐다.  가장 큰 차이라면  그 당시에는 <한자(漢字)가 많이 섞여 있었다.>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한글 전용 정책으로 한자 교육을 받지 아니하고 자란 세대들 에게는 별도(別途)로 한자를 배우지 않는 한, 당시 인쇄물들을 읽기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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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대한민국에서는 다시 한자교육의 필요성(必要性)을 말하는 사람들 이 있지만, 지금 한국어 글에서는 별로 한자를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 대부분의 학술 서적에서도 한자 사용을 줄이고 있는 편이다.  그러하지만, 나는 이글에 한자를 드문드문 섞고 있다. 한자(漢字)를 배우지 않은 한글세대가 이 글을 다 읽는다면, 이 글을 통해서도 한자 몇가지 정도는 배울 수 있게 될 것                            경향신문 (1950년 6월 13일자)                           이다.

어찌 되었든 간에 이야기의 본줄기로 돌아갈 것이니, 그 시대를 살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은 앞에 적은 것처럼, TIME MACHINE을 타고 그 시대를 한번 둘러보시라!

이제부터 [洋]자가 붙은 말 몇가지를 골라 이야기해 보기로한다.

양풍(洋風)이라는 말도 그 중에 하나인데, 여기서는 이야기 내용으로 보아 American style, 즉 ‘미국식’ 또는 ‘미국바람’이라고 할 수 있다. 예로부터‘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이라고 불려왔던 그 땅에 8.15 이후 ‘미국바람’이 퍼지기 시작했다. 동방예의지국이란 ‘예의(禮儀)를 잘 지키는 동쪽의 나라’라는 뜻으로 중국에서 한국을 가리켜 이르던 말이다. 원래 한국은 그러한 평(評)을 들을 수 있을 정도의 나라였었다.

한데 그러던 땅에 왜풍(倭風)이 들어와서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다음, 그 자리에 양풍(洋風, 미국바람)이 들이닥쳤다. 물론 나라 전체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東方禮儀之國과는 아주 거리(距離)가 먼 나라로 변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특히 8.15와 함께 미군들이 그 땅에 들어온 때부터 시작하여, 6.25  라고 하는 난리를 겪는 동안, 그리고 <잘 살아보세>와 <하면 된다>라는 것들이 뭇 사람들을 <禮儀之國>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로 만들어 놓았다.”라고 하면 자나친 말이 될까?

이런 이야기를 적다 보니, 생각나는 것이 하나 있다.  6.25 때 이야기다. 부산에서 살 때, K-9 비행장 근처에 우동교회 (佑洞敎會)라는 피난민 교회가 있었다.  당시박선택 목사가 담임으로 있던 곳이다. 나는 원래 기독교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는데, 육국병원에 있을 때 같은 병실에서 지내던‘김주찬’이라는 친구를 알게 된 것이 동기가 되어 교회엘 다니게 되었다. 한데, 어느 주일예배(主日禮拜) 설교시간에 그 교회 담임목사님이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일제시대에는 다꾸앙 냄새나는 설교를 하는 사람이 있었는데, 요즘엔 버터 냄새나는 설교를 하는 사람도 있더라.”

말속에 뼈가 있다. 그 말을 응용하여 나도 한마디 적는다.

“요즘은 돈냄새 풍기는 목회자(牧會者)도 있더라,”

내 말이 틀렸나?  교역자(敎役者)들 중엔 치부병(致富病)에 걸린 사람도 있다는 말이다.

직접 설명하기엔 거북한 말이지만 이왕에 [洋]자가 붙은 말을 꺼냈으니  적는다.

첫째로 <갈보, 양갈보, 또는 양공주>라는 말이 있다. 한데, 그것은 남자들에게 몸을 파는 여자를 속(俗)되게 이르는 말이다.

홍등가 (紅燈街, red light district)나 기지촌 (基地村, military campside town) 등에서 생계를 위해 웃음과 몸을 파는 여자를 지칭하는 천박(淺薄)한 그런 말을 조금이나마 순화하기 위해 창녀(娼女)라고도 하고 매춘부(賣春婦)라고도 하는데, 갈보이든, 창녀이든, 매춘부이든, 여자가 몸을 판다는 점이서는 조금도 다름이 없다.

한데 언제부터인가 그러한 직설적(直說的)이고 노골적(露骨的)인 표현 대신으로 쓰이는 말이 있다.

<직업여성(職業女性)>이라는 말이 바로 그것인데, 오늘날에는  관공서나 무슨 회사 등에서‘일정한 직업에 종사하는 여성’이라는 뜻 말고, 주로 유흥업소 등에서 도덕적으로 용납(容納)할 수 없는 퇴폐적(頹廢的)인 일에 종사하는 여성을 완곡(婉曲)하게 이르는 말로도 쓰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번 이야기에 나온‘양(洋)이란 서양의, 서양식, 서양 것, 등의 뜻이 있는 말로서, 앞에 적은 양갈보나 양공주를 비롯해 양담배, 양주, 양춤, 양코배기등, 양(洋)자가 붙은 여러 가지 말이 쓰여졌다. 바꾸어 말하자면, 8.15 해방과 함께 그 땅에 불어온 것은 미군들과 함께 상륙한 이른바 서구바람인 양풍(洋風)이었다.

거리에는 앞에 설명한 소위 <양공주>들이 생겨났다. 종래(從來)에는 남녀유별(男女有別)이 있어 부부들도 함게 거리에 잘 나다니지 않던 사람들에게는 양공주(洋公主)들이 미군들과 팔짱을 끼고 거리를 활보하는 모습을 대할 때 몹시 눈에 거슬렸을 것이다. 그러나, <유행과 새바람>이란 민감한 것으로 어느새 그러한 것이 사람 들 눈에 익어 자연스럽게 보였고, 한국 젊은이들도 그러한 풍습에 젖어들어 건전(健全)하게 교제(交際)하는 연인(戀人)들 사이에서도 스스럼없이 그러한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사교춤>이라는 댄스도 미군들과 더불어 그 땅에 상륙한 후, 댄스바람 이 번지고 있었다. 댄스의 열풍(熱風)은 이른바‘자유부인’들을 낳았고, 특히 전란(戰亂) 을 통한 식생활(食生活) 해결의 어려움과 함께 여성들 중엔 정조(情操)를 경시(輕視)하는 풍조(風潮)도 있었다.

나는 6.25전쟁 때 부산서 피난살이를 했고, 휴전(休戰) 후 서울로 되돌아가, 신촌에서 거의 30년을 살았다.

나는 신문에 실린 연재소설(連載小說) 읽는 것을 좋아했는데, 그 중엔 지금도 기억나는 것이 있다.  1954년에 발표된 자유부인 (自由夫人, 정비석[鄭飛石}작)이라는 소설이 바로 그 작품인데, 그것은 6.25전쟁 이후 일부 계층에 퍼진 서구(西歐) 풍조를 묘사한 소설로, 그 작품이 신문에 연재(連載)되면서 사회적으로 큰 파문(波紋)을 불러일으켰고, 책으로 만들어진 그 작품은 1950년대에 가장 많이 팔린 소설로 알려져 있다.

download소설 ‘自由夫人’은 당시 한국 사회에 큰 파문(波紋)을 일으켰고, 사회적 으로 큰 논란(論難)의 대상이 되기도 했는데, 사회 지도층에 있는 사람 들의 비리(非理)를 파헤치고, 국가의 이익을 실추시켰다는 이유로 작가 가 치안국(治安局)에 소환되는 일화(逸話)를 갖고 있기도 한 소설이다.

대한민국에서 자유당(自由黨)시절에만 그런 일이 있었겠는가? <춤바람>이나 정경유착(政經癒着)>은 그 후에도 흔하게 쓰인 말이다.

정경유착(政經癒着)이 무엇인가? 그것은 정치계(政治界)와 경제계(經濟界)가 서로 자신의 이익을 얻으 려고 서로 깊은 관계를 가져 하나가 되는 일이 아니던가?

일제통치 아래`폐쇄(閉鎖)된 사회에서 억압만 받아오던 한국인들은 그러한 자유화(自由化) 물결이 그저 좋아만 보여 무한정 맹목적으로 받아들여 정치적 사회적 부작용을 낳기 시작했다. 그런 속에서 암살(暗殺), 정치세력다툼, 공산주의자들의 테러, 폭력의 난무 등 해방초기의 정국은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휴전직후 55년도엔 처녀 70여명을 농락한 세칭‘박인수(朴仁秀)사건’ 이라는 것이 있었고, 각 결혼식장에서는 피로연을 댄스파티로 대체하는 풍경도 흔히 볼 수 있었다. 6.25전쟁 때, 국운(國運)이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은 상황에 놓여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빽>만 있으면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될 정도로 <뺵의 위력(威力)>이라는 것도 있었다.

그만큼 세상은 <빽>에 약했고 어수룩하기 그지없었다.

60년대를 돌아본다.

60년대 초부터 경제성장(經濟成長)이니, 국민소득증대(國民所得增大)니 하는 말이 쓰이기 시작했고, 그러한 말과 함께 생활 수준이 차차 향상 되면서부터 생겨나기 시작한 배금사상(拜金思想), 즉 돈이면 무엇이 든지 된다는 생각은 기업윤리(企業倫理)의 타락과 공무원들의 범죄 행위(犯罪行爲)와 탈세(脫稅)는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사치성이나 도피성 이민에 이르기까지 많은 부조리(不條理)를 낳았다.

말하자면, 천민자본주의(賤民資本主義)가 판을 치기 시작한 것이다.  서구식(西歐式) 생활의 모방성향이 늘어남에 따라, <호화 아파트>, <자가용족>, <바캉스>라는 말도 쓰이게 되었고, 극단적 표련으로는 <도둑촌>과  <호화 주택촌(豪華住宅村)>이라는 유행어까지 쓰이게 되었다.

아무튼, 극단적인 빈부(貧富)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의식(葛藤意識)과 우열감 내지는 불신풍조(不信風潮) 등이 생긴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뭇여성을 돈으로 매수하여 향락한 박동명(朴東明) 사건은 배금사상에서 비롯된 부조리(不條理)의 단면을 말해주고 있다.

그런 것뿐만 아니다. 최고, 제일, 일류, 고급, 그냥 고급은 신통치 않아 최고급이 아니면 거들떠보려고도 하지 않는 최고병(最高病)이나 일류병(一流病)에 걸린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한 병은 어린 학생들에게까지 전념되어, 일류학교에 가지 못하는 것을 비관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하고, 집을 뛰쳐나가 방황하거나, 나쁜 길로 빠져드는 아이들이 생기기도 했다.

그러한 배금병 / 배금주의와 일류병은 심지어 한국 교회에도 감염되어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 일류병과 사치병(奢侈病)은 날이 지나갈수록 더욱 나라 안에 퍼지고 있었다.

로렉스 (ROLEX), 몽블랑(MONT BLANC), 나폴레옹 코냑(Napoleon Cognac),   조니 워커(Johnnie Walker), 샤넬 (CHANEL) 등이 아니면 거들떠보려고 도 하지 않는 졸부(猝富)들도 생겼다.

그러한 일류병과 사치병은 교육적으로는 일류학교(一流學校) 지향열 (指向熱)이 만연되어 자식들을 어떻게든지 출세시켜야겠다는 부모들의 과열과 허영으로 이른바 <치맛바람>이란 유행어와 함께 어릴적부터 벅찬 과외활동을 강요하는 풍조(風潮)까지 빚었다.

그런 것에 더하여, 범죄(犯罪)의 대형화 또는 조직화와 인질사건 (人質事件) 등 강력사건의 증가 등도 그러한 갖가지 부조리한 사회풍조(社會風潮)의 외형적 영향 등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되새겨보는 지난 70년 동안의 사회풍조, 그것은 한국의 내일을 위해  정비(整備)하고 고쳐야 될 숙제가 아닐 수 없다.

이미 앞에 적었듯이, 60년대 들어서부터 <경제성장> <국민소득증대> 등의 기치와 함께 생활 수준이 차차 향상되면서부터 생겨나기 시작한 배금사상(拜金思想), 돈이면 무엇이든지 된다는 생각은 기업윤리 (企業倫理)의 타락(墮落)을 비롯해, 공무원 범죄(公務員犯罪)와 탈세 (脫稅) 등, 사회적으로 여러 방면에 부조리(不條理)가 생겼다.

***영화 자유부인(1956년 작, 상영시간 2시간 5분)

8.15 단상(斷想) 3 – 장군(將軍)들

태평양전쟁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9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둘째 이야기    광복 70년 (光復七十年)

<박노규(朴魯珪)장군1918년 3월 14일 ~ 1951년 3월 3일>은 한국전쟁 때 내가 복무했던 부대인 육군 제2사단 31연대장이었다.

그는  1946년 11월 국방경비사관학교 제2기생으로 졸업과 동시에 육군 참위로 임관된 후, 육군보병학교 고등군사반에 입교하여 현대전술에 대한 연구를 하던 중 1950년 5월 1일 육군중령으로 진급하였고,  한국전쟁 때 춘천 및 홍천 전투, 강릉 전투 등에서 활약했으며 1951년 3월 3일 일월산 전투에서 북한군 제10사단 패잔병을 섬멸하던 중 560고지에서 총에 맞아 전사했다.

사후 1951년 4월 27일 태극무공훈장이 수여되고 동시에 육군준장으로 추서되었으며 현재 유해는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장군묘역 1-47에 안장되어 있다.

전쟁중 진두지휘(陣頭指揮)를 하던 중 적탄(敵彈)을 맞고 33세를 일기(一期)로 이 세상을 떠난 박노규 연대장 … ‘6.25 전쟁’이라는 싸움터에서 대한민국의 국방을 위해 전장(戰場)의 이슬로 사라진 그의 명복을 빈다.

박노규 장군이 졸업한 <국방경비사관학교>와 관련이 있는 몇 가지 이야기 를 요약해서 적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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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경비사관학교의 정식명칭은  남조선국방경비사관학교 (南朝鮮國防警備士官學校)다.   영어로는 ‘South Korean Officer Training School’인 그 학교가 생기기 전엔 ‘군사영어학교 (軍事英語學校)’ 라는 것이 있었다.

군사(軍事)에 관한 영어와 미국식 군사훈련을 가르친 그 학교를   Military Language School이라고도 하는데, 미군정이 생긴 다음 서울 서대문구 냉천동에 있는 감리교신학교 자리에서 개교(開校) 한 그 학교는 장차 한국군 창설을 목표로 만든 학교다.

그 학교의 교육 과정을 마친 사람들 대부분이 일본군이나 만주군 출신인데, 남조선국방경비대를 거쳐 대한민국 건군(建軍)을 이룬 주역(主役)들 대부분이 군사영어학교 출신들이다.  그런 사람들 중엔 일제시대 때, 특별지원병으로 일본군에 입대 하였다가 훗날 한국군의 별을 단 사람들도 있다.

앞에 적은 박노규 연대장이 전사할 당시, 육군 제2사단장이었던 함병선(咸炳善) 장군도 군사영어학교 출신이다. 한편 태평양전쟁 당시, 특별지원병으로 일본군이 되었던  사람들 중, 육군종합학교(陸軍綜合學校) 출신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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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때, 내가 있던 부대의 이기욱 대위도  일본군  출신이었 다.  계급은 오장(伍長)이었다. (오장은 한국군 하사와 같은 계급이다.)

육군종합학교는 필요한 장교를 빠른 시간 안에 양성하기 위하여 1950년에 설치한 단기군사학교로서, 두세 달 정도의 교육을 시킨 뒤 장교로 배츨하였다.  더 설명하자면, 육종(陸綜)’이라고도 하는 육군종합학교는 6.25 전쟁 때, 한시적(限時的)으로 있었던 <전시사관양성(戰時士官養成) 군사학교>다. 이를테면, 그것은 부족한 초급장교들을 속성으로 만들어내는 임시학교였다.

부산 구포초등학교에 있던 육군훈련소에서 전투병(戰鬪兵)이 되기 위한 단기(短期) 군사교육을 받고 전선(戰線)에 배치되었던 나처럼,  ‘육종’ 출신 장교들도 지휘관이 되기 위한  기초훈련만 받고 전선에 투입된 초급장교들이다. 말하자면, 그들은 급조(急造)된 장교들이라는 이야기다.

그렇게 속성으로 된 많은 ‘육종’ 출신 장교들이 전투지휘를 하다 전사(戰死)하거나 전상자(戰傷者)가 되었다.

하여간, 수많은 젊은이들이 전사자가 되거나 전상자가 된  ‘6.25’라고 하는 그 전쟁이 일어나게 된 것은 한반도가 분단(分斷)된 다음에 생긴 것이고, ‘한반도의 분단’은 ‘태평양전쟁이 끝남에 따라 생긴 것이다.

1931년에 일어난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중일전쟁을 거쳐 태평양전쟁에 이르는 시기(時期)를 일본에서는 ‘15년 전쟁’이라고 한다. 그들(일본)의 표현대로 ‘15년 전쟁’ 시기에 살았고, 그런 것에 더하여 ‘6.25’ 라고 하는 전쟁도 겪은 나의 지난날들을 회상(回想)하며 이 글을 쓰는 내 자화상(自畵像)을 머리 속에 그려본다.

각설하고, 군대 계급에는 소장, 중장 등도 있는데 보통 <장군(將軍)> 이라고도 한다. 말하자면 <xx 소장>이나 <xx 중장>이 아니고, <xx 장군>이라는 말이다.

장군(將軍)이란 군대용어(軍隊用語)로서 준장,  소장,  중장,  대장 등 <별>을 단 계급 전부를 한데 묶어 일컫는 말이다.  한데, 장군(將軍)을 ‘장성(將星)’이라고도 한다.

  • ‘장수 장(將)’ + ‘별 성(星)’ = ‘將星’이다.

그러므로 준장(准將)은 一星將軍, 소장(少將)은 二星將軍, 중장(中將)은 三星將軍, 대장(大將)은 四星將軍이라고 지칭(指稱)한다.

한마디로 장성급(將星級)인 장군(將軍, General officer)은 군사(軍士)를 거느리는 우두머리다. 더 설명하자면 장군이란 군대를 지휘하고 통솔하는 우두머리로서, 큰 규모인 지휘관에게 주어지는 관직이나 칭호다.

앞에 적었듯이 미군정시대 때, 장차 한국군 창설을 목표로 만든 군사영어학교에서는 그 학교 학생들에게 미국식 군사훈련을 가르쳤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군의 군사용어 대부분도 미국의 군사용어를 번역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를 들어보면, 앞에 적은  ‘一星將軍, 二星將軍’ 등이 바로 그런 것이다.

Brigadier General (one-star General) = 准將, 별 하나. Major General (two-star General) = 少將, 별 둘.        Lieutenant General (three-star General) = 中將, 별 셋. General (four-star General) = 大將, 별 넷. General of the Army (five-star General) = 元帥, 별 다섯. 공군 원수는 General of the Air Force. 해군 원수는 Admiral of the Fleet  등이다.

어느 나라 군대든지 <장군> 또는 <원수>가 된다는 것은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바꾸어 말하자면, 군대생활에서 <별>을 단다는 것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다.’라고 할 수 있다. ‘하늘의 별 따기다.’라고 한 말은 요즘 세상 이야기고,  6.25 전쟁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그때 한국군의 실정(實情) …… 말하자면, 군대의 편제(編制) 등 필요한 인원(人員) 때문에 부득이 젊은 <장군>들이 생기게 되었다. 앞에 적었듯이 ‘군사영어학교’는 장차 한국군 창설을 목표로 하고 미군정이 만든 것이다.

한데, 대한민국 탄생과 함께 그 나라의 건군(建軍)을 이룬 주역(主役)들 대부분이 군사영어학교의 교육과정을 마친 일본군(만주군 포함)  출신들 이었다. 한국군 최초로 4성장군이 된 백선엽(白善燁) 장군도 만주군 출신이고 군사영어학교를 나온 사람인데, 그가 4성장군이 될 때 그의 나이는 32세였다. 서른 두 살에 <4성장군>이라 ……      글세올시다 ……

아무튼 야전복(野戰服)차림의 백 장군이 지프(jeep)를 타고 전선을 누비던 때와 오늘날 一星將軍이 될 수 있는 <나이가  50세전후>라는 것을 비교해 보면, 그 차이는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엔 별의 희소가치(稀少價値)가 1950년대, 특히 6.25전쟁 때의 그것 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희박(稀薄)해졌다. 달리 말하자면, 장성(將星)들의 수(數)가 지나치게 많은 것은 아닐런지?

기록에 의하면,  6.25전쟁이 일어났을 당시 한국군 장성의 수는 육군이 10명, 해군이 1명, 공군이 2명, 모두 13명인데, 당시 최고 계급은  소장 (少將)으로 4명(모두 육군)이었고, 나머지는 준장(准將)이었다.

그 전쟁이 일어났을 때, 기껏해야 30세 안팎이었을 사람들이 <별>을 달고  군대를 통솔(統率)했다.    아무튼 그 전쟁 때 백장군처럼 속성(速成)으로 된 장군들이 있었다.

그때는 정부 수립과 함께 출발한 군대의 조직편제(組織編制)에 미비(未備) 한 상태에서 전쟁을 겪게 된 때였다는 것을 참고하여 생각해보더라도, 군대에서 별을 단다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니다.     한데, 목숨을 잃은 후에 장군이 된 사람도 있다.

사람이 죽은 뒤, 그의 생전의 공훈에 따라  계급을 올리거나 훈장을 주는 것을 추서(追敍)라고 하는데, 앞에 적은 박노규 연대장이 그런 사람이다. 박노규 장군은 생전(生前)에 별을 단 적은 없지만 사후(死後)에 장군이 된 사람이다.

해방 이후  전쟁을 치루며 서른 안팎 나이에 별을 달았던 많은 장군들 중엔 박노규 장군 처럼 국가에 공(功)을 세워 사훈(死後)에 장군이 된 사람도 있고, 이제 역사의 평가를 기다리는 이들도 있다.

돌이켜 장군이 다 장군은 아니었던 것 같다.

8.15 단상(斷想) 3 – 은인(恩人)

태평양전쟁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8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둘째 이야기    광복 70년 (光復七十年)

해방 후엔 이런 것도 있었다.

basic각가지 영어학습 책도 시중에 퍼지기 시작했는데, 노점에서도 책을 팔았다.   그러한 것 중엔 다음과 같은 책도 있었다.

영어학습에 필요한 최소 어휘만으로 (850 단어만으로) 일상생활에 필요한 말을 할 수 있도록 만든 책도 있었는데, 찰스 오그던 (Charles K. Ogden)의 Basic English가 바로 그런 책이다.

하여간, 8.15 해방 후, 미군들과 함께 그 땅에 들어온 것이 영어 뿐만 아니었다.  의약품의 경우 예를 들면, 페니실린(penicillin), 다이아찐(diazine), 스트렙토마이신(streptomycin), 디디티(DDT) 등이 8.15 후에 한국으로  들어온 것들이다.  그러한 의약품과 함께 미군의관(美軍醫官)들도 남한 땅을 밟게 되었다.

지금 내가 적고 있는 이 글의 내용이 8.15 전반(全般)에 관한 이야기가 되지 못하고 <8.15 단상(斷想)>이라는 제목처럼 단편적인 글이다. 사람마다 같을 수는 없겠지만, <8.15>라고 하면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그 당시를 살아왔을 뿐만 아니고, 분단된 그 땅에서 동족상잔 (同族相殘)이라는 엄청난 비극이 일어난 6.25 전쟁 … 그리고 총과 칼을 들고 그 전장(戰場)으로 뛰어든 젊으이들 ,,,,,

총이면 총이지, 칼이라니?  그렇다.   대검(帶劍)이라고도 하는 칼을 총신(銃身) 끝에 꽂고 다녔다. 전투 상황에 따라 그 칼이 쓰여진다. 그러한 상황에서 적과 맞붙어 싸우다 전장(戰場)의 이슬이 되어버린 수 많은 전사자(戰死者)들 …

그리고, 적탄(敵彈)을 맞아 몸을 제대로 쓰지 못하게 된 전상자(戰傷者) 들의 수는 얼마던가?  한국 젊은이들만이 아니었다. 국제연합(國際聯合, UN)회원국 군인으로서 그 전쟁에 참전하여 목숨을 잃거나 몸을 다친 군인들의 수는 얼마던가?

그러했던 전쟁 ……… 더 설명하자면, 1950년 6월 25일 새벽에 북한 공산군이 북위 38도선에서 일제히 남한을 침공함으로 벌어지게 된 그 전쟁인데, 한국측에서는 그것을 6.25라고도 하고, 6.25전쟁이나 6.25 사변이라고도 하며, 한국전쟁 또는 한국동란이라고도 한다.

“그 전쟁이 일어난지가 언제인데 아직도 하나의 공통된 이름으로 불리지 않고 있다.”라는 이야기다.

한편 북한에서는 그것을 <조국해방전쟁>이라고 하는데, 그 말의 뜻은 ‘대한민국을 무너뜨리고 그들이 원하는 방법으로 통일을 하겠다.’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그런가 하면, 그 전쟁에 끼어든 중국은 抗美援朝戰爭이라고 하는데, <抗美>를 <抗米>로 쓰기도 한다. 미국이나 일본도 그들나름대로 쓰는 <6.25 전쟁> 이름이 있다.

그러한 전쟁 이름이야 어찌되었건, 내가 자유롭게 걸을 수 있고, 마음 대로 뛰어다닐 수 있는 몸을 가지고 살 수 있었던 것은 그 전쟁 때  김화지구 전투에서 중공군(中共軍)과 교전(交戰)한 것을 끝으로 내 삶에서 떠나 버렸다.

휴전회담(休戰會談)이 시작되기 직전이고, 내 나이 스물다섯살 때 생긴 일이다.

이야기 장면(場面)을 앞에서 적은 <미군의관(美軍醫官)들도 남한 땅을 밟게 되었다.>로 돌려본다. 미군정 때 미군의관들이 여러 가지 새로운 의약품을 가지고 한국으로 왔었던 것처럼, 6.25 전쟁 때에도 그 땅에 미군의관들이 있었다.  미 공군대위, Dr. Feeny 라는 군의관도 그들 중 한사람이다.

내가 그를 알게 되기까지의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런 것이다.

나는 전투중 중공군의 수류탄 파편으로 졸지에 부상병이 되었는데, 야전병원(野戰病院)에서 응급치료를 받은 다음 제일육군병원으로 후송 (後送)되었다.

한편 내가 그 병원에 입원하고 있을 때 휴전회담(休戰會談)이 시작되었 는데, 회담 중에도 그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다.  입원한 지 며칠 후, 분대장 고광만 하사가 들것에 실려 그 병원에 들어 왔다.    그도 다리를 다쳤는데, 그는 나보다 더 심하게 다쳤다. 내가 있던 중대에서 전사자와 전상자가 많이 생겼다는 것을 그를 통해 알게 되었다.

왼쪽 다리뿐만 아니고, 왼쪽 팔목도 다친 나는 팔목에 석고(石膏)붕대 를 하고 지내다가 원호대(援護隊)로 옮겨졌고, 1951년 9월 14일에 나는 명예제대증을 받아 들고 군문(軍門)을 나오게 되었다.

제대한 다음, 그 당시 부산 해운대 근처에 있던 K-9이라고 하는 미군 비행장에 있는 17th Medical Group에 취직이 되어 그곳 입원실에서 가볍고 손쉬운 잡일을 했다.

20121203011957_2 당시 부산 수영(K-9) 비행장  모습

앞에 적은 Dr. Feeny라는 군의관을 내가 알게 된 것은 바로 그때였다. 하지만, 내가 거기서 지내는 동안 처음부터 그 군의관을 알게 되었던 것은 아니고, 그 직장에서 얼마동안 지낸 다음에 그는 내가 한국군 부상병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 걸음걸이가 보통사람과 다르다는 것에 관심을 가진 그는 다른 미군 의사들과 함께 내 상처를 고쳐주려고 무척 애를 썼다. 하지만, 고치질 못했다.

그들이 내 상처를 고쳐주진 못했지만, 그 고마움은 잊을 수 없다.

지금도 그때 다친 상처 때문에 몸이 불편하기는 하지만, 목숨을 잃은 사람 도 있고, 나보다 더 심하게 다친 사람도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나는 불행 중 다행이다”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8.15 단상(斷想) 2 – 말(言語)

태평양전쟁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8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둘째 이야기    광복 70년 (光復七十年)

8.15 단상(斷想) 2 – 말(言語)

해방이 된 다음, 일본어가 그 땅에서 물러가고 대신 영어가 그 자리에 들어와서 미군정이 펼쳐지고 있는 동안 한국의 공용어(公用語)로 쓰였다.

말하자면, 일본이 강제로 한국에 퍼뜨려 놓은 일본어는 썰물처럼 그 땅에서 빠져나가고, 속된 말로 꼬부랑 말과 꼬부랑 글씨라고 하는 영어가 밀물처럼 밀려온 것인데, 코쟁이라고도 불리는 미군들이 말하는 것을 한두마디 알아듣고 그대로 비슷하게 흉내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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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서울 동대문 – 어느 미군이 찍은 사진 1

지금은 신문이나 잡지에도, 뉴스 방송에도, 텔레비젼 연속방송극에도, 거리에 즐비한 상가(商街) 간판에도 영어가 쓰이고 있다.

<상가 간판에도 영어가 쓰이고 있다.>라고 한 것에 관한 이야기를 적어 보려고 한다.

미군정 시대가 지나가고 대한민국이 탄생되어 회갑(回甲)을 지냈건만 아직도 그 땅엔 외래어(外來語)의 어문일치(語文一致) 또는 언문일치 (言文一致)에 관하여 정리할 것이 꽤 있다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외래어(外來語)란 말하자면 외국어가 국어 속에 들어와서 국어처럼 쓰이는 것인데, 특히, 한자어(漢字語)를 제외한 여러 외국의 말이 국어화(國語化)한 것으로서 <들온말>이라고도 한다.

그러한 <들온말>에 관하여 예를 들어 보기로 한다.

디지털카메라시대인 요즘엔 볼 수 없지만, 필름카메라시대에는 유원지 나 관광지 등에 있는 매점들 중엔 필름을 파는 곳도 있었다.

영어로 film인 그것을 위에 적은 것차럼‘필름’이라고도 하고,‘필림’ 이라고도 하며, 또는‘휠름’이라고도 한다.

이런 것도 있다.   Center에 관한 이야기다. Center는 축구나 농구 등의 경기(競技)에서 center line, centering 등으로 흔하게 쓰이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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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서울 동대문 – 어느 미군이 찍은 사진 2

한편, center는 무슨 상호(商號) 뒤에 흔히 붙이는 말이기도 한데 예를 들면 xx분식 센터, xx치킨 센터, xx스포츠 센터, xx심부름 센터 등이다.  그러한 center에서 온 말이 센타, 쎈타, 센터, 쎈터 등으로 쓰이고 있는 것도 볼 수 있다.

한데, 그러한 외래어도 한국에 토착되어 쓰이고 있다면, 그것도 일종의 국어다.

그러한만큼 같은 뜻을 지니고 있는 말을 위에 적은 센타, 쎈타, 센터, 쎈터 처럼 여러가지로 쓰이고 있는 것은 바람직한 것이 아니다.

하여간, 오늘날엔 그 예를 낱낱이 다 열거할 수 없을만큼 영어가 판을 치는 세상으로 변했지만, 해방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미군정시대 때 영어통역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들은 대개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 때 해외유학을 했거나, 아니면 국내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라고 하면 될 것이다.

당시 그 정도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은 그 시절에 대지주 등 부유하게 살던 집안 출신으로서 해방 전엔 친일을 했고, 해방이 된 다음엔 친미 행위를 한 사람들이었다’라고 할 수 있다.

영어를 아는 한국인들이 모두 그러했다는 것은 아니고,“해방 당시나 또는 해방 후 얼마 동안은 오늘날처럼 영어를 아는 한국인들이 많지 않았다.”라는 이야기다.

어찌 되었건, 군정 당국은 점령지를 통치하는데 언어장벽(言語障壁) 이라는 걸림돌이 생겨서 영어를 아는 한국 사람이 필요하게 되었고, <통역정치(通譯政治)>라는 것이 등장하게 되었다.

지금은 영어가 한국의 공용어는 아니지만, “그 땅에서 흔하게 쓰이고 있는 것이 영어다.”라고 할 수 있는데, 크게는 국가기관에서부터 작게는 일반 가정에 이르기까지 사람들의 생활 주변에 영어가 즐비하다.

물론 콩글리쉬(Konglish)를 포함해서 그렇다는 이야기다. 콩글리쉬(Konglish)라는 말이 나온 김에 ‘가라오케’이야기를 적는다.

1970년대 이후부터 쓰이고 있는 <가라오케>라는 말은 일본어와 영어의 합성어(合成語)이다.   <비어 있다>는 뜻의 일본어인 ‘가라 (空)’와 오케스트라(orchestra) 의 ‘오케 (orche)’를 합쳐서 만든 일종의 조어(造語)다.

말하자면, 사람이 연주하는 대신 기계가 합성하는 반주음에 맞춰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기계나, 그 기계를 설치한 술집 등을 뜻하는  말로 쓰이고 있다.

그러한 <가라오케>라는 말이 오늘날엔 영어사전에도 나와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하여간 태평양전쟁이 끝난 다음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전에 없었던 새로운 말이 만들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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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서울  – 어느 미군이 찍은 사진 3

지금 내가 이런 이야기를 적고 있는 것은 가라오케의 뜻이나 콩글리쉬 에 관한 긴 설명을 늘어놓으려는 것이 아니고, 태평양전쟁 이후 조수 (潮水)처럼 한국에 밀려들어온 영어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꺼내본 것이다.

한국어 대신 일본어를 국어라고 하던 땅에서 조선총독부 자리에 걸려 있던 일장기(日章旗)가 내려지고, 성조기(星條旗)가 올라갔다.

바꾸어 말하자면, 일본이 그 땅에 뿌려놓은 일본어 대신 영어가 들어 온 것인데, 그 당시 대다수 한국인들에게 영어는 익숙한 것이 아니었다.

여기서 내 자신에 관한 몇 가지 이야기를 적는다. 앞에서 이미 밝힌 것처럼, 나는 태평양전쟁이 끝나기 전부터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고, 지난 30년 세월을 미국에서 지내고 있다.

한데,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나에게 하나의 외국이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예를 들어 보기로 한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나에게 하나의 외국이다.”라고 했는데, 가령  내가 한국 어느 국제공항에서 입국수속을 하려면, 나는 국적법(國籍法) 때문에 외국인 신분으로 한국에 입국하거나 출국하게 된다.  내가 태어났고 자랐을 뿐만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의 병역의무를 다했음에도 불구하고, 국적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한국이 나에게 외국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그런 것 뿐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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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8월 15일, 서울

지난 30년 동안 모국방문을 한 것이 모두 네 번인데(네 번째는 2004년) 다녀올 때마다 한 달을 넘긴 적이 없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지난 30년 동안에 내가 한국에서 먹고 자고 한 날 수를 합하면 100 일쯤 된다는 이야기다.

10년 전에 다녀온 것이 나의 마지막 모국방문이 될 지 모를 것이라는 생각을 하니, 지난 날들이 주마등(走馬燈)처럼 내 눈앞을 스쳐 지나 간다.

하여간,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라는 말이 있지만, 요즘은 그렇게 변해가고 있는 속도가 전보다 더 빠르지 않은가?  그러하니, 2004년에 내가 직접 보았던 한국은 오늘날의 한국이 아니라 는 것을 길게 설명할 필요가 있겠는가?

내가 미합중국 시민이기 때문에 이렇게 긴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이 아니고, 요즈음 고국(故國)에서 들려오는 각가지 소식들 중엔 나에게 너무나 생소한 것이 많기 때문이다.

8.15 당시 이야기를 계속한다.

 

8.15 단상(斷想) 1 – 애국자

태평양전쟁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8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둘째 이야기    광복 70년 (光復七十年)

8.15 단상(斷想) 1 – 애국자

일제 강점기 때, 특히 태평양전쟁 당시엔 일제의 억압을 당할대로 당했고 굶주릴대로 굶주리면서 살아온 조선사람들이 8,15와 함께 그러한 굴욕(屈辱)의 멍에를 벗어나게 되었다. 어떤 형태로던지 일본에 협력하지 않고는 살아남기 어려웠고, 쇠사슬에 묶겨있던 것과 같은 상태였었는데, 그러한 것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사람들이 된 것이다.

한데, 그 ‘자유’라는 말의 참뜻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눈앞에 닥쳐온 천지개벽(天地開闢)과도 같은 큰 변화의 앞뒤를 살펴볼만한 겨를도 없이 사회는 무질서하고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한 혼란과 무질서는 전쟁 때문에 억압과 굶주림에 시달리던 한국 사람들의 의식(衣食)생활에 바로 나타나게 되었다.

말하자면, 그 전쟁이 끝난 다음 그 땅 곳곳에는 새로운 풍조(風潮)가 생긴 것인데, <우선 닥치는 대로 먹고 마시자는 사람들이 많았다.>  라는 사실이다.

일본이 그 전쟁에서 패전국이 되기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대부분의 생활 필수품은 배급제로 되어 있었다. 식생활에 관한 것만 아니고, 몸에 걸치는 옷도 마음대로 사서 입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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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는 자유, 생각하는 자유, 눈으로 보는 자유도 제한되었고, 심한 구속을 당하면서 지냈다. 그러한 생활에서 해방된 사람들이 방심(放心) 상태에 빠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을 것이다.

어찌 되었건 8.15 해방이 된 다음, 그렇게도 보기 힘들고 귀하던 물자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어디서 쏟아져 나왔는지 고무신, 양은그릇, 광목, 쌀이 마구 쏟아져 나왔다. 그렇게 많은 물자들이 어디에 있었는지, 하여간 굶주렸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하지만, 혼란과 무질서 중에 쏟어져 나온 물자는 어느새 그 자취를 감추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극심한 식량난을 겪게 되었다. 그러할 때에 한동안 식량을 배급한 적도 있었다.

한편, 해방이 된 다음 그 땅엔 애국자들이 많이 나타났다.

어떤 형태로던지 일본에 협력하지 않고서는 살아남기 어려웠던 때에 그렇게 많은 애국자들이 어디에 있었는지?

일제가 시키는대로 일본을 위해 살아온 것을 <애국한 것이다.>라는 뜻으로 한 말인지는 모르나, 하여간 애국자 홍수(洪水)가 났다. 일본에 아첨하고 그들에게 빌붙어 살며, 별로 배곱프지 않게 지냈던  사람들도 “내가 바로 애국자였노라.”라고 하면서 거들먹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사람들과는 반대로,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일제에 대항 하여 항일운동(抗日運動)을 하면서 목숨을 잃는 등, 몸 바쳐 애쓰며 살아온 사람들이 있었다.

그 당시의 국내외(國內外)의 상황에 따라 여러 갈래의 항일운동을 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한가지만 적는다. 그러한 애국지사(愛國志士)들 중엔 ‘광복군(光復軍)’도 있었다.

광복군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대고, 공식 명칭은 한국광복군이다.

1940년에 중국 충칭(重慶)에서 창설된 광복군의 초대 총사령관은 지청천(池靑天, 1888-1957)이고, 참모장은 이범석(李範奭, 1900-1972)이다.

다음에 적는 글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 실린 광복군에 관한 것을 설명한 내용 중에서 한 부분을 뽑은 것이다.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임시정부는 군사위원회(軍事委員會) 를 설치하고 광복군 창설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일본군의 점령 지역이 중국 대륙으로 확대되면서, 임시정부는 여러 곳으로 피난처를 옮겨다니는 상황에서 여의치 않았다. 비로소 1940년 9월 17일 중국의 임시 수도였던 충칭에 정착하면 서 광복군 총사령부의 설립을 보게 되었다.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광복군 선언문을 발표하여 “광복군은 한국과 중국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며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광복군 창설을 천명하였다.

태평양전쟁 때엔 위에 적은 것과 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대인 광복군도 있었다.

광복군엔 일본군 학도병(學徒兵)으로 중국에 파병되었다가 일본군에서 탈출하여 광복군이 된 사람도 있었는데, 장준하(張俊河)도 그러한 사람 이다.

그렇지만, 8.15와 함께 광복군이 환국(還國)하여 그 땅에 있던 일본군을 몰아서 밖으로 쫓아버린 것이 아니고, 미국과 소련 등 강대국들의 힘에 의해 <8.15 광복>이 이뤄진 것이었다.

어찌 되었건 삼팔선 이남 땅에 미군들이 들어왔고 세상이 바뀌었다.

눈에 보이는 것과 귀에 들리는 것을 비롯해 대부분의 한국사람들에게 생소한 것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그러한 것 중에서 몇가지를 골라 요약해보기로 한다. – 다음 이야기로 계속

삼팔선

태평양전쟁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8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둘째 이야기    광복 70년 (光復七十年)

8.15 해방이 된 다음, 나는 신문이나 라디오를 통해서 달라지고 있는 고국 소식을 대강 알고는 있었지만, 귀국하여 그 땅을 둘러보니 여기 저기 낯설고 생소한 것들이 있었다.

앞에 나온 이야기인‘귀국선’에도 적었듯이,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부둣가에는 태극기와 각가지 내용의 글자들이 담긴 깃발들이 있었다. 난생 처음 보는 태극기를 비롯해, 解放(해방), 自由(자유), 獨立(독립) 등 그런 글자가 적혀 있는 현수막이나 벽보들이 낯설기만 했다.

모두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8.15 해방이 되니, 이런저런 이유로 타국에서 지내던 수많은 조선 사람들이 너나할것 없이 그렇게 조국 땅으로 모여들었다.

나처럼 일본에서 이리 저리 떠돌다가 귀국하는 사람이나 또는 다른 곳에서 지대다가‘조국 해방’이라는 물결을 타고 귀환하는 사람들, 그들을 환영하러 나온 인파, 그리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는 일본인 등으로 부두는 번잡스러웠다.

세화회1나는 환전소에 들려서 일본 돈을 조선은행권으로 바꿔 가지고, 서울행 기차를 탔다. 서울역에서 내린 나는 거기서도 처음 대하는 것들을 보게 되었는데 예를 들면, 서울역 맞은편 어느 건물에 걸린 ‘日本人世話會’(일본인세화회)라는 간판이었다. (사진은 부산 일본인세화회 모습)

그것은 일본인들을 보살피는 모임이라 뜻이 있는 간판이다.

삼팔선

삼팔선에 관한 몇 가지 이야기를 요약해서 적어보려고 한다.

8.15 광복 이후 한국에서 자주 쓰이게 된 말 중에서 한가지를 고른다면, 그것은 삼팔선(三八線)이라고 할 수 있다. 태평양전쟁이 끝나게 됨에 따라 미국과 소련 두 나라가 한반도의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남과 북으로 나누어 점령한 군사분계선이 바로 그 ‘삼팔선’이다.

그렇게 미국과 소련 두 나라가 한반도를 둘로 나누어 각기 점령한 것을 예를 들어 말하자면, “그것은 두 어린이가 과자 한 개를 반으로 쪼개어 사이좋게(?) 나누어 먹은 것과 같은 것이다.”라고도 할 수 있다.

지금의 경계선은 6.25전쟁 휴전선이고 구불구분한 것인데 비하여, 38선은 위에 적은 것처럼 미국과 소련의 점령지 분할 경계선이고 일직선이다. 38선이든 휴전선이든 그것은 한반도를 둘로 갈라놓은 분단선(分斷線) 이다.

어찌 되엇건 그 땅에 ‘38선’이라는 것이 생긴 후 7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가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통일의 길은 보이지 않고 요원(遙遠)하기만 하다.

3838선이 생긴 다음, 그 선(線)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오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런 사람들 중엔 남쪽에 의지할 곳이 없이 막연하게 월남한 사람도 있었는데, 그런 사람들 중엔 자신을 ‘삼팔 따라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을까? 홀로 월남하여 졸지에 의지할 곳이 없게 된 자신을 스스로 비웃는 자조 심리(自嘲心理)에서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나는 노름을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따라지’라는 말이 나온 김에 한가지 적는다.

‘따라지’라는 말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노름판에서 ‘한 끗’을 뜻하는 말이고, 둘째는 보잘것없거나 하찮은 사람이나 물건을 이르는 말이다.

지금은 위에 설명한 것과 같은 시대는 아니지만, ‘삼팔선’이라는 말이 한국 곳곳에서 쓰여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본다.

강원도 양양군에 ‘삼팔선휴게소’라는 휴게소가 있는데, 강원도 인제군 에도, 경기도 포천시에도 그런 이름의 휴게소가 있다.  휴게소 뿐만 아니고, ‘삼팔선주유소’라는 주유소도 있다.   모두 38선 또는 그 부근에 있는 휴게소나 주유소 상호다.

‘38선’이라는 것을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게 되면서 미국과 소련 두 나라가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나누어 그들 두 나라가 나누어 각각 점령한 군사분계선(軍事分界線)이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 히로히토 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한다는 그의 조서(詔書)가 발표된 다음, 북한에 들어온 소련군이 북위 38도선을 막았고, 그들보다 나중에 서울에 입성한 미국군이 38선 이남 에 주둔하여 3년 동안 그 땅에 미군정(美軍政)이 펼쳐졌다.

더 설명하자면, 38선은 8.15 해방 직후부터 6.25 전쟁이 휴전될 때까지 남한과 북한과의 경계선이 되어, 오늘날까지도 한국 민족에게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여러 가지 비극과 고통을 안겨 주었고, 지금도 많은 사람 들에게 한(恨)많은 경계선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 무렵 유행하던 노래 중에는 ‘가거라 삼팔선’, ‘삼팔선의 봄’ 등이 있었다. 삼팔선은 당시 해방된 조국의 모습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는 말이다. 그리고 70년이 지난 오늘까지 휴전선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져 오고 있지만 ‘가거라 삼팔선’, ‘삼팔선의 봄’ 등의 노랫말에 담긴 절실함은 사라진 듯하여 안타깝기만 하다.

적성어(敵性語)

태평양전쟁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7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1부  태평양 전쟁(太平洋戰爭)

적성어(敵性語)

오늘날은 ‘영어 전성 시대’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러한 점은 한국이나 일본이나 다를 것이 없다.  태평양전쟁 당시와 종전(終戰) 후에 있었던 영어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하는 말이다.

먼저 약 50여년 전인 1966년 4월 16일자 동아일보에 실렸던 영어에 관한 한 기사(칼럼/논단)의 일부를 이 글에 옮겨 적는다.

글의 제목은 영어훈장(英語訓長)이다.


日帝末 太平洋戰爭(일제하 태평양전쟁)이 한창일 무렵 英文科(영문과)학생들은 콧대를 세우지 못하고 기를 펼 겨를이 없었다.

英語(영어)는 敵性語(적성어)라는 刻印(각인)이 찍혀 이것을 공부하는 학생들까지도  半要視察人的(반요시찰인적)인 대우를 甘受(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英語(영어)를 배워 무엇을 하겠느냐는 핀잔을 받기가 일쑤였고 무엇을 專攻(전공)하느냐는 질문이 떨어질 때마다 얼굴을 붉히고 송구스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 중간 생략 –

해방을 맞이하여 事態(사태)는 일변하였다. 英語萬能時代(영어만능시대)가 당도한 것이다.

男女幼少(남녀유소)를 막론하고 英語(영어)를 한두마디 지껄이지 못하면 사람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학생들도 많은 시간과 精力(정력)을 英語(영어)공부에 소비하게 되어 英語先生(영어선생)도 제법 어깨를 으쓱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커다란 문제가 제기되었다.

즉 이렇게 威力(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英語(영어)를 공부하는데 바치는 勞力(노력)의 代價(대가)를 우리들은 정당히 받고 있는 것인지?

혹자는 말하기를 解放前(해방전) 학생들에 비해 요즘 젊은 학생들의 英語(영어)실력 은 훨씬 나아졌다고 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도 않은 것 같고 단지 英語(영어)를 공부하는 학생들의 수가 많아졌기 때문에 出衆(출중)한 학생들의 모습이 눈에 띄는 度數(도수)가 늘어 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語學(어학)공부는 일종의 훈련이기 때문에 배우는 사람은 가만히 앉아있어서 는 안되는 것이고 반면에 선생들이 할일도 대단히 많아서 훌륭한 訓長(훈장)이 되려면 여간 애를 쓰지 않으면 안된다.

– 이하 생략 –

*그 당시 신문은 대개 한자(漢字)를 섞어서 썼다.


앞에 적었듯이 ‘太平洋戰爭이 한창일’ 때 ‘英語는 敵性語’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런 것 뿐만 아니고, 영어를 공부하는 학생들까지도 半要視察人的인 대우를 甘受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했던 때가 있었는데, 전쟁이 끝난 다음부터 영어가 판치는 세상 으로 변했다.

내가 가노야 비행장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던 것도 영어를 알기 때문이 었다. 그 당시 내가 영어를 알 수 있게 되었던 이야기를 간단하게 적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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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오사카 에서 지낼 때 그곳에서 오카모토 카나메 (岡本 要)라는     조선사람을 알게 되었는데, 그도 내가 있던 집에서 숙식(宿食)을 했고 같은 직장에서 일를 했다. 한데, 그는 전쟁이 끝나면 영어가 필요하게 될 것이니, 영어를 배우라 고 나에게 권했다.

<영어는 적국(敵國) 말이다.>, 또는 <영어를 배워 무엇을 하겠느냐?> 는 말이 있을 정도였던 때에, 나는 그의 권유에 따라 영어를 배우게 되었다. 그는 영어 자습(自習)에 필요한 책도 마련해 주었고, 영어 학습에 관한 기초를 가르쳐 주었다. 독학할 수 있는 방법도 가르쳐 주었다.

그렇게 지냈는데, 내가 불시(不時)에 일본 경찰에 잡히게 되는 바람에 인사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그와 헤어지게 되었다. 70년이 지난 지금도 오카모토 카나메 (岡本 要)라는 그 이름은 내 머리 속에 남아 있다.

당시 그의 나이는 30 전후였고 늘 안경을 쓰고 지냈는데, 그도 나처럼 일본식으로 된 성명(姓名)을 쓰고 있었다. 따라서 다시 만나볼 수 없게 된 그에 관한 의문도 있다.

첫째는 그러한 학식이 있고, 앞을 내다볼 줄 아는 사람이 왜? 무엇 때문에 막노동자들 속에 섞여 그런 곳에서 지내고 있었느냐?라는 것이다. 아마 목적하고 있는 무슨 때를 기다리며 지내는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 볼 뿐이다.

어찌 되었건, 전쟁이 끝나고 세상이 변했다. 영어도 그렇다.

전날까지‘英語는 敵性語’라고 하던 곳에‘영어 바람’이 불기 시작 하더니, 지금은‘英語萬能時代’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만한 세상 으로 변했다.  불과 70년 사이인데,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영어와는 상관 없는 것이지만, 오카모토 선생 이야기가 나온김에 이야기 한 가지를 덧붙인다.  그와 함께 나라(奈良)에 다녀온 이야기다.

그 당시, 오사카 에서 나라(奈良)까지는 전철로 한 시간쯤 걸린 것으로 생각된다. 아직도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것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이야기를 적어 보려고 꺼낸 이야기다.

동대사한 가지는 어슬렁거리면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수많은 꽃사슴들과 그런 것을 구경하는 관광객들이 뒤섞여 있는 사슴공원이고, 다른 한 가지는 그 지역에 있는 도다이지 (東大寺)라는 절이다.

한데, 절터가 워낙 넓어서 정당(正堂)과 부속 건물들이 흩어져 있고, 그 절의 대불전(大佛殿) 안에는 청동불상(靑銅佛像)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목조건물이라고 하는 그 불당(佛堂) 건물의 규모도 대단하지만, 불당 안에 있는 청동불상도 세계에서 가장 큰 불상이라고 한다. 그 불상의 크기에 대한 예를 든다면, 불상 손바닥 위에 보통 어른들 열댓명이 설 수 있다고 한다.

위에 적은 것과 같은 특이(特異)한 점이 있는 나라(奈良)가 먼 옛날엔 일본의 수도였었는데, 그곳엔 지금도 백제(百濟) 문화의 영향을 받은  흔적들이 남아있다.

귀국선

나는 귀국선(歸國船)을 타려고 가노야 (鹿屋)를 떠나 하카타 (博多)로 갔다. 한데, 하카타 부둣가엘 가서 주위를 둘러보니 그때까지도 배를 타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그곳에서 며칠을 지낸 다음 어렵게 부산으로 가는 배를 탈 수 있게 되었다.

일본으로 갈 때와는 다른 점이 있었다.

첫째로 갈 때는 생활환경 때문에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미지(未知)의 땅을 동경(憧憬)하며 밤 시간에 현해탄을 건넜는데, 귀국할 때는 밝은 낮 시간에 귀국하는 기쁨을 가지고 검푸른 바닷물결 등 바다 풍경을 보면서 그리던 고국 땅에 닿았다.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부둣가에는 태극기와 각가지 내용의 글자들  이 담긴 깃발들이 있었다.

한 마디로, 감개무량(感慨無量)이었다. 8.15 해방이 되니, 이런저런 이유로 타국에서 지내던 수많은 조선 사람 들이 너나할것 없이 그렇게 조국 땅으로 모여들었다. 돌이켜 보니, 1945년은 한국 민족에겐 잊을 수 없는 해였다는 것을 말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일본의 식민지시대가 끝난 해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조선 사람들에게 행했던 짓들을 길게 늘어놓지 아니 하더라도 그러한 사실들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미국의 원폭투하(原爆投下)라는 엄청난 충격파(衝擊波)를 받은 다음에 야 일본이 연합국에 무릎을 꿇었고, 한국에서 물러나게도 되었다. 나라 없는 설음을 안고 각가지 모욕(侮辱)을 당하며 전쟁 틈에서 살아 남은 수많은 조선사람들이 일본땅을 떠나 그리워하던 고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러했을 때에, 그 땅엔 귀국선(歸國船)이라는 해방가요(解放歌謠)가 생겼다.

1. 돌아오네 돌아오네 고국산천 찾아서/ 얼마나 그렸던가 무궁화 꽃을/ 얼마나 외쳤던가 태극 깃발을/ 갈매기야 웃어라 파도야 춤춰라/ 귀국선 뱃머리에 희망은 크다

2. 돌아오네 돌아오네 부모형제 찾아서/ 몇번을 울었던가 타국 살이에/ 몇번을 불렀던가 고향 노래를/ 칠성별아 빛나라 달빛도 흘러라/ 귀국선 고동 소리 건설은 크다

3. 돌아오네 돌아오네 백의동포 찾고서/ 얼마나 싸웠던가 우리 해방을/ 얼마나 찾았던가 우리 독립을 / 흰구름아 날려라 바람은 불어라/ 귀국선 파도 위에 새 날은 크다

돌아오네 돌아오네 고국산천 찾아서, 돌아오네 돌아오네 부모형제 찾아서, 돌아오네 돌아오네 백의동포 찾고서 ……

그렇다.   일본이나 중국에서 또는 멀리 남방(南方) 어디에선가 고향 땅으로 돌아오는 귀국동포들의 감격이 담긴 이런 노래가 많이 불리던 때가 있었다.

조선신궁과 가미가제

태평양전쟁 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6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1부  태평양 전쟁(太平洋戰爭)

일본인들의 토속신앙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은 조선사람들의 정신을 송두리째 없애고, 조선을 착취(搾取)하기 위하여 “일본과 조선은 한 몸이다.”라는 뜻으로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구호를 만들어, 그런 것을 조선사람들에게 강요한 적이 있었다.

그들의 행위는 그런 것 뿐만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조선의 국권을 빼앗은 다음, 조선인들에게 일본어 교육을 점차 실시해 나갔고, 조선의 민족적인 모든 문화활동을 못하도록 막음으로써, 우리 민족의 고유성을 말살해버리려고 했다.

그러한 목적으로 일본은 <내선일체>라는 것을 내세워 조선사람도 일본  사람처럼 <신사참배(神社參拜)>라는 것을 하도록 강요한 적이 있었다.

이쯤에서 그러한 ‘신사’란 무엇인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일본엔 그들의 고유한 토속신앙(土俗信仰)인 신도(神道)라는 것이 있는데, 그러한 신앙(信仰)의 대상이 되는 신(神, 가미)의 위패(位牌)가 있는 곳을 <신사(神社)>라고 한다. 그러한 <신사>란 일본 황실의 조상, 또는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사람을 신(神)으로 받드는 사당(祠堂)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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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남산에 있던 조선신궁 모습>

그 중엔 다른 신사보다 격(格)이 높은 신궁(神宮)이라는 것도 있다. 예를 들면 일제 강점기 때. 서울 남산에 있던 ‘조선신궁(朝鮮神宮)’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조선신궁의 주제신(主祭神)은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와 메이지 (明治)천황이다. 일본 신화의 여신인 天照大神은 일본 황실(皇室)의 조상이라고 한다.   그리고, 明治天皇은 일본이 조선을 빼앗을 당시의 일본 왕이다.

한데, 조선총독부 시절 특히 일제 말기 때, 그들은 조선사람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들의 강요에 굴복하였다.

하지만, 그런 것에 굴복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일제 강점기 때,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고 반대운동을 하여 일제로부터 10년형을 선고받아 복역 중, 목숨을 잃은 주기철(朱基徹, 1897-1944) 목사도 그 중에 한 사람이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이었던 주기철 목사에 관한 기록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韓國民族文化大百科事典]에 실려 있으므로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한다.

각설하고, 신사(神社)엔 도리이 (鳥居)라는 일본 특유의 <기둥문>이 있는데, 그것은 불경(不敬)한 곳과 신성(神聖)한 곳을 구분 짓는 경계라고 한다.    달리 말하자면, 일반적인 세상과 성스러운 곳인 신사가 있는 곳은 그 본질이 다르기 때문에, 그곳을 드나드는 경계에 도리이라는 문을 세우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한 도리이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고 몇가지 설(說)이 있을 뿐이다.

어떤 이론은 <닭이 머무르는 자리>를 뜻하는 한자인 <鷄居>에서 유래 되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神道>에서는 닭이 <神의 전령(傳令)>이라고 여기는 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그런 것이야 어찌 되었건, 도리이의 기본적인 구조는 두 개의 기둥이 서 있고, 기둥 꼭대기를 횡목(橫木)으로 서로 연결해 놓는 형태이다.

도리이의 기본적인 구조와 거의 비슷한 모양으로 된 구조물(構造物)이 한국에도 있다. 홍문(紅門)이라고도 하는‘홍살문’이 바로 그런 것인데, 홍살문은 능(陵), 묘(廟), 궁전(宮殿) 등에 세우던 일종(一種)의 문이다.

홍살문의 구조는 둥근 기둥 두 개를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이 없이 화살 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세워 놓았고, 그 중간에 태극문양이 그려져 있는 것이다.

홍살문은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홍릉(洪陵)에도 있는데, 홍릉은 조선 제26대 왕인 고종(高宗, 재위 1863 – 1907)과 비(妃)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 – 1895)를 합장한 무덤이다.

역사에 관한 이야기는 연대순(年代順)으로 또는 시간 수서대로 하나씩  수직(垂直)으로 늘어놓는 것이 보통이다.

한데, 태평양전쟁 이야기를 적다 말고, 느닷없이 일본 온천 이야기와 그들의 토속신앙에 관한 것을 적으면서 도리이 (鳥居) 이야기를 적었다.

그리고,“도리이 와 비슷한 모양으로 된 구조물이 한국에도 있다.” 라는 설명을 하면서 고종과 명성황후가 묻혀 있는 무덤에 관한 이야기까지 나왔다.

명성황후가 목숨을 잃게 된 이야기를 하자면, 미우라 고로 (三浦梧樓)라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도 하지 않을 수 없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후 생긴 신정부(新政府)의 군인이 된 미우라 고로는 주한일본공사(駐韓日本公使)로 조선에 부임하여, 조선의 친로 (親露)정권을 무너뜨리고 친일정권을 세우고자, 1895년 10월 8일 새벽에 그는 일본 자객(刺客)들을 동원하여 명성황후를 시해(弑害) 하고, 그 시신을 불태운 국제적 범죄를 저지른 자다.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등 조선에 있는 러시아 세력을 없애고, 일본의 세력을 그 땅에 넓히기 위하여 미우라 고로 등 일본 자객들이 경복궁을 침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을 <을미사변(乙未事變)>이라고도 한다.

그런 이야기가 담긴 텔레비전 연속극도 있고, 명성황후에 관한 이야기 는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이므로 줄이고, 태평양전쟁 이야기를 계속한다.

가노야 비행장

나는“오사카(大阪)에서 지낼 때 일본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유치장 생활을 하다가 후쿠오카 탄광으로 되돌아가게 되었고, 그 탕광에서 또 탈출하여 다루미즈(垂水)라는 곳에서 전쟁이 끝나는 것을 보게 되었다.”라는 이야기까지 적었다.

나는 전쟁이 끝난 다음 바로 귀국하지 못하고, 일본에서 더 지내게 되었다.

시모노세키 (下關)나 하카타 (博多)항 부두엔 한국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아, 배를 타기가 쉽지 않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귀국을 서둘지 않고, 다루미즈 근처에 있는 가노야 (鹿屋)라는 곳으로 갔다.

그곳엔 가노야 비행장이 있다.   마침 그 비행장에 들어와 있는 미군부대에서 현지인을 고용인으로 채용한다는 광고를 보게 되었다. 가노야 시청 앞에서 그런 광고문이 있는 것을 본 것이 계기가 되어  나는 귀국할 때까지 임시로 그 비행장에 취직했다. 내가 맡은 일은 자동차 타이어를 수리하는 미군들의 일을 도와주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일종의 조수(助手)다.

그 비행장은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 자살특공대인 가미가제(神風)의 기지(基地)였다. 특히, 그 전쟁이 끝나게 될 무렵엔 전체 가미가제 수의 약 반(半)이 그 비행장에서 출격(出擊)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 나는 70년 전에 있었던 것들을 더듬어 생각해보면서 이 글을 엮고 있는데, 내 기억을 더 생생(生生)하게 하려고 인터넷 검색도 해본다. 하지만‘오늘날의 일본은 내가 그곳에서 지내던 때의 일본이 아니다.’ 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

말하자면,‘시시각각(時時刻刻)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 세상이다.’라는 뜻이다.  예를 들면, 지명(地名)도 그런 것 중 하나다.

내가 한국을 떠나던 해인 1984년엔 없었던 지명이 지금은 한국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듯이,‘ 일본도 그렇다.’라는 것이다.

몇 해 전에 일본 큐슈(九州)지방에 미나미큐슈시(南九州市)라는 도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지람특공평화회관(知覽特攻平和會館)이 라는 것이 그곳에 있다. 지람(知覽, 일본발음 지란)은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본 육군 특공기지가 있었던 곳이다.

그 회관은 태평양전쟁 당시 폭탄을 실은 비행기 전체가 육탄(肉彈)이 되어 적함(미국 군함)에 몸으로 타격(打擊)한 특별공격대원의 유영(遺影), 유품(遺品), 기록 등 자료를 수집, 보전, 전시하고 있는 곳이다.

태평양전쟁 때 가미가제 특공대의 기지였던 가노야와 지란에 관한 이야기를 적고 있는데, 그 전쟁이 절정에 달하자 일본은 자살특공대인 가미가제 특공대까지 내세워 그 전쟁을 버텨보려고 했다.

그러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 知覽特攻平和會館 앞뜰엔, 다음과 같은   비문(碑文)이 있다.

‘아리랑 노래 소리로 / 멀리 어머니의 나라를 그리워하며 …..’ (원문은 일본어다.)

가미가제 특공대 …… 그들 중엔 조선 젊은이들도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비문이다.

***지람특공평화회관(知覽特攻平和會館)에는 조선인 대원도 11명 포함된 것으로 확인됐다. 1945년 3월 29일 당시 17세였던 박동훈은 유서에 큼직하게 ‘결사(決死)’라는 단어와 함께 “몸을 던져 적함과 함께 옥쇄해 영원히 황국을 지키겠다”고 썼다. 하지만 그는 ‘육군이 가족을 책임져 준다고 해 어쩔 수 없었다. 동생은 절대 군대에 보내지 말라’며 아버지를 안고 울었다고 가족은 증언했다. 그는 오카와 마사아키(大河正明)라는 일본 이름으로 올라 있다.

24세 탁경현은 출정 전날 밤 식당 아주머니에게 “마지막으로 조국의 노래를 부르겠다”고 했다. 그는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아리랑’을 불렀다. 흐르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그는 교토 약학대 재학 중 학도병으로 차출돼 왔다.

가고시마(鹿兒島)로

태평양전쟁 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5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1부  태평양 전쟁(太平洋戰爭)

가고시마(鹿兒島)로

경찰서에서 풀려나기는 했지만, 그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탄광으로 돌아간 나는 또 갱 안에 들어가 전과 같이 막장에서 석탄 가루를 마시며 석탄덩이를 운반차에 싣는 일를 했다. 그런 생활을 얼마동안 또 하게 되었는데, 더 견딜 수가 없었다.

탈출할 궁리를 하면서 얼마쯤 지내다가 또 그곳에서 빠져나왔다.

오사카에서 일본 경찰에게 불심검문(不審檢問)을 받았던 경험도 있고 하여, 신변안전에 경계를 하면서 전쟁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이리저리 떠돌아 다녔다. 그러던 중, 내가 찾아간 곳은 구마모도(熊本)지방에서 토목공사업을 하고 있는 하시모도(橋本)라는 조선사람의 집이었다.

당시 그는 조선인 노무자를 데리고 군용비행장 확장공사를 하고 있었다.  나는 다른 노무자들과 함께 그 집에서 숙식을 하며 지내게 되었다.

앞에 오사카 이야기에도 적었듯이, 당시 일본에서도 식량과 옷 등 일상생활용품의 거래가 자유롭지 못했다. 하지만, 군수품(軍需品)을 다루거나 군사용(軍事用) 시설을 만드는 곳 등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배불리 먹을 수 있는 편이었다.

내가 머물고 있던 집 주인은 가끔 노무자들에게 막걸리잔치도 베풀었는 데, 그럴 때 누군가 아리랑이나 타향살이 등 향수에 젖은 노래를 선창 하면 그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도 함께 불렀다.

그곳엔 나처럼 막연한 기대를 하고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도 있었고, 고향에 부모처자를 두고 징용으로 갔다가 그곳으로 옮긴 사람 등, 일본으로 가게 된 여러 가지 사연을 가지고 지내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거기서 얼마쯤 지내다 가고시마(鹿兒島)로 갔다.

내가 보통학교(초등학교)에 다닐 때, 교장 겸 담임선생이었던 일본사람인 사토나카 죠기찌(里中長吉) 선생의 고향이 가고시마(鹿兒島)라고 했다. 사토나카 선생의 가르침을 받은 나는 가끔 가고시마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어찌 되었든 간에 <이왕에 일본까지 온 것이니, 구경이나 해보자.>라는 생각으로 그곳까지 가게 되었다.

가고시마(鹿兒島)에는 화산(火山)이 있다. 내가 간 곳은 사꾸라지마 화산(櫻島火山) 남쪽 해안에 있는 다루미즈 (垂水)라는 곳이다. 사꾸라지마 화산은 오늘날에도 화산활동(火山活動)이 진행 중이다. 그 화산은 하루에도 몇번씩 분화(噴火)하는 일본의 대표적인 활화산 (活火山)이다.   그리고, 가고시마의 상징(象徵)으로 되어 있다.

<2015년 5월 26일에 있었던 사쿠라지마(櫻島) 화산 폭발 영상>

따라서 많은 관광객들이 모이는 곳이기도 한데, 내가 다루미즈에서 지내던 때엔 사정이 달랐다. 나는 그러한 화산 근처에서 한동안 지낸 적이 있었다.

내가 구마모도(熊本)지방에서 지내다가 그곳을 떠나 가고시마(鹿兒島) 현에 있는 다루미즈(垂水)에 갔을 때, 그곳엔 하다데구미(旗手組)라는 토목건설회사에서 일본군의 군용시설인 땅굴을 만드는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나는 그 전쟁이 끝날 때까지 거기서 버틸 수 있었다.  그 공사장에서 일하는 일본인 부녀자(婦女子)들도 꽤 있었다.

하여간, 그 전쟁 때문이 수많은 사람들이 시달림을 받았고, 결국은  일본의 패전(敗戰)으로 그 전쟁이 끝나게 되었는데, 그 부분에 관한 것은 앞에 이미 적었기 때문에 다음 이야기로 넘어간다.

온천의 나라 일본  

이번에는 일본 온천에 관한 이야기 몇 가지를 적어보려고 한다.  일본으로 가기전부터 그곳에 온천이 많다라는 것을 알고 있긴 해지만, 그곳에 가서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지내보니 과연 <일본은 온천의 나라다.>”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한데 온천이 많은 것뿐만 아니고, 일본 사람들은 혼욕(混浴)이라는 기괴망측(奇怪罔測)한 풍속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물론 일본인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하여간 일본 땅에 그러한 괴상한 풍속이 있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오사카에서 지낼 때는 그런 것을 본 적이 없었는데, 규슈(九州)지방 에는 그런 풍속이 있었다.

우선, 일본엔 왜 온천이 많은가를 알아보기로 한다.

지구과학사전에‘환태평양 지진대(環太平洋地震帶, Circum-Pacific Seismic Zone)’이라는 지리학 용어(地理學用語)가 있다.  쉽게 말하자면 그것은 태평양을 들러싼, 세계에서 지진 활동이 가장 활발한 지진대로서 화산대(火山帶)와 지진대가 겹쳐 있고, 습곡산맥 (褶曲山脈, 참조 보기 1.)이 발달하고 호상열도(弧狀列島, 참조 보기2.) 가 분포되어 있는 지대다.

보기 1 : 지각(地殼)에 작용하는 횡압력(橫壓力)으로 인하여 지층이 물결모양으로 주름지어 이루어진 산맥.

보기 2 : 활등처럼 굽은 모양으로 죽 늘어서 있는 섬들.  

더 간단하게 말하자면, 화산 지대에 속해 있는 일본열도(日本列島)는 화산이 많고, 따라서 온천도 많다.

일본열도는 北海道, 本州, 四國, 九州 등의 큰 섬과 3,500여개의 작은 섬으로 되어 있는데, 규슈(九州) 남부지방인 가고시마(鹿兒島)에도 화산과 온천이 있다. 그곳엔 활화산(活火山)인 사쿠라지마(櫻島)화산과 기리시마(霧島) 화산이 있다.

일본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온천에 관한 이야기를 적기 위해 화산 이야기를 늘어 놓았는데, 일본 온천 이야기의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미 앞에 적은대로 그곳엔‘혼욕(混浴)’이라는 별스러운 풍속(風俗)도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混浴’이라는 글자가 말해주듯이 섞여서 목욕한다는 뜻이 아니던가? 남녀가 같은 욕탕에서 목욕하는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그것도 서로 모르는 사람들이 옷을 훌렁 벗은채 나체로  함께 같은 탕에 들어가다니?

하지만, 그 땅에 그런 별난 풍습(風習)이 있게 된 데에는 그곳의 풍토 (風土)와 그들 나름대로의 독특한 민속 때문일 것이다. 그 사람들의 풍속이 그러한 것을 어찌하랴?

한데, 남녀칠세부동석(男女七歲不同席)이라는 말이 쓰이고 있는 곳에서 자란 사람이 <남녀가 같은 욕탕(浴湯)에 몸을 담그는> 그러한 풍속이 있는 나라에 가서 <혼욕>이라는 것을 처음 대했을 때, 그것은 기절초풍  할 정도로 놀랄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동방예의지국(東方禮儀之國)>에서 자란 사람인 내가 어찌하다가 그런 망측스러운 행동을 스스럼 없이 하는 사람들 속에 섞인 적이 있었다.

요즘에도 그런 풍속이 그 땅에 남아있는지?

하여간, 일본은 온천이 많은 나라다.

일본 탄광으로

태평양전쟁 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4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1부 : 태평양 전쟁(太平洋戰爭)

현해탄을 건너서 광부가 되다 

태평양전쟁이 한창이던 1943년 어느 봄날, 부산항 부두.

한 무리의 조선 청년들이 부둣가 한쪽에 몰려 있다.   그들은 일본 시모노세키로 가는 연락선에 오르려고 차례를 기다리는 사람들이다. 나도 그 일행에 섞여 인솔자들(일본인)과 함께 배에 올랐다.  부산을 떠난 배는 다음 날 아침에 시모노세키에 도착했다.

일본 땅에 배가 닿자 그 동안 싹싹하고 부드럽던 인솔자들의 말투가 갑자기 거칠어지고, 그들의 태도가 위압적으로 돌변했다.

잘못 왔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달리 방법이 없어 그대로 탄광까지 따라 갔다.   일행이 닿은 곳은 후쿠오까(福岡) 지방에 있는 한 탄광촌이었다. 그곳까지 간 조선사람들은 숙소 겸 식당인 <함바(飯場)>라는 허름한 목조건물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광산측의 감시를 받으며 살았다.

나는 작업에 필요한 교육을 받은 다음 탄광 광부가 되어 막장에서 석탄과 함께 지내게 되었다.  광부생활이 나로서는 아주 힘겨운 일이었다.   가장 견디기 어려웠던 것은 갱(坑) 안에 있는 동안 석탄가루가 섞인 탁한 공기 속에서 지내는 것이었다.

결국 나는 그곳을 떠나기로 하고, 감시원의 눈을 피할 수 있는 방법과 어디로 어떻게 갈 것인가를 궁리하면서 적당한 때를 기다렸다.

그렇게 지내던 중, 어느날 밤에 어둠이 짙은 야음을 틈타 그곳을 빠져 나올 수 있게 되었다.

japan

오사카

탄광에서 빠져나온 나는 오사카(大阪)로 갔다.
그 당시 일본은 군대의 인원보충뿐만 아니라, 전쟁하는데 드는 군수 물자 생산과 군사기지건설에 필요한 노동력 공급을 위해 조선사람들을 많이 데려갔다.

한데, 같은 일본 땅 안에서도 내가 지내던 그 탄광처럼 특정한 지역 에서 벗어나지 못하도록 노무자들을 감시하는 곳도 있었고, 그런 제한을 받지 않고 지낼 수 있는 곳도 있었다.

오사카가 그런 곳이었다.  당시 오사카에는 조선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나는 일본인 행세를 하면서 오사카까지 갔다.

하지만, 그곳까지 가는 것이 쉽지 않았다.

큐슈(九州)와 혼슈(本州)를 연결하는 해저(海底)터널을 통과해야 되고, 당시 일본 해군의 거점인 구레(吳) 요새지(要塞地)를 지나가야 되기 때문이었다.  기차가 구레(吳)를 지나갈 때는 승객(乘客)들이 밖을 내다볼 수 없도록  모든 차창(車窓)을 가리고 지나갔다.

하여간 나는 오사카에 도달했다. 앞에 설명했듯이 오사카는 조선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숙소와 일자리를 쉽게 마련할 수 있게 되었다.

오사카에서 지내는 동안, 시우쇠를 불려 강철을 만드는 제강소에서 일했다. 용광로에서 나온 쇠 찌꺼기가 식은 다음, 그것을 떼어 밖으로 운반해 내는 그런 일이었다. 힘드는 일이긴 했지만 탄광보다 자유롭게 지낼 수 있었다.

그렇게 지내고 있던 중 어느날 나는 혼자서 길을 걷고 있었는데, 한 경찰이 나를 불러 세웠다. 일본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린 것이다. 피할 길이 없었다.  경찰서로 끌려간 나는 그들의 심문을 받았다.

이유는 내가 조선사람이기 때문에 조사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나는 거기서 경찰서 유치장 생활을 했는데, 본적지 확인과 일본으로 가게 된 경위 등에 관한 조사를 받으면서 한 주일가량을 그렇게 갇혀 지냈다.

내가 갇혀 있던 방엔 일본인도 몇 사람 있었는데, 그들은 대개 식량을 암거래하다 붙잡힌 사람들이었다. 당시 일본은 전쟁 때문에 노동력만 부족했던 것이 아니고, 식량과 옷 등 일상생활용품의 거래가 자유롭지 못했다.

내가 조선사람이라는 이유 때문에 일본 경찰에게 붙잡히게 되었고, 경찰서 유치장 생활도 해보게 되었다. 그렇게 지내던 중, 나는 조사실로 불려갔다. 탄광에서 사람이 와있었다.

탄광에 있을 때, 내가 지내던 함바(飯場)집 주인이 나를 데리러 온 것이었다.나는 그 사람에게 넘겨졌고, 그와 함께 후쿠오카 탄광으로 다시 돌아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