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행로 (人生行路)

태평양전쟁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20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셋째 이야기    세월여류 (歲月如流)

인생행로 (人生行路)

사람은 누구나 제각기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環境)과 여건 속에서 나름 대로 살아가는데, 그렇게 살아가는 시간을 세월(歲月)이라고도 하고,  세월의 흐름이 빠르다는 뜻으로 세월여류(歲月如流)라는 말도 쓰이고 있다.

내가 태어났고 여남은 살 때까지 살던 곳인 경기도 용인 땅, <유실> 이라는 마을에서부터 지금까지의 내가 살아온 길을 뒤돌아보면서 이날까지 지내온 것을 생각해보니, 그러한 느낌이 더욱 새롭다.

<세월여류>라는 말에 공감(共感)하지 않을 수 없다.

<세월여류)에 관한 몇 가지 이야기를 펼쳐보기로 한다.


아주 간단하고 쉽게 말하자면, 인생(人生)이란 목숨을 가진 사람의 존재(存在), 또는 그 사람의 목숨이다.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아 있는 기간도 인생이라고 한다.

가수 최희준이 부른 <하숙생>이라는 노래가 있다.  <인생은 나그네길>이라는 가사로 시작되는 노래다.  우선, 그 노래의 가사부터 적고 이야기를 이어가보자.

인생은 나그네 길/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 구름이 흘러가 듯 떠돌다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나그네 길/ 구름이 흘러가 듯 정처 없이 흘러서 간다

인생은 벌거숭이/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가는가/ 강물이 흘러가 듯 여울져 가는 길에/ 정일랑 두지 말자 미련일랑 두지 말자/ 인생은 벌거숭이/ 강물이 흘러가듯 소리없이 흘러서 간다

위에 적은 가사처럼 사람이 한 세상 살아간다는 것은 <나그네 길> 같은 것이고, <빈 손으로 태어났다가> <빈손으로 돌아 간다>라는 것을 부정 (否定)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어째서 그렇다는 것인가?

쉽게 말하자면 사람은 누구든지 이 세상을 떠날 때, 이삿짐 나르듯이 무엇을 가지고 갈 수는 없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사람이 이 세상에 와서 어떤 모양으로 어떻게 살다가 언제 가든 간에, 태어날 때 공수래(空手來)한 것 처럼, 떠날 때에도 공수거(空手去)한 다는 뜻 아니던가?

그러한 것을 부정(否定)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앞에서 적었듯이 인생(人生)이란 목숨을 가진 사람의 존재(存在), 또는 그 사람의 목숨이고,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아 있는 기간이다. 한편, 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일도 <인생>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앞에 적은 <하숙생> 가사처럼 <인생은 나그네 길>과 같은 것 이고, <인생이 고달프다>라는 말도 쓰이고 있다.

세상에서 아무리 부귀(富貴)와 영화(榮華)를 누리면서 장수(長壽)한다고 하더라도, 늙고 병들어 저 세상으로 갈 때에는 너나없이 누구나 빈손으로 가지않던가?

이 세상을 떠나갈 때 이렇다할만한 이름을 남기고 가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거나 남의 손가락질을 받을만한 짓은  하지 않으면서 살다 가는, 그러한 인생길이 되어야 할 것이라는 말이다.

말하자면, 누구 앞에서라도 <한 점의 부끄러움 없이 한 세상 살다 갈 수 있게 된다면, 그러한 것 보다 더 보람있는 [삶]은 없을 것이다> 라는 이야기다.

‘구순(九旬)’하면 나도 남의 일처럼 살아왔건만 어느덧 올해(2016년) 만 90살이 되었다.

오늘날의 내 생활 주변(周邊)을 살펴본다.

내 삶의 종착점(終着點)이 시시각각 (時時刻刻)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끼니 때마다 주는 밥 먹고 우두커니 허송세월(虛送歲月)만 하면서 지낼 수는 없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한 뜻에서, 오늘도 컴퓨터 키보드를 누르면서 내 나름대로 이런 작업을 하고 있는 것이다.

돌이켜보니 스물 다섯 살, 한창나이에 사지(四肢)가 멀쩡하던 사람이 삽시간에 자유롭게 걸을 수 없는 몸이 되었다.  하지만, 어찌하랴!    이것이 내 운명(運命)인 것을 ……

젊디젊은 나이에 지팡이를 짚어야 걸어다닐 수 있는 처지가 되다니 …

이방원(李芳遠, 조선 제3대 왕인 태종[太宗])의  ‘하여가(何如歌)’라는 시조(時調)는 이렇게 시작된다. “이렇게 산들 어떻고 저렇게 산들 어떠한가”라고.

그 말을 응용하여 나도 한 마디 적어본다.

이런들 어떻고 저런들 어떠한가 나라의 부름 받고 맡은 제자리 지키다가  몸을 다치게 된 것을 …

그래도 나는 행운아(幸運兒)다. 그 난리 속에서 목숨을 잃은 전사자(戰死者)들도 있고 나보다 더 심하게 몸을 다친 전상자(戰傷者)들도 있다.

한데, 이렇게라도 살아있지 않은가 말이다. 얼마나 다행(多幸)인가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이방원의 <하여가(何如歌)>와 함께 생각해볼 것이 있다.  그것은 고려 충신 정몽주(鄭夢周)의 단심가(丹心歌)다.

이방원의 <하여가>와 정몽주의 <단심가>에 관한 긴 이야기를 하려고 끄집어 낸 것은 아니고, 내 고향인 용인에 정몽주선생의 묘가 있다는 것을 적기 위해 늘어놓은 이야기다.

정몽주 묘

  •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원리에 정몽주선생묘가 있다.

경기도 기념물 제1호인 그 묘가 있는 곳인 <모현면>은 내가 살던 곳인 <포곡면>과 인접(隣接)해 있는 곳이다.

<인생행로>에 관한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내 고향 땅에 있는 정몽주 선생묘 이야기까지 나왔다.

어찌 되었건, 지금 이 글에 적고 있는 이야기 제목처럼 <인생행로>라는 말 말고도, <인생>이라는 말이 널리 쓰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인생파(人生派)라는 말도 있도, 무슨 인쟁관(人生觀)이니, 인생철학(人生哲學)이니 하면서 아주 거창한 말을 하는 사람들도 꽤 있지만, 그런 이야기는 접어두고, <인생극장(人生劇場)>이라는 이야기 하나 적고, 인생행로에 관한 이야기를 마무리한다.


텔레비전이 보급되기 전에는 극장에 가서 영화나 연극을 볼 수 있었다.  한데, 요즘에는 굳이 극장엘 가지 않아도 그런 것을 볼 수 있다. 텔레비전만 틀어놓으면, 어디에서든지 영화나 연속극 등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Soap-Opera (2)한국의 경우, 가정의 일상생활을 다룬 것을 안방에서도 볼 수 있다고 하여 <안방극장>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한편, 미국에서는 그런 연속극을 비누회사에서 그 회사의 제품을 선전 하는 광고와 함께 시청자들에게 제공한다고 해서 SOAP OPERA라고도 한다.

대개 가정주부들을 상대로 방영되는 것인데, 남녀간의 사랑에 얽힌 이야기를 내용으로 한 것이 많다.

나는 전에 서울 서대문 네거리 근처에 있는 동양극장 앞을 지나다닌 적이 있었다. 주로 연극을 공연하고 있던 그 극장 앞을 지나다닐 때마다 그 극장에서 공연하는 연극의 제목과 공연기간이 적힌 간판이 극장 앞에 걸려 있는 것을 본 생각이 난다.

동양극장

그 간판에는 그 연극에 나오는 주연남녀배우를 비롯해 배우들의 이름과 몇 막(幕) 몇 장(場)짜리 연극이라는 것도 적혀있었다.

연극에는 관객을 웃기는 희극(喜劇), 음악으로 이루어지는 악극(樂劇), 종교를 주제로 하는 종교극(宗敎劇), 거의 난투장면을 주로 하여 꾸민 활극(活劇), 역사상 어떤 시대의 일을 가지고 만든 시대극(時代劇), 대사의 전부나 혹은 그 일부를 노래로 하는 가극(歌劇), 슬픈 이야기로 엮어져서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비극(悲劇), 사회의 죄악이나 불합리한 점을 풍자하는 내용이 담긴 풍자극(諷刺劇) 등 여러 가지가 있다.

관객들이 보는 앞에서 그런 연극이 극장무대 위에서 조명과 음악 등의 도음을 받아가며 배우들이 연기를 한다.

한데, 배우들이 무대에서 공연하는 그런 극장 말고, 인생극장(人生劇場) 이라는 것도 있다.

<인생극장>이란 다른 것이 아니다.  그 말은 이 세상을 하나의 <극장>이라고 가정(假定)하고, 세상에서 되어지는 모든 인생살이를 하나의 극(劇)으로 비유해서 한 말이다.

거기에는 인생의 불행과 비참한 이야기를 줄거리로 하여 파멸(破滅), 고통(苦痛), 죽음 등으로 인생의 끝을 맺는 비극도 있고, 보는 이들의 마음을 흐뭇하게 해주며, 인간의 삶에 대한 깊은 뜻을 다른 사람에게 깨우쳐 줄 수 있는 장면을 보여주며 막(幕)이 내려지기도 한다.

극장무대에서 하는 연극은 그 무대를 가리는 막(幕)이 몇 번이고 내려 가기도 하고, 올려지기도 할 수 있기 때문에 그 무대가 가려지기도 하고, 보이게도 되어 있다.   그러나, 인생극장에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인생살이>는 <단막극(單幕劇)>과 같은 것이다.

일반 극장에서는 극을 관객들에게 모여주기 전에 리허설(rehearsal)이 라고도 하는 예행연습(豫行演習)을 배우들이 한다. 그러나, <인생극장>에서는 그런 것이 없다.

한번 지나가면, 그 장면(場面)은 그것으로 끝이라는 말이다. 그런 만큼, <인생극장>에서의 연기란 대단히 어려운 것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특히, 세상을 살 만큼 살아온 나이가 지긋한 사람, 한 집안을 이끌어가는 가장(家長), 연장자(年長者), 상급자(上級者), 크고 작은 갖가지 생활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집단(集團)의 우두머리인 장(長) 등등의 경우, 그 연기는 더욱 힘들어지고, 훌륭한 연기를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마음과 정성을 다 바쳐야 될 것이다.

그러한 역(役)을 맡게 되었을 때, 경우에 따라서는 다른 사람들에게 ‘웃음거리’나 ‘조롱거리’가 되는 수도 있고, 또는 남에게 해(害)를 끼치 게도 되며, 덕(德)이 되지 못하게 되는 수도 있다.

<인생극장> —— 우리네 인간(人間)들이 한세상 살아가는 것은 너나 없이 누구나 인생극장(人生劇場)이라고 하는 단막극(單幕劇)에 출연 (出演)하는 배우들과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대행만능시대 (代行萬能時代)

태평양전쟁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19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둘째 이야기    광복 70년 (光復七十年)

대행만능시대 (代行萬能時代)

대행(代行)은 누구를 대신하여 무엇을 행하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널리 쓰이고 있는 <대행>이라는 말의 뜻은 앞에 적은 <진짜와 가짜> 이야기 끝 부분에 나온 것처럼, 제물로 쓸 물건을 사다달라고 부탁받은 사람이 그 부탁을 한 사람의 심부름을 해준 것과 같은 정도의 뜻이 아니다.   어째서 그렇다는 것일까?

그 이유는 이렇다.   예를 들면,  광고대행사,  분양대행사,  마케팅대행사 등등 – 그냥 <심부름> 정도가 아니고, 하나의 기업(企業)을 이루고 있는 업체(業體)들도 수두룩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런 것은 생략하고, 다른 것에 관한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언제부터인가 위에 적은 것 말고, 다른 종류의 대행업(代行業)을 하는 사람들도 있는 세상으로 변하고 있다. 그런 이야기 몇 가지를 적는다.

법화경(法華經)이라고 하는 불교의 경전(經典)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져 있는 <생로병사(生老病死)>라는 말이 있다.

사람이 이 세상에 (1) 태어나고, (2) 늙고, (3) 병들고, (4) 죽는 것을   生老病死라고도 하는데, <죽음>과 같은 뜻의 말인 사(死), 사거(死去), 사망(死亡) 등에 쓰이는 <죽을 사(死)>자 이야기를 엮어 보기로 한다.

그런 이야기를 엮으려면, 적어도 한자(漢字)에 관한 것을 폭넓게 설명 해야 되겠지만, 이 글(책)을 엮는 목적이 그러한 것에 관한 긴 설명을 하려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는 접어두로 지금 적고 있는 生老病死에 나온 글자인 <死>에 관한 것만를 간략하게 적는다.

<死>를 파자(破字)해보면, 즉 분해(分解)해보면 세 가지 요소(要素)로 이루어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一 + 夕 + 匕 = 死

一(일)은 지평선(地平線, 또는 어떤 기준[基準])이다.

예를 들면, 위를 뜻하는 글자인 上   (ㅏ + ㅡ = 上)

아래를 뜻하는 글자인 下   (ㅡ + ㅏ = 下)

夕(석)은 저녁이다.   낮 시간의 활동이 끝나는 때다.

匕(비)는 숟가락의 모양을 본뜬 상형문자(象形文字)로, ’숟가락’을 뜻한다.

저녁(夕) 숟가락(匕)을 땅(一)에 묻어버려 밥을 먹을 수 없게 되었으니, 즉, 一 + 夕 + 匕 = 死(죽을 사)다.

엉터리 해석인가?

사람들 중엔 천수(天壽)를 다 누리지 못하고 일찍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지만, 사람의 한평생을 말할 때, <生老病死>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어찌 되었건, 그러한 것을 부정(否定)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멀쩡하던 사람이 물에 빠져 죽기도 하고, 예기치 못했던 화재 때문에 불에 타 죽는 사람도 있고,  자살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가 하면,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는 사람들도 있고, 그 밖에도 사람이 세상을 떠나게 되는 이유가 여러가지임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이 목숨을 잃는 것에는 각양 각색 모습들이 있고, 아무도 그런 것을 예측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死>에 대한 설명에 나온 말처럼 사람이 <밥숟가락을 놓으면> 그 순간부터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당연한 이야기를 괜히 적었나?

각설하고, 박정희 장군이 5.16 쿠데타를 일으켜 국가원수(國家元首)가 된 다음, 그는 다음과 같은 호칭으로 불린 적이 있다.

대통령권한대행 국가재건 최고회의의장 육군대장 박정희 (大統領權限代行 國家再建 最高會議議長 陸軍大將 朴正熙)

어마어마한 그 직함(職銜)엔 <代行>이라는 말이 들어 있다. <대행>이라는 이야기를 적으면서 해보는 말이다.

오늘날 <대행>과 관련된 한국의 실정(實情)은 어떠한가?

이미 앞에 적은 광고대행사나 분양대행사 등을 포함하여, 그 가지 수를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종류가 많다.

capture-20151210-174435한데, 언제부터인가 제사 지내는 것도 대행하는 업체가 있다. 아무리 대행만능시대(代行萬能時代)로 변하고 있는 세상이라고는 하지만, 자기 조상 제사도 남이 대행해주는 세상이 되었다.

그런 제사상(祭祀床)을 받는 고인(故人)의 심정은 어떠할까?

그러한 대행제사(代行祭祀)보다, 고인이 살아있을 때 마음 편하게 해 주는 것이 낫지 않을까?

어느 텔레비전 연속방송극에 나온 대화(對話) 한 토막이 생각난다.

“있을 때 잘해, 살아있을 때 잘 하라는 말야,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

진짜와 가짜

태평양전쟁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18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둘째 이야기    광복 70년 (光復七十年)

진짜와 가짜

8.15 광복 이후, 우리네 생활 주변에서 흔하게 쓰이고 있는 말 중에는  <진짜>와 <가짜>라는 말도 있다. 그렇다면, <진짜>는 무엇이고 <가짜>는 무엇인가?

  • <진(眞)짜>는 글짜 그대로 <참>이다. <거짓이 아닌 것>, 또는 <옳고 바름>이다.
  • <진(眞)짜>는 사실(事實)이나 진리(眞理)에 어긋남이 없는 것이다.
  • <가(假)짜>는 <진(眞)짜>의 반대(反對)말이다.
  • <가(假)짜>는 진짜처럼 꾸민 것 또는 진짜가 아닌 것이다.

사이비(似而非)라는 말도 있는데, <사이비>는 겉으로 보기에는 비슷한 듯하지만, 근본적(根本的)으로는 아주 다른 것이다.

어찌 되었건,  <사이비종교>라는 말도 있고 <사이비과학>이라 는 말도 쓰이고 있다.

진짜와 가짜라는 이야기를 엮어보려고 끄집어낸 말이다.

찰리 채플린 (Charlie Chaplin, 1889 ~ 1977 영국인, 희극배우, 영화감독, 제작자)은 1914년에 첫 영화를 발표한 이래 무성영화 (無聲映畵, silent film)와 유성영화(有聲映畵)를 넘나들면서  ‘가짜 목사 (The False Priest)’ 등 여러 가지 작품을 만들어낸 사람이다.

채플린그런 것뿐만 아니고 그는 콧수염, 실크모자, 모닝코트, 지팡이 등으로 분장(扮裝) 또는 위장(僞裝)한 그의 인상(印象)을 사람들에게 심어줌으로 세계적인 인기를 얻은 사람이며, 1975년에는 엘리자베스 여왕으로 부터 그의 공로를 인정받아 작위(爵位)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에 관한 이야기 한 가지 적는다.

어느 날 찰리 채플린이 한 시골 마을을 지나고 있었는데,  그때 마침 그곳에서 <채플린 흉내내기 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그것을 본 채플린은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그 대회를 구경했다.

경연자(競演者)들은 모두 외모부터 진짜 채플린처럼 분장을 하고 나와서 채플린 특유의 몸짓과 말투를 흉내내고 있었다.  그것을 바라보고 있던 채플린은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그 대회에 출전하여 자신이 평소에 하던 그대로 연기를 했는데, 채플린은 3등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 대회 출연자들 중엔, <진짜 채플린>보다 더 실감나게 연기를 한 <가짜 채플린>이 두 사람이나 더 있었던 것이다.

한데, 사실은 채플린 특유의 몸짓과 말투와 그의 처진 눈썹과 짧은  콧수염 등은 채플린의 원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의 본디 모습을 본 적이 없고, 콧수염 등으로 변장(變裝)한 얼굴과 특이(特異)한 그의 행동 등만 본 사람들에게는, 변장한 채플린의 얼굴과 말투와 행동 등이 그의 진짜 모습인 줄 알았을 것이다.

그렇게 꾸민 것이 아닌 그의 본얼굴은 그 당시의 꽃미남이라고 해도 될만큼 잘 생긴 민낯을 가진 인물로 알려져 있다.

찰리 채플린은 앞에 적은 것처럼 콧수염, 실크모자, 모닝코트, 지팡이 등으로 그의 인상(印象)을 사람들에게 심어주었기 때문에, 그러한  그의 독특(獨特)한 것들, 말하자면 꾸민 것들이 그를 상징(象徵)하는 특징(特徵)처럼 되어 있다.

그렇게 꾸민 채플린을 흉내내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하는 것인데, 바꾸어 말하자면, 그것은 본 모습이 아닌 사람(채플린)을 흉내내는 사람들(가짜 채플린)도 있었다라는 이야기다.

이쯤에서 말머리를 돌려보기로 한다.

<5.16 쿠데타>에 관한 이야기를 적으면서, 맨 끝 부분에 나와 동갑인  몇 사람의 이름을 적었다.

한데, 희극배우 배삼룡(裵三龍)도 나와 동갑이다.   강원도 양구에서 태어난 배삼룡의 본명은 배창순이다. 춘천에서 보통학교(초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일본에서 유학한 적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배삼룡광복 후 귀국하여 1946 유랑악극단 ‘민협’의 단원으로 지내게 된 그는 어정쩡한 그의 모습을 빗대어 극단 선배들이 <삼룡>이라는 이름을 붙여 주었다. 그때부터 그는 <배삼룡>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

1969년 텔레비젼 MBC방송국이 개국되면서 그는 <웃으면 복이 와요>  등에 출연하여 우스운 짓이나 말로 남을 잘 웃기는 모습을 선보이며 그의 전성기(全盛期)를 달렸다. 그러한 배삼룡은 말을 더듬거나 바보스럽고 비실대는 행동을 했기 때문에 <비실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그는 무대생활만 한 것이 아니고, <형님먼저 아우먼저>, <출세작전>, <요절복통 007>, <아리송해>, <형사 배삼룡>, 등 희극영화에도 출연 하여 흥행에 성공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80년에 등장한 신군부(新軍部)의 “희극은 수준이 낮은 것이다” 라는 말을 듣게 되어 배삼룡은 무대를 떠나게 되었다. 그 후 음료사업을 시작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고, 미국으로 가서 얼마 동안 살다가 귀국했다.

1960 ~ 1970년대 서민들의 <삶의 애환(哀歡)>을 웃음으로 달래주었고, 그의 얼굴만 봐도 웃음이 절로 나오게 했던 배삼룡을 가르켜 말할 때,  <비실이 배삼룡>이라고 하거나 <바보 배삼룡>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한 배삼룡은 그 당시 많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나누어 주었다. 그러했던 배삼룡은 여러 해 동안 병석에서 투병생활(鬪病生活)을 하다 가 2010년 2월 23일 서울아산병원에서 항년 84세를 일기(一期)로 이 세상을 떠났다.  한편, 서민들에게 큰 웃음을 남기고 간 희극배우 배삼룡은 2003년 제10회 대한민국 연예예술대상 문화훈장을 수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진짜와 가짜>라는 제목으로 시작한 이야기가 <가짜 콧수염>을 달고 <가짜 행동> 등으로 사람들을 웃긴 찰리 채플린과 <비실이>와 <바보>가 대명사(代名詞)처럼 되어버린 배삼룡에 관한 이야기까지 나왔다.

채플린이 콧수염 등으로 가장(假裝)을 했던 것처럼, 배삼룡의 바보짓도 그가 진짜 바보였기 때문에 그러한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던 것은 아니었다.

앞에서 <박사와 장군>이라는 이야기를 적으면서 “지금은 가짜 박사도 있는 세상이다.”라는 말을 적었는데, 오늘날엔 <가짜>가 <진짜>를 뺨칠 정도로 세상이 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8.15 광복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진짜>라는 말과 <가짜>라는 말도사람들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말 중에 하나다.”라는 생각을 해보면서 적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무슨 가짜가 있다는 말인가?

살펴보기로 한다.

6.25전쟁 때, 전선(戰線)을 누비며 적군(敵軍)과 싸우다 전장(戰場)의 이슬로 사라져 목숨을 잃게 된 젊은이들도 있고, 나처럼 사지(四肢)가 멀쩡하던 사람이 적탄(敵彈)을 맞고 정상적(正常的)인 몸을 가질 수 없게 된 사람들도 생겼다. 달리 말하자면, <전사자(戰死者)>들도 많았고, <상이군인(傷痍軍人)> 이라고 불리게 된 사람들도 생겼다는 이야기다.

그러한 <전상자>들을 <상이군인>이라고도 하는데, <가짜 상이군인> 이라는 말도 쓰이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해 본다.  가짜 상이군인 뿐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다음과 같은 말도 쓰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세상으로 변하고 있다.

가짜 목사,  가짜 박사,  가짜 의사,  가짜 형사, 가짜 기자,  가짜 학력.  가짜 문서,  가짜 화폐,  가짜 이력서,   가짜 자동차 번호판, 가짜 양주(洋酒),   가짜 한우(韓牛), 가짜 고추가루,   가짜 콩나물,  가짜 참기름, 등등 …

서울 남대문시장에 있는 어느 참기름가게 앞에 다음과 같은 말이 적힌 간판이 붙어 있다고 한다.   “정말 순 진짜 참 기름만 팝니다.”

<깨>는 <참깨>도 있고 <들깨>도 있다.   그러므로 참깨로 짠 기름은 참기름이고, 들깨로 짠 기름은 들기름이다.

한데 어찌 된 것인지, <참기름>이라는 말 자체(自體)에 <참>이 들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무엇이 부족하여 수식어(修飾語)를 더 붙인 것일까?   같은 내용의 수식어를 세(3)개씩이나 덧붙인 것이다.  얼마나 <가짜>가 많으면, 그런 간판도 생겼을까?  ‘가짜가 많은 세상이라는 것을 새삼스럽게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라는 말이다.

<거의 같다>라는 뜻으로 쓰이는 <비슷하다>라는 말이 있다.

예를 들면, XXX와 비슷한 사람, 또는 이것과 저것은 모양이 비슷하다. 하지만, 엄밀(嚴密)하게 따져보면, <거의 같다>는 것이나 <비슷하다> 라는 말은 <조금도 틀림이 없이 같은 것이다>라는 뜻은 아니다.

<거의 같다>라는 것은 <조금도 틀림이 없이 같은 것>과는 그 말의 뜻이  다르기 때문이다.

구한말(舊韓末)의 정치가이며 독립운동가인 월남 이상재(月南 李商在) 님의 일화(逸話) 하나를 이 글에 옮겨 적는다.  그는 어느 강연장에서 청중들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고 한다.

이상재

옛날에 어떤 사람이 자기 아버지 제삿날이 다가와서 제사에 쓸 제물을 사러 장엘 가려고 하는데, 마침 그의 친구 한 사람이 자기도 장엘 간다 고 하기에, 그 친구에게 제물로 쓸 물건을 사다달라고 부탁했다.

그 친구는 무엇을 사오면 되겠느냐고 부탁한 사람에게 물었더니, 그 사람이 대답하기를 “고기 같은 것 한 근과 사과 같은 것과 배 같은 것 몇 개씩 하고, 북어 같은 것도 좀 사고 ……… ” 그런데 그 때 묵묵히 강연을 듣고 있던 청중들이 일제히 폭소를 터뜨리며 크게 웃었다.

바로 그때, 이상재님은 주먹으로 탁자를 치면서 청중을 향해 말했다.

“여러분! 무엇이 그렇게 우습단 말입니까?   사과면 사과, 배면 배지 거기에 웬 <같은>이라는 말이 붙느냐?  정말 우스운 사람도 다 보겠군.  그래서 웃어댄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절대로 웃을 일이 아닙니다. 우리 다같이 한 번 생각해봅시다.   각자 나는 지금까지 과연 안팍이 모두 진실된 사람이었나, 아니면 겉과 속이 다르지 않았나 한 번 살펴 보자는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이어야 합니다.  결코 사람 같은 사람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사람답게 살도록 모두 노력해야 합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모두들 고개를 숙였고, 그 강연장의 분위 기는 어느새 조용하고 숙연해졌다고 한다.

월남 이상재님이 청중들에게 던진 그 말씀은 오늘날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도 주는 경구(警句)라는 생각을 해본다.

조찬기도회

태평양전쟁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17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둘째 이야기    광복 70년 (光復七十年)

조찬기도회

교회용어사전 (Glossary of Christianity, 서울,생명의말씀사,2013)이라는 책이 있는데, 그 책에 ‘예배 및 예식’이라는 제목이 있고, 그 제목 안에 국가조찬기도회 <國家朝餐祈禱會, National prayer breakfast>라는 항목이 있다.

우선 조찬(朝餐)에 관한 이야기부터 해본다. ‘조찬(朝餐)’, ‘조반(朝飯)’, ‘아침 밥’  또는 그냥‘아침’이라고 하는 이런 말들은 모두 같은 내용의 말이다.

한데, 내 경험이나 생각으로는 ‘조찬(朝餐)’보다 ‘조반(朝飯)’이 낫고, ‘조반(朝飯)’보다 ‘아침 밥’이나 그냥 ‘아침’이라고 하는 말이 훨씬 실감 (實感)나는 말이라고 여겨진다.

아침, 점심, 저녁 …… 이렇게 끼니 때마다 거르지 않고 먹을 수 있는 환경(環境)에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서 해보는 말인데, 나도 그러한 사람들 중에 하나 였던 때가 있었다. 배고픔을 참으면서 지낸 것이 무슨 자랑거리일 수도 없고, 굶주림을 겪은 것이 내놓을 만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내가 겪었던 사실이니 적어보는 말이다.

일제 때, 특히 태평양전쟁 당시에 있었던 이야기는 말할 것도 없고, 6.25 전쟁 때에도 먹는 것 때문에 큰 어려움을 겪은 적이 있었다.

지금도 한반도의 허리를 가로지른 채 남북을 막고 있는 철조망은 6.25 전쟁 때문에 생긴 것인데, 그 전쟁 때 반찬 없는 주먹밥을 먹으며 전쟁터를 누비던 때가 있었다. 그러한 전장(戰場)에서 목숨을 잃었거나 전상자(戰傷者)가 된 사람들을 생각해본다.

혹자(或者)는 말하기를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다.”라고 하든가, 아니면 “지금 당장 잘 먹고 잘 살고 있으면 되는 것이지, 다 지나갔고 케케묵은 6.25 때 이야기를 궁상(窮狀)맞게 꺼집어내어 들먹일 필요가 있겠는가?” 라고 할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어찌 되었건 간에, <國家朝餐祈禱會, National prayer breakfast>에 나온 ‘breakfast’라는 말은 break와 fast의 합성어(合成語)다.

  • Break(깨뜨리다) + fast(음식을 먹지 않음) = breakfast

곧 “밤 사이에 먹지 않은 것을(단식한 것을) 깨고, 음식을 먹는다.”라는 뜻이다.

  • 24시간을 3등분한 여덟(8)시간 마다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고, 저녁밥을 먹은 시간과 아침밥을 먹는 시간과의 간격(間隔, 시간적인 동안)이 아침에서 점심까지,  또는 점심에서 저녁까지보다 더 길기 때문에 위에 적은 것과 같은 설명이 있게 되었다라는 것이다.

‘국가조찬기도회’에 관한 것을 적으려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국가(國家)가 무엇인가?

국가는 일정(一定)한 영토(領土)를 가지며, 거기에 거주(居住)하는   다수인(多數人)으로써 구성(構成)되어 하나의 통치조직을 갖는 단체, 즉 나라다.

따라서 ‘국가는 통치권(統治權), 영토(領土), 국민(國民)의 3 요소로써 성립된다.’라는 것이 국어사전의 해설이다.

이쯤에서 ‘국가조찬기도회’에 관한 몇가지 이야기를 골라서 간략하게 적어보려고 한다.

cats‘국가조찬기도회’는 1966년 3월 8일 옛 조선호텔에서 열린 ‘제1회 대통령조찬기도회’가 모태(母胎)이며, 1976년 제8회 때부터 국가조찬기도회로 이름을 바꾸었고, 2003년부터 사단법인으로 되었는데, 그 이름부터가 아주 거창(巨創)하다.

“(사) 대한민국국가조찬기도회 KOREA NATIONAL PLAYER BREAKFAST”

그 기도회는 국민화합(國民和合)과 경제활성화(經濟活性化) 또는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기도를 하기 위하여 기독교단체에서 해마다 주최 하는 아침기도회다. 그 기도회는 대통령을 비롯한 정치계의 요인(要人)들과 한국 개신교의 저명한 성직자(聖職者)들이 함께 기도도 하고 아침밥도 먹는 행사다.

위에 적은 것만으로는 그 모임에 관한 것을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유신정권(維新政權) 이후 본격적으로 정교유착(政敎癒着)을 하게 된 것이 바로 1966년부터 시작된 국가조찬기도회다.>라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한국에서의 그러한 정교유착(政敎癒着)은 일부 기독교 지도자들이 유신정권을 지원하는 형태로 시작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러한 국가조찬기도회에서 나온 말이라는 것은 5.16 쿠데타로 시작된 박정희 정권(政權)을 찬양(讚揚)하는 내용이고, 그러한 정권에 힘을 실어주는 형태였다.>라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정치계와 경제계가 서로 자신의 이익을 얻으려고 깊은 관계를 가지게 되는 정경유착(政經癒着)이라는 것이 있었는데, 정치인과 종교인들 중 에도 서로 깊은 관계를 가지는 사람들이 있다.

‘정교유착(政敎癒着’이라는 것이 바로 그러한 것인데, <정교유착을 하는 인사(人士)들은 기독교 성직자로서의 본분(本分)을 망각(忘却)했거나 아니면 저버린 사람들이다.>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기독교(개신교)의 경우, 성직자(聖職者)란 ‘종교교단(宗敎敎團) 내에서의 예배<제례(祭禮)의 집행>, 신도(信徒)의 교육, 교단의 운영 등을 지도 또는 담당하는 직업의 사람이다.’라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인데, 그렇다 면, 위 해석에서 말하고 있는 <종교교단>이란 무엇인가?

  • 종교(宗敎)란 무한절대(無限絶對)의 초인간적(超人間的)인 신(神)을 숭배(崇拜)하고, 신성(神聖)하게 여겨 선악(善惡)을 권계(勸戒)하고 행복(幸福)을 얻고자 하는 것을 뜻하는 것이고,
  • 교단(敎團)은 위에 설명한 것과 같은 종교상(宗敎上)의 신앙(信仰)과 제례의식(祭禮儀式)을 같이하는 동질적(同質的)인 사회집단(社會集團)이다.

한데 오늘날엔 개신교 성직자들 중, 자신의 본분을 저버리고 사는 사람 들도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세상이 되고 있다.    내면적(內面的)인 것뿐만 아니고, 외형(外形)에도 그런 면(面)이 있다.

돌이켜보건대, <지난 60 ~ 70년대의 물량주의(物量主義)와 권력지향풍조 (權力指向風潮)로 사회적 규범이 깨어지고, 가치관의 붕괴로 인한 혼돈 상태도 드러나고 있다.>라는 것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언제부터인가 <초대형교회>라는 말이 쓰이고 있다.

<아주 큰 교회> 라는 것인데, 일반적으로 출석하는 사람의 수가 1만명 이상 되는 교회를 지칭하는 말이라고 한다.  국가조찬기도회에 관한 이야기를 적다 보니, 초대형교회라는 말이 나왔다.

대통령조찬기도회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기도회가 오늘날엔 사단법인 대한민국조찬기도회 (KOREA NATIONAL PLAYER BREAKFAST)로 되어 있고, 그 조직규모가 거창하다.

대한민국 헌법 제1장 제20조 제2항에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라는 조문(條文)이 있는데, 그것이 논란의 대상으로 되고 있다.     정교유착(政敎癒着)이라는 말을 생각해 보면서 이번 이야기를 끝낸다.

5.16 쿠데타

태평양전쟁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16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둘째 이야기    광복 70년 (光復七十年)

5.16 쿠데타

한국 현대사에서‘<4.19혁명>은 이승만 박사를 연상(聯想)할 수 있는 말이고, <5.16 쿠데타>의 주인공은 박정희 장군이다.’라는 것이   초등학교 학생용으로 만든 국어사전에도 실려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을 길게 설명할 필요는 없지만, 이번 이야기의 제목으로 정한 내용을 엮어 나가기 위해, 우선 그런 설명부터 이 글에 옮겨 적고, 5.16 쿠데타에 관한 몇 가지 이야기를 펼쳐보기로 한다.

<사일구(4.19) 혁명(四一九革命)>

1960년 4월, 12년 동안에 걸친 이승만 정권의 독재 정치와 3.15 정.부통령 선거의 부정에 항거하여 학생과 시민이 들고일어난 일.

<오일륙(5.16) 군사정변(五一六軍事政變)>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육군소장을 비롯한 청년 장교들이 장면 내각을 뒤업고 정권을 장악한 일.

                  (초등학생 학습 국어사전 (주) 교학사, 1999. 7. 10)

위에 적은 것처럼 <5.16 군사정변>이라고도 하고, <5.16 군사혁명 (軍事革命)>이라고도 하는 <5.16 쿠데타>란 1961년 5월 16일, 박정희 (朴正熙) 소장을 중심으로 일단의 청년 장교들이, 4.19의거 이후의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인 혼란을 수습한다는 명목 아래 일으킨 군사혁명 이다.

이로써 민주당의 장면(張勉)정권이 무너지고 군사혁명정부가 생겼는데,    2년 동안 그들의 군정(軍政)이 실시되었던 것이다.

5.16군사쿠데타01

다시 설명하자면, <장면 내각(張勉內閣)> 또는 <장면(張勉)정권>이란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이 무너진 다음부터 박정희의 군정이 생길 때까지  그 중간에 있었던 정권이다.

이야기를 잇기 전에 World Book, Inc에서 펴낸The World Book Encyclopedia의 1988 판에 실린 박정희에 대한 기록을 소개한다.

Park Chung Hee (1917-1979) served as president of South Korea from 1963 to 1979.

He had taken power as head of the nation in 1961 after leading a military revolt against the civilian government.

In 1979, Park was assassinated by the head of the country’s Central Intelligence Agency.

Park, controversial leader, helped establish many new industries in South Korea and the country’s economy grew rapidly under his rule.

On the other hand, Park’s government greatly restricted individual rights.

For example, the government made illegal to criticize the president or the constitution, which gave the president almost unlimited power.

Park had many people imprisoned for criticizing his policies.

He declared that harsh rule was needed to guard against attack by North Korea.

Park was born in Sonsan-gun, a country in North Kyongsang Province.

In the early 1940’s he attended military academies and served in the Japanese Army.   (중간 생략)

Park became a Korean Army captain in 1946 and a general in 1953.

After leading the 1961 military revolt, he headed the military government for two years.

In 1963, Park resigned from the army and was elected president by the voters to head a new civilian government.

He was reelected by the voters in 1967 and 1971.

In 1972 and 1978, Park was reelected college made up of persons loyal to him.

위와 같이, 백과사전에 실린 박정희 대통렁이 남긴 행적(行蹟) 중엔 다음과 같은 설명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Park’s government greatly restricted individual rights.

For example, the government made illegal to criticize the    president or the constitution, which gave the president almost unlimited power.

Park had many people imprisoned for criticizing his policies.

위에 옮겨적은 설명만으로도, <5.16 쿠데타>의 주인공인 박정희 장군의 인간성(人間性)이 어떠하다라는 것을 대략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가 가지고 있는 출세(出世)에 대한 욕망(欲望)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한국 현대사에서 그는 보기드문 변신(變身)의 달인(達人)이라는 것이 세간(世間)에 알려져 있기 때문에 몇 가지 예를 들어보기로 한다.

박정희는 5.16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혁명공약(革命公約)>이라는 것을 발표했다. 한데, 그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으로 변질(變質)되어 버렸다.

예를 들면 공약 3번 중, <이 나라 사회(社會)의 모든 부패(腐敗)와 구악(舊惡)을 일소(一掃)하고>라는 말이 있는데, 구악(舊惡) 대신 <신악(新惡)>이 생겼고, 그 신악의 위세(威勢)는 구악을 뺨칠 정도였다.

그런 것 뿐만 아니었다.

공약 6번은 어떠했나?

<……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은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 >이라는 공약(公約)을 약속대로 실행(實行)했던가?

박정희 소장과 육군사관학교 8기생인 김종필(金鍾泌) 중령 등이 주도 (主導)한 쿠데타 세력은 그들과 합세한 일단(一團)의 병력과 함께 1961년 5월 16일 새벽에 한강을 건너 서울의 주요기관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군사혁명위원회를 만들어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은 혁명공약을 발표했다.

5.16 쿠데타의 주역(主役)인 박정희 장군 …… 이미 앞에 적었듯이 그는 <출세(出世)에 대한 욕망(欲望)이 남달랐고, 변신(變身)의  달인(達人)이라는 것이 세간(世間)에 알려진 사람이다.

  •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때, 문경공립보통학교 교사였던 박정희는 교사직을 사임하고, 일본의 허수아비 국가인 만주국(滿洲國) 신경군관학교 (新京軍官學校)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다.
  • 일본을 위해 목숨까지 내놓을 것을 맹세했고, 창씨개명할 때 100 퍼센트 일본식으로 성과 이름을 바꾸기까지 했던 박정희 —   그는8.15 해방을 맞아 광복군(光復軍)으로 변신했다.   그리고   귀국한다.

그는 귀국한 다음, 대한민국을 위해 남긴 그의 업적도 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그는 자신의 욕망(欲望)을 위해 수단과 방법 을 가리지 않는 사람이고, 결국은 한 나라의 독재자가 되었던 것이다.

박정희가 주도(主導)하는 제4공화국 헌법을 <유신헌법(維新憲法)>이 라고도 한다.   한데, 그 법에는 긴급조치(緊急措置)라는 것이 있다.

긴급조치(緊急措置)는 이현령비현령(耳懸鈴鼻懸鈴)과 같은 것이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고 하듯이, 둘러대기에 따라 이렇게도 되고 저렇게도 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한 <긴급조치>라는 것은 그 당시 박정희가 장기집권(長期執權)의 꿈을 꾸면서, 그의 욕망을 채우기 위하여 만들어낸 수단과 방법이었다.  말하자면, 그것은 자신의 인생말로(人生末路)를 재촉하는 법이었다.

자승자박(自繩自縛)이라는 말도 있고,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는 말도 있는데, 박정희 —– 그가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World Book, Inc에서 펴낸 1988 Edition The World Book Encyclopedia 에 실린 박정희 대통령에 관한 설명을 생각해본다.

In 1979, Park was assassinated by the head of the country’s Central Intelligence Agency.

이 설명문에 나온 ‘the head of the country’s Central Intelligence Agency.’의‘the head’라는 표현은 당시 중앙정보부 김재규(金載圭) 부장을 가리킨 것이다.

나는 이 글을 엮으면서 대한민국 역대 대통령 등, 저명(著名)한 인사 (人士)들의 이름도 적었다.   한데 그들 중 이승만 박사만 빼고, 그 밖에는 모두 이름으로만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하지만, 지금 이 글에 적고 있는 <김재규(金載圭)>라는 그 이름은 내 마음 속에 늘 있게 될 것이다.

돌이켜보건대, 박정희가 <혁명공약>을 어긴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세 번이나 집권기한(執權期限)을 연장(延長)했고, 유신헌법이라는 것으로 집권을 유지하려고 했다.   한데, 박정희 대통령이 휘두르는 그 엄청난 권력을 김재규가 막아낸 것이다.

김재규 …… 그가 어떠한 의도(意圖)로 (예를 들면, 정권 탈취 등) 박정희를 죽였든 간에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사건이 생긴 다음, 박정희 독재가 무너졌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역사(歷史)에 가정(假定)은 있을 수 없다.   이미 이루어진 것은 되돌릴 수 없거나 되돌리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글을 엮기 위해 한 가지 적는다. 박정희도 갔고, 김재규도 갔다.   한데,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가(安家) 술판에서 벌어진 그 사건이 없었다면, 이런 글을 쓰게 되지도 않았을 것이다라는 생각을 해본다.

박정희 대통령에게 총을 쏜 김재규 장군도 1926년생이다.  5.16 주체(主體)의 한 사람인 김종필 전 국무총리도 1926년생인데, 그의 구순(九旬,90세)에 관한 글이 인터넷을 통해 전해지고 있다.     (참고 : 위에 적은 <90세>란 한국의 전통적인 계산법에 따른 것임)

1926년생인 그들은 모두 내 나이와 같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나서 적어보는 것이다.

4월 혁명

태평양전쟁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15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둘째 이야기    광복 70년 (光復七十年)

4월 혁명

<미완(未完)의 혁명(革命)>이라고도 불리는 4월 혁명은  4.19 학생운동, 4.19 민주혁명, 4.19 의거, 4월 의거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보는 사람들의 시각(視角)이나 관점(觀點)에 따라 각각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는 ‘4월 혁명’에 관한 몇가지 이야기를 요약해서 적는다.

한국근현대사사전엔 4월 혁명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설명이 실려 있다.

  • 1960년 4월 19일을 전후하여 일어난 정치혁명,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제2공화국를 출범시키는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 5.16군사쿠데타 이후 의거로 규정되었으나 혁명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며, 4월 19일이 절정을 이루었다 하여 <4.19혁명>이라 불리기도 한다.

4월 혁명의 원인은 대략 이런 것이다.

원인의 근본은 원조경제(援助經濟) 위기서 싹튼 것이라고도 하는데, 그런 이야기는 접어 두고, 4월 혁명의 직접적인 원인은 이승만 1인 독재와 자유당의 부정부패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었다. 특히,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패색이 짙어진 자유당은 관권을 총동원하여 대규모 부정선거를 감행했다. 그렇게 조작되어 처리된 3월 15일의 선거 결과, 결국은 이승만 후보와 이기붕 후보가 각각 정,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국민들은 그러한 선거결과에 승복하지 않았고, 마산을 비롯해 전국 각처에서 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규탄시위가 이어졌다. 이 글의 제목인 <4월 혁명>이란 위에 설명한 <3.15 부정선거>를 저지른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 정권과 <5.16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장군의 군사정권 사이에 끼어 있던 한국 현대사의 한 장면이다.

한데, 한국 현대사에서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의 집권기간(期間)은 다른 어느 대통령들의 재임기간보다도 훨씬 길었다.

제1대 이후 지금까지 11명이 대통령 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대한민국 70년사에서 이승만과 박정희 (5,16 군정 포함) 두 사람이 집권한 기간은 30년이다.

이승만의 자유당이 12년이고, 박정희의 군정과 공화당이 18년이다.

참고로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의 재임기간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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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이야기 제목인 <4월 혁명>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면서, 이승만과 박정희 이름이 나오게 되었는데, 내친 김에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들의 성명과 재임기간도 적었다.  그리고 그들 중엔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한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적었다.

그러한 <창씨개명>이란 한국 민족의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없애려고, 1940년에 일제(日帝)가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걸고 강제(强制)로 한국인의 성과 이름을 일본식 씨명(氏名)으로 바꾸어 짓도록 한 것이다.

♦  내선일체(內鮮一體)란 1937년에 일제가 조선을 통치하기 위해 그들이 만들어낸 말인데, 내(內)는 그들이 일본 본토를 가리키는 말인‘내지(內地)의 첫 글자를 뜻하는 것이고, 선(鮮)은 조선을 가리키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말하자면, 內鮮一體란 조선과 일본은 <한 몸>이다라는 것이고, 따라서  그들 일본은 한국인들에게 일본식으로 창씨개명을 하도록 강요했던 것이다.

그들은 위에 설명한 ‘內鮮一體’뿐만 아니고, 한국인과 일본인의 뿌리는 같은 것이며, 같은 조상(祖上)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동근동조(同根同祖))라는 말도 만들어냈다. 그러한 당찮은 말을 만들어 내놓은 일본은 조선 사람들에게 터무니  없는 짓을 했던 것인데, 그들이 조선 사람들에게 강요(强要)한 창씨 개명도 그런 맥락(脈絡)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한데 앞에 적은 것처럼 박정희, 최규하, 김영삼, 김대중, 이명박도 창씨개명을 한 사람들이다.

그들의 창씨개명은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알아보기로 한다.

대한민국 대통령 중, 8.15 광복 후에 태어난 사람은 노무현과 박근혜 두 사람 뿐이고, 그 외는 모두 그 전에 출생한 사람들이다. 그 아홉 대통령 중에서 이승만, 윤보선, 전두환, 노태우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고, 다른 다섯 사람은 창씨 개명을 한 사람들이다.

박정희(朴正熙)는 다카기 마사오(高木正雄), 최규하(崔圭夏)는 우메하라 게이이치(梅原圭一) ,  김영삼(金泳三)은 가네무라 코유(金村康右),  김대중(金大中)은 도요타 다이쥬(豊田大中), 이명박(李明博)은 츠키야마 아키히로(月山明博)

朴正熙의 正,  崔圭夏의 圭,  金泳三의 金,  金大中의 大中,  李明博의 明博 등, 그들은 모두 제각기 한 글자나 두 글자를 살려서 창씨개명한 흔적(痕迹)이 있다.

창씨개명을 한 조선사람들의 대부분이 위에 적은 것처럼 원래의 성명 중에서 한 두 글자를 살렸는데, 박정희는 달랐다.

박정희는 <창씨개명>을 두 번이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첫번째 것인 다카기 마사오(高木正雄)에는 ‘朴正熙의 正’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 끝내지 않고 다시 지었는데, 오까모토 미노루(岡本實) 로 고쳤다고 한다. 박정희의 그러한 창씨개명은 100 퍼센트 일본인화(日本人化)된 성과 이름이다.

오까모토 미노루(岡本實)에 관한 것은 인터넷 등으로도 알려져 있기 때문에 더 긴 이야기는 적지 않는다.

각설하고, 앞에서도 적었듯이 <4월 혁명>을 화제로 삼아 글을 쓰다보니 창씨개명에 관한 것도 나왔고, 창씨개명에 관한 이야기를 적다보니 이승만과 박정희 두 대통령 이름도 나왔다.

이화장태평양전쟁이 끝난 다음, 이승만 박사가 그의 부인(프란체스카 도너 리)과 함께 미국에서 귀국하여, 서울 돈암동 부근에 있는 돈암장(敦岩莊)이라는 곳에서 얼마동안 살다가 종로 이화동에 있는 이화장(梨花莊)으로 이사했다.  그곳으로 이사한 이 박사는 대한민국 대통령이 될 때까지 이화장에서 살았는데, 그 무렵에 나는 이화장을 개축(改築)하는 공사현장에서 얼마 동안 일한 적이 있었다.

♦  내가 거기서 일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은, 당시 그 공사를 맡은 제일토건사 (사장 : 金相根, 당시 서울  을지로 사거리 근처 소재)의 김예수(金禮洙) 부사장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Charlie Kim이라고도 불렸던 김예수 부사장을 내가 알게 된 것은, 당시 서울 용산 한남동에 있던 13th Engineer Batallion 이라는 미군부대에 취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부대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면, 미육군 제7보병사단과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USAMGIK)에 관한 이야기까지 적어야 될 것이다.

USAMGIK, 즉, 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在朝鮮美陸軍司令部軍政廳)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연합국에 항복한 뒤, 미군 제24군단 (XXIV Corps)이 1945 년 9월 8일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한반도의 북위 38도선 이남을 다스리던 군사적 통치기관이다.  이 글의 목적이 그러한 미군정(美軍政)에 관한 것이 아니고, 내가 이화장을 개축(改築)하는 공사현장에서 일하게 되었던 설명을 하기 위해 꺼내본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에 관한 이야기는 더 적지 않는다.

하여간, 나는 13th Engineer Batallion이라는 미군부대 부대장인 윌헬름  중령(Lt. Col. William E. Wilhelm) 관저에서 일한 적이 있었는데, 내가 김 부사장을 알게 된 것과 이화장 공사현장에서 내가 일할 수 있게 된 것도 그러한 사유(事由)가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것을 생각해본다.

앞에 적었듯이 나는 이승만 박사 내외가 살고있던 이화장 개축공사현장에서 얼마동안 일한 적이 있었다.

한데, 백발이 성성한 그 분을 가까이에서 살펴본 첫인상은 평범해보이 는 노인이었다. 그는 가끔 공사현장에 나타나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물어 보기도 하면서 현장을 둘러보았는데, 그때 그 모습이 생각난다. 아주 자상하고 찬찬해 보이던 그런 분이 어찌하여 인생말년(人生末年)   에 이르러서는 부끄럽고 명예스럽지 못한 길로 가게 되었을까?

말하자면, 그 노인의 그러한 삶은 지나친 노욕(老慾)과 분수에 넘치는 과욕(過慾) 때문에 생긴 결과였다라는 생각을 해본다.

반면교사(反面敎師)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의 어원은 중국 공산당 창건자인 모택동(毛澤東)의 어록 (語錄)에서 찾을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다른 사람이나 사물(事物)의 부정적인 측면에서 가르침을 얻는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러한 뜻으로 볼때, 한국현대사에서 이승만 박사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반면교사>의 본을 보여주고 간 사람이라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 자리에 있을 당시, 서울 남산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한데, 4.19 후에 그 동상이 철거되었다.  그리고, 반세기 (半世紀)가 지나갔다.

51년만에 남산 언저리에 다시 이승만 박사의 동상이 세워졌는데, 그런 것이 여러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것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나는 이화장 개축공사 현장에서 일하고 있을 때 이승만 박사를 가까이에서 살펴본 생각이 나서, 그 당시에 있었던 이야기를 이 글에 적어 보는 것이다.

이번 글의 제목인 <4월 혁명>이 말해주고 있듯이 그 당시에 벌어졌던 선거와 관련된 것 한가지만을 가지고 이승만 박사를 평(評)한다면, 그의 과오(過誤)를 말할 수도 있을 것이고, 당연히 그가 비난(非難)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승만 90년>이라는 그의 한평생을 두루 살펴보면, 거대(巨大) 한 삶과 꿈이 담긴 그의 생애를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서예(書藝)- 2

태평양전쟁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14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둘째 이야기    광복 70년 (光復七十年)

서예(書藝)- 2

권불십년(權不十年) 이야기를 적는다는 것이 박정희 대통령과 김영삼 대통령의 휘호(揮毫)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휘호란 붓을 휘둘러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린다는 것인데,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한국 대통령들의 붓글씨에 관한 것 몇가지를 골라서 적어 보려고 한다.

역대 대통령 중 가장 휘호를 많이 남긴 사람은 박정희 전 대통령일 것이다. 그의 재임기간이 길기도 했지만, 하여간 그의 이름이 적힌 휘호를 많이 남긴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나 노무현 전 대통령은 한자(漢字)를 잘 몰라서인지 눈에 뜨이는 한자 휘호가 없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중의 휘호가 여러 점 있으나 노태우 전 대통령은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한문을 배웠고, 평생을 붓글씨와 가까이 하면서 살아온 사람으로 알려진 이승만 전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중에서 가장 뛰어난 필체(筆體)를 남긴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

붓글씨 이야기를 하는 김에 몇기지 더 적고 다음 이야기인 ‘4월 혁명’으로 넘어 간다.

붓으로 글씨 쓰는 것을 한국에서는 書藝라 하고, 중국에서는 書法이라고 하며, 일본에서는 書道라고 한다.

영어로는 대개 Chinese brush pen writing이라고도 하고, Chinese calligraphy 라고도 한다.   한데, calligraphy 라는 것를 풀이해 보면,  calli [beautiful] + graphy [forms of writing] = beautiful forms of writing 이라는 답이 나온다.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는가?

<書>는 시각적인 조형미를 평면에 나타내는 조형(造形) 예술이며, 온 몸과 힘과 정신이 붓끝에 모여 그것이 점(點)이나 선(線)에 나타나도록 심혈을 가울이는 동작이다.

붓글씨는 그렇게 예술적인 감각으로 쓰는 경우도 있고, 단순히 기록을 위한 하나의 필기 방법으로 쓰이기도 한다.

붓글씨의 발상지는 중국이다.

그러나 한문이 한국 것으로 소화시키듯이 붓글씨도 그렇다.

예를 들면, 추사체(秋史體)가 바로 그러한 것인데, 그것은 추사 김정희 (秋史 金正喜, 1786-1856, 조선 말기의 금석학자[金石學者]이며 서예가) 가 만든 것이다.

  • 추사체는 굵고 가늘기의 차이가 심한 필획과 각이 지고 비틀어진 듯하면서도 파격적인 조형미(造形美)를 보여주는 것이 특징이다.

남의 것을 모방(模倣)하지 앓고 창작한 그의 정신은 본받을만 하다.

한글에도 그러한 점이 있다.  한글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의 필법(筆法)은 한자를 쓰는 것과 같았으나, 붓을 움직이는 방법을 한자의 그것과 다르게 하여, 선이나 점획이 부드 럽고 단정한 궁체(宮體) 글씨를 만들게 된 것이다.

  • 궁체는 조선시대 궁중에서 쓰기 시작하여 발전해 온 전통적 한글 서체다.

요즈음 세상은 어느 때보다도 육체 단련을 위한 운동법이 널리 보급되어 있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몸에 좋다는 것은 무엇이든지 닥치는대로 먹는 사람도 있고, 값비싼 각종 보약과 건강식품의 수요가 늘어난다고 한다.

한편, 마음이 초조하고 정신이 불안하여 심적 불안을 가지고 지내는 사람도 적지 않은 듯하다.

다음과 같은 현상이 있는 것도 볼 수 있다. 몸에 해로운 것인 줄 알면서도 술울 마시거나, 담배나 마약에 의지하는 사람도 있고, 용하다는 점술가를 찾아다니거나, 무슨 종교에 발을 들여 놓는 사람도 있다.

그 밖에, 무슨 오락에 취미를 가져보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 아닌가 싶다. 그러한 것은 사회가 불안정할수록 더 심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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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때에, 손에 붓 한 자루 쥐고, 붓끝에 먹물을 묻혀 화선지에 글씨를 써보는 것도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는 한 방법이 될 것이다. 우선, 마음을 비우면, 마음의 여유가 생기게 될 것이고, 마음의 여유가 생기게 되면, 불안 속에서도 안정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면, 글씨는 어떻게 쓸 것인가?

평소에 좋아하는 글 한 구절이면 더욱 좋고, 그런 것이 아니라도 상관 없다.   어떤 글씨라도 또는 어떤 모양이라도 괜찮다라는 말이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가로든 세로든 간에, 그냥 붓 가는대로 팔을 움직여 보면, 종이 위에 붓끝이 움직이는대로 그 흔적(痕跡)이 남게 된다.

  • 그것은 정신을 붓끝에 집중시키며 붓을 움직여나갈 때, 그 <붓 움직임> 에 따라 까만 먹물이 하얀 화선지에 스며들면서 생기는 필적(筆跡)이다. 

그 필적은 붓에 묻은 먹물의 질이나 양에 따라 달라지고, 종이에 붓을 대는 각도와 붓을 내리 누르는 힘과 붓이 앞으로 움직이며 나가는 속도에 따라 달라진다. 붓글씨는 그래서 쓰는 묘미(妙味)가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찌 되었든 간에 붓글씨를 쓰다보면, 세상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지혜 도 생길 수 있으리라 ……   붓글씨를 꾸준하게 쓰면, 세상을 보는 안목(眼目)도 달라질 것이라는 뜻으로 해보는 말이다.

붓글씨 쓰는 이야기를 적다보니, 개칠(改漆)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改漆이라는 글자가 말해주듯이 개칠은 다시 고쳐 칠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개칠’한 글씨는 그것이 아무리 그럴듯하게 보이는 것이라 할지라도, 어설프게 쓴 ‘개칠’하지 않은 글씨만 못하다. 붓글씨에 관한 전문가는 개칠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붓 이야기를 적는 김에 한 가지 더 적는다.

붓(毛筆)은 원래 가는 대끝에 털을 꽂아서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데 쓰려고 만든 물건이다.

하지만 철필이나 만년필 등도 붓이라 하고, 신문이나 잡지, 방송 등, 언론을 ‘붓’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한데, 아무리 체계를 갖춘 학문적 지식이나, 능숙한 재능을 가지고 만들어내는 말이나 글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대하여 책임질 줄 모르면 아니 될 것이다.

말은 진실(眞實)해야 되고, 글은 곡필(曲筆, 어떠한 사실대로 쓰지 않고 거짓으로 쓰는 것)이 되지 않도록 해야 될 것이다.

그러므로 <붓>과 <혀>는 항상 조심해야 될 것인데, 특히 공인(公人) 이나 연장자(年長者)는 사석(私席)에서라도 말을 함부로 하지말고, 항상 조심하여 화(禍)를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될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명상서예(瞑想書藝)라는 말이나 태교서예(胎敎書藝)라는 말이 쓰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필적요법(筆跡療法, graphotheraphy)이라는 것도 있고, 서예치료(書藝治療, calligraphy treatment)라는 것도 있다.

아무튼, 이번 이야기는 시작에서부터 이리 저리 빙빙 돌다가 여기까지 왔다.    다음 이야기로 넘어간다.

서예(書藝)- 1

태평양전쟁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13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둘째 이야기    광복 70년 (光復七十年)

서예(書藝)- 1

광화문 현판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붓글씨 이야기가 나왔는데, 글씨 쓰는 법을 가르치는 학원을 대개 ‘서예학원’이라고도 한다. 영어를 가르치는 학원이면‘영어학원’이고, 음악을 가르치는 학원이면‘음악학원’이라고 하는데, 붓글씨를 가르치는 대부분의 학원들을 서예학원(書藝學院)이라고 한다.

붓글씨와 서예의 다른 점을 적어보려고 해본 말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붓글씨>와 <서예>는 그 개념(槪念)부터가 다른 것이다.  붓글씨와 서예라는 말의 뜻이나 글씨를 쓰는 방법, 즉 필법 (筆法)에 관한 것 등을 설명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보려고 한다.

서예(書藝)는 붓글씨를 맵시 있게 쓰는 예술(藝術)이고, 붓글씨는 붓으로 먹을 찍어 그냥 쓴 글씨다.

이쯤에서 <붓글씨>와 <서예>의 다른 점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붓글씨와 서예의 공통점은 그것에 쓰여지는 종이, 붓, 벼루, 먹 등이 서로 같음으로 붓글씨와 서예는 같은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붓글씨는 ‘붓으로 쓴 글씨’라는 것에 반(反)하여, 서예는  ‘書藝’라는 글자가 말해주듯이 ‘글씨를 붓으로 쓰는 예술’이다. 달리 설명하자면, 서예는 ‘예술성(藝術性)이 담겨있는 글씨다.’라는 것이다.

각설하고, 6.25전쟁이 휴전된 다음부터, 특히 서울지역에서 번창하게 된 것 중 하나를 꼽는다면 그것은 학원(學院)이 아닌가 싶다. 오늘날엔 여러 가지 외국어를 비롯해, 음악, 미술, 컴퓨터, 웅변, 연예, 자동차운전 등 400여 종의 학원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6.25전쟁 직후에는 사정이 달랐다. 오늘날 학원들이 범람하고 있는 것과 같은 현상은 아니었다라는 말이다. 그러했었는데, 오늘날의 실정(實情)은 어떠한가?

예를 들어본다.   서예학원에 경우, 임시수도(首都)였던 부산에서의 피난살이를 끝내고 서울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생기고, 사람들의 생활형편이 점점 나아짐에 따라 문화생활의 질(質)을 높혀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었는데, 그 수는 날이 지날 수록 늘어났다. 다른 말로 하자면, 외형적인 것을 사람들에게 돋보이게 하면서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극단적(極端的)인 예를 들어본다.

‘강남부자(江南富者)’라는 말도 있고, ‘벼락부자’라고도 하는 졸부 (猝富)들도 생기게 되었는데, 그러한 사람들 중엔 집안에 무슨 전집(全集)이니, 총서(叢書)니, 대전(大全)이니, 또는 여러 가지 전문사전(事典)들로 채원진 고급 책장(冊欌)을 갖추어 놓고, 거드름을 피우는 사람들도 생기게 되었다라는 이야기다.

너무 과장(誇張)된 표현인가? 당시의 사회상(社會相)의 한 부분을 누가 비꼬아서 지어낸 말일지도 모른다. 그런 것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붓글씨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한다.

원래 붓글씨의 주요 목적은 실용이다. 필기(筆記)가 목적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서예는 실용뿐만 아니라, 보는 사람이 감상(感賞)할 수 있고, 심미가치(審美價値)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붓글씨와 서예를 구분(區分)할 수 있는 것은 예술성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의 폭을 조금 넓혀보기로 한다.

6.25전쟁이 멈춘 다음, 부산이나 그 밖에 남쪽 땅 어디에선가 피난살이를 하다가 그 자리에 주저앉게 된 사람도 있었고, 환도(還都)와 함께 서울로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나도 부산에서 피난살이를 하다가 서울로 돌아갔다.

14334570신촌에서 ‘신촌인쇄소’라는 간판을 걸고 도장포를 겸한 인쇄소를 운영하며 살게 되었는데, 나는 신문에 실린 서예전시회(展示會)광고를 보면, 거의 그러한 전시회장에 가서 전시된 작품들을 둘러보았다.

한편, 1970년대 초에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서예잡지 ‘書藝’와 ‘書通’이 나왔다. ‘書藝’는 서예가인 월정 정주상(月汀 鄭周相) 선생이 발간한 것이고, ‘書通’은 서예가인 여초 김응현(如初 金膺顯) 선생이 발간한 것이다.

서통나는 1970년대 중엽에 대한민국의 서예연구단체인 동방연서회 (東方硏書會)의 김응현(金膺顯) 선생의 가르침을 받게 되었는데, 내가 모아놓은 ‘書藝’와 ‘書通’ 그리고 동방연서회에서 쓰던 교본(敎本)인 ‘東方書藝講座’와 서예전시회장에 갈 때마다 모아둔 전시작품에 관한

설명서와 그밖에 서예에 관한 책 등을 미국으로 이주할 때 가지고 왔다.

미국에서 살려면 영어도 필요하겠지만, 한국에 관한 것 몇가지 정도는 한국을 잘 모르는 미국인들에게 소개할 수 있는 자료가 있으면 좋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했었는데, 지금까지도 그 책들을 활용(活用)하고 있다.

미국생활을 한지 10년 쯤 지난 어느날 동내 도서관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클린턴 대통령 앞에서 붓으로  ‘大道無門’을 쓰고 있는 사진이 실려 있는 책을 읽어본 적이 있었다. 책 이름은‘KOREA’다.

한데, 그 사진에 관한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東亞日報 [1993.7.12.]에 실린 것을 이 글에 옮겨적는다.

<金대통령은 조찬후 자개농과 문방사우등이 있는 방으로 옮겨 클린턴대통령에게 ‘大道無門’ 휘호를 써주었으며 클린턴대통령 은 매우 흥미로운 표정으로 서예장면을 세심히 관찰.  金대통령은 “이 뜻은 어려운 일이 있을때 정정당당하게 자세를 취하면 어려움을 극복할수 있다는 것”이라고 휘호의 의미를 설명해주자 클린턴대통령은 “언제나 가까운 곳에 두고 그 뜻을 생각하겠다”고 사의를 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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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적은 것과 같은 것을 본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 이 글을 엮으면서 필요한 것을 대조(對照)해보기 위해 이것저것 인터넷 검색을 해보던 중,  사진과 함께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있는 것을 보았다.   President Bill Clinton Watching South Korean President Kim Young-sam prepare a Calligraphy Scroll.   The scroll was later presented to President Clinton, at Blue House in Seoul,       South Korea. 7/11/1993.

권불십년

태평양전쟁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12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둘째 이야기    광복 70년 (光復七十年)

권불십년

<權>  – <권세 권>이라는 글자다.

위에 적은 <權>의 설명인 권세(權勢)가 무엇인가? 그것은 권력(權力)과 세력(勢力)이다. 한편, 재력(財力)이라는 말도 있고 학력(學力)이라는 것도 있는데, 재력이나 학력이 권력에게 눌림을 당한 때도 있었다.

한글전용그러한 것에 관한 이야기는 앞으로 엮게 될 ‘5.16 쿠데타’에서 다루기 로 하고, 여기서는 ‘한글전용 정책’ 또는 ‘한글전용법 시행’과 관련이 있는 것을 간략하게 적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1970년부터 정부의 모든 공용문서를 맞춤법에 맞게 가로 쓰기 한글전용으로 하도록 규정되어 한글전용 어문정책이 확정 되었다.

그전에 이미 한국을 점령한 미군들이 펼친 그들의 군정(軍政)이 끝나고 대한민국이 독립된 직후부터도 한국정부는 국가정책의 일환 (一環)으로 한글전용 정책을 써 왔다. 하지만 그 실정(實情)은 오늘의 현실과 달랐다.

바꾸어 말하자면, <앞에 것>은 ‘한글과 한자(漢字)를 섞어서 썼다’ 라는 것이고, <나중 것>은 ‘한글만 쓰도록 했다’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오늘날엔 적지않은 한자문맹(漢字文盲)들이 있게 된 것이다.’ 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신문에서 한자가 사라지게 된 것은 박정희 정권의 막강(莫强)한 권력(權力) 밑에서 이뤄진 <한글전용 정책>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번 이야기 제목을 <권불십년>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권세가 정확 하게 10년을 넘지 못한다>라고 하기보다는, 아무리 강력(强力)한 권력으로 나라를 손아귀에 넣고 좌지우지(左之右之)하며 독재(獨裁)를 하는 사람이라도 그것이 그리 오래 가지못한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권력을 휘두르며 세상을 ‘떡 주무르듯’하고, ‘나는 새도 떨어 뜨린다’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권세가 당당하던 사람도 언젠가는 자신이 파놓은 함정(陷穽)에 빠지게 되거나, 자기가 만들어 놓은 덫에 걸리게 되는 수도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추풍낙엽(秋風落葉)과 같은 신세(身世)가 될 수도 있을 것이 라는 말이다.

사람의 욕심(慾心)이란 한(限)이 없는 것 같다.  권력에 욕심을 가지게 되면, 권력중독증(權力中毒症)에 걸리게 되고, 권력중독증에 걸리면, 제 명에 못 죽게 되는 수도 있다. 동서고금(東西古今)의 역사가 그런 것을 말해주고 있다.

예를 한가지 들어보기로 한다.

경복궁(景福宮)의 정문인 광화문은 1927년에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가 해체하여 경복궁 동문(東門)인 건춘문(建春門) 옆으로 옮겨졌는데, 6.25 전쟁 때 폭격으로 불에 탔다. 그러했던 광화문(光化門)이 1960년대 후반, 원래 있던 자리로 복원할 때, 박정희 대통령이 쓴 한글로 된 현판을 달았다.

‘<한자>로 된 것이 <한글>로 바뀐었다’라는 것인데, 어느 안전이라고 누가 감(敢)히 그에게 진언(進言)할 수 있었겠는가?’라는 말이다.

서슬이 시퍼런 권력을 쥐고 있는 대통령에게 비평(批評)을 하다니 ……      그 글씨에 대하여 왈가왈부(曰可曰否)할 수 있겠는가? 그런 말을 했다가는 날벼락이 떨어지고, 밥줄이 끊어질 수도 있게 될 것이다.    <오늘날 한자 문맹(漢字文盲)들이 있게 된 것도, 박정희 대통령이 펼친 어문정책(語文政策) 때문에 생긴 것이다.>라고 하면 지나친 말이 될까?

그의 권력은 대단한 것이었는데, 권불십년 이야기는 ‘5.16 쿠데타’ 에서 더 이어가기로 하고, 여기서는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라는 말처럼 ‘붓글씨 이야기가 나온 김에 붓글씨에 관한 것’ 몇가지를 적어보기로 한다.

8.15 단상(斷想) 5 – , 그리고 끝없는 갈등

태평양전쟁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11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둘째 이야기    광복 70년 (光復七十年)

8.15 단상(斷想) 5 – <공약(公約)>, <공약(空約)> 그리고 끝없는 갈등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 1945년 10월 16일, 미국에서 귀국한 이승만은 다음 날 저녁 8시 30분 서울 중앙방송국의 전파를 통해 첫 연설 방송을 했는데, “나를 따르시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습니다.”라고 말했다.

광복 70년을 뒤돌아보며, 여러 가지 면으로 생각나게 하는 말이다.

<못살겠다 갈아보자> <갈아봤자 별 수 없다>, <구관(舊官)이 명관(名官)이다> <싱겁다 신익희(申翼熙) 장난 마라 장면(張勉)>

slogan위에 나온 표어(標語) 중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1956년 5월 15일 제3대 대통령과 부통령 선거를 앞 두고 민주당 (대통령 후보 신익희[申翼熙], 부통령 후보 장면[張勉])이 내놓은 선거 표어고, <갈아봤자 별 수 없다 ……… 장난 마라 장면[張勉]>은 민주당이 내놓 은 표어를 반박(反駁)하는 자유당의 선거표어였다.

<구악(舊惡)을 일소(一掃)하고 …… >

이것은 앞에 이미 적은 것처럼 1961년 5월 16일, 박정희(朴正熙) 육군소장을 중심으로 일단(一團)의 청년장교들이, 4.19의거 이후의 정치적, 사회적 혼란을 수습한다는 명목 아래 일으킨 쿠데타의 이념과 성격을 밝힌 6개 항의 혁명공약(革命公約) 중, 한 부분이다.

혁명공약 전문(全文)은 다음과 같다.

  1.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
  2. 유엔헌장을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충실히 이행할 것이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 우방과 유대를 더욱 공고히 한다.
  3. 이 나라 사회(社會)의 모든 부패(腐敗)와 구악(舊惡)을 일소 (一掃)하고 퇴폐한 국민(國民)의 도의(道義)와 민족정기(民族正氣)를 다시 바로잡기 위하여 청신(淸新)한 기풍(氣風)을 진작(振作)시킨다.
  4. 절망과 기아선상에서 허덕이는 민생고를 시급히 해결하고 국가 자주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한다.
  5. 민족의 숙원인 국토통일을 위해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 배양에 전력을 집중한다.
  6. 이와 같은 우리의 과업이 성취되면 참신하고도 양심적인 정치인들에게 언제든지 정권을 이양하고 우리들은 본연의 임무에 복귀할 준비를 갖춘다.

한데, 그러한 <공약(公約)>이 <공약(空約)>으로 변했다. 그런 것 뿐만 아니다. <구악(舊惡)> 대신 <신악(新惡)>이 생겼는데, 신악의 위세(威勢)는 구악을 뺨칠 정도였다.

movie영화 이야기 하나 더 하며  <8.15 – 단상>을 마치고, <권불십년>이라는 이야기로 넘어간다.    지난 글에서 소개한 영화 <자유부인>의 감독인 한형모가 만든 영화로 ‘성벽을 뚫고’라는 것이 있다. 1948년에 일어난 여순반란사건(麗順叛亂事件)을 배경으로 한 민족분단 의 비극을 그린 1949년에 나온 작품이다.   영어로는 [Breaking the Wall] 이라고 하는데 한국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반공영화로 알려져 있는 작품이다.

이념(理念)의 갈등(葛藤) 때문에 생긴 한 가족의 불행한 비극(悲劇)을 그려낸 그 작품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집길과 영팔은 대학 동기동창이자 처남매부 간이다. 그러나 매부 영팔은 공산주의자이고, 처남 집길은 육군 소위이다. 이에 매부는 처남을 매수하려 하고, 처남은 매부를 설득하려 한다. 그런 가운데 여순반란사건이 일어나 이들은 숙명적으로 맞서야 하는 운명에 놓이게 된다. 처남은 다시 매부를 설득하려 하지만, 매부는 처남의 가슴에 총을 겨누고 처남도 하는 수 없이 방아쇠를 당긴다.

광복 70년을 맞는 오늘날까지 이 영화적 상황은 변하지 않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