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서 – 나와 너 그리고 우리들의 이야기

예수 카페어떤 일이 시작되는 연유를 보면 아주 사소하거나 우연적인 계기에서 비롯할 때가 많습니다. 지금의 제가 딱 그 모습이랍니다.

지난해가 저물던 무렵의 일이었습니다. 적(籍)을 둔 교회가 있어서 이따금 나가곤 있지만 성실한 교인은 아니랍니다. 교회 입장에서 본다면 그야말로 있으나 마나한 교인이지요. 저는 그게 좋답니다.

적을 둔 교회가 감리교회인데 교회에 속한 여러 모임 가운데 목장모임이라는 소그룹이 있답니다. 그전에는 속회라고 부르던 모임이랍니다. 장로교의 구역모임인 셈입니다. 예닐곱 가정들이 함께하는 작은 교회로 한달에 한번씩 각 가정을 돌아가며 모여서 성경공부도 하고 친교도 나누고 하는 모임이랍니다.

지난 십수년간 이 작은 모임에 함께한 적도 거의 없답니다. 제 집사람 혼자 가는 것이 당연한 일처럼 굳어졌답니다. 그러다 두해 전 부터 이 소모임에 몇 번 참석을 하게되었답니다. 딱히 뭐 아내의 잔소리가 싫어서는 아니었고 어찌 하다보니 한달 걸러 한번, 아님 두달 걸러 한번 정도로 참석을 하였답니다.

그러다 지난해 11월 모임에서 아주 엉뚱한 사건이 일어났답니다. 제가 속한 모임의 구성원들 평균 나이는 60세 전후랍니다. 교회이력으로 따지면 제법 연식이 오래된 분들이고요. 그런데 그날 성경공부를 하다가 누군가가 “좀 체계적으로 성경을 알고 싶은데 마땅한 그런 계기가 없어 어떤 땐 좀 답답하다. 우리 모임에서 함께 그런 계기를 만들어 보면 어떨까?”하는 의견을 내놓았고, 이런저런 이야기들이 오고가면서 그 가운데 제 블로그 글들을 읽고 계시는 한분이 “김아무개가 좀 그걸 맡아서 해주면 어떨까?”하셨답니다.

그 모임을 주관하는 장로님께서 저에 대한 신뢰(?)가 깊으셨던지 “그거 좋겠다. 그렇게 해보자”고 하실 때, 응당 제가 철이 들었다면 “아이고, 그게 무슨…”하며 손사래를 쳤어야 옳았을 일이건만 회갑나이를 그저 숫자로만 먹어 온 이 철부지가 그만 “그러지요, 뭐”라고 한 것이지요.

그래 올 일월부터 모임 때마다 성서공부를 한 시간여씩 맡아 하기로 했던 것인데, 그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퍼득 정신이 들면서 “에라이, 이놈아! 나이살 먹고 어찌 그리 철이 안 날수가…”하는 생각이 제 뒷통수를 딱 치던 것이었습니다.

아무리 속 넓으신 장로님께서 그리하라고 하여도 그저 덥썩 “예”하면, 교회도 잘 나오지 않는 놈이 교회모임에서 성서 이야기를 하고 가르친다고 듣는 욕이나 악평이야 그 방면으로 연륜이 쌓인 제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아이고! 모임의 수장인 장로님을 비롯한 속한 모임원들이 받을 그 많은 말들이 어찌 제 몫일 수 있으랴하는 생각이 든 것이랍니다.

그래 “제가 잘못 생각했습니다.”하고 모임원들께 넉넉하신 마음을 빌었지요. 그 대신 모두에게 누가 되지 않는 방법으로 성서 이야기를 나눌 방법들을 생각해 보았답니다.

그러다 바로 어제 일이었습니다. 멀리 떨어져 있는 이들과 비지니스 모임을 온라인에서 하게 되었답니다. 몇 해전 세탁인 교실을 이 방식으로 한 두해 해 본적이 있는데 그 때와는 환경이 아주 많이 달라져 있었답니다.

비지니스 온라인 미팅을 끝낸 후 든 생각이랍니다. 그래 이 방식으로 단 한사람과 만나더라도 성서 이야기를 함께 해보자하는 생각이 든 것이었지요.

“삶은 독파하는 것이 아니라 음미하는 것이다.” – 크리스토퍼 필립스(Christopher Phillips)라는 이가 쓴 책 <소크라테스 카페>라는 책 첫 장을 넘기면 만나게 되는 문장입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책의 소제목들입니다.

 1.  질문이란 무엇인가?(What is the question?)

2. 나는 어디에 서 있는가?(Where I am?)

3. 누구를 그리고 무엇을 원하는가?(Whom do you need?)

4. 이게 다 무슨 소린가?(What’s it all about?)

5. 왜 ‘왜’를 묻는가?(Why ask why?)

소크라테스가 고대 아테네 사람들에게 불어 넣었던 철학적 영감과 질문하는 삶을 오늘 현대인들이 되살려 일깨우는 일에 온몸을 다 던져사는 철학자 크리스토퍼 필립스(Christopher Phillips)의 물음들이 예수쟁이들에게도 그대로 유효하다는 생각으로 큰 간판을 “예수 카페”라고 올려봅니다.

성서를 마주 대하는 첫번째 자세는 ‘믿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 믿는 마음의 주체는 바로 ‘나’입니다. 그래 “내”가 가장 소중합니다. 성서 앞에서 ‘나’를 바로 볼 때 비로소 ‘너’가 보입니다. “네”가 “나”처럼 신 앞에서 똑같이 소중한 사람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 ‘나’와 ‘너’들이 모인 “우리”들이 보입니다. 그런 ‘우리’의 울타리의 크기 곧 넓이와 높이와 깊이를 키우는 일을 위해 성서를 읽는 것입니다.

그래 작은 간판을 “성서 – 나와 너 그리고 우리들의 이야기”로 새깁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얼마나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 모릅니다. 그저 시작할 뿐입니다. 거의 많은 시간을 저 혼자 이야기로 꾸며질 지도 모를 일입니다. 아마 그럴 개연이 높습니다. 그렇다하더라도 제겐 참 뜻있는 순례의 길이 될 것입니다.

제 아무리 백세 시대라 하더라도 예순 해 걸어 온 믿음의 길을 정리해 보는 마음으로 다시 읽어보는 성서는 또 새로운 가능을 열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묻지 않으면 침묵한다. 그런데 어떻게 묻느냐 하는 것이 그 대답을 유도한다. 우리는 성서를 자명한 것으로 전제하고 이미 대답을 얻고 있다고 생각하는 동안 성서 대신 아집에 정좌하게 된다. 그렇지 않으려면 계속 성서를 향해 물어야 한다.” – 바로 이 맘으로 시작하는 일입니다.

컴퓨터로 제 얼굴과 제가 보여드리는 자료들을 보며 이야기를 들으실 수 있고, 전화나 스마트 폰으로도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습니다.

매주 목요일 저녁 8시 30분부터 9시 30분까지(미국 동부시간) 한시간 동안 이야기를 하려 합니다.

그 첫시간은 이번 목요일(3월 5일) 저녁 8시 30분입니다. 아래 링크를 통해 함께 하실 수 있습니다.

https://www.anymeeting.com/492-961-284

마법사 전성시대

나이 든 세대가 젊은 세대를 이해 못하는 현상은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고대 이집트나 고대 중국 문헌에도 나오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젊은 것들은….”하며 혀차는 일이 어느 특정한 시대 어떤 특정한 문화권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하더라도 종종 제가 이해 못하고, 이해 할 수도 없는 것들이 있답니다. 이건 세대나 나이 차이의 문제가 아니라 “요즘 세상” 특히 “한인 사회 – 딱 한국이라고 특정짓지 않는 까닭은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에 만연한 어떤 풍습입니다.

바로 세상사는 방법을 재는 잣대입니다. 한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기도 하고, 가정, 집단, 지역사회 크게는 국가나 민족을 평가하는 기준일 수도 있겠습니다.

자기 밥그릇 챙기기라고 부르든, 집단 이익이라고 부르든 모든 판단 기준이 “나와 우리가 얼마나 차지하고 누리느냐”라는 것입니다. 아주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돈과 권력”이 모든 판단의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단  이틀만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던졌던 화두(話頭)  “정의(正義, justice)” 는 언제적 이야기인지 다 잊고 사는 것 같습니다. 어차피 사는 방법의 판단 기준이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즈음에는 그런 일에 시간을 허비하고 낭비하는 일은 없습니다만 한 때 한국에서 정치평론가라는 직업을 내세운 이들이 이야기하는 프로그램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한국사회에서 그런 직업군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철들어 한국 땅에서 산 세월보다  이민의 세월이 길다보니 낯설었을 수도 있습니다만 아무튼 “이젠 거기도 그런 세월이 되었구나”하는 생각에 자못 기쁜 마음도 있었답니다.

그러나 이내 실망을 하고 말았답니다.

그이들이 평론을 펼치는 잣대야말로 “돈과 권력” 그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이건 보수, 진보 또는 여, 야 아니면 친미, 종북 – 그 무엇이라고 부르던 그 평론가들이 어떤 블럭에 속해있건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의 잣대는 똑같이 “돈과 권력”이었고, 오늘도 여전히 똑같을 것입니다.

그렇게 똑같은 잣대를 가지고 이편 저편으로 나뉘어 오늘도 열을 올리고 핏대를 세우고 마치 우리는 서로가 아주 다르다는 양 싸우고 다투는 척을 합니다.

거짓에 둘려 쌓여, 아니 스스로 쳐 놓은 거짓의 거미줄을 자신들의 밥상으로 여기며 말입니다.

저라고 뭐 별반 다를게 있겠습니까만 그저 느낌 하나 적어보자는 생각이랍니다.

어떻게 반전을 이끌어낼 것인가크리스티안 안코비치( Christian Ankowitsch)가 쓰고 박정미가 번역한  리더스 북 발행 <어떻게 반전을 이끌어낼 것인가>라는 책을 읽은 것은 순전히 제 밥그릇을 더챙기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제가 먹고 사는 일에 무슨 도움이 좀 될까 하는 생각으로 읽었다는 말입니다.

그 책 <거짓을 진실로 바꾸는 마법>이라는 소제목에 있는 내용입니다.

 

“마케팅 전문가와 심리학자들이 모여서 명확한 경고의 메시지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정반대의 내용으로 바뀌는 문제를 연구했다.

실험에서 피험자들에게 ‘아스피린이 치아의 에나멜질을 파괴한다’라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곧바로 이 주장은 근거가 없는 이야기라고 말해주었다. 하지만 실험결과 피험자들의 머릿속에는 이 주장이 엄연한 사실로 자리잡은 것으로 나타났다.

곧바로 그 주장에는 근거가 없다는 경고를 덧붙였는데도 말이다.

말도 안 되는 것이 머릿속에 사실로 새겨지는 현상은 중년 이후에 더 많이 나타난다. 그렇다고 젊은 사람들이 예외라는 말은 아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에 대해서는 두 가지 답변이 가능하다.

첫번째는 기억이 장난을 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억이 ‘아스피린이 치아의 에나멜질을 파괴한다’는 메시지를 ‘근거 없음!’이라는 경고보다 더 잘 간직하기 때문이다. 그런 메시지는 대부분 기억 속에 아무 문제없이 저장되는 반면 메시지의 앞뒤 맥락, 즉 경고에 대한 기억은 소실되어버린다. 그 결과 우리는 아스피린이 치아의 에나멜질을 녹인다는 주장만 머릿속에 간직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허튼 주장을 의심스러운 홈페이지나 허접한 잡지에서 읽었다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만다. “

이 글을 읽다가 제가 무릎을 쳤답니다.

아하! 우리는 지금 마법에 걸려 사는구나 하는 깨달음이었답니다.

그 마법을 사람들에게 거는데 능숙한 마법사들이 판치는 사회에서 살고 있구나 하는 깨달음이랄까?

그래 제가 예수를 믿는답니다. “이건 아닙니다”라고 외치며 살 수 있는 힘이 그 믿음에서 나오므로.

그 믿음의 눈으로 보면 아직도 “요즈음 젊은 것들은….” 혀를 하며 나무랄 용기 역시 솟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