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음 – 기적 6

<하나님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33 

“생활고 때문에 세 모녀가 사망한 데 이어 30대 주부가 또 극심한 빈곤에 4살배기 아들을 안고 아파트 15층에서 뛰어내려 숨졌다. 경기 동두천경찰서는 지난 2일 오후 7시 45분쯤 동두천시 상패동의 한 아파트 화단에서 윤모(37·여)씨와 아들(4)이 숨진 채 발견됐다고 3일 밝혔다. 윤씨의 옷에서는 ‘미안하다’는 등의 글씨가 적힌 세금 고지서가 발견됐다.”  – 2014. 3. 3. 서울신문 인터넷판 사회면 기사 

“서울에 살던 세 모녀가 지난 2월 26일 저녁 주검으로 발견되었다. 언론을 통해 알려진 바대로 12년 전 아버지가 떠난 뒤 이들 모녀는 어머니의 식당 노동과 작은 딸의 아르바이트로 생활을 이어왔다. 35세, 32세였던 두 딸은 어려운 생활과 지병으로 신용 불량자가 되어 있었고, 병원비 부담 때문에 치료조차 포기하고 지내왔다고 한다. 60세 어머니는 지난 1월 팔을 다친 뒤 식당 일조차 하지 못해왔다. 이런 상황에 빠져 있었지만 그들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가장 가난한 이들을 위한 최후의 안전망, 기초생활보장제도의 수급 신청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중략 -고인이 된 세 모녀가 남기고 간 짧은 글에는 ‘죄송합니다’라는 말이 두 번이나 등장했다. 가난 때문에 생명을 포기한 이들이 마지막으로 남긴 것이 이토록 강한 염치였다는 것이 우리 사회를 여러 번 울리고 있다. 그러나 정작 죄송해야 할 것은 세 모녀를 방치한 이 나라의 복지와 사회일 것이다.”  – 인터넷신문 프레시안 2014년 3월 3일자 김윤영컬럼 중 

“기적신앙은 무엇보다도 낮은 계층에 널리 퍼져 있었고, 주후 3세기 동안에 비로소 상류층에 까지 비교적 널리 침투되었다는 사실을 드러내주는 몇가지 간접적인 증거들이 있다. 우리는 무엇보다 도혈루증 앓는 여인에 대한 이야기에서 그것을 알 수 있다. 그 여인은 열 두해동안 의사들에게 치료를 받기 위해 모든 소유를 헛되이 없앤 후에 예수에게로 왔다. 이전의 사회경제적인 신분(status)을 잃은 후에야 비로소 그녀는 비합리적인 기적신앙에 매달린다. 돈이 있을 때 의사에게 갈 수 있었고, 돈이 없을 때 생명을 다루는 다른 방책에 의존했다.” – 게르트 타이센(Gerd Theisen)의 공관복음서의 기적이야기에서 

“ 예루살렘 양의 문 곁에는 히브리말로 베짜타라는 못이 있었고 그 둘레에는 행각 다섯이 서 있었다.  이 행각에는 소경과 절름발이와 중풍병자 등 수많은 병자들이 누워 있었는데 그들은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따금 주님의 천사가 그 못에 내려 와 물을 휘젓곤 하였는데 물이 움직일 때에 맨먼저 못에 들어 가는 사람은 무슨 병이라도 다 나았던 것이다. 

그들 중에는 삼십 팔 년이나 앓고 있는 병자도 있었다.  예수께서 그 사람이 거기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또 아주 오래된 병자라는 것을 아시고는 그에게 “낫기를 원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병자는 “선생님, 그렇지만 저에겐 물이 움직여도 물에 넣어 줄 사람이 없읍니다. 그래서 저 혼자 가는 동안에 딴 사람이 먼저 못에 들어 갑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께서 “일어나 요를 걷어 들고 걸어 가거라” 하시자 그 사람은 어느새 병이 나아서 요를 걷어 들고 걸어 갔다.” – 요한복음 5 : 2 – 9 

세모녀

그들은 왜 미안하고 죄송하다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등졌을까요? 살아있는 자들 가운데 그들이 남긴 그 미안함과 죄송함을 받을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염치없는 사회에게 던진 이들의 염치있는 마지막 인사를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까요?  성서의 눈높이로 고민해야 마땅한 신앙인들은 이런 사회적 물음에 어떻게 답해야 할까요? 

그런 질문들을 안고 예수가 행한 기적 이야기들의 주인공들을 찾아가 보도록 합니다. 

예수가  행한 기적으로 치유를 받은 사람들이 앓았던 병명들을 보면 이들의 당시 삶을 알 수 있습니다.  더러운 귀신이 들린자, 혈루증 환자, 눈 멀고, 귀가 들리지 않는 병들은 당시 사회에서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생긴 병이기 때문에 이런 환자들은 일반 사람들과 어울려 살 수 없었습니다. 반사회적인 병인 동시에 종교적으로 보호를 받기는 커녕 종교의 이름으로 철저히 버려질 수 밖에 없는 병이었습니다. 문제는 그 병이 아니라 그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철저히 버림받는 위치에 놓여 있었다는 말입니다. 

기본적으로 경제활동을 할 수 있는 자격과 환경을 박탈당한 사람들이므로 경제적은 측면으로 보자면 사회의 가장 밑바닥 사람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더더우기 문둥병자에 이르면 주검 곧 시체보다도 못한 대접을 받는 환자들이었습니다. 문둥병을 고쳤다는 말은 거의 죽음에서 부활했다는 말과 같은 말이었습니다. 

예수가 치유 기적을 행해 고쳐준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예수가 치유기적을 행한 사람들 가운데 그 사람의 직업이나 신분을 밟힌 기록은 한번 뿐입니다. 바로 회당장 야이로입니다.(마가복음 5 : 22 – 23,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 아래 엎드리어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회당장 야이로를 제외한  병고침을 받은 사람들의 면면들을 보면, 여인들, 아이들, 거지, 종 등의 신분을 가진 사람들 뿐입니다. 

예수 기적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더 이상 떨어질래야 떨어질 곳이 없는 사람들, 희망을 잃은 사람들, 정상적인 보통사람들과 더불어 살 수 있는 길조차 막힌 사람들이었습니다. 

바로 “미안하다”, “죄송하다”는 말을 남기기 직전의 사람들이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는 그들과 함께 했습니다. 

오늘날 “염치있는” 마지막 인사말을 가슴에 품고 희망을 잃고 사는 사람들과 함께하며 그들에게  스스로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용기와 힘을 북돋아주는 행위를 하는 사람이나 단체들을 향해 반사회적(때로는 종북)이라는 딱지를 붙이며 몰아세우는 “염치없는” 이들의 모습들을 보면서, 예수의 십자가 사건은 오늘도 여전히 진행중이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이제 예수가 무엇때문에 왜 치유 기적을 행했었는지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합리적 의심 – 천안함 프로젝트

폭풍 전야라고 하던가요.

아주 조용한 주일 오후입니다. 오늘밤부터 시작된다는 겨울 눈폭풍의 이름은  Titan이라고 한답니다. 적게는 7인치에서 많게는 12인치까지 내린다고 합니다. 기온도 뚝 떨어진다고 하고요.

전기나 물이 끊길 우려도 있다는 뉴스에 만일을 위해  휴대용 부탄가스 버너와 장작 등도 준비해 놓았답니다.

그리고 즐긴 다큐멘타리 영화 ‘천안함 프로젝트’입니다.

오늘 오전에 지인이 한번 꼭 보라는 메세지와 함께 보내준 유튜브 동영상입니다.

“합리적 의심”이 원천 봉쇄되거나 “무조건적 믿음”이 애국이나 신앙으로 치부되는 사회는  불안한 사회입니다. 왜냐하면 폭풍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공유할 수 있는 영상임으로 여기에 올립니다.

 

 

http://www.youtube.com/watch?v=SLFB2IW8Zmg#t=4438

주인공 – 기적 5

<하나님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32 

그 때 더러운 악령들린 사람 하나가 회당에 있다가 큰 소리로  “나자렛 예수님, 어찌하여 우리를 간섭하시려는 것입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읍니까? 나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거룩한 분이십니다” 하고 외쳤다.  그래서 예수께서 “입을 다물고 이 사람에게서 나가거라” 하고 꾸짖으시자  더러운 악령은 그 사람에게 발작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떠나 갔다.  이것을 보고 모두들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이것은 권위 있는 새 교훈이다. 그의 명령에는 더러운 악령들도 굴복하는구나!” 하며 서로 수군거렸다.  예수의 소문은 삽시간에 온 갈릴래아와 그 근방에 두루 퍼졌다. – 마가복음 1 : 23- 28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이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 요한복음 20 : 30 – 31 

마가의 기록에 따르면 예수가 갈릴리로 나아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주로 한 일들은 치유의 기적을 행한 것입니다. 

귀신들린자들에게서 귀신을 쫓아내고, 문둥병, 열병, 중풍 등등의 각종 질병들을 치유하는 기적을 행함으로써 “예수의 소문은 삽시간에 온 갈릴래아와 그 근방에 두루 퍼(마가 1 :28)”졌거나,  “온 동네 사람들이 문 앞에 모여 들(마가 1 : 33)”었고, “사람들은 사방에서 예수께 모여 들었(마가 1 : 45)”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심지어 “사람들이 너무 많아 예수께 가까이 데려 갈 수가 없었(마가 2 : 4)”거니와,  “예수께서는 밀어닥치는 군중을 피하시려고 제자들에게 거룻배 한 척을 준비하라고 이르(마가 3 : 9)”시기까지 하였다고 합니다. 

이렇게사람들이 예수에게로 몰려든 첫 번째 이유가 병고침의 기적을 행한데 있었다고 마가는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에 이르면 미처 기록하지 못한 기적들이 아주 많다고 합니다. 그리고 요한은 이런 치유의 기적들을 기록으로 남기는 까닭을 명확하게 정의합니다. 바로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한복음 20 : 31)”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러한 예수의 치유기적 사건에 대해 추호의 의심도 없이 하나님의 아들인 메시아가 행한 권능으로 이루어진 역사적인 사실로 믿고 있듯이, 지금으로부터 약 300여년 전까지만해도 이런 기적 사건들을 있는 그대로 믿어야만 하는 것이 기독교인들의 당연하고 마땅한 자세라고 생각했었습니다.

Pool at Bethesda

그런데 약 삼백 여년 전부터 성서학이라는 학문이 발달하면서 이런 기적 이야기들을 전하는 자료들과 성서를 분석하기 시작하였고, 그런 연구를 통해 예수의 기적이야기들은 다큐멘타리 같은 기록 영화같은 것이 아니고 이야기가 기록으로 남겨지기까지 여러 전승과정을 거쳤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일테면 똑같은 예수의 기적이야기라 할지라도 마태가 전하는 이야기와 마가의 이야기 그리고 누가가 기록한 이야기들 사이에 서로 다른 차이가 있다는 것입니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도록 하지요. 

“그런데 군중 속에는 열 두 해 동안이나 하혈증으로 앓고 있던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는 여러 의사에게 보이느라고 고생만 하고 가산마저 탕진했는데도 아무 효험도 없이 오히려 병은 점점 더 심해졌다.   그러던 차에 예수의 소문을 듣고 군중 속에 끼어 따라 가다가 뒤에서 예수의 옷에 손을 대었다.  그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병이 나으리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손을 대자마자 그 여자는 과연 출혈이 그치고 병이 나은 것을 스스로 알 수 있었다.   예수께서는 곧 자기에게서 기적의 힘이 나간 것을 아시고 돌아 서서 군중을 둘러 보시며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은 “누가 손을 대다니요? 보시다시피 이렇게 군중이 사방에서 밀어 대고 있지 않습니까?” 하고 반문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둘러 보시며 옷에 손을 댄 여자를 찾으셨다.  그 여자는 자기 몸에 일어난 일을 알았기 때문에 두려워 떨며 예수 앞에 엎드려 사실대로 말씀드렸다.  예수께서는 그 여자에게 “여인아,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병이 완전히 나았으니 안심하고 가거라” 하고 말씀하셨다.” – 마가복음 5 : 25 -34 

“마침 그 때에 열 두 해 동안이나 하혈병을 앓던 어떤 여자가 뒤로 와서 예수의 옷자락에 손을 대었다.  예수의 옷에 손을 대기만 해도 나으리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예수께서 돌아 서서 그 여자를 보시고 “안심하여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 하고 말씀하시자 그 여자는 대뜸 병이 나았다.” – 마태복음 9 : 20 -22 

혈루병자를 고치시는 예수의 기적을 전하는 마가와 마태와의 차이입니다. 기적사건을 전하는 이런 마태, 마가, 누가의 차이점들을 비교 분석하는 작업들이 일어나기 시작하면서 어떤 모습이 가장 예수가 했던 원형에 가까운 것인가를 연구하는 일이 지속되었던 것입니다. 

약 200백년간에 걸친 이런 연구들을 한군데 모아 집대성한 사람은 아프리카의 성인 슈바이쳐입니다. 그의 책 “ 예수의 생애 연구사(The Quest of the Historical Jesus)”라는 것입니다. 

슈바이처는 이 책에서 성서학자들이 예수의 기적을 바라보는 여러가지 유형들과 그 연구의 변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가 이 글에서 학문적인 연구 결과를 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님으로, 이런 연구들이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는 점을 소개드리는 것으로 줄이고요, 아주 획일적으로 이렇다하는 결론은 아니지만 대충 예수의 기적이야기들의 변천에 대한 큰 틀에서의 같은 생각들이 있다는 점만 말씀드립니다.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한 내용들을 보면 기적이야기의 주도권이 예수에게 있고, 병고침을 받은 사람들이 예수를 부를 때 ‘메시야’ 또는 ‘그리스도’라는 호칭이 사용되고, 고침을 받은 사람의 선교 이야기가 이어지고, 고침받은 사람의 신앙이 강조되는 것들 <아라이 사사꾸(荒井 獻)의 예수의 행태> 이 있습니다. 

그러나 본래 예수의 기적이야기로 가까이 시간을 돌려보면 예수는 누군가에게 요청을 받고 기적을 행하며 기적행위의 주도권을 쥐지도 않고, 메시아나 그리스도의 호칭도 없습니다. 기적 그 자체보다는 기적을 통해 고침을 받은 ‘사람’에 대한 관심이 더 크고, 고침을 받은 자의 신앙이 전제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기적을 통해 치유받은 사람들이 원래 병들기 전에 그들이 있던 곳, 곧 그들의 가족이나 고향으로 돌아가는 일이었습니다. 

이제 예수의 기적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들 곧 기적이야기의 주인공들을 만나 보도록하겠습니다. 이들을 만나보는 일이야말로 에수의 기적 이야기를 바로 이해하는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위험한 이성(理性) – 영화 변호인을 보고

영화관에서 한국영화를 본 게 언제적 일인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이민(移民)온 이후 영화관을 찾아가 한국영화를 본 일이 이번이 처음이니 아마 족히 삼십 년은  넘은 듯 합니다. 

몇 년전인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만 가까운 필라델피아 영화관에서 김기덕감독의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라는 영화를 상영한 적이 있었답니다. 그 때 그 영화를 보겠다고 계획을 세웠다가 끝내 보지 못했던 적이 있었고요. 나중에 집에서 다운 받아 보고는 김기덕감독의 영화들을 두루 찾아 보기도 했었답니다. 

아무튼 영화관에서 보는 것과 집에서 TV 모니터로 보는 맛은 좀 다르지요. 

그러다 엊그제인 월요일 밤에 마침내 영화관에서 한국영화를 보게 되었답니다. 영화 “변호인”을 필라델피아  Warrington에 있는  Regal Cinema에 가서 보고 온 것이지요.  역시 영화는 영화관에 가서 보아야 제 맛이더라고요. 

영화를 보러 가자는 제의를 두 군데 다른 모임에서 받았답니다. 한 곳은 저와 세상 보는 눈높이가 비슷한 사람들이 모인 모임이고, 다른 한 곳은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이들의 모임이었습니다. 

영화상영기간(2. 21- 2. 27 딱 일주일)이 짧아서 선택의 폭이 제한적이었다는 까닭도 있었지만, 세상보는 눈이 비교적 저와 다른 이들과 함께 영화를 보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도 있고해서 두번 째 그룹인 신앙생활을 함께하는 이들과 영화를 같이 보았답니다. 

다들 가게들을 하고 있는 처지라 문을 닫은 후 함께  저녁식사도  한 뒤에 영화를 보기로 하고, 마지막 상영시간인 9시 50분에 시작하는 것을 택했답니다.  그날 집으로 돌아온 시간이 새벽 1시 반이 넘었답니다. 

그날 함께 영화를 본 이들의 평균 연령는 거의 육십에 가깝답니다. 이틀이 지난 오늘까지 일상의 일탈에서 일어난 피로가 계속되는 나이들이랍니다. 

아무튼 함께 영화를 본 아홉 명 가운데  여섯명은 이즈음 한국의 표준어가 된 듯한 경상도 말을 쓰거나  그 곳이 고향인 분들이었고요, 저도 태생은 피난지 부산에서 났으니 그렇게 따지면 일곱이 영남이 되겠네요.  굳이 정치적인 성향이나 세상보는 눈으로 따져 보자면 저와 제 아내를 빼고는 아무래도 이른바 보수쪽(?)으로 기우는 분들이었답니다. 

모두 아이들이 거의 다 컸다는 공통점도 있겠군요. 우리 부부가 이 곳 델라웨어에서 살면서 함께하는 정말 참 좋은 한국인 이웃들이랍니다. 

그렇게 영화 변호인을 보았답니다.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길. 

나이 탓도 있고, 밤 늦은 시간 탓도 있고, 함께 타고 간 ben 운전을 맡은 이에 대한 미안함도 있고  영화 감상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지는 못했답니다. 

다만 제 생각은 이 그룹과 영화를 함께 본 일은 좋은 선택이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서적 시각으로 영화  “변호인”을 보고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제가 다른 그룹인 저와 생각이 비슷한 이들과 함께 이 영화를 보았다면 뭐 이데올로기까지 나아갈 정도의 영화가 아니니까 그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겠지만, 적어도 대한민국의 인권문제라던지, 영화의 모티브가 된 정치인 노무현이라는 인물에 대한  되씹음 등의 생각을 해 보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함께 이 영화를 본 이들의 입장에서 느낌을 찾아보려고 하니 영화의 느낌이 더욱 크게 다가왔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를 본 후 제게 크게 다가온 것은 두가지랍니다. 

주인공 송우석변호사에  대한 느낌은 이미 “느낌 아니까!” 별로 새로울 것이 없었답니다.

0영화 변호인4

두가지 중에 첫번 째는 악역을 맡은 배우들을 비롯한 조연들 곧, 검사역을 맡은 조민기배우와 고문경찰 차동영역의 곽도원배우, 판사역의 송영창배우, 사무장역의 오달수배우 등의 열연이었습니다.  그들의 연기를 보면서 “사람 일반의 적나라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답니다. 

바로 “사람들의 생각”이랄까, 또는 “이성(理性)”이라고 부르는 사람들만이 지닌 뛰어난 능력의 한계랄까, 그것을 잘 전해주는 이른바 조연들의 열연이었답니다. 

사람들이 다른 동물들과 다르게 뛰어날 수 있는 여건 중에 하나가 바로 이성(理性)이라는 것이지만 그  이성이란 것이 늘 잘못될  수가 있고, 때론 그 잘못된 이성은 짐승만도 못한 지경에까지 이르게 된다는 것을 그 조연들이 잘 표현해 주고 있었답니다. 

무릇 신앙이란 바로 이런 인간들의 이성 곧 사람들 생각에는 한계에 있다는 고백 끝에서 나오는 것이지요. 

그런데 그 신앙을 마구 짓밟는 세력들은 늘 있어왔지요. 때론 애국이라는 이름으로…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았다.”는 고문경찰 차동영의 이데올로기는 영화속 시대 상황인 1980년대가 아닌 영화를 돌리고 있는 바로 오늘 2014년에도 여전히 유효하다는 메세지를 전해 준 영화랍니다. 

두번째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 

피고 송우석을 변호하려고 그 변호인단에 이름을 올린 이들 가운데 과연 몇 명이나 “송우석의 정신”을 변호하려고 했을까? 라는 물음입니다. 그들 모두가  “변호사”라는 자신들의 직업에 대한 변호가 아닌 “송우석의 정신”을 변호했거나 그렇게 노력해 왔다면 오늘 한국사회는 정말 달라지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으로… 

모처럼 즐긴 문화생활을 돌아보며…

아버지의 88년

아주 조촐한 잔치를 마쳤답니다. 

아버님의 출판기념회 겸 어머님, 아버님의 미수연(米壽宴) 겸 막내동생 생일까지 몰아서 치룬 잔치치고는 정말 조촐한 자리였답니다. 

아버님을 생각하며 준비했고, 오늘 잔치자리에서 나눈 동영상입니다. 

이 영상은 공개해도 좋겠다는 생각으로 여러분과 함께 잔치자리를 나누는 마음으로 올립니다.

 

아바타 – 기적 4

<하나님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31 

제자들은 마침 역풍을 만나 배를 젖느라고 몹시 애를 쓰고 있었다. 이것을 보신 예수께서는 물 위를 걸어서 제자들 쪽으로 오시다가 그들 곁을 지나쳐 가시려고 하였다. 그것은 새벽 네시쯤이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물 위를 걸어 오시는 것을 보고 유령인 줄 알고 비명을 질렀다. 그를 보고 모두 겁에 질렸던 것이다. 그러자 예수께서 곧 제자들을 향하여 “나다. 겁내지 말고 안심하여라” 하시며  그들이 탄 배에 오르시자 바람이 그쳤다. 제자들은 너무나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 마가복음 6 : 48 -51 

어떤 보도를 실제로 일어난 일로 믿는다고 해서 역사적인 진실이 될 수도 없다.예를 들어 죠지 워싱톤이 실제로 은화 1달러를 포토맥 강 너머로 던졌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나는 이 이야기를 믿는 쪽을 택하겠다.  하지만 이런 나의 믿음은 실제로 그가 그랬는가, 그렇게 할 수 있었는가 없었는가의 묹제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예수가 실제로 이런 일들을 했는지에 대한 역사적인 질문도 그와 같다. 그가 그렇게 했다고 믿는 것은 실제로 그가 그렇게 했는가의 여부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역사적인 질문을 신념이나 믿음으로 풀 수는 없다. 간단히 말해 예수의 귀신축출행위나 치유행위를 제외한 권세있는 다른 행동들은 “역사적 미결 보도”로 남을 수 밖에 없다. 

비록 예수전기의 일부분인 이 이야기들이 불확실한 것임에 틀림없지만 예수에 대한 교회의 이야기 일부분으로서 이런 이야기들이 지닌 의미는 명확하다. 그 시대의 연관성을 가지고 비유적 표현들을 풍부하게 사용한 이야기들은 초대교회가 경험한 살아계신 그리스도께서 –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에게도 여전히 – 하나님의 능력을 가지고 성도들을 위험과 악에서 구하시며 광야에서 먹여 주시고 죽움에서 생명을 가져다 주시는 분임을 확실하게 전해주고 있는 것이다. – 마커스 보그(Marcus J. Borg)의 ‘예수 새로보기(Jesus! A New Vision)’에서(김기석 번역)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낳은 예수 이야기, 예수가 세례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홀연히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마태 3:16)” 내려 앉으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마태 3 :17)”라는 소리가 들렸다는 이야기, 물 위를 걸었다는 이야기, 갑자기 모습이 변하여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 마침내 예수가 부활해서 엠마오로 가는 두제자와 함께 길을 걷는 이야기 등을 읽거나 듣는 당신의 느낌은 어떤 것인지요? 

예수를 중심으로 일어났거나 행해졌던 기적 이야기들은 크게 세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답니다. 첫째는 병을 고쳐주고 귀신을 쫓아내 주는 기적들입니다. 곧 치유의 기적 유형입니다. 두번 째는 풍랑이 일어 사나운 바다를 잔잔케 한다거나 베테랑 어부들도 빈 손일 정도로 조황이 안좋은 환경에서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를 낚게 했다는 이야기, 오천명을 먹인 이야기 등 초자연적인 기적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제가 오늘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든 여러 예들처럼 하나님 곧 신이 나타나는 기적입니다. 신의 현현(顯現) 기적 유형입니다. 영어로는Epiphany라고 하는 신의 현현은 신이 직접 나타나 사람들의 오감으로 느낄 수 있게 나타나는 현상을 발합니다. Incarnation(화신化身)이라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 예수 그 자체가 신의 현현이라는 말할 때 이 말을 사용하곤 하지요.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꼭 알고 넘어가야할 것이 있습니다.

incarnation

아바타라는 유명한 영화가 있었지요. 흥행기록을 세운 3D 영화로 유명한 영화 말입니다. 바로 그 아바타(Avatar)라는 말이 힌두교에서 쓰는 아바타라(Avatāra)의 영어식 표현인데요, 그 뜻이 신의 화신(神의 化身, incarnation of God)이랍니다. 신이 사람세계에 드러난 모습을 아바타라고 한다는 말이지요. 

힌두교에서는  사람들이  진리를 잊고  악과 부정(不正)에 빠져있을 때,  진리를 가르쳐 악으로부터 사람들을  구원하고 정의를 회복하는 일을 하기 위해 신(브라만)의 대리자로서 아바타가 나타난다고 한답니다. 

그런데 이런 신의 화신은 불교에서도 나타난답니다. 이른바 불교의 삼신설(三身說)이 그것입니다. 삼신이란 첫째  법신(法身)  둘째 보신(報身)  셋째가 바로 화신(化身)인데, 화신이란  진리를  이미 깨달은 붓다가  일반 사람(중생) 모습으로 나타나서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펴는 일을 하는 모습을 일컫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의 현현 곧 신이 나타나는 기적은 딱히 예수에게만 나타나는 이야기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비단 예를 든 고등종교 뿐만이 아니라 원시종교에서도 신의 현현 기적 이야기들은 넘쳐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신이 나타나는 기적을 인정하고 믿되, 거기 매몰되어서는 안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기적 이야기를 하면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문제랍니다. 

이런 신 현현 기적에 대한 믿음을 신앙의 전제로 삼는 믿음만으로는 참다운 예수의 모습, 그리스도의 모습 마침내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만나기 힘들다는 말입니다. 

어쩌면 이런 기적에 대한 믿음은 신앙의 전제가 아니라 신앙의 깊은 곳에 이르렀을 때 저절로 거저 따라오는 것이라고  생각한답니다. 

그런 뜻에서 제가 기적이야기를 하면서 중점적으로 다루려고 하는 것은 바로 첫번 째 기적 유형인 치유기적에 대한 것이랍니다. 

자! 예수를 중심으로 일어났던 세 가지 기적의 유형들 가운데 두번째,  세번째인 초자연적인 기적과 신의 현현 기적이야기는 이 정도로 접고 치유 기적으로 넘어갑니다.

간절함 – 기적 3

<하나님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 30

악령의 발작으로 그 아이는 불 속에 뛰어 들기도 하고 물 속에 빠지기도 하였읍니다. 그래서 여러 번 죽을 뻔하였읍니다. 선생님께서 하실 수 있다면 자비를 베푸셔서 저희를 도와 주십시오.”  이 말에 예수께서 “‘할 수만 있다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사람에게는 안 되는 일이 없다” 하시자 아이 아버지는 큰 소리로 “저는 믿습니다. 그러나 제 믿음이 부족하다면 도와 주십시오” 하고 청하였다. – 마가복음 9 : 22 – 24

개인적으로 정신을 집중해서 처리해야 할 들이 있어 한 주간 글쓰기를 쉬었답니다. 게다가 하루 걸러 내리는 눈이  일상의 시간들을 마구 헝클어뜨린 탓도 한 몫했답니다. 아무튼 다시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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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정월 대보름도 지나갔습니다. 제가 어릴 때엔 해마다 음력 정초이면 시장바닥이나 역광장이나  정류장 부근에 자리를 깔고 호객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로 그해의 토정비결을 봐주는 사람이었습니다.

토정 이지함은 이상한 행동을 많이 했고  기지, 예언, 술수에 관한 일화를  많이 남긴 조선시대(1517-1578) 인물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점보는 책 토정비결을 쓴 점술가 정도로 토정선생을 생각하지만, 그는 포천과 아산 현감을 지낸 목민관이었습니다.

특히 그가 아산현감으로 있을 때 걸인청(乞人廳)을 세워 관내에 있는 굶주린 백성, 아픈 백성, 노인들을 돌본 일들에서 이즈음 사회적 화두인 “복지”를 실현한 선각자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가 포천, 아산 두 고을 현감으로 있으면서 나라에 올린 상소문을 통해서는  당시 백성들의 어려움과 실상을 있는 그대로 소상히 적어 올리며 문제의 해결을 청원하는 백성 사랑하는 관리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토정비결이라는 비결서를 그가 썻다는 것이 역사적인 사실인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합니다만 후대 사람들이 만든 비결서에 토정 행했던 여러 기행의 힘을 빌리고자 그의 이름을 차용했다는 의견이 우세하답니다.

아무튼 알수없는 내일에 대한 길흉의 점괘를 바라는 사람들의 마음, 또는 행운이나 길운을 꿈꾸며  기적을 바라는 사람들의 심리에 대해 토정이 했다는 말입니다.

“내가 뭐 하늘의 이치를 알아서 사람들의 신수를 말하겠소. 하두 졸라서 보아준 게지. 또 그네들은 내가 신수를 안보아 주면 마음에 안정을 얻지 못하고 다른 데 가서라도 기어이 신수를 보아야만 마음 편해질 것이니, 내나름대로 그들 사정을 들어 이리 저리 이야기하여 준 것 뿐이오.”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이 했다고 전해오는 말이랍니다.

유대 역사가 요세푸스와 함께  예수의 기록을 자신이 쓴 역사책에 남긴 사람으로 알려진 로마역사가 타키투스(Publius Cornelius Tacitus, 기원후56년 – 117년)는 그의 책 <역사>에서 로마황제 베스파시아누스가 기적을 행한 일에 대해 이렇게 기록에 남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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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드리아 백성 가운데 한 사람이 있었는데, 일찍이 시력을 잃어버린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런데 그가 베스파시아누스 앞에 엎드려 한숨을 쉬며 자신의 눈을 고쳐줄 것을 간청했다.  – 중략 – 그가 청한 것은 베스파시아누스의 침을 자기의 뺨과 눈거풀에 문질러 달라는 것이었다. 또 어떤 사람은 손에 문제가 있었는데, 이 사람도 같은 신(세라피스 신)의 명령에 따라 베스파시아누스를 찾아와서 자신의 손을 발로 밟아 달라고 요청했다. 처음에 베스파시아누스는 이런 일들을 우습게 생각하고 거절했다. 그러나 병자들이 집요하게 매달리자 그의 마음도 흔들렸다.  – 중략 – 환자들의 간절한 바람도 있고 아부꾼들의 환호도 있어 용기를 가지고 시도해 보기로 했다. – 중략 –베스파시아누스는 자신의 행운으로 모든 것이 가능하며, 더 이상 의심할 것이 없다고 판다하여 미소를 지으면서, 주변에 서서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눈 앞에 섰다. 문제의 그 손은 금방 정상으로 돌와왔고, 앞을 못보던 사람에게도 새로이 광명을 찾아왔다. 믿기지 않는 이야기를 해서는 이들을 볼 수 없는 요즘 같은 시기에도 그 때 그 사건을 목격했던 사람들은 이 두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토정 이지함이나 로마 베스파시아누스황제 두 이야기의 공통점은 바로 비결을 받고, 기적을 받은 사람들이 간절히 바라는 어떤 기원(祈願)과 그것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사람들의 확고한 믿음이 먼저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 이야기로 들어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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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보다 먼저 광야에서 ‘회개와 세례’를 선포했던 요한이나, 당시 갈릴리를 근거로 해서 일어났던 갈릴리 유다의 반로마 봉기에 많은 유대인들이 함께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금만 깊히 생각해 보면 세례요한을 찾아 나섰거나 갈릴리 유다와 함께 반로마 봉기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함께 할만한 여건”들을 갖추고 있던 사람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세례요한을 찾아가 세례를 받고 싶거나, 반로마 항쟁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을지라도, 그 길이 원천 봉쇄된 처지로 살던 사람들도 있었다는 말입니다.

바로 나병환자, 귀신 들린 자, 간질 환자 등 각종 병을 앓고 있던 사람들이나 귀먹고 눈이 멀었거나 신체 이상이 있는 장애자들이 바로 그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의지와는 아무 관계없이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살아야 했었고, 그것이 종교적으로 정당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사회적 규범이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기원 곧 소망은 병이 낫고, 장애로 부터 해방되어 자신들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 정상인으로서 남들처럼 사회생활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그들의 꿈과 소망을 이루어 줄 당시의 의술(醫術)은 그들이 기댈 곳이 못되었습니다. 값비싼 의약품들과 의술은 사회 상층부에 속하는 이들의 몫이었으며, 그들에게는 꿈도 꾸지 못할 먼 곳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기댈 곳은 오직 ‘기적’뿐 이었습니다.

예수는 그런 이들을 향해 나아간 것이고, 또한 그들이 찾은 이가 바로 예수였던 것입니다.

이제 예수가 행했던 기적들은 어떤 것들이 있었고, 그 기적을 본 사람, 베품을 받은 사람, 전해들은 이들의 반응들은 어떠했으며, 기적을 행한 후 예수가 보인 모습들을 두루 훑어 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