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으로

그래도 설마? 하는 마음이 깊었었는데 그예 사단이 나고 말았다. 한 점 부끄럼 없이 탐욕스런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똘똘 뭉친 기득권 세력들이 제 놈들 모습 쏙 빼어 닮아 완장 채워 내세운 윤석열이 대한민국 대통이 되었단다.

잘 싸운 듯 한데, 딱 한 치 모자라 칠 십 년 빌어 온 간절함을 이루지 못했다. 거의 다 와서 딱 한 치 앞에서라니.

또 한 번 한참을 뒷걸음질 칠 것이 명약관화(明若觀火)하여 답답함이 밀려오긴 한다만, 무릇 역사가 다 그렇게 조금씩 조금씩 느린 걸음으로 사람사는 세상 또는 하나님나라로 가까이 다가가고 있다는 내 믿음에 이르면 또 참을 만한 일이다.

다만, 한반도 역사를 등에 걸머지고 오늘을 절실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받아 드렸던 이들이 아파하며 흘릴 눈물을 생각하니 그저 답답할 뿐이다.

솔직히 떠나 사는 내가 뱉는 이 말들은 모두 그저 사치에 불과하다. 내가 기껏 마주 할 앞으로의 일들이란 한반도의 위기를 전하는 신문을 들고 올 내 가게 손님들 또는 부끄러운 대한민국 뉴스에 대해 묻는 손님들을 만난 수도 있겠다는 생각과 때론 인근 대도시 한인 마켓 앞에서 피켓 시위를 하는 내 모습을 상정하는 것 뿐이다.

그러나 그 땅에서 또 다시 치열하게 삶을 깍아내며 살아가야 할 이들을 생각하면 그저 아플 뿐이다.

참 아프다.

허나, 딱 한 치 앞까지 이르기에 칠 십 년 걸어 온 공동체이고 보면 조금 주춤해진 모습이라도 주눅들 일은 결코 아니다.

무릇 민(民)이 부서지면서 깨어 일어나 제 얼 바로 세워 이어가는게 바로 역사다.

오늘의 아픔으로.

  1. 9. 22

간절함

우리 내외와 내 아이들은 사뭇 다르다. 그 중 하나는 반려동물에 대한 태도다. 우리 내외는 이제껏 반려동물을 키워 보겠다는 생각을 단 한번도 해 본 적이 없다.

더하여 내 경우엔 직업상 쌓인 이력 탓이기도 하겠지만 개나 고양이는 딱 질색이다. 검정색 겨울 울 코트에 개나 고양이 털을 잔뜩 묻혀온 세탁물을 받아 본 세탁업자들 이라면 나를 충분히 이해하리라.

우리 부부와 달리 아들 내외는 고양이를 키우고, 딸 내외는 개를 키운다. 어찌하리, 아이들이 키우는 개와 고양이는 까닭을 묻지 않고 그냥 내 새끼가 된다.

허나 아이들의 개나 고양이는 내 속내를 이미 꿰뚫고, 제 놈들을 한 다리 걸러 대하고 있음을 익히 알고 있는 듯 하다.

딸 내외는 아픈 경험을 한 유기견을 데려 다 키운다. 녀석은 딸과 사위, 특히 사위 곁을 조금도 떨어져 있지 않으려 한다.

모처럼 딸과 사위 그리고 수키(개 이름)가 찾아와 이틀 동안 함께 한다.

오늘 낮에 아내와 사위와 딸은 교회 주일 예배를 드리려 가고, 수키와 내가 단 둘이 집에 머문 약 한 시간 반은 내겐 정말 긴 시간이었다.

수키 – 녀석은 나를 전혀 신뢰하지 않았다. 녀석은 울음과 짖음을 끊지 않았다. 안절부절 어찌할 바를 모른 쪽은 나였다.

한 시간 여 녀석을 달래다 지친 내가 택했던 방법은 녀석과 함께 창가에 앉아 아이들을 기다리는 일이었다.

창 밖을 바라보는 수키 녀석의 간절함 이라니! 나는 언제 그렇게 간절해 본 적이 있었던가?

아내와 아이들이 돌아와 수키의 울음과 짖음이 멈춘 후, 나는 두 어 시간 삽질을 했다. 지난 해 보다 한층 넓어진 텃밭에 씨를 뿌리기 위해.

이 나이에 수키만큼 만이라도 무언가에 간절해 보고 싶다는 생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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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

세상 걱정 모두 내려놓고 그저 내 맘과 몸이 가는 대로 보낸 하루야 말로 참 안식일(安息日)이다.  내겐 오늘이 그랬다.

이른 아침 지난 뉴스들을 훑다가 보게 된 부고(訃告)들. 솔직히 덤덤하게 받아들일 연세 즈음에 떠나신 이들이라 그 이들의 지난 삶을 잠시 추억하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한쪽은 과할 정도로 뉴스 량이 많고 다른 한 쪽은 조촐하 다만, 나는 조촐한 쪽에 꽂혀 그를 추억한다.

이어령 선생은 나름 한 시대에 이름 한번 떨친 이었으나 내겐 별로 큰 의미 없는 이었으므로 그저 뉴스일 뿐, 서광선 선생의 부음은 아주 잠시라도 삶과 신과 이웃을 다시 생각하게 해 주었다.

서광선 선생은 “믿음이란 불안 없는 삶을 보장하지 않는다. 우리가 참으로 하느님을 태초의 창조의 힘으로 생각하고, 관계성의 힘으로 생각한다면, 창조의 보전은 인간들 사랑의 힘에 달려 있는 것이다.”라고 선언한 도로테 죌레(Dorothee Sölle)를 알게 해 주신 이기 때문이다.

제 아무리 장수시대라도 때 되면 다 떠나게 마련이다.

바람 소리 거세도 이미 매운 맛 잃은 봄바람이다. 애초 오늘의 계획대로 뒤뜰 텃밭을 갈아 일구다. 모처럼 삽질에 ‘흠흠’ 콧소리 내며 내가 봄이 된다. 화단엔 움 돋는 화초들과 이미 만개한 이른 봄꽃들이 게으른 내 어수선함을 비웃는 듯하다만 내 흥이 돋는데 제깟 것들이 뭔 대수랴!

오후에 참 좋은 벗이자 후배가 찾아와 쉬는 날 담소(談笑)를 즐겼다. 그는 내가 아는 한, 내가 만나는  발 딛고 서 있는 삶 가운데서 가장 성서적 삶을 살려고 애쓰는 친구다. 그래 난 늘 그가 참 좋다.

무엇보다 그가 꿈꾸는 세상이 조금씩 조금씩 그저 느낄 수 있을 만큼은 누렸으면 하는 생각으로 그를 응원한다. 필라 우리센터(https://wooricenterpa.org/ )는 그의 꿈이 녹아 싹 트고 있는 꿈이다.

담소 끝에 한국 선거 걱정을 하는 그에게 내가 던진 말.

“걱정 마시게! 지난 칠십 년 조금씩 조금씩 스스로 일깨우며 살아 온 시민들이 있는데…>

무릇 안식일은 걱정조차 없어야 한다.

아무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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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기도

연 이틀 모질게 매운 바람 불다 그치니 내 집에 봄이 내려 앉았다. 봄 준비 한답시고 뒤뜰로 나선 내게 활짝 핀 크로커스 꽃들이 웃으며 말을 건냈다. “쯔쯔쯔 이 게으른 친구야! 난 벌써 와서 기다렸구만…” 허나 내게도 늘 핑계는 있는 법. “예끼! 비웃지 말어! 겨우내 집안 단장하느냐고 나도 몹시 바뻣다고. 네 놈 웃음을 반갑게 맞는 걸 고맙게 생각해!”

그렇게 봄이 온다.

오늘 아침 집안 정리를 하다가 발견한 작은 상자는 눈에 익지 않은 것이었다. 상자를 여니 돌아가신 장모 물건들이 담겨 있었다. 그 물건들 중엔 돌돌 말린 신문 쪼가리들이 담긴 백이 하나 있었다. 그 신문 쪼가리들을 펼치며 터져 나온 말 “에고, 우리 장모님”

어느새 스무 해가 빠르게 지나 간 일이다. 그 무렵에 나는 지역 한인사회 신문에 글을 열심히 썼고 한 때는 신문을 만들기도 했었다. 다 ‘지나간 일이다’라는 생각으로 내가 모아두었던 흔적들을 모두 없앴던 일도 벌써 오래 전이다. 하여 이젠 거의 기억에도 없는 일이 되었다.

허나 장모는 그 당시에 내가 썼던 글들을 오려 고이 간직해 두셨던 것이다. 장모 남기신 물건들도 이젠 없다 싶었는데 상자 하나 남아 잠시 옛 생각에 빠져 본 아침이었다.

2002년 월드컵 경기 중계를 보며 썼던 글을 보며 웃었다. 그 때만 하여도 내가 참 젊었었구나 하는  생각으로.

 

<중계 카메라가 비추어 주는 곳곳마다 온통 붉은 바다였다. 열 두 번 째 선수라는 응원단 곧 red devils의 상징색이란다. 더하여 그들의 가슴에는 ‘빨갱이가 되자(Be the reds) 구호조차 선명하였다. 이 어찜이뇨? 이 넉넉함이 어디서 온 것이더뇨?

일개 축구응원단의 색깔을 비약한다 말하지 말라. 지난 세기, 우리에게 적(赤)은 오직 적(敵)이었으며 뛰어넘지 못할 벽이었다. – 그렇게 반 백년을 살아왔다. – 그럼에도 아직도 툭하면 좌파입네 우파입네 손가락질로 때리고 싸우며 저 함성 뿐인 민중을 속이는 정치꾼, 오직 양시(兩是)나 양비(兩非) 뿐인 사이비 언론들 그 냄새나는 구덩이에서 쏟아 터져 나오는 저 붉은 빛의 함성, 붉은 파도 이 어찌 신(神)의 일하심 아니겠나!>

이 글의 끝을 나는 이리 맺었었다.

<비노니 언론이여! 실축(失蹴)한 젊은이에게 돌 던지지 말지어다. 분단의 세월, 그대들이 내지른 고의적 실축은 천년이 가도 남을지니.>

이즈음 한국 언론들을 보면  ‘양비양시’도 아니고 그저 장사꾼처럼 보인다. 실축도 아니고 고의적 실축 뿐.

지금 내가 사는 곳이나 그저 생각 속에 남은 한국이나 봄이 참 봄 다운 봄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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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

내가 대통령 선거 투표를 처음 해 본 때는 2000년도이다. Al Gore와 George W. Bush가 붙었던 그 해 선거에서 나는 아시안계 정치 참여단체인 80-20 Initiative의 이사자격으로 Al Gore를 위한 선거 운동도 했었다.

한국에서는 내가 투표권을 부여 받을 나이부터 이민을 올 때까지 대통령 선거에 참여할 수 없었다. 대통령을 체육관에서 뽑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이민 온 이후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마음을 완전히 내려놓기 까지는 제법 시간이 걸렸었다. 그러다 맘먹고 시민권을 갖고 뒤늦게 첫 대통령 선거 경험을 한 것이다.

나이 육십이 넘을 무렵에 품은 꿈이 하나 있었다. 예순 다섯이 되면 가능한 이중 국적을 얻어 한국 대통령 선거도 한 번 해 보아야겠다는 꿈이었다. 막상 그 나이에 이르자 나는 망설였다. 어차피 다시 돌아 가 누울 한 뼘의 땅도 없는 처지이고, 돌아가 살 마음도 없고, 내 아이들도 돌아갈 가능성이 거의 전무한데 그 꿈이 가당키나 한 것이냐? 하는 물음 앞에 답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여 그 꿈을 접은 지도 시간이 꽤 흘렀다.

비록 권리는 없으나 관심마저 끊을 수는 없는 일이다. 법적 지위로야 어찌되었던 나는 근본이 그저 한국인이므로.

그렇게 보게 된 한국 대통령 후보 토론이었다.

나는 진보니 보수니 하는 가름이나 좌나 우를 나누는 일은 그리 마뜩찮게 여기는 편이다. 무엇보다 내가 선 자리를 매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이 들어 갈수록 그 자리매김이 힘든 일은 점점 많아진다. 다만 그 양단의 극에 다른 이야기들은 거의 듣지도 않거니와 그런 주장을 펴는 사람조차 피하는 편이다.

내가 유일하게 즐기는 페북을 통해 오래 전 어렸을 때 친구들의 소식들을 힐끔거리론 하지만, 친구 맺기를 거의 하지 않는 까닭은 나와 세상보는 생각이 이미 너무 멀리 떨어진 친구들과 공연히 어색한 관계를 잇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그저 옛 추억으로 반가움을 되새기고 말 뿐.

이젠 칠순잔치 소식들을 올리는 친구들과 내가 서로 결코 꺾이지 않을 고집스런 생각을 나누며 시간을 허비 할 순 없는 나이이기 때문이다.

민주적 사회에서 선거란 개인이나 이런 저런 각종 이익, 이해단체들이 자신이나 속한 단체들의 이해관계에 맞는 대표자를 선택하는 과정이다. 하여 자기 주장도 펴고, 아까운 돈과 시간을 보태기도 하고, 속한 공동체의 뜻을 하나로 묶어 내는 일도 하는 법이다.

문제는 대표자로 나서는 후보자들이나 그를 내세우는 정치집단과 표를 행사하는 개개 유권자나 각종 이해 단체들 사이에 난무하는 거짓과 사기질들이다.

그 거짓과 사기질을 잘 가리는 유권자들이 표를 제대로 행사하는 사회가 민주적으로 앞서 나가는 법일 터이고.

그렇게 든 몇 가지 생각들.

우선 누가 뭐라고 떠들어도 대한민국은 정말 짧은 시간에 너무나 빨리 좋은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첫째이다. 그 생각의 까닭은 단순하다. 내가 비록 투표권은 행사하지 못했지만 처음 투표권을 가졌던 1970년 대초만 하여도 이편 저편의 세가 99.9대 0.1이었다. 그것이 조금씩 조금씩 바뀌어 이젠 거의 51대 49 다툼이 되었으니 참 많이 바뀌었다. 그 다툼의 내용이야 어떠하든 어느 한 쪽이 일방적이 아니라는 것만 하여도 크게 나아진 일 아니겠나? 더하여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여건임도 불구하고.

둘째는 사람의 생각이나 모습이 바뀌기는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심상정과 안철수를 보며 가져 본 생각이다.

세째는 사람살이 발전해 나아가는 방향에는 언제나 맞바람이 불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윤석열을 보며 든 생각이다. 그를 보며 내가 공연히 부끄러워진다. 허나 역풍으로 하여 사람살이 좀 더 나은 세상으로 향하는 힘이 더욱 거세진 역사도 종종 겪어온 일이다.

오래 전 0.1이었던 숫자가 이번 선거에서 51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면 오래 또아리 틀었던 양 극단(極端)들이 모두 한 칸 씩 밀려나 사라지는 역사가 일지 않을까?

과메기

친구 덕에 말로만 듣던 과메기 맛을 보았다. 과메기란 놈을 본 것도 처음이었다. 과메기라는 말을 들어 본 지도 그리 오래 되지 않는다. 내게 과메기 맛을 보게해 준 친구 역시 그의 지인에게서 선물을 받게 되어 처음 마주하게 된 음식이란다. 우리들이 즐겨 먹던 건조 생선으로는 오징어, 굴비, 북어, 양미리 등이었을 뿐 한국에서 살 때 과메기란 음식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기는 서울내기들인 친구나 나나 마찬가지였다.

과메기 뿐만 아니라 친구 아내는 생태찌개, 김치 찜, 삼겹살 수육 등 맛깔스런 음식들로 한 상을 차려 내어 우리 부부가 호사를 누린 어제 저녁이었다. 친구는 그가 담근 매실주를 따라주며 말했다. “이게 뒤끝이 참 깨끗해요. 맘껏 마셔도 내일 아침 거뜬할 겝니다.” 그의 말은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실로 간만에 권커니 잣커니 하며 마신 술자리였는데 오늘 아침 맞이는 정말 가뿐했다.

엊그제 친구를 만난 것은 거의 삼년 만 이었다. 비록 가까운 거리에 떨어져 살지만 코로나 탓도 있고 그저 무심히 그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나는 먼저 인사 치레를 건넸다. “아이고 날 잡아 오랜만에 한 잔 합시다.” 이어진 그의 응답이었다.”아이 뭔 날을 잡아요? 그냥 오늘 하면 되겠구만!”

그렇게 마련한 어제 저녁 자리였다.

서로 못 본 사이에 그는 이사를 했다. 그의 새집은 그의 농장을 한 눈에 조망하는 자리에 작고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친구 내외의 노년을 보낼 집으론 정말 안성맞춤이었다. 일찌감치 노년을 즐길 준비를 마친 그가 크게 부러운 저녁이었다. 근사한 저녁상과 매실주 반주에 대한 감사는 부러움의 크기보다 훨씬 컸다.

길고양이 두 마리를 보살펴 키우는 재미도 듣고, 구십 대 쇠약해지신 그의 어머니와 내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고, 아이들 소식들도 나누고, 우리들의 노후에 대한 그저 쓰잘데없는 걱정도 나누며 적당히 오르는 취기를 즐긴 저녁이었다.

어쩌면 내게 과메기는 어제 밤이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른다. 내겐 낯 선 음식이기도 하거니와 구태여 특별한 음식을 찾아 나서지는 않는 내 성정 탓으로 보아 그런 생각이 든다.

다만 과메기 없이도 숙취 없는 매실주 없이도, 그저 참 좋은 친구들과 이따금씩이라도 얼굴 마주 하고 여유로운 담소를 나누는 시간들을 즐길 기회를 누렸으면 좋겠다.

친구내외에게 고마움을.

섣달 그믐, 2022

때때로 일기예보는 참 정확하다. 아침에 눈을 뜨니 일기예보대로 눈이 하얗게 쌓였다. 쌓인 눈 위로 쌀가루 같은 눈발이 쉬지 않고 있다.

곧 설날이란다. 오늘의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그저 하루일 뿐이다만, 아득한 그 시절 섣달 그믐이면 어머니는 밤새 불린 쌀 한 말이 담긴 커다란 양푼(그땐 ‘다라이’라했던가?)을 목이 휘어질 듯 이고 방앗간으로 향하셨다. 나는 그 뒤를 졸래졸래 따르고.

덜컹덜컹 피댓줄 돌아가는 소리와 찜통에서 나오는 허연 김들이 가득한 방앗간  모습이 선하게 다가온다. 어머니가 잠시 목을 푸는 사이에 밤새 불린 쌀은 하얀 가루가 되어 커다란 사각 시루떡이 되고, 절구판을 거쳐 길고 따끈한 흰 가래떡으로 변했다.

어머니는 다시 목을 꼿꼿이 세우시고 그 무거웠을 가래떡 양푼을 이고 집을 향해 큰 걸음을 보채셨다. 나는 어머니가 손에 쥐어 준 따끈한 가래 떡을 양손에 쥐고 한입 베어 물며 어머니를 따라 총총 걸음을 걸었었다.

그래! 아주 아주 오래 전 일이다.

눈 내리는 오늘 아침 바람은 차고 매웠다. 눈을 치우고 가게로 나가려다가 포기하고 눈 그치기를 기다렸다. 이 게으름은 다 내가 나이든 탓이다.

문득 눈에 들어 온 작은 새 한 마리. 카메라를 찾아 들고 새와 함께 한참을 숨바꼭질 놀이를 했다. 카메라 셧터를 누르는 순간, 새는 어찌 그리 내 손놀림을 빨리도 알아채지는 푸드득 날아 자리 옮기기를 여러 번 하였다.  나는 놀이였는데 작은 새는 삶을 위한 몸부림 친 노릇이었는지도 모른다.

열 두시가 다 되어서야 눈이 멎었다.

추위를 이기노라 옷으로 몸을 두 배나 불리우고 드라이브웨이를 덮은 눈을 치웠다. 삽질이 이젠 버겁다는 생각이 든 것은 몇 해 전 일이다만, 그래도 ‘운동 삼아’라는 생각으로 snow blower를 장만하는 일은 매해 미루고 있었는데 이젠 ‘때가 되었나?’ 싶게 눈 치우는 일이 제법 고되다.

거의 다 마치었다 싶을 때가 가장 힘든 법이라고 온 몸에 땀이 흥건히 배이고 숨도 거칠어질 즈음 앞집 네이든(Nathan)이 성큼성큼 내게 다가 오더니만 “제가 도와 드립죠” 말을 건넸다. 그의 손에 들린 삽은 족히 내 삽 크기의 두 배는 되었다.

종종 친구처럼 이야기를 건네는 유태계 네이든은 사십대 중반 쯤(내가 나이를 물어본 적은 없으니…)이다.

그 덕에 쉽게 눈 치우는 일을 마친 후, “내가 탈진할 무렵에 도와주어 정말 고맙소, 눈 치울 때면 늘 그렇듯 마지막 조금 남았을 때 정말 힘든데… 정말 고맙소.”라고 던진 내 인사에 그가 보낸 답이 내 다리에 남은 힘을 쪽 빼놓았다.

“뭘요! 그저 아들처럼 생각하세요!.”

그랬었다. 네이든이 보기에 나는 그저 작고 초라한 노인이었다. 눈 치우는 일조차 버거운.

나는 사십대 사내를 친구로 생각하며 살고 있었고.

나를 깨닫는 순간이 바로 신(神)을 만나는 순간이라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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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마…

문득 생각난 박상원 선생이 떠나신 지도 이미 여러 해가 지났다. 지나간 모든 시간들이 바로 엊그제 처럼 느끼지는 것은 나이든 탓일게다.

한 동안 같은 마을에서 살았던 박상원 선생은 조금 외로운 분이셨다. 얼핏 날 선 듯  날카로워 보이는 인상이 한 몫 한 탓이었기도 하지만, 그의 환경이 그리 만든 연유도 있었다.

그는 나보다 거의 한 세대 나이차를 이를 만큼 까마득한 대학 선배였는데 나를 늘 ‘영근씨’라 불렀었다. 아마도 다 그의 외로움 탓이었을 게다.

그는 일본 제국주의 시절 미국에서 무장 독립투쟁의 꿈을 키웠던 우성(又醒) 박용만(朴容萬)선생의 장조카였다. 한 때 우남(雩南) 이승만(李承晩)의 의형제이자 열성 지지자였던 박용만선생이 이승만의 정치적 천적이 된 이후 그의 자손들이 겪어 낸 이야기들을 나는 박상원 선생을 통해 많이 들을 수 있었다. 김대중대통령 시절 우성 박용만 선생께 추서된 훈장을 가족 대표로 받고 돌아 왔던 날, 상기된 모습의 박선생은 어린 아이 같았었다.

그는 은퇴 후 우리 동네를 떠나 따님이 사는 코네티컷으로 이주하였다. 이주 후에도 이따금 서로 간 전화 안부는 이어졌었다.

아이고, 세어보니 벌써 십 오년이 지난 저 쪽 세월이야기가 되었다. 그와의 마지막 통화가.

그가 노환으로 앓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어느 날, 그의 전화를 받았었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카랑카랑 쇳소리가 났었다.

“아니, 영근씨! 어째 이런 일이… 그런 쥐새끼가 한나라의 대통령이 되다니! 아니 5,6,7십년대 건설 노가다판에서 출세했다는 것은 바로 부정 부패 비리에 쩔었다는 이야긴데…그런 사기꾼이 어떻게 나라의 대통령이…”

그의 분노는 한동안 이어졌었다. 이명박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직후 그 무렵 일이었다.

시간이 흘러 박근혜가 대통령이 되었다는 뉴스를 보면서 나는 박상원 선생을 생각하며 혀를 찼었다. “쯔쯧, 박선생님 먼저 잘 가셨지 이 꼴 안보고…. 이 꼴 보셨으면 또 속 끓이며 전화 하셨을텐데…”

이즈음 한국뉴스를 보며 자꾸 돌아가신 박상원 선생이 떠오른다.

‘설마…’하는 마음이 크게 앞서기는 한다만, ‘설마…’하는 염려가 쉽게 가시지도 않는다.

문과 무를 겸비했던 <문무쌍전(文武雙全)>박용만선생이 역사의 그늘로 사라졌듯 지난 백 수십년 사이 아쉽게 저물어 간 뜻들이 얼마나 많을까?

이즈음 답답한 한국 뉴스들을 훑어보다 떠오른 박상원 선생.

무릇 한(恨)을 품고 살았던 우리들의 선대들이 비관적인 삶은 살지는 결코 않았으므로.

설마 이명박에 박근혜를 더해  수십 년 도둑질에 이골 난 놈들이 채워 준 완장 찬 텅 빈 머리 무당까지…

그리 부끄러운 일이야….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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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성 박용만에 대한 글보기

사돈

캘리포니아 사돈댁에서 귀한 선물을 보내 주셨다. 손수 키워 거두시고 잘 말린 먹음직스런 대추를 한아름 보내 주셨다. 예상치 않던 일이라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의 크기가 꽤 컸다.

누이들 집에도 나누어 보내고, 마침 찾아 온 내 참 좋은 벗에게 조금 덜어 주었건만  우리 내외에겐 과할 정도로 남은 많은 양이었다.

대추차도 끓여 놓고, 대추 꿀차도 절여 놓았다. 사돈 덕에 올 겨울 감기 걱정은 내려놓아도 좋을 듯하다. 대추 넉넉히 넣은 약밥 만들기는 뒤로 미루어 두었다.

사돈사이 –  꽤 오랜 시간 내겐 어머니와 아버지와 장모와 장인 사이를 일컽는 말이었다.

나는 일남 삼녀 외아들, 아내는 일녀 이남 맏딸. 장인과 장모, 아버지와 어머니, 그렇게 사돈 내외는 이 미국 땅에서 기십년을 한 동네에서 살았었다. 다 지나간 이야기다만.

세월은 어느 사이에 나와 아내를 사돈 사이의 한 축으로 만들었다. 사돈 댁도 마찬가지일 터.

대추 꽃은 그냥 피고 지는 법 없이 열매를 반드시 맺는다고 한다지.

눈내리는 늦은 밤, 대추차 한잔 앞에 놓고 비나리 한마당.

‘그저 우리 아이들 건강하고 행복하게…’

한마음일 사돈내외에게 감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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핸디 맨

며칠 전 일이다.

이즈음 내가 이런저런 집수리를 하느냐고 손을 빌리고 있는 김선생은 경험 많은 목수이자 핸디 맨이다. 내가 그를 안지는 오래 되었다만 내 집 일을 맡긴 것은 처음이고, 그와 특별히 이야기를 나눈 일이 없어 그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다. 그의 편에서 보아도 마찬가지일게다. 나에 대한 관심이 그의 삶에 끼어들 틈은 전혀 없었을게다.

집수리 자재들은 내가 주문을 하고 그의 손을 빌리고 있는데, 자재 주문을 하다보니 아무래도 그의 의견이 필요하다 싶어 내 컴퓨터 앞에 함께 앉게 되었었다.

내가 준비한 자재 목록을 찾다가 우연치 않게 그 전날 밤에 보고 있었던 유튜브 채널이 뜨던 것이었다. 그 때 김선생이 내게 던진 물음이었다.

“아니 이런 걸 다 보세요?  XX교회 분들은 이런거 안보시던데. 그 교회 다니시잖아요?” 김선생의 다소 황당한 물음에 나는 그냥 웃고 말았다.

그때 내 컴퓨터에서 돌아가고 있던 유튜브 채널은 ‘열리공감 TV’이었는데, 이어지는 김선생의 말이었다. “저도 이거 즐겨보는데요. 놀랬네요. XX교회 분이 이런 걸 보시다니…”

나는 또 웃었고, 그냥 좀 아팟다.

나는 이젠 토론을 즐기지 않는 나이가 되었다. 교회에 적은 두고 있으되  출석은 거의 드문 편이다.

누군가에게 정형화된 모습으로 기억된다는 것은 조금은 아프고 슬픈 일이다.

그렇다하여도 이즈음 자기 믿음 또는 패거리 믿음 속에 갇혀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마치 중세처럼. 내가 교회를 가까이 하지 않은 까닭 가운데 하나다만.

나 역시 갇힌 믿음으로 우기는 말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그래도, 사람사는 모습은 어제보다는 늘 앞으로 나아가는 법이다. 비록 때론 뒤로 돌아가는 형국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왈 나선형 전진이라고 하던가? 그렇게 앞으로 나간다고 믿는다.

그 맘으로 작지만 내 소출의 일부를 떼어내 보내도 즐거운 한국 유튜브 채널들이 있다. ‘열린공감 TV’와 ‘김용민의 평화나무’ 등이다.

핸디 맨 김선생의 손이 닿은 끝은 참 보기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