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민국 1 – 세월호에

생각도 많거니와 하고픈 말들은 쌓여있건만 단 한마디의 말이나 한 줄의 글조차 부끄러워 그저 맥을 놓고 있던  시간들이었습니다. 비단 저 뿐만이 아닐겝니다. 

기적은  통상 바라는 사람들에게 일어납니다만 그 바램을 들을 귀도, 볼 눈도, 느낄 감성조차 없는 오직 돈에 환장한 악귀들에겐 통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단 한명의 목숨도 살려내지 못한 채 이제 주검을 제대로 가족들에게 돌려 줄 수 있기만을 바라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세월호. 

2014년 4월이 그렇게 지나갑니다. 

korea

“이게 국민을 위한 나라(국가)냐?”라는 물음은 “그걸 이제 알았냐?”라는  뻔뻔스럽게 당당한 답으로 돌아옵니다. 

이쯤되면 무능, 무책임에다 태생자체가 비합법적인 부정한 정권에 대한 타도(打倒)운동이 일 법도 하건만 야당의 대표라는 위인들의 언행을 듣자하니 책임질 정권과 한 통속일 뿐입니다. 

그저 분노가 입니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품은 분노는 풀어야합니다.  쌓이면 병이 들기 때문입니다. 

총론과 각론으로 따져 하나 하나 이야기하며 분노를 푸는 방법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모든 길에서 막아 선 단 하나의 질문에 그저 주저앉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바로 “너는 떠난 사람 아니냐?”라는 물음이었습니다. 그 물음 앞에서 “다시 보따리 싸고 들어가 싸우련다.”  대답하지는 영영 못할 형편이랍니다. 

그렇게 풀지 못하는 병에 눌려 답답한 사월이 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곰곰 돌이켜보니 참으로 긴 싸움으로 이어 온 역사였습니다. 옛날 옛날 고려적 이야기는 접어 놓더라도, 이조(李朝) 오백년 이래 일제 식민지를 이어 북에 김씨 조선, 남에 박씨 조선이라는 아직도 군주국의 모습을 벗어나지 못한 시대에 이르기 까지 끊이지 않게 싸워 온 역사였습니다. 

그리고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정말 엄청난 진보의 과정이었습니다. 

거의 대부분이 십대 아이들이라는 삼백 명이 넘는 목숨들을 생으로 수장시킨(솔직히 저는 단 한 생명이라도 숨 줄 붙들고 있으리라는 바램은 버렸으므로) 거대한 세력(그것이 박근혜라는 정권의 수장  아니면 그에 빌붙은 그 세력이던, 관(官)이라고 부르는 수백년 이래 철밥통 세력이던, 돈과 권력에 환장한 군(軍) 또는 민(民)의 세력이던) 들의 불의로 인해 진보의 과정에 가속이 붙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이제 오월을 맞아야겠습니다. 

일상적인 일로 돌아가면서 이제 제가 서 있는 곳에서 할 수 있는 일 작은 일들을 해 보려고 합니다. 그  하나로 남, 북 조선 곧 북의 김씨 조선과 남의 박씨 조선이라는 전제군주국의 모습들을 찾아 보는 일도 의미가 있을 듯합니다. 

이제 오월입니다.

모를 일- 세월호 그리고 슬픔

칼 맑스 또는 카르 마르크스(Karl Heinrich Marx)라고 불리는 옛날 사람이 생각나는 밤입니다.

IE001702167_PHT오늘 낮에 제 가게 손님 한 분께서 하신 말씀때문이랍니다. 

폴란드계 미국인 여성으로 종신교수(Tenured Professor)로 아직 대학에 남아있지만 썩 나이 드신 할머님이시랍니다. 이 양반이 오늘 제게 물었답니다. “아니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난거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오? 지금 몇 시간이나 지났소? 더 많은 이들이 살아 나왔다는 소식은 들었소?” 

한국 진도 앞바다에 가라앉은 세월호에 대한 이야기였답니다. 

자동차 사고는 어디에서건 매일 일어나는 일이고, 하늘에서 비행기가 떨어지고, 물에 배가 가라앉고… 있어서는 안되고, 있지 말아야 되는 일들이지만 사람사는 세상인고로 일어날 수는 있는 일들이겠지요. 

이런 일들을 미리 방지하노라고 여러 안전 대책들과 사전 점검들을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고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어난 사고나 사건에 대해서는 준비된 대비책에 따라 신속 정확하게  대응해야 마땅한 것이겠지요. 

사고나 재난이 개인의 영역을 떠나 국가적 차원의 것이라면 당연히 국가는 준비된 매뉴얼에 따라 모든 국가적 역량을 동원하여 자국민의 안전과 구출을 위해 최선을 다해야 정상적인 국가일 터이지요. 

그런데 지난 이틀동안 세월호에 연관된 기사들을 보면서 저는 칼 맑스를 떠올리게 되었답니다. 정말 한물 갔다고 생각했던 인물이 예견한 국가를 본 듯했기 때문이랍니다. 

“국가는 부르주아 자본가의 이익을 대변하는 집행위원회이고 지배계급의 지배도구에 불과하다.” 

칼 맑스의 이야기인데, 왜 나는 자꾸 그의 말이 어제 오늘 대한민국과 겹쳐지는지 모를 일입니다. 

이 순간에도 가슴 쥐어뜯을 가족들을 위로하며.

바보들 세상 – 말씀 8

<하나님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42 

“너희 가운데 누가 양 백 마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중에서 한 마리를 잃었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아흔 아홉 마리는 들판에 그대로 둔 채 잃은 양을 찾아 헤매지 않겠느냐? 그러다가 찾게 되면 기뻐서 양을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 와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자, 같이 기뻐해 주십시오. 잃었던 양을 찾았읍니다’ 하며 좋아할 것이다.  잘 들어 두어라. 이와 같이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하늘에서는 더 기뻐할 것이다.” – 누가복음 15 : 4 – 7 

 “너희의 생각은 어떠하냐? 어떤 사람에게 양 백 마리가 있었는데 그 중의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고 하자. 그 사람은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그대로 둔 채 그 길 잃은 양을 찾아 나서지 않겠느냐?  나는 분명히 말한다. 그 양을 찾게 되면 그는 길을 잃지 않은 아흔 아홉 마리 양보다 오히려 그 한 마리 양 때문에 더 기뻐할 것이다.  이와 같이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도 망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  – 마태복음 18 : 12 -14 

아주 잘 알려진 예수의 비유 말씀 가운데 하나인 잃어버린 양의 비유입니다.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에 기록된 이 비유의 마지막 서로 다른 구절들 곧 “잘 들어 두어라. 이와 같이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 아홉보다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는 것을 하늘에서는 더 기뻐할 것이다.(마태)”와 “이와 같이 하늘에 계신 너희의 아버지께서는 이 보잘 것 없는 사람들 가운데 하나라도 망하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누가)”는 기록자들인 마태와 누가의 첨언이었을 가능이 높다는 것이 성서 연구자들 사이에 정설입니다. 

나머지 남은 예수의 비유 원형을 다시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아흔 아홉 마리는 들판에 그대로 둔 채(마태)”, “아흔 아홉 마리를 산에 그대로 둔 채(누가)” 잃어버린 양 한마리를 찾아나서는 주인 또는 목자의 행동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자! 이제 생각을 해 봅시다. 

양 백마리라는 한무리의 집단이 있습니다. 그 집단을 소유하고 있는 주인에게는 백마리들 하나 하나가 모두 소중한 가치를 지닌 재산입니다. 주인이나 목자의 입장에서 보면 말입니다. 백마리로 구성된 양의 무리는 들판 또는 산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안전한 우리(울타리나 가옥)에 있었던 상태가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lost sheep만일 양들이 안전한 어떤 우리안에 있었던 상황이라면, 그 상황에서 한 마리를 잃어버린 조건이었다면,  당연히 예수의 비유는 합당한 이야기가 됩니다. 상식적이라는 말씀입니다. 충분히 되찾은 후에 일어난 잔치자리도 설명이 가능합니다. 잃어버렸던 양 한마리의 가치 중 십분의 일 정도 한도내(?) 또는 양 한마리 값 통째를 다 써서 맘껏 먹고 마셔도 손해 볼 일을 아니었습니다. 그저 잃어버린 양의 가치만큼 즐긴 것으로 치부하면 될 일이니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비유는 이런 전제조건이 깔린 상황이 아니였습니다. 

들판이나 산에서 방목 상태에 있는 양떼에게는 그들을 지켜 줄 목자나 하다못해 양들을 지켜 줄 개들이 필요했습니다. 만일목자나 지킴이 동물조차 없이 양떼들을 방목상태로 방치한다는 것은 바로 자신의 재산권을 포기하거나 양들의 생명을 포기하는 일이었습니다. 양떼들을 공격하여 먹이로 삼으려는 들짐승이나 남의 재산을 약탈하거나 훔치는 일을 일삼던 당시 횡행했던 도적들에게는 내 놓은 밥상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는 이 비유에서 양떼들을 지킬 목자나 어떤 장치도 없이 양 아흔 아홉 마리를 들이나 산에 그대로 방치한 채로 잃어버린 양 한마리를 찾아 나선 주인의 모습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쯤해서 우리 스스로에게 한번 묻기로 하지요. 

만일 똑같은 상황이라면 저나 당신은 어떤 행동을 보일까요? 아무런 전제 조건 없이, 일테면 “믿음으로”라는 수식없이 솔직하게 우리들이 보일 수 있는 행동에 대해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차라리 이런 비유가 더 나을 수도 있겠습니다. 

뉴욕 맨하턴 타임 스퀘어 광장이나 서울 명동 한복판에서 좌판 행상을 벌이고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도록 하지요. 개당 백불 또는 십만원씩 하는 물건 백개를 놓고 팔려고 하는데 그 중 하나를 지나가던 행인 하나가 확 가로채 도망가고 있는 상황을 그려 보실까요. 

그 좌판에 있는 아흔 아홉개 곧 구천 구백불  또는 구백 구십만원을 버려둔 채, 잡을 수 있는지도 모를 그 백불 또는 십만원을 낚아채 도망간 이를 찾아 나설까요? 

한번 이런 상황을 머리 속에 그려 보면서 한번 솔직하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선택을 생각해 보시자는 말입니다. 

아마 이 글을 쓰고 있는 저나 읽고 있는 당신이나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오늘 재수 더럽다”며 좌판에 있는 구천 구백불의 물건을 지키는 쪽으로 선택하지 않을까 싶은데, 그렇지 않으신가요? 

이건 지극히 상식적인 판단이지요, 그리고 합리적입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글쎄 만일 이러한 제 물음에 당신이 “아니!”라고 하신다면 둘 중 하나일 것입니다. 스스로를 속이고 있거나 예수 반열에 올랐거나…. 

예수가 말한 이 잃어버린 양 한마리의 비유는 바로 그런 우리들의 선택 지점에 대한 물음입니다.

상식에 대한 역설(逆說,paradox)을 넘어 상식에 대한 반역(反逆)이었습니다. 

혹시 역설, 반역. 이런 말들이 거슬리시나요? 그러면 그런 말들을 순하게 써보지요. 바로 바보랍니다.

바보들이 사는 세상이 하나님 나라라는 말씀이랍니다. 

다가오는 주일이 기독교력으로 종려주일입니다. 사람들이 “바보들의 세상”에 열광하던 시간을 기리는 주일이지요. 그러나 똑똑한 인간들은 바보 한 사람 곧 예수를 죽이고 말지요. 십자가에 매달아 말입니다. 

자! 예수의 비유 몇 가지 더 이야기 하렵니다.

그의 선언 – 말씀7

<하나님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41 

  “하늘 나라는 이렇게 비유할 수 있다. 어떤 포도원 주인이 포도원에서 일할 일꾼을 얻으려고 이른 아침에 나갔다.  그는 일꾼들과 하루 품삯을 돈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고 그들을 포도원으로 보냈다.    아홉 시쯤에 다시 나가서 장터에 할일 없이 서 있는 사람들을 보고  ‘당신들도 내 포도원에 가서 일하시오. 그러면 일한 만큼 품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니 그들도 일하러 갔다. 주인은 열 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오후 다섯 시쯤에 다시 나가 보니 할일 없이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어서 ‘왜 당신들은 하루 종일 이렇게 빈둥거리며 서 있기만 하오?’ 하고 물었다.  그들은 ‘아무도 우리에게 일을 시키지 않아서 이러고 있읍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래서 주인은 ‘당신들도 내 포도원으로 가서 일하시오’ 하고 말하였다.  날이 저물자 포도원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사람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사람들에게까지 차례로 품삯을 치르시오’ 하고 일렀다.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일꾼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을 받았다.  그런데 맨 처음부터 일한 사람들은 품삯을 더 많이 받으려니 했지만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밖에 받지 못하였다.  그들은 돈을 받아 들고 주인에게 투덜거리며  ‘막판에 와서 한 시간밖에 일하지 않은 저 사람들을 온종일 뙤약볕 밑에서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하십니까?’ 하고 따졌다. 

그러자 주인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을 보고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오? 당신은 나와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지 않았소?  당신의 품삯이나 가지고 가시오. 나는 이 마지막 사람에게도 당신에게 준 만큼의 삯을 주기로 한 것이오.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 하고 말하였다. 

이와 같이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 – 마태복음 20 : 1- 16 

인용성서 구절이 좀 길었습니다만, 이럴 때 성서 한번 다시 읽어보자는 뜻으로 길게 인용을 했습니다. 하나님나라에 대한 비유 가운데 꽤 널리 알려진 대목입니다. 

예수가 한 이 하나님나라에 대한 비유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계시는지요? 아니면 이  비유에 대해  이제껏 당신이들어 본 설교나 성서공부를 돌이켜 보면서 다시 곱씹는다면 어떤 해석과 신앙고백을 하실 수 있으신지요? 

자! 제 생각을 말씀드리기 전에 최근에 누군가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 하나 먼저 소개를 드립니다. 

제 또래의 한 사내가 지난해에 한국을 다녀왔답니다. 큰 맘 먹고 나선 십수년 만에 고국방문이었답니다.  이 사내는 이민 오기 전에 한국에서 제법 유수한 회사의 직원으로 있다가 해외파견 근무 형식으로 미국에 오게 되었답니다. 그러다 여기 눌러 앉게 되었고, 작지만 제법잘 나가던 사업체를 운영하다가 그만 통째 말아먹고 빚더미를 안게 되었다고 합니다. 

다시 밑바닥부터 시작해서 십 수년 만에 자녀들도 다 시집 장가를 들이고, 부부가 그저 하루 밥 먹고 살며 남에게 손가락질 받지 않을만큼 살게 되었답니다. 그렇다고 치부를 해서 쌓인 재산이 있거나 한 형편은 아니었답니다. 

십 수년을 그렇게 고생을 하며 다시 일군 삶을 돌아보며 큰 맘 먹고 고국에를 다녀왔다는 것이지요. 짧은 모국방문을 마치고 돌아온 그 사내가 하던 말이었답니다. “이젠 다시는 그 곳에 가지 않을겝니다. 너무 많이 변했어요. 모든 판단의 기준이 그저 돈이더라고요.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바로 돈이더라니까요.” 

이어지는 그의 말입니다. “만나는 친구들과 지인들은  제가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한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답니다. 그들의 관심은 제가 얼마짜리 집을 소유하고 있는지, 얼마짜리 차를 타고 다니는지?  뭐 그런 것에만 관심이 있더라는 말입니다.” 

글쎄, 그 사내의 말을 100% 다 받아들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즈음 한국뉴스들을 보고 있노라면 가치판단의 기준이 ‘돈’ 인 것은 틀림없는 듯 합니다. 어떤 특정 분야뿐만이 아니라 사회 모든 분야에서 이 규칙은 어디에서나 통용되고 있는 듯합니다. 

이제 예수의 비유로 돌아갑니다. 

저 위에서 인용한 마태복음 20장의 기록에서 아주 유명한 16절의 말씀, “이와 같이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될 것이다.”라는 것은 예수의 말씀이라기 보다는 마태복음을 기록한 마태의 이야기 곧 그가 첨가한 부분이다라는 것이 학자들 사이의 주된 의견이랍니다. 

16절을 빼 놓고 본다면 이 비유의 촛점은바로  15절에 있습니다. “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하는 것이 잘못이란 말이오? 내 후한 처사가 비위에 거슬린단 말이오?”라는 말입니다. 

vineyard-workers“내 것을 내 마음대로 처리”할 수 있는 주인이 “네가 뭔데?”라며 꾸짖는 상대는 바로 아침 일찍부터 온종일 일하고도 한 시간 남짓 밖에 일하지 않은 사람과 같은 임금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상식적으로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입니다. 아마 오늘날 이런 임금지불 방식을 고수하는 고용주가 있다면 각종 송사로 재산을 날리는 일은 고사하고 아마 사법 판단의 대상이 될런지도 모를 일입니다. 

예수의 비유는 상식을 뒤엎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상식을 뒤엎는 비유로 하나님 나라를 설명했을까요? 

귀가 열린 척, 눈이 뜨인 척이라도 해 가면서 비유를 곱씹어 보아야하지 않을까요? 

십수년만에 모국방문을 하고 돌아온 사내가 본 오늘날의 한국사회나 지금 저와 그 사내가 살고 있는 이 미국 땅이나 이천년전 예수가 숨쉬고 있었던 팔레스타인 유대사회나 전혀 다르지 않은 사실이 한가지 있답니다. 

법이나 율법, 아니 나아가 상식이 우선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이 법이나 율법 나아가 상식까지도 지킬 수 없는 부류의 사람들이 그 때나 지금이나 존재한다는 것이고, 법이나 율법 나아가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제 배불리는 사람들이 그 때나 지금이나 여기나 저기나 늘 있어왔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는 비유를 통해 “그건 아니다!”라는 반기를 든 것입니다. 사람 곧 인간은 신 앞에서 누구나 평등하다는 선언인 것입니다. 

예수 시대의 사람에 대한 평가가 율법의 잣대에 올려져 있었고, 제 또래의 한 사내가 본 오늘날 한국사회(한국말을 사용하는 사회)의 사람에 대한 평가가 돈에 올려져 있다는 것은 모두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에 대한 평가는 누구나 다 평등한 자리에 있다는 선언인 것입니다.

지금, 여기에– 말씀5

<하나님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 -40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겠느냐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질문을 받으시고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다.  또 ‘보아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고 말할 수도 없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 – 누가복음 17장 20 – 21 

제자들이 예수께 가까이 와서 “저 사람들에게는 왜 비유로 말씀하십니까?” 하고 묻자  예수께서 이렇게 대답하셨다. “너희는 하늘 나라의 신비를 알 수 있는 특권을 받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받지 못하였다. 가진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하게 되겠지만 못 가진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이사야가 일찌기,’너희는 듣고 또 들어도 알아 듣지 못하고, 보고 또 보아도 알아 보지 못하리라.   이 백성이 마음의 문을 닫고 귀를 막고 눈을 감은 탓이니, 그렇지만 않다면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 서서 마침내 나한테 온전하게 고침을 받으리라’ 고 말하지 않았더냐?  그러나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나는 분명히 말한다. 많은 예언자들과 의인들이 너희가 지금 보는 것을 보려고 했으나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지금 듣는 것을 들으려고 했으나 듣지 못하였다.” – 마태복음 13장 : 10- 17 

예수가 주로 한 일은 기적행위와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바로 말씀입니다. 그 말씀들 가운데 많은 것들이 이른바 “비유”라는 형태의 이야기들입니다. 특히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말씀들은 많은 경우 이 비유라는 형식으로 이야기했습니다. 

오늘부터 몇차례 예수가 했던 비유말씀에 대해 써보려고 합니다. 

비유란 예수 당시 사람들과 그 이전 구약시대 이스라엘인들에게 아주 익숙한 이야기 방식의 한 형태입니다. 비유라는 말의 히브리어( ‘마샬’lvm, mashal)은 잠언, 속담, 풍자(satire), 비웃음(taunt), 조롱(derision), 수수께끼(riddle), 풍유 또는 비유(allegory) 등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답니다. 

그런데 예수는 스스로 왜 이런 비유를 사용해서 말씀하는지를 설명합니다.( 마태복음 13 : 10- 17, 마가  4: 10-12,  누가 8: 9-10) 

바로<보고 또 보아도 알아 보지 못하고 듣고 또 들어도 알아 듣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그들이 알아 보고 알아 듣기만 한다면 나에게 돌아 와 용서를 받게 될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되새기고 넘어갈 일이 있습니다. 예수의 말씀은 예수가 기록하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예수가 떠나고 난 뒤 한 세대 후쯤부터 글자화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예수가 비유로 이야기하는 까닭을 설명하는 말은 예수의 말이 아니라 구약의 이사야에 나오는  말입니다. 

이사야가 야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예언자로 나서기 전에 야훼 하나님께 들은 음성입니다. 

“너는 가서 이 백성에게 일러라. ‘듣기는 들어라. 그러나 깨닫지는 말아라(못하리라). 보기는 보아라. 그러나 알지는말아라(못하리라).’    너는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고 귀를 어둡게 하며 눈을 뜨지 못하게 하여라.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 와서 성해지면 어찌 하겠느냐?” – 이사야 6: 9- 10 

이사야에 나오는 말과 예수의 말을 곱씹어 읽어 보시길 바랍니다. 

비유로 이야기하는 까닭은 바로 “모르게 하기 위해서”라는 결론에 이르는 것이 아닌지요? 조금 우스꽝스럽지 않으신지요? 

제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까닭은 제 생각을 누군가에게 이해시키고, 읽는 이들로 하여금 제 생각을 잘 드러내어 알게 하기 위해서 인데요, 읽는 사람들이 읽을수록 모르게 쓰는 글이라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그런데 비유란 역설 곧 패러독스(paradox)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지요. 예수의 이런 비유에 대한 설명은 바로 역설이지요. 

바로 믿음을 전제하고 들어야만 들리고, 이해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 “가짜 믿음”이 끼여들 여지가 너무나 많거니와, 실제 지난 이천년 동안 숱한 가짜들이 판을 쳐서 들어도 듣지 못하고, 보아도 보지 못한 채 전혀 엉뚱한 예수만 바라보다가 간 사람들이 넘쳐나지요, 그리고 오늘 여기에서 마찬가지고요. 

here and now“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다.  또 ‘보아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고 말할 수도 없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라는 말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지난 이천년 동안 “여기있다, 저기있다”, “내가 보았다, 갔었다.” 등등 숱한 유혹들이 넘쳐났거니와 지금 오늘도 마찬가지랍니다. 

예수의 비유는 자칫 이현령 비현령(耳懸鈴 鼻懸鈴), 곧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식의 이해하기 쉬습니다. 

이제 예수의 비유에 대해 이야기하렵니다. 저도 바르게 쓰고 읽는 이들도 바르게 이해하려면 바른 믿음의 잣대가 전제되어야 한답니다.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다.  또 ‘보아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고 말할 수도 없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라는 말씀에서 “바로 너희가운데 있다”라는 말에 원뜻은 “바로 너희의 손이 미치는 곳에 있다.”라는 의미라는데는 성서학자들의 의견이 일치된답니다. 

예수의 비유, 예수의 말씀은 바로 저나 당신의 손길이 닿는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는 말입니다.

김수영과 만세

지난 주일 오후에 정말 잠시 한순간,  그야말로 채 30초도 안되는  짧은 순간 얼핏 보았던 책의 표지와 목차들이 내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는답니다. 

필라에서 아는 이들끼리 저녁을 나누는 모임이 있었답니다.(이 모임은 제법  뜻이 있다는 생각이라 언젠가는 따로 소개드리려 한답니다.) 

아무튼 그 모임이 끝나고 서로 헤어지는 인사를 하다가 문득 제 눈길을 끈 책이었답니다. 모임의 멤버 가운데 인쇄업을 하는 벗이 만든 책이었습니다. 

그 책을 쓴 이는 필라 지역 사람들이라면 한두번 쯤은 그가 쓴 글을 읽어본 적이 있을 만큼 제법 지역사회에서는 알려진 이름이었답니다. 

그런데 제가 그 순간 하품을 할만큼 딱하게 생각했고, 며칠이 지난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는 까닭은  그 책이 “김수영 문학상”에 출품하기 위해 낸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랍니다. 

김수영그  책을 쓴 이의 평소 글로 보아 도대체 김수영시인하고는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일테면 공화당 티파티(Tea Party)에 속한 이가 오바마가 제정한 상에 응모하는 격이랄까, 아니면 만년 새누리당 지지자가 진보당 이정희가 제정한 상에 응모하는 그런 참 맞지 않는 그림같은 느낌을 받았답니다. 

그 이가 과연 김수영이 “김일성 만세”라는 시를 쓴 사람인 줄은 알고 있는지, “정부가 지금 할 일은 사회주의의 대두의 촉진 바로 그것이다.”라는 말을 한 것이 김수영시인이었다는 것은 알고나 있는 것인지 그런게 두루 궁금하더란 말이지요. 

세월따라 세상은 바뀌게 마련이지만, 1960년대와 전혀 변하지 않은, 아니 어쩌면 훨씬 뒷걸음친 모습으로 변한 한국사회(한국어를 사용하는 사회)와 갈수록 점점 뻔뻔스럽게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자기 모습을 바로 비추어 보자는 생각으로 김수영시인의 글을 소개합니다. 

첫번째는1960년 9월 20일에 쓴 그의 일기이고, 두번 째는 그의 유고시 “김일성 만세”입니다. 

1.

<언론자유나 사상의 자유는 헌법조항에 규정이 적혀있다고 해서 그것이 보장되었다고 생각해서는 큰 잘못이다. 

이 두 자유가 진정으로 보장되기 위해서는 위선 자유로운 환경이 필요하고 우리와 같이 그야말로 이북이 막혀 있어 사상이나 언론의 자유가 제물로 위축되기 쉬운 나라에서는 정부가 적극적으로 이 두 개의 자유의 창달을 위하여 어디까지나 그것을 격려하고 도와주어야 하지 방관주의를 취한다 해도 그것은 실질상으로 정부가 이 두 자유를 구속하게 된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정부가 지금 할 일은 사회주의의 대두의 촉진 바로 그것이다. 

학자나 예술가는 두말할 것도 없이 국가를 초월한 존재이며 불가침의 존재이다. 일본은 문인들이 중공이나 소련같은 곳으로 초빙을 받아 가서 여러가지로 유익한 점을 배우기도 하고 비판도 자유로이 할 수 있게 되어있다. 

언론의 창달과 학문의 자유는 이러한 자유로운 비판의 기회가 국가적으로 보장된 나라에서만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검열이란 정부 기관이나 영진위, 기윤실, 유림 따위에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검열은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 이미 존재하며, 자기 검열이야말로 가장 무서운 검열이다. 

글쓰는 사람이 조건반사처럼 글을 쓰면서, 심지어 혼자 생각에 잠겨 있을 때조차 스스로의 글과 생각을 제한해야 한다면, 거기엔 실질적인 검열이 없더라도 언론 자유가 있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가령 불평은 있지만 검열 때문에 불평을 말할 수 없는 오웰의 ‘1984’보다 불평 자체를 느끼지도 못하는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가 더 끔찍한 세계다.> 

2.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을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이란 시인이 우겨대니

 

나는 잠이 올 수밖에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을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정치의 자유라고 장면이란 관리가 우겨대니

 

나는 잠이 깰 수밖에.

강도만난 예수

연재글인 <하나님나라 – 구원의 확신으로 성서 읽는 법>을 잇지 못하고 있습니다. 여느해와 마찬가지로 삼월과 사월 사이는 몹씨 바쁘답니다. 이런 저런 봄맞이 준비도 있거니와 제가 운영하는 가게의 각종 보고 및 검열 등이 몰려있는 탓입니다. 게다가 이즈음 새 일을 준비하느랴 시간을 좀 나누어 쓰다보니 글을 쓸 여유가 그리 만만치 않답니다. 

이야기의 진행상 예수가 하셨던 비유말씀들을 풀어가야 하는데, 아무래도 이번 한주간은 고스라니 건너 뛰어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은 사순절 곧 예수의 삶 가운데 마지막 순간들을 곱씹는 기간이기도 합니다. 

비록 연재글은 잇지 못하지만 예전에 제가 쓴 글 가운데 예수의 비유 말씀에 대한 것이 있어 소개 드립니다. 

혹시라도 제 글을 읽으시는 분들 가운데, 교회에서 배우고 믿는 신앙으로 보는 성서 이야기 또는 자신의 신앙(전통적인?)과 제 이야기 사이에 다른 느낌을 받는 분들이 계시다면 계속 이어질 제 이야기를 조금 더 읽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아마 바울 이야기로 넘어가면 많은 부분 서로간에 같음을 발견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아무튼 오늘은 쉬어가는 이야기입니다. 

신약성서에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가 있다. 나그네가 산길을 걷다 강도를 만나, 있는 것 다 빼앗기고 반쯤 죽은 상태로 누워 있다. 그 옆을 사제(그 시대의 최고의 귀족계급)와, 레위 사람(하급 성직자들), 사마리아인( 당시 유태인들이 가장 미워했던 사람들로 유태인과 이방인 사이의 혼혈족)이 지나간다.

사제와 레위는 그냥 못 본 체 지나치고 사마리아인이 반쯤 죽은 피해자를 응급조치하여 그를 여관으로 데려가 쉬게하고 여관 주인에게 넉넉한 돈을 지불하며 간호를 부탁한다. 

예수와 율법학자(오늘날 목사나 신학자들쯤 될까? 일정기간의 정규 연구과정을 거친 이들이다. 단지 이것이 직업은 아니었고 포도주장수, 기름장수, 목수등의 생업을 따로 갖고 있었다)의 대화체 서술인 이 이야기에 나오는 사람들 – 사제, 레위인, 사마리아인, 강도들, 강도 만난 사람, 여관주인 – 가운데 누가 예수의 역을 담당한 사람일까? 

전통적인 교회의 해석대로라면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예수의 역을 담당해서 강도 만나 죽을 고비에 있는 사람을 구원했다는 것이 정답이다. 그래서 우리도 예수같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어려운 이웃을 돌보자는 뜻으로 이 비유는 곧잘 사용된다. 

서남동그런데 이 물음 “누가 예수의 역할이냐?”라는 질문에 엉뚱한(?) 답을 한 사람은 고(故) 서남동(徐南同)목사이다. 그는 비록 그 흔한 신학박사 학위 하나 없었지만 살아 생전 “한국 신학계의 안테나”라고 불릴 만큼 큰 학자였으며 이른바 ‘민중신학’, ‘한(恨)의 신학’, ‘단(斷)의 신학’의 틀을 세운 분이다. 

그 서남동목사가 내 놓은 답은 “강도 만난 사람” – 바로 그 이가 예수라는 것이다. 그는 이를 신학적 용어로 ‘한(恨)의 그리스도’라고 하였다. 강도를 만나서 얻어 맞고 빼앗기고 죽을 고비에 빠져 “살려달라”고 애처로이 신음하는 그 사람이 바로 “예수”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예수가 강도를 만났다. 애당초 가진 것 없었으니 빼앗긴 물건이야 변변하겠냐만 반쯤 죽을만큼 맞아 쓰러져 신음하고 있다. 그 옆을 내가 아니면 당신이 지나간다.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조차 뭉개져 나오는 절박한 소리, 그 소리의 주인공이 예수라면 어떻게 응답하고 일해야 할까?

예수의 비유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는 이렇게 풀어야 한다는 것이 서남동목사의 해석이다. 

자! 강도를 만난 예수를 찾아 떠나자. 그의 신음소리를 듣고 그의 상처를 감싸주고 마침내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우자. 진정 참된 이웃이 되기 위하여! 멀리 갈 것 없다. 나는 지금 내가 사는 이 곳 델라웨어에서 찾을 터인즉, 그대는 그대가 사는 곳에서 그 소리를 찾아 볼 일이다. 

예수를 믿느냐, 아니 믿느냐의 전제는 단연코 필요치 않다. 그것은 오늘날 교회들의 전제이니 그들의 몫이다. 살면 살수록 답답함이 늘어 가는 이민(移民), 귀와 입 트이지 않아 늘 당하고 산다는 생각, “오직 새끼들만 잘 되면…”하는 소원으로 하루 열 몇 시간을 노동으로 보내지만 만만치 않은 세상. 

“나도 옛날엔 한국에서…” 큰 소리 쳐 보지만 끝내 허한 가슴 쓸어내야 하는 오늘. “이쯤 살았으면 넉넉한데…” 그래도 밀려오는 외로움 -이 모두 “강도 만난 예수”의 소리 아니겠나. 

***서남동 목사가 이런 이야기를 하셨을 때가 1970년대 한국이었다.

2014년 오늘, 때때로 듣는 한국발 뉴스 속에서 그리고 여기 내가 발딛고 사는 미국에서 여전히 “강도 만난 예수”의 한맺힌 소리들을 듣곤 한다.

이런 가수도 있었군요

이승환이라는 가수라는데, 제 나이 탓인지 이름이 낯설답니다.

이런 노래를 만들어 부르는 가수가 있어 세상은 여전히 살만하다는 생각이랍니다.

필요와 욕망

누가 시켜서 하는 일도 아닌데 그저 늘 바쁩니다. 제가 쉰다고 누가 뭐라 할 사람도 없답니다. 그런데도 주어진 시간보다 해야할 일들이 늘 많은 삶을 살고 있답니다. 그렇다고 무슨 대단한 일을 하느냐하면 그도 아니거니와, 결과도 늘 있는듯 없는듯 하답니다. 

그나마 지나간 일들과 시간에 대해 그리 후회하거나, 아까워하지 않는 성격이 다행이라면 다행이랍니다. 비록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제 욕망에 따라 움직였던 일과 시간일지라도 말이지요.   

언젠가 어느 스님의 블로그를 방문했다가 얻은 한 깨달음입니다.

“필요와 욕망을 분별할 수 있는 삶만 살 수 있다면 성공한 삶이다”라는 것입니다. 

어디까지가 제 삶에 있어 필요한 것이고, 어디서부터 내 욕망으로 끌고 가는 삶일까?

- - -

불가에서는 “내려 놓는 삶”을 이야기합니다. “비움”을 말씀합니다. 욕망을 비우는 것이겠지요. 그렇게 그렇게 비우다 더는 비울 수 없는 것이 “필요”이겠지요. 

나는 어디까지 비울 수 있을까요? 

출가(出家)한 사람이 아니니 아내와 아이들과 부모님들과 또 그렇게 얽힌 사람들에게 꼭 필요한 것들은 우선 확보해 두어야겠지요. 그렇게 우선 확보해둔 기본적인 필요를 위해 필요한 것들을 꼽아 보는 것이지요. 

그렇게 “필요”부터 따져보니 버려야 할 “욕망”은 별로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는 것이지요. 

그래 이번엔 거꾸로 버릴 것을 먼저 버려 보는 것이지요. “욕망”을 벗어 보는 것이지요. 그런데 지금 컴퓨터 옆에 있는 종이 한 장 버리는 일에서부터 “망설임”이 먼저 인답니다. 필요를 꼽을 땐 별 시간이 걸리지 않던 것이 욕망을 꼽자니 그 놈의 “집착”이라는 놈이….. 

<지갑을 버리고, 부모조차 버리고, 지팡이 하나만 달랑 들고 나를 따르라>했던 것은 예수이지요. 

이 쪽으로나 저 쪽으로나 참다운 출가를 하기 전엔  “욕망”의 끈을 놓긴 어려운 일인가봅니다. 

필요와 욕망을 흰 빨래와 검정 빨래 가리듯 가리울 수만 있다면 참 성공한 삶이라는 생각을 해 보는 것입니다. 

우리 것

오늘 낮에 제 가게에 할아버지 한 분이 찾아오셨답니다. 평소 제 가게를 드나드는 손님이 아니셨답니다. 아직 걸음걸이는 건강해 보이셨지만 연세가 꽤 드신 어른이셨답니다. 머리에는 “Korean War Veteran”이라는 글씨가 선명한 모자를 쓰고 계셨습니다. 

저를 보자 그 어르신께서 하시는 말씀이셨습니다. “이거 작은 건데 네게 선물로 주려고 한다. 받아주겠니? 우리 이웃집에 사는 아무개가 말하던데 네가 한국에서 왔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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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뭔 일인가 싶어 고개를 끄덕이며 “선물이라니요? 무슨….”하며 주저하는 제게 그 어르신이 내미신 것은  구리로 만든 동그란 작은 접시였습니다. 접시 안에는 사슴이 그려져 있었답니다. 

“아니, 이걸 왜 제게 주십니까?”라는 질문에 그 어르신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한국전쟁 참전용사라네. 한국에 대한 추억이 있다네. 보다시피 내가 살면 얼마나 더 살겠나. 하나하나 정리하며 살고 있는데… 마침 당신이 한국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고 이거는 당신에게 주고 싶어서…” 

그렇게 밑도 끝도 없이 낯선 할아버님께 받은 구리접시를 바라보며 이 글을 쓰고  있답니다. 

오늘 낮에 제 아내는 한국학교 아이들과 함께 필라델피아 미술 박물관(Philadelphia Museum of Art)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회를 다녀왔답니다. 저는 다음 달에나 가보려고 생각하고 있는 전시회랍니다. 

미국에서 처음으로 순회전회되는 전시회입니다. 이곳 필라델피아를 시작으로해서 LA와 휴스톤에서 이어져 열리게 된답니다. 

“한국의 보물, 조선시대의 예술과 문화 1392 -1910 (Treasures from Korea: Arts and Culture of the Joseon Dynasty, 1392-1910)”이라는 이름의 전시회랍니다. 약 150여점의 조선시대 예술품들이 전시되는 이 전시회를 엊그제 NewYork Times도 “극도로 절제된 우아함(minimalist elegance)”이라는 말로 소개했답니다. 

<“우리 것”을 생각하는 “우리”>와 <“우리 것”을 바라보는 “이웃들” >이라는 생각에 잠시 젖어보는 주말 저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