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사 전성시대

나이 든 세대가 젊은 세대를 이해 못하는 현상은 비단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고대 이집트나 고대 중국 문헌에도 나오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요즘 젊은 것들은….”하며 혀차는 일이 어느 특정한 시대 어떤 특정한 문화권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렇다하더라도 종종 제가 이해 못하고, 이해 할 수도 없는 것들이 있답니다. 이건 세대나 나이 차이의 문제가 아니라 “요즘 세상” 특히 “한인 사회 – 딱 한국이라고 특정짓지 않는 까닭은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공동체의 문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에 만연한 어떤 풍습입니다.

바로 세상사는 방법을 재는 잣대입니다. 한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기도 하고, 가정, 집단, 지역사회 크게는 국가나 민족을 평가하는 기준일 수도 있겠습니다.

자기 밥그릇 챙기기라고 부르든, 집단 이익이라고 부르든 모든 판단 기준이 “나와 우리가 얼마나 차지하고 누리느냐”라는 것입니다. 아주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돈과 권력”이 모든 판단의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단  이틀만에 프란치스코 교황이 던졌던 화두(話頭)  “정의(正義, justice)” 는 언제적 이야기인지 다 잊고 사는 것 같습니다. 어차피 사는 방법의 판단 기준이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즈음에는 그런 일에 시간을 허비하고 낭비하는 일은 없습니다만 한 때 한국에서 정치평론가라는 직업을 내세운 이들이 이야기하는 프로그램들을 본 적이 있습니다. 한국사회에서 그런 직업군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철들어 한국 땅에서 산 세월보다  이민의 세월이 길다보니 낯설었을 수도 있습니다만 아무튼 “이젠 거기도 그런 세월이 되었구나”하는 생각에 자못 기쁜 마음도 있었답니다.

그러나 이내 실망을 하고 말았답니다.

그이들이 평론을 펼치는 잣대야말로 “돈과 권력” 그 자체였기 때문입니다. 이건 보수, 진보 또는 여, 야 아니면 친미, 종북 – 그 무엇이라고 부르던 그 평론가들이 어떤 블럭에 속해있건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의 잣대는 똑같이 “돈과 권력”이었고, 오늘도 여전히 똑같을 것입니다.

그렇게 똑같은 잣대를 가지고 이편 저편으로 나뉘어 오늘도 열을 올리고 핏대를 세우고 마치 우리는 서로가 아주 다르다는 양 싸우고 다투는 척을 합니다.

거짓에 둘려 쌓여, 아니 스스로 쳐 놓은 거짓의 거미줄을 자신들의 밥상으로 여기며 말입니다.

저라고 뭐 별반 다를게 있겠습니까만 그저 느낌 하나 적어보자는 생각이랍니다.

어떻게 반전을 이끌어낼 것인가크리스티안 안코비치( Christian Ankowitsch)가 쓰고 박정미가 번역한  리더스 북 발행 <어떻게 반전을 이끌어낼 것인가>라는 책을 읽은 것은 순전히 제 밥그릇을 더챙기기 위한 일이었습니다. 제가 먹고 사는 일에 무슨 도움이 좀 될까 하는 생각으로 읽었다는 말입니다.

그 책 <거짓을 진실로 바꾸는 마법>이라는 소제목에 있는 내용입니다.

 

“마케팅 전문가와 심리학자들이 모여서 명확한 경고의 메시지가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정반대의 내용으로 바뀌는 문제를 연구했다.

실험에서 피험자들에게 ‘아스피린이 치아의 에나멜질을 파괴한다’라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곧바로 이 주장은 근거가 없는 이야기라고 말해주었다. 하지만 실험결과 피험자들의 머릿속에는 이 주장이 엄연한 사실로 자리잡은 것으로 나타났다.

곧바로 그 주장에는 근거가 없다는 경고를 덧붙였는데도 말이다.

말도 안 되는 것이 머릿속에 사실로 새겨지는 현상은 중년 이후에 더 많이 나타난다. 그렇다고 젊은 사람들이 예외라는 말은 아니다. 왜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가에 대해서는 두 가지 답변이 가능하다.

첫번째는 기억이 장난을 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억이 ‘아스피린이 치아의 에나멜질을 파괴한다’는 메시지를 ‘근거 없음!’이라는 경고보다 더 잘 간직하기 때문이다. 그런 메시지는 대부분 기억 속에 아무 문제없이 저장되는 반면 메시지의 앞뒤 맥락, 즉 경고에 대한 기억은 소실되어버린다. 그 결과 우리는 아스피린이 치아의 에나멜질을 녹인다는 주장만 머릿속에 간직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허튼 주장을 의심스러운 홈페이지나 허접한 잡지에서 읽었다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만다. “

이 글을 읽다가 제가 무릎을 쳤답니다.

아하! 우리는 지금 마법에 걸려 사는구나 하는 깨달음이었답니다.

그 마법을 사람들에게 거는데 능숙한 마법사들이 판치는 사회에서 살고 있구나 하는 깨달음이랄까?

그래 제가 예수를 믿는답니다. “이건 아닙니다”라고 외치며 살 수 있는 힘이 그 믿음에서 나오므로.

그 믿음의 눈으로 보면 아직도 “요즈음 젊은 것들은….” 혀를 하며 나무랄 용기 역시 솟는 것입니다.

잔치 그리고 숙제 – 평화

마치 잔치가 끝난 듯한 분위기입니다. 약  100시간에 달했다는 프란치스코  천주교황  방한 이후의 한국언론들 모습이 그렇다는 말입니다.

교황이 남긴 말씀들의 의미를 꼽는 기사들도 차고 넘치거니와 말씀들이 누구를 향한 것이라는  나름의 해석들도 넘쳐납니다.

짧은 한국방문 기간동안 보여주었던 교황의 언행을 보고 들으며 저마다 자기 생각 한자락쯤 있을 것입니다.

물론 전혀 관심 밖이었던 사람들도 많았을 터이고, 애써 무시하려는 이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이에 반해서 교황의 방한과 그의 언행들이 행여 자기 밥그릇에 도움이 될지 해가 될지를 저울질하던 이들도 있었을 것이며, 자신들의 맺힌 한과 숨통을 풀어줄 수 있는 능력자로 기대했던 사람들도 있었을 터입니다.

날라리 기독교인(개신교)인 저는 어제 주일을 맞아 모처럼 교회에서 주일예배를 드렸습니다.  한 두어 달만의 일인 듯 싶습니다.

예배순서가 거의 마칠무렵에 찬송을 부르다가 문득 프란치스코교황이 방한 중에 하셨다는 말씀 하나가 머리 속에 뱅뱅 돌았답니다. 그 연유로 잔치가 끝난 마당을 돌아보며 제 생각 한 자락 풀어 놓습니다.

먼저 어제 제가 교회에서 불렀던 찬송가의 내용이랍니다. 교회생활 조금 하신 분들이면 익히 잘 아는 찬송입니다.

<내 마음속에 참된 평화있어 주 예수가 주신평화/시험 닥쳐와도 흔들리지 않아 과연 귀하다 나의 평화/ 주 항상 계시네 내 맘속에 주 가 항상 계셔 아 기뻐라/ 주 내 맘속에 계셔 위로 하신다 / 어찌 내가 주를 떠나 살까>

이런 내용의 찬송입니다.

사람 일반이 종교에 귀의하여 의지하고자하는 일차적인 모습을 잘 보여주는 가사입니다. 그리고 종교는 당연히 귀의한 사람들에게 평안과 안식과 평화를 보장합니다. 적어도 인류 역사와 함께 발전해 온 종교들 일반의 모습입니다. 원시종교의 원형이기도 합니다.

비록 날라리일지언정 기독교인인 저는 예수가 유일한 구세주로서 제게 평안과 평화를 주시는 분임을 정말 자랑스럽게 어느 자리, 누구에게라도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다른 사람들이 저와 같아야 한다고 말하거나 주장하지도 않거니와 그런 일에 시간과 정열을 허비할 생각은 추호도 없답니다.

아무튼 “주 예수가 내 마음에 평화를 주신다”는 찬송을 부르는 일은 신자로서 지극히 당연한 일이고 그 믿음에 감사할 일입니다.

그런데 어제 저는 그 찬송을 읊조리며 영 편편치 못한 제 마음 한구석을 다스릴 수가 없었답니다. 바로 교황이 던진 평화에 대한 뜻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것이 아니라 정의의 결과>,  <평화란 상대방의 말을 참을성 있게 들어주는 대화를 통해 이뤄질 수 있다는 확고부동한 믿음에 바탕을 두고 있다>,  <정의는 과거의 불의를 잊지는 않되 용서와 관용과 협력을 통해 그 불의를 극복하라고 요구한다>

교황이 남긴 말씀들입니다.

교황과 김용오그가 말한 평화는 신과 나와의 관계가 아닌 나와 이웃간의 관계에 방점이 찍혀 있습니다.

신과 나와의 관계란  믿음의단계에 있어 아주 깊은 곳에 이를 수도 있는 관계설정일 수가 있는 동시에 가장 저급하고 천박한 신앙의 기초가 되기도 합니다. 내가 신을 쫓아가면 신앙의 깊이는 깊어질수 있지만 신이 나를 쫓게 만들면 천박하기 그지없는 장사속  종교가 되기 십상입니다.

그러나 나와 이웃간의 관계 설정에서 신의 존재를 묻는 물음은 자못 경건해 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싸움과 다툼의 시작이고 목숨을 걸 수도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교황은 바로 그 지점에서의 평화를 이야기합니다. 그리고 그 평화는 바로 정의가 세워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너와 나 사이,  우리와 너희 사이에 정의가 이루어 진 결과로 얻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의를 세우는 일을 민주적으로 풀어나가라는 조언을 덧붙인 것입니다.

대다수의 언론들이나 글쟁이들이 이런 언행을 풀고 간 프란치스코교황에 초점을 맞추고 이야기들을 풀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잔치가 끝났습니다.

이제 교황이 말씀하신 평화에 대한 참된 뜻을 제대로 알려면 프란치스코 교황이 오늘 서 있는 자리를 바로 보아야만 합니다. 그가 어느 순간 하늘에서 툭 떨어져 2014년 8월 한반도 남쪽에 현현했던 것이 아니기에 그렇습니다.

프란치스코교황이 2014년 8월 세월호 집단 생수장 이라는 사건을 통해 그 사회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드러난 한반도를 향해 평화라는 화두를 던질 수 있었던 것은 최근 천주교 반세기사(50여년)의 고뇌와 교황 개인이 걸어 온  77년사라는  고뇌의 바탕 위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50여년 전(1962년 10월 –  1965년 9월)에 있었던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있었던  천주교의 일대 회개운동이 없었다면,  그의 신앙을 키워낸 아르헨티나라는 척박한 환경이 없었다면 아마 오늘 프란치스코 교황은 없었을 것입니다.

바로 “정의의 결과물로 얻을 수 있는 평화”란 잔치 끝마당에 저절로 떨어지는 열매가 아니라 앞으로 50년이 더 걸릴지라도 한국민들이 노력해 얻어야만하는 숙제라는 것입니다.

조선민국9 – 민란2

프랑스혁명은 인류사에 있어 분명 하나의 큰 획을 긋는 사건이었습니다.  혁명이 일어나게 된 여러가지 요인들이 있거니와 그 과정을 통해 사회 질서의 커다란 변화도 겪었고, 혁명의 결과에 따라 세계사의 물결이 커다랗게 출렁이었습니다.

프랑스대혁명(1789.7.14 – 1794.7.27)을 전후로 한 한 세기 동안의 유럽과 프랑스 이야기를 풀어 나가기 전에 혁명의 주요 원인과 결과 가운데 한가지를 아주 간단하게 요약하고 넘어 가려고 합니다.

혁명의 큰 원동력 가운데 한 축은 “배고파 이대로는 못살겠다”고  아우성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의 대부분은 문맹자들이었고, 좋게 말해서 평민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당시 프랑스를 떠바치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숫자로는 당시 전체 인구의약  90%를 넘어서는 그야말로 주류였습니다. 그들의 노동과 세금으로 국가가 지탱해 나가고 있었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프랑스혁명

이들은 프랑스 혁명의 시발과 과정에서 아주 주요한 한 축이였거니와 민란의 주인공이었지만, 프랑스 혁명 이야기를 할 때면 늘 그늘에 가려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왕실, 제1 계급(카톨릭 고위성직자), 제2계급(귀족), 제3계급(평민 귀족, 브르조아 신흥 귀족) 등이 주인공인 듯 그려집니다. 그들의 숫자라야 다 합해도 인구의 10분의 일을 넘지 않았으며, 특히 왕실 및 제 1, 2급 귀족들의 숫자는 2% 미만이었습니다.( 이숫자는 후에 이야기할 한반도 조선 말기 양반 숫자와 비교해 보면 재미있습니다.)

혁명 과정을 통해 약 17만명이 목숨을 잃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대부분이 “배고파 못살겠다고” 외치던 좋게 말해 평민이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대혁명이 끝난 후 채택된 이른바 프랑스 인권선언문에 나오는 “자유와 소유권, 안전과 억압에 대한 저항권” 곧 자유, 평등, 박애(권리)라는 위대한 선언에는 사실 90%에 이르는 평민들을 제외된 선언이었습니다. 왕실과 제1, 2, 3 계급의 귀족들 곧 10% 미만의 사람들만의 선언이었던 것입니다.

프랑스 혁명은 인간 곧 사람에 대한 존엄과 생명의 고귀함을 부르짖는 천부인권사상이 전제 되어 있다고들 평가하지만 분명 거기에는 차별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영향으로 공산주의, 사회주의 이론들과 신봉자들이 기세를 드는 형국으로 변화는 이어집니다.

오늘 뉴스에  세월호 집단 생수장 학살사건에 대한 특별법에 여야가 합의했다는 소식을 들으며 프랑스 대혁명 시절 이야기가 연상되어 몇 자 적어 봅니다.

조선민국 8 – 민란1

19세기는 농민항쟁의 시기였다. 농민항쟁은 19세기 이전부터 봉건적 사회모순이 첨예화되는 과정에서 매우 다양하게 전개되었다. 항쟁과정이 잘 들어나지 않은 소극적 경제투쟁에서부터 폭력적 봉기에 이르기까지 농민들은 끊임없이 봉건지배체제에 반대하여 투쟁하였다. – 한국역사연구회 편 <한국사강의> 208쪽 

천명(天明, 1781-1788)의 대기근에 이은 대판과 강호의 식량폭동(1787), 천보(天保, 1830-1843)의 대기근에 이어 1837년 대판에서 일어난 오오시오의 반란은 식량의 절대적 부족에서 나온 산물이었다. 백성의  반란이든 기근이든 도시의 파괴소동이든 결국은 막번체제(幕藩體制)가 사회경제상황의 발전에 뒤져 낡은 전례나 자연경제에 매달리는 이외에 아무런 방책도 가지지 못한 탓으로 일어난 것이었다. – 한길사편 <일본 현대사의 구조> 162 쪽 

중국의 토양개조, 사회구조의 변혁을 말하면 누구나 농민전쟁을 연상할 것이다. 특히 소작료 인하를 목표로 한 항조운동(抗租運動: 조세 거부 운동)이 농민의 밑바닥으로부터 일어났던 세상을 바로잡자는 행동임은 분명하다. 물론 농민들에게 변혁의 이상(理想)이 있었을 리는 없고 그 운동은 지주나 관료들에 의해 곧 진압되는 것이 보통이었으나, 이것이 집중적으로 일어난 것은 남송(南宋), 명대(明代) 중기 이후, 청대의 건륭(乾隆, 1736 – 1795) 말년 이후였다. – 한길사편 <중국현대사> 10쪽 

세계사의 흐름을 보면 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오는 시점은 이른바 민란(民亂) 전성시대였습니다. 유럽에서 아시아를 관통하는 일대 유행이었습니다.

이즈음 유행은 서울, 동경, 북경, 파리, 뉴욕을 비롯한 내노라하는 도시는 거의 동시에 퍼지고 누리는 세상입니다.

지리적으로 멀고 가까움이 유행의 흐름에 영향을 끼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뉴욕에서 150마일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제가 사는 촌동네는 유행에서 벗겨나 있는 곳입니다. 서울과 뉴욕이 동시패션을 구가하지만 제가 사는 촌동네는 90년대 쯤에 머물러 있다는 생각도 해봅니다.

어느 쪽이 좋은지(유행에 민감한 대도시 쪽 또는 유행에는 별반 관심없이 사는 촌동네 쪽)는 개개인들의 선호에 달린 일이기도 하겠거니와 때로는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그 곳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뉴욕이나 서울에 가면 빨리 이 촌동네로 돌아오고 싶답니다.

아무튼 그건 이즈음 세상이야기이지만, 어찌보면 약 이백 여년 전 민란전성시대에 살았던 사람들 역시 선택의 여지없이 자신들이 살았던 땅에서 역사의 일원이 되어 살았을 것입니다.

이즈음이야 중동 가자지구에서 밤에 일어난 일들도 실시간으로 전세계로 퍼져나가거니와, 부산 해운대 앞바다 실시간 영상을 보고자한다면 이곳 미국 촌동네에서도 손바닥 들여다 보듯 볼 수 있는 세상이어서 동시간에 유행을 탄다는 게 전혀 신기할 것이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한가지 신기한 점은 지금으로 200-300여년 전 아직 동양과 서양이 서로 인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살던 시절인데 이 민란만큼은 거의 동시대에 일대 유행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런 민란이 유행하게 된 원인 역시 동서양을 막론하고 같았다는 사실인데요, 바로 먹고 살겠다고 일어난 반란이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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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먹고 살겠다고 난리를 일으킨 사람들이 있겠고, 그 난리를 유발한 난리 이전에 “자기들 끼리 배불렸던” 사람들이 있었겠지요. 그 무렵 프랑스 혁명을 통해 잘 알려진 말인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인 바로 “배불렸던” 한 쪽 축입니다. 구체제(舊體制)입니다.

18세기에서 19세기로 넘어오는 싯점은 바로 이런 구체제와 새로운 질서를 요구하는 무리들의 일대 충돌이 일어났던 시기입니다.

이 시기를 어떻게 보냈느냐 하는 역사적 경험들이 20세기 이후에 보는 각나라의 이미지로 굳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들을 외면한 채 한반도 내에서 일어난 일들만 들여다보면 그 시절 양반의 뒤를 잇는 소수의 앙시앙 레짐들이 오늘날에도 사회 엘리트가 되어야 마땅하다는 생각으로  “민족성이 게으르고…”운운하는 사기꾼들에게 고개를 끄덕일 수도 있게되는 것입니다.

자! 프랑스 혁명부터 이야기하지요. 뭐 거창하게 자유, 평등, 박애라는 구호가 처음부터 등장한 것이 아니랍니다. 그저 배고파서 일어난 난리였답니다. 언놈은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데 언놈들은 세금 한푼 안내고 떵떵거리며 사는 세상이 더러워서 일어난 난리였답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배고파 손가락 하나 까닥거리기조차 힘든 지경에 빠져있는 사람들 뿐이었다면 난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정도 배부르고 가진 게 있지만 구체제는 싫고, 새로운 질서를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었기에 배고픈 이들과 손을 잡고 난리를 일을킬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 세월호 유가족들의 단식 소식과 쓰러질 듯한 사내의 모습을 보며, 그들의 소원을 이루어 줄 수 있는 사람들이 누구일까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잊지말아야

이즈음 국제 무법자 행세를 하는 이스라엘민족의 조상신 야훼는 자기 민족 곧 히브리족과 계약을 맺습니다. 이른바 십계명조약입니다.

십계명조약에 근거가 된 조건은 히브리족은 노예에서 풀려난 자유민족이고 그렇게 된 것은 바로   해방자인 야훼 하나님 때문이었다는 상호 이해였습니다.

히브리가 이스라엘로, 유대로 바뀌였다가 다시 이스라엘로 바뀌는 수천년의 과정을 통해 그 민족이 걸어온 수난과 영욕의 세월들은 많은 이들이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세월동안 그들이 결코 잊지 않고 자자손손 이어온 것은 “그들의 조상이 노예였다는 것과 해방자 야훼신이 그때 함께하여 자유민이 되었다.”는 고백입니다.

그런 자기들만의 정체성를 근거로  오늘날 국제 무법자 행세를 정당화하는 발상을 세우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같은 종족출신으로 똑같은 고백을 하면서도 전혀 다른 야훼 하나님을 선포한 이가 있습니다. 바로 예수입니다.

노예였던 아픔을 결코 잊지 않되 자유민의 기쁨을 누리는 것은 특정한 민족, 특정한 족속, 특정한 사람이 아니라 언제 어느 곳에 어떤 모습으로 사는 누구라도 똑같이 누릴 수 있다는 선포를 한 사람입니다.

예수가 선포한 이야기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사람’은 ‘사랑’이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사랑인 세상 곧 하나님의 나라를 선포했습니다.

그리고 그 전제는 이스라엘족과 똑같이 “잊지 말아야 할 것” – 곧 노예(죄인)였던 사실을 잊지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이 사랑이 되는 세상으로 가려면 잊지 말아야 할 것을 간직하는 일에서 시작됩니다.

2014년 오늘을 한국어를 사용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일이 있습니다. 사람이 사랑으로 바뀌는 세상으로 가려면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일입니다.

힘있는 모든 분야의 권력자들, 돈 꽤나 거머쥔 부유한 이들, 지식 꽤나 머리에 이고 산다는 이들, 글줄 말질 꽤나 한다는 이들, 하나님 예수 부처 마호멧 공맹자 하다못해 자기 주먹 꽤나 내세우는 이들이 모두 잊는다해도 진정 사람이 사랑으로 바뀌는 세상을 믿는 이들이라면 결코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세월호 입니다.

사람을 돈과 권력의 노예로 만든 사건이고, 끝내 죽음으로 몰고 간 죄이기 때문입니다.

진정 예수쟁이라면 잊지 말아야합니다. 잊지 않아야 새 세상이 열립니다.

이 글을 쓰는 동안 가수 김장훈씨가 세월호 유가족들의 단식에 함께 한다는 뉴스를 보았습니다. 그가 참 예수쟁이입니다.

잊지 말아야 새 세상이 열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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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ow must go on

하루 일을 마치고 이런 저런 뉴스들을 훑어봅니다. 눈에 딱 들어오는 기사말고는 그저 제목이나 축약기사 몇 문장 읽다 마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저 입맛에 맞는 뉴스들을 척척 꺼내 읽을 수 있는 참 좋은 세상(?)입니다. 그게 정말 좋은 세상인지는 모를 일이지만 말입니다.

끝난 한국의 보궐선거 이야기와 뒷이야기들 그리고 향후 전망에 대한 기사들도 차고 넘칩니다.

저야  뭐 이미 그쪽 사람도 아니거니와, 공화당과 신민당이 다투던 시절 정치에 익숙한 사람인지라 고물도 이만한 고물이 있을까 싶은 사람인데 감히  2014년 문명의 한국정치를 이야기하는 일은 정말 터무니없는 일일 겝니다.

그렇다하더라도  대한민국 군대 삼년을 복무했던 한때 “민족 중흥의 역사적사명을 띄고” 살았던 사람으로서 정치판 훈수 한자락 정도는 가당한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으로 몇자 적어봅니다.

대부분의 기사에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아니면 “그래, 뭐 그런 생각도 할 수 있겠지.”하며 넘어가는 것이지만 도대체 몇가지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답니다. 그래 그 이야기 몇자 적어 보려는 것입니다.

우선 여 11석, 야 4석에 대한 결과입니다. 압승과 참패라는 제목들이 눈에 띕니다. 뭐 그렇다고 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이런 결과에 대한 수많은 해설과 논평, 전망 가운데 딱히 동의할 만한 것이 없었답니다.

열 다섯 곳에서 실시된 보궐선거 가운데 제 관심을 끌어던 곳들은 서울 동작, 전남 순천.곡성, 울산 남구을 등이었습니다.

그 나머지 곳들은 지난 몇개월 동안 뉴스를 제대로 훑어 본 이들이라면 가히 짐작 가능한 지역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관심을 주었던 세 곳의 결과를 보면서 제 머리속에 든 생각들이랍니다.

아주 간략한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대한민국은 진보중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는 까닭은 사람들의 생각이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생각때문입니다. 바로 표심입니다.

그 표심이란 넘쳐나는 뉴스와 평론과 논설들이 분석하고 서로 제 잘난 말장난 하듯 뭐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내 배 부르고, 내 등 따스면 그만”이라는 표심의 밑바탕 생각입니다.

그런데 이게 뭐 유권자 또는 주권자의 잘못이 아닙니다. 이 지구상 어느 나라, 어느 곳의 유권자나 주권자들이 똑같이 가지고 있는 생각입니다.

그런 일반적인 유권자들의 생각이  명하게 드러난  것아 바로 동작구와 전남 순천.곡성의 결과입니다.

“내 배 부르게, 내 등 따습게”에 표를 던진 이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우선 순천,곡성을 두고 지역주의 타파라고 거품무는 말들은 모두 가짜라는 생각입니다. 그 곳은 다만 “자기 동네사람이라는 혈연, 지역, 계파로 뭉뚱그려져 거기에 우리끼리 걸지게 먹고 마시고…”라는 생각들이 뭉쳐진 결과일 뿐입니다.

동작구는 왈 “강남 4구”가 먹힌 것일 뿐입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런 유권자들의 표심이 결코 나쁜게 아니라는 지점을 강조합니다.

다만 이런 유권자들의 생각 곧 민(民)의 생각의 흐름을 잘 읽고 뒷생각이나  아무런 책임감 없이 감언이설로 거친 말로 하자면 유권자 상대로 사기에 능한 세력들이 이겼을 뿐이라는 말입니다.

그들의 이름을 뭉뚱그려 여권에 속한 정당 및 사회 제반 세력들이라고 한다면 반대 쪽은 정말 초라하답니다.

어찌보면 11대 4도 정말 선전한 것이란 생각도 든답니다.

상대는 민(民)을 알고 민(民)을 속이는 방법에 통달하고 있는데, 이쪽은 자기들이 민(民)을 아직도 가르친다고 착각들을 하고 있답니다. 단지 한편일 수도 있는 자기들끼리 서로 가르친다고 다툼을 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말입니다.

비단 야(野)라고 불리우는 정당 뿐이 아닙니다. 이른바 언론, 대안매체, 스스로 진보연 하는 제반 단체들 아니 개인들 모두에게 그대로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생각을 해봅니다.

이 글을 쓰다가 “안철수 1기…”운운하는 기사 제목을 보면서 기사가 아닌 사기는 이 바닥에서 언젠가일지 모르는 그날까지 show must go on 일 것 같습니다.

세월호

“세월호 집단 생수장(生水葬) 학살사건” 하나만이라도 제대로 끈질기게 물고 늘어질 수 있는 세력만 있다면 대한민국 아니 한반도, 나아가 한글을 쓰는 모든 이들의 떳떳한 미래가 열린다는 생각으로….

그런 내일을 준비하는 정치집단이 다음 권력의 주인이기를 빌며….”

거위의 꿈

엊그제 페북에 올라온 유튜브 영상 하나가 머리속에서 좀처럼 지워지지 않고 머물고 있습니다. 세월호 희생자인 고(故) 이보미양과 가수 김장훈씨가 부른 듀엣곡 “거위의 꿈”이라는 노래입니다.

생전에 이보미양이 학교 행사를 준비하면서 녹음했던 노래에 가수 김장훈씨가 자신의 목소리를 입혀 만든 작품이랍니다. 보고 들으며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답니다. 그냥 쓰리고 아팠습니다.

어제 오늘은 증인으로 법정에 선 생존  단원고 학생들의 증언들이 “거위의 꿈”으로 인한 아픔을 더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연관져서 떠오른 그림이 제 블로그 대문을 꾸미고 있는 피카소 그림이었습니다.  한국에서의 학살이라는 그림입니다. (연관 글 그림하나)

CCA≪¼O한국전쟁이 한참이던 1950년 10월부터 12월 7일 사이 황해도 신천군에서 벌어진 주민 대학살 사건을 주제로 한 그림입니다. 당시 신천군민의  4분의 1인, 약 3만 5천 여명이 희생된 끔직한 사건입니다.

그런데 그 숱한 사람들을 죽인 주체가 누구인지는 아직도 확실치가 않답니다.

한반도 북쪽 정권은 그 학살자의 주범은 미군이라고 하고, 한반도 남쪽 정권은 무고한 양민을 학살하는 북의 노동당과 인민군에 대항한 우파 지하조직 및 신천군민의 저항이며 반공투쟁 사건이라는 당시 월남민(越南民)의 소리만을 부각시킨 채 그저 침묵일변입니다.

현재까지 드러난 여러 정황에 비추어 보면 미군은 아닌 것 같고, 당시 극심한 좌우 대립과 신천군의 특징상 토지개혁으로 첨예화된 지주와 소작인들 사이의 갈등이 주요 원인이 아닐까하는 설이 우세하다고 합니다.

아무튼 피카소의 그림을 보면 한쪽은 무방비 상태이고  다른 한쪽은 완벽한 무장 상태입니다.

세월호 집단 생수장(生水葬) 학살 사건을 단순 교통사건로 치부하는 잡놈(들)도 있다는 뉴스도 보았답니다. 천걸음, 만걸음을 양보해 교통사고쯤으로 치부한다하여도 완전히 무방비 상태인 보행자가 파란 불에 길을 건너다 완벽한 무장 상태로 질주하는 차량에 치어 죽었는데  정상적인 국가(기관)권력이라면 그 사고의 원인을 따져 묻는 게 지극히 정상입니다.

지금 돌아가는 꼴을 보고 있노라면 질주하던 차량의 운전사(이것조차 분명하지 않지만)가 죽었으니 이 사건은 없던 일과 똑같다는 투입니다.

약 65년 전에 수만 명이 누군가에 의해 죽었는데도 누가 죽였는지를 모르는 우리들의 역사랍니다.

25년 전, 광주 학살을 보고 당한 눈들이 시퍼렇게 살아있는데도 학살자들은 시침 뚝 떼고 살아가고, 엄한 곳으로 핑계를 돌리는 역사가 연속인 오늘입니다.

거위의 꿈을 부르던 아이만이 아니라 모든 세월호 희생자들과 그 가족들, 아픔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은 여전히 그저 무방비 상태입니다.

무릇 국가란 그렇게 무방비 상태로  삶을 편안히 누릴 수 있는 국민들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소총과 포와 미사일로 완전 무장하여 무방비 상태인 사람들을 죽여야만 학살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편안히 누려야 할 삶을 보장하지 못하고 죽음을 방치한 권력 역시 학살의 주범입니다.

아픔 가운데, 오늘 법정에서 검찰측 물음에 증언한 단원고 어느 학생의 말에서 희망을 봅니다.

문 : 먼저 탈출하지 않고 다른 친구들을 탈출시키면서 남아 있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나? 

답 : 내가 안하면 (아이들이) 그냥 그대로 있을 것만 같은 생각에 움직였다.

(거위의 꿈이 언젠가 이루어질 수 있게하는 해답일 겝니다.)

조선민국 7 – 백년

백년이라는 세월이 참 별거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든 적이 있었습니다. 저희 온 집안 식구가 모였던 자리였습니다. 오는 구월이면 유치원(kindergarten)에 들어가는 조카손주아이의 재롱을 즐기고 계신 왕할머니와 왕할아버지(조카손주 아이들이 제 부모님을 부르는 호칭들입니다.)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입니다.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를 왕할아버지와 왕할머니로 부른답니다.

아이들의 왕할아버지와 왕할머니는 이제 구순을 바라보시고, 백세시대로 접어드는 때에 조카손주들이 백년을 산다고 가정했을 때 거의 이백년의 세월이 한 순간에 만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았던 것입니다. 그리 생각해보니 백년이라는 세월이 참 별거 아니구나하는 데까지 이르던 것이었습니다.

나아가 사람살이가 이즈음 우리들이 사는 모습으로 얼추 골격을 갖추기 시작한 것이 끽해야 삼백년이 채 안된다는 것을 떠올려보면 사람살이의 변화 또는 인류역사의 변화란  어찌보면 짧은 한순간일 수도 있겠다는 가히 망상에 까지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살이의 변화를 역사발전이라고 말하던, 신의 섭리라고 말하던 돌이켜보면 인류는 똑같지는 않지만 어떤 비슷한 과정을 거치며 살아 온 듯합니다. 언제 어느 곳에서 그 삶의 맥을 이어왔더라도 말입니다.

일테면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철기 문화라는 문화의 발전과정이나 비단 마르크스의 역사발전 5단계설이 아니더라도 사회의 발전 과정을 보노라면 지구상 어떤 민족이나 종족들의 살아온 과정들은 거의 엇비슷한 보폭으로 여기까지 온 것임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람살이의 변화를 역사발전 또는 신의 섭리라고 말했을 때 이미 그 말 안에는 그 변화가 나아지는 쪽으로 이른바 진보한다는 뜻을 품고 있다고 할 수 있겠는데, 이런 생각을 사람들이갖게 된 것이 고작 삼백 년이 채 안되었다는 말씀을 드리고자 잡설이 이렇게 길게 되었답니다.

한 삼백년 이전까지만 하여도 사람들은 사람살이가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옛날로, 아주 먼 옛날 태초의 모습으로 돌아가기 위해 나아가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었답니다. 기독교 영향 아래에서 생각의 틀이 짜여져 내려온 서구에서는 에덴동산으로 돌아가기 위해 사람살이가 나아가는 것으로 여겼고, 중국적 생각의 틀을 가쳐 살았던 동양에서는 요순(堯舜)시대로 돌아가는 것이 사람살이 궁극의 목표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생각의 틀이 깨어진 것이 동양과 서양을 막론하고  18세기와 19세기를 넘어오던 그 때에 일입니다.

자본주의를 일으켜 승승장구할 것 같았던 영국이 식민지 아메리카를 잃고, 공산주의를 잉태하게 된 때가 그 무렵이고,  신생 미국이 독립한 것 때가 바로 그 때였으며, 서구 유럽을 바닥부터 뒤엎고 새로운 질서의 근간을 세운 프랑스 대혁명이 그즈음에 일어났습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심심치않게 입에 오르내리곤 하는 좌파니 우파니, 진보니 보수니하는 말들이 생긴 때이기도 합니다.

서구사회의 급격한 변화는 이내 동양으로 건너와 일본이 명치유신으로 나아가는 원인이 되었고, 중국 청나라의 급격한 몰락의 시발이 되기도 한 것입니다.

그 무렵 한반도는 조선의 마지막 유교적 제왕이라는 모습과 실패한 개혁적 이미지를 동시에 갖추었던 이산(李祘) 정조(正祖) 임금의 시대를 지나 몰락의 길에 들어서던 시기였습니다.

1800년을 기점으로 전후 약 50년 사이의 백년은 인류사는 물론이거니와 동서양  많은 주요국가들이 이전과는 다른 전혀 새로운 경험을 하게되는 신시대로 접어 들던 때였습니다.

renan“예수는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인간”이라고 했던 르낭이 교수직을 박탈당한 때가 프랑스 2월혁명 후인 1862년의 일이었으니, 오랜 중세적 종교 사고가 바뀌던 때도 바로 그 무렵이었던 것입니다.

바로 이 시기를 어떤 관점으로 바라보는냐에 따라 오늘 우리들의 시대를 판가름하는 생각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른바 문창극류의 역사적 사고가 단지 한 개인 것만이 아니라 오늘날 수많은 한인들에게 깊히 각인되어 드러나지만 않을 뿐인 생각으로 굳어진 까닭은 바로 이 시대를 옳게 곱씹지 못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으로 한반도에서는 정조 이후로, 세계사로는 프랑스혁명전후로 부터 대충 한번 훑어 보고자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