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지에 대한 소망

ㄱ씨 – “그 소식 들으셨어요? 아, 글쎄 아무개가 알고보니 이런저런 사람이래요”

ㄴ씨 – “에이 설마요? 그 사람이 아무렴 그럴까요? 잘못 들으셨겠지?”

ㄱ씨 – “아니 뉴스에 나왔다니까요. 신문, 방송 할 것없이 다 나왔어요. 그게 사실이래요.”

ㄴ씨 – “그래요? 뉴스에 나왔어요. 그럼 뭐….”

일테면 이런 대화를 나누었거나 들어보신 적 있으신지? “뉴스에 나왔으니 사실”이라는 말이 과연 진실일 수 있을까?

물론 “뉴스에 나왔으니 사실”이라는 말은 진실일 수도 있다. 다만 이 때의 진실은 누군가의 주관적 진실일 뿐이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사람들은 “뉴스에 나왔으니 사실”이라는 말을 객관적 진실로 받아들인다.

hope많은 이들이 “뉴스는 진실보도를 해야한다”는 말이 정당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말 속에 진실이란 <객관적 진실>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이 말은 틀린 말이다. 엄밀한 뜻에서 객관적 진실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 백명이 있다고 할 때 그 백명 모두가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타당한 진실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시점은 지난 해 4월 16일에 일어났던 세월호 참사 300일 째 되는 날이다.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사실은 2014년 4월 16일 세월호라는 여객선이 바다 속에 잠기며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물리적인 사실이다.

그런데 뉴스로 넘어오면서 진실은 여러가지로 갈린다. 날씨가 나쁜 탓에 일어난 단순 해상 사고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국가가 일으킨 집단 생수장 사건이라고 믿는 사람들까지 그 사건에 대한 진실의 차이는 현격하다. 때론 물리적인 사실 조차 주관적 해석이 난무하기도 한다.

이쯤 독일이 낳은 위대한 신문학자인 에밀 도피파트(Emil Dovifat)가 그의 고전적인 저서 <신문학(新聞學)>에서 한 말을 곱씹어본다. “뉴스란 ‘알리는 일’이기 때문에 그것을 전달하는 자의 주관을 통해 흐르며 이와 같은 전달자의 주관적 영향을 받게 되어 있다.”

에밀 도피파트(Emil Dovifat)는 우리들이 세상 돌아가는 소식을 접할 때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을 명확하게 짚어 알려준다. 바로 우리들이 이른바 뉴스를 통해 알고 있는 사실이란 객관적인 사실이 아니라 누군가의 주관이 개입된 주관적 사실이라는 말이다.

신문이나 라디오, 텔레비죤 나아가 이즈음 유행인 각종 SNS(Social Network Service)망의 정보들이 전하는 뉴스들이란 객관적 진실이 없다는 주장에 반발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죄송하지만 이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일 뿐이다.

그럼으로 뉴스를 통해 세상 돌아가는 일들을 정확히 알고자 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넘쳐나는 뉴스들이 모두 신뢰할 수 있는 객관적인 사실이라고 믿는 생각부터 버려야만 한다. 특히 정치, 경제, 사회, 종교 등에 대한 뉴스들은 접하는 사람들이 손으로 만져 확인할 수 있는 물리적인 사실이 아니라 그 뉴스들을 만들어 낸 사람들의 “어떤 뜻”이 담긴 주관적 사실이라는 것을 알고 받아 들여야만 한다는 말이다.

필라델피아 인근지역에 살며 알음알음으로 뜻이 엇비슷한 이들이 모여 소식지 “희망”을 세상에 던지게 되었다.

지난 십여년 동안 지속되어온 정보유통 기술 발달로 인하여 이젠 모국(母國) 대한민국 국민과 해외동포라는 가름이 거의 무의미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적어도 정보에 관한한 동일한 공간에서 사는 것과 마찬가지인 세상이 된 것이다. 이젠 살고 있는 지역이 아니라 “한국어를 제일언어로 사용하는 사람들”이라는 공동체가 새롭게 형성되었다고도 말할 수 있다.

“희망”지를 통해 오늘날 우리들이 접하는 뉴스들이 “객관적 진실”이 아니라 “누군가가 전하고 싶은 주관적 진실”임을 알리되, 그 “누군가”의 실체를 알려 뉴스를 접하는 이들이 바른 판단을 하는데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 이달 말경에 필라델피아 인근에 배포할 예정으로 시작하는 소식지 월간“희망”에 보낸 원고입니다.

아님 말고?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미국내에서는 성인이라면 누구나 합법적으로 총기를 구입하여 소지할 수 있습니다. 물론 합법적인 범위 안에서 사용할 수도 있고요.(대부분의 주에서 라이플이나 샷건은 18살 이상, 권총은 21살 이상이면 구입할 수 있답니다.)

제 세탁소 손님들 가운데도 각종 총기류 자랑을 하는 손님들이 더러 있답니다.

그러다보니 총기류 사고에 대한 각종 사고들이 종종 일어나곤 한답니다. 강절도 등의 범죄행각은 물론이고 크고 작은 사람들 사이의 다툼 끝에 총기류를 사용하는 사고 소식들을 심심치 않게 듣곤 한답니다.

이즈음에는 좀 숫자가 줄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많은 미국내 한인 이민자들이 자영업을 합니다. 특히 동네 코너 스토아들 곧 구멍가게를 운영하는 한인들이 많답니다. 이런 자영업자들을 상대로 하여 총기류를 이용한 강절도 사건들이 잊을만 하면 일어난답니다. 물론 지역에 따라 차이는 있겠습니다만 제가 알기로도 정말 많은 이들이 한번쯤은 경험했을 일이랍니다.

비교적 안전하다는 세탁소에도 이런 일들이 종종 일어난답니다. 저는 직접 경험하지는 않았지만 제가 운영하던 세탁소에서 종원업이 당한 경우는 있었답니다.

오래 전에 저희 동네를 떠난 이 가운데 한 해에 세번이나 권총 강도를 당한 사람이 있답니다. 당시 30대로 혈기 왕성했던 친구인데 권총 앞에서는 맥을 쓸 수 없었답니다. 생각할수록 당한 일에 분을 풀 수 없었던 이 친구는 끝내 권총을 하나 사서 늘 지니고 다녔답니다.

그렇게 권총을 몸에 품고 다니던 이 친구가 어느날 권총도 팔고 가게도 팔아 이 동네를 떳답니다.

그 때 그 친구가 했던 말이랍니다.

“총 가지고 있으니 꼭 누군가를 죽일 것 같아요. 강절도가 문제가 아니예요. 구멍가게에 잔도둑놈들이 많거든요. 근데 이놈들이 훔치다 걸리면 그냥 웃으며 장난이라고 하면 그만이예요. 그걸 잡았다고 경찰이 제 편 들어주는 것도 아니고요. 제가 화를 내면 놀려요. 장난 가지고 왜 그러냐고? 거기다 욕까지 듣고 나면 제 손이 저절로 권총으로 가요. 그러다 언제간 꼭 누군가를 죽일 것 같더라고요. 그래 다 털고 떠나는거죠.”

어제 한국 연합뉴스에 <정쟁으로 시작해 무죄로 끝난 ‘사초 실종’ 사건>이라는 뉴스를 보면서 떠올린 오래 전 우리 동네를 떠난 이의 소리였답니다.

연합뉴스 제목부터가 어쩜 그렇게 ‘아님 말고’식인지 권총에 손이 저절로 갔다는 그 친구의 심정을 떠올려 본답니다.

정쟁(政爭)으로 시작했다는 말이 애초 그른 말이라는 말씀이지요. 이건 서로간에 다툰 문제가 아니라 어느 한 쪽이 도둑도 강도도 아닌 시민들을 상대로 사기를 친 사건이라는 말씀입니다.

회의록혹시 이 사건의 중심인 “2007년 남북정상회담 대화록 전문”(전문 읽기)을 읽어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꼭 한번 읽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아마 누구라도 한글을 제대로 읽고 이해할 수 있는 정말 상식적인 시민 수준의 사람이라면 1시간에서 길게 2시간 정도 투자하시면 읽을 수 있는 분량인데, 읽고 나면 정말 손이 권총으로 가는 느낌을 받을 수 밖에 없답니다.

읽고나면 당시 노무현 대한민국 대통령과 김정일 조선 민주주의 인민공화국 국방위원장 두 사람이 각자 자기가 처한 위치에서 각자의 통치 영역에 대해 얼마나 치열한 자기 고민 위에 서있는지를 알 수 있답니다.

특히 노무현대통령이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민족통합에 대한 아주 작은 주춧돌 하나를 얹기 위해 치열하게 자신의 생각을 펼쳐내는 모습을 읽을 수 있답니다.

정말 아무 선입견없이 그 대화록을 읽는 사람이면 누구나가 저처럼 느낄 수 밖에 없는 기록이랍니다.

그런데 그걸 다 세상에 들어내 놓고도 자신있게 큰 소리로 사기를 치고, 그 사기가 먹히는 세상이니 권총에 손이 가는 사람만 미칠 지경에 이르는 것입니다.

오늘도 “아님 말고”라고 뻔뻔스런 웃음을 날리는 이들을 보면서 이어진 생각 하나.

누구나 다 그렇게 총팔고 가게 팔고 동네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끝내 총에 손이 닿아 그 뻔뻔스런 얼굴을 향해 방아쇠를 당기는 이들도 있다는 생각 말입니다.

녹두죽

저는 1남 3녀 외아들로 자랐답니다. 제 부모님께서는 올해 70주년 결혼기념을 맞게 되시는데 아버님께서는 손수 밥을 지어 드신 경험이 거의 전무할 정도로 어머님께서 수발을 들어오셨습니다. 이즈음에는 아버님께서 이따금 설거지 정도는 하시지만 말입니다.

이쯤이면 대충 짐작하실 일이겠지만 제가 부엌일을 할 수있다는 생각조차 안하고 산게 거의 50여년쯤 된답니다. 그러나 한 십여년 전부터 밥도 하고, 반찬도 하고 심지어 요리에도 도전하는 일들을 시작했었답니다.

그 무렵에 부엌에 드나들게 된 계기는 맛 때문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손길도 예전의 그 맛이 나지 않고, 아내의 손맛에도 질려갈 무렵이었습니다. 그래 내 입맛에 맞는 음식을 내 손으로라는 생각으로 시작한 일이었습니다.

당시 두아이들과 아내가 맛있게 먹어줄 때 느끼는 기쁨이 제법 쏠쏠했답니다.

그러나 사는게 바쁘다보니 제가 시간이 날 때 그리고 제 맘이 내킬 때에만 했던 일이랍니다. 제 마음대로였던 셈입니다.

그러다 지난 해 어느 순간부터 종종 그냥 음식 만드는 재미에 빠진답니다. 김치 깍두기에서부터 각종 국과 찌개 나아가 왈 요리에 이르기까지 영역을 넓혀가며 재미의 폭을 키워나간답니다.

이런 낯선 제 모습을 보고 어떤 이는 “늙막에 쫓겨나지 않으려고 애쓴다”라고도 하고, 어떤 이는 남성 호르몬이 다되어 여성화되기 시작했다는 말도 하지만, 다 그 재미를 느껴보지 못한 탓이랍니다.

정성스럽게 만든 음식을 누군가 맛있게 먹어줄 때 느끼는 정말 쏠쏠한 재미를 느껴 본 사람은 그런 말들이 귀에 들어오지 않을겝니다.

그 재미란 바로 제 어머님께서 누려오신 평생의 재미요, 행복이셨답니다. 손도 크시지만 정갈한 서울 음식을 내 놓으시곤 식구들과 손님들이 맛있게 먹을 때 어머님께서 느끼셨던 재미와 당신 손 맛에 대한 자부, 정말 대단하셨답니다(아니 대단하시답니다. 아직도 종종 현재진행형인 때가 있으시므로)

녹두죽이즈음 제 음식솜씨는 맛에 대해서는 어머니에게 차마 비교할 수 없는 아주 조악한 초보 수준이지만 느끼는 기쁨은 어머니에게 견줄만 하답니다.

올 겨울을 잘 넘기시던 어머님께서 요 며칠 감기 기운에 입맛을 잃으셨답니다. 그래 오늘 저녁엔 어머님 흉내를 내보았답니다.

제가 아플 때 어머님이 끓여 주시던 녹두죽을 끓여 본 것이지요.

음식에 재미 붙인 일은 제 삶에서 몇 안되는 썩 잘한 선택같다는 생각을 해본답니다.

신(神)의 뜻

is점점 그 잔인함이 도를 더해갑니다. 수니파 원리주의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의 행태가 그렇습니다. 그동안 연이어온 참수(斬首)라는 무자비하고 반인륜적인 살인행위를 거듭해 오더니만 이번엔 산채로 사람을 불태우고 그대로 매장해 버리는 만행을 저질렀답니다.

잔혹하게 죽임을 당한 요르단 조종사 마즈 알카사스베(Mouath al-Kasaesbeh)중위의 나이는 고작 26살이었답니다.

이런 뉴스를 보면서 도대체 종교란 무엇인가? 신은 과연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 물음이 적합한 것이라는 데 힘을 실어주는 또 다른 뉴스가 있습니다. 지난해 이래 툭하면 나오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발언이 한국내에서 또 다시 등장했습니다. 이번엔 이명박장로의 좌장이라고 일컫는 이재오의 입에서 나온 소리랍니다.

개신교계 보수단체인 한국미래포럼이 나라와 민족을 위한 예배와 국가안보 특강, 자유평화통일 결의대회를 국회 헌정기념관에서 열었답니다. 이들은 이 자리에서 국가발전 방안으로 종북 척결과 게임, 폭력, 동성애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했답니다.

이날 축사에 나선 이재오는 대한민국 수립과 6.25 전쟁 정전, 남북통일 등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했습니다는 것입니다. 그가 한 발언들이랍니다.

“하나님의 뜻으로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수립되었습니다. 전쟁은 사람이 일으켰습니만 결국 이것을 종전시키고 휴전을 맺고 대한민국을 복원시킨 것은 하나님의 뜻으로 믿고 있습니다. 통일에 대한 노력은 사람들이 합니다. 인간들이 통일에 대한 노력을 끊임없이 하지만, 결국 통일을 어느날 이루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봅니다.”

“금방 경제가 파탄될 거 같고 그래도 오늘 우리나라가 세계 10위권 내외의 경제를 유지하고 나라가 유지돼 온 것은 결국 한국 기독교의 기도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참석자들 – 아멘~) 우리나라에 만약에 기독교가 없었다면, 주일마다 성도님들의 기도가 없었다면 또 교회를 이끌어 주시는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의 기도가 없었다면 나라가 온전했겠느냐.”

하나님의 뜻, 곧 신의 뜻은 과연 무엇이고, 어떤 것일까? 그들이 말하는 하나님 곧 신은 어떤 하나님이고 어떤 신일까? 그리고 이어지는 물음은 과연 신은 있는 것일까?라는 것입니다.

제 스스로 예수쟁이라는 확신으로 사는 사람이지만 이 물음은 여전히 제게도 유효합니다.

“자살 폭파범도, ‘9·11’도, 십자군도, 마녀사냥도,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전쟁도, 보스니아 대량 학살도, 명예 살인도, 번들거리는 양복을 빼 입고 TV에 나와 순진한 사람들의 돈을 우려먹는 복음 전도사도 없는 세상”은 바로 “종교없는 세상”이라고 선언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진화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입니다.

그는 그의 책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 –신이라는 망상 또는 현혹)”을 통해 신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 확실하고 다만 종교란 인류 진화에 따른 부산물이라고 주장합니다. 더 나아가 신이 없어도 인간은 행복하고 도덕적일 수 있으며, 종교는 이 세상에 불행을 가져올 뿐이라고 선언합니다.

또한 언론인이었던 크리스토퍼 히친스 (Christopher Hitchens)는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물음에 <신의 존재 여부는 가설이고 논증의 대상일 뿐이다.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등에서 주장하는 ‘전지전능’한 신은 과학적으로 검증된 바 없는 ‘이야기’>라고 단정합니다.

그는 그의 책 < 신은 위대하지 않다>에서 “신 없는 인간의 삶이 가능한가” 하는 물음에 대해 <가능할 뿐 아니라 그 편이 훨씬 낫다. 인류가 누려야 할 평화와 행복을 위해 처음부터 그랬어야 했다”고 강변합니다.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나 크리스토퍼 히친스 (Christopher Hitchens)가 목청을 높였던 때는 9.11사건 이후인 2005년 전후의 일입니다.

그로부터 10년이 흐른 오늘, IS의 무자비한 행태를 보면서, 그리고 엿가락처럼 제 맘대로 늘였다 줄였다 제 입 맛에 맞게 내세우는 신의 뜻에 대한 주장들을 들으면서 이른바 무신론자들의 주장을 다시 떠올려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따져본다면 IS의 잔혹함보다 수십, 수백배 더한 집단들과 국가들이 존재했던 역사가 있고, 신의 뜻을 내세운 사기꾼들은 언제나 넘쳐났던 것이 사람 살아온 모습입니다.

약 2800여년 전에 살았던 그리스의 호머가 던진 “모든 인간은 신을 필요로 한다’(All men need the gods.)”는 명제는 바로 숱한 무신론자들의 믿음을 넘어선 곳에 신에 대한 신앙이 존재한다는 선언일 것입니다

무신론자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오늘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사랑과 정의와 공평과 기쁨과 감사”를 실천하고 나누는 일이 바로 신을 증거하고 신의 뜻을 이루어 나가는 일일겝니다.

금요일엔 돌아오렴

<시간은 흘러가다가도 다시 그날로 붙들려간다

학생들은 3박 4일의 수학여행을 마치고 금요일에 돌아오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배에 갇힌 일반인 승객들과 더불어 끝내 집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이것은 남겨진 가족들이 가닿을 수 없는 수백개의 금요일에 관한 기록이다.>

금요일엔 돌아오렴416 세월호 참사 시민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대표 김순천, 이하 작가기록단)이 지난해 4월 16일 세월호 참사 직후부터 12월까지 단원고 희생학생 유가족들과 동고동락하며 그중 부모 열세명을 인터뷰하여 펴낸 책 <금요일엔 돌아오렴>에 대한 출판사 서평입니다.

<시간은 흘러가다가도 다시 그날로 붙들려간다>라는 말이 절규로 들리기도 하고, 사명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딱히 <시간은 흘러가다가도 다시 그날로 붙들려간다>는 명제에 사로잡혀 뉴스를 훑은 것이 아니건만 생각은 자꾸 그리로 몰려갑니다.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 ‘박종철 사건’ 은폐 검사… 당시 고문치사 수사 축소·은폐> – 오늘자(2/2) 온라인 경향신문 머릿기사 제목입니다. “책상을 탁!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던 사건이요, 1987년 6월 항쟁의 도화선이 된 사건입니다.

한국 현대사에 있어 하나의 전환점으로 기록될만한 사건인 셈입니다. 그 사건의 한가운데서 진실을 은폐하여 자신의 직무를 유기했던 자가 세월이 흘러 대법관 후보자로 이름을 올렸다는 뉴스를 보며 도대체 우리들에게 30여년의 세월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라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또한 오늘자 오마이뉴스에는 <10월 10일 10시에 태어난 아이가 ‘종북’의 증거라고?>라는 제목의 기사가 머리기사들 가운데 하나로 올라와 있습니다.

“‘통일콘서트’를 열었다는 이유 등으로 구속된 황선 희망정치연구포럼 대표가 구속영장 실질심사에서 겪은 일과 앞으로 진행될 재판에 대한 본인의 생각을 담은 글을 남편인 윤기진씨에게 편지로 보내왔다. <오마이뉴스>는 황선 대표가 윤기진씨에게 보내온 편지 내용을 몇 편에 걸쳐 싣는다.”

이 기사를 싣는 까닭을 설명해주는 편집자의 글입니다.

그리고 이 기사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한편, 피의자는 2005. 10. 10. 북한 조선노동당 창건일을 기해 임신 중인 자식을 북한에서 출산할 목적으로 ‘아리랑 축전’ 관람을 빙자, 방북하여 북한 평양산원에서 자녀를 출산 후 소위 통일둥이 ‘윤겨레’라 이름 짓고, 같은 해 10. 25. 판문점을 통해 귀환함으로써 종북인사들로부터 ‘통일전사’란 칭송을 받았다.”

국가보안법으로 황선씨를 구속기소한 검찰측 기록입니다. 사실 제가 이 기사를 클릭했던 까닭은 10월 10일 10시라는 숫자 때문이었습니다. 바로 제 딸아이가 태어난 월 일 시(月日時)이기 때문입니다.

구속된 황선이라는 이는 10월 10일 10시에(시간은 오전인지 오후인지를 명확히 기록치 않아 모르지만 글의 흐름상 저녁시간인 듯) 한반도 북쪽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을 방문했던 10여년 전 바로 그 시간쯤 바로 그곳 평양에서 딸을 낳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당시엔 한반도 남쪽 대한민국 정부가 여행허가를 내주어 약 4천여명 가량이 그 가을에 북을 방문했다고 합니다. 황선씨는 그 중 한사람이었다고 합니다.

제 아내는 그보다 십오여년 전 10월 10일 오전 10시쯤 이곳 미국 델라웨어에서 딸아이를 낳았답니다.

제 아내가 그 때나 지금이나 10월 10일은 제 딸아이의 생일일 뿐 조선노동당 창건일인 줄은 모르듯이, 아마 황선씨도 10월 10일은 그녀의 딸 생일일 뿐일 것입니다.

저나 제 아내가 그해 10월 10일에 제 딸아이가 이곳 델라웨어에서 세상에 나오도록 한 것이 아니듯이, 황선씨 역시 그 때 그 시간 평양에서 자신의 딸을 낳으려고 계획하고 그렇게 실행했다는 말 자체는 도저히 성립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1987년 “책상을 탁! 치니까 억! 하고 죽었다.”는 경찰의 발표를 진실로 만들려는 검사가 2015년 대한민국의 대법관이 되려는 현실로 본다면, 아마 황선씨도 자신의 주도면밀한 계획에 따라 그 때 거기에서 출산할 수 있는 능력보유자가 될 수있다는 것이 그리 낯선 사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대한민국 검사의 관점에서 본다면 말입니다.

그리고 <시간은 흘러가다가도 다시 그날로 붙들려간다>는 사실을 명확히 정리해 주는 글이 있습니다.

오늘자 조선일보에 실린 그 유명한(?) <김대중컬럼>입니다. 제목이 <‘對北’에 올인하는 ‘박근혜 외교’>라는 글입니다.

그는 이글을 통해 미, 중 일 등 강대국들과의 적절한 외교가 우선인데 그를 도외시하고 박근혜정부가 통일에 매달려 대북관계에 우선순위를 두는 것은 매우 염려스럽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가 말하고자 하는 진정한 속내는 바로 <종북장사>를 하는 조선일보를 방해하지 말라는 것이랍니다.

바로 이 대목들입니다.

<대통령이 철도·도로·특구(特區) 개발 등 대북 사업을 계속 언급하고 남북 대화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이면 내각과 장관들은 대통령의 의중을 따라가기 마련이고, 그것이 최근 박 대통령의 외교 현장에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민족’이라는 명제에 이끌려 자신의 이념적 스펙트럼을 넓혀 보이려는 감상(感想)이 작용한 ‘통일’이라면 위험하기까지 하다.>

금요일에 돌아오지 못한 아이들을 잊어서는 절대 아니되는 까닭입니다. <시간은 흘러가다가도 다시 그날로 붙들려>가는 경험을 후대에게 물려주지 않으려면, 지금 살아있는 자들이 잊지 말아야만 합니다.

광장(廣場)과 밀실(密室)

최인훈 광장오늘자(2월 1일) 연합뉴스는 다시 태어난 최인훈의 소설 <광장> 소식을 전하고 있습니다. 문학과지성사는 ‘광장’ 출간 55주년을 맞아 소설이 처음 발표됐을 때의 삽화 6점을 다시 추가한 개정판을 1일 내놨다는 것입니다.

작가 최인훈에 따르면 1960년 잡지 ‘새벽’ 11월호에 <광장>을 발표한 이후 오늘날까지 모두 열차례 정도 고치고 수정해 왔다고 합니다.

6ㆍ25 전쟁포로인 소설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은 남북, 좌우를 모두 거부하고 중립국을 택해 가던 수송선 위에서 바다로 자신의 몸을 던져 죽음을 택합니다.

작가 최인훈은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이 작품을 쓸 당시에 주인공이 그렇게 힘겨워한 일들의 뒤끝이 이토록 오래 끌리라고는 예감하지 못하였다.”

소설 광장이 발표되었던 때로 부터 55년이 흐른 2015년 현재 <광장>이 계속해 다시 쓰여졌다는 소식은 서글픔입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상황은 전혀 변함이 없다는 것을 말해주기 때문입니다.

아니, 상황이 전혀 변한 것이 아니라 더욱 나빠졌기 때문입니다. 1960년 소설 발표 당시 작가 최인훈이 썻던 서문(序文)이 이를 증명해 줍니다.

‘메시아’가 왔다는 이천년래의 풍문이 있습니다

신이 죽었다는 풍문이 있습니다. 신이 부활했다는 풍문도 있습니다. 코뮤니즘(공산주의)이 세계를 구하리라는 풍문도 있습니다.

우리는 참 많은 풍문 속에 삽니다. 풍문의 지층은 두텁고 무겁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역사라고 부르고 문화라고 부릅니다.

인생을 풍문 듣듯 산다는 건 슬픈 일입니다. 풍문에 만족지 않고 현장을 찾아갈 때 우리는 운명을 만납니다.

운명을 만나는 자리를 광장이라고 합시다. 광장에 대한 풍문도 구구합니다. 제가 여기 전하는 것은 풍문에 만족지 못하고 현장에 있으려고 한 우리 친구의 얘깁니다.

아시아적 전제의 의자를 타고 앉아서 민중에겐 서구적 자유의 풍문만 들려줄 뿐 ‘사는 것’을 허락지 않았던 구정권하에서라면 이런 소재가 아무리 구미에 당기더라도 감히 다루지 못하리라는 걸 생각하면 저 빛나는 4월이 가져온 새 공화국에 사는 작가의 보람을 느낍니다.’

2015년 오늘은 저 빛나던 1960년 4월에 비하면 ‘광장(廣場)과 밀실(密室)’ 모두 한반도 남북에서는 대중(시민, 인민, 국민, 민중 등 무엇이라 부르던간에)의 소유가 아닌 세월이기 때문입니다.

최인훈이 “광장은 대중의 밀실이며 밀실은 대중의 광장이다. 인간을 이 두 가지 공간의 어느 한쪽에 가두어 버릴 때, 그는 살 수 없다. 그럴 때 광장에 폭동의 피가 흐르고 밀실에서 광란의 부르짖음이 새어 나온다”고 썻던 바로 그 ‘광장과 밀실’ 말입니다.

다만 <풍문에 만족지 못하고 현장에 있으려고>했던 소설 광장의 주인공 이명준은 바다에 투신하는 죽음을 택했지만, 2015년 오늘 <풍문에 만족지 못하고 현장에 있으려고>하는 현실의 주인공들은 황선처럼 감옥으로 끌려가거나 신은미처럼 강제추방을 당한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죽음이라는 도피보다는 살아 감옥에 가고 추방당하더라도 ‘광장과 밀실’을 누리고자 애쓰는 사람들이 있어야 “광장에 폭동의 피가 흐르고 밀실에서 광란의 부르짖음이 새어 나오”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한반도 남북 그 어디서건 대중(시민, 인민, 국민, 민중) 모두가 ‘광장과 밀실’을 누리기 위해서라도 황선이 되고 신은미가 되어 <풍문에 만족지 못하고 현장에 있으려고> 노력할 일입니다.

이명박과 한국교회

대한민국 전 대통령 이명박이 출간한다는 회고록에 대한 뉴스들이 넘쳐납니다. 그에 관한 뉴스의 분량보다 몇 수십 또는 수백 아니 수만가지 보고 듣는 사람마다 서로 다른 느낌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 숱하게 다른 느낌들 가운데 하나, 바로 제 생각입니다.

제가 살고 있는 곳 델라웨어주에는 델라웨어 대학이 있습니다. 해마다 이 대학교에 수십명에 이르는 한국의 대학교수들과 공무원 또는 정치인 등이 교환교수나 연구원이라는 이름으로, 또는 석, 박사 과정으로 짧게는 일년에서 수년 동안 머물다 한국으로 돌아갑니다.

한국에 돌아간 그들은 정, 관, 학계를 비롯하여 각 분야에서 나름 중추 역할을 합니다. 그들 가운데는 장차관, 국회의원, 대학총장 등을 위시해 제법 이름 꽤나 파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제가 수인사를 나누었거나 밥 한끼, 술 한잔을 나누었던 사람들은 모두 이곳에 있는 교회를 통해 만난 이들입니다.

델라웨어주는 미국 50개 주 가운데 로드 아일랜드 다음으로 두번 째로 작은 주이고, 델라웨어대학은 (참 무의미한 짓이지만) 미 전국 대학순위로 따져 60-70위 쯤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학교입니다. 그나마 지금의 부통령인 바이든(Joseph Robinette Biden, Jr.)의 모교로 조금 알려진 정도입니다.

자! 이쯤 한번 생각해 보기로 하지요. 미국 촌구석에 있는 대학에 왔다간 사람들을 위시해 이른바 아이비 리그에 속한 대학부터 미 전역, 각 대학에 해마다 무수히 많은 이들이 연구원, 교환교수 또는 석박사 과정으로 이 땅에서 머물다 한국에 돌아갈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 수많이 이들이 한국사회의 중추 역할들을 했거나, 하거나, 할 것입니다.

또한 중요한 사실 하나는 교회를 통해 그 수많은 사람들이 그보다 몇곱이나 많은 이곳 이민자들과 영주자 또는 방문자들과 교류를 나누거나 연을 이어갈 것입니다.

이런 일이 비단 이곳 미국에만 국한되지는 않습니다. 영국, 동서 유럽, 중동, 러시아, 중국, 일본, 호주, 동남 아시아,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전세계에서 이젠 쉽게 볼 수 일들입니다.

한국내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 사람들(정치, 경제, 사회, 문화, 종교 등 제반 분야에서부터 사기꾼, 도둑놈 등의 범죄자들에 이르기 까지) 가운데는 해외에 있는 교회를 통해 얼기설기한 연을 맺고 있다는 말씀이고, 그 고리는 단지 한국사람이라는 이유 때문인데 그것은 생김새가 비슷하다기 보다는 같은 언어 곧 한글을 사용하여 의사소통을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대한민국 국민과 해외 동포를 가름하는 일이 이젠 거의 무의미한 지경에 이르렀다는 생각을 하게 된 지점입니다. 게다가 ‘웨이보’가 중국을 대표하듯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써도 한글을 이용하고 카톡을 쓰며 대용으로 텔레그램을 써도 한글로 쓰는 이들만의 세상에서는 한반도와 전세계란 지역적 나눔은 아주 무의미한 일이라는 생각을 해보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연결고리로 존재하는 곳이 바로 한인교회입니다.

한인교회란 한국내 교회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있는 한글을 사용하는 교회를 일컬어 하는 말입니다.

올해는 조국 광복(해방- 이런 똑같은 하나의 현상을 두고 서로 다른 말을 써야만 하는 세월이) 70주년되는 해입니다.

이런 때에 이명박과 그의 회고록이 뉴스의 헤드를 장식하면서 든 생각이란 바로 지난 70년 동안 한글을 쓰는 사람들이 믿는 교회 공동체가 만들어 낸 죄의 결과물이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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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 델라웨어 대학에서 잠시 머물던 이들 가운데 서울대 김종욱교수라는 이가 있습니다. 그 이의 말로 이 글을 접습니다.

<어떻게 이렇게 생명을 경시하고 하나님의 창조 세계를 이렇게 무시할 수가 있나 울분이 치솟는다. 몇몇 사람에게 이득이 된다고, 다른 생명과 사람들을 희생시키고 복원할 수조차 어렵게 만들어 놨다. 다 돈 때문이다. 뭐 그럴싸한 이유를 덮어씌우는데, 실상은 돈에 눈이 멀어서 일어난 일이다.

4대강 사업은 사기다. 전 국토를 이렇게 졸속으로 파헤치는 일은 일어나서는 안 되는 거다. 그런데 이명박 전 대통령은 해외에 나가서는 하천 생태계를 복원하고 있다고 세계를 상대로도 거짓말했다. 그런 엉터리 거짓말로 상도 많이 받았다. 이런 사람이 교회의 장로다. 한국교회가 얼마나 부패했으면 이런 장로를 배출했을까.

한반도 대운하 얘기 나오고 4대강 사업 진행할 때 목사들이 칭송 많이 했다. 성경적이라든지 문명사적이라든지 무슨 거창한 말 갖다 붙이고. 조금만 살펴보면 거짓말이라는 걸 알게 될 텐데 그걸 믿는 사람들을 보면 참…. 사기꾼들 보면 욕심 많은 사람을 이용한다.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물욕이 많기 때문에 사기꾼의 술수에 넘어간다고 본다. 교회가 물욕에 빠져 있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그렇지 않으면 내용도 살펴보지 않고 4대강 사업이 좋은 거라고 떠들 수가 없는 거다.

그런데도 장로 대통령이라고, 잘못이 있어도 지적하면 안 된다고 두둔한 게 교회다.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성경을 잘 봐야 한다. 예수님은 헤롯을 ‘여우’라고 표현했다. 식민지이기는 했어도 헤롯은 어쨌든 당시 유대인들의 왕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이나 초대교회는 절대 권력자들을 떠받들지 않았다. 예수님의 행동은 우리나라로 치면 대통령을 가리켜 짐승이라고 한 것과 같다. 한국교회가 그렇게 권력자들의 편에 서서는 안 된다. 권세에 따르라는 성경 말씀은 권력에 굽신굽신하라는 뜻이 아니다.>

사족 : 문제는  이명박 뿐이 아니라 한인교회마다 차고 넘치는 이명박 아바타들.

70주년의 차이

메르켈  독일 총리

<나치 만행을 기억하는 것은 독일인의 영원한 책임이며 아우슈비츠는 인간성 회복을 위해 독일이 해야 할 일을 일깨워준다.> – 아우슈비츠 해방 70주년 기념식에서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한 말.

<존경하는 국민여러분, 70년 전, 우리 민족 모두는 하나된 마음으로 조국의 독립을 위해 투쟁하였고, 함께 광복을 맞이했습니다. 광복을 기다리던 그 때의 간절함으로 이제 분단 70년을 마감하고 우리의 소원인 통일을 이루기 위한 길에 나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 대한민국 박근혜 대통령의 신년 기자회견문에서

무릇 역사란 돌아보는 자들의 몫입니다. 그 몫이 그들의 미래를 결정하기 마련이고요.

나치는 독일이었다는 고백으로 미래를 맞는 공동체와 반민족 친일분자였던 조상을 독립투쟁가로 둔갑시켜 우상화하며 미래를 여는 공동체의 차이.

역사란 오늘을 사는 이들의 고백이지요.

분단을 극복한 공동체와 분단에 얽매인 공동체의 결정적 차이일 겝니다.

70주년을 해석하는 차이 말입니다.

과거에 (해방에 대한)간절함이 애초 없었던 이들이 말하는 (통일에 대한)미래란 그저 공허할 뿐이고요.

겨울, 빙판 운전 요령

Charlie는 거의 말수가 없는 제 가게 손님입니다. 그런데 어제 장문의 이메일을 제게 보냈습니다. 제가 매주 손님들에게  보내는 편지에 대한 답신이었습니다.

제가 지지난 일요일에 뉴욕을 올라가면서 빙판길 운전으로 힘들었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겨울철 빙판길 운전의 베테랑으로서 자신의 경험과 요령을 설명한 글입니다.

혹시라도 겨울철 빙판길 운전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하는 생각으로 소개드립니다.

Charlie 편지의 번역과 원문 그리고 제가 보낸 편지의 번역과 원문입니다.

이 글을 올리는 이 시간에도 제가 사는 곳에는 눈이 내리고 길은 빙판이랍니다.

drive on ice

Young에게

지난 주에 사고없이 뉴욕시 여행을 무사히 마쳤다는 것은 침착하게 (운전에)집중할 수 있는 당신 능력을 입증한 것이다.

나는 버팔로 지역에서 29년간 살았고, 내 어머님께서 내가 15살 되던 해, 영하의 온도에서 2-3인치 두께의 거울 같은 얼음으로 완전히 뒤덮힌 우리가 살던 (공공이 아닌) 도로에서 내게 첫 번째 운전교습을 시켜주셨다.

이 (교습)초대에 대해 어머님을 쳐다보는 내 눈길에 대한 대답으로 어머님께서는 “만일 네가 거울 같은 얼음에서 운전할 수 있다면, 어디에서나 운전할 수 있을 것이다. 자, 가자!” 라고 하셨었다.

그래서 나는 8기통 엔진이 장착된 5,000 파운드가 넘는 닷지 세단 운전석에 앉았고, 가속 페달을 빨리 밟고 떼는 것은 아주 좋지않다는 사실과 브레이크 페달은 거울 같은 얼음에서는 단지 미끄러지게 만드는 기계장치에 불과하다는 것을 곧바로 배웠다.

뉴잉글랜드 인근 언덕이 많은 농장지역에서 성장하셔서, 어머님은 겨울에 아버님 보다 겨울 운전에 (사실대로 말하자면 모든 기상 상황에서도) 기술이 더 뛰어나셨고, 내게 우리 도로에서 가속시켜 올라가고, 진입로(driveway) 끝에 도달할 때 차를 옆으로 미끌어지게 하며, 그리고 나서 가속 페달과 핸들을 사용해서 진입로로 빨리 나아가는 방법을 가르쳐주셨다.

그것이 11월과 12월에 우리 집에서 진입로 끝까지 운전하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며, 그 이후 나머지 겨울 동안은 눈이 너무 많이 쌓이거나 진입로가 얼음판이 되어 차를 도로변에 주차시켜야 했고, 나는 겨우내내 눈을 치워 통로를 만들어야 했다.

아버님은 그 (운전) 기술에 결코 성공하지 못하셔서, 차를 두번이나 도로변 깊은 고랑에 처박고 나서야 (견인 트럭을 불러야 했다) 배우려는 시도를 포기하셨다.

나는 아나폴리스 지역으로 이주하기 전까지 그곳에서 열 다섯 해 겨울 동안 운전을 했으며, 버팔로에서 지냈던 겨울 중 몇 해는 지난 세기 중 최악의 상황으로 꼽혔었다.

나는 또한 스포츠카 경주를 몇 번 했으며, (내 차의 엔진이 고장이 났고, 모든 부품은 아파트에 두고 와서) 차동호회 친구로 부터 빌린 차로 내 겨울 운전 지식을 이용하여 얼음 운전 대회에 참여했고, (일반 대중에게) 차단된 도로 코스에서 (그 친구의 차로) 첫 번째 시도에서 그의 기록을 18초 단축시켜 의도치 않게 그 친구를 무안하게 만들었다.

(대회에서) 1분 8초라는 내 기록은 그에게 2등 트로피를 안겨주었다. 내가 탑승객으로 조차 그의 차를 타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은 그를 더 무안스럽게 만들었지만, 이후 우리는 계속 친구로 지냈다.

내가 유리했던 점: 그는 겨울 환경에서 운전하는 방법을 내 어머님께 배우는 혜택을 받지 못했다.

내가 처음 ‘Delmarva Power’에 취직을 했을 때, 겨울 운전에 대한 한 시간 길이의 교습을 해줄 것을 부탁받고, 최소한 3년 동안 그렇게 했다.

내 교습으로 사람들이, Young, 당신이 본 것 같이, 겨울 폭풍으로 연쇄충돌 차더미에 쌓이지 않게 도움이 되었기를 바란다.

겨울 운전의 관건은 침착을 유지하고, 어리석게 운전하는 사람들로 부터 멀리 떨어지며, 브레이크는 마지막 수단으로만 사용하고, 관성과 엔진 브레이크를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활용하는 것이며, 걷지도 못할 정도의 얼음판에서는 운전하지 마라.

당신이 Exit 5에서 뉴저지 턴파이크 북쪽 끝까지 무사히 운전해 갔다는 것은 당신이 이런 것들을 최소한 일부를 따랐다는 것을 암시한다.

잘했다! 이곳에서 사는 29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곳의 많은 사람들은 필요한 (운전) 기술을 알지 못해서, 동네 자동차 정비공장을 행복하게 만들고 있는 것을 보았다.

Charl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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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ng

To have successfully completed your journey to NY last week without incident is a testament to your ability to stay calm and focused.

I lived in the Buffalo area for 29 years, and my mother gave me my first driving lesson when I was 15 on a sunny winter day with the temperature below freezing and the (non-public) road we lived on covered entirely with 2-3 inches of glare ice.

My look at my mother upon this invitation was answered with “If you can learn to drive on glare ice, you can drive on anything.  Let’s go!”  So I climbed behind the wheel of a Hemi V8 engine Dodge sedan weighing over 5,000 lbs, and quickly learned that getting on and off the gas pedal quickly was a very bad idea and brakes are merely a mechanism that puts you into a skid on glare ice.

Having grown up in a hilly farming region near New England, my mother was more skilled at winter (and truthfully, all weather) driving than my father, and taught me how to accelerate up our road, kick the car sideways when approaching the end of the driveway, and then shoot into the driveway by using the gas pedal and steering.

That was the only way to be able to drive all the way up the driveway in November and December at our home before the snow became so deep and the driveway so icy that we had to park the cars on the road for the rest of the winter and I had to shovel a walkway for the rest of the winter.

My father was never successful at that technique, and put his car into the road’s deep ditch twice (requiring a tow-truck to remove it) before giving up on trying to learn.

I drove through fifteen winters up there before moving to the Annapolis area, some of them among the worst Buffalo saw in the last century.

I also did some sports car racing, and used my winter driving knowledge in an ice driving competition using a car I borrowed from a fellow car club member (my car’s engine had failed, and I had it all apart back in my apartment) and managed to unintentionally embarrass the car’s owner on my first attempt by undercutting his time on the closed course by 18 seconds.

My finishing time of 1 min 8 seconds gave him the second place trophy.  It was doubly embarrassing as I had never even ridden in his car as a passenger, but we remained friends afterward.

My advantage: He had never had the benefit of my mother teaching him how to drive in winter conditions.

When I was first employed by Delmarva Power, I was asked to give an hour-long course on winter driving, and did so in at least three years.  I hope that saved other people from winding up in pileups in winter storms, such as you saw.

The keys to this driving is to be patient, stay away from others driving foolishly, use your brakes only as a last resort, use momentum and engine braking to your advantage, and do not drive on ice on which you cannot even walk on.

For you to successfully drive from Exit 5 northward to the end of the turnpike indicates that you must have been following at least part of this approach.

Well done!  I have noticed over twenty nine years of living here that many people in this area do not understand the techniques needed, much to the happiness of the auto collision shops in the area.

Charli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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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에 뉴욕을 다녀왔답니다. 평소 그리 자주 가지 않는 편이라 얼마나 시간이 걸리는지, 오고 가는 길의 날씨는 어떨지 등등 미리 확인을 하고 집을 나섰답니다.

비는 좀 오겠지만 낮기온이 40도에 이른다고 해서 그리 걱정을 하지 않고 길을 나섰답니다. 집에서 약 3시간 정도 걸린다고 해서 넉넉하게 약속시간보다 4시간 전에 떠났답니다.

뉴저지 턴파이크에 들어서자 비가 오기 시작했답니다. 평시처럼 차들은 60-70마일로 달렸답니다. 그러다 Exit 4와 5사이를 지날 무렵부터 차들은 35마일 미만으로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답니다.

비가 내리면서 얼어서 도로가 빙판이 된 것입니다. 제 앞에서 가던 차가 스스르 미끄러지더니 갓길에 처박히는 것도 보았답니다.

겁이나서 service area로 들어서 쉬어갈까 했지만 ramp를 올라갈 수가 없어서 그 어떤 차도 service area를 들어갈 수가 없었답니다.

그렇게 6시간이 지나서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답니다. 그리고 그 6시간 동안 분리대를 박고 부서진 차, 서로 부딪혀 부서진 차들, 20-30대가 넘게 연속 충돌된 차들 등등 세어보지는 못했지만 거의 100여대가 넘는 사고차들을 보았답니다.

무사히 도착한 후에 저는 “아무 사고없이 운전하는 것이 바로 기적이야, 기적”이라는 생각을 했었답니다.

그리고 이런 비슷한 말을 한 사람이 오래 전에 중국에 있었답니다. 약 1200여년 전에 살았던 임제라는 불교 스님이랍니다.

그가 한 말이랍니다. “기적이란 물 위를 걷는 게 아니라 땅 위를 걷는 것” 이라고요.

하루하루 평범하게 살아가는 일이야말로 기적이라는 것이지요.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그저 감사할 수 밖에 없답니다.

감사가 넘쳐나는 한 주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저는 손님들의 옷에 스테인들을 없애는 일에 감사하는 한주간이 되었으면 한답니다.

Last Sunday, I went to New York City. As I don’t go there often, I checked the weather forecast and expected road conditions before I left home.

As the weather forecast said that though it would rain, the daytime temperature would be 40 degrees, I could leave home without concerns about the trip. Since it takes about three hours under normal conditions, I left four hours before the appointment to have the extra room of one hour.

As soon as I entered the NJ Turnpike, rain started. Vehicles were moving at the speed of 60-70 mph as usual. But when I was passing somewhere between Exit 4 and Exit 5, all the cars dropped their speed to under 35 mph.

The temperature was lower than expected and the rain was frozen as soon as it touched the ground. Yes, it was freezing rain! A car in front of me slid off the road.

I was somewhat afraid and thought about taking a break at a service area. But the ramp to the service area was icy and no cars could go there. I had to just follow the traffic and keep going.

I managed to reach my destination after six tense hours. During the trip, I saw so many accidents: cars which hit the median strip of the road and collided with other cars, and piles of cars crashed. I’m pretty sure that I saw more than 100 cars which were involved in accidents that day.

After I arrived at the appointment place, one thought came to my mind: “It is a miracle. Just to drive without getting involved in an accident is really a miracle.”

A long time ago in China, one Buddhist monk made a statement similar to this thought. He was Rinzai (or Linji, 臨濟) who lived around 1,200 years ago.

He said: “A miracle is not to walk on water, but to walk on the ground.”

What he meant is that to live every day uneventfully is nothing but a miracle. If we would understand this, we could not but live in gratitude, I think.

I wish that you will have a week which is full of things for which you are grateful.

For myself, I hope that I’ll have a week during which I get rid of all the stains from my customers’ clothes and feel grateful for that.

어떤 감사 – 홍길복목사님께

<지혜의 왕이라고 불리는 솔로몬 임금이 한번은 신하들을 모두 불러 모은 후 이런 명령을 내렸다고 한다. “이제 너희들은 이 세상에 나가서 기쁠 때 보면 슬퍼지고 슬플 때 보면 기뻐지는 것을 하나 구해 오거라.”

솔로몬의 신하들은 온 천하를 다니면서 기쁠 때 보면 슬퍼지고 슬플 때 보면 기뻐지는 것을 찾아 헤매다가 드디어 한 가지를 구해서 왕에게로 가져왔다. 그것은 왕의 손가락에 꼭 맞는 반지였다. 솔로몬왕은 그 반지를 자기 손가락에 끼웠다. 그리고 자세히 그 반지를 들여다 보았다.

그런데 거기, 그 반지 곁에는 이런 글이 쓰여 있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This too shall pass). ‘이 또한 지나가리라’ 성공도 실패도, 사랑도 미움도, 기쁨도 슬픔도, 그리고 마침내는 삶과 죽음까지도 다 지나가서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손길에 맡기고 나면 모든 것이 다 그것이 그것이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남는 것은 감사뿐이다. 건방지게 들릴지 모르겠으나 진심으로 드리는 말이다. 이제는 실패까지도 감사할 나이가 되었다.> – 홍길복목사가 쓴 “호주 디아스포라 목회와 신학>에서

사람이 한평생 자기 생각을 바꾸지 않고 똑같은 걸음걸이로 한결같은 길을 걸어왔다면 그것을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언듯 그리 생각할 수 있는 일이지만 실제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서는 비웃음만 살 뿐이다.

내 나이 젊어 한 때 많은 선배와 선생들을 만났다. 그들 가운데 “예수”에 빠진 사람들이 많았다. 그들은 스스로 “예수처럼 사노라”고 확언하기도 했고, “예수처럼 살자”고 외치기도 하였다. 나도 이제 환갑, 진갑을 지나니 그이들은 칠순 팔순을 바라보게 되었다.

오래 전에 “예수에 빠져 예수를 외쳤던” 그이들이 오늘도 여전히 “예수에 빠져 예수를 외치며” 살고 있는 모습을 본다. 신문과 방송을 통해서거나 아는 이들의 전언을 통해서 또는 직간접적인 만남을 통해서 여전한 그이들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 모습들은 마치 전혀 변함없이 한마음으로 평생을 살아온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속내는 다르다. 그들이 오래 전에 말했던 “예수”와 지금 그들이 말하는 “예수”의 모습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내가 젊어서 그들에게 들었던 예수는 “오늘 우리와 함께 살아 움직이는 존재”였지만, 이제 나이들어 그들이 말하는 예수는 “체제(體制)안에 안주하며 그들만을 위해 만들어진 허수아비”일 뿐이다. 세월이 흘러 그들이 “예수”를 여전히 외치는 것은 변함 없으되 외치는 “예수”의 모습은 전혀 달라졌다는 말이다.

홍길복-2그러나 35년만에 만난 선생님 홍길복목사는 전혀 변함이 없으셨다. 그는 여전히 “떠남과 움직임은 아브라함 이후 성경의 전통이다. 크리스천의 삶은 영원한 순례자의 길을 걷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움직이시는 하나님(The Moving God, The Mobile God)의 뒤를 따라가는 것이다.”고 외치고 있었다.

홍목사님은 많이 변해 있었다. 35년 세월의 흔적을 얼굴에 남기지 않는 인간이 누가 있겠는가? 그 역시 늙어 있었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예수의 모습은 예나 지금이나 한결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스스로에게 “실패자”라는 낙인을 찍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실패자임을 자인하는 까닭으로 두가지를 든다. ‘신학적 실패’와 ‘인간적 실패’가 바로 그것들이다.

두가지 모두, 그가 청년 시절에 외쳤던 ‘움직이는 예수의 모습’과 달리 ‘안주하는 예수’에 빠졌었던 일을 말한다.

그가 말하는 ‘신학적 실패’란 잘못된 목회 목표 설정 두가지이다.

첫째는 자신의 삶의 자리인 “호주 이민의 삶”에 두발을 딛지 않고 “한국적 상황 – 일테면 한국의 민주화, 인권 문제, 조국 통일과 평화문제 등”을 그대로 안고 고민하는 일에 빠져서 실제 빵과 기쁨을 함께 나누워야 했던 이민자들과 함께하지 않았던 이민 초기에 대한 반성이다.

둘째는 자신도 한때 “안주하는 예수”에 빠졌던 일에 대한 통렬한 자기반성이다. 그 역시 “교회 성장이라는 권력욕과 물질욕과 함께 어깨동무를 하고 가는 탐욕”에 빠졌었던 일을 고백하며, “목적이 수단이 되고 수단이 목적으로 변해 버린 지난 날 나의 목회에 대한 슬프고 아픈 참회”라며 가슴을 치고 있었다.

그가 두번 째로 꼽는 ‘인간적 실패’란 사랑의 실패를 고백함이다. 그는 성서와 예수를 ‘사랑’으로 요약한다. 그에게 사랑의 실패란 곧 성서이해의 실패이며 예수신앙의 실패였다. 그의 고백이다.

<지난날 나의 목회는 ‘고객관리’라고 하는 차원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했다. 사랑으로 한 것이 아니라 의무와 책임으로 한 일은 결코 목회라고 불릴 수는 없다. 이 지구상에 단 한사람의 억울하고, 가난하고, 아파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사실은 그것까지도 목사의 책임이다. 목사는 사랑에 대하여 무한책임을 진 사람의 다른 이름이다.

공동묘지에 무덤의 숫자가 늘어난다고 해서 그것도 성장이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머릿수를 많이 채우는 것이 성장이 아니다. 사람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 오늘날 기독교는 머릿수가 그득한데 진심으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별로 많지 않다. 세상이 교회를 염려하는 시대가 되었다.

계속해서 교회를 다니자니 찜찜하고 안 다니자니 딱히 다른 할 일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한탄한다. 사람의 마음을 얻어야 하는데 사람의 마음은 사랑으로만 얻는다.>

이렇게 스스로를 실패자라고 규정한 홍목사는 그 실패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그에게 이제 남은 것은 오직 “감사”일 뿐이라고 외친다.

<그때 그렇게 실패하도록 허락해 주신 하나님, 그때 그렇게 아플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 그때 그렇게 넘어지도록 방치해 두신 그 하나님의 측량할 길 없는 사랑을 깨닫기 때문에> 이제 그가 오직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감사 뿐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한평생 자기 생각을 바꾸지 않고 똑같은 걸음걸이로 한결같은 길을 걸어왔다면 그것을 축복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언듯 그리 생각할 수 있는 일이지만 실제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에서는 비웃음만 살 뿐이다.

그러나 아무리 세상이 그리보여도 “움직이는 신”의 세상에서는 “사람이 한평생 예수에 대한 자기 생각을 바꾸지 않고 똑같은 걸음걸이로 한결같은 길을 걸어왔다면 그것은 바로 축복”이다.

한결같으신 선생님을 다시 뵐 수 있었던 일은 내게 축복이요, 감사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