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선생이 주는 교훈

l_2015042401003950000316611오늘 뉴스들을 훓어보다가 눈에 들어 온 경향신문 기사입니다.

10년 만에 신간 <담론>(돌베개)을 출간한 신영복 성공회대학교 석좌교수(74)를 인터뷰한 내용입니다. 그리고 그가 했다는 말을 여러번 곱씹어 봅니다.

“통일을 대박이라고 보는 것 자체가 경제주의적 발상입니다.

사실 통일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통일 과정에서 우리의 주체성이 보장되기 어렵다는 겁니다. 결국 사드는 배치하게 될 것이고 한·일 정상회담도 하게 될 것이라 봅니다. 그만큼 국가적 장래를 깊이 있게 생각하면서 결정 내릴 수 있는 자주성이 없지 않습니까.

주변 강대국의 이해관계가 동북아의 정치질서를 결정하고 남과 북이 발언권을 쥐는 것은 작습니다.

한반도의 오래된 민족사적 과제죠. 문제는 지도자, 정치인들이 역사적 의식이 없고 민족사적 관점이 없다는 것입니다.

정치는 뿌리를 잘 펴는 정본(政本)입니다. 그 뿌리는 사람입니다. 즉, 사람을 인간답게 키워내고 그들이 지닌 창의성·인간성을 극대화하는 시스템 실천이 정치인데 오히려 정권 획득과 재생산이 전부라고 아는 천민적 사고가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여러 번 있었습니다.

IMF, 2008년 금융위기 등 위기에 처했지만 그 역사적 계기를 성찰로까지 이끌지 못했습니다. 미봉책에만 급급했지요.

인간의 삶이 과연 어떤 의미가 있고 무엇이 중요한가에 대한 사고가 얕습니다. 변화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깊이 있게 천착해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고 그것이 커져야 합니다.

최근 인문학적 관심이 고조되고 우리 삶에 대한 성찰성이 사회 일각에서 많이 일어나고 있다고 봅니다. 곳곳에 그런 작은 숲을 만들어내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작은 숲들끼리 소통의 연대를 만들어간다면 사회적 변화의 역량을 축적할 수 있습니다.”

“작은 숲들끼리 소통의 연대를 만들어 나가는 일”이야말로 이 시대를 생각하며 살아가는 이들의 소명이라는 생각으로.

표심(票心) 그리고 어떤 대통령

한곳에서 오래 장사를 하다보니 단골손님들의 세대가 바뀌어 갑니다. 아주 오래 전 단골들 가운데는 세상 뜨신 분들도 많거니와, 오랜 단골 손님들은 이제 거의 은퇴를 했거나 준비를 하고 있는 분들이 많습니다. 이젠 결혼한 아들 딸들의 옷을 들고 손주들과 함께 가게를 들어서는 손님들도 제법 된답니다.

세월이 그렇게 흐른 것이지요.

그 세월 덕에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서로 나누고 지내는 손님들이 제법 된답니다. 특히 장성한 아이들 이야기와 은퇴 이후 삶에 대한 이야기는 단골 메뉴랍니다.

반면에 웬만해서는 꺼려하며 꺼내지 않는 이야기 주제도 있답니다. 바로 정치  이야기입니다. 종종 이런 주제의 화제를 꺼네는 손님들도 있지만 제가 좀 피하는 편이랍니다. 구태여 꺼내서 제게 득될 것이 없다는 장사속도 있겠지만 자칫 논쟁의 빌미를 만들 여지가 있기 때문이랍니다.

제가 사는 곳은 비교적 민주당세가 강한 곳이어서 주지사와 상원의원은 늘 민주당 몫이랍니다. 그러나 아주 보수적인 측면이 강한 곳이기도 하답니다. 손님들의 약 80%가 백인 중하층에 속하는 사람들인데 제 또래 손님들은 아주 보수성향이 강하답니다.

그런데 이쯤해서 가만히 돌이켜보니 손님들이나 저나 거리낌없이 이야기하면서 웃던 정치인이 한사람 있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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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기억하실만한 이름입니다. 바로 세라 페일린(Sarah Louise Palin)입니다. 2008년에 있었던 제 44대 미국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부통령 후보였던 인물입니다.(페일린이 방한했던 적이 있었다는 사실은 오늘 그녀의 사진을 검색하다 안 일이랍니다.)

당시 제 가게 손님들이 그녀에 대해 했던 말들이 아직도 기억난답니다.

“그 여자는 하와이가 아프리카에 있는 나라 이름인줄 알걸!”, “아마 그 여자가 너를 보면 북한에서 왔다고 할걸!”, “영어 알파벳을 다 쓸줄이나 알까 모르지?” 등등 이었답니다.

무지, 무식에 뻔뻔함의 대명사처럼 그녀의 이름이 회자되곤 했었답니다.

당시 공화당에서는 비교적 고령인 72살의 존 매케인(John Sidney McCain III)이 대통령후보였고, 민주당 오바마 현 대통령이 후보였지요. 민주당내 경선에서 패배한 힐러리 클린턴에게 쏠렸던 표심 특히 여성표심을 좀 잡아보겠다고 공화당이 내민 깜작 카드였는데 결과는 대실패였답니다.

그녀가 낙선한 선거 이후에도 한때 제법 메스콤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은 든든한 뒷배경이 되어준 이른바 “티파티(Tea party)”라고 하는 극우 강경파 때문이었답니다.

이 티파티라고 지칭되는 공화당네 극우 강경파들은 오바마라고 하면 거의 치를 떠는 수준이랍니다. 특히 오바마가 내세운 의료개혁법안인 오바마케어는 나라 망치는 주범으로 여긴답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재미있는 현상을 볼 수 있답니다.

저희 가게 손님들 가운데 페일린을 비웃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바마케어에 비난의 화살을 날린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네들은 공화당내 강경보스 그룹인 티파티 세력이나 운동에는 비판적이랍니다.

제가 사는 동네에 세라 페일린(Sarah Louise Palin)에 필적할만한 티타티(Tea party) 그룹의 샛별이었던 여성 정치인이 있었답니다. 크리스틴 오도넬(Christine Therese O’Donnell)이라는 여성입니다.

그녀는 오바마대통령의 러닝 메이드로 부통령이 된 이 곳 출신 상원이었던 Joe Biden의 의원자리를 놓고 2010년 중간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로 나섰답니다. 그때 그녀의 뒷배경이 된 것은 극우 보수 강경세력인 타파티와 극우 방송매체인 Fox News였답니다. 그녀는 일약 전국적인 인물로 부상했었답니다.

그러나 선거 결과는 당시 민주당 후보였던Chris Coons에게 57% 와 40%라는 현격한 차이로 상원의원 자리를 내어주고 만답니다.

오바마케어라는 의료개혁법으로 자신들의 주머니에서 돈이 나가는 것은 싫어하지만, 그 법안을 빌미로 한 극우 강경세력도 반대하는 이곳 표심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지요.

자신들의 이득과 손실에는 민감하지만 극우나 극좌의 강경한 변화에는 거부감을 나타내는 표심의 일반적인 현상은 아마 제가 사는 동네에 국한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티파티를 등에 업고 오는 2016년 대선 공화당 후보로 나선 테드 크루즈(Rafael Edward Ted Cruz)가 어떤 결과를 얻을지도 궁금하거니와, 세라 페일린(Sarah Louise Palin)과 참 흡사하다는 느낌을 같는 얼굴마담이 통치하는 어느 나라가 겹지기도해서 몇자 적어보는 것인데….

2008년 선거에서 공화당원조차 메케인과 페일린조에게 표를 던지지 못했던 까닭으로 고령의 메케인이 사고를 당했을 경우 페일린이 대통령이 되는 것은 도저히 못봐준다는 심리가 작동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답니다.

자기나라 말로 자기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듯한 대통령을 보면서 든 생각들이랍니다.

작은 바램 – 시대정신

지난  12일 힐러리 클린턴이  2016년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하면서 공개했던  동영상입니다.

”Everyday Americans need a champion, and I want to be that champion.” 평범한 미국인들이 필요로 하는 챔피온이 되겠다며 다음 대권에  도전한 것입니다.

아이를  키우다 직장으로  돌아가는 엄마,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을 준비하는  아시아계 젊은이, 사업을 시작하는  두  이민자 형제,  결혼을  앞둔  동성연애자  등  그야말로 평범하고 소수자들을 내세운  동영상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가족”을  강조했습니다.

제법  그럴듯한  영상입니다.

“힐러리 클린턴” – 그녀가 살아온 삶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그녀는 평범한 사람하고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아왔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명문 사립대인 웨슬리여자대학, 예일대학교 로스쿨 출신에 변호사, 주지사, 대통령 영부인, 상원의원, 국무장관 등을 거쳐온 그녀의 삶에서 평범한 사람들의 모습을 찾아내기는 어렵습니다.

가족만해도 그렇습니다. 그녀의 대선가도에서 가장 큰 장애물들 중 하나로 꼽히는 남편 빌 클린턴의 유명한 외도 사건과 두 부부의 관계를 들여다보면 그녀가 내새우는 핵심가치인 “가족”이라는 명제에서 별로 점수를 얻을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답니다.

그렇게본다면 힐러리 클린턴과 ‘평범한 사람들’ 그리고 ‘가족’이라는 이미지가 잘 맞아떨어지지가 않는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캠프는 그 두가지 명제를 전면에 내세웠습니다.

그녀와 그녀의 캠프가 표를 얻기위해 공략해야할 지점이 바로 그곳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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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릇 미국뿐만 아니라 주민들이 선거를 통해 권력행사권을 결정하는 국가의 모든 정치인들은 선거를 앞둔 주민들의 관심사를 공략하기 마련입니다. 힐러리 클리턴이 내세운 이미지 광고에서 시작하여 각종 공약들이 그런 촛점에 맞추어 생산되어지는 것입니다.

만에 하나, 클린턴이 당선되었다고 친다면 그녀와 그녀의 행정부가 ‘평범한 사람들’과 ‘가족’에 촛점을 맞추고 권력을 행사하는지를 가늠하고 판단하고 그렇게 하도록 요구하는 몫은 바로 그렇게 선택한 시민들의 것입니다.

이른바 민주주의 사회에서 민도를 측정해내는 하나의 방편입니다.

그런점에서 대한민국 보다는 좀 나은편에 속하지만 미국 역시 갈 길이 멀다는 생각이랍니다.

내세운 정책들과 내세운 정책들의 수행능력을 “한표 행사의 권력”을 누리는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데 이미지와 상징조작에 속아 던져 놓고는 잊고사는 주권자들이 넘치는 사회는 갈 길이 멀기만 한 것이지요.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 내세운 거의 모든 정책공약들이 거짓으로 판명난 대통령과 그 정권이 여전히 40%대의 지지율을 누리고 있다는 한국 뉴스들을 볼 때면 참 남감한 생각이 들곤한답니다.

“경제”, “민생”이라는 화두는 언제 어느 나라 선거에서건 중요한 명제입니다. 그러나 그 명제에 그 시대 그 곳에 사는 주권자들의 시대정신을 담아내지 않는한 허망한 것입니다.

미국이나 대한민국이나 지금 필요한 시대정신은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만드는 일”이 아닐까 합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한 이민자로서 내게 주어진 한표의 행사 권리를 놓고 늘 꼼꼼히 따지려 애쓰는 것은 바로 이 땅 미국과 내 영원한 모국 대한민국이 그런 세상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때문이랍니다.

소수라고?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아 해외에서 살고있는 한인들 가운데 뜻이 엇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 전세계 동시 추모행사를 벌이고 있는 주간입니다.

이 행사에 함께하는 사람들을  숫자나 퍼센티지로  따지자면 아마 한반도 남북으로 나누어져 사는 사람들을 비롯하여 전세계에 퍼져사는 전체 한인인구 가운데 지극히 작은, 어쩌면 무시해도 좋을만큼의 숫자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어제 필라델피아 외곽 Ambler에 있는 작은 교회당에서 모인 필라델피아모임도 그 중 하나랍니다.

필라델피아를 중심으로 가까운 남부 뉴저지와 델라웨어주까지 포함하는 지역에 살고 있는 한인수는  비록 고무줄 통계이기는 하기만 대충 4만명 정도로 가늠하곤 한답니다.

그 4만여명 가운데 약 50여명이 함께 한 모임이었답니다. 그야말로 그냥 무시해도 좋은 숫자랍니다.

 숫자 생각을 하다보니 딱 대비되는 것이 있답니다. 한국시간 4월 16일에 세월호 참사 일주기를 추모하기 위해 시청앞에 모였던 사람들의 숫자랍니다. 5만명 정도(주최측 추산)라고 하더군요.

오천만 가운데 오만, 사만 가운데 오십명. 얼추 비슷한 대비지요.

아마 전세계 동시추모대회라고 이름을 붙인 이 행사에  참여한 한인들은 그지역에 사시는 분들 숫자 대비 얼추 비슷한 정도의 사람들일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그냥 무시해도 좋은 숫자라는 말씀입니다.

막말로 한줌거리도 안되는 사람들이 저마다 사는 곳에서 모여 “전세계 동시 추모…”운운하는 행사였답니다.

어제 필라델피아 추모행사에 참여했던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아도 정말 무시해도 좋을만큼 적은 사람들이 자기들만의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처럼 보였답니다.

우선 어제 있었던 필라델피아 행사를 잠시 소개드리지요.

조촐하지만 정성드려 차린 제단에 헌화를 하며 묵념을 하므로 “내가 왜 여기 와 있을까”하는 물음에 대한 자답(自答)을 얻는  것으로 행사를 시작했답니다.

그리고 무용안무가 김정웅씨가 만든 세월호 참사 무용극과 추모단편 영화를 함께 보았답니다. 특별히 안무가 김정웅씨가 “이웃의 아픔을 온몸으로 듣고  가슴으로 공감하는” 몸동작을 생활화하자는 설명에  몸치인 저도 저절로  동작을 따라하고  있었답니다.

여러 순서들 가운데 제 생각으로 이 날의 하일라이트는 손정례님의 춤입니다. 한풀이 춤이었답니다. 이 동네에서는 알려진 고수(鼓手)인 정세영선생의 장고와 추임새에 맟추어 풀어낸 손정례선생님의 춤사위는 단연 이 행사의 으뜸이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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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나이 올해 아흔이랍니다.

그리고…

참가한 이들이 저마다 모임에 참여하게 된 까닭과 생각들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답니다.

“ ‘제발 이젠 그만해라! 그거 왜 하냐?’하는 소리를 들으며 여기 왔습니다. 제 양심의 소리 때문에…”

“목사입니다. 목사여서 부끄럽습니다. 교회가 이 시대의 아픔에 동참하지 못하는 모습에 부끄럽습니다. 그 부끄러움을 안고 살고자 합니다.”

“아주 평범한 가정주부였습니다. 제가 이런 모임에 참석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이젠 이런 모임에 함께하지 않고는 우리 아이들을 바로 바라보는 것이 부끄러울 것 같습니다.”

“늘 떠나온 모국이 잘 되기만을 바랍니다. 그래서 이런 모임을 주관하곤 합니다. 그런데 우린 늘 소수여서 마음이 아픔니다.”

“왜? 우리는 역사를 정리하지 못하고 살아왔는지 그게 아픔입니다. 그리고 여기서 정리하지 못하면 우리 한인들의 미래가 고난에 빠질까봐, 행여라도 단절되지 않을까 그런 염려가 있습니다.”

등등의 이야기가 이어졌습니다.

아픔을 함께 나누는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우린 소수라는 절박한 소리를 느낄 수 있었답니다.

그런데 저는 바로 그 지점에서 희망을 보았답니다.

“소수” – 바로 우리들은 적은 숫자라는 데에서 희망을 본 것이랍니다.

무릇 역사란 소수의 사람들이 이웃사람들을 생각하며 확장시켜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수이기 때문에 당해야만 했던 모든 아픔과 수모와 천덕을 이겨내면서 말입니다.

그 힘은 “그 길을 걷는 사람들만이 느낄 수 있는 기쁨”에서 온답니다.

그 “기쁨”은 바로 소수만이 누리는 축복이랍니다.

이제 초상(初喪)입니다.

sewol22“내가 왜 수학여행을 와서, 내가 왜 세월호를 타서 , 나는 꿈이 있는데, 나는 살고 싶은데…”

침몰후 바다속으로 잠겨가는 배안에서 열일곱살 사내아이가 외쳤던  절규입니다. 고등학교 이학년이었던 김동혁군의 꿈은 그렇게 그의 절규와 함께 수장(水葬)되었습니다. 그때, 거기에 함께 있었던 305명 가운데 살아 뭍으로 돌아온 사람은 단 사람도 없습니다. 그 중 아홉명은 아직도 바다속에서 잠겨있건만 벌써 일년이 흘렀습니다.

예전 우리 조상들은 사람이 죽고난 후 일년이 지나면 소상(小祥)이라는 의례를 치루었습니다. 소상이라고 말할 때 쓰이는 상(祥)은 죽었다는 뜻으로 쓰는 상(喪)이 아니라 상서롭다는 뜻의 상자를 썻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지나 다시 봄이 되었으니 이제 슬퍼하는 마음을 잊고 좋은 계절을 맞으라는 뜻입니다. 슬픔에 겨워 식음을 전폐하던 세월을 접고 이제 새로운 세상을 맞으라는 뜻의 의례였습니다. 물론 이제는 거의 잊혀진 옛풍습일 뿐입니다.

이미 옛것이 되어 모두에게 잊혀진 이 풍습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들 바로 세월호 유가족들과 실종자 가족들입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자식들과 기둥이자 삶의 의미였던 가족들을 잃고 난 일년맞이가 그들에겐 다시 초상(初喪)이 되었습니다.

2015년 4월 16일을 맞이하는 세월호 유가족들과 실종자가족들은 다시 상복을 입고 삭발을 했습니다. 슬픔을 잊는 때가 아니라 슬픔에 아픔을 더하는 일년맞이입니다.

2014년 4월 16일, 봄이 흐드러진 제주의 풍광 대신 진도 앞바다 추운 겨울보다 차디찬 바다물 속으로 잠겨가며 외쳤던 김동혁군의 절규는 2015년 4월 16일 그의 어머니 김성실님의 소리가 되어 우리를 향해 이렇게 외치고 있습니다.

“어떻게 진상규명을 할지 이야기하는 사람은 한명도 없다. 하나같이 다하는 이야기는 추모와 기억 뿐이다.”

2015년 4월 16일, 여기 필라델피아에서는 김동혁군과 305명의 넋을 추모하지 않으려합니다. 아직 그들이 소리치며 절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내가 왜 수학여행을 와서, 내가 왜 세월호를 타서 , 나는 꿈이 있는데, 나는 살고 싶은데…”

그들이 아직 살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아직 꿈을 꾸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오늘 삼보일배의 느린 걸음으로 광화문광장으로 향해 나아가는 그들의 아버지들과 누이들과 함께, 오늘도 봄이 가득한 안산과 광화문광장 그리고 삶의 현장에서 그들의 꿈으로 사는 어머니들과 오라비들와 함께 숨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잊지 않으려합니다.

“우리는 외칠 것입니다. 하나 하나 떨어져 나가 단 한사람이 남더라도 외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돌이 되어 외칠 것입니다. 끝까지 단 한사람만이라도 남아 있기만 하다면 그 순간까지 부디 우리들을 잊지 말아 주십시요. 기억해 주십시요. 그것만이 우리들의 소망입니다. 그 바램으로 여기 필라델피아까지 우리들이 온 까닭입니다.”

그렇게 우리들의 가슴에 잊지못할 당부를 남겨놓고 다시 상복을 차려입은 김동혁군의 어머니를 기억하기 때문입니다.

진실의 반대말은 거짓이 아니라 망각 곧 잊어버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진실을 지키기 위해 잊지 않을 것입니다. 잊지 않을 뿐 아니라 그 아픔과 슬픔의 진실 규명을 위해 작은 노력이나마 게을리하지 않을 것입니다.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며 온몸, 온힘을 다해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들의 꿈을 위하여 손톱이 다 빠지고 손가락이 까맣게 타토록 절규했던 넋들을 기리는 일은 바로 이제부터 우리들이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2015년 4월 16일, 이제 초상입니다.

416 참사 1주기 전세계 해외동포 동시 추모 집회 from SESAMO on Vimeo.

나라 망할 짓 하는 놈들을 보며 마땅히 일어야 할 자각(自覺)

“100년 전 이 나라가 망했다는 사실은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그 사실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지금도 나라 망칠 짓을 태연하게 저지르고 있는 사람들이 있고, 따져보면 100년 전보다도 더 심한 상황이다. 조선 망국이 근대화를 위한 좋은 기회가 되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까지 있지 않은가. 망국의 의미를 철저하게 인식하는 것이 정신적 광복을 위해 꼭 필요한 일이다.”

망국<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의 저자인 역사학자 김기협의 말입니다.

온라인 매체 프레시안에 게제되었던  그의 글  <해방일기>는 제가 즐겨찾던 글이기도 하였습니다. 매체 프레시안과 그 곳에 게제되는 컬럼들을 제가 다 흔쾌히 받아 들이지는 못하지만, 조중동이나 한겨레, 경향, 오마이 역시 그 언저리에 있다는 생각이고 보면 깨우침과 생각은 늘 제 몫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무튼 역사학자 김기협의 노력은 평가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는 20세기 초에 일어났던 조선 망국의 요인을 두가지로 적시합니다.

권력의 공공성 상실이 첫째요, 도덕 정치의 상실이 두번 째라는 것입니다.

그가 적시했던 조선 망국의 요인 두가지는 망국 이후 일제 식민지와 분단의 역사를 거쳐 오늘에 이르게까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견고해져서 ‘엽기적 수준’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는 그의 주장에 딱히 겨룰만한 반론을 찾지 못하고 있답니다.

그의 말입니다.

” 한국인들, 특히 엘리트 계층 한국인들의 도덕성 수준이 20세기에 들어와 형편없이 떨어진 것은 국가가 망하고 이민족의 악질적 지배를 받은 때문이었다. 그런데 1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밑바닥에서 헤매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지금 우리는 엽기적 수준으로 부도덕한 정치-경제 시스템에 빠져 있다. 앞장서서 문제를 드러내고 있는 몇몇 사람만 처리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무능한 진보보다 부패한 보수가 낫다’, 도덕성이야 어쨌든 경제를 살릴 능력만 있으면 된다’는 국민의 사고방식을 점검할 필요가 있다.”  그의 책 <망국의 역사, 조선을 읽다>에서

나라 망할 짓들만 골라서 자행하는 놈들이 교활하게 목청만 높이는데 그 소리에 고개 끄덕이는 주권자들이 늘 과반(過半)에 육박하는 현실을 보면 그가 옳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이른바 엘리트들의 타락이 비단 우리 한인들에게만 국한된 일도 아니거니와 그가 말하는 ‘국민적 사고방식’에 대한 자각의 역사가 일천함에 비한다면 그 변화의 속도는 빠르다는 낙천적 생각이 앞선 까닭은 바로 세월호 유가족들 때문이랍니다.

세월호 참사 일주년을 맞으며 삼배 일보의 느린 걸음이지만 쉼없이 목표를 향해 전진해 나가는 이호진 부녀와 연대의 끈을 결코 놓지 않는 유가족들의 모습은 가히 지난 백여년 이래 처음 경험하는 자각이라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계약이란?

성서 – 우리들의 이야기 6

이스라엘의 희망은 구약성서에 기록되어 있는 고난의 시대 이래로 수 세기 동안 유태인들을 괴롭혀온 참혹한 고난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도 살아있다.  최근사 아우슈비츠와 그 외의 다른 죽음의 수용소에서 조직적으로 근절되고, 탈출할 수 있는 모든 출구가 닫혀진 것처럼 보였던 나치 횡포의 무시무시한 시절까지도… (John Macquarrie  의 “인간이 되신 하나님”에서)

미쳐가는 나라, 미쳐가는 세상?

손님 – “그 뉴스 봤니?”

아내 – “무슨 뉴스?”

손님 – “사우스 캐롤라이나에서 일어난 거 말야.”

아내 – “음, 봤지요.”

손님 – “나라가 미쳐가고 있는 거 같아”

아내 – “……”

손님 – “차라리 한국으로 갔으면 좋겠어.”

아내 – “거제도로? 거기도 예전에 한국이 아닌데…”

손님 – “암튼,  미국은 미쳐가고 있어”

오늘 제 가게에서 한 손님과 제 아내가 나눈 대화랍니다.

Morris씨는 이제 제 가게 손님 가운데 유일한 한국전쟁 참전 용사입니다. 미군으로 복무하면서 한국을 다녀온 경험이 있는 손님들은 많지만 한국전쟁 참전 경험이 있는 분들은 최근 수년 이래 모두 이 세상을 떠났고 Morris씨만 남았답니다.

그는 여든 여섯 나이에 비해 아직 정정한 편입니다. 손수운전은 물론이거니와 지팡이 없이도 걸음걸이가 그리 무겁지 않답니다.

저희 부부가 아무리 바빠도 노인들 이야기는 들어주는 시늉이라도 열심히 하는 까닭은 그 나이때에 부모님들이 계시기 때문일겝니다.

Morris씨는 한국전쟁 중에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답니다. 그이가 겪었던 당시 포로수용소의 이야기들은 저희 부부가 듣는 그의 단골 레파토리이기도 합니다. Morris씨가 이름 석자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는 거제도 여인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는 메뉴입니다.

그 Morris씨가 오늘 미국이 미쳐가고 있다며 분통을 터트린 까닭은South Carolina주 North Charleston에서 일어난 일 때문이었습니다. 경찰의 단속을 거부하고 도망가던 Walter Scott이라는 흑인의 등을 향해 8발의 총알을 쏘아 그를 죽인 백인 경찰 Michael Thomas Slager에 행위를 대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며 분노한 것입니다.

사건 발생 초기 정당방위라는경찰과 경찰당국의 주장은 한 시민이 찍어놓은 동영상으로 하여 거짓으로 판명이 났고, 도망가는 피해자를 등뒤에서 정조준하여 살해한 것임이 드러난 일입니다.

아내로부터  Morris씨와  나누었던 이야기를 듣고는  백인인  Morris씨가 아닌 흑인인  Morrison 씨가 떠올랐답니다.

home-by-toni-morrison1Toni Morrison은  1993년 흑인으로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미국을 대표하는 소설가 중에 한사람입니다. 그녀는 지난 2012년에  “Home”이라는 작품을 발표했습니다.

그 소설에서 24살 청년으로 등장하는 주인공Frank Money는 제 가게 손님 Morris씨와 동년배인 흑인입니다.

Frank Money 역시 한국전쟁에 참전합니다.

그가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된 이유는 이  미국땅에서 흑인들이 겪어냈던 아픔 때문이었다고 작가  Toni Morrison은 이야기합니다.

소설속 주인공 Frank Money는 남부 조지아주 로터스 출신의 흑인 청년입니다. 그는 아주 어릴 적에 겪었던 일로 정신적으로 심한 고통을 안고 살아갑니다. 그의 경험이란 한 흑인 남자가 백인들에 의해 생매장 당하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한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훗날, 그렇게 생매장당한 흑인은 백인들의 놀이도구로 그렇게 죽게 된 사실을 알게됩니다.

백인들은 흑인 아버지와 아들을 싸우게 해놓고는 내기를 벌입니다. 둘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싸워야한다는 조건을 내걸고 말입니다. 그때 흑인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합니다. “네가 나를 죽이라고.” 흑인 아버지는 결국 생매장을 당합니다.

작가 Toni Morrison는 1940년대에만 해도 여전히 일고나고 있었던 미국의 원시적이고 병적인 인종차별 현장을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소설속 주인공 Frank Money는 이런 병적인 사회로부터 탈출하고자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평범한 삶의 현장에서 단지 피부색이라는 판단 기준에 따라 누군가에는 심심풀이 놀이가 되고, 또 다른 누구가는 목숨을 걸어야하는 노리개가 되어도 뉴스거리가 되지 않았던 세상을 “미쳐가는 세상”이라는 생각없이 살아왔을 Morris씨가, 오늘날 공권력이란 힘을 빌어 도망가는 흑인 용의자의 등뒤를 향해 정조준하여 총알을 8발이나 발사한 백인 경찰을 보며 “미쳐가는 세상”이라고 한탄하는 모습을 보면서, 과연 “미쳐가는 것일까?” 아님 “그래도 나아지고 있는게 아닐까?”하는 생각 사이에서 하루를 보냈답니다.

Morris씨와 Morrison의 주인공 Frank가 겪여냈을 1950여년 그 전쟁통에서 일어났던  “국민방위군 사건”과  2015년 오늘  일주기를 맞이하는 “세월호참사 사건” 사이의 연계 역시 그선상에서 일어난 발상이랍니다.

두가지 사건 모두 무지, 무능, 탐욕이라는 공통점들이 있지만 사건을 겪어낸 가족들의 행태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그 다름에서 희망을 보게된답니다.

무지, 무능, 탐욕의 바탕, 바탈까지 부끄럼없이 뻔뻔스럽게 드러내는 권력을 보면 “미쳐가는 것”이 틀림없어 보이지만, 세월호 유가족들이 지켜낸 꿋꿋한 지난 일년의 행태를 보노라면 “그래도 나아지고 있는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는 생각 말입니다.

멋진 찬양 – 상상력

상상력구약성서에는 신인 야훼 하나님과 인간인 히브리(유다, 이스라엘) 공동체가 계약을 맺는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여러 계약이야기들 가운데 유명한 것들은 모세가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고 야훼 하나님과 히브리족과 맺는 계약이야기와 다윗왕이 통일왕국을 이룬 후 야훼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는 계약이야기입니다.

이 두가지 계약이야기는 구약성서의 중심 축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이 두개의 계약이야기를 서로 상충 곧 부딪히는 개념이라라고 해석한 사람이 있습니다.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이라는 미국의 성서학자입니다.

그는 다윗과 하나님과 맺은 계약의 밑바탕에 깔린 생각을 “왕권의식(Royal Consciousness)”이라고 규정합니다. 이는 다윗, 솔로몬과 그 후의 왕과 제사장들 중심으로 축복이 이어져 나가는 믿음과 소망을 바탕으로 한 계약이라고 그는 주장합니다.

좀 더 쉽게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의 이야기를 풀어 쓰자면 이런 말입니다.

잘 사는 게 축복인데 잘 살기 위해서는 강력한 왕권이 필요하고 그 왕권은 바로 신이 부여해 준다는 계약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거기에 더해 선민사상 곧 신에게 택함을 받은 백성인 유대족에게만 그런 왕권을 부여받은 메시아가 등장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계약 이야기에 바탕을 두고 오늘날 팔레스타인의 이스라엘이 이따금 벌이는 국제 무법자같은 행동이 나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종종 개독교 소리를 듣는 오늘날 한인 교회나 신자들이 “예수 천당”이라며 ‘괴롭고 힘든 이 세상보다 천당가서 잘 살자’는 삐뚫어진 신앙을 외치는 일도 바로 이런 계약 정신이 한몫하고 있다는 해석이 따를 수 있답니다.

잘 사는 축복을 위해서라면 왕권이라는 신과의 중간 매개자가 필요하고 그 매개자가 억압과 착취를 하더라도 그 힘을 신에게 부여받았음으로 정당하다는 신앙이 자리를 잡게 된다는 말입니다.

또한 이 계약은 무조건적으로 신이 이스라엘에게(특히 왕권에게) 내려준다는 계약입니다.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는 이와는 대척점에 있는 모세와 신과의 계약정신 바탕에는 “대안의식(Alternative Consciousness)”이 자리잡고 있다고 말합니다.

에집트 노예상태에서 해방시켜준 하나님과 노예에서 해방이 된 히브리족과의 쌍방계약인 이 계약은 잘사는 것에 초점을 두기보다 더불어 함께 먹고 사는데에 초점이 있다고 합니다.

잘살게 해준다는 약속을 빌미로 억압과 착취를 정당화하는 매개자가 있는 계약이 아니라 올바른 정의와 공평이 강과 같이 흐르는 세상에 대한 계약이라는 것입니다.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은 이런 모세와 하나님과의 맺은 형태의 계약이 이루어지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상상력 특히 예언자적 상상력(Prophetic Imagination)이 필요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그의 책  <예언자적 상상력(The Prophetic Imagination)>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물어야 할 물음은 자유가 현실적인지, 실천 가능한지, 실현가능한지 여부가 아니라, 그것이 상상할 수 있는 일인가 하는 것이다. 우리의 의식과 상상력이 왕권 의식에 의해 철저하게 공략당하고 흡수되어 버려서 대안적인 사고를 품을 용기나 능력까지 빼앗겨 버린 것은 아닌지 물어 볼 필요가 있다.

성취에 앞서 상상력이 와야 한다. 우리의 문화는 거의 모든 것을 성취할 만큼 힘이 있지만, 아무것도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무력하기도하다. 어떤 것이든 남김없이 성취할 수 있게 해 주는 바로 그 왕권 의식이 상상력을 억눌러 버린다. 상상력은 위험하다는 것이 그 이유다. 따라서 모든 전체주의 체제는 예술가를 두려워한다. 지배 현실에 도전하여 싸울 수 있는 수단으로써 마지막 남은 것이 시적 상상력이다.>

부활주일을 보내고,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바라보면서 2015년 오늘을 사는 한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리고 한사람의 예수쟁이로서 떠올려 본 월터 브루그만(Walter Brueggemann)입니다.

종말론적 삶을 강조하는 신 앞에서  예언자적 상상력은 사람이 그에게 화답하는 정말 멋진 찬양이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하나님의 이름들

부활의 아침입니다.

예수가 십자가에 달려 죽었다가 다시 사셨다는 사건을 나에 대한 구원 사건으로 이해하고 믿게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그의 은총이고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은 누구에게나 늘 열려있습니다.

다만 폴 틸리히(Paul Johannes Tillich)의 선언처럼  신의 용납(은혜와 은총)을 용납(받아드리는) 하는 것은 사람의 몫일 따름입니다.

그러므로 부활의 아침은 누구에게나 언제나 열려있습니다.

성서 – 우리들의 이야기 다섯 번째이야기입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이름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새의 노래소리에 귀 기울여지는 아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