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전쟁 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2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1부 : 태평양 전쟁(太平洋戰爭)
그들의 야욕
일본은 진주만 기습에 이어, 서남 태평양에 있는 수 많은 섬들과 동남 아시아 여러나라를 단숨에 휩쓸었다. 그들은 전쟁이 시작된 지 반년만에 필리핀, 말레이 반도, 싱가포르. 버마등도 점령했고, 이어 솔로몬 군도, 뉴기니, 자바, 수마트라에도 그들의 세력을 넓혀 나아갔다.
미국과 영국을 멸망시킨다는 뜻으로 미영격멸(美英擊滅)이라는 구호도 외쳤던 일본은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을 만드는 것이라고 하면서 그런 전쟁을 도발했다.
대동아 공영권은 당시 일본 정부와 일본군에 의해 만들어지고 보급된 개념으로, 일본제국이 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침략하면서 그들이 내세운 표어 중 하나다. <대동아>란 일본(한국 포함), 만주, 중국에 동남 아시아를 더한 지역 이라는 뜻으로 쓰인 말이다.
대동아 공영권의 요지는 위 아시아 지역에서 서양 세력을 몰아내고, 그 지역의 공존(共存)과 공영(共榮)을 이루어 나아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일본의 침략행위를 정당화하려는 것과 일본의 이익을 위해 일본이 만들어낸 한 구상이었다. <태평양전쟁>을 <대동아전쟁> 이라고도 부른 일본이 그 전쟁에서 패함으로써, 대동아공영권은 일본 의 헛된 꿈과 표어로 끝났다.
각설하고, <그런 전쟁이 있게 되기까지 일본은 어떤 나라였나>에 관한 이야기를 간추려 본다. 19세기 후반, 일본은 쇼군(將軍)이 정무를 맡아보던 바꾸후(幕府)가 무너지고, 중앙 집권 통일 국가의 건설과 자본주의 형성의 기점이 된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시대로 변했다.
그후 그들은 군사적이거나 경제적으로 다른 나라를 정복하여 큰 나라를 건설하려는 침략적인 야욕(野慾)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한 <영토 확장>의 꿈을 꾸면서 그들은 조선의 국권을 빼앗는 등 제국주의 나라로 변했다.
역전승(逆轉勝)
역전승은 처음에는 지다가 나중에 가서 이긴다는 것인데, 태평양전쟁 때 있었던 미국과 일본과의 전쟁이 그런 것이다.
일본 비행대들이 진주만에 정박 중인 미국 군함들을 기습공격한 것을 시작으로 일어난 태평양전쟁에서 일본군은 연전연승(連戰連勝)을 거두며 파죽지세(破竹之勢)로 그들의 점령지역을 넓혀나갔다.
하지만, 그 전쟁이 일어난 지 반년만에 전황(戰況)은 바뀌어 일본군의 기세가 꺾기게 된 것이다.
태평양전쟁의 한 부분이고 일본이 태평양에서의 제해권과 제공권을 제압(制壓)당하게 된 <미드웨이 해전 (Battle of Midway)>의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은 것이다. 진주만을 기습공격하여 기세(氣勢)를 떨치던 일본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그들의 기(氣)가 꺾이기 시작했다.
약 반년동인 거침없이 그들의 점령지역을 넓혀나가고 있던 일본은 1942년 6월 4일(미드웨이 현지 시간), 하와이 군도(群島) 멘 서쪽 미드웨이에서 펼쳐진 미국과의 해전(海戰)에서 되돌릴 수 없는 패전을 하게 된다.
일본 함대의 주력 항공모함 4척이 침몰한 데다 3500명의 병력과 300대 의 항공기를 잃었다.
태평양전쟁의 주도권(主導權)이 하루아침에 미국으로 넘어간 것이다.
일본의 패전은 그럴 수박에 없는 복합요소들이 한꺼번에 작용헸기 때문이었다.
미드웨이 해전은 태평양의 전략 요충지(要衝地)인 미드웨이 섬을 공격하려던 일본 군함들이 벌떼처럼 달려든 미국 전투기들의 공격을 받아 태평양전쟁의 판도(版圖)를 바꾼 해전이다.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국이 크게 승리한 후, 전세(戰勢)는 역전되어 일본군이 퇴각하거나 전멸하기 시작했다.
전쟁 초기에 일본군에게 점령당했던 곳의 범위가 점점 줄어들었고, 결국은 미국 비행기들이 일본 본토 하늘을 떼지어 날아다니며 곳곳에 폭탄과 소이탄(燒夷彈)을 떨어뜨렸다.
소이탄은 화염(火焰)이나 고열(高熱)로 사람이나 건조물 등을 살상한다.
미군이 오끼나와(沖繩)를 점령한 다음부터 미국 비행기들의 일본본토 공습이 더욱 심해졌다. 오끼나와에서 가장 가까운 현이 가고시마(鹿兒島)다. (현은 한국의 도와 같은 일본의 행정구역 단위 이름이다.)
가고시마 상공은 그런 비행기들이 날아다니는 길목이 되었다.
가고시마에 다루미즈(垂水)라는 곳이 있다.
그곳엔 일본군의 군사용 땅굴을 만드는 공사장과 군용물자를 저장하는 시설이 있었는데, 미군 비행기가 그곳에 전단(傳單)을 뿌렸다.
바람에 날려 이리저리 굴러다니는 수많은 전단엔 여러 가지 내용들이 담겨 있었다.
대개 만화그림이 섞인 것이다. 그 전단 중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긴 것도 있었다.
11시 55분을 나타내는 시계가 그려진 그림인데, 1부터 11까지는 숫자 대신 미군들이 점령한 섬들이고, 각 섬에는 부러진 깃대에 달린 일본 국기들이 있다.
11은 오끼나와다.
도쿄(東京)를 상징하는 12엔 부러지지 않은 일장기 깃대가 있다. 그것은“곧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하게 될 것이다.”라는 암시가 담긴 전단이다.
일본의 패전
<곧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하게 될 것이다.>라는 암시가 담긴 전단이 뿌려진 다음,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끼(長崎)에 각각 원자탄이 떨어졌다.
때는 1945년 8월 6일과 9일이었다.
태평양전쟁 초기에 일본은 그들이 원하던 섬들을 점령하는데 성공했으 나, 연합군의 해군과 공군력을 완전히 없앨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일본 비행기들의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미태평양함대가 일본에게 당하 는 등, 일본군이 연전연승(連戰連勝)을 거듭하며 기고만장(氣高萬丈) 하여 동남 아시아 일대와 태평양 일부를 휩쓸었다.
하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결국 그 기세는 꺾이고, 일본 본토가 ‘원자탄 세례’를 받은 것이다.
<대동아공영권>이라는 구실을 내세워 <대동아전쟁>이라는 것을 일으킨 제국주의 일본은 아시아 여러 나라를 침략했고, 마침내 전쟁을 일으켜 미국에 대들더니 결국은 그들 머리 위에 원자탄이 떨어지게 되었다.
앞에 적은대로 가고시마에 다루미즈(垂水)라는 곳이 있고, 그곳엔 일본군의 군사용 땅굴을 만드는 공사장이 있었다.
1945년 8월 15일에 나는 그곳에서 전쟁이 끝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날, 히로히토(裕仁) 일본 천황이 무조건항복을 한다는 방송을 했는 데, 전쟁을 시작한 지 3년 9개월만에 일본이 연합국에 항복한 것이다.
거의 70년 전에 있었던 이야기다.
그리고 새로운 두 세대(世代)가 생겼다. 패적국이 되었던 일본이 숙였던 고개를 들어 세우고 있다.
하와이 시간으로 1941년 12월 7일 이른 아침에, 한 떼의 일본 해군 비행기가 하와이 진주만(Pearl Harbor)에 있는 미국 군함들을 기습하여 공격함으로 생긴 것이 태평양전쟁의 시작이다,
우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 도서실에 관한 이야기와 태평양전쟁 을 소재로 하여 만든 영화에 관한 이야기부터 적는다.
그 도서실에 있는 책들은 아파트 주민들을 위한 것인데, 나는 가끔 그 도서실에 가서 보는 책이 있다.
그 책은 도서실 안에서만 읽을 수 있도록 된 규정 때문이다.
책 이름은 ‘ILLUSTRATED WORLD WAR II ENCYCLOPEDIA’고, 모두 24권 으로 되어 있다. 책 이름이 말해주듯이 사진이나 삽화가 많이 들어 있는 것인데, 그 책에 실린 사진이나 삽화 등이 태평양전쟁 때의 내 기억을 더욱 생생(生生)하게 해주고 있다.
태평양전쟁 당시 내가 살아온 것을 생각나게 해주는 것이 또 있다.
물론 내가 직접 겪은 것은 아니고, 그 당시의 세상이 그러했다는 것을 회상(回想)해볼 수 있는 내용이 담긴 것이기 때문에 그러한 이야기 한 토막을 적어보려고 한다.
내용은 이런 것이다.
태평양전쟁을 소재로 하여 만든 영화에 관한 것인데 두 가지다.
그 중 하나는 1970년에 나온 <도라 도라 도라 (Tora Tora Tora)>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2011년에 나온 <연합 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 태평양 전쟁 70년 째의 진실>이라는 영화다.
<도라 도라 도라 (Tora Tora Tora)>는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이 진주만을 기습하여, 그곳에 있는 미합중국 태평양 함대를 공격함으로 일어나게 된 것을 다룬 다큐멘터리적인 영화인데, 1971년 아카데미 특수시각효과상(特殊視覺效果賞)을 받은 작품이다.
그 작품의 줄거리는 이렇다.
1941년12월 7일 (일요일) 아침, 진주만에 정박(碇泊) 중인 미합중국 태평양 함대는 그곳 상공에 갑자기 나타난 일본 해군 비행기들의 기습 공격을 받는다.
한나절도 못되어 그곳에 있던 미국 군함들의 대부분이 박살난다.
그 비행기들은 감쪽같이 하와이 가까이까지 접근한 일본 연합함대 항공 모함에서 날아온 일본 해군 함재기(艦載機)들이다.
일본군의 그런 공격으로 미일전쟁(美日戰爭)이라고도 하는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그러한 것에 앞서, 독일, 이태리, 일본의 3국 동맹계약이 이루어지자, 일본 군부는 미국 함대들이 모여 있는 진주만을 기습공격할 것을 결정 한다.
여러 차례 거듭되는 비행사들의 훈련을 통해 진주만 기습작전을 빈틈 없이 꾸민 일본 전투기들은 마침내 진주만을 향한다.
한편, 그런 사실을 모르는 진주만의 미군 사령관은 전투기들과 항공 모함들을 한곳에 모아 배치해 놓고, 방심한 채 휴일을 보내려 한다.
그러나 일본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주시하던 미 정보부에서는 일본 대사관에 도착하는 비밀암호를 해독하여 일본의 전쟁 위협을 경고하지 만 상부에서는 이를 무시하고, 거듭되는 암호해독문서조차 제대로 전달 되지 않는다.
마침내 진주만 상공에 도착한 일본 전투기들은 작전성공을 알리는 암호인‘도라 도라 도라’를 외치고, 환호성을 지르며 진주만에 있는 미국 군함들을 향해 무차별 폭격을 시작한다.
진주만에 있는 미국 군함과 비행기들은 모두 박살나 버리고, 그곳은 수라장이 되어버린 채 불바다로 변한다.
한편, 일본은 공습 후 미국에 선전포고를 하고, 전 미국인들은 일본의 야비한 행위에 대해 놀라고 있다.
그러한 와중(渦中)에, 진주만 섬 근처에 정박 중이던 미 항공모함과 전투기들은 일본 비행기들의 폭격을 피하고, 일본군과의 전투에 돌입 한다.
<연합 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 – 태평양 전쟁 70년 째의 진실>이라는 영화의 내용은 이런 것이다.
태평양전쟁 때 일본제국 해군 연합함대 사령관인 야먀모토 이소로쿠 (山本 五十六)에 관한 이야기가 담긴 것인데, 일본의 침략적인 것은 제외하고 정치적 의도에 초점을 맞춰 만든 것으로, 야먀모토 이소로쿠 의 발자취를 통해 태평양전쟁의 개전(開戰)과 경과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1943년에 그는 전선시찰에 나섰다가 남태평양 상공에서 비행 중, 미군 비행기의 공격으로 목숨을 일었다.
한편, 일본의 진주만 공격 당시 침몰한 전함 애리조나호를 기념하는 그 배는 미국의 역사박물관이 돼어 있다, 선전포고를 하지 않고 일본이 시작한 태평양전쟁의 막이 오른 지 70년 이 지났다. 진주만은 그러한 역사가 숨쉬고 있는 곳이다.
그 전쟁이 끝나게 될 무렵에 일본은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끼(長崎) 에 떨어진 두 발의 원자탄 세례를 받았다. 역사가 시작된 후, 처음으로 원자탄이 쓰여진 전쟁 …… 태평양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의 한 부분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제2차 세계대전은 독일, 이탈리아, 일본 등의 추축국(樞軸國, the Axis)과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의 연합국(聯合國, the Allies) 사이에 일어난 세계적 규모의 전쟁이다.
1931년에 일어난 만주사변을 시작으로 중일전쟁을 거쳐 태평양전쟁에 이르는 시기를 일본에서는‘15년 전쟁’이라고 한다. 그러한 전쟁 에서 원자탄 세례를 받은 일본은 1945년 8월 15일, 연합국에 항복 하고 패전국이 되었다. 그러한 것에 따른 이야기를 엮어보려고 한다.
딱 일주일 전 낮에 일어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갑자기 이 블로그의 모든 한글들이 “??????????” 이렇게 물음표로 다 바뀌어 있었답니다.
처음에는 뭔가 잘못되었지만 시간이 좀 지나면 “저절로”로 다시 원상복귀될 수도 있겠지 했답니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서 “이거 어쩌지?”하는 걱정과 함께 제가 할 수 있는 일들을 모두 해보았답니다.
하루 이틀이 지나면서 한편으로으로는 아쉬운 맘이 넘쳐났지만 그래도 나이 값 하노라고 “뭐 산다는 게 다 그렇지…. 잊을 건 잊고, 새로 시작하지 뭐…”하는 다짐을 놓았답니다.
그런데 도저히 잊혀지지가 않는 것입니다.
그래 붙들고 씨름을 해 본 것이지요. 분명 “????????????”라는 표시들이 남아 있는 한 이걸 다시 한글로 돌려 놓는 방법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일주일 동안 다른 일들을 하면서도 머리 속에는 내내 한가지 생각 뿐이었답니다. 바로 “망가진 블로그 원상 복구 시키기”였습니다.
그러다 오늘 이른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블로그 호스팅을 해주는 회사에게 상세한 문의 이메일을 보냈답니다.
막바로 24 이내에 질문에 대한 응답을 해 주겠노라는 회신과 함께 세군데 사이트 링크들을 소개하면서 스스로 찾아서 해결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조언을 해 주던 것이었습니다.
오늘 낮에 틈틈이 호스팅 회사가 소개한 링크들 특히 포럼에 등록된 유사한 경험들을 읽다가 드디어 해결책을 찾았답니다.
알고보니 일주일 전 한글이 다 깨지는 사고가 나자마자 제가 생각했던 바로 그 곳에 문제가 있었던 것인데… “설마 그렇게 쉽게?”라는 생각에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곳에 해결책이 숨어 있었답니다.
참 바보 같은 한 주간이었답니다.
그런데 그 바보 같은 일 때문에 얻은 것이 엄청 많답니다.
헤매느냐고 여기 저기 묻고 찾아다니다 보니 배운 게 엄청 많다는 것이 첫째고요, 둘째는 반드시 기록을 보관해 두어야만 한다는 깨달음이고요, 셋째는 어떤 경우에도 반드시 길은 있다는 믿음이고요 – 36계 줄행랑도 비책 가운데 하나이므로 – 그리고 무엇보다 해결한 뒤에 느끼는 이 만족과 기쁨은 아흔 아홉마리 양을 (야수들이 덤빌 수도 있는 무방비 상태에) 내버려두고 한마리 양을 찾아 나섰다가 얻은 기쁨을 이야기한 예수의 비유만큼이나 큰 것이랍니다.
<항상 침착하고 차분하게만 대처한다면, 어떤 예기치 못한 상황속에서도 그 보상을 받을 수 있으리라. “If we will be quiet and ready enough, we shall find compensation in every disappointment.” > – 헨리 데이빗 소로우(Henry David Thoreau)
이렇게 또 다른 시작을 맞게 될 줄은 전혀 예기치 못했답니다.
며칠 전 일터에서 급작스럽게 처리해야할 일들이 있어 컴퓨터 앞에 앉았다가, 머리 좀 식힌답시고 제 개인 블로그(http://www.for1950s.com/)에 들어갔답니다.
지난 삼년 오개월여 제가 일기처럼 글을 남기던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모든 글들이 – “???????” – 바로 이런 물음표시로 바뀌여져 있었답니다. 당시에는 뭔가 일시적으로 잘못되었거니 했답니다. 시간이 지나면 원상복귀 되려니 하며 덮어 두었답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에 들어와 다시 블로그에 들어가보니 여전한 것이었습니다.
그때서야 아차 싶어서 이런저런 복구작업을 해 보았답니다.
그렇게 이틀을 보내다가, 제 능력 범위를 벗어난 일인 듯하여 도움의 손길을 구했답니다.
손길을 청했던 이에게 돌아 온 대답은 “저 역시 능력 밖입니다.”였습니다. 그래도 이 양반이 크게 도움을 주었답니다. 두어가지 택할 수 있는 방법 제시와 함께 글들을 건져 낼 방안을 알려주셨기 때문이랍니다.
처음에는 정말 안타깝고 아쉰 생각 뿐이었답니다. 거의 삼년 반 동안 썻던 일기가 몽창 날라가 버렸다는 생각이 들자, 그걸 따로 저장해 놓치 않은 자책이 아주 심했답니다.
어제 오늘, 그 양반이 가르쳐 준 방법으로 400개가 넘는 글들 가운데 거의 95% 이상을 건져냈답니다.
블로그 복구작업은 계속될 것이지만, 만약을 대비하여 새 일기장을 하나 만들었답니다. 바로 이 블로그입니다.
복구작업과 함께 새 일기를 여기에 이어 쓰려고 합니다. 만일 옛 일기장 복구가 된다면 두 개를 합치려 합니다.
이 일기장 주소인 http://www.delhanin.com/ 의 delhanin은 제가 이메일을 쓰기 시작했던 지난 1999년 이래 오늘까지 저의 다른 이름입니다. 델라웨어에 사는 한인을 줄여 본 말이랍니다.
이제 새 일기장을 꾸밉니다.
<갑자기 소나기를 만나 단풍나무 숲이나 길게 뻗은 소나무 가지 밑으로 비를 피하게 되었을 때도, 그 후미진 곳을 세밀하게 관찰한다면 그 잎사귀나 나무껍질 속, 혹은 그 발 아래의 버섯에서 새로운 경이의 세계를 발견하게 되리라.> – 역시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말입니다.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이곳을 찾아준 분들께 드리는 인사치고는 너무 밋밋한 것 같아 사진 한장 덧붙입니다. 엊그제 받은 사진이랍니다. 일년 전쯤 어느 예식에 참석했다가 누군가가 찍은 것을 엊그제 저희 부부에게 보내주신 것이랍니다.
일기란 이렇게 까맣게 잊어버렸던 순간을 되뇌이게 하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오늘, 지난 글들을 건져내며 느껴보았답니다.
**** 사족 : 그렇게 헤매기를 딱 일주일. 오늘은 6월 30일입니다. 일주일만에 망가졌던 블로그를 다시 복구시켰답니다. 이 큰 기쁨이라니!
제 아버님은 1926년 생입니다. 그리고 그 세대들이 겪은 일반적인 경험들 – 일테면 무학(無學)이나 낮은 학력을 비롯하여 일제 징용이나 징집, 국군 또는 인민군으로써 전쟁경험, 50년대에서 70년대 이르는 급작스런 변화기를 살아낸 소시민들의 경험들 –을 겪어오신 이입니다.
지난 두번에 걸쳐 쓴 1920년 생들의 일반적인 경험들과 특수한 사람들의 경험들을 함께 겪었거나 듣고 보고 살아오셨습니다.
우리들이 이즈음 종종 듣거나 말하는, 친일분자와 애국 독립 투사, 좌익 빨갱이와 우익 백색 테러단, 종분분자들과 꼴보수분자들 등등 한국 현대사의 극단적인 양극과는 거리가 먼, 아니 그런 것에는 관심조차 가질 겨를없이 먹고 살며 목숨 부지하기에 급급해 하며 살아온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지난 백년에 이르는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며 살아온 사람들이지만 어찌보면 사(史)라고 이야기하는 것과는 무관하게 살아오면서 실제 그 사(史)의 주인공이었던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 바로 제 아버님이십니다.
나이 스물이 되도록 태극기를 본적이 없거니와 한국이라는 나라는 없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어쩌면 그 시대의 진짜 민(民)이었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리고 그런 민(民) 가운데 한분이 제 아버님이십니다.
화랑무공훈장으로 한 쪽 다리의 아픔을 평생 다스리고 살아오신 아버님이 이제와 돌아볼수록 다시 저린 이야기들이 넘쳐나지만, 그래도 그 이야기들 속에서 민초(民草)들이 품어야 할 희망과 소망에 대한 이야기들을 엮어서 제게 건네신 것은 이달 초의 일이었습니다.
나이 스물에 맞았던 해방이 어느덧 70년 전 일이 되었는데, 비록 민초이지만 아직 살아있는 사람으로서 몇 자 느낌을 적어보았노라고 말씀하시며 건네주신 원고입니다.
조금 손을 보아 출판하려는 계획에 앞서 먼저 여기 제 블로그에 연재로 소개 드립니다.
큰 제목은 <태평양전쟁 과 광복 70년 –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입니다.
1920년도에 태어났다면 현재 만 95세이고 1929년생이면 만 86입니다. 아무리 백세 장수시대라고 하지만 1920년대생들 태반은 이미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닙니다. 더더군다나 그들은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실제 징용, 징병되었던 연령대이고 보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뜬 분들이 다른 세대들 보다 많습니다.
이들 가운데 생존해 계신 분들은 살아있는 현대사라고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북의 김일성(金日成, 1912년)과 남의 박정희(朴正熙, 1917년)가 1910년대생들이었고 그 뒤를 이어 한국정치사에 일획을 그었던 이른바 삼김<三金 :김대중(金大中, 1924년), 김영삼(金泳三, 1927년), 김종필(金鍾泌, 1926년)>씨들이 모두 1920년대생입니다.
아직 이 세대들에 대한 제대로된 정리와 평가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시점입니다.
저는 이 세대들 중 막내축에 속하는 한분을 우리 후대들이 반드시 기억해야만 한국어 공동체의 미래가 밝게 열릴 수 있다고 생각한답니다.
임종국(林鍾國, 1929년 10월 26일 ~ 1989년 11월 12일) – 바로 그 사람입니다.
선생은 고작 60을 넘기시고 세상을 떴습니다. 그나마 그의 60년의 삶은 그리 평탄치 않았습니다. 선생은 해방이후 20년이 지난 1966년에 <친일문학론>이란 책을 세상에 내놓습니다. 식민지에서 벗어난지 20년이 지나서야 식민지치하 이른바 엘리트들의 친일행각에 대한 연구의 첫 발을 그가 디딘 것입니다. 이후 그가 세상을 등질 때까지 친일행각을 벌인 인물들에 대한 연구에 매진합니다.
그가 죽기 얼마 전 그의 삶을 돌아보며 그가 남긴 말입니다.
<60의 고개마루에 서서 돌아다보면 나는 평생을 중뿔난 짓만 하면서 살아왔다는 생각이 든다. 문학가를 꿈꾸던 녀석이 고시공부를 했다는 자체가 그랬고, <이상전집>이 그랬고, <친일문학론>이 그랬고, 남들이 잘 안하는 짓만 골라가면서 했던 것 같다. 타고나기를 그 꼴로 타고났던지 나는 지금도 남들이 흔히 하는 독립운동사를 외면한 채 침략사와 친일사에만 매달리고 있다. <일본군 조선침략사>가 지난해 말에 출간된 터이지만 계획된 일을 완성하자면 앞으로도 내겐 최소한 10년이 기간이 필요한 것이다.
권력 대신 하늘만한 자유를 얻고자 했지만 지금의 나는 5평 서재 속에서 글을 쓰는 자유밖에 가진 것이 없다. 야인(野人)이요, 백면서생(白面書生)으로 고독한 60년을 살았지만 내게 후회는 없다. 중뿔난 짓이었어도 누군가 했어야 할 일이었다면 내 산 자리가 허망했던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또한 그는 민족을 배반하고 친일행각으로 삶을 이어온 이들을 낱낱이 밝히기 전에는 죽을래도 죽을 수 없다며 이런 글도 남깁니다.
<혼이 없는 사람이 시체이듯이, 혼이 없는 민족은 죽은 민족이다. 역사는 꾸며서도, 과장해서도 안되며 진실만을 밝혀서 혼의 양식(糧食)으로 삼아야 한다. 15년 걸려서 모은 내 침략 ․ 배족사의 자료들이 그런 일에 작은 보탬을 해줄 것이다. 그것들은 59세인 나로서 두 번 모을 수 없기 때문에 벼락이 떨어져도 나는 내 서재를 뜰 수가 없다. 자료와, 그것을 정리한 카드 속에 묻혀서 생사를 함께 할 뿐인 것이다.
나는 지금 65년에 걸쳤던 <주한일본군 침략사> 1,800매를 반 쯤 탈고했다.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 경향에 신경이 쓰여서 예정에 없던 일을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끝나면 1876~1945년의 모든 사회분야에 걸친 침략 ․ 배족사 전8권을 8년 작정으로 완결할 생각이다. 그러고서도 천수(天壽)가 남으면 마음 가볍게 고향(문학)으로 돌아가서, 잃어버린 문학사회사의 꿈이나 쫓고 싶다. 친일배족사 8권을 끝내기 전에는 고향(문학)이 그리워도 갈 수가 없고, 죽을래야 죽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에게 8년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할일을 남기고 떠난 그의 뒤를 잇고자하는 사람들이 모여 오늘도 함께 일하는 곳이 바로 “민족문제연구소”입니다.
그가 남긴 ‘친일문학론’과 연관지어 전해오는 이야기 두가지가 있답니다.
하나는 ‘친일문학론’ 초판 1500권이 다 팔리는데 걸린 시간이 13년이었고, 그 가운데 1000권은 일본에서 팔렸다는 사실입니다.
두번째는 그의 부친인 임문호입니다. 임문호는 천도교 지도자였는데 수차례 일본의 식민지 정책 및 대외 침략 전쟁에 동참할 것을 선동한 행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바로 친일행각을 했던 전력이 있는 인물입니다. 임종국이 <친일문학론>을 집필하던 도중 아버지의 이러한 행적을 알고 상당히 괴로워했는데 이를 알아챈 그의 부친 임문호는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내 이름도 거기에 넣어라. 그 책에서 내 이름이 빠지면 그 책은 죽은 책이다’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그의 부친의 이름도 “친일 명단”에 등재되었답니다.
그는 죽기전 자신이 살아생전 남긴 족적들은 50여년이 지나야 빛을 볼 수 있을 것이라는 말도 남겼었다고 합니다.
오늘도 한반도에 얽힌 뉴스들은 답답함으로 다가옵니다.
1920년대 끝자락에 태어나 20세기 초반 한반도 역사를 가슴에 품고 살다간 임종국선생의 물음이 진정 끝나는 날, 그날이 한반도와 한국어 공동체의 미래가 새롭게 열리는 날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