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들어 Ferguson, Missouri, Baltimore 등지에서 일어난 사건들 때문에 전국 각지의 경찰관들이 곤욕을 치루고 있지요. 비무장인 사람들을 향해 경찰관들이 과잉대응을 했다는 비난이 수그러들지 않는 가운데 제가 사는 델라웨어주 New Castle County (군,郡) 경찰들이 몸에 부착하는 카메라를 장착하고 다닌다고 합니다.
New Castle County Police Chief (뉴캐슬 군 경찰청장)인 Elmer M. Setting은 지난 주부터 시험적으로 8명의 경찰관들이 이런 몸에 부착하는 카메라를 달고 임무 수행을 했다고 발표했답니다.
또한 Gordon군청장은 “이 카메라들은 경찰관들이 임무수행하는데 있어 그 임무수행이 정당한 것인지에 대한 투명성을 더해 줄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향후 대당 $1,000이 소요되는 이런 카메라는 전군(郡)은 물론 주(州)내 모든 시(市)와 주(州) 전체 경찰관들에게 확대하여 지급될 것이라고 합니다.
경찰관들에 대한 자기검열성 짙은 이런 카메라 부착 시행에 관한 뉴스에 달린 댓글들은 긍정과 부정적 시각들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어쨋거나 위임받은 권력 행사는 늘 투명성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측면에서 본다면 진일보가 아닐까합니다.
대왕 알렉산더(Alexaner)가 붙잡혀온 해적에게 “너는 어찌하여 바다를 어지럽혔느냐?”고 물었답니다.
대왕의 물음에 해적은 이렇게 답했답니다. “대왕이시여! 어찌하여 당신은 세상을 어지럽혔습니까? 나는 작은 배로써 그렇게 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도적놈’이라고 비난받지만, 당신은 막강한 군대로 그렇게 했기 때문에 ‘정복자’라는 칭함을 얻은 것일 뿐입니다.”라고요.
성 어거스틴이 쓴 “신의 도성(신국론), The City of God”에 나오는 이야기랍니다.
작은 좀도둑이나 국가나 자기만을 위한 생각에 빠져 있는한, 똑같이 도둑놈에 불과하다는 말일 것입니다. 작게는 개인에서부터 크고 작은 집단 나아가 국가에 이르기까지 이기주의에 빠져서 자기 개인이나 집단만의 이익을 우선시하다보면 결국 도둑놈이 될 뿐이라는 교훈입니다.
해적이나 도적이 남의 물건을 훔치거나 빼앗는 것이나, 국가나 집단(물론 교회도 포함)이 주어진 권력을 신성시하여 개인에게 충성과 복종을 강요하는 것이나, 똑같이 도적질이라는데는 다름이 없다는 이 이야기의 핵심에는 “소유”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비단 물질적 소유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욕망들 일테면 식욕, 성욕, 지식욕, 권력욕에 이르는 것들에 대한 소유입니다. 남보다 내가 더 가지려는 욕망, 끝내 내가 모두 차지해야만하는 욕망에 이르기까지 개인이나 국가 또는 교회, 각종 집단들이 지닌 욕망을 말하는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이런 욕망 곧 소유에 대한 개념을 두 가지로 분류했습니다. 사용(use)과 향유(enjoy)라는 개념들이 바로 그것들입니다. 그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어떤 것을 ‘향유’한다는 것은 그것 자체의 목적 또는 이익을 위해 그것에 집착하는 것을 말한다. 어떤 것을 ‘사용’한다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어떤 것을 얻기 위해 쓰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우리가 원한다는 것이 옳은 것이라는 전제로 말이다.”
어거스틴은 이 두 개념이 전도되는 상황을 악이요, 죄라고 말합니다. 향유(enjoy)할 것을 사용(use)하거나, 사용해야 하는 것들을 향유하는 것을 말합니다.
어거스틴은 욕망의 향유(enjoy)와 사용(use)을 구분하는 잣대로 “필요(necessary)”라는 도구를 사용합니다. 그가 말하는 “필요”란 개인의 삶을 영위하는데 필요한 최소한의 음식과 의복입니다. 마찬가지로 집단이나 단체, 국가에게 있어서는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것을 “필요”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필요 이상의 것들은 “여분(superfluous)”라고 정의합니다. 그리고 이 “여분”의 것들은 이웃과 나누는 것이요,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며, 개인나 단체 또는 국가가 소유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만일 이 “여분”의 것들을 “필요”라고 말하면서 자기 것 또는 권력의 것이라고 우기는 것이야말로 바로 도적질이요, 사기질이라고 강조합니다.
어거스틴(성 아우렐리우스 아우구스티누스 Sanctus Aurelius Augustinus)이 보았던 도둑질과 사기질은 그가 죽은지 1600여년이 지난 오늘도 도처에서 여전히 일어나는 일이지만, 그는 그럼에도 사람사는 일은 여전히 “희망”이라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희망에게는 아름다운 두 딸이 있다. 그들의 이름은 분노와 용기다. 현실이 지금 모습대로인 것에 대한 분노, 그리고 현실을 마땅히 그래야 하는 모습으로 바꾸려는 용기.”라는 어거스틴의 말처럼 오늘도 “현실에 대한 분노와 용기”를 지니고 사는 사람들이 여전히 넘쳐나기 때문입니다.
8.15 해방이 된 다음, 나는 신문이나 라디오를 통해서 달라지고 있는 고국 소식을 대강 알고는 있었지만, 귀국하여 그 땅을 둘러보니 여기 저기 낯설고 생소한 것들이 있었다.
앞에 나온 이야기인‘귀국선’에도 적었듯이,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부둣가에는 태극기와 각가지 내용의 글자들이 담긴 깃발들이 있었다. 난생 처음 보는 태극기를 비롯해, 解放(해방), 自由(자유), 獨立(독립) 등 그런 글자가 적혀 있는 현수막이나 벽보들이 낯설기만 했다.
모두 처음 보는 것들이었다.
8.15 해방이 되니, 이런저런 이유로 타국에서 지내던 수많은 조선 사람들이 너나할것 없이 그렇게 조국 땅으로 모여들었다.
나처럼 일본에서 이리 저리 떠돌다가 귀국하는 사람이나 또는 다른 곳에서 지대다가‘조국 해방’이라는 물결을 타고 귀환하는 사람들, 그들을 환영하러 나온 인파, 그리고 자기 나라로 돌아가는 일본인 등으로 부두는 번잡스러웠다.
나는 환전소에 들려서 일본 돈을 조선은행권으로 바꿔 가지고, 서울행 기차를 탔다. 서울역에서 내린 나는 거기서도 처음 대하는 것들을 보게 되었는데 예를 들면, 서울역 맞은편 어느 건물에 걸린 ‘日本人世話會’(일본인세화회)라는 간판이었다. (사진은 부산 일본인세화회 모습)
그것은 일본인들을 보살피는 모임이라 뜻이 있는 간판이다.
삼팔선
삼팔선에 관한 몇 가지 이야기를 요약해서 적어보려고 한다.
8.15 광복 이후 한국에서 자주 쓰이게 된 말 중에서 한가지를 고른다면, 그것은 삼팔선(三八線)이라고 할 수 있다. 태평양전쟁이 끝나게 됨에 따라 미국과 소련 두 나라가 한반도의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남과 북으로 나누어 점령한 군사분계선이 바로 그 ‘삼팔선’이다.
그렇게 미국과 소련 두 나라가 한반도를 둘로 나누어 각기 점령한 것을 예를 들어 말하자면, “그것은 두 어린이가 과자 한 개를 반으로 쪼개어 사이좋게(?) 나누어 먹은 것과 같은 것이다.”라고도 할 수 있다.
지금의 경계선은 6.25전쟁 휴전선이고 구불구분한 것인데 비하여, 38선은 위에 적은 것처럼 미국과 소련의 점령지 분할 경계선이고 일직선이다. 38선이든 휴전선이든 그것은 한반도를 둘로 갈라놓은 분단선(分斷線) 이다.
어찌 되엇건 그 땅에 ‘38선’이라는 것이 생긴 후 70년이라는 세월이 흘러가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통일의 길은 보이지 않고 요원(遙遠)하기만 하다.
38선이 생긴 다음, 그 선(線)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오는 사람들이 생겼다. 그런 사람들 중엔 남쪽에 의지할 곳이 없이 막연하게 월남한 사람도 있었는데, 그런 사람들 중엔 자신을 ‘삼팔 따라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했을까? 홀로 월남하여 졸지에 의지할 곳이 없게 된 자신을 스스로 비웃는 자조 심리(自嘲心理)에서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나는 노름을 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따라지’라는 말이 나온 김에 한가지 적는다.
‘따라지’라는 말엔 두 가지 뜻이 있다. 첫째는 노름판에서 ‘한 끗’을 뜻하는 말이고, 둘째는 보잘것없거나 하찮은 사람이나 물건을 이르는 말이다.
지금은 위에 설명한 것과 같은 시대는 아니지만, ‘삼팔선’이라는 말이 한국 곳곳에서 쓰여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몇 가지 예를 들어 본다.
강원도 양양군에 ‘삼팔선휴게소’라는 휴게소가 있는데, 강원도 인제군 에도, 경기도 포천시에도 그런 이름의 휴게소가 있다. 휴게소 뿐만 아니고, ‘삼팔선주유소’라는 주유소도 있다. 모두 38선 또는 그 부근에 있는 휴게소나 주유소 상호다.
‘38선’이라는 것을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게 되면서 미국과 소련 두 나라가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하여 한반도를 남과 북으로 나누어 그들 두 나라가 나누어 각각 점령한 군사분계선(軍事分界線)이다.
1945년 8월 15일, 일본 천황 히로히토 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한다는 그의 조서(詔書)가 발표된 다음, 북한에 들어온 소련군이 북위 38도선을 막았고, 그들보다 나중에 서울에 입성한 미국군이 38선 이남 에 주둔하여 3년 동안 그 땅에 미군정(美軍政)이 펼쳐졌다.
더 설명하자면, 38선은 8.15 해방 직후부터 6.25 전쟁이 휴전될 때까지 남한과 북한과의 경계선이 되어, 오늘날까지도 한국 민족에게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여러 가지 비극과 고통을 안겨 주었고, 지금도 많은 사람 들에게 한(恨)많은 경계선이 되고 있는 것이다.
그 무렵 유행하던 노래 중에는 ‘가거라 삼팔선’, ‘삼팔선의 봄’ 등이 있었다. 삼팔선은 당시 해방된 조국의 모습을 그대로 전해주고 있는 말이다. 그리고 70년이 지난 오늘까지 휴전선이라는 이름으로 이어져 오고 있지만 ‘가거라 삼팔선’, ‘삼팔선의 봄’ 등의 노랫말에 담긴 절실함은 사라진 듯하여 안타깝기만 하다.
오늘날은 ‘영어 전성 시대’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그러한 점은 한국이나 일본이나 다를 것이 없다. 태평양전쟁 당시와 종전(終戰) 후에 있었던 영어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하는 말이다.
먼저 약 50여년 전인 1966년 4월 16일자 동아일보에 실렸던 영어에 관한 한 기사(칼럼/논단)의 일부를 이 글에 옮겨 적는다.
글의 제목은 영어훈장(英語訓長)이다.
日帝末 太平洋戰爭(일제하 태평양전쟁)이 한창일 무렵 英文科(영문과)학생들은 콧대를 세우지 못하고 기를 펼 겨를이 없었다.
英語(영어)는 敵性語(적성어)라는 刻印(각인)이 찍혀 이것을 공부하는 학생들까지도 半要視察人的(반요시찰인적)인 대우를 甘受(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도대체 英語(영어)를 배워 무엇을 하겠느냐는 핀잔을 받기가 일쑤였고 무엇을 專攻(전공)하느냐는 질문이 떨어질 때마다 얼굴을 붉히고 송구스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 중간 생략 –
해방을 맞이하여 事態(사태)는 일변하였다. 英語萬能時代(영어만능시대)가 당도한 것이다.
男女幼少(남녀유소)를 막론하고 英語(영어)를 한두마디 지껄이지 못하면 사람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되었고 학생들도 많은 시간과 精力(정력)을 英語(영어)공부에 소비하게 되어 英語先生(영어선생)도 제법 어깨를 으쓱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한가지 커다란 문제가 제기되었다.
즉 이렇게 威力(위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英語(영어)를 공부하는데 바치는 勞力(노력)의 代價(대가)를 우리들은 정당히 받고 있는 것인지?
혹자는 말하기를 解放前(해방전) 학생들에 비해 요즘 젊은 학생들의 英語(영어)실력 은 훨씬 나아졌다고 한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지도 않은 것 같고 단지 英語(영어)를 공부하는 학생들의 수가 많아졌기 때문에 出衆(출중)한 학생들의 모습이 눈에 띄는 度數(도수)가 늘어 난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語學(어학)공부는 일종의 훈련이기 때문에 배우는 사람은 가만히 앉아있어서 는 안되는 것이고 반면에 선생들이 할일도 대단히 많아서 훌륭한 訓長(훈장)이 되려면 여간 애를 쓰지 않으면 안된다.
– 이하 생략 –
*그 당시 신문은 대개 한자(漢字)를 섞어서 썼다.
앞에 적었듯이 ‘太平洋戰爭이 한창일’ 때 ‘英語는 敵性語’라고 한 적이 있었다. 그런 것 뿐만 아니고, 영어를 공부하는 학생들까지도 半要視察人的인 대우를 甘受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했던 때가 있었는데, 전쟁이 끝난 다음부터 영어가 판치는 세상 으로 변했다.
내가 가노야 비행장에서 일할 수 있게 되었던 것도 영어를 알기 때문이 었다. 그 당시 내가 영어를 알 수 있게 되었던 이야기를 간단하게 적어보려고 한다.
나는 오사카 에서 지낼 때 그곳에서 오카모토 카나메 (岡本 要)라는 조선사람을 알게 되었는데, 그도 내가 있던 집에서 숙식(宿食)을 했고 같은 직장에서 일를 했다. 한데, 그는 전쟁이 끝나면 영어가 필요하게 될 것이니, 영어를 배우라 고 나에게 권했다.
<영어는 적국(敵國) 말이다.>, 또는 <영어를 배워 무엇을 하겠느냐?> 는 말이 있을 정도였던 때에, 나는 그의 권유에 따라 영어를 배우게 되었다. 그는 영어 자습(自習)에 필요한 책도 마련해 주었고, 영어 학습에 관한 기초를 가르쳐 주었다. 독학할 수 있는 방법도 가르쳐 주었다.
그렇게 지냈는데, 내가 불시(不時)에 일본 경찰에 잡히게 되는 바람에 인사 한 마디도 하지 못하고 그와 헤어지게 되었다. 70년이 지난 지금도 오카모토 카나메 (岡本 要)라는 그 이름은 내 머리 속에 남아 있다.
당시 그의 나이는 30 전후였고 늘 안경을 쓰고 지냈는데, 그도 나처럼 일본식으로 된 성명(姓名)을 쓰고 있었다. 따라서 다시 만나볼 수 없게 된 그에 관한 의문도 있다.
첫째는 그러한 학식이 있고, 앞을 내다볼 줄 아는 사람이 왜? 무엇 때문에 막노동자들 속에 섞여 그런 곳에서 지내고 있었느냐?라는 것이다. 아마 목적하고 있는 무슨 때를 기다리며 지내는 사람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해 볼 뿐이다.
어찌 되었건, 전쟁이 끝나고 세상이 변했다. 영어도 그렇다.
전날까지‘英語는 敵性語’라고 하던 곳에‘영어 바람’이 불기 시작 하더니, 지금은‘英語萬能時代’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만한 세상 으로 변했다. 불과 70년 사이인데,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영어와는 상관 없는 것이지만, 오카모토 선생 이야기가 나온김에 이야기 한 가지를 덧붙인다. 그와 함께 나라(奈良)에 다녀온 이야기다.
그 당시, 오사카 에서 나라(奈良)까지는 전철로 한 시간쯤 걸린 것으로 생각된다. 아직도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것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이야기를 적어 보려고 꺼낸 이야기다.
한 가지는 어슬렁거리면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수많은 꽃사슴들과 그런 것을 구경하는 관광객들이 뒤섞여 있는 사슴공원이고, 다른 한 가지는 그 지역에 있는 도다이지 (東大寺)라는 절이다.
한데, 절터가 워낙 넓어서 정당(正堂)과 부속 건물들이 흩어져 있고, 그 절의 대불전(大佛殿) 안에는 청동불상(靑銅佛像)이 있다. 세계에서 가장 큰 목조건물이라고 하는 그 불당(佛堂) 건물의 규모도 대단하지만, 불당 안에 있는 청동불상도 세계에서 가장 큰 불상이라고 한다. 그 불상의 크기에 대한 예를 든다면, 불상 손바닥 위에 보통 어른들 열댓명이 설 수 있다고 한다.
위에 적은 것과 같은 특이(特異)한 점이 있는 나라(奈良)가 먼 옛날엔 일본의 수도였었는데, 그곳엔 지금도 백제(百濟) 문화의 영향을 받은 흔적들이 남아있다.
귀국선
나는 귀국선(歸國船)을 타려고 가노야 (鹿屋)를 떠나 하카타 (博多)로 갔다. 한데, 하카타 부둣가엘 가서 주위를 둘러보니 그때까지도 배를 타려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는 그곳에서 며칠을 지낸 다음 어렵게 부산으로 가는 배를 탈 수 있게 되었다.
일본으로 갈 때와는 다른 점이 있었다.
첫째로 갈 때는 생활환경 때문에 막연한 기대를 가지고 미지(未知)의 땅을 동경(憧憬)하며 밤 시간에 현해탄을 건넜는데, 귀국할 때는 밝은 낮 시간에 귀국하는 기쁨을 가지고 검푸른 바닷물결 등 바다 풍경을 보면서 그리던 고국 땅에 닿았다.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는 부둣가에는 태극기와 각가지 내용의 글자들 이 담긴 깃발들이 있었다.
한 마디로, 감개무량(感慨無量)이었다. 8.15 해방이 되니, 이런저런 이유로 타국에서 지내던 수많은 조선 사람 들이 너나할것 없이 그렇게 조국 땅으로 모여들었다. 돌이켜 보니, 1945년은 한국 민족에겐 잊을 수 없는 해였다는 것을 말 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일본의 식민지시대가 끝난 해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조선 사람들에게 행했던 짓들을 길게 늘어놓지 아니 하더라도 그러한 사실들은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미국의 원폭투하(原爆投下)라는 엄청난 충격파(衝擊波)를 받은 다음에 야 일본이 연합국에 무릎을 꿇었고, 한국에서 물러나게도 되었다. 나라 없는 설음을 안고 각가지 모욕(侮辱)을 당하며 전쟁 틈에서 살아 남은 수많은 조선사람들이 일본땅을 떠나 그리워하던 고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사흘 동안 더위경보(heat warning)속에서 지냈습니다. 체감온도가 화씨 105도(섭씨 약 40도)에서 화씨 115도(섭씨 46도)사이에 이르는 날씨면 내려지는 경보랍니다. 게다가 높은 습도가 함께하는 여름 날씨는 오래 살아도 적응되지 않는 것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지역 주민들에게는 똑 같은 조건이지만 직업상 우리 부부에게 더해지는 찜통이 하나 더 있답니다. 바로 보일러입니다.
습도 높은 더위 경보속에서 뜨거운 보일러 스팀이 더해지는 세탁소 풍경 한번 상상해 보시겠습니까? 사반세기 넘는 여름을 그렇게 지내고 있답니다.
그래 불만이냐고요?
지난 밤 한 줄기 소나기 지나간 후 맞은 오늘 아침,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에서 보내준 시원한 바람 한 점에 대한 감사를 안다면 감히 불만이라는 말은 불경(不敬)에 이른답니다.
산다는 것은 무릇 감사랍니다. 더위조차 감사랍니다.
주춤한 더위에 감사하며 훑어보는 신문기사에 내일이 National Hot Dog Day라는 게 있어 달력을 보니 중복(中伏)이랍니다.
Hot Dog과 중복(中伏)과는 전혀 무관한 듯 하면서도 연관이 있습니다. 바로 개입니다.
Hot Dog의 유래를 찾아보니 소시지 모양이 독일산 개와 닮아서 그렇게 이름지어졌다고 합니다. 복날에 보신탕 곧 개장국을 먹는 우리 풍습은 익히 마는 일이고요. 핫도그나 개장국에 대한 호불호는 개인 취향에 달린 일이니 제가 논할 바는 아니지요.
다만 저는 핫도그는 맘만 먹으면 배가 터지게 먹을 수 있는 환경과 여건속에 살지만 제가 좋아하지 않으므로 거의 입에 대지 않는답니다.
개장국 곧 보신탕은 한때 제가 탐했던 음식 가운데 하나랍니다. 토종 서울내기인 제가 보신탕을 입에 댄 것은 다 그 놈의 술 탓입니다. 워낙 “남의 살”로 일컫는 육류(肉類)에는 그리 관심도 없는 제가 개고기만큼은 제법 탐(貪)했던 편입니다.
우선 육질이 기름지지 않아 좋고 속설(俗說)때문인지 술이 좀 과하더라도 개고기 안주라면 이튿날 숙취(宿醉)에 거의 시달리지를 않았던 것입니다. 저의 집안에 술은 물론이거니와 개고기까지 탐(貪)하는 것은 제가 유일하여 “가문(家門)의 영광”이 아니라 “가문의 골칫거리”가 된 지 오래이지만은 그것도 옛날 일일 수 밖에 없는 까닭은 도대체 이 땅에서는 개고기 맛을 볼래야 볼 수 없는 딱한 현실 탓입니다.
개고기는 먹고 싶어도 먹을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살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널려 있는 것은 손에 잡기 싫고, 결코 손에 쥘 수 없는 것에 대한 탐욕은 끝이 없고, 이 여름 저는 천상 사람인 것이지요. 비단 이 여름 뿐이겠습니까마는…
천상 사람으로 살더라도 개만큼은 살아야 할 터인데 “개도 지키며 산다는 윤리”에 이르면 그게 또 그리 쉽지만은 아닌 일인 듯 싶습니다.
바로 견오륜(犬五倫)입니다. 개들도 지키며 사는 다섯가지 윤리 도덕이랍니다. 이건 제가 만듣 이야기가 아니라 강원도 양양지방에서 전해져 오는 이야기라고 한국구비문학대계에 실려있는 이야기랍니다.
견오륜(犬五倫). 이른바 개라면 지켜야 할 다섯 가지 도덕입니다.
첫째, 지주불폐(知主不吠)하니, 군신유의(君臣有義)라. – 개는 주인을 알아서 주인을 보고 짖지 않는다.
광견(狂犬)- 곧 미치지 않고서야 제 주인을 보고 어찌 짖겠는가? 개가 지켜야 할 첫째 도리라는 말입니다. 하물며 개도 이럴진데 사람이 제게 은혜를 준 이를 향해 짖는다면 참 개 만도 못한 인생입니다. 사람이 지켜야 할 오륜(五倫)으로 군신유의(君臣有義)에 해당하는 말 쯤 아니 되겠습니까?
둘째, 모색상사(毛色相似)하니, 부자유친(父子有親)이라. – 개의 털은 어미를 닮을지니 자식은 부모를 알아야 한다.
광견(狂犬) -곧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제 부모를 깨물어 상처 내겠는가? 개가 지켜야 할 두 번째 도리라는 말입니다. 하물며 개도 이럴진데 저를 낳아 주신 부모를 깨문다면 참 개 만도 못한 인생입니다. 사람이 지켜야 할 오륜으로 부자유친(父子有親)에 해당하는 말 쯤 아니 되겠습니까?
셋째, 잉후원부(孕後遠夫)하니, 부부유별(夫婦有別)이라. – 뱃속에 새끼를 배었을 땐 부부관계를 삼간다.
광견(狂犬)- 곧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제 새끼를 배고도 오직 제 배부름만 생각 하겠습니까? 하물며 개도 이럴진데 사람이 제 새끼를 배고도 그걸 생명으로 느끼지 못한다면 참 개만도 못한 인생입니다. 사람이 지켜야 할 오륜으로 부부유별(夫婦有別)에 해당하는 말 쯤 아니 되겠습니까?
넷째, 소부적대(小不敵大)하니, 장유유서(長幼有序)라. – 작은 것이 큰 개를 해치지 않는다.
광견(狂犬) -곧 미치지 않고서야 어찌 저 보다 나은 상대를 물겠습니까? 개가 지켜야 할 네 번째 도리라는 말입니다. 하물며 개도 이럴진데 사람이 저 보다 한 발 앞 서 가는 이를 시기 질투한다면 참 개만도 못한 인생입니다. 사람이 지켜야 할 오륜으로 장유유서(長幼有序)에 해당하는 말 쯤 아니 되겠습니까?
다섯째, 일폐중폐(一吠衆吠)하니, 붕우유신(朋友有信)이라. – 한 개가 짖으면 다른 모든 개들도 호응해서 짖는다.
요건 좀 문제가 있습니다. 때때로 적합하기도 하고 한 개가 짖는다고 다 짖을 까닭이 없을 때도 있습니다. 물론 개 사회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광견(狂犬)일 수도 있겠지만 사람에 이르면 다 짖는데 안 짖는 하나가 역사를 이끌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어쨋거나 사람이 지켜야 할 오륜으로 붕우유신(朋友有信)이 이쯤 해당 되지 않겠습니까?
태평양전쟁 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6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1부 태평양 전쟁(太平洋戰爭)
일본인들의 토속신앙
일제 강점기 때, 일본은 조선사람들의 정신을 송두리째 없애고, 조선을 착취(搾取)하기 위하여 “일본과 조선은 한 몸이다.”라는 뜻으로 “내선일체(內鮮一體)”라는 구호를 만들어, 그런 것을 조선사람들에게 강요한 적이 있었다.
그들의 행위는 그런 것 뿐만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조선의 국권을 빼앗은 다음, 조선인들에게 일본어 교육을 점차 실시해 나갔고, 조선의 민족적인 모든 문화활동을 못하도록 막음으로써, 우리 민족의 고유성을 말살해버리려고 했다.
그러한 목적으로 일본은 <내선일체>라는 것을 내세워 조선사람도 일본 사람처럼 <신사참배(神社參拜)>라는 것을 하도록 강요한 적이 있었다.
이쯤에서 그러한 ‘신사’란 무엇인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일본엔 그들의 고유한 토속신앙(土俗信仰)인 신도(神道)라는 것이 있는데, 그러한 신앙(信仰)의 대상이 되는 신(神, 가미)의 위패(位牌)가 있는 곳을 <신사(神社)>라고 한다. 그러한 <신사>란 일본 황실의 조상, 또는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사람을 신(神)으로 받드는 사당(祠堂) 이다.
<서울 남산에 있던 조선신궁 모습>
그 중엔 다른 신사보다 격(格)이 높은 신궁(神宮)이라는 것도 있다. 예를 들면 일제 강점기 때. 서울 남산에 있던 ‘조선신궁(朝鮮神宮)’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조선신궁의 주제신(主祭神)은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와 메이지 (明治)천황이다. 일본 신화의 여신인 天照大神은 일본 황실(皇室)의 조상이라고 한다. 그리고, 明治天皇은 일본이 조선을 빼앗을 당시의 일본 왕이다.
한데, 조선총독부 시절 특히 일제 말기 때, 그들은 조선사람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들의 강요에 굴복하였다.
하지만, 그런 것에 굴복하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일제 강점기 때,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를 거부하고 반대운동을 하여 일제로부터 10년형을 선고받아 복역 중, 목숨을 잃은 주기철(朱基徹, 1897-1944) 목사도 그 중에 한 사람이다.
*신사참배 반대운동의 상징적인 인물이었던 주기철 목사에 관한 기록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韓國民族文化大百科事典]에 실려 있으므로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한다.
각설하고, 신사(神社)엔 도리이 (鳥居)라는 일본 특유의 <기둥문>이 있는데, 그것은 불경(不敬)한 곳과 신성(神聖)한 곳을 구분 짓는 경계라고 한다. 달리 말하자면, 일반적인 세상과 성스러운 곳인 신사가 있는 곳은 그 본질이 다르기 때문에, 그곳을 드나드는 경계에 도리이라는 문을 세우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한 도리이의 기원은 분명하지 않고 몇가지 설(說)이 있을 뿐이다.
어떤 이론은 <닭이 머무르는 자리>를 뜻하는 한자인 <鷄居>에서 유래 되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神道>에서는 닭이 <神의 전령(傳令)>이라고 여기는 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한다.
그런 것이야 어찌 되었건, 도리이의 기본적인 구조는 두 개의 기둥이 서 있고, 기둥 꼭대기를 횡목(橫木)으로 서로 연결해 놓는 형태이다.
도리이의 기본적인 구조와 거의 비슷한 모양으로 된 구조물(構造物)이 한국에도 있다. 홍문(紅門)이라고도 하는‘홍살문’이 바로 그런 것인데, 홍살문은 능(陵), 묘(廟), 궁전(宮殿) 등에 세우던 일종(一種)의 문이다.
홍살문의 구조는 둥근 기둥 두 개를 세우고, 그 위에 지붕이 없이 화살 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세워 놓았고, 그 중간에 태극문양이 그려져 있는 것이다.
홍살문은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있는 홍릉(洪陵)에도 있는데, 홍릉은 조선 제26대 왕인 고종(高宗, 재위 1863 – 1907)과 비(妃)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 – 1895)를 합장한 무덤이다.
역사에 관한 이야기는 연대순(年代順)으로 또는 시간 수서대로 하나씩 수직(垂直)으로 늘어놓는 것이 보통이다.
한데, 태평양전쟁 이야기를 적다 말고, 느닷없이 일본 온천 이야기와 그들의 토속신앙에 관한 것을 적으면서 도리이 (鳥居) 이야기를 적었다.
그리고,“도리이 와 비슷한 모양으로 된 구조물이 한국에도 있다.” 라는 설명을 하면서 고종과 명성황후가 묻혀 있는 무덤에 관한 이야기까지 나왔다.
명성황후가 목숨을 잃게 된 이야기를 하자면, 미우라 고로 (三浦梧樓)라는 사람에 관한 이야기도 하지 않을 수 없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 후 생긴 신정부(新政府)의 군인이 된 미우라 고로는 주한일본공사(駐韓日本公使)로 조선에 부임하여, 조선의 친로 (親露)정권을 무너뜨리고 친일정권을 세우고자, 1895년 10월 8일 새벽에 그는 일본 자객(刺客)들을 동원하여 명성황후를 시해(弑害) 하고, 그 시신을 불태운 국제적 범죄를 저지른 자다.
명성황후를 살해하는 등 조선에 있는 러시아 세력을 없애고, 일본의 세력을 그 땅에 넓히기 위하여 미우라 고로 등 일본 자객들이 경복궁을 침입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을 <을미사변(乙未事變)>이라고도 한다.
그런 이야기가 담긴 텔레비전 연속극도 있고, 명성황후에 관한 이야기 는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이므로 줄이고, 태평양전쟁 이야기를 계속한다.
가노야 비행장
나는“오사카(大阪)에서 지낼 때 일본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유치장 생활을 하다가 후쿠오카 탄광으로 되돌아가게 되었고, 그 탕광에서 또 탈출하여 다루미즈(垂水)라는 곳에서 전쟁이 끝나는 것을 보게 되었다.”라는 이야기까지 적었다.
나는 전쟁이 끝난 다음 바로 귀국하지 못하고, 일본에서 더 지내게 되었다.
시모노세키 (下關)나 하카타 (博多)항 부두엔 한국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아, 배를 타기가 쉽지 않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귀국을 서둘지 않고, 다루미즈 근처에 있는 가노야 (鹿屋)라는 곳으로 갔다.
그곳엔 가노야 비행장이 있다. 마침 그 비행장에 들어와 있는 미군부대에서 현지인을 고용인으로 채용한다는 광고를 보게 되었다. 가노야 시청 앞에서 그런 광고문이 있는 것을 본 것이 계기가 되어 나는 귀국할 때까지 임시로 그 비행장에 취직했다. 내가 맡은 일은 자동차 타이어를 수리하는 미군들의 일을 도와주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일종의 조수(助手)다.
그 비행장은 태평양전쟁 때 일본군 자살특공대인 가미가제(神風)의 기지(基地)였다. 특히, 그 전쟁이 끝나게 될 무렵엔 전체 가미가제 수의 약 반(半)이 그 비행장에서 출격(出擊)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금 나는 70년 전에 있었던 것들을 더듬어 생각해보면서 이 글을 엮고 있는데, 내 기억을 더 생생(生生)하게 하려고 인터넷 검색도 해본다. 하지만‘오늘날의 일본은 내가 그곳에서 지내던 때의 일본이 아니다.’ 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
말하자면,‘시시각각(時時刻刻)으로 변하고 있는 것이 세상이다.’라는 뜻이다. 예를 들면, 지명(地名)도 그런 것 중 하나다.
내가 한국을 떠나던 해인 1984년엔 없었던 지명이 지금은 한국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듯이,‘ 일본도 그렇다.’라는 것이다.
몇 해 전에 일본 큐슈(九州)지방에 미나미큐슈시(南九州市)라는 도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지람특공평화회관(知覽特攻平和會館)이 라는 것이 그곳에 있다. 지람(知覽, 일본발음 지란)은 태평양전쟁 말기에 일본 육군 특공기지가 있었던 곳이다.
그 회관은 태평양전쟁 당시 폭탄을 실은 비행기 전체가 육탄(肉彈)이 되어 적함(미국 군함)에 몸으로 타격(打擊)한 특별공격대원의 유영(遺影), 유품(遺品), 기록 등 자료를 수집, 보전, 전시하고 있는 곳이다.
태평양전쟁 때 가미가제 특공대의 기지였던 가노야와 지란에 관한 이야기를 적고 있는데, 그 전쟁이 절정에 달하자 일본은 자살특공대인 가미가제 특공대까지 내세워 그 전쟁을 버텨보려고 했다.
그러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 知覽特攻平和會館 앞뜰엔, 다음과 같은 비문(碑文)이 있다.
‘아리랑 노래 소리로 / 멀리 어머니의 나라를 그리워하며 …..’ (원문은 일본어다.)
가미가제 특공대 …… 그들 중엔 조선 젊은이들도 있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비문이다.
***지람특공평화회관(知覽特攻平和會館)에는 조선인 대원도 11명 포함된 것으로 확인됐다. 1945년 3월 29일 당시 17세였던 박동훈은 유서에 큼직하게 ‘결사(決死)’라는 단어와 함께 “몸을 던져 적함과 함께 옥쇄해 영원히 황국을 지키겠다”고 썼다. 하지만 그는 ‘육군이 가족을 책임져 준다고 해 어쩔 수 없었다. 동생은 절대 군대에 보내지 말라’며 아버지를 안고 울었다고 가족은 증언했다. 그는 오카와 마사아키(大河正明)라는 일본 이름으로 올라 있다.
24세 탁경현은 출정 전날 밤 식당 아주머니에게 “마지막으로 조국의 노래를 부르겠다”고 했다. 그는 모자로 얼굴을 가리고 ‘아리랑’을 불렀다. 흐르는 눈물을 감추기 위해서였다. 그는 교토 약학대 재학 중 학도병으로 차출돼 왔다.
우리 동네 군수(New Castle County Executive) 양반인 Tom Gordon이ISIS의 테러 위협에 대비하는 새로운 감시망을 설치했다고 발표했답니다.
군(郡,county)내에 자그마치 수십만개에 달하는 카메라를 설치해서는 최신 프로그램을 통해 한 곳에서 손바닥 들여다보듯 한 눈에 관찰할 수 있는 시스템을 도입했다는 것인데, 현재 이 시스템은Washington, D.C와 Atlanta주를 비롯한 아주 소수의 경찰청만이 보유하고 있다고 합니다.
안전한 곳에 살아서 마음 놓이는 주일 아침이면 좋겠는데 클릭 몇번하니 이어지는 기사랍니다.
바로 우리 군내(New Castle County)이자 델라웨어주 행정수도인 Dover에서 11명의 갱단을 체포했답는 소식입니다. 모두 20대 남녀로 구성된 갱단이라는데요. 그들을 체포할 당시 압수한 물품들을 보니 겁이 덜컹합니다. 각종 마약류는 그렇다치더라도 그들이 들고 있었던 무기들을 보니 ISIS보다 더 무서운 무기들이 널린 사회를 안전하다고만 해야할는지…
AP 통신이 서울발로 전하는 뉴스 “죽은 남한의 국가정보원 민간인 감시 없었다는 유서 남겨…”(Dead S. Korean agent left note denying spying on civilians) 기사에 짧은 시간에 많은 댓글들이 달려 있답니다.
그 중 추천을 많이 받았거나 제 눈에 뜨인 것들 몇 개 소개합니다.
“어떤 국가나 정부이건 단 두가지 뿐 – 바로 돈과 권력”
“미국을 포함한(모든 곳에서) 누구나 누군가를 감시하며 사는 세상”
“자살? 그걸 믿으라고?”
“한국인은 일본인과 같어. 자기 조직을 살리기 위해 사무라이 방법을 택한거야. 한국인은 좀 이상한 민족이야. 일본을 미워한다고 말하면서 일본인들처럼 행동할라고 하거든. 둘은 동족 아닐까?”
오늘 한 사내가 오늘까지 살아온 삶과 그가 오늘 겪고 있는 모습을 읽으며 제 가슴 속에 커다란 돌멩이가 하나 달렸습니다.
사내의 이름 박래군입니다. 그는 지난 4월에 있었던 세월호 추모집회에서 불법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한국시간으로 어제 구속 수감되었습니다. 그에 대한 기사들을 훑어본 바에 따르면 이번이 열 두번 째 겪는 일인 듯합니다.
제가 세월호참사에 대한 관심을 갖고 뉴스들을 찾아 읽고는 했지만 박래군이라는 이름이 낯설었던 까닭은 이른바 ‘운동’이나 ‘운동가’들에 대한 관심은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세월호 국민대책회의 공동위원장이자 4.16 연대 상임 운영위원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구속되었다는 뉴스를 보면서 현 대한민국 정권이 그들의 예정대로 세월호참사 마무리 작업 수순에 들어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박래군이 누굴까?’하는 궁금증이 일었답니다. 그래 그와 관련된 뉴스들을 검색해 보았답니다.
우선 눈에 먼저 뜨인 것은 그가 지난 달 어느 야외집회에서 박근혜대통령을 향해 막말을 늘어놓았다는 기사였습니다.
지난 6월 22일자 TV 조선의 “뉴스특급 730”이라는 프로그램에서는 <세월호 대책위 “박근혜 마약?” 발언 파문>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세월호대책회의 박래군 공동운영위원장이 “청와대를 압수수색해 마약 했는지 안 했는지, 한 번 확인해봤으면 좋겠다”, “대통령이 세월호 당일 ‘피부미용, 성형수술 등을 하느라고 보톡스 맞고 있던 것 아니냐. 보톡스 맞으면 당장 움직이지 못하니까 7시간 동안 그렇게 하고 있었던 것 아닌가’하는 의혹도 있다”, “청와대 곳곳을 다 뒤져서 마약이 있는지 없는지, 보톡스 했는지 안 했는지, 확인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등등의 말을 했다고 보도하고 있습니다.
설혹 그런 의심과 밝히고 싶은 굴뚝 같은 마음이 있다하더라도 그래도 대통령인데 좀 과했다는 생각과 함께 그의 구속 사유에는 “괘씸죄”도 한 몫 했겠다는 생각이 더해졌답니다.
그냥 그쯤해서 “자기 과시형 운동권 사내”쯤으로 치부하고 그에 대한 관심을 끄려고 했었답니다. 그런데 그의 이력이 그에 대한 검색을 더하게 만들었답니다.
참으로 몹쓸 학연이나 지연이 그에 대한 관심의 끈을 잇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이력을 보니 저와 같은 대학 같은 학과가 적혀 있었습니다. 게다가 제가 졸업하던 그 해에 그는 입학을 했다고 합니다. 저에게 딱 10년 후배인 셈입니다.
그리고 제가 이민 보따리를 꾸리던 그 때 그는 본격적으로 운동을 업(?)으로 삼기 시작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에 대한 제 관심은 급격히 높아졌답니다. 그래 낮일을 제끼고서 그에 대한 본격적인 검색에 들어갔답니다.
그리고 하루해를 접는 이 시간, 박래군 생각에 가슴에 돌덩어리 하나 메고 있습니다. 그 묵직한 아픔은 그가 살아온 지난 30년 세월 때문이 아니라 그가 어제 영어(囹圄)의 몸이 되면서 남긴 말에 그의 30년이 오롯이 녹아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제가 구속되더라도 416연대는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안전사회 건설 목표를 향해 변함없이 국민과 함께 행동 할 것”이라는 그의 말속에는 그가 30년 인권운동에 몸바쳐왔던 생각과 꿈과 희망이 담겨 있었습니다.
다음은 지난 2012년 11월에 한림 국제대학원 정치경영연구소에서 그와 대담한 내용들 가운데 발췌해 소개드리는 박래군의 생각들입니다. 당시 대담 제목은 “별 11개 단 이 사람, 인생 제2막에서 던진 돌직구”입니다.
그의 생각들을 곱씹으며 동시대를 가슴으로 안고 살아온 한 사내에게 빚진 마음으로 무거운 밤입니다.
“운동권 진영에서 가장 큰 문제가 정파적인 문제다. 이런 것들이 자꾸 운동을 왜곡시키고 대중들의 참여를 막고 그들의 자발성이 분출되는 것을 막는 것 같다. 정파가 종파화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하는데 지금은 그런 식으로 가면서 우리가 갖고 있는 역량을 결집시키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라며 대중과 유리된 채 정파 이익 중심의 운동을 전개하는 운동권의 모습에 안타까움을 토로한다.”
“나는 지금 인생의 제2막을 살고 있다. 소설가가 되려는 꿈을 갖고 대학에 들어가서 소설을 썼던 것까지가 제1막이다. 그다음은 원치 않는 운동권이 되어 운동을 사는 게 제2막이다. 2막을 60살까지 살려고 한다. 제3막의 삶은 1막에서 못 이룬 소설가의 꿈을 이루는 것이다.”
“운동을 하다 보면 내가 주인공이라는 생각을 하기 쉽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나는 보조적인 역할을 하는 거지 운동의 주체는 당사자들이 돼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나중의 성과도 그 사람들이 가져가는 게 맞고 패배도 그들의 질 수 있어야 한다.”
“인권운동하면서 나도 모르게 어느 정파에 속해있기도 했는데 그게 참 별 볼일 없다는 생각을 했다. 예를 들어 유가협에서 장례를 치르는데 NL열사면 내가 NL이 아니라고 해서 안 갈 것인가? 그렇지 않은 거다. 그 죽음 앞에서 내 입장에서 다르다고 하더라도 가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파적인 것을 내려놓자고 한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진보적 인권운동론을 주창하는 사람이다. 인권을 가지고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내 청춘은 그런 중에서도 되게 더럽다.(웃음) 소설가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대학에 들어갔기 때문에 1학년 때는 학생운동 이런 것은 일절 무시하고 소설 쓰고 술만 마셨다.(웃음) 그때가 참 행복했던 것 같다. 그런데 악마의 손길에 의해(웃음) 운동권이 되었고 그 뒤로는 정말 치열하게 살았다. 한 1년 동안 학생운동을 하다가 이제는 재밌게 운동하나 보다 하다가 강제징집을 당했고, 일주일 동안 서대문경찰서에서 두들겨 맞고 그날로 강원도 양구에 있는 훈련소 가서 또 두들겨 맞았다. 맷집이 약했으면 벌써 죽었을 것이다.(웃음)”
“프랑스 철학자 자끄 랑시에르가 ‘이 사회의 주류가 아닌 비주류, 소수의 사람들이 하는 것이 진짜 정치지 주류가 하는 것은 지배’라고 얘기를 했는데 참 똑똑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진짜 정치란 누군가를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갈등들을 조절하고 자기 권리를 못 찾고 있는 사람들로 주체가 되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면 내가 하는 인권운동은 아주 훌륭한 정치라고 생각한다. 이런 훌륭한 정치를 30년 이상 해온 것이니까 정치에 미련이 있겠는가.(웃음)”
“1998년 ‘양지마을 사건’이라고 큰 이슈가 되었던 일이 있었다. 충남 연기군에 한 부랑인 수용시설이 있었는데 진짜 감옥보다 더한 비참한 곳이었다. 거기에서 탈출했던 어떤 한 사람의 얘기를 듣고 일주일 동안 조사를 해서 당시 국민회의 이성재 의원과 몇몇 단체와 함께 그곳에 쳐들어가 거기에 갇혀 있었던 300여 명이 되는 사람들을 전부 해방시켰다. 그 사건이 터지고 언론에는 ‘노예의 섬’이라고 해서 기사화되었고 우리는 거기서 나온 사람들을 위해 손해배상청구소송을 대행해주기도 했다. 그런데 이 사람들 상당수가 가족들에게 버림받는 사람들이었는데, 이들이 사회복지시설은 죽어도 가기 싫다고 해서 더 이상 손 쓸 수 있는 부분이 없었다. 나중에 수소문 해보면 이들 대부분은 노숙인이 되어버리거나 죽어 있었다. 이 일을 겪으면서 ‘과연 무엇이 잘못됐나’ 고민했다.
그러면서 우리가 모든 것을 대행해서 언론에 폭로도 하고 소송도 해주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옆에서 돕고 그들이 스스로 이 문제를 풀도록 했으면 그 사람들이 이후 노숙자가 되고 알콜중독자가 되어 거리에서 죽어가는 일이 없지 않았겠느냐 하는 생각을 했다. 인권센터를 통해 대리하는 운동이 아니라, 피해자가 스스로 주체로 서게 하는 인권운동과 사람들이 차분히 인권에 대해서 공부하면서 자기의 권리를 찾아가는 길을 밟아갈 수 있는 대중적 기반의 모델을 만들어 가고 싶다.”
“독재 정권 때는 억울하다는 생각조차도 못 했었고, 조금 상황이 나아졌을 때는 억울하지만 어떻게 해볼 수 없으니까 그냥 지나쳤던 것이 지금은 사람들의 의식이 좀 높아져서 자신이 인권을 침해당한 것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하고 소송까지 가는 경우들이 꽤 있다. 그런데 이것들이 굉장히 이기적으로 수용되어 있다.
‘이기적으로 수용되어 있다’는 말은…
‘내 인권피해에 대해서는 참을 수 없다’고 하면서 다른 사람이 인권침해를 당하는 부분에 대해서는 ‘내가 그것을 굳이 뛰어들어서 휘말려? 송사에 휘말릴 수도 있는데?’ 하면서 문제제기를 안 한다는 거다. 이렇듯 인권문제가 철저하게 개인화 되어 있고 이기적으로 되어 있다. 이것은 운동진영에도 존재한다. 노동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 매일 욕하는 것이 ‘평소에는 남의 인권에 대해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너네 해고당하면 인권운동 찾느냐?’라는 것이다. 인권운동이라는 것은 일종의 ‘품앗이’라고 할 수 있는데 평소에 정말 어려움에 처해 있는 사람들과 연대하고 공감하고 같이 싸울 줄 알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 특히 IMF 이후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던 연대의 가치들이 철저하게 깨져 나갔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 진보운동이 엄청난 패배를 하고 있다고 본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나라 자살률이 OECD 1위고 범죄율도 엄청나게 높아지고 있지 않나. 사람들이 옆에서 죽어나가는 대도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있다. 내 일이 아니기도 하고, 이런 일들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웃음)”
박래군 – 그의 말처럼 이제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안전사회 건설 목표를 향해 변함없”는 길을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과거를 되풀이하게 마련이다. (Those who do not remember the past are condemned to repeat it.)” – 미국의철학자이자 시인이었던 조지 산타야나(George Santayana)가 한 말입니다.
또한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은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는 말씀으로 오늘을 사는 우리들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나아가 선생은 “우리나라에 부처가 들어오면, 한국의 부처가 되지 못하고 부처의 한국이 된다. 우리나라에 공자가 들어오면, 한국을 위한 공자가 되지 못하고 공자를 위한 한국이 된다. 우리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오면, 한국을 위한 예수가 아니고 예수를 위한 한국이 되니 이것이 어쩐 일이냐. 이것도 정신이라면 정신인데 이것은 노예정신이다. 자신의 나라를 사랑하려거든 역사를 읽을 것이 다른 사람에게 나라를 사랑하게 하려거든 역사를 읽게 할 것이다.”라는 교훈으로 늘 역사에게 오늘을 묻고 내일을 설계라고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해 E. H. Carr(Edward Hallett Carr)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이며, 역사적 사실은 역사가가 과거의 어떠한 사실을 역사적 사실로 선택할 때 존재할 수 있다.”라고 명징한 대답을 내민 바 있습니다.
저는 이즈음 뜻이 맞는 몇몇 사람들과 역사공부를 함께 하려고 시간을 좀 내고 있습니다. 조금 뜬금없는 일이기도 합니다만 어떤 계기가 있었습니다.
세월호참사 일주기를 넘어가는 시점에서 결성된 4.16연대가 ‘이젠 인권을 이야기 할 때’라며 제안한 “존엄과 안전에 관한 4.16 인권선언” 때문이었습니다. 처음 뉴스에서 이에 대한 기사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은 바로 “뜬금없이 이게 뭐지?”라는 것이었습니다.
세상사람 살아가는 모든 모습들을 다 담아낼 수 있는 엄청난 크기의 그릇에 “세월호”를 주어담는다는 게 적절한 것인가?라는 스스로의 물음 때문이었습니다.
가뜩이나 시간이 흐르면서 “세월호”라는 말조차 피로감으로 다가오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이즈음에 이런 접근이 과연 옳은 것일까?라는 질문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습관처럼 이런 물음을 들고 성서에게 물었습니다. 그리고 성서가 제가 준 응답은 에스겔(에제키엘) 34장에 있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습니다.
<야훼께서 나에게 말씀을 내리셨다.
“너 사람아, 너는 이스라엘 목자들에게 내 말을 전하여라. 목자들에게 그들을 쳐서 이르는 내 말을 전하여라.”
‘주 야훼가 말한다. 망하리라. 양을 돌보아야 할 몸으로 제 몸만 돌보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아! 너희가 젖이나 짜 먹고 양털을 깎아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 먹으면서 양을 돌볼 생각은 않는구나. 약한 것은 잘 먹여 힘을 돋구워 주어야 하고 아픈 것은 고쳐 주어야 하며 상처입은 것은 싸매 주어야 하고 길 잃고 헤매는 것은 찾아 데려 와야 할 터인데, 그러지 아니하고 그들을 다만 못살게 굴었을 뿐이다.
양들은 목자가 없어서 흩어져 온갖 야수에게 잡아 먹히며 뿔뿔이 흩어졌구나. 내 양떼는 산과 높은 언덕들을 이리저리 헤매고 있다. 내 양떼가 온 세상에 흩어졌는데 찾아 다니는 목자 하나 없다.
그러니 목자들아, 이 야훼의 말을 들어라. 내가 맹세한다. 나의 양떼는 마구 잡혀 갔고, 나의 양떼는 목자가 없어서 들짐승에게 찢겼다. 그런데도 내가 세운 목자들은 나의 양떼를 찾아 다니지 않았다. 제 배만 불리고 양떼는 먹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러니 목자들아, 이 야훼의 말을 들어라.
주 야훼가 말한다. 목자라는 것들은 나의 눈밖에 났다. 나는 목자라는 것들을 해고시키고 내 양떼를 그 손에서 찾아 내리라. 그들이 다시는 목자로서 내 양떼를 기르지 못할 것이다. 나는 내 양떼를 그들의 입에서 빼내어 잡아 먹히지 않게 하리라.
주 야훼가 말한다. 보아라. 나의 양떼는 내가 찾아 보고 내가 돌보리라.’> – 에스겔 34 : 1 – 11, 공동번역
바로 “존엄과 안전 지대에서 내 팽개쳐져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위로이자, 그렇게 “사람들을 내 팽개친 권력자들”에 대한 응징의 소리였습니다. 나아가 신의 직접통치를 선언하는 대목입니다.
신앙의 눈으로 본 응답이었답니다.
그리고 이제 사람 살아온 모습 곧 역사에 묻기로 한 것입니다.
혼자 역사 앞에 서서 묻기보다는 여럿이 함께하는 일이 좋겠다는 생각으로 평소 뜻이 엇비슷한 이들과 함께 나선 일입니다.
어디까지가서 어떤 응답을 얻을런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행여 헛수고가 되도라도 뜻을 새길 수는 잇겠다는 생각입니다.
‘인권’이라는 큰 그릇 속에서 지금은 눈에 잘 띄지도 않는 세월호에 얽힌 피맺히고 한맺힌 소리들이지만 언젠가 그 그릇을 꽉 채워 세상을 향한 큰 울림이 되는 날을 그리며 역사에 묻고자하는 것입니다.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함이요, 미래를 열기 위함이요, 세월호를 역사적 사실로 남기기 위해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