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합니다.

우리들이 필라세사모의 이름으로 모이기 시작하던 무렵, 어느 분인가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동안 저는 내 모국(母國)이 자랑스러웠답니다. 정말 짧은 시간에 엄청난 경제성장을 이루었고, 게다가 민주주의를 그렇게 빨리 정착시킨 나라도 없다는 그런 자부심을 준 모국이었답니다. 그런데 세월호 사건과 그 이후에 일어난 일들을 보면서… 뭐랄까요, 부끄러움이랄까요, 안타까움이랄까요, 그냥 이건 아닌데…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아요. 그래 모국을 위해 뭔가라도 아주 작은 일이라도 해야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모국이란 말이 너무 크다면 그 말은 접어 두더라도, 세월호 유가족들과 실종자 가족들을 위해 아주 작은 일이라도 무언가를 해야하지 않을까 물음으로 함께 생각을 나누어 왔습니다. 그렇게 한해가 지나가고 2016이라는 숫자가 코앞에 놓였습니다.

2014년 4월 16일. 손내미면 잡힐듯한 세월이 지났을 뿐인데 많은 이들에겐 고려적보다 먼 옛날 일이 되었고, 아픔을 호소하는 가족들의 소리는 변함없건만 들으려는 귀 있는 자들도 점점 더 줄어만 갑니다. 오히려 “아직도냐?”, “이젠 그만하라”는 목소리가 정상인듯한, 정말 비정상적인 현실입니다.

BN-CL246_skferr_E_20140419002744자! 이쯤 지금으로부터 155년 전인 1860년 5월에 한양 땅에서 일어났던 사건을 소개해 드립니다. 일년 조금 지난 일을 고려적 이야기로 생각하는 세상이니,  강화도령으로 잘 알려진 조선조 철종임금 11년차에 일어난 일이지만 한 공간에서 일어난 일로 여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소개드립니다.

포도대장을 지낸 신명순의 집에 낯선 중년의 여인이 스며듭니다. 여인의 이름은 주례, 당시 나이 쉰 네살이었습니다. 여인은 그 때 열 세살이었던 아들을 데리고 신명순의 집을 침입합니다. 가슴에는 단도(短刀)를 품고 있었다고 합니다.

마침 신명순은 큰 사랑방에서 아우와 함께 담소중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신명순의 나이는 예순 둘. 주례라는 여인이 단도를 꺼내들고 신명순을 향해 달려들었으나 신명순 형제의 힘에 맥없이 저지당했습니다. 열 세살 어린 아이도 그냥 얼어버렸고요.

아우성 소리에 신명순의 하인들이 달려들어 여인과 아이를 포박하고 포도청으로 끌고 갔답니다.

그리고 포도청에서 공초한 내용은 이렇답니다.

“지난해 오월에 제(주례) 맏아들이 병들어 죽고 작은 아들 회종이 지난해 팔월에 무슨 일인지 우포도청에 잡혀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열흘도 못되어 죽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제 아들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몰랐습니다. 저는 그저 몇 달 동안 마음이 저리고 뼈가 삭아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귀하거나 천한거나 다 같은 것입니다.

이 달은 제 맏아들이 죽은 달이요, 둘째 아들의 생일이 낀 달입니다. 도대체 제 작은 아들이 왜 죽었는지를 알고 싶은 생각에 정신이 나가 포도대장 집을 들이닥치게 되었습니다.”

여인 주례는 이 일로 하여 목을 잘리는 형벌로 세상을 마감했습니다. 열 세살 막내는 귀양길에 올랐고요.

그리고 155년이 흘렀습니다. 그 세월동안 아낙 주례같은 삶을 살다가 간 사람들은 얼마나 될까요?

오는 일요일은 11월 15일(한국 시간 11월 16일)은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지 580일이 되는 날입니다.

“도대체 우리아이들이 왜 죽었는지?” – 진실을 규명해달라고 외치는 300이 넘는 아낙 주례들의 소리가 오늘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155년전 아낙 주례의  한맺힌 소리를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지만, 2015년 오늘 우리들은 세월호 유가족들의 한맺힌 소리들을 들을 귀는 있답니다.  바로 우리들이 말입니다. 더하여 가족들의 한맺힌 소리를 더 크게 전파하는 울림통이 될 수도 있답니다.

바로 그 자리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접속 – 세월호가족과 재외동포 온라인 만남>

일시 : 2015년 11월 15일(일) 오후 9시 (미국 동부시간 기준)

함께 하시렵니까? [email protected] 으로 문의해 주십시요.

초대 – 강도맞은 사람들을 만나기 위한…

환갑 진갑 다 지났어도 웬만한 모임에 나가면 말석차지랍니다. 하여 자리 펴고 자리 접는 뒷일과 막일들이 제 몫이거니하며 개의치 않는답니다. 물론 말석차지가 좋은 점도 있답니다. 그런 자리에선 이 나이가 아직 청춘이라는 생각도 할수 있거니와 조금 헝클어진다 하여도 눈감고 넘어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래도 나이가 나이인지라 나이로 따져 저보다 어린사람들이 많은 모임도 있게 마련입니다. 이런 자리에선 아무래도 더욱 신중해지고 가급적 뒷자리에서 드러나지 않게 조심하려고 애쓰는 편이랍니다. 허나 타고난 성격 때문에 불쑥불쑥 튀는 통에 모임이 끝나고나면 ‘아차!’하는 때가 종종 있답니다.

그렇게 종종 ‘아차!’하면서도 이즈음 제가 즐겨하는 모임이 있답니다. 모임의 이름도 있답니다. 바로 “필라 세사모”입니다. 정식 명칭은 “세월호를 기억하는 필라델피아 사람들의 모임”이랍니다.

명확히 말하자면 제 거주지가 필라델피아는 아니지만 제가 사는 델라웨어주도 범 필라델피아 지역 변방에 위치함으로 끼워 주신 것이랍니다. 가급적 박수나 치며 앞서가는 이들을 쫓아나 가자고 얼굴 내민 일인데, 종종 버리지 못한 못된 습관으로 ‘아차!’하면서도 모임을 즐기고 있답니다. 무엇보다 모임에 대해 열성적이며 나이살에 비해 ‘아차!’하는 빈도수가 높은 저를 잘 이해해주는 이 모임의 구성원들이 넉넉한 까닭입니다.

이 모임에서 아주 뜻깊은 행사를 준비하고 있답니다.

세월호 유가족들과 재외동포들이 온라인에서 만나 이야기를 나누는 행사랍니다. 이 행사를 위해 어제 저녁에 약 한 시간에 걸쳐 시험적으로, 온라인에서 여러 다른 지역에 있는 이들이 같은 시간에 함께 모여 이야기하는 연습을 해보았답니다.

한국의 세월호 유가족들 몇 분들을 비롯하여 호주, 영국, 캐나다, 그리고 미국 동부의 뉴욕과 뉴저지 그리고 필라델피아, 중부의 시카고와 테네시, 서부의 켈리포니아 등 여러 곳에 계신 분들이 함께 했답니다.

그리고 이제 오는 일요일(11월 15일) 저녁에 세월호 유가족들과 재외동포들이 온라인에서 만나는 첫번째 행사를 갖는답니다.

자, 이쯤 세월호 유가족 및 실종자 가족들 이야기를 좀 하고 넘어가려합니다. 제가 바라보고 느끼는 세월호 유가족 및 실종자 가족의 모습입니다.

제가 잠시나마 가르침을 받았던 선생님들 가운데 서남동목사님이 계시답니다. 목사님께서 세상 뜨신지 벌써 서른 해가 넘었답니다.  그 어르신께서 즐겨 인용하시던 예수의 비유가 있답니다. 잘 아시거나 한번쯤은 들어보셨음직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입니다.

<그러나 율법교사는 짐짓 제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 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 사람이 가진 것을 모조리 빼앗고 마구 두들겨서 반쯤 죽여 놓고 갔다. 마침 한 사제가 바로 그 길로 내려 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는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또 레위 사람도 거기까지 왔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길을 가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그의 옆을 지나다가 그를 보고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가까이 가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 주고는 자기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서 간호해 주었다.  다음 날 자기 주머니에서 돈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잘 돌보아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돌아 오는 길에 갚아 드리겠소’ 하며 부탁하고 떠났다.  자, 그러면 이 세 사람 중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은 누구였다고 생각하느냐?” 율법교사가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누가복음 10: 29-37

성서 누가복음에 나오는 예수의 비유 말씀입니다. 선한 사마리아사람들처럼 사는 것이 예수믿는 이들이 해야할 일이라는 해석은 익히 아는 교회의 전통적 이해입니다. 그런데 서남동목사님은 이 비유를 놓고 이렇게 질문을 던지셨습니다.  “이 비유에서 예수의 역할은?” 이라고 말입니다. 이 글을 읽고 계시는 당신은 누구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서목사님은 “강도만나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예수라고 말씀하셨답니다. 2015년 현재, 제가 이해하고 느끼고 만나는 세월호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들의 모습이랍니다. 바로 이들이 제가 섬겨야하는 예수라고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월호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들이 길을 가다 강도만났던 일에 대해 적절한 보상과 배상을 받았고, 이미 다 치유되고도 남을 대접을 받았다고 여긴답니다. 더하여 그렇게 강도 맞는 일은 살면서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인데 유달리 특별나게 군다고 혀를 차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서는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누가복음에 나오는 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의 시작은 “영생에 대한 물음”으로 시작합니다. 예수를 믿는 이들, 바로 영생을 꿈꾸는 이들에게 대한 답변입니다.

서남동선생님은 그 성서적 물음과 답변을 제게 이렇게 해석해 주신답니다. 오늘 네가 보고 있는 ‘강도만나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예수인 줄로 알라고 말입니다. 바로 제가 만나는 세월호 유가족들과 실종자 가족들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감사하는 일은 이런 제 생각을 넉넉히 이해해주는 필라세사모의 구성원들이랍니다.

혹시라도 오는 11월 15일 저녁에 있을 “세월호 유가족들과 재외동포들의 온라인 만남” 행사에 참여 하시기를 원하시는 페친이 계시다면(단, 재외동포 페친들만) 제게 연락 주시기를 바라며 이 글을 쓴답니다. 이메일([email protected] 으로)을 주시면 함께 하실 수 있는 안내를 보내 드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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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일로 정말 잔인하고 몹쓸 세상도 경험했지만, 사회를 지탱해 주는 좋은 사람들도 많이 만나게 됐어요. – 중략- 아, 소수라도 이렇게 힘써 주시는 분들이 있으니 덜 억울하구나, 내가 덜 바보구나, 내가 덜 외롭구나 싶어요. – 중략- 그런걸 보면 외면만 받는 세상속에 있는건 아니네요.” – 세월호희생자 길채원학생의 어머니 허영무씨

“진실이라는 목표 하나 보고 달려가다보면 목적지에 다다를 수 있을 것 같아요.  – 중략-  어쨌든 내가 할수있는 만큼 최선을 다해서 간다. 그거예요. 이길 가다보면 또 다른사람들이 있으니까. 우리 가고난 뒤에 다른사람들이 언젠가는 밝혀줄거다. 그건 확신해요. 우리가 앞서서 얼마만큼 가줬으니까 다음사람들이 거기에서 출발하면 되니까….” – 세월호희생자 이창현학생의 어머니 최순화씨

누군가의 외로움을 덜어줄 소수가 되어보지 않으시렵니까? 이 사회를 지탱해 나갈 좋은사람이 되어보지 않으시렵니까? 누군가 앞서가다 지친 이들의 곁에서 잠시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 주지않으시렵니까? 그 자리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송곳

페친 한분이 웹툰(미국에서는 Webtoon보다는  Webcomic 이라 합니다만) ‘송곳’ 이야기를 꾸준히 올리실 때만 하여도 제 눈길은 거기 가닿지 않았답니다. 그러다 드라마 ‘송곳’ 이야기가 연이어지면서 티저 영상을 올리셨고, 제가 그걸 보게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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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길로 드라마 ‘송곳’을 찾아 보기 시작했고, 5회까지 보았답니다. 매회 드라마가 시작될 때 똑 같은 자막이 되풀이 됩니다. “이 드라마는 2003년 6월 어느날부터 시작되는 이야기입니다.”라는 자막입니다. 그런데 드라마를 보면서 제 머리속엔 2003이 아니라 1970년대와 2015년 오늘의 모습들이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답니다.

조지송, 조화순, 김경락(이 양반은 1980년대 미국와서 만났지만)목사님들의 모습들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1970년대 인천과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를 이끌었던 분들입니다. 그리고 그이들을 이어 70년대 후반부터 80년내 중반(제가 이민온 이후는 모른답니다)까지 이른바 노동운동에 삶을 바친 이들의 얼굴들을 떠올려 본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한분, 어제 송곳 5회를 보다가  “같은 색인지 알았는데 아니였다.”라는 대사에서 떠오른 이가 있답니다.

그 분의 이야기를 하기 전에 제 기억속에 있는 1970년대에 비하면 2015년 지금의 대한민국은 비교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로 다른 세상이 되었습니다. 비단 대한민국 뿐만 아닙니다. 이곳 미국내 동포사회의 변화도 마찬가지입니다. 특히 먹고, 입고, 자는 환경의 변화는 말로 설명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제가 이민온 1980대 중반만 하더라도 개밥통조림 사다먹은 이야기가 그냥 우스개소리만은 아닌 때였습니다.

아무리 못입고, 못먹고, 열악한 잠자리라 하더라도 그 때에 비하면 오늘날은 가히 천국에 가깝다고도 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1970년대나, 2003년이나, 2015년 오늘에나 여전히 변하지 않은 것들이 있습니다. 사람들을 줄세워 평가하고, 가르고, 나누어 차별하는 일입니다. 어찌보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차별이 더욱 더 심화되었는지도 모릅니다.

이쯤, “같은 색인지 알았는데 아니였다.”라는 대사에서 떠오른 분 이야기입니다. 조지송, 조화순목사 이상으로 유명세를 탓던 이입니다. 이즈음에도 종종 뉴스에 이름이 오르락하기도 합니다. 저희 부부 결혼식 때 축복기도를 해주신 분이기도 하십니다.

올초에 그 이에 대한 근황을 들을 수 있었답니다. 그와 가까이 지내는 분에게서 전해들은 것이지요. 꽤 비싼 차를 타고 다니는 그 이에게 물었답니다. “(목사로서) 이거 좀 과하지 않은가?”라고 말이지요. 그랬더니 돌아온 대답이었답니다. “우리 고생할만큼 했잖은가? 이젠 이 정도는 우리도 누릴만 하지!”라고요.

저는 목사가 최고 고가의 차를 타고 다닌다고 문제가 될 일은 아니라고 봅니다. 다만 그 차를 어떤 생각으로 타고 다니고, 그 차를 이용해 무슨 일을 하고 있느냐는 따져 보아야 할 일이라고 생각한답니다.

무엇보다 “우리 고생할만큼 했잖은가? 이젠 이 정도는 우리도 누릴만 하지!”라는 말은 2015년 한국인들 특히 60대 이후 세대들의 굳어진 생각을 대변해 주는 말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답니다.

“우리 고생할만큼 했잖은가? 이젠 이 정도는 우리도 누릴만 하지!”라는 말을 고민없이(내가 느끼기에) 뱉어내셨을 이 어른이 두 분 조목사님들과 어깨 나란히 노동현장을 누비고 다니셨던 1970년대에는 분명 성서에 뜻을 두고 예언자적 사명을 다한다고 믿었을 것입니다.

성서 예언자들은 그들이 예언자적 소명을 다할 때만 기록으로 남겨졌고, 그 소명을 다했을 땐 소리없이 사라졌답니다.

그리고 2015년 오늘은 여전히 ‘송곳’같은 예언자들이 요구되는 시대랍니다. 어쩌면 1970년대나 2003년 보다 더욱 절실하게 말이지요.

4월 혁명

태평양전쟁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15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둘째 이야기    광복 70년 (光復七十年)

4월 혁명

<미완(未完)의 혁명(革命)>이라고도 불리는 4월 혁명은  4.19 학생운동, 4.19 민주혁명, 4.19 의거, 4월 의거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보는 사람들의 시각(視角)이나 관점(觀點)에 따라 각각 다른 이름으로도 불리는 ‘4월 혁명’에 관한 몇가지 이야기를 요약해서 적는다.

한국근현대사사전엔 4월 혁명에 관하여 다음과 같은 설명이 실려 있다.

  • 1960년 4월 19일을 전후하여 일어난 정치혁명, 이승만 독재정권을 무너뜨리고 제2공화국를 출범시키는 역사적 전환점이 되었다. 5.16군사쿠데타 이후 의거로 규정되었으나 혁명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며, 4월 19일이 절정을 이루었다 하여 <4.19혁명>이라 불리기도 한다.

4월 혁명의 원인은 대략 이런 것이다.

원인의 근본은 원조경제(援助經濟) 위기서 싹튼 것이라고도 하는데, 그런 이야기는 접어 두고, 4월 혁명의 직접적인 원인은 이승만 1인 독재와 자유당의 부정부패에 대한 국민들의 불만이었다. 특히,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패색이 짙어진 자유당은 관권을 총동원하여 대규모 부정선거를 감행했다. 그렇게 조작되어 처리된 3월 15일의 선거 결과, 결국은 이승만 후보와 이기붕 후보가 각각 정,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국민들은 그러한 선거결과에 승복하지 않았고, 마산을 비롯해 전국 각처에서 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부정선거에 항거하는 규탄시위가 이어졌다. 이 글의 제목인 <4월 혁명>이란 위에 설명한 <3.15 부정선거>를 저지른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 정권과 <5.16 쿠데타>를 일으킨 박정희 장군의 군사정권 사이에 끼어 있던 한국 현대사의 한 장면이다.

한데, 한국 현대사에서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의 집권기간(期間)은 다른 어느 대통령들의 재임기간보다도 훨씬 길었다.

제1대 이후 지금까지 11명이 대통령 자리에 앉게 되었는데, 대한민국 70년사에서 이승만과 박정희 (5,16 군정 포함) 두 사람이 집권한 기간은 30년이다.

이승만의 자유당이 12년이고, 박정희의 군정과 공화당이 18년이다.

참고로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의 재임기간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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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이야기 제목인 <4월 혁명>이 무엇인가를 설명하면서, 이승만과 박정희 이름이 나오게 되었는데, 내친 김에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들의 성명과 재임기간도 적었다.  그리고 그들 중엔 <창씨개명(創氏改名)>을 한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적었다.

그러한 <창씨개명>이란 한국 민족의 고유한 문화와 전통을 없애려고, 1940년에 일제(日帝)가 내선일체(內鮮一體)를 내걸고 강제(强制)로 한국인의 성과 이름을 일본식 씨명(氏名)으로 바꾸어 짓도록 한 것이다.

♦  내선일체(內鮮一體)란 1937년에 일제가 조선을 통치하기 위해 그들이 만들어낸 말인데, 내(內)는 그들이 일본 본토를 가리키는 말인‘내지(內地)의 첫 글자를 뜻하는 것이고, 선(鮮)은 조선을 가리키는 뜻으로 쓰인 것이다.

말하자면, 內鮮一體란 조선과 일본은 <한 몸>이다라는 것이고, 따라서  그들 일본은 한국인들에게 일본식으로 창씨개명을 하도록 강요했던 것이다.

그들은 위에 설명한 ‘內鮮一體’뿐만 아니고, 한국인과 일본인의 뿌리는 같은 것이며, 같은 조상(祖上)을 가진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동근동조(同根同祖))라는 말도 만들어냈다. 그러한 당찮은 말을 만들어 내놓은 일본은 조선 사람들에게 터무니  없는 짓을 했던 것인데, 그들이 조선 사람들에게 강요(强要)한 창씨 개명도 그런 맥락(脈絡)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한데 앞에 적은 것처럼 박정희, 최규하, 김영삼, 김대중, 이명박도 창씨개명을 한 사람들이다.

그들의 창씨개명은 어떠한 것이었는지를 알아보기로 한다.

대한민국 대통령 중, 8.15 광복 후에 태어난 사람은 노무현과 박근혜 두 사람 뿐이고, 그 외는 모두 그 전에 출생한 사람들이다. 그 아홉 대통령 중에서 이승만, 윤보선, 전두환, 노태우는 창씨개명을 하지 않았고, 다른 다섯 사람은 창씨 개명을 한 사람들이다.

박정희(朴正熙)는 다카기 마사오(高木正雄), 최규하(崔圭夏)는 우메하라 게이이치(梅原圭一) ,  김영삼(金泳三)은 가네무라 코유(金村康右),  김대중(金大中)은 도요타 다이쥬(豊田大中), 이명박(李明博)은 츠키야마 아키히로(月山明博)

朴正熙의 正,  崔圭夏의 圭,  金泳三의 金,  金大中의 大中,  李明博의 明博 등, 그들은 모두 제각기 한 글자나 두 글자를 살려서 창씨개명한 흔적(痕迹)이 있다.

창씨개명을 한 조선사람들의 대부분이 위에 적은 것처럼 원래의 성명 중에서 한 두 글자를 살렸는데, 박정희는 달랐다.

박정희는 <창씨개명>을 두 번이나 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첫번째 것인 다카기 마사오(高木正雄)에는 ‘朴正熙의 正’이 들어 있기 때문에 그것으로 끝내지 않고 다시 지었는데, 오까모토 미노루(岡本實) 로 고쳤다고 한다. 박정희의 그러한 창씨개명은 100 퍼센트 일본인화(日本人化)된 성과 이름이다.

오까모토 미노루(岡本實)에 관한 것은 인터넷 등으로도 알려져 있기 때문에 더 긴 이야기는 적지 않는다.

각설하고, 앞에서도 적었듯이 <4월 혁명>을 화제로 삼아 글을 쓰다보니 창씨개명에 관한 것도 나왔고, 창씨개명에 관한 이야기를 적다보니 이승만과 박정희 두 대통령 이름도 나왔다.

이화장태평양전쟁이 끝난 다음, 이승만 박사가 그의 부인(프란체스카 도너 리)과 함께 미국에서 귀국하여, 서울 돈암동 부근에 있는 돈암장(敦岩莊)이라는 곳에서 얼마동안 살다가 종로 이화동에 있는 이화장(梨花莊)으로 이사했다.  그곳으로 이사한 이 박사는 대한민국 대통령이 될 때까지 이화장에서 살았는데, 그 무렵에 나는 이화장을 개축(改築)하는 공사현장에서 얼마 동안 일한 적이 있었다.

♦  내가 거기서 일할 수 있게 되었던 것은, 당시 그 공사를 맡은 제일토건사 (사장 : 金相根, 당시 서울  을지로 사거리 근처 소재)의 김예수(金禮洙) 부사장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Charlie Kim이라고도 불렸던 김예수 부사장을 내가 알게 된 것은, 당시 서울 용산 한남동에 있던 13th Engineer Batallion 이라는 미군부대에 취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부대에 관한 이야기를 하자면, 미육군 제7보병사단과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USAMGIK)에 관한 이야기까지 적어야 될 것이다.

USAMGIK, 즉, 재조선미육군사령부군정청(在朝鮮美陸軍司令部軍政廳)은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태평양전쟁에서 연합국에 항복한 뒤, 미군 제24군단 (XXIV Corps)이 1945 년 9월 8일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한반도의 북위 38도선 이남을 다스리던 군사적 통치기관이다.  이 글의 목적이 그러한 미군정(美軍政)에 관한 것이 아니고, 내가 이화장을 개축(改築)하는 공사현장에서 일하게 되었던 설명을 하기 위해 꺼내본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에 관한 이야기는 더 적지 않는다.

하여간, 나는 13th Engineer Batallion이라는 미군부대 부대장인 윌헬름  중령(Lt. Col. William E. Wilhelm) 관저에서 일한 적이 있었는데, 내가 김 부사장을 알게 된 것과 이화장 공사현장에서 내가 일할 수 있게 된 것도 그러한 사유(事由)가 있었기 때문이다라는 것을 생각해본다.

앞에 적었듯이 나는 이승만 박사 내외가 살고있던 이화장 개축공사현장에서 얼마동안 일한 적이 있었다.

한데, 백발이 성성한 그 분을 가까이에서 살펴본 첫인상은 평범해보이 는 노인이었다. 그는 가끔 공사현장에 나타나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물어 보기도 하면서 현장을 둘러보았는데, 그때 그 모습이 생각난다. 아주 자상하고 찬찬해 보이던 그런 분이 어찌하여 인생말년(人生末年)   에 이르러서는 부끄럽고 명예스럽지 못한 길로 가게 되었을까?

말하자면, 그 노인의 그러한 삶은 지나친 노욕(老慾)과 분수에 넘치는 과욕(過慾) 때문에 생긴 결과였다라는 생각을 해본다.

반면교사(反面敎師)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의 어원은 중국 공산당 창건자인 모택동(毛澤東)의 어록 (語錄)에서 찾을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다른 사람이나 사물(事物)의 부정적인 측면에서 가르침을 얻는다는 뜻으로 쓰이고 있다.

그러한 뜻으로 볼때, 한국현대사에서 이승만 박사는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반면교사>의 본을 보여주고 간 사람이라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이승만 박사가 대통령 자리에 있을 당시, 서울 남산에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   한데, 4.19 후에 그 동상이 철거되었다.  그리고, 반세기 (半世紀)가 지나갔다.

51년만에 남산 언저리에 다시 이승만 박사의 동상이 세워졌는데, 그런 것이 여러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것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나는 이화장 개축공사 현장에서 일하고 있을 때 이승만 박사를 가까이에서 살펴본 생각이 나서, 그 당시에 있었던 이야기를 이 글에 적어 보는 것이다.

이번 글의 제목인 <4월 혁명>이 말해주고 있듯이 그 당시에 벌어졌던 선거와 관련된 것 한가지만을 가지고 이승만 박사를 평(評)한다면, 그의 과오(過誤)를 말할 수도 있을 것이고, 당연히 그가 비난(非難)의 대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승만 90년>이라는 그의 한평생을 두루 살펴보면, 거대(巨大) 한 삶과 꿈이 담긴 그의 생애를 짐작해볼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말하는 까닭

일주일에 한번씩 온라인 화상으로 만나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세월호 가족들이 앓고 있는 아픔이 이어지는 한, 우리라도 그들을 잊지말고 그 아픔의 아주 작은 것이라도 나눌 수 있으면 나누어 보자고 만나는 친구들입니다.

모일 때마다 작은 주제를 정해놓고 서로의 생각들을 나누곤 합니다. 지난 주에는  “미국에 사는 우리들은 왜 세월호 참사를 비롯한 한국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는지? 왜 이민와 살면서 떠나온 모국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하고 있는지?”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나이도 다르고 미국에 온 햇수도 다르고 이제껏 살아온 경험들도 서로 다르거니와 직장생활을 하는 친구도 있고, 자영업을 하는 친구들도 있고, 가정주부로 자녀교육에 열심인 친구도 있으니 저마다 다른 생각들이 있었답니다.

그날 모임은 일테면 그렇게 서로 다른 우리들이 왜 모여 함께 이야기하고 우리들이 나눈 이야기들을 전파할 수 밖에 없는지를 이야기하는 자리였습니다.

늘 그렇듯 모임이 끝나면 저는 새로운 것을 배우고 또 새롭게 눈뜨는 것들로해서 이 나이에 과한 즐거움을 얻는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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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난 주말과 주초에 제가 경험한 일 때문에 이 글을 써보는 것입니다.

이른바 SNS라는 신종 대화 도구들이 있습니다. 트위터니 페이스북이니 카톡, 텔레그램 등등이 그것들이지요. 저는 제 또래 남못지않게  이런 신종 도구들을 먼저 사용해보는 왈 얼리어답터에 속하는 편입니다. 모든지 처음 나왔다하면 찝적거려보기는 하는 편이랍니다. 그런데 즐기는 쪽으로 접어들면 완전히 구태를 벗어나지 못하는 쪽이랍니다.

일테면 저는 제 소유의 셀폰(핸드폰, 스마트폰 무어라고 부르던간에)이 없습니다. 그저 PC와tablet을 가지고 놀 뿐입니다. 전혀 불편함을 모르고 삽니다. 폰을 손이나 핸드백에서 떼어내지 못하고 사는 아내를 보면 이따금  “왜 저럴까?”하는 생각을 하곤합니다. 그러나 아내는 저더러 “촌스럼의 극치로 산다”고 말한답니다.

트위터나 페이스북을 이용하는 방법도 마찬가지랍니다. 트위터에서 누군가를 팔로잉한다든가 페북에서 친구맺기를 신청한다든가, 댓글을 단다든가 하는 일에는 거의 쑥맥에 가까운 촌스러움이 있답니다. 그저 수줍게 제 이야기를 올리고 그것으로 족한 편이지요. 당연히 팔로윙이니 팔로워니, 친구숫자니 하는 것에는 관심조차 없는 편이랍니다.

그러니 말이 사회관계망서비스 이용을 할 뿐이지 골방에서 제 이야기를 혼자 떠드는 수준에 불과한 진짜 촌스러움의 극치랍니다.

그런 제게 지난 주말과 주초에 댓글로 충고들을 남긴 이들이 있답니다. 한 친구는 지금이라도 만나면 “야~ 쨔샤!”하며 반길 중고등학교 동창이고, 또 다른 이는 전혀 모르는 어찌 하다보니 페북에서 만난 분입니다.

제 어릴 적 친구는 현재 한국에 살고, 페북에서 만난 분은 미국에 사시는 이입니다.

먼저 헤어져 만나지 거의 40년이 넘는 제 어릴적 친구의 충고는 “떠났으면 지금 사는 곳의 삶에 충실하길 바란다. 여긴 사는 우리들이 꾸려나갈 것이므로…”하는 것이였는데, 그 충고를 남긴 시간과 그 친구가 누리고 있었던 형편으로 미루어 오랜 옛 벗인 저를 진심으로 아끼는 마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와 그리 멀리 않은 곳에서 사는 페북에서 알게된 이의 충고는 “차라리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는게 좋겠다”는 것이었는데 사뭇 성난 투의 말이었답니다.

두 사람 다 제가 페북에 올린 한국관련 이야기들에 대한 반응들이었지요.

그래 저를 다시 돌아보는 것이랍니다.

먼저 최근에 제가 받은 이메일 몇 개를 소개해 드리는 것으로 제 이야기를 이어가려 합니다.

<You’re welcome.  I’m glad you are here, and doing what you do, too. Very interesting article — research which reinforced my observations / perceptions in a few of the listed occupations. >

<Mr. Kim,

Thanks for your note. It reminded me of the African-American slaves, when the children and spouses were sold and they knew, chances were, they would not see each other again.  My Dad told me of stories where slaves who were able to escape to the north, who spent the rest of their days trying to find out where their kin lived and to reconnect.  Some stories ended right and others ended very sad.  To this day I cannot trace my family back to the slavery days.  However, my wife Mae can trace her descendants back to Nova Scotia, Canada and the slave ship that brought the family to Halifax from Jamestown, VA.

I always enjoy your notes: they make us think!>

<Mr. Kim,

I really like your note. I hope you are right about the move to the “HANGRY” Generation .  I see the “me first” in our national politics. Maybe that will change as the younger generation influences.>

<Dear Young Kim,

Thank you for another delightful letter from My Cleaners.  I agree the world is full of very diverse people with lots of differing attitudes and beliefs.  Your reminder to be open to others comes at a perfect time.  Well, any day would be the perfect time, wouldn’t it?

What transpires at your counter, everyday, is a wonderful example of openness and willingness to come into relationship.  One of my teachers would say that we move through a progression in knowing people.  We start as Strangers, move to Acquaintances, then to Rapport and finally into Relationship.

Strangers — we know nothing about each other

Acquaintances — we know some facts (name, address, phone number) about each other.

Rapport — we share similar feelings, are harmonious, we can get along

Relationship — we share and understand what to expect from each other, we share mutual expectations.

In my business (dental practice) we used to say, “Never treat a stranger.”

Of course, always started out as Strangers.  We easily became Acquaintances with a written intake form which shared the needed data.

Coming into Rapport was more time consuming, requiring some questions and answers, sharing of information, thoughts, feelings, opinions, experiences.

Relationship required a more complete discussion of what we each expected from each other.

Although not everyone wants to be in Relationship with every other person, or even with their healthcare providers, (or cleaners).  We all can easily move toward Rapport, starting with just a SMILE.  A welcoming, open attitude begins there and moves ahead with words and gestures.

Your “Letter From Your Cleaner” constantly reminds us what we can expect from you.  This is an open door for relationship building.  What you can expect from me, is to be paid for your service.  I also may provide a pleasant attitude, timely retrieval of my clothes, a sincere referral of a friend to your business.  Thus, we move into Relationship as we each fulfill our mutual expectations.  This is the basis of a trusting, respectful Relationship.

My wardrobe is improved by your cleaning service, and my life is improved by your letter and my spirit is lifted by our relationship.

Yours for a better world,>

제가 이 이민의 땅에서 이곳 사람들에게 받은 이런 종류의 메일은 책으로 엮는다면 족히 몇권 분량은 된답니다. 믿거나 말거나 말입니다.

제가 이 미국에서 이민자로 사는 삶의 모습이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비춰진 일면일 수도 있습니다. 이들에게 저는 “괜찮은 한국계 미국인”으로 알려지고 싶은 욕망도 있거니와 저로 인해 한국과 한국인들의 좋은 점들이 드러나 알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민의 삶을 이제껏 가꾸어 나왔다고 생각한답니다.

그런데 제게 늘 자랑스러워야 할  대한민국이 손가락질 받고 우스개 노릇으로 전락하는 모습은 정말 아니랍니다. 그래 한국과 한반도에 대해 제가 관심을 끊지 못하거니와 적극 이야기하는 것이지요.

그런 제가 종북이니 반국가적(반정부라는  말은 그래도 들을만 하답니다.)이니 하는 말을 듣게되면 솔직히 분노가 치민답니다.

사르트르는 <유대인>이라는 책에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반유대주의란 유대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유대인”을 “혐오집단”으로 지목해 그들에 대한 증오없이 도저히 살 수 없는 반유대주의자들의 문제>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이어갑니다 <만약 유럽의 부르조아들은 그런 체계를 유지하기 위해서 유대인이라는 민족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그것을 만들어 냈을지도 모른다.>

사르트르가 이런 말을 남겼던 때로부터 70년이 흘렀습니다.

중동에서는 유대인들이 옛날 유럽인 행세를 하고 있듯이, 같은 한인들끼리 한반도 안에서 그리고 이곳 미국 뿐만 아니라 세계 도처에서 “혐오집단”과 “증오의 대상”을 찾는 못된 관습은 사라져야 마땅한 일입니다.

제가 이 땅에서 더욱더 미국인으로 살기 위해서라도 한국과 한반도에 대한 관심과 이야기를 끊을 수 없는 까닭이랍니다.

가을 주일아침

Daylight savings time  해제로 간밤에 시간이 바뀌자 아침시간이 사뭇 길어졌습니다. 주일아침 습관으로 일어나 성서 한쪽 읽고, 뉴스 검색 좀 하다가 집안을 서성거려도 아내를 깨우기는 아직 이른 시간입니다. 밖은 이미 훤하지만 행여 모처럼 되찾은 한시간을 잠속에서 즐기려는 아내가 깰까봐 조심스레 집을 나섭니다. 평소처럼 왼쪽으로 꺽어 동네 한바퀴를 돌까하다가 오른쪽으로 꺽어 동네 밖으로 나서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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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앞에 작은 개천이 있습니다. White Clay Creek입니다. 봄이면 동네 낚시꾼들이 꼬이는 곳이기도 합니다. 민물 송어를 낚기위해서지요. 봄 낚시철이면 주정부에서 낚시꾼들을 위해 송어를 방사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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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엔 실개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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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가Halloween day였음을 알려주는 장식을 한 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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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식한 집과 이웃집 뒤뜰을 지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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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년 전후에 이 동네에 새로운 마을들이 들어서기 전에 있었던 옛 집입니다. 지붕에는 파란 이끼가 가득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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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옛집 앞마당에 놓인 의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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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앞에 선 고목에 경고문이 붙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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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곳은 개인소유이므로 여기서 사냥, 낚시, 덫 놓는 일 , 무단침입을 금한다는 경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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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길입니다. 동네 관광용 기차가 다닙니다. 이 동네에서 근 이십년 살면서 실제 기차를 본 적은 한번도 없습니다. 아내는 아이들과 몇번 기차를 타본 적이 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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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시가지를 관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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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길 너머 하얀 건물들은 버섯공장입니다. 녹색팻말은 동네 야구장 안내판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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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ockessin 시의 구시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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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교회당이 하나 있습니다. 아마 이 동네에서 제일 작은 교회당일겝니다. 동네에 있는 한인교회와 중국인교회에 비한다하여도 규모가 1/10, 1/20 수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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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ippey 교회당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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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연혁입니다. African – American 교회입니다. 흔히들 말하는 흑인교회지요. 미국내African – American 교회형성 과정과 Chippey 교회당의 연혁이 새겨져 있습니다. 현재 이 교회당 건물은 1972년에 지어졌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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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당 옆에 쇠락한 건물이 몇 년째 주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한때 동네 마을회관(community center)으로 쓰였던 곳입니다. 한인회에서 몇차례 노인잔치할 때 빌려 쓰기도 했던 곳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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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개천이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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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독립기념일이면 불꽃놀이 축포를 쏘아 올리는 옛 체육공원입니다. 야구장과 football(미식축구)장이 있는 곳입니다. 보이는 축구꼴대 뒤로 크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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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은 새로생긴 축구(soccer)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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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규격 축구장 네곳이 붙어있습니다. 최근 미국 기호 스포츠로 급부상한 축구열기를 느낄 수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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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있는 외길 다리입니다. 이쪽 차 한대 가면 저쪽 차 한대가 지나갈 수 있는 외길 다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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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길다리 아래 개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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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에 핀 빨간 열매를 보며 옛날 앵두나 까마중 생각을 해본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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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주라도 있는 집인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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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땐 입술 까맣게 까마중  따먹던 어린애였는데 어느새 손주 생각할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주일아침이라고 부르던 시간인데….

서예(書藝)- 2

태평양전쟁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14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둘째 이야기    광복 70년 (光復七十年)

서예(書藝)- 2

권불십년(權不十年) 이야기를 적는다는 것이 박정희 대통령과 김영삼 대통령의 휘호(揮毫)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휘호란 붓을 휘둘러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린다는 것인데, 이야기가 나온 김에 한국 대통령들의 붓글씨에 관한 것 몇가지를 골라서 적어 보려고 한다.

역대 대통령 중 가장 휘호를 많이 남긴 사람은 박정희 전 대통령일 것이다. 그의 재임기간이 길기도 했지만, 하여간 그의 이름이 적힌 휘호를 많이 남긴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나 노무현 전 대통령은 한자(漢字)를 잘 몰라서인지 눈에 뜨이는 한자 휘호가 없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재임 기간중의 휘호가 여러 점 있으나 노태우 전 대통령은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한문을 배웠고, 평생을 붓글씨와 가까이 하면서 살아온 사람으로 알려진 이승만 전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중에서 가장 뛰어난 필체(筆體)를 남긴 사람으로 평가되고 있다.

붓글씨 이야기를 하는 김에 몇기지 더 적고 다음 이야기인 ‘4월 혁명’으로 넘어 간다.

붓으로 글씨 쓰는 것을 한국에서는 書藝라 하고, 중국에서는 書法이라고 하며, 일본에서는 書道라고 한다.

영어로는 대개 Chinese brush pen writing이라고도 하고, Chinese calligraphy 라고도 한다.   한데, calligraphy 라는 것를 풀이해 보면,  calli [beautiful] + graphy [forms of writing] = beautiful forms of writing 이라는 답이 나온다.   무슨 설명이 더 필요하겠는가?

<書>는 시각적인 조형미를 평면에 나타내는 조형(造形) 예술이며, 온 몸과 힘과 정신이 붓끝에 모여 그것이 점(點)이나 선(線)에 나타나도록 심혈을 가울이는 동작이다.

붓글씨는 그렇게 예술적인 감각으로 쓰는 경우도 있고, 단순히 기록을 위한 하나의 필기 방법으로 쓰이기도 한다.

붓글씨의 발상지는 중국이다.

그러나 한문이 한국 것으로 소화시키듯이 붓글씨도 그렇다.

예를 들면, 추사체(秋史體)가 바로 그러한 것인데, 그것은 추사 김정희 (秋史 金正喜, 1786-1856, 조선 말기의 금석학자[金石學者]이며 서예가) 가 만든 것이다.

  • 추사체는 굵고 가늘기의 차이가 심한 필획과 각이 지고 비틀어진 듯하면서도 파격적인 조형미(造形美)를 보여주는 것이 특징이다.

남의 것을 모방(模倣)하지 앓고 창작한 그의 정신은 본받을만 하다.

한글에도 그러한 점이 있다.  한글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의 필법(筆法)은 한자를 쓰는 것과 같았으나, 붓을 움직이는 방법을 한자의 그것과 다르게 하여, 선이나 점획이 부드 럽고 단정한 궁체(宮體) 글씨를 만들게 된 것이다.

  • 궁체는 조선시대 궁중에서 쓰기 시작하여 발전해 온 전통적 한글 서체다.

요즈음 세상은 어느 때보다도 육체 단련을 위한 운동법이 널리 보급되어 있는 시대라고 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몸에 좋다는 것은 무엇이든지 닥치는대로 먹는 사람도 있고, 값비싼 각종 보약과 건강식품의 수요가 늘어난다고 한다.

한편, 마음이 초조하고 정신이 불안하여 심적 불안을 가지고 지내는 사람도 적지 않은 듯하다.

다음과 같은 현상이 있는 것도 볼 수 있다. 몸에 해로운 것인 줄 알면서도 술울 마시거나, 담배나 마약에 의지하는 사람도 있고, 용하다는 점술가를 찾아다니거나, 무슨 종교에 발을 들여 놓는 사람도 있다.

그 밖에, 무슨 오락에 취미를 가져보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 아닌가 싶다. 그러한 것은 사회가 불안정할수록 더 심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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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때에, 손에 붓 한 자루 쥐고, 붓끝에 먹물을 묻혀 화선지에 글씨를 써보는 것도 마음의 안정을 얻을 수 있는 한 방법이 될 것이다. 우선, 마음을 비우면, 마음의 여유가 생기게 될 것이고, 마음의 여유가 생기게 되면, 불안 속에서도 안정을 얻을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러면, 글씨는 어떻게 쓸 것인가?

평소에 좋아하는 글 한 구절이면 더욱 좋고, 그런 것이 아니라도 상관 없다.   어떤 글씨라도 또는 어떤 모양이라도 괜찮다라는 말이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가로든 세로든 간에, 그냥 붓 가는대로 팔을 움직여 보면, 종이 위에 붓끝이 움직이는대로 그 흔적(痕跡)이 남게 된다.

  • 그것은 정신을 붓끝에 집중시키며 붓을 움직여나갈 때, 그 <붓 움직임> 에 따라 까만 먹물이 하얀 화선지에 스며들면서 생기는 필적(筆跡)이다. 

그 필적은 붓에 묻은 먹물의 질이나 양에 따라 달라지고, 종이에 붓을 대는 각도와 붓을 내리 누르는 힘과 붓이 앞으로 움직이며 나가는 속도에 따라 달라진다. 붓글씨는 그래서 쓰는 묘미(妙味)가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찌 되었든 간에 붓글씨를 쓰다보면, 세상을 꿰뚫어 볼 수 있는 지혜 도 생길 수 있으리라 ……   붓글씨를 꾸준하게 쓰면, 세상을 보는 안목(眼目)도 달라질 것이라는 뜻으로 해보는 말이다.

붓글씨 쓰는 이야기를 적다보니, 개칠(改漆)이라는 말이 생각난다. 改漆이라는 글자가 말해주듯이 개칠은 다시 고쳐 칠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개칠’한 글씨는 그것이 아무리 그럴듯하게 보이는 것이라 할지라도, 어설프게 쓴 ‘개칠’하지 않은 글씨만 못하다. 붓글씨에 관한 전문가는 개칠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알 수 있다.

붓 이야기를 적는 김에 한 가지 더 적는다.

붓(毛筆)은 원래 가는 대끝에 털을 꽂아서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데 쓰려고 만든 물건이다.

하지만 철필이나 만년필 등도 붓이라 하고, 신문이나 잡지, 방송 등, 언론을 ‘붓’이라는 말로 표현하기도 한다. 한데, 아무리 체계를 갖춘 학문적 지식이나, 능숙한 재능을 가지고 만들어내는 말이나 글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대하여 책임질 줄 모르면 아니 될 것이다.

말은 진실(眞實)해야 되고, 글은 곡필(曲筆, 어떠한 사실대로 쓰지 않고 거짓으로 쓰는 것)이 되지 않도록 해야 될 것이다.

그러므로 <붓>과 <혀>는 항상 조심해야 될 것인데, 특히 공인(公人) 이나 연장자(年長者)는 사석(私席)에서라도 말을 함부로 하지말고, 항상 조심하여 화(禍)를 당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될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명상서예(瞑想書藝)라는 말이나 태교서예(胎敎書藝)라는 말이 쓰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가 하면, 필적요법(筆跡療法, graphotheraphy)이라는 것도 있고, 서예치료(書藝治療, calligraphy treatment)라는 것도 있다.

아무튼, 이번 이야기는 시작에서부터 이리 저리 빙빙 돌다가 여기까지 왔다.    다음 이야기로 넘어간다.

서예(書藝)- 1

태평양전쟁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13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둘째 이야기    광복 70년 (光復七十年)

서예(書藝)- 1

광화문 현판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서 붓글씨 이야기가 나왔는데, 글씨 쓰는 법을 가르치는 학원을 대개 ‘서예학원’이라고도 한다. 영어를 가르치는 학원이면‘영어학원’이고, 음악을 가르치는 학원이면‘음악학원’이라고 하는데, 붓글씨를 가르치는 대부분의 학원들을 서예학원(書藝學院)이라고 한다.

붓글씨와 서예의 다른 점을 적어보려고 해본 말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붓글씨>와 <서예>는 그 개념(槪念)부터가 다른 것이다.  붓글씨와 서예라는 말의 뜻이나 글씨를 쓰는 방법, 즉 필법 (筆法)에 관한 것 등을 설명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보려고 한다.

서예(書藝)는 붓글씨를 맵시 있게 쓰는 예술(藝術)이고, 붓글씨는 붓으로 먹을 찍어 그냥 쓴 글씨다.

이쯤에서 <붓글씨>와 <서예>의 다른 점이 무엇인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붓글씨와 서예의 공통점은 그것에 쓰여지는 종이, 붓, 벼루, 먹 등이 서로 같음으로 붓글씨와 서예는 같은 것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붓글씨는 ‘붓으로 쓴 글씨’라는 것에 반(反)하여, 서예는  ‘書藝’라는 글자가 말해주듯이 ‘글씨를 붓으로 쓰는 예술’이다. 달리 설명하자면, 서예는 ‘예술성(藝術性)이 담겨있는 글씨다.’라는 것이다.

각설하고, 6.25전쟁이 휴전된 다음부터, 특히 서울지역에서 번창하게 된 것 중 하나를 꼽는다면 그것은 학원(學院)이 아닌가 싶다. 오늘날엔 여러 가지 외국어를 비롯해, 음악, 미술, 컴퓨터, 웅변, 연예, 자동차운전 등 400여 종의 학원이 있다고 한다.

하지만 6.25전쟁 직후에는 사정이 달랐다. 오늘날 학원들이 범람하고 있는 것과 같은 현상은 아니었다라는 말이다. 그러했었는데, 오늘날의 실정(實情)은 어떠한가?

예를 들어본다.   서예학원에 경우, 임시수도(首都)였던 부산에서의 피난살이를 끝내고 서울로 돌아오는 사람들이 생기고, 사람들의 생활형편이 점점 나아짐에 따라 문화생활의 질(質)을 높혀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생기게 되었는데, 그 수는 날이 지날 수록 늘어났다. 다른 말로 하자면, 외형적인 것을 사람들에게 돋보이게 하면서 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극단적(極端的)인 예를 들어본다.

‘강남부자(江南富者)’라는 말도 있고, ‘벼락부자’라고도 하는 졸부 (猝富)들도 생기게 되었는데, 그러한 사람들 중엔 집안에 무슨 전집(全集)이니, 총서(叢書)니, 대전(大全)이니, 또는 여러 가지 전문사전(事典)들로 채원진 고급 책장(冊欌)을 갖추어 놓고, 거드름을 피우는 사람들도 생기게 되었다라는 이야기다.

너무 과장(誇張)된 표현인가? 당시의 사회상(社會相)의 한 부분을 누가 비꼬아서 지어낸 말일지도 모른다. 그런 것이야 어찌 되었든 간에, 붓글씨에 관한 이야기를 계속한다.

원래 붓글씨의 주요 목적은 실용이다. 필기(筆記)가 목적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서예는 실용뿐만 아니라, 보는 사람이 감상(感賞)할 수 있고, 심미가치(審美價値)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붓글씨와 서예를 구분(區分)할 수 있는 것은 예술성이 있느냐 없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야기의 폭을 조금 넓혀보기로 한다.

6.25전쟁이 멈춘 다음, 부산이나 그 밖에 남쪽 땅 어디에선가 피난살이를 하다가 그 자리에 주저앉게 된 사람도 있었고, 환도(還都)와 함께 서울로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나도 부산에서 피난살이를 하다가 서울로 돌아갔다.

14334570신촌에서 ‘신촌인쇄소’라는 간판을 걸고 도장포를 겸한 인쇄소를 운영하며 살게 되었는데, 나는 신문에 실린 서예전시회(展示會)광고를 보면, 거의 그러한 전시회장에 가서 전시된 작품들을 둘러보았다.

한편, 1970년대 초에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서예잡지 ‘書藝’와 ‘書通’이 나왔다. ‘書藝’는 서예가인 월정 정주상(月汀 鄭周相) 선생이 발간한 것이고, ‘書通’은 서예가인 여초 김응현(如初 金膺顯) 선생이 발간한 것이다.

서통나는 1970년대 중엽에 대한민국의 서예연구단체인 동방연서회 (東方硏書會)의 김응현(金膺顯) 선생의 가르침을 받게 되었는데, 내가 모아놓은 ‘書藝’와 ‘書通’ 그리고 동방연서회에서 쓰던 교본(敎本)인 ‘東方書藝講座’와 서예전시회장에 갈 때마다 모아둔 전시작품에 관한

설명서와 그밖에 서예에 관한 책 등을 미국으로 이주할 때 가지고 왔다.

미국에서 살려면 영어도 필요하겠지만, 한국에 관한 것 몇가지 정도는 한국을 잘 모르는 미국인들에게 소개할 수 있는 자료가 있으면 좋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러했었는데, 지금까지도 그 책들을 활용(活用)하고 있다.

미국생활을 한지 10년 쯤 지난 어느날 동내 도서관에서 김영삼 대통령이 클린턴 대통령 앞에서 붓으로  ‘大道無門’을 쓰고 있는 사진이 실려 있는 책을 읽어본 적이 있었다. 책 이름은‘KOREA’다.

한데, 그 사진에 관한 기사가 신문에 실렸다. 東亞日報 [1993.7.12.]에 실린 것을 이 글에 옮겨적는다.

<金대통령은 조찬후 자개농과 문방사우등이 있는 방으로 옮겨 클린턴대통령에게 ‘大道無門’ 휘호를 써주었으며 클린턴대통령 은 매우 흥미로운 표정으로 서예장면을 세심히 관찰.  金대통령은 “이 뜻은 어려운 일이 있을때 정정당당하게 자세를 취하면 어려움을 극복할수 있다는 것”이라고 휘호의 의미를 설명해주자 클린턴대통령은 “언제나 가까운 곳에 두고 그 뜻을 생각하겠다”고 사의를 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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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적은 것과 같은 것을 본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 이 글을 엮으면서 필요한 것을 대조(對照)해보기 위해 이것저것 인터넷 검색을 해보던 중,  사진과 함께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있는 것을 보았다.   President Bill Clinton Watching South Korean President Kim Young-sam prepare a Calligraphy Scroll.   The scroll was later presented to President Clinton, at Blue House in Seoul,       South Korea. 7/11/1993.

문무쌍전(文武雙全) 박용만선생

유난히도 푸르른 날이었습니다. 오늘 오후 제 일터에서 바라본 가을하늘이랍니다. 눈부시게 푸른 하늘을 쳐다보다 떠오른 얼굴 하나있어 예전에 썻던 글하나 찾아 여기 올립니다.

10-23-15


 

문무쌍전(文武雙全) 박용만선생

1881년 강원도 철원에서 태어나 1928년 중국 북경에서 세상을 마친 우성(又醒) 박용만(朴容萬)선생. 90여년 전 이 미국 땅에서 젊은 꿈을 펼쳤던 사나이의 자취는 유, 이민사(流,移民史)에 깊고 뚜렷한 자국을 남겨 놓았다. 이 땅에서 살다 갔거나 살고 있는, 앞서나간 겨레를 생각하고 되씹는 일은 오늘을 아둥바둥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힘을 주거니와 다음세대에게 꿈을 주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선생의 삶을 정리해 본다.

박용만구한말 개화파의 일원으로 옥살이를 했던 선생은 그 곳에서 이승만을 만나 의형제를 맺는다. 옥에서 풀려난 선생은 얼마 후인 1904년 삼촌 박희병과 함께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다. 도미후 이곳 저곳으로 옮겨 다니던 선생은 1909년 네브라스카 커니에 있는 농장을 빌어 ‘한인 소년병 학교’를 세운다. 1912년 네브라스카 헤이스팅스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한 선생은 헤이스팅스 육군사관학교에 입학 참령군인이 된다.

이승만의 외교독립론, 안창호의 교육입국론에 비해 선생은 군사력으로 조국광복을 이루어야 한다는 무장투쟁론을 내세운다. 이 ‘소년병학교’에 100여명의 한인 생도들이 있었을 만큼 선생의 꿈은 야무진 것이었다.  낮에는 농장에서 일을 하거나 학교에 다니고 밤에는 조국광복의 꿈을 키우며 군사훈련에 열중하던 이 소년병학교 출신들은 후에 조국광복과 광복후 조국건설에 중요한 몫들을 담당한다. 김려식, 백일규, 정한경등의 학자들과 구연성, 김용성, 김일신등의 의사들, 기업인으로 유명한 유한양행의 유일한등이 이 학교 출신들이다.

박용만선생은 무력투쟁을 앞세웠지만 문장력이 뛰어난 문필가이기도 하였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발간하던 ‘합성신문’의 주필, 하와이 국민회의 기관지 ‘신한국보’의 편집장을 지내며 그가 써낸 글들은 당시 한인사회의 정신적 길잡이였다. 뿐만 아니라 그가 펴낸 저서 ‘군인수지(軍人須知)'(1911), ‘국민개병설'((1911), ‘아메리카 혁명'(1914)들은 시대를 앞서갔던 그의 흔적들이다.

선생은 소년병학교시절이나 후에 하와이에서의 ‘무관학교’시절 손수 편집한 한글교본을 가지고 한글교육에도 힘쓰셨던 교육자이었다. 실로 문(文)과 무(武)를 겸비(文武雙全)하셨던 분이셨다.

1912년 하와이로 건너가신 선생은 그곳의 신문편집을 담당하는 동시에 무관학교를 설립한다. 기록에 의하면 당시 이 학교의 학생수가 300명이 넘었다고 한다. 실제 무장(武裝)까지 하였던 이 학교의 위세는 선생의 꿈을 이룰만한 밑둥이었다.

그러나 선생의 불행은 의형(義兄) 이승만이 하와이로 오면서 시작되었다. 당시 이승만은 프린스톤에서 박사학위를 끝내고 잠시 한국에 갔다가 마땅히 할일을 찾지 못하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다. 미국 본토에서 마땅한 자리가 없자 하와이의 박용만선생에게 자신을 초청해 줄 것을 요청한다. 하와이 국민회의는 이승만의 파벌조장 전력을 문제 삼아 그의 하와이행에 매우 부정적 견해를 표출하였으나 박선생의 강력한 요청으로 이를 성사시키게 된다. 그러나 하와이로 온 이승만은 박선생과 협력하는 대신 이미 이 곳에서 탄탄한 자리를 잡고있던 의동생에 대한 경쟁심을 키우며 질투하기 시작한다.(kingsley K.가 쓴 책 ‘하와이의 한인과 교회’ 113쪽)

결국 정치력이 뛰어났던 이승만에게 선생은 밀려난다.  당시 상해에서 세워진 상해임시정부 초대 수반 선거에서도 신채호의 강력한 지지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에게 패하고 만다. 이후 현실의 승자 이승만에 의해 선생의 자취는 서서히 묻히고 만다.

타고나게 낙천적 성격이었던 선생은 하와이의 생활을 털고 중국으로 들어가 신채호, 신숙들과 더불어 ‘북경군사통일회’를 만들어 중국내에 흩어져 있던 전 한인 군사력을 통일하려는 노력을 해 본다. 그 당시 선생이 계획했던 <조국 무장해방 작전도>를 보면 그의 크고 절실했던 꿈을 알 수 있다. 그렇게 꿈을 키우던 1927년 10월 16일, 선생은 의문의 피살을 당하여 역사속으로 묻히고 만다.

1945년 해방이후 이승만의 집권으로 그에 대한 기록은 물론 그의 후손들까지 이런저런 핍박을 당하기까지 한 것이 우리 현대사의 한 모습이다. 김대중정권이 들어선 후 우성 박용만 선생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고 그의 발자취를 새롭게 조명하는 기운이 일어난 것은 썩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더우기 우리 마을 델라웨어에 그 분의 유일한 혈육인 장조카 박상원선생이 생존해 계셔서 우성선생의 자취를 가깝게 느낄 수 있음은 무척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2001. 3 .8.)


 

<후기>

우성의 장조카 박상원선생은 커네티컷으로 이주해 사시다가 몇해전 세상을 뜨셨습니다. 그 이가 커네티컷에서 제게 전화를 주셨던 일은 이명박대통령이 당선되던 즈음이었습니다. 당시 박상원선생이 하셨던 말씀이었답니다.

“아니, 어떻게 그렇게 쥐XX 같은 놈이…. 참 내가 큰 아버지 생각해서도 차마 눈 못 감겠는데….도대체 어찌되어 가는 것인지…”

푸른 가을 하늘을 쳐다보다가 문득 떠오른 선생을 생각해보니 이즈음 박근혜 세상 소식을 모르고 가신게 더 편한 길이 아니였을까하는….

권불십년

태평양전쟁과 광복 70년 (Pacific War and Postwar Korea) – 12

– 글쓴 이 : 김도원(金道元)

둘째 이야기    광복 70년 (光復七十年)

권불십년

<權>  – <권세 권>이라는 글자다.

위에 적은 <權>의 설명인 권세(權勢)가 무엇인가? 그것은 권력(權力)과 세력(勢力)이다. 한편, 재력(財力)이라는 말도 있고 학력(學力)이라는 것도 있는데, 재력이나 학력이 권력에게 눌림을 당한 때도 있었다.

한글전용그러한 것에 관한 이야기는 앞으로 엮게 될 ‘5.16 쿠데타’에서 다루기 로 하고, 여기서는 ‘한글전용 정책’ 또는 ‘한글전용법 시행’과 관련이 있는 것을 간략하게 적는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1970년부터 정부의 모든 공용문서를 맞춤법에 맞게 가로 쓰기 한글전용으로 하도록 규정되어 한글전용 어문정책이 확정 되었다.

그전에 이미 한국을 점령한 미군들이 펼친 그들의 군정(軍政)이 끝나고 대한민국이 독립된 직후부터도 한국정부는 국가정책의 일환 (一環)으로 한글전용 정책을 써 왔다. 하지만 그 실정(實情)은 오늘의 현실과 달랐다.

바꾸어 말하자면, <앞에 것>은 ‘한글과 한자(漢字)를 섞어서 썼다’ 라는 것이고, <나중 것>은 ‘한글만 쓰도록 했다’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오늘날엔 적지않은 한자문맹(漢字文盲)들이 있게 된 것이다.’ 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신문에서 한자가 사라지게 된 것은 박정희 정권의 막강(莫强)한 권력(權力) 밑에서 이뤄진 <한글전용 정책> 때문이 아니겠는가?

이번 이야기 제목을 <권불십년>이라고 했는데, 그것은 <권세가 정확 하게 10년을 넘지 못한다>라고 하기보다는, 아무리 강력(强力)한 권력으로 나라를 손아귀에 넣고 좌지우지(左之右之)하며 독재(獨裁)를 하는 사람이라도 그것이 그리 오래 가지못한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권력을 휘두르며 세상을 ‘떡 주무르듯’하고, ‘나는 새도 떨어 뜨린다’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권세가 당당하던 사람도 언젠가는 자신이 파놓은 함정(陷穽)에 빠지게 되거나, 자기가 만들어 놓은 덫에 걸리게 되는 수도 있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추풍낙엽(秋風落葉)과 같은 신세(身世)가 될 수도 있을 것이 라는 말이다.

사람의 욕심(慾心)이란 한(限)이 없는 것 같다.  권력에 욕심을 가지게 되면, 권력중독증(權力中毒症)에 걸리게 되고, 권력중독증에 걸리면, 제 명에 못 죽게 되는 수도 있다. 동서고금(東西古今)의 역사가 그런 것을 말해주고 있다.

예를 한가지 들어보기로 한다.

경복궁(景福宮)의 정문인 광화문은 1927년에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가 해체하여 경복궁 동문(東門)인 건춘문(建春門) 옆으로 옮겨졌는데, 6.25 전쟁 때 폭격으로 불에 탔다. 그러했던 광화문(光化門)이 1960년대 후반, 원래 있던 자리로 복원할 때, 박정희 대통령이 쓴 한글로 된 현판을 달았다.

‘<한자>로 된 것이 <한글>로 바뀐었다’라는 것인데, 어느 안전이라고 누가 감(敢)히 그에게 진언(進言)할 수 있었겠는가?’라는 말이다.

서슬이 시퍼런 권력을 쥐고 있는 대통령에게 비평(批評)을 하다니 ……      그 글씨에 대하여 왈가왈부(曰可曰否)할 수 있겠는가? 그런 말을 했다가는 날벼락이 떨어지고, 밥줄이 끊어질 수도 있게 될 것이다.    <오늘날 한자 문맹(漢字文盲)들이 있게 된 것도, 박정희 대통령이 펼친 어문정책(語文政策) 때문에 생긴 것이다.>라고 하면 지나친 말이 될까?

그의 권력은 대단한 것이었는데, 권불십년 이야기는 ‘5.16 쿠데타’ 에서 더 이어가기로 하고, 여기서는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라는 말처럼 ‘붓글씨 이야기가 나온 김에 붓글씨에 관한 것’ 몇가지를 적어보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