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여행 – 1

<그 사이>

신촌역에서 연세대앞 철다리까지 철길부근은 어릴적 놀이터였다. 산딸기, 뱀딸기, 까마중, 도토리 등 먹을거리와 강아지풀, 채송화 등의 놀이기구,  계집아이들 손톱 물들이던 봉숭아 같은 화장품까지 아이들이 하루를 보내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신촌역

철길 위에 대못을 올려놓고 침을 잘 발라놓은 뒤 기차를 기다리곤 하였다. 못은 기차가 지나간 뒤면 납짝하고 날렵한 모습으로 바뀌여 땅따먹기나 못치기 놀이 도구가 되었다. 연세대 앞 철다리는 사내아이들의 간크기를 재는 시합장이었다. 기차가 오기 직전에 누가 먼저 철다리를 건너냐는 시합에 나는 늘 그저 구경꾼이었다.

머리가 조금씩 굵어지면서 신촌역에서 수색이나 능곡역까지 몰래 기차를 훔쳐(쎄벼) 타서 오가는 것이 놀이가 되던 때도 있었다.

신촌역에서 기차표를 끊어 교외선을 타고 송추, 일영, 벽제 등지로 하루길 소풍을 오가던 때는 고등학교에 들어간 뒤의 일이다.

신촌역에서 이대쪽으로 들어선 막걸리 작부집들이 눈에 들어올 무렵엔 나는 이미 스물이 넘어있었다. 신촌역 앞에 인력시장이 서고, 그 곳에서 하루 몸팔이에 실패하고 빈속에 막걸리 기운으로 고함 한번 지르다가 막걸리 반공법에 걸려 잡혀온 사내와 함께 유치장에서 밤을 보낸 이후 신촌역과 철길은 내게서 멀어졌다.

기차를 타고 제법 먼 여행길에 나섰던 추억이 있다.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이었다. 청량리에서 동해안 북평까지 열시간 넘게 걸렸던 중앙선 기차여행이었다. 그해 초가을 심한 폐렴으로 병원신세를 지게되었는데 그때 병실에서 듣던 기차소리는 오래도록 내 기억에 남아있다. 그리고 그해 겨울, 나는 처음으로 홀로 집을 나서 경부선을 탓었다.

열 여덟을 넘기던 그해 여름부터 여름과 겨울이면 쌀과 모포 한장으로 꾸린 배낭을 메고 기차를 타곤하였다. 경부, 호남, 전라, 장항, 중앙선을 타고 산과 강과 바다를 쏘다녔다.

기차와 배를 타고 몇차례 제주행을 하고 열시간 넘게 배를 타고 울릉도를 다녀온 뒤로 나는 기차소리를 잊었다. 이미 서른이 넘어 일상에 매인 나이가 되었으므로

벌써 몇 해 전이 되었는지 – 먼 옛일들에 대한 기억들은 새록새록 떠오르건만 가까운 최근의 일들 일수록 기억력이 떨어지는 것은 나이 탓일 것이다.- 한국에서 경부선 KTX를 타 본 일이 있다. 그날 일은 내 어릴 적 기억 속에 한국도 아니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미국도 아닌 어느 외국에서의 경험으로 기억되고 있다.

아직 인터넷을 모르던 때에 뉴욕을 오가던 하루길 기차여행은 내 이민생활에 누리던 호사였다. 고작 맥주 두어 캔 즐기는 사이 도착하는 짧은 기차여행이지만 맨하턴 서점에서 만나는 한글 신간서적들을 만나고, 입에 맞는 설렁탕이나 해장국 한그릇의 호사를 즐기고 돌아오던 날이면 그냥 여기가 신촌이었던 것이다.

빠른 세상의 변화로 이런 소소한 즐거움조차 잊은지도 제법 되었다. 오가는 기차값과 한끼 식사 값이면 내 방에 앉아서도 책 대여섯 권은 족히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미 오가는 길이 번거로운 나이가 되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다행일랄까? 뉴욕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딸아이를 보러 간다는 핑계로 이따금 기차여행은 이어지고 있다.

이번 계약기간이 끝나면 서른 해가 되어가는 내 가게 뒤편으로는 미국 동북부를 잇는 Amtrek 철도가 있다. 하루에도 몇번씩 기차는 경적을 울리며 그 길을 오간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늘 막연한 꿈을 꾸었었다. “언젠간 기차를 타고 미국 대륙여행을 해 보아야지”하는 꿈이었다.

그리고 올 여름, 비록 절반이었지만 그 꿈을 이루는 첫 걸음으로 나는 기차여행 길에 올랐던 것이다.

“더 늙기 전에…” 기차 안에서 아내가 한 말이었다.

그리고 여행이 끝난 후 인사차 들린 내게 구순 어머니께서 던진 말씀이다.  “아무렴, 아직 젊을 때 다녀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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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여름 기차여행 끝에,  나는 아직 “더 늙기 전에”와 “아직 젊을 때” 그 사이에 서있었던 것이다.

<멀리 산꼭대기에 하얀 천같은 것이 덮어 있는 모습을 처음 본 이후, 우리는 그것이 “눈이다! 아니다!”로 서로의 생각을 세웠었다.>

권선생을 위하여

“공감은 진정한 이타성(altruism)을 촉진할 수 있다. 우리가 다른 계층에 속하는 사람의 관점을 취하면, 그가 가상의 인물이라도, 그 계층에게 공감을 확대할 수 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사람들이 다른 생명체들의 경험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들의 고통이 덜어지기를 진심으로 바라게 된 현상이 부분적으로나마 인도주의 혁명에 기여했다는 가설을 지지하는 증거이다.” – 스티븐 핑거의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 1002쪽에서-

내 기억력이 아직 믿을만한 것이라면 그를 두차례 만났었고, 그나마 수인사를 나눈 일은 딱 한번 뿐이다. 함께 차 한잔 나눈 적이 없으니 그가 나에 대해 거의 아는 바가 없 듯이 나 역시 그를 잘 모른다.

그가 나보다 나이가 어리며 아직 학교에 다니는 자녀들이 있고, 엔지니어(이것도 정확치 않지만)로 회사 생활을 하며 이따금 해외출장을 다니곤 한다는 것이 내가 아는 권선생의 전부이다. 내가 아는 한 그는 미국사회에서 전형적인 회사원으로 중산층에 속한 중년이다. 그저 ‘내가 아는 한’ 말이다.

그런 권선생과 나는 지난 일여년 동안 거의 매주 한차례씩 두어 시간 동안 자리를 함께하고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우리가 나눈 이야기의 주제는 단 한가지였는데 “세월호”였다. 그것은 온라인 화상 모임을 통해서였다. 그러므로 권선생과 나는 서로간에 아는 것은 거의 없지만, 단 한가지 “세월호에 얽힌 사람들”에 대한 생각에 대해서는 서로를 꿰뚫고 있다고해도 크게 엇나간 말이 아니다.

권선생은 이번 여름휴가를 가족들과 함께 한국방문으로 보냈다. 그는 가족들과 함께 한국방문을 하는 일이 매해 있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아무렴, 그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이민이든 해외파견이든 어떤 이유에서건 모국을 떠나 살면서 온가족이 함께 모국 방문을 하는 일이 결코 쉽거다나 흔치는 않은 일이다.

그리고 어제, 나는 권선생이 올 여름휴가를 보낸 한국방문 이야기를 들었다. 물론 온라인 모임을 통해 함께 하는 친구들과 함께.

그는 작심한 사람처럼 한국방문 동안의 많은 시간을 “세월호”와 함께 하였던 듯하다. 광화문과 안산을 갔었고, 그 곳 풍경들과 만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모국방문 중 내내 스친 사람들과 세월호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는 아파했다.

“광화문 광장의 분수대는 찌는 더위를 식혀주는 시민들의 놀이터였어요. 이런저런 사람들의 놀이와 쉼의 공간인 것 같았어요. 제가 뉴스에서 보듯이 세월호 유가족들이 누리고 있는 공간은 초라하기까지 하였고 사람들의 관심도 별로였어요.”

“일부러라도 지하철을 많이 탔는데요. 제가 있는 동안 세월호 노란 리본을 단 사람은 딱 한사람 보았을 뿐이예요.”

“안산에서는…. 그냥 휑한 커다란 주차장이랄까요, 달구어진 사막같이 열기만 있고 사람은 없는…. 제가 꽤 오래 그 곳에 있었는데 추모객은 고작 두 명 뿐이였어요.”

“제가 참 마음이 아팟어요. 걸린 현수막들이 참 오래 되었다는 느낌 때문이었지요. 저 오래된 현수막들을 처럼 사람들이 다 잊어버린 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래도 역시 엄마였어요. 물론 생활전선 최일선에 있는 아빠들은 벌어 먹고 사는게 우선이기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있어요. 저도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고요. 그들은 좀 지쳐 있었어요. 그런데 엄마들은 달랐어요. 그녀들은 목숨을 내놓은 것 같았다고 할까요.”

나는 권선생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가 참 착한 사내라는 생각을 했다. 아마 이즈음 내가 읽고 있는 책 때문일지도 모른다.

스티븐 핑거가 쓴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가 그것인데, 권선생은 바로 그 착한 본성을 내게 깨우쳐 주는 듯 하였기 때문이다.

스티븐 핑거는 “세상은 점점 폭력적이고 나쁜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라는 사람들의 생각은 잘못된 것이라고 단정지으며 “사람들은 폭력성과 꾸준히 싸워왔고, 점점 더 좋은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선언하면서, 그렇게 세상이 바뀌어 가는 이유 중에 첫번 째로 ‘감정이입(empathy)’을 꼽는다.

다른 사람들, 특히 처지와 환경이 전혀 다른 사람들이 서로 겪는 아픔과 고통을 공감하는 ‘감정이입(empathy)’이라는 인간의 본성이 세상을 선한 쪽으로, 좋은 쪽으로, 비폭력적인 쪽으로 이끌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내 얼굴 크기만큼이나 두꺼운 스티븐 핑커의 책속의 숱한 증거들보다 권선생에게서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를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오늘, 일하면서 권선생의 아픔을 조금 덜어낼 방법에 대해 생각해 보았던 것인데, 그것은 비단 권선생의 아픔이라는 보다는 ‘세월호’라는 말이 아직도 아픔으로 들리는 그 무수할 해외의 숱한 권선생들의 아픔을 덜어낼 방법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것은 광화문이나 안산에 있는 오래고 낡은 현수막 옆에 새 현수막을 다는 일이다.

새롭게 다시 세월호의 아픔을 되내기는 말을, 해외에사는 각자의 지금 고향의 이름으로 말이다.

우선 나부터 하나 시작하고 볼 일이다. 권선생을 위하여.

외로움에 대하여

좀체 더위가 가시지 않는다. 어제는 습도가 높지 않아 그런대로 견딜만 했는데 오늘은 그냥 찜통이다. 그래도 해뜨는 시각은 하루에 1분씩 늦어지고 있고, 해지는 시각은 1분씩 빨라진다고하니 찬바람 건듯 불어올 날이 머지 않았다.

오늘, 손님이 보잔다고하여 카운터 앞으로 나가기를 몇차례 하였다. 그들에게서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들은 이야기들이다.

“시가 너무 좋았다.”, “외로움이 우리 모두의 것이라는 걸 새롭게 느꼈다.”, “내가 외로웠던 때를 생각하며, 네가 말한 그 손님에게 위로를 보내고 싶다”…

솔직히 부담스러운 인사들이었다. 나는 그저 편지 한장을 띄웠을 뿐이고, 시 하나 소개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외로움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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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소에 오시는 손님들을 보면 서로 다른 모습들을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주로 남편 또는 아버지가 가족들의 옷을 가지고 오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반대로 아내 또는 엄마가 그 역할을 하시는 분들도 있고요. 그렇게 혼자서 오시는 분들이 있는가 하면 오실 때 마다 딸이나 아들과 함께 오시는 분들도 계십니다. 더러는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손주 손녀를 앞세우고 들어 오시는 경우도 있고요.

그리 흔치는 않지만 늘 부부가 함께 제 가게를 찾으시는 분들도 있답니다. 그 중에는 아주 젊은 부부도 있고, 은퇴하신 노부부도 있습니다. 그렇게 늘 부부가 함께 오시다가 어느날부터인가 혼자 오시는 분이 계셔 “오늘은 왜 혼자냐?”라고 물으면 “혼자가 되었다”는 대답을 들을 때가 있습니다. 그럴때면 그렇게 된 연유는 알수 없지만 참 마음이 아플 때가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 그런 분이 계셨답니다. 솔직히 저는 그 분에 대해 아는바가 전혀 없답니다. 어떤 처지인지, 어떤 환경인지, 다만 그날 ‘혼자가 되었다’는 사실만 알았을 뿐입니다. 그 손님이 옷을 맡기고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제 머리 속에 떠오른 시가 하나 있답니다. 시 전체를 외우지는 못하고 제목만 생각났던 것이지요.

그날 저녁,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그 시를 찾아 읽었답니다. 그 시는 그 손님을 위한 시라기 보다는 제 자신을 위한 시처럼 여겨졌답니다. 저는 혼자가 아니지만 말입니다.

그날의 느낌이 지워지지 않아 오늘은 그 시를 하나 소개드립니다.

당신의 세탁소에서.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          정호승

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에서 가슴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새들이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것도 외로움 때문이고<
네가 물가에 앉아 있는것도 외로움 때문이다
 
산 그림자도 외로워서 하루에 한 번씩 마을로 내려온다
종소리도 외로워서 울려퍼진다


I see customers coming to the cleaners in various ways.

In some cases, usually husbands or fathers bring the family’s clothes. In some cases, on the contrary, mainly wives or mothers play the same role. Just like that, some customers come to the cleaners alone. Some others almost always come with their daughter or son. Sometimes, grandfathers or grandmothers come with their grandchildren.

Though it’s not so common, there are the cases that couples always come to the cleaners together. Among them, some are young and some are old and retired. While one of those couples had come to the cleaners always together, from one day only one of the couple began to come. As I noticed it and asked the person why she/he came alone, sometimes the response was that “I am left alone.” Then, even though I didn’t know what had happened to them, I felt so bad.

Last week, I saw one customer who was under this situation. Frankly, I don’t know much about her, in what situation she had been. I got to know only one fact, that she is alone now. While I was seeing her leaving the cleaners after she had dropped off her clothes, one poem came to my head. I did not memorize the whole poem, but did remember its title.

In the evening, when I came back home after work, I located and read the poem. I felt that the poem was for myself, instead of the customer, even though I’m not alone.

As I cannot erase the feelings of that day, I would like to introduce the poem to you.

From your cleaners.
 

We Are Human, as We Are Lonely
– Ho-seung Chung

Don’t cry.
As we are lonely, we are human.
To live a life is to endure loneliness.

Don’t wait in vain for a call which will not come.
Walk on the snowy path if it snows, and
Walk in the rain if it rains.

A black-chest snipe in the reeds is looking at you.
Sometimes even God sheds tears of loneliness.

It is because of loneliness why birds are sitting on the tree branch, and
It is because of loneliness why you are sitting on the waterside.

Even the shadow of a mountain comes down to a village once a day because it is lonely.
The sound of a bell spreads in the air because it is lonely.
 

권리와 의무

아직 TV토론은 시작도 하지 않았지만 바야흐로 선거의 계절이 돌아오긴 한 모양입니다. 투표 장소와 투표 일정을 알리는 안내우편을 받고서 든 생각입니다. 시민으로서 누릴 권리를 행사하라는 안내입니다.

Polling Card

며칠 앞으로 다가온 Jury service 는 시민으로서의 의무입니다.

권리든 의무든 일상에 매어사는 시민들에게는 때론 거추장스러운 일로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저처럼 자영업자들에겐 그 거추장스러움이 더할 수도 있습니다.

Jury Service

이번이 세번 째인 배심원 의무는 그 통지를 받은 날부터 묵직한 스트레스가 함께 한답니다. 행여 배심원으로 선택되어 며칠 동안 시간이 뺏기는 것은 아닌지 하는 염려가 따르기 때문입니다. 다행히 지난 두 차례 배심원 소집에서는 모두 하루 시간이 동원되는 것으로 끝났는데 이번엔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투표에 이르면 조금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의무는 반드시 해야만 하는 것이고, 의무를 다하지 않을 때는 불이익 또는 벌칙을 감당해야 하지만, 권리란 나의 의지에 달린 일이므로 행사를 하지 않는다 하여도 당장 어떤 불이익을 당하거나 벌칙이 주어지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한국에서 살 때 국가공동체에게 의무를 다한 것은 병역의 의무였습니다. 만 31개월 며칠 동안의 군생활과 거의 10여년에 가까운 향토예비군 의무를 다한 것이지요.

한국에서 대통령선거를 해본 적은 단 한번도 없습니다. 제가 한국에서 살 때는 저처럼 보통 시민들은 대통령을 직접 선택할 권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무렵부터 한국을 떠날 때까지 대통령 선거는 이른바 체육관 선거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인지는 몰라도 여기와서는 의무는 의무대로 권리는 권리대로 시민으로서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일들은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종종 한국내 선거 풍토에 대한 절망감을 토로하는 글들이나 이야기들을 보거나 들을 때가 있습니다.

지나간 일(역사)들을 뒤돌어볼치면 여기나(미국) 거기나(한국) 매한가지 아닐까 합니다.

19세기가 끝나갈 무렵의 조선은 패망 직전이었습니다. 그 무렵의 미국은 동(뉴욕)에서 서(샌프랜시스코)까지를 완전 통합하고 세계 판도의 새 주역으로 떠오를 때였습니다.

그 무렵의 미국의 모습을 앙드레 모로아는 그의 미국사에 이렇게 그리고 있습니다.

“실리주의적인 모사꾼들이 정치에서 주로 한 가지 문제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그것은 어떻게하면  헌법, 의회, 주정부 그리고 시청을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용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였다. 유혹은 크고 허술했기에 사업가가 자신을 도울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정치인에게 이익의 일부를 제공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었다.  – 중략 – 각 주의원들의 소행도 별로 나을 게 없었다. 연방의회마저 대사업가의 이익을 대표해 선출된 의원으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시대에 미합중국의 첫째가는 위험 요소는 파렴치였다.”

오늘이라고 뭐 크게 달라진 게 있겠습니까만, 앙드레 모로아는 당시 상황에 대해 이런 사족을 달았답니다.

“아메리카의 민주주의는 실패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다만 아메리카의 민주주의가 너무 빨리 성장하는 바람에 법률과 도덕이 뒤따르지 못했을 뿐이다.”

사람 – 곧 시민들의 깨우침을 요구한 것입니다.

19세기나 21세기나, 미국이나 한국이나, 언제 어디에서건 여전히 유효한 권리와 의무에 대한 시민들의 깨우침입니다.

필라 세사모 소식지 – 4

연일 100도 가까이에 이르는 찜통더위가 이어진다.

이 무더운 날, 세월호를  기억하자며 필라델피아 인근 마켓에서 전단지를 돌리거나, 워싱톤 백악관 앞에 서 있거나 하는 벗들이 있다. 누군가는 모처럼 한국 나들이한 시간들을 광화문과 안산에서 보내고 왔다.

그들이 네번째 만든 ‘필라 세사모 소식지’이다.

[gview file=”http://www.for1950s.com/wp-content/uploads/2016/08/philasewol-vol.4.pdf”]

생업(生業)

길 건너에서 같은 업(業)을 하고 있는 6.25선생께서 손을 턴단다. 그가 힘들어 한다는 이야기는 이따금 들었지만, 막상 이렇게 가게 문을 닫아야 할 만큼 곤궁한 처지인지는 몰랐다.

그를 처음 본 지도 어느새 스무해 전 일이 되었다. 어느 한인들 모임에서였다. 한 사내가 남도 특유의 사투리로 열을 올리고 있었는데 그의 주변에는 내 또래 사내들이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사내는 6.25 전쟁 때 자신과 가족들이 얼마나 고생을 했었는지 열변을 토하고 있었는데, 바로 어제 일어났던 일을 설명하듯 하던 것이었다. 이런 첫 만남 때문에 한동안 나는 그를 적어도 1945년생 전후의 나이로 여기고 깍듯히 대하곤 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시간이 지난 후, 그의 나이를 알게 되었을 때부터 나는 그를 6.25선생이라고 불렀다. 그가 나보다 18개월 먼저 세상에 나왔다는 사실을 안 이후에 나는 그의 얼굴만 보면 6.25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피난지 부산에서 태어난 나는 부산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거니와, 아무리 용을 쓰고 어릴 적 기억을 되뇌어 본다한들 고작 1950년대 후반에 일어났던 일들 혹은 그 시절 풍경에 대한 것이 고작일 뿐이건만,  6.25 때 일들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는 그는 가히 내가 쫓아갈 수 없는 비범함이 있었을 터이다.

아무튼 말이 좀 많은 편이기는 하나 그는  썩 괜찮은 사내이다. 인물이 착하기도 하거니와 동네 한인들 대소사에 손이 필요할 때면 앞뒤 가리지않고 흔쾌히 나서서 평판도 나쁘지는 않다. 그저 한 마을에 살고있는 한인 가운데 한사람 사이 정도이던 그와 내가 얼굴을 자주 부딪히게 된 것은 한 십 수여년 전 쯤부터이다. 그가 내 가게 길건너에 있는 세탁소를 인수해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그 무렵 나는 그 이전 십 수년 해오던 세탁업에 지쳐 딴데 한눈을 팔고 있었거니와, 당시만 하여도 아직 세탁소 형편이 썩 나쁘지만은 않은 때여서 그에 대해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아니하였다.

내가 세탁업을 시작했던 때만 하여도 ‘세탁소 간판만 붙이면 밥은 넉넉히 먹고 살 수 있다’는 말이 떠돌 때이고, 적어도 2,000년도 전후만 하여도  그 말은 타당하지 않았는가 싶다. 처음 내가 세탁소를 시작할 때 가까운 주변 몇 마일 안에 세탁소 숫자라야 한 손으로 꼽을 정도이었지만, 2,000년도 초반에는 이미 두손 열손가락으로는 모자라고 두발 열발가락을 다 동원해야 할만치 늘어나 있었다. 6.25선생께서 세탁업에 발을 들여놓던 때는 바로 그 무렵이었다.

6.25선생이 인수한 가게주인으로 그가 네번 째이다. 그 이전에 주인이었던 세사람 모두 내가 한자리에서 겪은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지난 십여년 동안 세탁업은 세상이 변한 만큼보다 더 큰 변화를 겪었다.

최근 몇 년 사이, 두 손 두 발 모든 가락수를 꼽아야 할만큼 많던 내 주변 세탁소들 숫자가 손만 동원해도 충분히 세고도 손가락이 남을 만큼 변했다.

변하는 세상풍경이 끝내 6.25선생을 비껴가지 않은 모양이다.

늘어가는 내 나이 숫자보다 줄어드는 세탁소 숫자가 자꾸 밟히는 까닭은 나 역시 변하는 풍경 한가운데 서있기 때문일게다.

쉬는 날, 내 업(業)을 생각하며.

Michelle Obama

거창하게 미대륙횡단이라고 말하기에는 쑥스러운 일이고, 주마간산(走馬看山)으로 서쪽에 있는 태평양까지 보고 돌아왔습니다.

미국은 여전히 대단한 나라입니다. 넓고 크고 높은, 곳곳마다 이 땅의 주인이었던 인디언들의 이야기와 새롭게 개척자로 나선 이들의 이야기들 그리고 오늘 이 땅을 살아가는 이들의 이야기들이 담겨 있는 정말 큰 나라입니다.

그렇게 여행을 통해 본 이 나라의 위용보다 더 큰 모습을 오늘 밀린 뉴스들을 보다가 만났습니다.

지난 주 제가 사는 곳에 이웃한 필라델피아  Wells Fargo Center에서 열였던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the First Lady인  Michelle Obama가 한 연설이었습니다,

그녀는 민주당 상대 후보인 Donald Trump 의 이름은 단 한번도 거론하지 않고도 그녀가 할 말을 충분히 대중들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물론 영부인 전담 연설 비서관이 써주었겠지만, 한마디 한마디를 그렇게 자신의 것으로 표현할 수 있음은 바탕에 진실이 없고서는 하기 힘든 일일겝니다.

Michelle Obama가 선언한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나라”는 바로 그녀와 그녀에게 갈채를 보낼 수 있는(민주, 공화, 녹색… 누구라도) 시민들이 있기에 지금 여기에서 유효한 것이 아닐까합니다.

미국 – 아직은 내 자식들이 살아 볼만한 나라입니다.

MRS. OBAMA:  Thank you all.  (Applause.)  Thank you so much.  You know, it’s hard to believe that it has been eight years since I first came to this convention to talk with you about why I thought my husband should be President.  (Applause.)  Remember how I told you about his character and conviction, his decency and his grace -– the traits that we’ve seen every day that he’s served our country in the White House.

I also told you about our daughters –- how they are the heart of our hearts, the center of our world.  And during our time in the White House, we’ve had the joy of watching them grow from bubbly little girls into poised young women -– a journey that started soon after we arrived in Washington, when they set off for their first day at their new school.

I will never forget that winter morning as I watched our girls, just seven and ten years old, pile into those black SUVs with all those big men with guns.  (Laughter.)  And I saw their little faces pressed up against the window, and the only thing I could think was, “What have we done?”  (Laughter.)  See, because at that moment, I realized that our time in the White House would form the foundation for who they would become, and how well we managed this experience could truly make or break them.

That is what Barack and I think about every day as we try to guide and protect our girls through the challenges of this unusual life in the spotlight — how we urge them to ignore those who question their father’s citizenship or faith.  (Applause.)  How we insist that the hateful language they hear from public figures on TV does not represent the true spirit of this country.  (Applause.)  How we explain that when someone is cruel, or acts like a bully, you don’t stoop to their level -– no, our motto is, when they go low, we go high.  (Applause.)

With every word we utter, with every action we take, we know our kids are watching us.  We as parents are their most important role models.  And let me tell you, Barack and I take that same approach to our jobs as President and First Lady, because we know that our words and actions matter not just to our girls, but to children across this country –- kids who tell us, “I saw you on TV, I wrote a report on you for school.”  Kids like the little black boy who looked up at my husband, his eyes wide with hope, and he wondered, “Is my hair like yours?”  (Applause.)

And make no mistake about it, this November, when we go to the polls, that is what we’re deciding -– not Democrat or Republican, not left or right.  No, this election, and every election, is about who will have the power to shape our children for the next four or eight years of their lives.  (Applause.)  And I am here tonight because in this election, there is only one person who I trust with that responsibility, only one person who I believe is truly qualified to be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and that is our friend, Hillary Clinton.  (Applause.)

See, I trust Hillary to lead this country because I’ve seen her lifelong devotion to our nation’s children –- not just her own daughter, who she has raised to perfection –- (applause) — but every child who needs a champion:  Kids who take the long way to school to avoid the gangs.  Kids who wonder how they’ll ever afford college.  Kids whose parents don’t speak a word of English but dream of a better life.  Kids who look to us to determine who and what they can be.

You see, Hillary has spent decades doing the relentless, thankless work to actually make a difference in their lives — (applause) — advocating for kids with disabilities as a young lawyer.  Fighting for children’s health care as First Lady and for quality child care in the Senate.  And when she didn’t win the nomination eight years ago, she didn’t get angry or disillusioned.  (Applause.)  Hillary did not pack up and go home.  Because as a true public servant, Hillary knows that this is so much bigger than her own desires and disappointments.  (Applause.)  So she proudly stepped up to serve our country once again as Secretary of State, traveling the globe to keep our kids safe.

And look, there were plenty of moments when Hillary could have decided that this work was too hard, that the price of public service was too high, that she was tired of being picked apart for how she looks or how she talks or even how she laughs.  But here’s the thing — what I admire most about Hillary is that she never buckles under pressure.  (Applause.)  She never takes the easy way out.  And Hillary Clinton has never quit on anything in her life.  (Applause.)

And when I think about the kind of President that I want for my girls and all our children, that’s what I want.  I want someone with the proven strength to persevere.  Someone who knows this job and takes it seriously.  Someone who understands that the issues a President faces are not black and white and cannot be boiled down to 140 characters.  (Applause.)  Because when you have the nuclear codes at your fingertips and the military in your command, you can’t make snap decisions.  You can’t have a thin skin or a tendency to lash out. You need to be steady, and measured, and well-informed.  (Applause.)

I want a President with a record of public service, someone whose life’s work shows our children that we don’t chase fame and fortune for ourselves, we fight to give everyone a chance to succeed — (applause) — and we give back, even when we’re struggling ourselves, because we know that there is always someone worse off, and there but for the grace of God go I.  (Applause.)

I want a President who will teach our children that everyone in this country matters –- a President who truly believes in the vision that our founders put forth all those years ago:  That we are all created equal, each a beloved part of the great American story.  (Applause.)  And when crisis hits, we don’t turn against each other -– no, we listen to each other.  We lean on each other.  Because we are always stronger together.  (Applause.)

And I am here tonight because I know that that is the kind of president that Hillary Clinton will be.  And that’s why, in this election, I’m with her.  (Applause.)

You see, Hillary understands that the President is about one thing and one thing only -– it’s about leaving something better for our kids.  That’s how we’ve always moved this country forward –- by all of us coming together on behalf of our children — folks who volunteer to coach that team, to teach that Sunday school class because they know it takes a village.  Heroes of every color and creed who wear the uniform and risk their lives to keep passing down those blessings of liberty.

Police officers and protestors in Dallas who all desperately want to keep our children safe.  (Applause.)  People who lined up in Orlando to donate blood because it could have been their son, their daughter in that club.  (Applause.)  Leaders like Tim Kaine — (applause) — who show our kids what decency and devotion look like.  Leaders like Hillary Clinton, who has the guts and the grace to keep coming back and putting those cracks in that highest and hardest glass ceiling until she finally breaks through, lifting all of us along with her.  (Applause.)

That is the story of this country, the story that has brought me to this stage tonight, the story of generations of people who felt the lash of bondage, the shame of servitude, the sting of segregation, but who kept on striving and hoping and doing what needed to be done so that today, I wake up every morning in a house that was built by slaves — (applause) — and I watch my daughters –- two beautiful, intelligent, black young women –- playing with their dogs on the White House lawn.  (Applause.)  And because of Hillary Clinton, my daughters –- and all our sons and daughters -– now take for granted that a woman can be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Applause.)

So don’t let anyone ever tell you that this country isn’t great, that somehow we need to make it great again.  Because this, right now, is the greatest country on earth.  (Applause.)  And as my daughters prepare to set out into the world, I want a leader who is worthy of that truth, a leader who is worthy of my girls’ promise and all our kids’ promise, a leader who will be guided every day by the love and hope and impossibly big dreams that we all have for our children.

So in this election, we cannot sit back and hope that everything works out for the best.  We cannot afford to be tired, or frustrated, or cynical.  No, hear me — between now and November, we need to do what we did eight years ago and four years ago:  We need to knock on every door.  We need to get out every vote.  We need to pour every last ounce of our passion and our strength and our love for this country into electing Hillary Clinton as President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Let’s get to work.  Thank you all, and God bless.

어느 주일 일기(日記)

오늘 아침에 루이지애나(Louisiana)에서 세명의 경찰관이 피살되었다는 보도이다. 잇단 미국내 총기 사건 소식들 뿐만 아니라 며칠전 프랑스의 대혁명 기념일에 일어났던 프랑스 니스테러 사건을 비롯한 지구촌 사건 사고들은 끊이지를 않는다.

보고 듣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보이고 들리는 한국내 뉴스들에 이르면 이즈음 찜통 열기에 이는 짜증이 더해진다. 개 돼지에서부터 종놈, 상놈에 이르게까지, 2016년 이 문명의 세월을 조선시대가 아닌 고대로 되돌려 살아가려가는 무뢰배들을 향해 치미는 화 때문이다.

오늘은 모처럼 필라델피아 나들이에 나서 다민족, 다문화 일치를 내세우는 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후 한국마켓 장을 보고 돌와왔다.

다민족, 다문화를 내세운 교회에서도 한인교회 또는 전통적인 미국인들 교회들의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는 모습에 크게 실망하였다. 제임스 파울러(James Fowler)라는 이는 사람들의 신앙 깊이를 여섯 단계로 나누어 신앙발달 단계를 설명한바 있지만 교회 공동체의 신앙고백 수준도 그곳에 맞출 수 있을 듯하다.

파울러가 말한 겨우 두번 째 단계인 신화적이고 문자적인 단계(mythic-literal faith)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교회들의 모습에 이젠 조금 지치기도 한다.

한국마켓 장을 보러 갔다가 찜통 더위 속에서 세월호 소식지를 배포하고 있는 반가운 얼굴들을 만났다. 반가움도 잠시 이내 답답함으로 변했다. 무지하고 뻔뻔하게 자기밖에 모르는 내 나이 또래 사내의 목청 높은 소리 때문이었다.

그 자리를 급히 떠난 까닭은 내게 일행이 있었다기 보다는 “이 나이에 내가 뭘…”하는 주눅이 앞섰기 때문이리라.

그렇게 돌아와 습관으로 성서에게 묻는다. 공의를 행하며 구원을 베푸는 신을 향해.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의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The Better Angels of Our Nature)>를 주문하다.

어제, 오늘, 내일…

아내를 도와 델라웨어 한국학교 30주년 기록들을 모으고 있다. 이 곳 델라웨어에서 살아온지 꼭 서른해인지라 그저 내 지나온 기록을 더듬듯 시간을 보내고 있다.

내가 이 기록들을 들추고 있는 까닭은 지난 서른 해를 돌아봄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언제지 모를 내일을 내다보기 위함이다.

그러다 오늘 어느 분께서 참조하라며 보내주신 동영상을 보며, 멍하니 오랜 시간을 그저 앉아있었다.

월드투게더 에티오피아 어린이합창단이 부르는 노래 동영상이었는데, 나에겐 30년이 아니라 70년이 어른거렸던 까닭이다.

아니, 오늘과 내일이 어른거리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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