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여행 – 16

샌프란시스코와 동양인들

반이민정책을 내세워 톡톡히 재미를 보고 있는 도널트 프럼프가 세번 결혼했으며, 영화배우였던 두번째 부인 Marla Maples 를 빼고, 나머지 두 부인들이 이민 1세라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첫번째 부인인 Ivana Marie는 스키선수 출신으로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온 이민자였고, 현재 부인이자 세번째인 Melania는 모델 출신으로 슬로베니아에서 온 이민자이다. 이즈음 Melania가 불법취업이민으로 미국에 정착했다는 뉴스가 터져나와 트럼프를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트럼프측은  부인 Melania가 정상적이고 합법적인 방법과 절차에 따라 이민을 왔다는 증거들을 찾아 내놓고 있으나, 그 증거들에 의문을 보내는 비판자들의 의견들이 지속적으로 뉴스를 타고있다.

미국에서 이민자들에 대한 문제가 불거진 일이 비단 오늘에만 있는 일도 아니고, 트럼프만이 반이민정책을 내세웠던 것만이 아니다. 다만 트럼프 경우는 이민정책 뿐만 아니라 다른 구호성 정책이나 그의 삶의 방식 등에 일관성이 많이 결여된 것 같은 내 나름의 의견이 있을 뿐이다.

약 한세기 이전에도 이민자들은 미국이 안고 있던 문제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유럽과 아시아에서는 수많은 이민자들이 신천지 미국으로 들어왔다. 대서양을 건너서 오는 유럽계 이민자들은 동부 뉴욕에 있는 Ellis Island에서 입국심사를 받고 미국 땅을 밟았다.

반면에 태평양을 건너서 오는 중국인들, 일본인들과 시베리아쪽에서 오는 러시아인들은 서쪽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Angel Island에서 입국심사를 받고 미국에 들어왔다. Angel Island 곧 천사의 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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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 지역적으로 동쪽과 서쪽이라는 차이 뿐인 것 같지만 그 입국절차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엘리스 아일랜드로 들어온 유럽계 이민자들은 비교적 빠르게 입국수속을 마치고 신천지 땅을 밟을 수 있었으나, 천사의 섬으로 들어온 아시안계 이민자들 특히 중국인들은 입국수속이라기 보다 감금이라고 표현해야 적합할 만한 수용소 생활을 거쳐야만 하였다. 그들은 짧게는 한달에서 길게는 거의 이년여에 이르기 까지 수용소 생활을 했다고 한다.

아시안계 인종차별은 그렇게 시작되었고 그 첫번 째 대상자들은 바로 중국인들이었다.  당시 중국 본토까지 알려졌던 서부의 골드러시 소식에 황금빛 꿈을 그리며 미국행을 결심한 중국인들이나 서부개척에 노동력이 절실했던 미국 입장에서 중국인들의 미국이민은 서로에게 좋은 일이었다. 그러나 입국절차에서 황인들은 백인들과는 다른 대접을 받은 것이다.

그렇게 미국 땅을 밟은 중국인들은 대륙횡단철도 건설노동현장의 주역이 되었다. 철도건설 이후인  1880년 무렵에 이르러 미국은 불경기를 맞는다. 이때 미국인들 사이에는  중국인들이 일자리를 빼앗아 갔기 때문에 경기가 나빠졌다는 비난 여론이 들끓었고 결국 1882년 의회는 중국인들의 이민을 금지하는 법(Chinese Exclusion Act)을 통과 시킨다. 2016년 트럼프와 그를 지지하는 백인들의 모습이 겹쳐지는 지점이다.

또 다른 아시안계 이민자들이 있다. 일본인들이다. 일본계들은 중국계와는 다르게 미국사회에 많이 동화되었고 뿌리도 깊다. 그러나 그들 역시 수년 동안 캘리포니아 등지의 사막지대 수용소에서 감금되어 살았던 아픈 역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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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2년 2월 19일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행정명령 9066호에 서명한다. 이 명령은 적성국민들을 강제적으로 거주지에서 내쫓아 수용소에 강제 수용시키는 법적 근거가 되었다. 이 명령에 따라 약 12만명에 달하는 일본계 미국인들이 단지 일본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재산을 몰수 당한 채 캘리포니아, 아리조나, 와이오밍, 콜로라도, 아이다호, 유타, 아칸소 등 사막지대나 외진 곳에 건설된 수용소로 강제 이주되었다.

얼핏 미국과 전쟁중인 적국의 국민들을 국가 안전상 강제 수용한 것처럼 정당화할 수 있는 부분이 있는 것 처럼 보이지만, 대다수 당시 일본계 이민자들은 이민 2,3,4세대들로써 이민자라기 보다는 미국에 동화된 미국인들이었다는 점에서 이 명령은 당시 미국 헌법 및 국제법에 반하는 명백히 불법적이고 반인권적인 행위였다. 훗날 미국정부는 공식적으로 이 명령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고 사과한다.

이 당시 일본계 미국인들은 아버지 또는 할아버지가 일본인이라는 이유만으로 미국에서 낳고 자란 미국인임에도 불구하고 3, 4년 동안 강제 수용을 당하고, 정당하게 모은 재산을 모두 빼앗기고 되찾지 못하는 역사적 경험을 하였다. 이 땅에서 살아갈 내 아이들을 생각하며 한반도 뉴스에 귀기울이곤하는 내 모습이 겹쳐지는 부분이다.

샌프란시스코 일본인촌과 중국인촌은 그렇게 미국땅에 뿌리 내리게된 일본계와 중국계 미국인들의 역사였다.

우리는 일본인촌 식당가에서 일본과 중국 그리고 한국 젊은이들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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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촌 금문제과점(Golden Gate Bakery) 앞에 길게 늘어선 대열에서 반시간 가까이 인내심을 발휘했던 하나아빠의 노고로 우리는 중국 호떡과 빵을 누리는 기쁨을 맛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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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에 가면 언덕길을 오르내리는 케이블 카를 타보아야 한다고해서 그 맛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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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두가에서 해물찜을 놓고 한잔하는 맛도 일품이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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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악사에게 음악 감상료를 놓는 우리 일행의 모습이 비록 암표장사 같을지라도 그 밤 부두가 거리악사는 색스폰으로 우리를 매료시키며 여행의 맛을 진하게 하였다.

기차여행 – 15

길 – 두 개의 다른 시선

“이 세상에는 두 개의 시각이 있다. 세상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두 개의 시각. 성장으로 보는가, 아니면 쇠퇴로 보는가! 시인의 눈으로 보면, 신의 눈으로 보듯이 삼라만상은 활기차고 아름다워 보이리라. 그러나 역사의 눈으로 본다면, 혹은 과거의 눈으로 본다면 모든 것은 활기없고 공격적으로만 보여지리라. 만약 자연을 중단이라고 생각한다면 모든 것은 즉시 죽고 부패 하겠지만, 진보라고 생각한다면 자연은 더없이 아름다워지리라.”

초기 미국의 정신이었던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남긴 말이다.

그는 노예제도와 멕시코 전쟁에 항거하며 동부 메사추세스 콩코드 강변 월든 숲속에서 오두막 집을 짓고 살았다 . 그가 숲속에 작은 길들을 만들며 사색했던 그 무렵 서부에서는 새로운 세상이 열리고 있었다.

멕시코와의 전쟁에 승리한 후 텍사스와 캘리포니아를 차지한 지 얼마 안되어 신생국가 미국인들에게 꿈 같은 이야기들이 급속히 번지기 시작하였다. 일확천금의 꿈 이른바 골드러시(Gold rush)의 복음이 퍼진 것이다. 그 때의 상황을 앙드레 모로아는 그의 미국사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 이 소식이 동부로 전해지면서 소위 골드러시가 시작되었다. 1849년 한 해에만 캘리포니아 인구는 6,000명에서 8만 5천명으로 늘어났다. 그전까지 한 어촌에 지나지 않던 샌프란시스코는 몇면간 인구 5만이 넘믐 도시가 되었고 얼마 후에는 20만의 대도시로 발전했다.하지만 교통은 여전히 불편했다. 어떤 사람은 해로로 남미의 케이프혼을 돌아서 들어왔고, 또 어떤 사람은 파나마 지협을 넘는 육로와 해로를 거쳐 모여들었다. 그리고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오리건과 유타를 거치는 산길을 통해 찾아왔다. 도중에 수천 명이 피로와 기아, 험난한 산맥, 인디언에게 희생되었지만 무덤으로 뒤덮힌 길을 지나 끝내 목적에 도달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동부 콩코드에서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산책으로 숲속 길을 만들던 그 무렵 누군가는 황금을 얻으려  캘리포니아로 가는 육로를 만들고 있었다. 정신과 물질, 어느 것이 우선일까? 과연 선택해야만 하는 명제일까?

우리는 시에라네바다산맥을 넘어 샌프란시시코로 가는 그 길을 기차 대신 버스를 이용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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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 하운드 버스.

내가 고등학교 때 일이었다. 그 무렵 막 경부고속도로가 놓였고, 서울역 맞은 편에서 그레이하운드 버스를 타고 부산을 가보는 일은 그야말로 꿈이었다.

2016년 미국에서 그레이하운드를 타는 일이란 꿈이 아니라, 마지못해 선택하는 일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만큼 교통수단으로는 환영 받지 못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여행이란 경험을 즐기는 일일 수도 있거니와, 네바다 Reno에서 캘리포니아San Francisco 까지220마일(약 354km)을 일인당 단돈8달러에 탈 수 있었던 그레이하운드를 마다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잠시 착각을 하고 호텔에서 그레이하운드 정류장까지 채 반마일도 안되는 길을 택시를 이용해  15달러를 지불하고서야 버스를 탄 이야기 역시 경험을 즐겼다고 말하기는 아프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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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라네바다를 넘어선 후  캘리포니아  풍경은 이중적이었다. 이제껏 본적 없는 넓고 풍요로운 과수 농장과 함께 화재로 민둥산이 된 곳에 위치한 주택가들, 태평양 물을 받아 안은 멋진 해안을 배경으로 한 도시 풍경과 함께 시야에 들어 온 거리 노숙자들의 숙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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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길은 이중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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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향기> – 삶에 있어서 머무름, 기다림, 느긋함 등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철학자 한병철의 생각이 담긴 책이름이다.

‘사색적인 삶이 풍요롭다.’라는 명제는 멋있다. 그러나  ‘사색적인 삶’이 시간에 늘 쫓겨 살수 밖에 없는 평범한 속물인 내겐 애초 가당치 않는 전제이므로 ‘풍요’ 역시 내가 누릴 몫은 아니다. 그러므로 내게 있어  ‘사색적인 삶’이란 진짜 가당치 않은 지적 사치일 뿐이다.

딸아이가 모처럼 주말을 함께 보내고 다시 일터로 돌아가는 일요일 오후, 기다리는 버스가 한시간 반여 늦게 도착하였다. 계획에 없이 딸아이와 함께 했던 한 시간 반 동안의 시간은 내게 자유를 일깨워 주었다. 아이의 직장생활과 향후 계획, 남자친구와의 이야기들을 묻고 들으며 버스가 늦어지는 시간에 감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딸아이와 아내는 때론 아주 같기도 하고 전혀 다르기도 하다. 둘 사이에 도대체 닮은 게 무엇이 있을가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거니와 너무 똑같아 깜짝 놀랄 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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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롭다는 것은 단순히 구속되어 있지 않거나 의무에 묶여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자유를 주는 것은 해방이나 이탈이 아니라 편입과 소속이다. 그 무엇에도 연결되어 있지 않은 상태는 공포와 불안을 불러일으킨다. 자유롭다- frei, 평화- Friede, 친구- Freund와 같은 표현의 인도게르만어 어원인 ‘fri’는 ‘사랑하다’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자유롭다는 것은 본래 ‘친구나 연인에게 속해 있는’이라는 뜻이다. 인간은 바로 사랑과 우정의 관계 속에서 자유를 느끼는 것이다. 묶여 있지 않음으로 해서가 아니라 묶여 있음으로 해서 자유로워진다. 자유는 가장 전형적인 관계적 어휘다. >

한병철이 <시간의 향기>에서 하는 말이다.

내가 딸아이가 타고 갈 버스가 늦게 도착한 것을 감사하며 자유를 생각한 까닭이다.

기차여행 – 14

요세미티 숲길을 걸어…

요세미티는 엄청난 위용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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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택한 진입로인 Tioga Pass 도로는 11월에서 이듬해 5월까지는 길이 폐쇄된다고 한다. 눈 때문이란다. 엄청난 위용으로 앞을 가로 막고 서 있는 Tioga Peak의 높이는 고도 11,526ft(3513m)이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오르는 차창 밖 풍경을 보면서, 운전대 옆으로는 시선이 가지 않았다. 오금 저리는 절벽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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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발 9945ft(3031m)지점에 이르러서야 공원 입장권을 구입하는 입구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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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rcupine Flat 지점에 이르러 우리는 숲길을 걷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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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언덕길 아니면 고작 펜실베니아 Pocono 산(2,133 ft ,650 m) 정도, 그것도 길어야  1마일 정도 걸어본 경험이 전무인 우리들에게 조금은 과감한 도전이었다. 기억컨데 설악산을 마지막으로 오른 이후 산행은 처음이니, 약 35년 만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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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왕복 8.8마일(약 14km) 거리를 걷기로 하고 떠났다. 그러나 이내 깨달았다. 얼마나 무모한 일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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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평균고도 8000ft(2440m)라는 고지 때문이어서가 아니라,  우리들의 나이와 평소 소홀했던 운동 탓이었다.

우리는 왕복 4.4마일(약 7km) 거리인 Indian Rock을 오가는 것으로 급히 계획을 수정하였다. 그 수정은 아주 적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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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길을 걸으며 나는 그즈음 가슴 깊은 곳을 짓눌러 딱히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아픔을 주던 내 쓰잘데 없는 걱정거리들을 버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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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쏟아진 폭우와 천둥번개는 하산길 도로 곳곳에 낙석을 깔아 놓았다.

비가 개인 후, 요세미티를 등진 하늘 끝에는 무지개가 파스텔화를 그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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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여행 – 13

요세미티 가는 길

네바다 Reno 시에서 요세미티 공원 입구인 캘리포니아 Mono Lake 까지의 거리는 약 140마일(225km), 예상소요시간 약 3시간 정도였다. 단 이것은 교과서 정보였을 뿐, 충청도 사나이 하나아빠에게는 딱 두시간이면 족한 거리였다.

눈 앞에 풍경만으로는 엄청 높은 산지를 달리고 있는 듯도 하였고, 그저 대평원을 달리는 느낌도 들었고, 때론 사막을 달리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저 경이로움의 연속이었다.dsc02244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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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바다 – 캘리포니아 경계선에는 검문소가 있었다. 매우 낯선 풍경이자 처음 겪어보는 일이었다. 메인주에서 플로리다까지 동부 여러 개 지역을 다녀 보았으나 주 경계를 넘으며 검문소를 본 것은 처음이었다. 캐나다 국경을 넘으며 만났던 검문소 만큼 철저하지는 않았고 그저 형식상 이루어진 검문이었지만 낯설기는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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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켜 생각해보면 좁은 땅에 검문소가 어찌 그리 많았던지. 아주 먼 옛일이 되었지만, 검문소를 피해 멀리 우회해서 도망치듯 경계를 넘었던 일이 더러 있었다. 청춘이었던 시절에. 검문소를 보며 내 스물 무렵이 떠오른 일도 조금은 생소한 체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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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차가 검문소에 정차하자 “어디에서 오는 길이냐”고 경비원이 물었다. 하나 아빠가 충청인답게 잠시 뜸을 드리는 사이 서울내기인 내가 잽싸게 대꾸했다. “Reno!”  검문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10대 나이에 이민을 온 하나아빠가 웃으며 말했다. “거 참 뭐라할지 잠시 망설였네. 리노, 아니면 델라웨어, 아니면 한국…” 그랬다. 아직도 우린 한국에 닿은 사람들이었다.

캘리포니아 하면 산불이라더니 군데 군데 까맣게 타버린 풍경들이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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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세미티 공원에 들어서기 전에 있는 모노호수(Lake Mono)에 이르러서야 운전대를 잡은 하나아빠도 잠시 쉴 수 있었다. 이곳은 호수 밑에서 자란 tufa라는 암석이 유명하단다. 안내소에는 영상물 상영관과 전시관이 잘 꾸며져 있었다.

Mono lake rock formations Tufa Towers Mono's Magnificent Monuments, Mono County, California
Mono lake rock formations Tufa Towers Mono’s Magnificent Monuments, Mono County, California

전시관내 설명 가운데 눈에 뜨인 것은, 이곳에 터잡고 살던 인디언들의 거주시설과 후에 이 땅을 차지한 개척자들의 주거형태 모형에 대한 안내였다. 인디안들의 초라하고 허술한 주거형태가 개척자들에 의해 현대화(?) 되었다는 설명이었는데, 뭐 인정한다 하더라도 인디언들의 거주공간에 담겨 있던 이야기들이 사라진 연유가 함께 했었다면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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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명사진 몇 장 찍고 이제 요세미티를 오른다. 이 때만 해도 우리는 모노호수(Lake Mono)가 해발 6,383 ft (1,946 m) 고지에 위치에 있다는 사실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아직도 성실하고 깨끗하기를…

며칠 전 모처럼 만난 지인과 함께 점심식사를 하는 자리였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최근 한국에서 새로 임명된 장관 한사람에 대한 이야기가 화제로 올랐다. 새로 임명된 그 장관과 지인은 동향이었으며, 장관이 한때 미국에서 지낼 때 가까이 지냈다고 한다. 지인이 내게 했던 말이다.

“나는 그 친구를 아주 성실하고 깨끗한 사람이라고 기억하고 있어요. 공직자으로써 자기 일에 매우 충실한 사람이기도 했고요. 내가 뭐 한국 떠나온지 40여년인데 그쪽 뉴스 어디 그렇게 잘 보나요? 낯익은 이름이 뉴스에 나오길래 좀 눈여겨 보았지요. 처음엔 참 잘됬다 싶었어요. 그만한 사람이면 장관 한번 할만하지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허 근데…. 그거 아니더구먼요. 내가 사람을 잘못 봤었나하는 생각도 들고요, 아니면 사람이 많이 바뀐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였고요. 아무튼 그 친구에 대한 뉴스들을 주욱 보면서 한국사회 이른바 엘리트계층이 참 많이 상했구나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언제부터인가 나는 내가 사는 동네 한인들을 만나 한국에 대한 이야기, 특히 한국 정치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경우는 거의 없다. 화제가 그쪽으로 달려가면 나는 슬그머니 자리를 뜬다. 경험상 시간과 에너지 낭비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특히 영남이나 호남 출신들이 주를 이루는 모임에서 한국정치 이야기가 나오면 거의 그날 하루 기분을 잡치는 일이 되고 만다. 출신지역 뿐만 아니라, 언제쯤 이민을 왔는지, 하는 일이 무엇인지에 따라 들어보나마나 그들이 하려는 말은 이미 들은 것이나 다름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여 가깝게 지낼수록 한국 정치 이야기는 금물이다.

개인적으로 만나면 다 좋고 착하며 자기 일에 성실한 사람들이다.

여기 살다보면 한국에서 연수나 연구차 또는 파견근무 등등으로 일이년 정도 단기 거주를 하거나 수년 동안 장기거주를 하다가 한국으로 돌아가는 이들과 연을 맺을 기회가 있기 마련이다. 그들 가운데 회사원들도 있지만 주로 공무원들이나 교수들이 많다.

내 기억 속에도 손으로 꼽을 수 없을만큼 많은 얼굴들이 있다. 생각해 떠올릴수록 모두 좋은 사람들이었고, 착하고 자기 일에 성실한 사람들이었다.

그들 가운데 종종 한국 뉴스에 오르내리던 인물들도 있었다. 대개의 경우 며칠전 지인이 이야기했던 신임장관과 같은 인물의 모습으로 뉴스에 오르내리던 것이었다. 그 때마다 나 역시 지인처럼 혀를 차곤 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지인이나 내가 만났던 사람들의 현재 모습을 대변한다고는 결코 생각치 않는다. 그들보다 많은 이들이, 아니 그들 빼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전히 착하고 성실하며 자기 일에 충실한 사람들의 모습으로 공직이나 교직에서 땀흘리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

기차여행 – 12

Reno의 밤

해가 떨어지자 도시 Reno는 불야성이 되었다.

네바다주가 본래부터 도박을 허용한 것은 아니라고 한다. 1861년 네바다주 초대의회는 모든 도박을 금지하고, 도박을 할 경우 벌금형과 징역형 모두를 선고할 수 있는 법을 제정하였단다. 이후  1869년에 면허제도를 도입하면서  도박행위를 합법화하는 대신에 고액의 면허료를 납부토록 하거나 청소년 입장을 제한하는 등의 규정을 두었다고 한다.

1877년에는 채무가 있는 사람, 아내나 미성년자를 동반한 성인남자를 경범죄로 벌하는 규정도 두었고,  1909년에는 다시 도박을 금지하면서 중벌로 다스렸으나 1931년에 완전히 합법화하면서 도박으로 유명한 주가 되었다고 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도박으로 유명한 네바다주에서 복권은 금지되어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가 재미를 더하는데,  약자인 시민들로부터 이익을 취하는 행위인 복권판매가 정부를 부패하게 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미국 독립선언문을 기초한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은 도박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남겼다고 한다.  “도박은 신성한 인간을 좀 먹고 인류에 대한 적개심을 키울 뿐이다.”

그러나 오늘날 수많은 정치인들은 도박사업이야말로 네 가지 E 정책 곧  education(교육), environment(환경), elderly(노인복지),  economic development(경제발전) 정책을 제대로 이루는데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아주 적합하다고 주장하곤한다. 심지어 도박사업은 국가에 도움을 주는 애국적인 행위라고 하는 정치인들도 있다.

세상 참 많이 바뀌었다 할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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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 떨어진 후 우리는 식당을 찾아 나섰다. 스시바가 그럴듯하여 자리를 차지하였다. 셰프는 자못 거만하였다. 일식요리엔 자신한다는 얼굴이었다. 어찌하리! 하나아빠가 천하의 미식가인 것을. 사케 한잔에 이미 만사 오케이가 된 나와 달리, 하나아빠는 연신 뭔가 부족하다는 웃음을 날렸던 것이다. 셰프는 내심 그런 하나아빠가 걸렸던 듯하다. 마침내 그를 폭발시킨 것은 하나아빠가 던진 이 말 한마디였다. “당신이 제일 자신있게 잘하는 것을 맛보고 싶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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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젊은 나이의 셰프는 우리들의 입과 배를 만족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지만, 내가 보기에도 하나아빠를 만족시키기에는 수가 부족하였다. 그러나 하나아빠를 비롯한 우리 모두를 만족시키는 일이 벌어졌다. 우리들 앞으로 건넨 계산서에는 우리들이 예상했던 밥값의 반 정도가 청구되어 있었고, 사람좋은 웃음을 끊이지 않던 하나아빠는 호기롭운 팁을 셰프에게 건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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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에서 증명사진 몇 장을 찍고, 피할 수 없는 도박장의 유혹을 그냥 피하고 지나가기에 미안한 마음에 하나아빠는 호기롭게 주사위게임을, 하나엄마와 아내는 슬럿 머신에 잠시 ‘여기 왔었다’는 표식을 남겨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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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아침, 우리는 요세미티를 향하기 전에 든든한 아침으로 배를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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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 그리고 좌파

노동절 휴일도 저물었다.

어제 농사짓는 벗이 땡볕에서 땀 흘려 키운 열무 몇 단을 보내왔다. 그의 노동을 생각하며 열무김치를 담갔다. 실히 병 하나를 채우고도 남았다. 농사짓는 친구 덕에 이젠 김치도 곧잘 담게 되었다.

얼마전에 만두 먹으러 중국인촌에 갔다가 사서, 다듬어 얼려놓은 오리고기를 꺼내어 주물럭구이를 만들었다. 기름기가 노인들에게 그리 좋지 않을 것 같아 고기만 저며 했더니 양이 참 적었다.

이즈음 다리가 불편해 거동이 힘드신 아버지는 “이게 다 6,25 때 박힌 수류탄 파편 탓”이라며 혀를 차신다. 내일 MRI 찍기 위해 병원 나들이를 하신다.

암기운이 다 가신  듯  가신 듯 하면서도, 잊힐만 하면 문제가 있다는 의사 소견에 움찔하시는 장모도 내일 병원 나들이를 하신다.

양쪽 노인들 몫으로 조금씩 떼어 놓고보니 우리 부부 양념에 비벼 한끼 식사로 딱 적합하였다.

이런 저런 뉴스들을 훑어 보다가 저녁나절 묵자(墨子)를 읽는다. 묵자를 읽는다기 보다는 문익환과 신영복을 읽는다가 맞겠다. 그 분들이 읽은 묵자를 내가 읽고 있기 때문이다.

묵자나 예수나 그들이 살았던 그 시대의 눈으로 비추어 보면, 아니 어쩌면 오늘에 이르기까지 줄곧 극단에 서 있는 좌파 일수도 있을 것이다.

“강자는 약자를 억누르고 부자는 가난한 사람을 능멸하고, 귀한 사람은 천한 사람에게 오만하며 간사한 자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을 속이는 것이며, 천하의 화와 찬탈과 원한이 생겨나는 근본적인 원인은 서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며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愛人若愛其身)”는 묵자의 가르침은 예수에 닿아 있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愛人若愛其身)”는 선언은 이미 혁명일 것이다. 입으로 말고 몸으로 서로가 실천하는 세상은 혁명 이후에나 가능할 것 아닐까? 극좌에 있는.

휴일 뉴스들은 나를 좌파로 몬다. 일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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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여행 – 11

Tahoe – 그 푸르름

기차에서 맞는 마지막 식사시간에 아내는 서빙하는 승무원 한사람에게 “이 사진, 당신이지요?”  라고 물었었다. 아내는 어느 한글 블로그에서 California Zepher 기차를 소개하는 글을 읽었단다. 거기에는 식당칸에서 일하는 승무원 사진이 있었는데, 아내는 스마트폰으로 그 사진을 보여주며 “사진속 인물이 당신 아니냐?”고 물었던 것이다.

그 젊은 친구가 그렇게 좋아하리라고는 생각치 못했다. 자기가 유명인사가 되었노라며 박장대소하던 젊은이는 동료 승무원들에게 자랑을 했고, 승무원들이 다투어 그 사진을 보자고 우리 테이블을 오갔다. 그 중 젊은 친구가 자기도 한장 찍어 널리 알려 달라며 우스개 소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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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열차 종착지가 아닌 네바다 Reno에서 내렸다. 타호(Tahoe) 호수와 요세미티((Yosemite) 공원을 보고 샌프란시스코로 가는 계획이었기 때문이다.

한때 골드러쉬의 주무대였던 네바다주는 라스베가스와 리노로 대표되는 도박으로 유명한 곳이다.

20세기 초까지 금광을 따라 이루워졌던 도시들 대부분이 유령도시가 되었고, 밤이면 불야성을 이루는 라스베가스와 리노 그리고 곳곳에 들어선 카지노에서 황금빛 대박을 꿈꾸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곳으로 바뀌었지만, 네바다주는 사우스 아프리카와 호주에 이어서 여전히 세계에서 세번 째로 큰 금 생산지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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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no는 해발 4,505 ft (1,373 m)에 위치한 도박장으로 유명하고, 인근해 있는 타호 호수와 요세미티 공원 진입도시로써 관광지로 알려진 곳이다.

예약한 호텔은 기차역에서 두 블록 거리 아주 가까이 있었다. 아내들은 방에 짐을 풀고, 하나아빠와 나는 예약해 놓은 렌트카를 픽업하러 나섰다.

wedding거리로 나선 우리에게 다가온 낯선 풍경들 가운데 하나는 속전속결로 끝내주고 주 7일 자정까지, 더하여 차를 탄채로 속성으로 치루어준다는 결혼식장이었다. 결혼과 이혼 수속이 자유롭다는 네바다의 풍경이었다.

길을 건너려 사거리 신호등에 서서 기다리는데, 저쪽에서 오토바이를 탄 젊은 백인청년 하나가  우리들을 향해 팔을 내밀어 손가락질을 하며 달려왔다. 가죽조끼 하나 걸친 그의 양 팔뚝은 문신으로 가득 채운 도화지였다. 그는 우리 앞을 지나며 손가락으로 총잡은 흉내를 내며, 입으로는 총소리를 내며 지나가던 것이었다. 장난질로 치부하긴엔 씁쓸한 풍경이었다.

우리는 빌린 차를 타고 타호 호수로 향했다. 운전대만 잡으면 날아다니는 하나아빠 덕에 우리는 짧은 시간 동안에 많은 곳들을 보고 다닐 수 있었다. 더하여 말수 적은 하나아빠와 서로가 지내왔던 어리고 젊은 시절을 함께 나눌 수 있었던 시간들은 이번 여행이 내게 준 즐거움 가운데 하나였다.

차는 지그재그로 언덕길을 올라가며 산꼭대기에 드리워진 하얀 천 가까이 가고 있었다. 그렇게 오르다 눈앞에 놓인 팻말을 보고서야 그 하얀 천이 눈이었음을 믿게되었다. 팻말에는 고도 해발 10,000ft(약 3,000m)라고 쓰여 있었다. 우리가 넘고 있었던 산이름은 생김새와는 전혀 다른 ‘장미 산(Mount Rose)’이었는데 최고 높이가 10,785 ft (3,287 m)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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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내리막길을 한참 달려간다.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타호 호수. 그 푸르름에 내게서 나온 소리, 그저 탄성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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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와 네바다 경계선상 해발 6,225 ft (1,897 m)에 있는 타호호수의 물속 깊이는 자그마치 1,645 ft (501 m)라고 한다.(백두산 천지의 깊이 384m) 그런데 마치 그 속이 다 드려다 보일듯이 맑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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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버거 맛이 일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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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여행 중이던 하나가 제 아빠에게 문자를 보냈단다. “타호에 가면 맑은 물에서 수영 한번 하라”고. 우리는 호수에 몸을 담구는 대신 호수를 가로질러 오가는 보트에 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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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여행 – 10

유타 – 신앙의 힘

저녁식사를 하는 동안 기차는 몰몬교인들의 땅 유타로 들어섰다. 나는 몰몬교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바 없지만 잘 아는 몰몬교인은 있다. 매우 근검화순 (勤儉和順)하고 독실한 사람이다. 이민온지 거의 40여년이 된 그는 아직도 첫번 째 기도제목을 “모국통일”이라고 말하는 사람이다. “사람 사랑”이 바로 신앙이라고 말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한때 나는 퀘이커 모임에 들락거렸던 적이 있었다. 집에서 오분 거리도 안되는 곳에 그들의 모임장소가 있다. 그들의 예배의식은 나를 매료시켰었다. 친교방식도 부담이 없어 좋았다. 그들과 함께한 주일아침 명상기도를 통해, 한동안 나는 1시간을 5분 정도의 시간으로 느낄만큼 명상을 즐기는 기쁨을 누리기도 하였다. 결국 핑계이지만, 아내와 아이들 생각때문에 퀘이커교도가 되지는 아니하였다.

아무튼 몰몬이나 퀘이커나 장로교나 감리교나 침례교나 다 한묶음이요, 불교도나 유교도나 이슬람교도나 천주교인이나 개신교인이나 무종교인이나 다원주의 신봉자나 모두 함께 살 수 있다는 종교의 자유를 누릴 수 나라가 미국이라는 모범을 보여준 땅이 유타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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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몬교도들이 유타주에 정착한 과정을 보면 히브리인들이 겪었던 40년 광야 이야기나 2만 5천리 길을 걸어서 피신했던 중국 공산당의 대장정 이야기가 떠오를 정도이다.

Mormon Trail (entire route)

<지도자 브링햄 영(Bringham Young)은 박해받는 신도들을 사막지대로 인도했다. 당시 1만 5천명의 몰몬교도가 3천대의 포장마차를 타고 길을 떠났다. 온갖 고난 끝에 브링햄 영은 눈 쌓인 봉우리로 이뤄진 산맥에 둘려싸여 햇빛에 반짝이는 새하얀 호수, 즉 소금호수를 발견했다. 그곳이야말로 새로운 예루살렘을 건설할 땅이라고 믿은 그는 그 사해로 들어오는 강을 요르단 강이라고 명명하고 Salt Lake시를 건설했다. – 앙드레 모로아의 미국사에서>

이 몰몬교도들은  고난의 장정과 정착과정을 통해 인디언들과 미리 정착해 있던 이민자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한 어두운 역사를 만들었다. 그러나 당시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이런 흑역사는 비단 몰몬교도들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인디언(원주민이라는 말이 맞겠지만)들과 멕시코인들의 땅을 개척이라는 이름으로 점령해 나갔던 대륙의 개척자들 모두에게 드려진 흑역사일 뿐이다.

몰몬교도의 유타주 정착은 대륙의 동과 서를 잇는 전환점이었다고 한다. 어떤 신앙이든 신앙공동체는 때때로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어 놓기도 한다. 그 공동체 안 구성원들이 매달릴 수 밖에 없는 어떤 절박함이 마지막 순간에 이르렀을 때 터지는 힘으로.

어두움 속을 달려 유타주를 건너며 저절로 입밖으로 터져 나오는 소리가 있었다. “미국, 정말 크다!” 약 200만명이 산다는 유타주의 넓이는 거의 한반도 크기와 맘먹는단다.

새벽녘에 눈을 떠 차창밖을 보니 무수한 별들이 떠있었다. 기차는 네바다 사막을 달리고 있었고 열차안에서 시간은 두번째로 바뀌어졌다. Central Time Zone에서 Mountain Time Zone으로, 그리고 다시 Pacific Time Zone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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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희미한 어둠속에서 첫번 째 만난 네바다주 아주 작은 마을에서 본 첫번 째 간판은 Casino였다. 먼동이 트자 이어지는 것은 광야였다. 네바다는 사막이라기 보다는 척박한 광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