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일아침, 맹자이제(孟子二題)

인(仁)에 대하여

孟子曰:三代之得天下也以仁, 其失天下也以不仁. 國之所以廢興存亡者亦然. 天子不仁, 不保四海; 諸侯不仁, 不保社稷; 卿大夫不仁, 不保宗廟; 士庶人不仁, 不保四體. 今惡死亡而樂不仁, 是猶惡醉而強酒.

<맹자왈 : 삼대지득천하야이인, 기실천하야이불인, 국지소이폐흥존망자역연, 천자불인, 불보사해; 제후불인, 불보사직; 경대부불인, 불보종묘; 사서인불인, 불보사체. 금악사망이락불인, 시유악취이강주. >

맹자가 말했다. :  3대(옛날에 있었던 하夏 은殷 주周 세나라)가 천하를 얻은 것은 인(仁 : 어짐)이 있었기  때문이요,  삼대가 천하를 잃은 것은 인(仁)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나라가 폐하고 흉하고 지탱하고 망하는 것도 다 그와 마찬가지 이치이다.

임금이 어질지 못하면  사람사는 세상을 이룰 수 없고, 권력을 쥔 자들이 어질지 아니하면 나라를 보존할 수가 없고, 관리들이 어질지 아니하면 정부를 보존할 수 없으며, 지식인들과 서민들이 어질지 아니하면 몸(사람)을 보존할 수 없는 법이다.

오늘날 사람들이 죽기를 싫어하면서도 인하지 않음을 즐기는(이리 독하게 사는 까닭은)것은 마치 취하기를 싫어하면서 독주를 입에 붓는 것과 마찬가지다.

재앙<얼(孼)>에 대하여

有孺子歌曰:”滄浪之水清兮, 可以濯我纓: 滄浪之水濁兮, 可以濯我足.” 孔子曰:”小子聽之! 清斯濯纓, 濁斯濯足矣, 自取之也.” 夫人必自侮, 然後人侮之; 家必自毀,而後人毀之; 國必自伐, 而後人伐之. <太甲>曰:”天作孽, 猶可違; 自作孽,不可活.”此之謂也.

유유자가왈 : “창랑지수청혜, 가이탁아영: 창랑지수탁혜, 가이탁아족.” 공자왈 : “소자청지! 청사탁영, 탁사탁족의, 자취지야.” 부인필자모, 연후인모지; 가필자훼, 이후인훼지; 국필자벌, 이후인벌지, <태갑>왈 : “천작얼, 유가위: 자작얼, 불가활.”차지위야.

어린아이들이 부르는 노래로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으리’라는 노래가 있다.

공자께서 이 노래를 들으시고 “자네들 저 노래를 들어보게. 물이 맑을 때는 갓끈을 씻지만 물이 흐리면 발을 씻게 되는 것이다. 물 스스로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도 모름지기 스스로를 모욕한 연후에 남이 자기를 모욕하는 법이며, 한 집안의 경우도 반드시 스스로를 파멸한 연후에 남들이 파멸시키는 법이며, 한 나라도 반드시 스스로를 짓밟은 연휴에 다른 나라를 짓밟는 것이다.

[서경] <태갑>편에 “하늘이 내린 재앙은 피할 수 있지만, 스스로 불러 들인 재앙은 피할 길이 없구나”라고 한 것은 이를 두고 한 말이다.”  (신영복선생님 번역에서)

백남기선생과 배신자

고 백남기(白南基, 1947. 10. 8  – 2016. 9. 25)선생에 대한 소식들을 듣고 보는 심정은 매우 아리고 쓰리고 아픕니다.

크고 거창할 것도 없이 자신이 사는 삶의 자리에  ‘생명과 평화’를 심고 가꾸는 일에 충실했던 사람, 일컬어 농민이었던 백남기선생은 여기 이민(移民)의 땅에서도 종종 만날 수 있는 이웃의 모습이었습니다.

쌀값 몇 만원에 대한 공약이 누군가에게는 호객행위에 불과했겠지만,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삶을 지탱해주는 꿈이었을겝니다.

공약이 헛되지만 않았더라면 백남기선생이 오래전에 등진 서울행에 나서지 않았을 일입니다.

그날 이후, 선생께서 결코 만만치않게 버텨왔을 일년 가까운 시간들 그리고 선생의 죽음 뒤에 그 가족들이 겪고 있는 모진 고통들을 나눌 아무런 방안도 없습니다. 그저 아플 뿐입니다.

십여년 전에 먼저 세상을 떠난 이선관시인(1942-2005)은 백남기선생을 죽음으로 내몰고, 주검조차 다시 죽이려는 자들을 배신자라고 이름지어 불렀습니다.

배신자

가요방에 한번도 가보지 않은 자라도/ 이인섭 작사 김광빈 작곡 배호가 불렀던/ 배신자를 모르는 분은 아마 우리나라 사람치고/드물 겁니다

이 신파조의 노래 가사를 쉽게 이야기하자면 / 어떤 순진무구한 더벅머리 총각이 사랑하는 이에게 / 청춘과 순정을 다 바쳤는데 지울 수 없는/ 아픈 상처만 주고는 야멸차게 떠나버렸다고/ 한마디로 배신자라고 노래한 겁니다

각설하고

해방 되고 오늘날까지 반세기 동안 / 우리나라에 대통령이 된 분이 / 몇 명인 줄 알고 계시기나 한 겁니까 / 그 분들이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 그 많은 약속 / 그 많은 다짐 / 그 많은 공약 공약 공약을 했습니다

만약 그분들의 그 많은 약속 그 많은 다짐 /그 많은 공약 공약 공약이 지켜졌다면 지켜졌다면

지켜졌다면……

배신자, 이 땅에 사는 전 국민의 배신자

고 백남기선생께서 즐겨 부르셨다는 ‘동지를 위하여’라는 노래는 그가 할 수 있었던 배신자에 대한 끝없는 항거의 몸짓이었을 겝니다.

그저 아픔으로.

가을, 주일아침 그리고 생명

<안식일이 되어 예수께서 다시 회당에 들어 가셨는데 마침 거기에 한쪽 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예수께서 안식일에 그 사람을 고쳐 주시기만 하면 고발하려고 지켜 보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 예수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는 “일어나서 이 앞으로 나오너라” 하시고  사람들을 향하여는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은 말문이 막혔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마음이 완고한 것을 탄식하시며 노기 띤 얼굴로 그들을 둘러 보시고 나서 손이 오그라든 사람에게 “손을 펴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가 손을 펴자 그 손은 이전처럼 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나가서 즉시 헤로데 당원들과 만나 예수를 없애 버릴 방도를 모의하였다.> – 성서 마가복음 3장 1 – 6절, 공동번역

지난 20일 노스 캐롤라이나 샬롯(Charlotte)에서 일어났던 경찰관에 의한 용의자 피살사건 현장 녹화영상이 공개되었다. 경찰관들이 착용하고 있었던 몸부착 카메라(officer’s body camera)에 찍힌 영상이다. 영상으로 흑인 용의자가 총을 손에 들고 있었는지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다만 경찰관들이 쏜 총소리임에 분명한 네발의 총성과 마치 토끼몰이하듯  포위하는 경찰관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경찰측은 용의자의 차량에서 용의자의 지문과 DNA를 확인할 수 있는 권총과 마리화나를 증거로 용의자가 공공 안전을 위협하는 인물이었음을 주장하고 있지만,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그가 경찰관에 의해 피살 되었다고 주장하는 시위대들을 무마시키기에는 어림없어 보인다.

한국에서는 지난해 경찰이 쏜 물대포에 맞아 쓰러진 후 317일 동안 사경을 헤매던 백남기선생이 끝내 숨졌다는 소식이다.

%eb%b0%b1%eb%82%a8%ea%b8%b0%ec%84%a0%ec%83%9d백선생을 치료해온 서울대병원은 돌아가신 백선생의 사인은 신장 기능이 갑자기 떨어지는 증세인 급성신부전 때문이었다고 하였다. 경찰측은 오래전부터 백선생이 쓰러져 누우신 일과 물대포 살수 사이에는 “인과관계가 불명확하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었으며, 지난 9월 12일 국회에서 열린 이른바 ‘백남기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했던 사고 당시 경찰청장이었던 강신명은 “(시위 진압 과정에서) 사람이 다쳤거나 사망했다고 무조건 사과하는 것은 적절치 않고 원인과 법률적 책임을 명확히 하고서 해야 한다”고 답변한 바 있다.

명백한 것은 두 사건 모두 법질서를 내세운 측이 힘(총과 물대포)으로 사람의 목숨을 빼앗아 간 사건이다. 마흔 세살의 흑인 Keith Lamont Scott은 법질서를 집행하는 권력인 경찰이 판단하기에 공공 안전을 위협하는 인물로 여겨져 목숨을 잃은 경우이고, 일흔살 농민 백남기선생은 “대통령의 공약인 쌀값 21만원을 보장하라”는 요구가 공공안전을 위협하는 행위라고 주장하는 권력의 최첨병인 경찰이 쏜 물대포를 맞고 숨진 것이다.

오래전에 이유를 막론하고 사람을 상하게 하고 죽이는 법질서를 파괴했던 이가 있었다. 바로 예수이다.

‘안식일에 일하지 말라’는 법질서를 앞세운 이들에게 던졌던 “안식일에 착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악한 일을 하는 것이 옳으냐? 사람을 살리는 것이 옳으냐? 죽이는 것이 옳으냐?”는 예수의 물음은 ‘법의 존재’ 이유를 묻는 것이었다.

무릇 법이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지 사람이 법을 위해 있지 않다는 것이며, 법이 사람들의 삶을 보호할 때 그 존재 의미가 있는 일일 뿐 그것에 반하여 사람들을 상하게하고 죽게하는 법은 언제든지 폐기할 수 있다는 선언이었다.

외형적이고 형식주의를 우선시할 수 밖에 없는 사회통념과는 별개로, 적어도 예수쟁이라면 성서를 삶의 지표로 삼는 신앙인이라면 “법은 사람을 위해 있어야 한다”는 이 명제를 놓치지 말아야 할 일이다.

최근 대한민국 국회에서 있었던 대정부질문 답변에 나선 황교안총리가 교언영색의 화술로 법질서를 앞세워 세월호 유가족 및 실종자 가족들의 가슴을 후비고 파며 또 다른 죽음을 안기는 장면이 떠오른다.

황총리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포장되어 소개되는 오늘의 종교는 예수와는 거리가 너무 멀다.

뚝 떨어진 수은주 따라 성큼 다가선 가을날 주일 아침, 떨어진 낙엽에서 다시 솟아날 생명을 보았던 예수와 숱한 예수쟁이들을 그리고 생각하며…

당신의 작은 관심을…

살며 머리가 저절로 숙여지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그런 분들을 만날 때면 제가 누리는 복이 크다는 것을 느끼곤 합니다.

장광선선생님은 그 중 한분이십니다.

그이는 무엇보다 사람을 사랑하는 이입니다. 그리고 고향을 사랑하는 분입니다.

거의 반세기 가까운 세월동안 필라델피아 한인사회를 터삼아 모국의 민주화와 통일 운동에 전념해 오신 모습들, 동포사회 이민자들이 건강하게 이 땅에 뿌리내렸으면 하는 바램으로 살아오신 모습들 보다 제가 장선생님께 고개 숙이는 까닭은 바로 사람과 고향을 사랑하는 그의 삶의 모습 때문입니다.

그런 장선생님은 지금 투병중이십니다. 만만찮은 투병생활 중에 제법 긴 글로 인사와 함께 지금 제가 작은 관심이라도 보내야만 될 일을 짚어주셨습니다.

장선생님의 건강을 빌면서 그이의 뜻을 단 한사람만에게라도 전하고 싶어 여기 그이가 보낸 글을 함께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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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장광선입니다. 제 건강상의 핑계로 오랜동안 인사를 드리지 못했습니다. 그 동안 모든 분들이 평안하시고 각박한 경제현실을 지혜롭게 헤쳐오셨으리라 믿습니다.

유엔식량구호기구 ( World Food Program)의 보도에 의하면 8월말과 9월초 사이 큰 비바람으로 두만강유역이 수몰되어 백여명의 사망자와  4백여 실종자가 나왔고 십사만여명의 이재민이 발생하여 긴급구호가 요청된다고 합니다.

이에 유엔식량구호기구는 즉각적인 구호팀을 꾸려 식량 및 필요한 의료품을 지원하기 위한 모금활동에 들어섰습니다.

1995년에 한반도 북쪽에 큰 홍수가 나서, 미국동포사회에서는 ‘수재민돕기 쌀 한 포대 보내기 운동 본부’를 꾸려 모금에 나섰던 일이 있습니다.

당시는 핵문제로 하여 미국과 북한이 극한 대결을 하던 때여서  우리는 과연 수재원호에 얼마나 호응을 얻을 수 있을런지 몹시 마음조리며 어렵게 발을 떼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한 달 동안했던 일차 모금액이 십만달러를 훌쩍 넘어 끈끈한 동포애를 실감했던 일이 새롭습니다.

당시 유엔식량구호기구를 통해 성금을 전달했었는데 유엔식량구호기구 출범이래 정부출연이 아닌 민간모금으로서는 최단기일에 최대액의 성금이 접수된 기록이라며 담당자들이 크게 감동하던 일이 생생합니다.

이번에 북녁 동포들이 겪은 재해에 대해서도 우리가 동포애와 상부상조하는 아름다운 민족전통의식을 발휘하여 안타까운  우리들의 마음을 담아 수해복구지원금을 보냈으면 하는 심정으로 인사를 드립니다.

유엔식량구호기구의 보도를 직접 확인하시고 (WFP 사이트 링크 ) wfp에 직접 성금을 보내실 수 있으며

소액의 정성을 보내실 경우 편의를 위해 필라지역에서는 제가 모아서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햄버거하나, 커피 한 잔 거르시고 그 돈을 동포애로 써 주십시오.

아무리 적은 액수라도 거기 묻은 동포애는 측량할 길 없이 크고 따뜻한 것일 것입니다.

제게 보내실 때는 수표나 머니오더일 경우지불인을 K Jang 으로 쓰시고 메모란에  <수재성금>이라 써서

K Jang

204 Griffith St. Salem, NJ 08079  로 보내주시면 됩니다.

익명을 원하실 경우에는 <익명처리>라 써 주십시오.

모금된 모든 액수는 모금기관에 전액 전달할 것이며 모금에 참여해주신 개개인에게 그 결과를 통지해드릴 것입니다.

주변 친지분들께도 널리 알려주셔서 함께 동포애를 발휘하도록 도와주시기 앙망합니다.

장광선 삼가 드림

단 한분만에게라도 장선생님께서 품고계신 민족사랑, 사람사랑하는 마음이 전달되기를 비는 마음으로…

기차여행 – 마지막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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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는 정말 아름다운 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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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적한 주택가 상점들 가운데 이른 아침 가장 먼저 문을 연 곳은 미용실이었다. 도시는 치장이 필요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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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가에서도 노숙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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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곳곳에서 여러 다른 모습의 홈리스들을 보았다. 잠시 제 자리를 비운 다른 노숙자의 짐을 터는 모습, 남녀 노숙인들이 서로 마주보며 스마트폰을 들고 전화놀이에 빠져 있는 모습, 신문 경제면을 샅샅히 훑고있는 모습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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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숙인들의 문제는 비단 캘리포니아만의 문제가 아니다. 여러해 전, 우리 동네에서 만났던 힘깨나 쓰던 한인 노숙자 사내는 지금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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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프란시스코에서 이동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가늠하는 일은 매우 어려웠다. 아주 넉넉하다싶게 떠난 공항행이었지만 길위에서 꼼짝을 못하고 시간을 보낼 수 밖에 없었던 경험이 비단 우리 일행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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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샌프란시스코는 여전히 아름다운 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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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두가 청과상에서 닭한마리 값으로 사먹은 Saturn Peach(도넛 복숭아) 는 새롭고 신기하면서도 익숙한 맛이었다. 무릇 여행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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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과 초를 다투며 공항 렌트카 반환지에 도착한 우리는 비행기 시간에 맞추었다는 안도에 조금전 겪었던 일들을 추억거리로 새기며 웃을 수 있었다. 주행거리 겨우 만 마일 정도였던 렌트카가 공항으로 오는 하이웨이 진입로에 들어서자 엑셀이 말을 듣지 않는 것이었다. 좀처럼 놀란 티를 내지 않고 여행 내내 느긋했던 하나아빠가 당황했던 순간이었다. 그러나 그는 정말 베테랑이었다.

그렇게 시간에 쫓겨 탑승게이트에 도착한 우리들을 맞은 것은 비행기 연착 안내였다. 샌프란시코에서 1시간 40분 늦게 출발한 비행기 탓에 우리는 환승지 샤롯(노스 캐롤라니아)에서 4시간을 맥없이 앉아 있어야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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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라델피아행 환승 비행기를 기다리던 노스 캐롤라이나 Charlotte 공항 대합실에서 나는 어느 노부부의 모습을 한동안 넋놓고 바라보았다. 노마나님은 연신 먹을거리를 남편에게 건네고 있었고  할아버지는 무표정하게 그를 받고 있었는데, 마치 오래전 시골 버스 정거장 대합실에서 마주쳤던 모습을 보고 있는 듯하였다. 짐이라야 달랑 작은 백팩 두개 뿐인 것으로 보아, 떨어져 사는 자식들 얼굴 한번 보고 돌아가는 길이 아니였을까?

나는 노부부를 보면서 흑인으로서는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Toni Morrison이 쓴 소설 “고향”을 떠올렸다.

소설속 주인공 Frank Money는 한국전쟁 참전용사이다. Frank가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된 이유는 이  미국땅에서 흑인들이 겪어냈던 아픔 때문이었다. 남부 조지아주 로터스 출신의 흑인 Frank는 아주 어릴 적에 겪었던 일로 정신적으로 심한 고통을 안고 살아간다. 그의 경험이란 한 흑인 남자가 백인들에 의해 생매장 당하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한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훗날, 그렇게 생매장당한 흑인은 백인들의 놀이도구로 죽게 된 사실을 알게된다.

백인들은 흑인 아버지와 아들을 싸우게 해놓고는 내기를 벌인다. 둘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싸워야한다는 조건을 내걸고. 그때 흑인 아버지는 아들에게 말한다. “네가 나를 죽이라고.” 흑인 아버지는 결국 생매장을 당하고 만다.

작가 Toni Morrison는 1940년대에만 해도 여전히 일어나고 있었던 미국의 원시적이고 병적인 인종차별 현장을 고발하고 있다. 소설속 주인공 Frank Money는 이런 병적인 사회로부터 탈출하고자 한국전쟁에 참전하게 된 것이다.

평범한 삶의 현장에서 단지 피부색이라는 판단 기준에 따라 누군가에는 심심풀이 놀이가 되고, 또 다른 누구가는 목숨을 걸어야하는 노리개가 되어도 뉴스거리가 되지 않았던 세상을 겪어왔을 대합실의 노부부를 보며, 그들이 헤쳐왔을 세월들에 잠시 빠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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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고향의 길목이 되어버린 필라의 스카이라인은 반가움이었다.

그랬다. 여행 끝에서 만나는 일상은 반가움이어야만 했다.

후기 – 하나네와 우리 부부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미처 맛보지 못했던 중국인촌 만두를 아쉬어하며, 여행 후 두어 주 지나 필라델피아 중국인촌에서 만두로 배를 채웠다.

그리고 며칠 후, 우리 부부는 사랑하는 아들이 사랑하는 아이의 부모 Washington씨 부부와 저녁을 함께 하였다.

 

가을 – 일요일 아침

맨하탄에서 일어난 폭발사고 소식에 가슴이 철컹 내려앉는다. 우선 사고 지역과 딸아이 거주지역과의 거리를 따져보고, 아이에게 연락해 본다. 딸아이는 사고조차 모르고 있었다. 가슴을 쓸어 내리며 찬찬히 뉴스들을 뒤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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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수선한 마음을 다스릴 겸 이른아침 동네 한바퀴를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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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체육공원 어귀 밤나무엔 밤들이 한가득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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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색으로 변해가는 풀밭에 핀 들꽃이 아침인사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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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공원 앞에 “Nip”이라고 불렸던 야구선수 James Henry Winters를 기리는 팻말이 서 있다. 오래전엔 야구도 흑인리그와 백인리그가 따로 있었단다. 흑인리그에서 명성을 떨치던 Nip은 은퇴후 결혼한 그의 아내  Sarah Smith 고향인 이 마을에서 정착해 평범한 일꾼이 되어 살다가 갔다고 한다.

사람사는 곳에 여전한 것은 흑백 갈등 뿐만이 아닐게다.

이 좋은 가을날 아침에 누군가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릴 것이고, 또 누군가는 아픔으로 가슴을 저미기도 할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자기가 사는 곳에서 평범한 일꾼으로 살며 계절을 한껏 느끼며 누리는 세상이었으면 좋겠다.

기차여행 -17

금문(金門, Golden Gate)

금문교(金門橋, Golden Gate Bridge)로 향했다. 아무렴, 샌프란시스코인데 금문교 배경으로 얼굴 사진 하나 정도는 찍고 가야 마땅한 일이었다.

가는 길에서 만난 단독주택들은 작고 마당은 없지만 아주 예뻣다. 특히 집 색깔들이 동부에서는 보기 드문 풍경이어서 자꾸 눈길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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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일행중에 주로 수다(?) 담당이었던 아내가 느닷없이 샌디에고에 있는 어느 목사에게 전화를 한다. 샌프란시스코와 샌디에고는 같은 캘리포니아라도 약 500마일(800km) 떨어진 곳이건만 아내는 San Diego와  San Francisco에서 San만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하나아빠처럼 1.5세 이민인 그이는 속한 교단에서 차세대 목회자로 손꼽혔던 사람이다. 내 나이 또래인데 벌써 준은퇴상태이며, 손주가 다섯이란다. 내외 모두 건강 문제로 꿈의 크기를 줄였나보다. 이즈음엔 책을 쓰고 있단다.

벌써 두 해가 지났다. 그가 모처럼 내가 사는 동네에 왔었다. 강변을 걸으며 그는 김광석이 부른 ‘서른 즈음에’를 웅얼거렸었다. 난 그런 그이를 아내못지 않게 좋아했다.

안개속을 달리다보니 이미 금문교를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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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본 금문교는 이런 멋진 모습들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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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이렇게 안개 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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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찍으며 금문교에게 너무나 미안하게도 나는 제2한강교와 절두산을 생각하고 있었다. 한때 세계최고, 최초라는 여러 수식어가 붙었던 금문교에게 정말 미안하리만치 내겐 큰 감흥이 없었다. 셋 중 하나였으리라. 내가 이미 늙었거나, 넘쳐나는 세계 최초와 최고들로 인하여 둔해졌거나, 아니면 안개 때문이었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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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여름 대낮이었건만 안개는 거치지 않았고 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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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아래로 내려가서야 감탄이 일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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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문교 옆 Sausalito 마을을 들리지 않았다면 그나마 금문교에 대한 정취는 별로 남아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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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usalito는 우리를 매료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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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을거리는 우리들의 눈과 입맛과 배를 완전하게 정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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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여행중이던 하나는 제 아빠가 Sausalito에 있다는 문자를 보내자, ‘거기있다면 자전거를 빌려 타보라’고 했단다.  아이들은 아직 우리들의 나이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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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전거 대신 해변에서 앉아 놀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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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usalito에서 금문(金門,Golden Gate)을 지나 누리고 있는 내 이민의 여유를 보았다고 한다면 과장일까?

다섯번째 필라 세사모 소식지

여름 휴가차 모국 방문을 했던 필라 세사모 회원들이 유가족들을 만나고 돌아와 전하는 소식 등을 실은 다섯번째 필라 세사모 소식지.

[gview file=”http://www.for1950s.com/wp-content/uploads/2016/09/philasewol-vol.5.pdf”]

세월호 참사로 딸 예은이를 잃은 유경근씨의 노모 이세자씨는 감리교단의 장로를 맡고 있는데 세월호참사 직전에 교단을 대표해서 한국여장로연합회 회장으로 선출된 바 있다. 이세자씨 부부는 모두 장로를 맡아 온 독실한 기독교인이지만, 세월호참사 이후 교인들과 소통에서 어려움이 적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다음은 예은이 할머니 이세자씨가 교인들과 소통에서 겪는 어려움과 새롭게 열린 신앙의 눈을 이야기한 내용이다.

<유가족들 중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은 70~80명 정도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교회를 못 갑니다. 그 이유가 대개 목사님 때문이라고 합니다. 목사님들이 유가족들에게 “아이들이 천국에 갔으니 정신 차리고 제 자리에 돌아와야 하지 않느냐?”고 했습니다.

그런 말을 들은 유가족들의 마음에는 비수가 꽂힙니다. 교인들은 또 “손주가 이제 천국 갔으니 좋게 생각하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저는 “나도 아이들이 천국 가 있는 거 알아”라고 말은 합니다. 하지만 유가족들에게 그렇게 말하는 것은 결코 그들이 치유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부모들이 교회를 더 못 갔습니다. 교회에 나가면 더 아파야 하니까요. 그래서 따로 모여서 예배를 드립니다.

제자들과 함께 길을 가시다가 날 때부터 소경인 사람을 보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저렇게 소경이 된 것은 누구의 죄냐고?”고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부모의 죄도 아니고 소경의 죄도 아니라고 하시죠.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을 쉽게 하는데, 그 말은 정말 잘 사용해야 합니다.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세월호 참사로 아이들이 죽은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노인들은 손주 얘기도 듣고, 남편 얘기도 듣고, 지나가는 학생들 말도 들어야 합니다. 사람의 소리를 들어야 합니다.

솔로몬도 백성의 소리를 듣고자 지혜를 달라고 했습니다. 똑똑하게 말하는 게 지혜가 아닙니다. 나이 먹을수록 더 들어야 합니다. 다른 이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생각을 한 다음, 말은 한참 있다가 해야 합니다.

저는 제가 어떻게 해야 한다는 걸 알게 해 준 예은이에게 고맙습니다. 그 아이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꼴통 같았던 이 할머니의 눈을 열어준 걸 생각하면 그 아이에게 고맙기만 합니다. 이 일이 아니었다면 저는 끝까지 제가 신앙생활을 잘 하고 있는 줄 알았을 것입니다.>

추석- 세월에 대하여

송편 대신 만두를 조금 빚었다. 솔직히 ‘송편 대신’이라는 말은 애초 가당치 않은 수사이다. 아무리 미국사람 다되어 산다하지만 노인들이 계시고, 그래도 명색이 추석인데 덕담 한마디로 넘어가기엔 예가 아니다싶어 만두를 빚게되었다.

“어제 막내네가 필라에 장보러 간다고해서 따라갔는데 파는 송편도 없더구나. 다 팔린건지…. 찾는 사람이 없는건지…. 이젠 추석도 없나보다.” 만두를 들고 찾아간 내게 어머니가 건넨 말씀이다. 노모는 손수 만들지는 못할망정 사서라도 송편 몇 점 아들과 나누고 싶었던  모양이다.

또 한번의 추석이 그렇게 지나간다. 참 신기한 일이다. 해마다 이맘 때면 날씨만큼은 내 어릴적 추석날 같다. 창문을 여니 벌레소리가 벌써 가을이다.

무심코 손에 든 책이 아주 오래 전 것이다. <성서와 인간> –  1972년도이니 내가 대학을 들어가던 해에 나온 책이다. 그해 외할머니께서는 내게 손수 한복을 지어 주셨다. 나는 그 옷을 지금도 간직하고 있다.

책장을 넘기다 눈에 들어 온 대목이다.

“돌이켜 우리는 혼란을 거듭하는 조국의 처지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 조국의 발전의 길은 지도층의 영웅화를 배제하고 대중이 참되게 계발되는 데 달려 있다고 생각한다. 일석이조에 이와 같은 과업이 완수될 수는 없지만, 질서화를 위해 암중모색한 소크라테스의 인생관과 그의 논리성은 곧 우리의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를 소위 아테네의 영웅이라고 오해해서는 안된다. 그는 ‘궤변의 논리’를 앞세우는 특권층을 ‘성실의 논리’로 막아냈으나 유감스럽게도 우매한 대중에 의해 사형당한 아테네의 선량한 평민이었다.”

예전 숭실대 총장을 지내신 조요한(趙要翰)선생님의 글이다.  글제목이  < 혼란과 질서 – 궤변론자들과 소크라테스>이다.

변한 추석풍경과 다르게 여전한 ‘궤변의 논리’들이 무성한 한반도 뉴스들이 마구 스쳐 지나간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성실의 논리’들은 더욱 거세게 꾸준히 발전되어 왔다는 생각으로 넉넉한 한가위 저녁을 물린다.

따져보니 그 무렵 한복 지으시던 외할머니가 이고 있던 세월의 짐을 내가 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