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는…

피해자는 너무나 많이 기억하는 반면에, 가해자는 너무나 적게 기억한다. – 스티븐 핑커(Steven Pinker)의 ‘우리 본성의 선한 천사’에서


오늘 동네에서 저와 같은 업종인 세탁업을 하는 이에게 들은 말입니다. 자기 가게에서 일하는 멕시칸들이 이번 주 목요일에 모두 일을 못하겠다고 했답니다. 7명의 멕시칸 종업원들이 모두 그 날 하루는 쉬겠다고 통보를 했다는 것이지요. 사연인즉 Wilmington시내에 있는 St Paul’s Church에서 이번 목요일에 열리는 트럼프의 이민자들에 대한 행정명령을 규탄하는 모임에 참석해야하기 때문이랍니다.

한인 커뮤니티에도 이런저런 걱정과 우려들이 떠도는 이즈음이지만, 사실 저처럼 촌에 살고 있거나 이 땅의 시민이 된지도 제법 시간이 흐른 사람들에겐 솔직히 무관한 일로 치부할 수도 있는 정황이었답니다. 그런데 트럼프의 광기가 이렇게 우리들의 생업에 가까이 다가온 것이지요. 실제 히스패닉을 상대로 장사를 하는 한인들은 걱정이 많다고들 합니다.

오늘 아침에 우리 동네 신문인 News Journal은 어제  Newark시에서 있었던 행사 하나를 제법 크게 소개했답니다. Newark시는 제 가게가 있는 곳이고, 행사는 트럼프의 행정명령에 반대하는 시위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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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은 시위에 참석한 이들의 목소리를 이렇게 전하고 있답니다. “미국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다양성이다. Diversity is what makes America great.”, “우리는 낯선 이들을 환영한다. 그들이 어디에서 왔건, 우리는 그들을 위해 싸울 것이다. We welcome that stranger. We fight for that stranger, no matter where that stranger is from.”, “우리는 이 싸움에서 승리할 것이다. We are going to win this battle.”

트럼프 치하의 미국이 앓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는 한국계 시민으로서 멕시칸들을 비롯한 이민자들과 이 땅의 건강한 시민들과 손잡고  승리하는 대열에 함께 해야 할 때입니다.

봄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을 위하여

뜻맞는 이들이 모여, 작으나마 기금을 모아 밝은 세상을 만드는 일에 쓰자는 뜻으로 재단을 세운지도 제법 되었답니다. 비록 작지만 꾸준했기에 이제 거의 재단의 틀이 짜여져 간답니다. ‘희망재단(Hope Network Foundation)’이라는 이름으로 등록을 마친 일도 꽤 오래 전입니다.

그렇다고 이제껏 내세울만한 대단한 일을 해 본적은 없답니다.

그래도 명색이 재단이므로 이사회를 연답니다. 올들어 첫 이사회를 준비하면서 지난 분기에 했던 일들을 정리해 보는 것이지요.

그 중 하나랍니다. 지난 해 북한에 큰 홍수가 나서 엄청난 피해를 입고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았던 일이 있습니다. 아마 지금도 그 고통을 이고 사는 이들이 많지 않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그 무렵에 ‘희망재단(Hope Network Foundation)’의 이름으로 적으나마 그들을 돕는 일에 함께 한 적이 있었답니다.

작은 금액의 돈을 유엔 세계식량계획(World Food Program, WFP) 미국본부에 보냈던 것인데, 뒤늦게 WFP에서 감사의 편지를 받았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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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회를 준비하면서 잊고 있었던 함경북도 수재민들을 생각해 본답니다. 비단 북의 수재민들 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고통과 아픔 속에서 봄을 기다리는 사람들 말입니다.

자연의 시계로 오는 봄은 때가 되면 오는 법이지만, 사람들이 기다리는 봄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오는 것일까요?

일찍이 법정 스님께서는 이렇게 답을 주셨답니다.

<그것은 어디서 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마련하는 것.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 비극은 있어도 절망은 없다. 새날을 비상(飛翔)하는 의지의 날개가 꺽이지 않는 한 좌절이란 있을 수 없다. 어제를 딛고 오늘은 일어서야 한다. >

‘희망재단(Hope Network Foundation)’이 봄을 만들어 가는 사람들에게 작은 희망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혼돈의 시대

가치(value, 價値)의 혼돈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미국이나 한국이나 말입니다. 어느 아주머님(할머님?)께서 던졌다는 외침 ‘염병하네’라는 말이 가슴에 닿는 이즈음입니다.

‘염병하네’보다는 ‘옘뱅하네’로 제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말입니다. 제가 어릴 적에 흔히 듣고 사용했던 말인데, 통상은 ‘옘뱅하네’만 따로 쓰진 않았고 그 앞에 ‘지랄’이라는 말을 얹었던 것 같습니다. ‘지랄 옘병하네’라고 말이지요. 때론 그 앞에 한마디 덧붙이곤 하였지요. ‘미친 년(놈) 지랄 옘뱅하네’라고 말이지요.

길을 걸으며 담배 꽁초를 버리고 침을 뱉고 하는 일이야 지극히 정상적인 일로 받아들이던 시절이었습니다. 그 말이 익숙했던 때 말입니다. 실제 동네마다 ‘미친 놈(년)’들이 하나 둘 씩은 있었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리고 ‘지랄 옘병’을 하며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지던 진짜 환자들을 거리에서 보는 일이 그닥 신기한 일이 아닐 때였습니다.

1960대의 일입니다.

그렇다고 ‘미친 년(놈) 지랄 옘병하네’라는 말을 정신 줄 놓고 앓는 환자들에게 쓰진 않았던 것 같습니다. 멀쩡하게 제 정신으로 사는 놈년들이 비정상적,비상식적인 말이나 행동을 할 때 그 욕을 퍼부었지 않았나 하는, 아주 오래된 기억을 되살려 봅니다.

그런데 2017년 오늘 듣는 ‘염병하네’라는 말이 트럼프 치하의 미국이나 탄핵정국의 한국을 설명하는 말로 이리도 적합할 수 있는지 놀란 마음이랍니다.

‘미친 놈(년) 지랄 옘병’하는 형국이 이어지고 있는 것이지요. 2017년에 말입니다.

그래 가치(value, 價値)의 혼돈입니다.

사람들이 사는 모습은 <‘가치(value, 價値)’를 둘러싼 투쟁의 역사>일 수도 있겠습니다.

내 삶에 중요한 가치에 대해 생각해 보는 밤입니다.

새 장난감, 손전화에 대해

‘쓸데없이 고집만 쎄서….’ 내가 종종 아내에게 듣는 잔소리 가운데 하나이다. 아내가 그 말을 던지는 대부분의 경우에, 나는 절대 그 말에 동의하지 않으므로 아내의 잔소리는 끊임없이 이어진다.

아내가 지적하는  ‘쓸데없는 고집’ 가운데 하나는 손전화(스마트폰 또는 핸드폰)없이 사는 내 삶이다. 이런 나를 골동품 취급하는 이들은 아내말고도 종종 만날 수 있다.  골동품으로 여기든 촌놈으로 여기든 ‘쓸데없는 고집’으로 치부하든, 아내를 비롯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의 몫일 뿐 내가 관여할 바가 아니다.

손전화를 전혀 사용해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십 수년 전 아직 스마트폰이라는 말이 생겨나기 전, 모두들 투박한 모양의 핸드폰들을 사용하던 시절에 한 일년여 손전화기를 허리춤에 차고 다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다 그만 전화기를 없앤 이후엔 손전화기와는 상관없이 살았다. 뭐 큰 이유나 생각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저 단지 편했기 때문이었다.

스마트폰이 등장하고 내 나이 또래 이상의 노인들 조차 스마트폰을 사용하는게 어색하기는커녕 당연한 세상이 되었어도 나는 그 물건을 쓸 생각이 전혀 없었다. 딴 이유없다. 그저 없이 지내는 편이 편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하면 믿을 사람들이 몇 명이나 있을까 모르겠지만, 스마트폰에서 사용하는 앱을 만들 수 있을 만큼의 기술적 지식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을지언정 스마트폰은 없이 살았다. 다시 말하지만 내 편한 삶을 위해서였다.

아내에게 ‘고집세다’는 잔소리를 들어가면서도 없이 살았던 내가 마침내 손전화(스마트폰)를 사서 손에 넣었다.

내가 개인컴퓨터(pc)로 사용하는 텔레그램 말고, 스마트폰으로만 사용할 수 있는 카카오톡을 사용하기 위해서이다. 물론 카톡도 pc버전이 있지만 아내의 스마트폰 전화번호를 사용하지 않으면 안되었기에 ‘에이 할 수 없다’하고 하나 장만한 것이다.

이 새로운 장난감을 손에 넣고 지금 열공중이다. 나는 이 장난감을 가지고 전화를 주고 받는 일에 사용할 생각이 전혀 없다. 내가 밥 먹고 사는 업종인 세탁업에 종사하는 이들을 위해 카톡 또는 sns등을 이용해 정보를 손쉽고 빠르게 전달해 주는 일이나, 언어문제로 순간을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도구로 사용해 보고자하는 내 늙으막 꿈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해 보고자 함이다.

내 새 장난감으로 하여 아내의 잔소리 가운데 하나는 사라질런지… 아님?

설날, 애국가를 부르며

잊고 살다가 일년에 한 두차례라도 애국가와 미국가를 부를 수 있음은 모두 한인회 덕이다. 목청 높여 온 힘으로 부르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가사를 읊조리며 따라 부를지언정 그런 때이면 한인회에 고마움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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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 년 저쪽 세월을 돌이켜보니 손에 잡힐 듯 한건만 강 건너 아스라히 저 편에 있다. 그 때만 하여도 한인회는 없었고, 다운타운에서 장사하는 한인들 중심으로 실업인협회라는 단체를 만들어서 한인들을 조직해 나가는 때였다. 몇 해 후 각종 직능단체들이 생기고, 그를 터삼아 델라웨어 한인회가 발족하였다.

매해 한인들의 수도 늘어갔거니와 아직 인터넷 등이 출현하기 전이라 이민사회의 각종 정보 유통이 원활하지 않던 때여서 한인회 행사에는 제법 많은 한인들이 모이곤 하였다.

그 중 5월 메모리얼데이 한인 축제와 설날 전후로 열리는 새해맞이 잔치에는 삼 백여명이 넘는 한인들이 모여  함께하곤 했다. 매 행사마다 빠지지 않고 초대하는 단골손님들은 한국전 참전용사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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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 참전 용사들이 점점 나이 들어 사라져 가면서 줄어드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행사에 참석하는 한인들의 수는 줄어갔다. 까닭을 찾자면 여러가지가 있겠다. 미국으로 오는 이민자들의 수가 이젠 거의 제로에 수렴한다는 사실에서부터 스마트폰 안에 차고 넘치는 정보들이 사람들이 마주할 기회를 앗아갔다는데에 이르기까지….

그럼에도 한인회를 붙들고 이어가고자 씨름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꿈은 결코 큰 것이 아니다. 다만 ‘나’와 ‘우리’를 잊지 않고자 함이다.

오늘 저녁 그네들이 마련한 설날맞이 잔치에 가서 애국가와 미국가를 부르고 왔다. 아직은 정정한 한국전 참전용사들과 함께.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한인들의 권익신장과 한국의 문화와 전통을 이웃에게 알리고자 애쓰는 델라웨어 한인회 김광실회장을 비롯한 임원들 모두에게 속깊은 박수를 보낸다.

참 좋은 일

어제 제 이메일함에 들어온 편지 한통의 내용입니다.

“델라웨어 대학교 은퇴교수인 내가 이즈음 하고 있는 일 가운데 하나는 뉴왁시에 있는 헬렌 그라함 암센터에서 환자와 간병인들에게 글쓰기 교실을 여는 일이다. 물론 자원봉사이고 이 교실은 누구에게나 열려있고 공짜이다. 오늘 네가 보낸 이메일 편지 내용은 내가 오는 2월 13일에 열리는 글쓰기 교실의 주제와 딱 맞는 것이다. 그래서 네 편지를 그날 참석하는 사람들과 네 편지를 함께 나누려고 하는데 괜찮겠니? …….”라는 것이었습니다.

I’m a retired professor from the University of Delaware, and I offer a writing program for patients and caregivers at the Helen Graham Cancer Center in Newark. I do it as a volunteer, and it’s free of charge and open to all. The post you sent out today fits perfectly with the topic of our next writing workshop, on February 13. Would it be all right with you if I print out copies to give to the patients and caregivers who attend that session? We usually have 12-18 people present. Of course I’ll include the contact information so that they can sign up for your weekly posts if they wish.

Thank you very much for your weekly reflections, which I enjoy very much, and for considering this request.

Joan DelFattore

이 편지를 받은 저는 당연히 제 세탁소 손님인 Joan DelFattore님께 답을 드렸답니다.

“저로서는 그저 영광일 뿐”이라고요.

제가 보냈던 편지 내용이란 사실 별거 아니었답니다. 내 마음으로 다스릴 줄 아는 하루를 보냈으면 하는 마음을 전한 것이었지요. 그런 잠시의 제 생각 하나가 누군가에게 정말 순간일지라도 편안한 느낌으로 다가갈 수 있다면 제게 참 좋은 일이지요.

제가 보냈던 편지 내용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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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휴대전화 가게에 들릴 일이 있었답니다. 그날 대기 의자에 앉아  “참 세상 많이 바뀌었다.”는 생각을 해 보았답니다. 십 수년 전만해도 지금과 같은 휴대전화 가게 같은 매장은 볼 수도 없었을 뿐더러 그런 비즈니스를 생각하는 사람들도 별로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 생각을 이어가다보니 십 수년 동안 새로 생겨 호황인 업종들과 잘 나가다가 없어지거나 쇠퇴한 업종들을 꼽아보게 되었답니다. 그 생각의 끝은 역시 “세상 참 많이 바뀌었다.”이었답니다.

제 업인 세탁업도 마찬가지랍니다. 여러가지 면에서 참 많이 바뀌었답니다.

개인용 컴퓨터, 인터넷 및 정보 통신 기술 등으로 특징지어지는 이른바 제3차 산업혁명의 결과들일 것입니다. 어려운 것은 제가 잘 모르고요, 사람사는 모습들이 빠르게 바뀌어 가고 있다는 말일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제4차 산업혁명의 시대라고들 한답니다. 솔직히 저는 그런 변화에 대해 잘 모른답니다. 다만 앞으로의 세상은 더욱 더 빠르게 바뀌어 갈 것이고, 사람들이 먹고 사는 직업의 유형들도 빠른 주기로 바뀌어 갈 것이라는 생각은 갖고 있답니다.

그런 생각을 이어가다보면 제 아이들 세대들은 우리 세대보다 더 어려운 세상을 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염려가 들기도 한답니다.

세상이 빠르게 변화하는데 제가 할 수 일은 아무 것도 없답니다.

다만 그날 휴대전화 가게에서 이렇게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 한가지를 생각해 낸 것이 있답니다.

조금은 느리게 살자는 것이랍니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는 일에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지만, 내 삶을 느리게 천천히 여유있게 사는 것이야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일이니까요.

자! 새로 시작하는 한 주간 여유롭고 넉넉한 시간들이 되시길 빕니다.

당신의 세탁소에서


A few days ago, I had to go to a cell phone store. On that day, while I was sitting on the chair and waiting, I got it into my head that the world had really changed a lot. Just a decade or so ago, I did not see businesses such as cell phone stores. I don’t think that anybody would have thought about that kind of business. Following such a train of thoughts, I started to think about newly-born and booming businesses and those once booming, but now declining businesses during the past decade or so. Expectedly, the thoughts ended in the conclusion: the world has really changed a lot.

So has the dry-cleaning business, which I have been doing. It has changed a lot in many respects.

Those changes may be the outcome of the third industrial revolution which can be characterized by personal computers, the internet and information/communication technologies. Though I don’t have expert knowledge about it, I think what it tells us is that the way of our lives has been changing rapidly.

Then, it is said that now we are living in the era of the fourth industrial revolution. Frankly, I don’t have any idea about that. But, I think that in the future, the world will change at an even faster pace and the rise and fall of businesses will change at a shorter cycle.

Following the train of this kind of thoughts, I started to wonder whether our children’s generation might confront a world which might be even harder to cope with than the one that we do.

Though the world is changing rapidly, I cannot do anything about that.

However, at the cell phone store the other day, I got an idea of one thing which I could do in the rapidly changing world.

It was to live in a little bit slower way.

Though I cannot do anything about rapid changes in the world, I can have my own way to decide how to live. To live my life in a slower and more leisurely way is totally up to me.

Well! I wish that you’ll have an easy and comfortable week.

From your cleaners.

세월호 1000일 – 어떤 설법

이 나이들어 특별한 종교에 혹 할 까닭은 없다만, 종종 귀에 들어오는 설교나 설법을 들을 때면 그 종교의 경전을 찾아 읽곤 한다. 일테면 말씀을 전하는 이들에 대한 예의 때문이다.

내 주위엔 다양한 종파의 기독교인들부터 몰몬에 이르기까지, 불교의 조계종에서 원불교까지, 천도교에서 무종교까지 다양한 지인들이 있다.

이따금 그 사람이 믿는 종교와 그 사람의 이미지가 일치할 때 느끼는 깊은 울림이 있다. 내가 그 종교를 믿고 안 믿고 하는 것과는 아무 관계가 없이 말이다.

딱 한 주 전의 일이다. 세월호 1,000일을 되새기고자 모인 필라 세사모 행사에서 말씀을 전한 원불교 강신오 교무님의 소리(이런 걸 ‘소리’라 해야 마땅할 터)를 들으며 누린 울림은 아주 컷다.

하여 그 울림을 함께 나눈다.

1000

반갑습니다. 원불교 강신오 교무입니다.

심해(深海)는 얼마나 추울까요.. 세월호 1000일인 오늘, 마치 아직 9명이 남아있는 깊은 바다와 같이 추운 것 같습니다.

매서운 추위 속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세월호 참사 1000일 범종교 추모식’을 준비해주신 필라 세사모 여러분과,  생명의 소중함을 알고, 그 아픔을 함께 느끼고 나눌줄 아시기에 이 자리에 함께하신 모든 분들과 혹 사정이 있어 지금 이 자리에 함께 하지 못하셨지만 마음으로 함께 하시는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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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를 맞아 원불교 경산 종법사님께서는 ‘성자가 되는 길’이라는 신년법문으로 세 가지 지침을 주셨습니다. 먼저 짧게 나누는 시간 갖겠습니다.

하나, 마음에 공을 들입시다.

모든 행복과 불행, 성공과 실패, 전쟁과 평화가 결국은 한 마음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그래서그 때 그 곳에 알맞게 마음을 낼 수 있도록, 마음 사용법을 잘 알아야 합니다.

둘, 일에 공을 들입시다.

우리의 삶은 소소한 일에서부터 국가와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일까지 끊임없는 일의 연속입니다.  작은 일에서부터 도덕적으로 조화롭게 성공시켜

내 마음과 내가 속한 곳에서부터 멀리까지 일이 잘 되도록 공을 들여 성공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셋, 만나는 사람마다 공을 들입시다.

우리는 무수한 인연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인연들이 인연을 따라 나를 부처로, 성인으로 만들어주고, 일을 성공시켜주고, 목적을 이루게 해주는 동지이며 협력자 입니다.

그래서 서로서로 은혜가 되고 발전이 되도록 공을 들여야 합니다.

 

오늘 이 자리에 함께 하신 모든 분들과 세상의 모든 분들께서, 자기 마음을 알아 마음에 공을 들여 마음의 자유를 얻으시고,일마다 조화롭게 성공시켜 작은 일부터 큰 일까지 성공하시고,만나는 인연마다 서로 은혜가 되고 발전이 되어모두 함께 성인이 되시고 함께 평화하시기를 염원드립니다.

제가 출가를 하고 나서 얼마 안지났을 때, 그 때는 나는 오늘 죽어도 여한이 없는 사람이라고누가 물어도 그렇게 대답하던 아주 오만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그 때, 물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허리도 안되는 그 얕은 물에 머리부터 빠져서, 오직 살겠다고 허우적 거리며 난리를 치던 기억은,그동안의 오만함에 대한 수치감과 함께, 살아있는 생명이 준비없이 강제로 죽음을 맞이할 때, 숨쉬고 싶을 때 입과 콧속으로 물밖에 들어오지 않을 때, 그 얼마나 무섭고 두려운지를, 그리고, 살아있는 모든 생명이 생명 그 자체로 참으로 소중하고 귀하다는 것을 뼛속 깊이 각인시켜주었습니다.

천 일 전에 세월호에 있던 아이들과 승객들은, 어땠을까요…

지금도 생각하면 상상할 수 조차 없는 그 두려움과 고통이 가슴에 밀려오는 듯 합니다.

한 생명이 태어나 자기 한 몸 만을 자기 인줄 알고 살다가 자연과 부모와 세상의 모든 생명들과 그 생명을 지켜주는 바른 법을 알고 함께 성장하는 것을 우리는 삶이라고 하고, 그러한 ‘존재 자체의 은혜’를 아는 삶, ‘그 삶을 사는 생명’을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삶을 사는 사람은, 자기의 생명이 참으로 귀한 줄 알아서, 나 아닌 생명도 참으로 귀하다는 것을 압니다. 자기가 육신과 마음의 고통을 알기에, 나 아닌 생명이 아파할 때 참으로 함께 아파해줄 수 있습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을 보고, 우리는 자기가 주인이 되는 삶, 참된 삶을 산다고 할 수 없습니다.

돈의 노예가 되고, 권력의 노예가 되고, 원망의 노예가 되고, 성의 노예가 되어, 도무지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자기가 집착한 것에 아귀같이 달라붙어서 인간으로서의 양심마저 버리고, 타인의 생명을 해치는삶을 사는 것은 마음으로는 참으로 불쌍하다고 여기되, 그 행위에 대한 것들은 분명 단죄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참으로 미운것이 아니라, 다른 모습을 가진, 나와 한 생명인 그 삶을 함께 ‘사람의 삶을 살자’고 인도하기 위한 것이며, 그리하여 함께 사는 세상을 어제 보다 나은 세상으로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지난 달, 치료 차 한국에 갔었습니다.  처음 참가한 4차 집회에서 한 고등학생의 자유발언이 있었습니다. 친일청산을 하지 못함으로 인해 이승만으로 부터 시작하는 뿌리깊은 민간인 학살의 한을, 그 아이가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촛불은 바람이 불면 꺼지는 것이 아니라  옮겨 붙는다고,  횃불이 되고 들불이 되고, 산불이 된다는 웅변에 모두가 뜨거운 가슴으로 환호하고 박수하였습니다.

세상의 어느 나라가 이런 평화로운 집회를 하고, 평화로운 정권교체를 이루어내겠는가 하는 자부심과 긍지가 마음 깊이 새겨졌습니다. 그것을 마치 시험이라도 하듯이, 친일 세력들은 가진 것을 놓지 않기 위해 돈으로 사람을 매수하여, 폭력과 폭언으로 더러운 시위를 만들고자 하지만, 우리 대한민국 국민들은 10차가 넘고, 세월호 1000일 집회를 한 지금까지도 한 마음으로 그 평화로운 촛불혁명 이어가고 있습니다.

새해가 밝았습니다.

배를 일부러 걸려 넘어뜨리기위해 바다에 내렸던 닻 마저 몰래 잘려 아직까지도 깊은 바다에 가라앉아있는 세월호는, 그러나 우리들을 하나로 이어 우리 안에 있던 참으로 아름다운 홍익인간의 정신과 양심을 끌어올렸습니다.

돈에 눈이 멀어, 정치인의 도덕성을 보지 않고 만들어낸, 마치 우리 안의 탐욕을 거울같이 보여주었던 이명박근혜를 만들었던 그 욕심과 이기심이 아니라,  지금 이 마음과 이 정신으로 다시 시작하도록 우리들을 하나로 끌어올리고 있습니다.

국회에서 탄핵이 결정된 이후, 사람들은 ‘이제 시작이라는 말’을 많이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시작입니다.

온 국민과 국토가 만신창이가 된 오늘, 그들이 돈으로 던지는 미끼에 우리가 주인이 되는 기회를 또다시 잃을 수는 없습니다.

어둠은 아무리 작은 빛이라도 빛이 있는 한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오늘 이렇게 우리가 함께 하고, 연대하고, 세월호를 기억하는 한, 생명과 민주주의를 향한 촛불은 마음과 마음으로 전해져 결코 꺼지지 않는 빛으로 어둠을 밝힐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함께하신 모든 동포님들과 한국에서 촛불을 드시는 대한민국의 진정한 주인들께 진리의 크신 은혜와 호렴이 늘 함께 하시어,

모두 마음마다 일마다 만나는 인연마다 공을 들이셔서, 대한민국과 이땅에 진리와 양심과 정의가 촛불같이 빛나고, 그 불이 번져 들불이 되고 산불이 되어 온세상에 빛나기를 기원합니다.

함께 하겠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

늘, 매 순간이 다시 시작입니다.

 

 

감사합니다.

 

오호, 이 즐거움이라니!

2016년은 벌써 지난해가 되었다. 그래, 지난해 일이다. 이제 두 내외가 사는 삶에 거추장스러운 물건들은 좀 정리하고 살자는 생각으로 집안 정리를 했었다.

그 물건들 가운데 버릴까 말까 고민하다가 상자에 넣어 창고방에 밀어넣어둔 것들이 있었다.카세트 테이프, 비디오 테이프, LP 레코드판 등이다.

오래 전 기억들을 담아 둔 물건들이지만, 그것들을 재생해 주는 기기들이 집안엔 남아있지 않았으므로 쓸모가 없었기 때문인데, 그렇다고 버리자니 웬지 마음이 내키지 않았던  탓이다.

그 중 LP 레코트판들은 오래 전 이민 짐 속에 있었던 물건들인데, 이민 이후 정작 전축이라고 부르던 물건을 사본 적이 없으니 그냥 잊혀진 것들이었다.  그것들 대부분은 60, 70년대 노래들 이거나  당시의 영화음악들인데, 곁에 있다는 것이 신기하기도해서 차마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다 며칠 전, Amazon에 들어가 어떤 물건을 찾다가 눈에 뜨인 것이 Nostalgic Entertainment Center라는 축음기였다.

오호, 이런 물건이 있다니! LP 레코드 플레이어는 물론이거니와 카세트 테이프 재생과 CD플레이어, FM, AM 라디오 방송을 들을 수 있는 물건이었던 것이다. 반가운 마음에 아내와 상의도 없이 주문을 했고, 오늘 나는 30년 넘게 짐속에 물건이었을 뿐인 LP 레코트판을 돌려 노래를 듣는다.

오호! 이 즐거움이라니.

매화를 생각함

어제 내린 눈이 뜰을 하얗게 덮었다. 주일아침의 적막함은 내가 누리는 소소한 즐거움 가운데 하나이다. 뒷뜰 눈밭에 소리없이 내려앉은  아침햇살은 적막함에 푸근함을 더한다.

시집 하나 손에 든다. “내 가슴에 매화 한그루 심어놓고”

얼핏 춥고 시리게만 보이는 세상을 향해 은은한 매화 향기 전하는 아름다운 사람들을 생각하며 편지 한 장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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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되면 이따금 이런 질문을 던지는 손님들이 계시답니다. 올해 음력설은 언제냐?라는 물음입니다. 올해는 1월 28일이 Chinese New Year로 잘 알려진 음력설이랍니다.

잘 아시다시피 중국을 비롯한 인근 동양국가들은 오래 전부터 음력 달력을 사용했답니다. 그런데 이 음력달력은 태양의 움직임에 깊게 영향을 받는 농사꾼들에게 불편한 점이 많았답니다. 그래서 사용한 것이 24절기라는 것입니다. 일년을 24절기로 나눈 것인데 이 절기는 우리들이 사용하는 태양력에 맞춘 것이랍니다.

24절기 가운데 태양력으로 제일 첫번 째 절기는 소한(小寒)입니다. 지난 1월 5일(목)이 소한이었답니다. 소한이라는 말은 ‘조금 추운 날’이라는 뜻이지만, 실제 한국에서는 일년 중 가장 추운 날이라는 뜻으로 사용된답니다. 실제 아주 춥기도 하고요.

일년 중 가장 추운 날이라는 소한 무렵에 피는 꽃이 있답니다. 매화입니다. 중국이나 한국에는 이 매화에 대한 시들이 넘쳐나게 많답니다. (이즈음 사람들에겐 잊혀진 많은 것들 가운데 하나이지만 말입니다. 이즈음엔 사계절이나 24절기와는 아무 상관없이 꽃들이 피고 지는 세상이 되었으니 옛사람들이 매화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모르는게 당연할 수도 있겠지요.)

옛 한국인들이 매화를 노래한 시만 모아서 펴낸 시집이 제게 있답니다. 시집의 제목은 “내 가슴에 매화 한그루 심어놓고”인데, 시집에 실린 시들을 읽다보면 왜 옛사람들이 매화를 좋아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답니다.

혹시라도 지금 어렵고 힘든 시간을 보내는 처지에 있다면, 삭막하고 어둡고 추운 한겨울에 피는 매화를 보며 힘을 내고, 이제 곧 모든 세상이 활짝 필 봄을 준비하라는 뜻으로 매화를 바라본 것이랍니다.

2017년 1월의 두번 째 일요일 아침에 제가 읽은 매화 시 한편을 당신과 함께 나눕니다.

당신의 세탁소에서

온갖 꽃 중 매화만  눈 속에서 피어나서

그윽한 향기 마치 내 마음을 안다는 듯

달빛 아래 홀로 있어도 네(매화)가 있으니 행복하여라


 

capture-20170108-093440Around this time of year, some customers occasionally ask me a question. It is “when is the lunar New Year’s day this year?” This year, January 28 is the day, which is well known as Chinese New Year’s day.

As you know well, the lunar calendar has been used since a long time ago in China and other countries in the Orient. But, it gave many inconveniences to farmers who had to farm according to the motion of the sun. So, the twenty-four seasonal divisions (or solar terms) were devised. As the term indicates, they divided a year into twenty-four terms, reflecting the motion of the sun. In a sense, they were the way to adjust the lunar calendar to the solar calendar.

The first of the 24 divisions is ‘Sohan (소한, 小寒).’ January 5 (Thursday) was that day this year. Though the word ‘Sohan’ means ‘somewhat cold day,’ in reality, it is regarded ‘the coldest day of year’ in Korea. It is usually very cold on the day.

There is a flower which blooms around ‘Sohan,’ the coldest day of year. It is a Plum blossom. There are numerous poems about a Plum blossom in China and Korea. (Unfortunately, it has become just one of so many things that people in these days have forgotten. As flowers bloom and fall regardless of seasonal divisions, nowadays, it may be no wonder that people don’t know how much people in the old days loved a Plum blossom.)

I have a collection of poems which Koreans in the old days wrote about a Plum blossom. Its title is “After I plant a plum tree in my heart (내 가슴에 매화 한그루 심어놓고).” If you read the poems in the book, you will understand why people in the old days loved a Plum blossom.

They looked at a Plum blossom and heard the message: if you are in difficult and adverse circumstances, get strength by looking at Plum blossoms which bloom in desolate, dark, and cold winter, and prepare for the not-too-distant spring in which all the world will burst into bloom.

I would like to share with you a few lines of a poem on a Plum bloom this second Sunday morning of January 2017.

From your cleaners.

Only a Plum bloom of all flowers blossoms in the snow,

As if its sweet scent knew my mind,

I am happy, though I am alone under the moonlight, because you (a Plum bloom) are here.

2017년엔 대서소(代書所)로…

웬만하면 일을 줄일 일이지 늘일 나이가 결코 아니다. 허기사 내 주제가 그렇다는 것이지, 이즈음엔 칠순에도 새 일을 꾸미고 벌리는 사람들은 천지더라만.

지난 해 하반기에 들어서면서 나는, 한 해의 하반기가 아닌 인생의 하반기를 준비해야 할 지점을 막 통과하고 있는게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었다. ‘하반기를 준비할 시점’이라는 말을 되뇌며 첫번째로 든 생각은 욕심을 버리자는 것이었다.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은 이어가되, 어느 순간에 내 뜻과는 상관없이 그만 끝나고 말지라도 후회하지 않는 삶을 살아갈 나이에 이르렀다는 자각이었다.

딱히 신앙이 아니더라도 물리적인 나이가 종말론적 삶을 살 수 밖에 없는 지경에 다다렀다는 내 생각이 결코 조급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으로.

그러던 중, 자꾸 내게 새 일을 던진 이가 있었다. 한인 세탁인들을 위한 월간지를 만든다고 나선 황주상이라는 이였다. 몇 차례 사양 끝에 결국 글 하나 써 보냈다. 그건 단지 글이 아니라, 새해 2017년에 내가 행해야만 할 일이었다.

내 세탁업 경력은 차치 하고서라도 적어도 이 업계의 정보를 일별하여 업자들 수준에 맞게 정리하여 재단하여 제공하는 일과 언어를 통한 마케팅 문제 등을 대서소 주인처럼 해 줄 수 있는 일들은 아직 내가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대서소라도 있었으면 하는 이들에겐 말이다.

kleaners

세탁소의 미래 – 길을 찾아서

“미스터 김도 내 나이 되보면 알거야. 움직이는게 귀찮아 진다구. 미스터 김은 아직 내 말을  이해 못하겠지만…”.  얼추 십여년 전에, 나보다 열살 정도 나이가 많은 동네 어른 한 분이 내게 건냈던 말이다. 당시에 그 말을 듣고 있던 솔직한 내 심정은 “에이, 설마… 그 나이에…”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지난 해, 나는  딱 십여 년 전 동네 어르신이 하시던 말씀을 그대로 전했다. 얼추 열살 정도 아래인 내 후배에게.

이제 Social Security의 full benefit을 받을 수 있는 나이도 코 앞에 이르렀거니와, 아이들도 다 제 갈 길 찾아 나섰고, 우리 내외 둘이서 나누는 저녁 밥상은 날로 단촐해지니 움직이는게 귀찮다기 보다는 할 수 있는 한 새로운 일을 만들지 않으려 한다는 표현이 더 적합할 듯 하다.

아무튼 지난 해에 나는 많은 일들을 줄였다. 줄인 것은 비단 일 뿐만이 아니다. 집안 물건들도 많이 줄였다. 애초 그리 가진 것들이 많은 편이 아니였는데도 줄일 수 있는 것들이 그리 많을 줄은 몰랐다.  집안이 휑할만큼 줄였다. 그렇게 줄이고 나니 어쩌다 들르는 아이들은 집이 두배는 넓어진 것 같다고 한다.

일에 이르러 따지자면 한참 때에 비해 거의 은퇴 수준이라 할 만 하겠다.  서른 해가 다 되어가는 세탁소 일들 뿐만이 아니라, 십 수년 이어오던 한인 세탁인들과의 여러 연들도 줄일 수 있는 만큼 최대한 줄여서인지 딱히 급하다는 생각이 드는 일이 거의 없는 일상이 되었다.

느긋함을 만끽할 나이에 들어섰다는 자각을 실천에 옮긴 것도 지난해 일이었다. 미대륙횡단 기차를 탔던 일이다. 그 여행 이후, 이제 나는 내 인생 후반기를 위한 준비가 필요한 때에 이르렀다는 생각이 깊어졌다. 그리고 몇 가지 계획들을 세웠다. 아내를 위하여, 아이들을 위하여, 고령의 부모님들을 위하여, 무엇보다 내 자신을 위하여 이제 이 나이에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들이 무엇인지를 찾아 보았던 것이다.

허나 삶이 살아 볼만한 까닭은 모든 삶이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데에 있는가 보다. 내가 새로운 삶을 계획하려고 하는 때에 장모가 먼저 저 세상으로 새 삶을 찾아 떠났다.

그 무렵에 내게 전화를 한 이가  Kleaners의 황주상사장이다. 그와는 일면식도 없거니와 통성명도 그날 전화로 처음 나눈 사이이다. 새로 시작하는 한인종합세탁전문지 월간 Kleaners에 컬럼을 부탁한다는 그에게, 이미 은퇴 수순에 들어선 나보다는 보다 활기찬 기운으로 업계에서 일할 수 있는 분들을 찾아보는 것이 나을 것이라며 찾아오겠다는 그를 만류했다.

황사장은 매우 적극적인 사람이었다. 그로인해 나는 Kleaners에 실릴 첫 컬럼을 이렇게 쓰고 있다.

아마 내 또래의 사람들이라면 누구의 기억속에라도 남아 있을 “대서소 (代書所)”라는 곳이 있었다. 혹시 그 이름이 낯선 이들도 있을까? 그건 참 좋은 일이다. 젊은 사람이 세탁업을 이어 받았으므로. 아무튼 “대서소”란  출생과 사망신고서, 혼인과 이혼신고서, 진정서, 탄원서, 고소장을 써 주는 곳, 그야말로 삶의 희로애락을 대신 써주는 곳의 이름이었다.

이 첫 컬럼을 쓰고 있는 내 솔직한 심정은 바로 “대서소”를 개업하는 마음이다. 그저 내 느긋함을 즐기며, 내 경험과 지금 내 일상의 하나인 정보를 보고 듣는 일을 나누는 그런 대서소가 된다면 그 또한 내 나이에 맞는 일이 아닐까?하는 생각 말이다.

첫 컬럼에 뭔 글을 쓸까?라는 생각에 빠져 있을 때, 하얀 얼굴의 여호와의 증인 한사람이 건넨 안내지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How do you view the future?” 우리의 내일은? 나나  이 글을 읽는 당신 세탁소의 미래는?.

그 길을 찾는 것이  내가 이 컬럼을 이어가는 뜻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내가 참 좋아하는 시 한편으로 이 글을 맺는다.

관점

  • 쉘 실버스타인

추수감사절 만찬은 슬프고 고맙지 않다 /성탄절 만찬은 어둡고 슬프다/ 잠시 생각을 멈추고 /칠면조의 관점으로 만찬 식탁을 바라본다면.

주일만찬은 즐겁지 않다 /부활절축제도 재수 없을 뿐 /닭과 오리의 관점으로 / 그걸 바라 본다면.

한때 나는 참치 샐러드를 얼마나 좋아했었던지 /돼지고기 가재요리, 양갈비도 /잠시  생각을 멈추고 식탁의 관점에서 /식탁을 바라보기전까지는.

Point Of View

  • Shel Silverstein

Thanksgiving dinner’s sad and thankless/ Christmas dinner’s dark and blue/ When you stop and try to see it/ From the turkey’s point of view.

Sunday dinner isn’t sunny/ Easter feasts are just bad luck/When you see it from the viewpoint/Of a chicken or a duck.

Oh how I once loved tuna salad/ Pork and lobsters, lamb chops too/ ‘Til I stopped and looked at dinner

From the dinner’s point of view.

무릇 모든 사물이나 사건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생각이 달라지고, 그 다른 생각으로 인해 일어나는 일들의 결과가 아주 다르게 나타나는 현상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는 생각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