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과 질문

홍길복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 – 6

제 2강 – 3 : 무엇을 ? (What ?) – 다시 사람을 묻는다

8. 둘째는 18세기 계몽주의 시대의 휴매니즘(Enlightenment Humanism)인데 이를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인본주의 인문학(人本主義 人文學)’ 혹은 과학주의 인문학, 실증주의 인문학 등으로 부를수 있습니다. 이는 르네쌍스 이후 꾸준히 상승되어 온 인간 이성의 절정기에서 태동된 인문학입니다.

‘이성적 동물로써의 인간’이 우주와 만물의 주체이고 이 인간을 인간되게하는 것은 인간의 ‘이성’이라고 보았던 시대입니다.

시대적 배경을 모르면 그 시대의 사상을 알 수 없습니다. 18세기는 한 마디로 ‘혁명의 시대’입니다.

크게는 두 가지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첫째는 영국을 중심한 산업혁명 입니다(The Industrial Revolution). 18세기 중반 부터 19세기 초반 까지 이어진 과학, 기술의 혁신과 이에 따른 정치-사회-경제 전반에 대한 대 변혁 운동입니다.

산업혁명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쓴 사람은 Arnold Toynbee 입니다. 산업혁명은 역사 이후 인류가 오랫동안 생존의 방식으로 여겨왔던 수렵과 농업 경제와 수공업 체제를 공장, 공업, 기계산업 체제로 전환 시치고 거기에 따른 ‘전문화’와 ‘분업화’를 촉진 시킨 혁명적 전환을 통칭하는 개념입니다.

산업혁명이 가능하게 된 데는 그 이전에 괄목 할 만한 몇 가지 과학기술의 발명과 발견이 뒷받침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중 첫째는 신소재의 발견 입니다. 종래에는 나무나 숯을 통해서 얻어드렸던 에너지를 석탄과 구리 등 광물 자원에서 얻게 되었습니다. 둘째는 이 새로운 에너지를 통하여 증기기관과 방적기계를 발명해 내고 석유 재품과 전기 에너지가 발전 되었습니다. 셋째는 교통과 통신의 발전이 가속화 되었습니다. 증기 기관차, 증기 기선, 자동차, 전신, 라디오 등이 연이어 발명 되었습니다. 넷째는 생산 체계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적은 인력을 가지고 높은 생산성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다섯째는 노동력의 전문화와 분업체계가 형성 되었습니다.

18세기 영국에서는 처음으로 Richard Arkwright, James Hargreaves, 킹덤 브루넬(Brunel),새무엘 크롬튼 등이 각종 형태의 방적기계와 James Watt가 증기기관을 발명해 냄으로 각종 제철, 제강 산업과 석탄을 통한 제련 기술 등으로 산업혁명의 기반을 구축했습니다. 산업혁명은 이런 여러가지 요소들과 함께 이루어지게 된 것이지 어느날 갑자기 하늘에서 떠러진 것이 아닙니다.

한편 산업혁명의 영향에는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부분이 있습니다.

긍정적  부분은 그 이전의 정치-경제적 봉건체제를 무너뜨리고 근대적 산업사회를 이루게 된 것 입니다. 종래의 지주계급은 무너지기 시작하고 신흥 산업 브르조아지가 탄생하게 되었습니다. 농노사회는 사라지고 새로운 도시 임금 근로자 계층이 나타났습니다. 더 나아가 이와같은 경제구도의 변화는 귀족들과 지주들의 지배 계급을 무너뜨리고 신흥 브르조아지인 중산층 노동자 계급을 통하여 민주사회를 향한 교두보를 구축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마침내는 보편적 선거제도를 통한 시민 혁명의 불을 지피게 되었습니다. 산업혁명은 단순한 기술의 발전이 아니라 시민의식을 넓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한편 산업혁명은 어두운 측면도 만들어 냈습니다. 기술의 혁신과 공업화는 인간과 사회를 비인간화시켰 습니다. 도시화와 거기에 따른 여러가지 부작용들이 나타났 습니다. 환경 오염, 인권의 탄압, 장시간의 노동(산업혁명 초기에는 최저 노농 시간을 하루 12 시간으로 했다), 임금의 착취, 여성과 아동의 노예화(어린이는 하루 12시간 이상 일을 시킬수 없다는 법), 성적 착취, 전염병 등 세상을 참 비참하게 만들었습니다. (이 시대 영국은 이런 도시화와 산업화에 따른 실업자의 급증과 사회 범죄의 증가를 새로운 식민지 개척으로 연계시켰으나 결국은 칼 마르크스를 중심한 공산주의와 사회주의 운동을 불러오게 되었습니다.)

18세기 유럽에서 일어난 두번째 혁명은 시민혁명입니다. 이는 초기 영국에서 일어난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 /Bloodless Revolution)과 프랑스 혁명(French Revolution)은 물론이고 이후 미국의 식민지 독립운동에 이르는 일체의 절대왕정 체제를 무너뜨리고 민주적 시민사회를 세워나간 정치적 민주-인권운동을 통칭하여 부르는 말 입니다.

잉글랜드에서 ‘왕은 존재하기는 하지만 다스리지는 못한다’라는 선언은 의회의 승인이 없이는 절대 왕권이라 해도 아무 일도 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특히 불란서 혁명은 세금과 착취와 물가와 높은 신분제도 속에서 드디어 ‘못 살겠다 갈아보자’고 하면서 ‘앙시 앵 레짐’(Ancien Regime), 즉 왕권신수설에 기초했던 절대 왕정 지배 체제를 무너뜨리고 루이 14세와 16세 및 마리 앙뚜안넷을 단두대 위에서 처형했습니다.

시민들은 바스티유 감옥과 베르사유 궁전을 무너뜨리고 1789년 8월 26일 마침내 ‘프랑스 인권선언’을 만들었습니다. ‘자유 평등 박애’를 기초로 한 이 선언은  생존권, 저항권, 소유권, 평등권, 투표권이 인간의 보편적 권리임을 확실하게 했습니다. 인류 역사에서 처음으로 피지배자들이 유혈 혁명을 통하여 독립과 자유를 쟁취해 냈습니다. (18세기 계몽주의는 흔히 기독교 근본주의자들이 주장하는 것 처럼 신본주의에 대한 대칭 개념으로써 이성주의에서 출발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천부적 권리를 회복하자는 운동에서 시작된 것 입니다.)

계몽주의는 인간의 일상적이고 실제적인 삶의 문제, 개인 한 사람 한 사람이 지닌 천부적 인권과 자유,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는 인간 평등의 신념을 이성적으로 깨우쳐 준 근대 인문학이 세운  쾌거 입니다.

9. 세번째는 20세기 이후의 인문학입니다. 여기에서는 두번에 걸친 세계 대전을 거쳐오면서 집단과 전체에 함몰되어온 ‘신뢰 할 수 없는’ 인간 이성에 대한 반동이 나타납니다.

18세기 이후 최고조에 이르렀던 인간 이성에 대한 신뢰가 모두 무너졌습니다.인간은 더 이상 이성적 존재라고 말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비인간화(Dehumanization) 되어버린 상황에서 그야말로 이제는 사람다운 사람이란 무엇인지를 다시 질문하게 되었 습니다.

‘처음에는 신이 인간을 속였다. 그 다음은 물질이 인간을 속였다. 그런데 이제는 인간이 인간을 속였다’는 슬픈 사실을 자각하게 되었 습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니체와 쇼펜하우어를 거쳐 키엘케골, 하이덱거, 야스퍼스 등의 실존주의자들과 수 많은 현대 철학자들은 그래서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질문하게 되었습니다.

개인과 주체를 새롭게 보기 시작한 이 시대의 인문학은 ‘인간주의 인문학’으로 얼굴을 드러냅니다. 이를 우리는 Humanistic Humanism이라고 부릅니다. 싸르트르, 까뮤, 하버마스, 글리크, 리프킨, 릿쩌, 푸코, 촘스키, 싱어 등등 많은 현대의 지성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 입니다.

‘인간은 노예다. 인간에게는 참된 자유가 없다. 인간은 모두가 이기적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 인간은 물질의 종이고 권력의 노예다.’ 이것이 우리 <시드니 인문학 교실>이 함께 고민하면서 풀어가야 할 숙제 입니다.

  1. 맺는 말 입니다.

서구 인문학의 세 가지 큰 흐름을 살펴보았습니다.

  • 르네쌍스 인문주의에서 출발하여 (2) 계몽주의 인본주의를 거쳐서 (3) 마침내는 20세기 인간주의로 이행, 발전, 변화되어 온 과정을 말씀드렸습니다.

핵심을 거듭 강조 합니다.

서구에서의 인문학은 그 앞에 어떤 형용사나 접두사를 붙인다 하더라도 ‘인간이란 무엇인가?’가 주제 입니다. <사람공부>가 서구인문학의 목표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공부가 어려운 이유는 ‘인간이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소포클레스Sophocles(B.C.497-406)는 그의 비극적 희곡 안티고네(Antigone)에서 말합니다. ‘세상에는 이상한 것이 참으로 많지만 그 중에서도 제일 이상한 것이 사람이다’

인간 스스로 인간을 알려는 탐구는 수천년 전 부터 시작되었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숙제로 남아 있습니다. 소포클레스가 말한 그 ‘이상한’에는 풀어야 할 많은 의문들이 들어 있습니다. ‘이상한’은 낮선, 일반적이지 않은, 종잡기 어려운, 판단하기 어려운, 신비한, 등 여러가지 뜻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람공부>! 정말 어려운 작업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인간을 알기 위해서 인간들이 남겨놓은 인간의 생각, 말, 글, 그림, 노래, 동작 등 모든 흔적과 자취를 공부하는 각론에 들어서게 됩니다. 어서 우리 <시드니 인문학 교실>에도 이런 다양한 분야에서의 발제자들이 준비되기를 기대 합니다.

             Comments & Question

             Sharing Time : – 고양이 목에 방울달기 – 일부 기독교 신학자들과 목사들 중에는 인본주의와 신본주의를 대립개념으로 이해하고 가르치는 이들이 있습니다. 사실 엄밀한 의미에서 인본주의의 반대개념은 물질주의이고 신본주의의 반대개념 역시 물질주의입니다.

신본주의자들이나 인본주의자들은 서로 싸울 것이 아니라 힘을 합하여 물질주의, 세속주의, 자본주의, 자유주의 시장경제주의자들과 대결해야 한다고 봅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적을 잘못 선택하고나니 잘못된 길로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는 어떻게 이 인간을 인간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와 – 그 핵심은 물질 지상주의에 의한 인간성의 상실 혹은 비인간화와 이에 따른 인간 사회의 극단적 양극화 현상 입니다 – 우리 인간성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이기주의적이고 탐욕적인 이기적 유전자를 극복해 내고 진정 자유와 평등, 사랑과 기쁨이 넘치는 ‘사람사는 세상’을 만들어 갈 수 있을까요?

인간은 인간답게, 신은 신답게

홍길복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 – 5

제 2강 – 2 : 무엇을 ? (What ?) – 전환의 시대

6. 서구 인문주의의 역사적 흐름은 고대 그리스에서 자연철학의 시대를 넘어 소피스트들과 소크라테스 시대로 부터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 후 여러가지 인문주의 사조들이 있어왔지만 , 이제 우리는 르네쌍스 시대의 인문학, 계몽주의 시대의 인문학, 그리고 20세기의 인문학의 내용과 성격을 간단히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7. 첫째는 15, 16세기에 시작된 인문학으로 르네쌍스 휴매니즘(Renaissance Humanism)입니다. 우리는 이를 ‘인문주의 인문학(人文主義 人文學)’이라고 부릅니다.

인문주의 인문학은 중세 스콜라철학에 대한 반동입니다. Thomas Aquinas에 이르러 절정에 오른 Scholar 철학은 모든 학문을 눈에 보이지 않는 형이상학적 신(形而上學的 神)에다 집중 시켰습니다. 그야말로 신학이 모든 학문의 여왕이었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형이상학적 하나님은 얼마든지 이성적, 논리적으로 그 존재와 활동이 증명 가능하다고 주장했습니다.(여기에는 현재도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 신학 사이에 논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여튼 중세 천년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알수도 없는 신을 중심 삼아 왔는데 르네쌍스 인문주의는 모든 학문의 촛점을 이 형이상학적 신으로 부터 눈에 보이는 현실적 인간 세상으로 바꾸었습니다. 눈 앞에서 변하는 이 세상, 과학, 문화, 예술, 정치, 경제 등 실제적 인간 삶의 현실에 관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따라 르네쌍스 인문주의에서는 고전어, 문학, 역사를 비롯하여 법과 정치, 수학과 물리학, 천문학과 지구과학 등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게 진행되었습니다. 이제는 ‘수학이 학문의 여왕’이 되었습니다. 르네쌍스 휴매니즘에서는‘인간은 인간답게 생각하고 그저 인간답게 말하고 인간답게 행동해야한다’는 원칙이 강조되었습니다. 꾸미거나 숨기거나 위선적이 되어서는 않된다는 겁니다. ‘인간은 인간답게 그리고 신은 신답게’(Francesco Petrarch 1307-1374나 Lorenzo Villa 1407-1457는 인문학의 이상으로 인간은 인간의 본성에 따라 자연스럽게 생각하고 제대로 말하고 떳떳하게 행동해야한다고 주장함으로 데카메론이나 나체화 등이 출현하게 됩니다.)가 이 때의 구호였습니다.

르네쌍스 인문주의는 이후  ‘18세기 啓蒙主義 人本主義’의 기초가 됩니다. 이는 새로운 전환입니다. ‘신으로 부터 인간으로’, ‘맹신적 신앙에서 합리적 이성으로’, ’무지에서 깨달음으로’, ‘억압에서 자유로 ’코페루니쿠스 Copernicus 적 전환이 이루어졌습니다.

이때 사람이 사람답게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기 위해서 제일 먼저 시작한 일이 중세 천년을 지내는 동안 잃어버렸던 그리스의 고전을 다시 찾아내는 일이었습니다. 라틴어와 헬라어를 중심한 고전어를 다시 배우고 공부하고 해석하는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16세기 유럽에는 인문계 고등학교가 250개를 넘었습니다. 데카르트 자신도 Jesuit에서 세운 ‘라 폴레쉬’에서 그리스어, 라틴어, 문법, 수사학,  철학을 공부했습니다. ( 이 전통이 이어져서 오늘날도 영국, 독일, 프랑스, 미국, 호주 등에서는 고등학교 과목에 Greek과 Latin어 같은 고전어를 개설하고 있는데 이는 단순히 고전어 하나를 더 배운다는 뜻만 있는 것이 아니라 인문학적 개혁정신의 기본을 이어가자는데 있습니다.)

이리하여 르네쌍스 인문주의자들은 헤로도토스와 호메로스, 헤시오도스와 호라티우스, 아이소포스와 피타고라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고전을 재발견해 내고 이를 다시 읽고 해석하기 시작했습니다.

언어에 이어 논리학과 수사학도 다시 살아났습니다. 논리학과 수사학은 이론과 합리성과 상식의 터전 위에서 표현하고 설득하는 기술입니다. 사람을 가장 오래, 그리고 가장 깊게 감동 시키는 것은 감정을 움직이는 설교나 기도가 아니라 이성을 통한 설득이라고 보았습니다.

‘마음을 흥분시키지마라 머리로 이해하게 하여라!’ 사실 언어와 논리는 단순한 지식의 확대 뿐만이 아니라 인간의 지성과 품성을 넓히는 일을 합니다.

언어란 단순히 의사 소통의 도구 만이 아니라 사물의 실체와 본질을 탐구하는 인식의 수단이고 보다 더 넓은 세상을 알게해 주는 통로입니다. 우리는 언어를 통하여 다른 세상을 보게 됩니다.

다른 글과 말을 통하여 다른 나라와 다른 사람과 다른 문화, 역사, 전통, 풍습을 알고 이해의 폭을 넓히게 됩니다.  동시에 르네쌍스 인문주의에서 반드시 지적해야 할 사항 중 하나는 이때부터 드디어 모든 학문하는 방법론이 철저하게 과학적 터전 위에 세워지게 되었다는 점 입니다. 이는 15세기 중반 인쇄술의 발명과 그 후 이어진 물리학에서의 천체이론에 대한 새로운 학설들 –천동설이 아닌 지동설, 만유인력의 법칙 등과 신대륙의 발견, 새로운 화학무기의 발명 등이 일체의 인문-사회과학에 대해서도 귀납적 방법론을 요구하게 된 것 입니다. 우리가 이 시기의 정신 사조를 통칭하여 ‘르네쌍스 인문주의’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 때부터 드디어 인간이 우주와 역사의 중심에 놓여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ㅋ’와 ‘이 순간’

노부모님과 장인 어른, 누님 내외와 동생 내외 그리고 아들과 며느리, 딸과 예비 사위, 조카들과 함께 한 거한 생일상을 물린 후, 서울에 있는 큰처남에게서 축하 문자를 받았다.

내게 형제가 없어서인지, 처남 매형 사이라기보다는 동생 같은 큰처남은 늘 밝아서 좋다. 이따금 던지는 그의 농담은 유쾌하다. 오늘 그가 보낸 문자 역시 그렇다.

‘다시 한번 생신 축하드리고 항상 건강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정말 세상에 잘 오셨어요. ㅋ’

마지막 ‘ㅋ’가 없었다면 정말 딱딱하고 뜬금없을 수도 있는 문자였다. 마지막 그 ‘ㅋ’ 하나가 재미와 흥을 돋운다.

‘세상에 잘 왔다’는 말은 듣기에 썩 좋기도 한 말이지만, 동시에 듣기에 참 부끄러운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ㅋ’ 하나로 그저 내가 사는 재미를 일깨워준다.

‘ㅋ’를 읽는 내 관점이다.

큰처남이 문자 ‘ㅋ’로 떠올린 피천득의 시 ‘이 순간’이다.


이 순간

  • 피천득

이 순간 내가/ 별들을 쳐다본다는 것은/ 그 얼마나 화려한 사실인가

오래지 않아/ 내 귀가 흙이 된다 하더라도/ 이 순간 내가 제 9교향곡을 듣는다는 것은/ 그 얼마나 찬란한 사실인가

그들이 나를 잊고/ 내 기억 속에서 그들이 없어진다 하더라도/ 이 순간 내가 친구들과 웃고 이야기 한다는 것은/ 그 얼마나 즐거운 사실인가

두뇌가 기능을 멈추고/ 내 손이 썩어가는 때가 오더라도/ 이 순간 내가 마음 내키는 대로 글을 쓰고 있다는 것은/ 허무도 어찌하지 못한 사실이다.

사람 공부

홍길복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 – 4

제 2강 -1 : 무엇을 ? (What ?) /  인문학의 정의와 역사적 흐름에 대해

1. 어떤 개념 (Concept, Name, Title, Term)을 정의(Definition)하는 것은 왜 중요할까요? 모든 개념에 대한 정의 속에는 그것의 본질과 지향점들이 이미 내포되기 때문입니다. ( 정치란? 경제란? 설교란? 정의란? 시와 시인이란? 교수란? 집사람이란? 결혼이란? 이런 개념에 대한 개인적 정의는 그의 생각과 사상을 나타내게 됩니다.)

2. 한자로 인문학(人文學)이란 ‘사람 人’자에‘글 文’자에 ‘배울 學’자를 씁니다. 사람 혹은 사람들이 남겨놓은 글과 말, 소리와 그림, 춤과 행위(말, 글, 그림, 낙서, 음악, 시, 춤, 몸짓 등)를 포함한 일체의 인간적 발자취와 흔적, 무늬와 자국들을 추적하고 살펴보고 되새기며 그 의미를 추적하고 그것들을 체계화하여 개인과 인류 공동체에 적용해서 보다 더 나은 상태로 발전시켜 보려는 시도와 노력과 연구를 총칭하여‘인문학’이라합니다.

그러므로 인문학의 출발점은‘사람’이고 인문학 연구의 내용도 ‘사람’이며 그 최종적 지향점도‘사람’입니다. 인문학은 ‘사람에 의한’, ‘사람에 대한’. ‘사람을 위한’ 학문입니다.(By the people, of the people, for the people)

3. 인문학은 ‘신학(神學)’이나 ‘천문학(天文學)’과는 구별됩니다. 신학은 ‘귀신 神’자에다 ‘배울 學’을 씁니다. 귀신을 공부하는 것이 신학 입니다. 그러나 신(神)은 배워서 알수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는 입장이 크기에 神과 學을 연결하는 것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습니다. 신학은 나타나 있지 않고 숨겨진 비밀스런 것들과 감히 접근 할 수 없는 신비스런 것들을 ‘신앙’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천문학은 ‘하늘 天’자에다 ‘글 文’자를 씁니다. 하늘, 해, 달, 별, 바람, 구름, 비, 천둥, 번개, 안개 등 모든 자연계를 관찰하여 그것들의 이치와 원인, 배후와 원리, 현상과 법칙을 찿아내어 체계화하고 거기에서 어떤 보편적인 원칙을 발견하여 지금과 내일, 개인과 인류 공동체를 보다 더 나은 상태 – 안심, 평안, 행복, 만족 –로 만들어 보겠다는 시도요, 연구요, 노력입니다.

인문학은 ‘지리학(地理學)’과도 구별됩니다. ‘따 地’자에다 ‘다스릴 理’자를 쓰는 지리학은 일차적으로는 사람이 살아가는 이 땅 – 산과 바다, 나무와 숲, 강과 평야, 지하와 지상-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인문학은 땅에서 일어나는 개인과 가정, 사회와 국가, 인류와 공동체 등 각종 조직이 남겨놓았거나 보여주고 있는 다양한 현상들을 살펴보고 분석하고 체계화하여 그 속에 있는 어떤 보편성있는 원리나 이론적 체계를 수립하여 개인과 인간 사회를 보다 더 의미있고 행복한 상태로 발전시켜 보려고합니다.

구체적으로 인문학은 인간을 중심하여 인간들이 생각하고 살아가면서 만들고 남겨둔 것들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여기서 취급하는 주요 대상들은 다음과 같은 6개 분야 입니다.

(1) 언어학 –초기에는라틴어와 헬라어를 포함하는 고전어가 중심이었고 요즘은 현대의 언어철학도 포함된다.

(2) 미학 – 음악, 미술, 춤, 연극, 영화, 드라마 등 공연예술을 포함한 일체의 예술 분야.

(3) 문학 – 시, 소설, 수필, 희극, 비극 등 모든 문학작품.

(4) 역사학.  (5) 종교학(신학 포함).  (6) 철학.

4. 그러므로 인문학에서는‘人’ 곧 사람이 ‘文’이요 ‘글’이라고 봅니다.

人이 文이고 文이 곧 人입니다. 여기에서는 목적과 방법, 대상과 주체를 구별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연구하는 사람과, 동시에 그 연구의 대상이 되는 사람을 동일화 합니다. 프로타고라스가 인간을 만물의 척도 – Man is the Measure of All Things.– 로 보고 이어서 소크라테스가 철학의 중심 과제를 자연에서 인간으로 설정하여 ‘너 자신을 알라’고 하면서 하늘을 향했던 손가락을 인간에게로 방향을 돌린 것이 바로 인문학의 출발점이 됩니다.

5.서양 철학에서 ‘인문학’이란 라틴어의 Studia Humanitatis 를 직역한 것입니다. 영어로는 Study of Humanities 입니다. 어색한 말이긴 하지만 ‘휴매니즘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서양 철학사에서는 이 휴매니즘학, Humanitatis의 개념을 아주  다양하게 이해하고 해석해 왔습니다. 세분화하면 르네쌍스 휴매니즘, 계몽주의 휴매니즘, 인간주의 휴매니즘을 비롯하여 마르크스주의 휴매니즘, 실존주의 휴매니즘, 기독교 휴매니즘, 세속주의 휴매니즘 등등이 있습니다.

인문학이란 대단히 넓은 외연을 가진 개념입니다. 시대에 따라 강조점이 다르고 여러가지 형용사를 붙일수 있기 때문입니다. 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인문학에는 분명한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간을 중심한 인간의 발자취, 인간의 흔적, 인간의 모습을 추적해 가는 인간학이라는 점입니다.

인문학은 인간학입니다. 신학은‘신’을 공부하고 자연과학은 자연을 연구의 대상으로 삼고 사회학은 사회를 탐구하고 인문학은‘인간’을 연구합니다. 인문학은 그 지향점이 인간 입니다. 예컨데 신학은 인간을 연구하면서도 신을 위해서 인간을 연구하는데 인문학은 신을 공부하면서도 인간을 위해서 신을 공부합니다.

원추(鵷鶵)와 올빼미

장자(莊子) 외편(外編)인 추수편(秋水篇) 열 네번 째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혜자(혜시惠施)가 양나라 재상으로 있을 때, 장자가 그를 만나고자 했다. 그 때에 어떤 자가 혜자에게 말했다.

“장자가 지금 오는 것은, 당신을 대신해서 재상이 되고자 함입니다”

이 말에 혜자는 두려워서, 장자를 찾으려고 나라 안을 사흘 밤낮으로 수색했다. 그러자 장자가 이를 알고 스스로 나타나서, 혜자에게 말했다.

“남쪽에 사는 원추(鵷鶵)라는 새가 있는데, 자네는 알고 있는가? 그 원추라는 새는, 남해를 출발하여 북해로 날아 가지만, 오동나무가 아니면 머무르지 않고, 귀한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으며, 단맛이 나는 샘물이 아니면 마시지 않네.   그런데 썩은 쥐를 얻은 올빼미가 원추가 지나가자 제가 물고 있는 썩은 쥐를 빼앗으려는 줄 알고, 올려다 보면서 꽥 하고 호통을 쳤다네. 지금 자네는 양나라의 재상자리 때문에 나에게 꽥 하고 소리를 치겠다는 건가!”

혜시와 장자, 두 사람의 됨됨이와 크기 나아가 두 사람이 자신의 삶을 어떻게 바라보고 있느냐의 차이를 잘 드러내고 있는 유명한 일화입니다. 아마 장자는 그 자리를 뜨면서 호탕한 웃음 한자락 날렸을 것입니다.

또한 장자(莊子) 내편(內編)인 제물론편(齊物論篇) 아홉번 째 이야기에서 장자는 “方生方死(방생방사) 方死方生(방사방생)”이라는 말로 모든 삶과 사물에는 서로 상대성을 지닌다고 설파합니다.

“方生方死(방생방사) 方死方生(방사방생)” – 곧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으면 삶이 있다는 말입니다.

삶의 참 뜻을 먼저 깨우친 옛 선생이 후대에게 남겨 놓은 말씀들입니다.

여러 해 전에 마지막 길을 떠나시기 전에 이런 말을 남기고 간 이가 있습니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삶의 참 뜻을 고뇌해 보지 못한 사람들에겐 아주 낯선 말 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 이가 비록 원추는 아닐지라도 썩은 쥐로 배를 채우는 삶은 결코 살지 않았음을 증명해주는마지막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엊저녁에 정말 깜도 안되는 놈, 그야말로 제 배때기 하나 채울 욕심만으로 썩은 쥐새끼 입에 물고 정치 사기꾼질에 여념없는 천하의 못된 박쥐같은 잡놈이 원추를 보고 짖었다는 뉴스를 보다가 떠올린 장자 이야기 한편입니다.

사람답게 살기 위하여

홍길복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 – 3

교실문을 여는 글 3 – 왜 인문학인가?

‘시드니 인문학 교실’이 지향하는 제 1차적 목표는 이렇게 요약해 볼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와 삶의 현장은 물질과 권력(정치권력, 자본권력, 종교권력)을 사람 보다 위에 두고 이것들을 더 가치있는 것으로 여기며 이를 추구하고 더 많이 획득하는 것에다 사람이 사는 최고의 목표를 두고 있는 시대라고 진단합니다.

한 마디로 이 시대의 인간은 비인간화되고 동물화 되어가고 도구화 되고 있습니다. 인간은 탐욕과 교만의 노예로 전락된지 오래되었습니다.

나에 대한 최대의 원수는 나 자신이고 인간에 대한 최대의 적은 인간 자신입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하면 너와 나를 포함한 우리 개인들과 우리 공동체가 보다 더 인간이 인간답게 되고 인간의 품격을 회복, 유지, 확장해 나갈수 있을까 고민하고 생각하고 토론하여 보다 더 선하고 아름다운 개인과 사회를 꿈꾸어 가고자 합니다.

우리는 이를 위하여 종교적 신앙에 의존하거나 반대로 사회 변혁적 방법들을 추구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읽고 듣고 쓰고 말하고 나눔으로 ‘개인적으로는 사람다운 사람이 되고자하고 공동체적으로는 사람다운 사람들이 어울려 살아가는 세상’을 이루어 보자는 하는 이상주의자들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조선 시대 성리학자 율곡(栗谷) 이이(李珥)는 ‘격몽요결’(擊蒙要訣)에서 선비가 학문을 하는 이유, 즉 지식인이 글을 읽고 쓰고 가르치는 목표는 ‘사람이 사람답게 되고 또 사람답게 살기 위함’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는 먼저 사람다운 사람이 되면 자연히 사람다운 삶도 살게 된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인문학의 일차적 목표는‘사람됨’에다 둡니다.

동양에서의 인문교육이란 곧 인성교육이라고 할 수 있고 이를 ‘전인’(全人 Whole man)교육으로 이해했습니다. 서양은 기술, 과학, 테크닉을 중심하여 합리성과 과학기술을 발전시켜왔지만 동양은 사람됨, 즉 인간의 품성을 중시해 왔습니다.

중국을 중심한 동북 아시아에서는 그의 신분과 직책이 무엇이든, 이를테면 왕이든 사대부이든, 상민이든 천민이든, 농부이든 상인이든 그의 하는 일과 직책이 어떠하든 간에 ‘적어도 사람이 사람답게 될려면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읽고, 외우고, 거기에 따라서 일체의 삶을 영위해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사서(四書)는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이고 삼경(三經)은 시경(詩經), 역경(書經, 易經<周易>)입니다.

대학의 핵심 개념은 ‘덕(徳)’입니다. 이‘덕’을 기초와 기본으로 삼아 논어는 그 위에다 ‘인(仁)’을 더하고 맹자는 ‘의(義)’를 가르치고 중용은 ‘예지(禮智)’를 보탭니다. 우리는 논어, 맹자, 중용이 가르치는 4가지 핵심 개념인 이 ‘인의예지(仁義禮智)’를 사덕(四德)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여기 이것들 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 하나가 추가 됩니다. 곧 ‘중용(中庸)입니다.

아무리 인의예지가 중요한 사덕이요, 모든 것의 기초요, 또 이를 잘 실천하는 사람이 된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그 어느 경우에도 자기만 옳고 자기만 바르고 최고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주장하고 그렇게 행동한다면 그는 아직도 덜된 사람이라고 보는 겁니다.

동양의 인문학에서 가장 중요한 키 워드(key word)는 중용입니다. ‘극단적으로 나가지 마라. 극단은 절대로 않된다. 극단을 피하라!’  중용이란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아니하며 정도(正道)를 걷는 것 입니다. 이 경우 정도(正道)란 ‘옳바른 길’이지 ‘가운데 길’이 아닙니다. 중용(中道)나 중립(中立)이 정도(正道)는 아닙니다.

중용은 흑과 백 사이에 있는 회색이 아니라 검은 검은 검다고 하고 흰 것은 희다고 분명하게 말하면서도 그 둘을 아우르는 포용성을 말 합니다.

동양 인문학의 핵심인 ‘중용’을 영어로는 Harmony and Balance로 번역 합니다. 포용성이란 관용, 너그러움, 똘레랑스(Tolerance)입니다. 동양의 인문학은 극단, 오직, Only, 영어에서 ‘나’ ‘I’는 아무리 문장의 중간에 와도 늘 대문자로 쓰는 것은 대단히 위험하고 그릇된 태도라고 봅니다.

나와 다른 것은 그냥 ‘다를 뿐’이지 ‘틀린 것’이 아닙니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갖거나 달리 말하거나 다른 스타일로 산다고해서 나만 옳고 그는 틀린 것으로 판단하는 것은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호주와 같이 180여 개나 되는 민족들이 함께 살아가야하는 ‘다문화 사회(Multi-cultural society)’ 에서는 특정한 민족이나 그들의 문화, 언어, 종교, 전통만 주장하는 것은 더불어 함께 살아가야 하는 Living Together 우리의 삶과 평화를 위태롭게 합니다.

과거 유대인들의 선민의식, 십자군 전쟁을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믿었던 중세 기독교, 근대 이후 서구 강대국의 식민지 정책을 등에 업고 선교라는 이름 아래 아프리카와 중남미를 비롯한 세계 도처에서 살인, 폭력, 수탈을 감행해 온 기독교 선교의 죄악사,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대동아 공영권, 수 백만명이나 죽음의 골짜기로 몰아넣은 게르만 민족의 우월의식을 비롯하여 지금도 이어지는 이슬람 과격주의자들, 오직 예수, 오직 믿음, 오직 교회만 외치는 기독교 근본주의자들과 민족적 배타주의, 비관용적 인생 태도, 비타협적 인간 관계 등은 인문주의 정신을 그 밑바탕에서 부터 흔들어놓는 것들 입니다.)

동양의 인문학은 사서삼경(四書三經)의 원리에 따라서 사람이 현실 속에서 사람답게 살아야 할 실천적 덕목을 네 가지로 요약해 줍니다.

첫째는 측은지심 (惻隱之心 Sympathy)입니다. 사람은 신분과 직업, 성별과 나이, 사상과 언어를 초월하여 자기 이외의 모든 사람을 포함하여 자연계와 동식물계 등 세상 삼라만상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고 일러 줍니다. 종교에서 말하는 자비심, 사랑, 희생, 공감하는 마음입니다.

둘째는 수오지심 (羞惡之心 Goodness)입니다. 자기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 친지, 이웃, 사회와 국가체제에 대해서 까지 잘못된 것이 드러나고 알게되었으면 이를 수치스럽게 여기고 그 그릇된 일을 바로잡기 위하여 싸워야한다는 교훈 입니다.

셋째는 겸양지심 (謙讓之心 Tolerance)입니다. 한 마디로 겸손과 양보 입니다. 겸손이란 그냥 공손하게 처신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 어떠한 모습의 사람이라 하더라도 타인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 입니다. 양보란 말이나 행동이나 일이나 물건에 있어서 일체 타인에게 먼저 선택권을 주고 나를 제일 뒤에 세우는 것입니다.

마지막 넷째는 시비지심 (是非之心 Justice)입니다. 이는 인간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에 대하여 옳고 그른 것을 가릴줄 아는 지혜입니다. 특히 사회적 불의에 대하여 침묵하는 것은 그 악에 동조하는 것 입니다.

예수도 ‘옳은 것은 옳다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강론이나 설교나 설법을 해야하는 자리에 있는 사람들, 한 시대의 지식인들과 지성인들, 교수들과 언론인들은 300여명도 더 되는 어린 학생들이 차거운 바다에서 떼죽음을 당하고서도 2년 반이 넘도록 그 원인은 무엇이고 누가 책임자이고 앞으로 다시는 이런 비극적인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무슨 대책을 세워야 할찌 말하지 않고 분노 할 줄을 모른다면 인문학적으로 볼 때 그는 인간이랄 수가 없습니다.

맺는 말입니다.

도대체 우리는 모여서 무엇을 위하여 듣고 읽고 말하고 나눌려고 하는가? 한 마디로 사람이 되려고 합니다. 사람다운 사람이 되려고 서로 서로 좀 돕고 도움을 받고 싶습니다.

좋은 이야기, 책, 영화, 음악, 그림, 연극, 드라마, 기타 무엇이든지 사람이 되는 데 유익하다고 생각되는 자료들을 소개해 주십시요.

그 다음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람답게 ‘살려고’ 합니다.

어려운 일인줄 뻔히 압니다. 알기는 해도 실천하는 것은 아마 숨을 거두기 까지 불가능 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래서 고민하고 괴로와하고 슬퍼라도하고 싶습니다.

그러다보면 희망의 빛이 비치리라고 기대하며 ‘행복했지만 괴로웠던 사나이’를 조금은 이해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제 생각을 함께 나누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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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란 절대로 없다

홍길복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 – 2

교실문을 여는 글 2 – 왜 인문학인가?

1.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일화 입니다.

그들은 말을 타고 앞으로 질주하다가도 가끔은 멈추어 서서 그 동안 달려온 길을 되돌아보곤 하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너무 빨리 달리면 우리 영혼이 우리를 따라올 수 없기 때문이라고 말 합니다. 육신을 말 위에 싣고 빨리 달리다보면 정신은 저 만치 뒤쳐진다는 생각이 있었던 겁니다. 몸만 너무 바쁘게 살아왔던 우리가 생각과 마음을 추수려 보자는 것이 우리의 목표 중 하나 입니다.

결국 우리가 지향하는 방향은 자아를 둘러보는 ‘자기 성찰’입니다.

명나라 문인 진유계(陳繼儒)의 글 입니다.

‘고요히 앉으니 평상시 내 마음이 얼마나 경박했는지 알겠구나. 입을 다물고 침묵을 지키니 지난 날 내 말이 얼마나 가벼웠는지 드러나는구나’

2. 혜능대사(慧能大師)가 법성사에서 한 말 입니다.

어느날 법당 밖에서 바람에 흔들리는 깃발을 보면서 두 스님이 논쟁을 벌렸습니다. 한 스님은 바람이 분다고 했고 다른 스님은 깃발이 움직인다고 했습니다. 한참 자기 주장이 옳다고 서로 말싸움을 하고 있는데 혜능이 끼어들었습니다. ‘그건 바람이 부는 것도 아니고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다. 오직 너희들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추구하려는 것은 생각이나 사물에 대한 자기 주장의 한계를 인식하고 ‘고집 내려 놓기’ ‘집착 내려 놓기’ ‘이것과 저것의 차이가 아닌 동질성 찾기’ 같은 것들에 있습니다.

3. 원효대사(元曉大師)가 당 나라로 유학을 가던 길에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날 여행 중 해가 져서 어두운 산중에서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한 밤 중에 너무 목이 말라 더둠거리다가 웬 바가지에 손이 닿아 그 안에 담긴 물을 마셨습니다. 아주 시원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눈을 떠 둘러보니 간 밤에 시원하게 마셨던 그 물이 어떤 사람의 해골 속에 담겨진 해골수 임을 알게 되어 토기가 일어났습니다.

그때 원효가 말했습니다. ‘물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로구나! 물은 그 물이 그 물인데 어찌하여 나는 꽥꽥거리는가?’

모든 착함과 악함, 아름다움과 추함, 일체의 진리와 비진리는 모두 다 이해의 넓이와 깊이, 그리고 관점, 상황, 입장에 따라 달라지는 겁니다. 칸트식으로 말 하면 ‘물 자체’ (Ding an sich /Thing itself)는 변하지 않습니다.

4. 황희 정승 이야기 입니다.

한번은 종들이 서로 다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한 종이 나아와 사정을 이야기하면서 상대방은 틀렸고 자기가 옳다고 말했습니다. 이야기를 듣고난 황희는 ‘네 말이 맞다’ 라고 맞장구를 쳤습니다. 얼마 후에 상대방 종이 또 정승을 찾아와서 오전에 나리를 찾아왔던 종은 거짓말을 한 것이라고 하소연을 했습니다. 설명을 다 듣고난 황희는 ‘듣고보니 네 말도 옳구나’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종일 곁에서 이 모습을 지켜 본 조카가 못마땅해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저씨 아저씨는 흐리멍텅합니다. 제가 들으니 아침에 와서 말한 종 아이 말이 맞습니다’ 그러자 황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 그렇구나 네 말을 듣고 보니 네 말도 맞구나’ 세상은 모두 다 일리로 만들어져 있습니다.

절대란 절대로 없습니다.

5. 1920년 대 막스 프랑크 연구소에서는 물리학에서 매우 중요한 빛에 대한 연구 중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광학 연구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동일한 실험실에서, 동일한 시간, 동일한 조건을 갖추고, 같은 연구자가 실험을 하는데도 빛이 어떤 경우에는 작은 알갱이, 즉 입자(cubic)로 나타나는가 하면, 또 어떤 경우에는 파동(waves)으로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빛은 입자다 ! 아니다 빛은 파동이다!’하는 두 가지 가설이 서로 충돌하고 큰 이론적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이 때 만들어진 이론이 그 유명한 ‘불확정설’(The Theory of Uncertainty /The Uncertainty Principle) 입니다. ‘빛은 입자이기도 하지만 또 파동일수도 있다. 꼭 한가지로만 나타나지는 않는다’는 이론 입니다.

아인슈타인의 영향을 받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Werner Heisenberg)가 세운 이 이론은 이후 자연과학 뿐만이 아니라 철학, 신학, 사회학, 정치학, 경제학 등 일체의 형이상학과 형이하학 전반에 걸쳐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수학이나 물리학 같은 자연과학도 정답이 하나로 나타나지 않는데 어찌하여 신학과 철학, 인문학과 사회학, 문화와 예술 같은 인문학이 한 가지 질문이나 하나의 개념에 대하여 오직 한개의 대답이나 결론만 있을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하나의 질문에는 하나의 답만 있는게 아니다’ 이것이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의 생각 입니다.

6. 점묘법 (點描法) – 점 하나 하나씩을 찍어서 커다란 형태를 이루는 미술 기법을 생각해 봅니다.

호주 원주민들의 그림입니다. 작은 점을 하나씩 하나씩 찍다 보니까 어느새 큰 그림이 됩니다. 우리가 하루 하루를 산다는 것은 점을 하나씩 하나씩 찍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하루 하루 점을 찍어가다보니 일생이 되는 겁니다. 또 우리 여럿이서 제각기 점을 하나씩 찍다보니 그것이 우리 사회가 되고 역사가 됩니다.

하나가 여럿이고 여럿이 하나 입니다.

7. 모자이크(Mosaic)도 마찬가지 입니다.

조각들이 모여서 전체를 이룹니다. 제 아무리 많이 배우고 많이 갖고 많이 누리는 것 처럼 보여도 인간과 인간이 하는 일이란 모두 모자이크의 작은 조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인문학은 서로 협력하여 전체를 이루고 함께 모여서 보다 넓은 세상을 만들어 가려고 합니다. 작은 사람들이라 하여 기죽을 필요 없고 큰 사람들이라 하여 잘난 척 해서는 않된다는 것을 가르치려는 것이 인문학의 목표 입니다.

8. 실학의 거두, 다산은 정조가 죽은 다음 해, 1801년 전남 강진으로 유배를 떠나 강진 읍내의 한 허름한 주막집 뒤간방에서 처음 4년을 보냈습니다. 그 후 그 곳을 떠나 지금의 ‘다산초당’ (茶山草堂)으로 옮겼는데 그 때 다산은 4년 동안이나 이 폐족당한 선비를 돌보아 주었던 주모와 그의 딸을 위해 그 오두막에 당호(堂號)를 지어주었습니다.

그것이 유명한 ‘사의제’ (四宜齊) 입니다. ‘이 집은 사람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네가지를 익히는 곳’이라는 뜻입니다.

<첫째, 늘 생각은 맑고 바르게 하거라. 둘째, 말은 반드시 생각한 다음에 하고 또한 적게하여라. 셋째, 모든 행동은 무겁고 신중하게 해야한다. 넷째, 용모와 의관은 항상 누가 보던 않보던 단정하게 해야한다>

이는 물론 유배 중 자신의 몸과 마음을 스스로 추수리려던 자아성찰의 인문학적 자세이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시골의 한 주막집 주모에게 조차도 당호를 지어줌으로 사람을 결코 가벼이 대하지 아니하는 ‘牧民心書’의 태도요, 사람을 낮추어보지 아니하고 대등하게 대하는 인격입니다.

인문학의 목표는 너와 나, 사람과 자연, 하느님과 사람, 어린이와 어른, 여자와 남자, 가진자와 못가진자, having group 과 have nothing group, 정상인과 비정상인, 내국인과 외국인, 원주민과 이민자, 먼저 온 이민자와 후발 이민자, 일체의 모든 甲과 乙 사이에 그려진 빗금(슬레쉬 /)을 철폐하려는 데 있습니다.

인문학은 사회적 약자의 편에 섭니다.

결국 우리는 모여서 무엇을 하자는 것인가?

이상동몽(異床同夢)

<홍길복 목사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에 수강 신청을 하며….

해마다 이월은 내 생각을 좀 넓히는 때이다. 뭐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다. 그만큼 좀 한가하다는 말이다. 이맘 때면 춥고 눈도 많이 오곤 해서 내 가게가 좀 한가하다. 일요일 말고도 하루 이틀은 눈 때문에 가게 문을 닫고 쉬기도 하거니와 가게 영업시간을 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돈은 좀 덜 들어온다. 허나 시간은 좀 풍부해진다. 그러다보니 평소에 생각지 아니했거나 못했던 것들이 보이게 되어 생각의 폭과 깊이가 넓고 깊어지는 나름 내가 좋아하는 이월이다. 그러나 이어지는 삼월 초이면 언제나 내 지갑은 가난하다. 삼월 초 내 생일을 해마다 늘 그렇게 맞는다.

그런데 올해는 좀 다르다. 눈도 전혀 오지 않았고 날씨도 추워 본 적이 없다. 가게는 내가 많은 짬낼 틈없이 바빳다.

이 달초에 호주에 계시는 홍길복목사님께서 이메일 편지를 보내주셨는데, 그 편지를 소화해 내는 것만으로도 이미 내 생각의 용량을 초과하는 것이어서 생각과 돈 모두 풍족하게 삼월 내 생일을 맞게 되었다.

이달 초에 홍목사님께서 보내주신 편지 내용이다.

참 오랜만 입니다. 그동안 어찌 지내셨습니까? 안부를 묻는 일조차 쉽지 않은 세상에서 그래도 벌써 해가 바뀐지 한달이 지났습니다. 한가닥 작은 희망에 대한 희망 조차도 사라져 가는 땅 입니다. – 중략 – 시드니에서 작은 ‘인문학 교실’을 열었습니다. 한 달에 두번 모입니다. 첫번 모임에 그래도 마음을 함께하는 친구들 한 30여명이 모였습니다. – 중략 –  옷은 새 것이 좋지만 사람은 옛 사람이 좋네요.

그랬다. 홍목사님과 헤어져 그는 호주로 나는 미국으로,  함께 했던 한국이라는 삶의 자리를 바꾸었던 시절에 그는 30대였고 나는 20대였다.

이제 그이는 70대 중반의 은퇴목사이고, 나는 은퇴를 바라보는 60대 중반이 되었다. 그래, 우린 서로 옛사람이었다. 다만  거기에 수식어 하나를 얹는다. <변하지 않은…>이라고.

‘각자 삶의 자리는 다르지만 이 교실을 통하여 이상동몽(異床同夢)하는 <인문학 친구들> 입니다. <異床同夢>! 이 얼마나 멋진 말 입니까? 잠은 각기 다른 데서 자지만 꿈 만은 같이 꾸기를 소망합니다.’

그 이가 첨부파일로 덧붙인 <시드니 인문학 교실> 강의록에 적어놓은 말이다.

나는 홍목사님의 허락을 받고, 그 이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 강의록을 이 곳에 올린다. 더하여 내가 참 사랑하고 존경하는 필라 인근의 친구들과 함께 한 달에 두번씩 이 강의록을 참조하면서 인문학 공부를 쫓아가려 한다.

자! <홍길복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로  ‘들어가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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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껏 살며 딱 두 교회에 적을 올렸다. 한국의 신촌 대현교회 – 그 곳에서 만났던 많은 친구들은 내 삶을 지배했다. 홍목사님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내 아내 역시. 수 년전에 아내와 딸과 함께 그 곳을 찾았었다. 그리고 이민와서 한 곳…. 나 역시 옛이 그립다.>


홍길복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 – 1

 교실문을 여는 글 1 – 왜 인문학인가? 

일찌기 다산 정약용은 강진으로 유배를 떠나기 전 한양에 있을 때 몇몇 친구들과 계(契) 모임 하나를 만들었습니다. 이름하여 ‘죽란시사’(竹欄詩社)라 했습니다. 한 시대를 살아가며 세상을 걱정하며 자아를 성찰하는 선비들이 모여 생각과 마음을 나누는 일종의 풍류계(風流係)였습니다.

우리도 지금 ‘시드니 인문학 계’를 통하여 인생의 시름과 아픔은 서로 위로하고 시대와 인간을 피차 보듬어 주면서 이 절망의 땅에서도 함께 희망의 무지개를 바라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같이 먹고 자면서도 꿈과 생각은 서로 다른 동상이몽(同床異夢)가들이 아니라, 각자 삶의 자리는 다르지만 이 교실을 통하여 이상동몽(異床同夢)하는 <인문학 친구들> 입니다. <異床同夢>! 이 얼마나 멋진 말 입니까? 잠은 각기 다른 데서 자지만 꿈 만은 같이 꾸기를 소망 합니다.

지난 12월 이 모임을 준비하던 이들은 ‘시드니 인문학 교실’의 목적과 기대를 다음과 같은 말로 다듬어서 표현했습니다.

(1) 동양과 서양에서 이어온 인문학의 전통과 역사, 목적과 내용, 방법론과 한계를 함께 공부해보자. – 클라스의 진행은 주로 준비된 강연, 토의, 책읽기와 나눔 등이 될 것이다.

(2) 이를 통하여 인문학적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고 개인적 사고의 깊이를 심화 시키고 또 그 틀을 좀 더 넓혀 나가자. – 우리는 종교단체들 처럼 무엇을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각하고 의심하고 고민하고 진솔하게 마주침으로’ 더 바른 삶이란 무엇인지를 추구해 나가려고 한다.

(3) 이런 사유의 깊이는 인문학 교실에 참여하는 친구들 개개인의 삶에 의미와 보람을 갖게 해 줄 것으로 기대한다.

(4) 더 나아가 우리는 이 교실을 통하여 우리가 더불어 살아가는 이 세상으로 하여금 보다 정의롭고 사랑과 평화가 넘실거리는 사회가 되기를 기대한다.

약간은 논리적으로 서술된 이런 <시드니 인문학 교실의 목적>을 저는 다음과 같은 몇 가지 이야기들을 통하여 좀 유연하게 풀어보겠습니다.

 

갈등(葛藤) 또는 포등(葡藤)

한때 뒷뜰 등나무와 포도나무는 내 집 자랑거리였다. 등나무는 deck의 지붕이었고 포도나무는 울타리였다. 특히 아버님이 좋아하셔서 내 집에 오실 때면 늘 뒷뜰 등나무 그늘에 나가 계시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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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나무 아래 내 아버님의 한 때 

봄이면 등나무 꽃과 이어피는 라이락 꽃에 취했었고, 여름이면 등나무 그늘 아래서 잔치를 벌리곤 했었다. 포도가 영글 즈음 등나무 그늘 아래서  쏘로우나 휘트먼을 읽는 호사는 분에 넘치는 것이었다. 겨울이면 deck 위에 쌓인 눈을 치우며 마치 죽은듯이 앙상히 마른 등나무를 걱정하곤 했었다. 어느 해 봄이던가 등꽃이 주렁주렁 달린 뒷뜰 deck에 현판을 걸었었다.

“은혜원(恩惠園)” – 뒷뜰을 바라보거나 그 곳에 나가 앉아있을라치면 내가 느꼈던 감정을 드러낸 작명이었다. 현판 글씨는 아버님께서 써 주셨다. 그 등나무 그늘 아래서 초, 중, 고, 대학을 마친 내 아이들이, 이젠 아버님처럼 이따금 들르는 곳이 되었다.

몇 해전이던가? 거동이 불편해지신 아버님께서 내 집을 찾으시는 일도 아주 드물어지고, 아이들도 더는 자기 집이 아니게 될 무렵부터 나 역시 뒤뜰에 나갈 일이 부쩍 줄기 시작하였다.

등나무 줄기와 포도나무 줄기가 엉겨 라일락 나무를 휘감기 시작한 것 조차 모르고 한 해를 넘긴  후에야 등나무와 포도나무가 더는 은혜원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었다. 내 손길이 닿지 않은  그 무렵 등나무와 포도나무는 내 은혜원을 파괴하는 무법자였을 뿐이었다.

등나무와 포도나무의 만행으로 라이락을 잃고 나서야 나는 분노하였고, 두 해 전 봄에 등나무와 포도나무 밑둥과 deck 기둥들에 전기톱을 대어 잘라내었다. 물론 “은혜원(恩惠園)” 현판을 떼어낸 일이 먼저였다.

갈등(葛藤)이 아닌 포등(葡藤)이 빚어낸 참사였다. 아니 내 게으름이 만들어낸 아픔이었다. 그렇게 휑하게 변해버린 뒷뜰을 이젠 다시 가꾸려 한다.

Deck을 다시 꾸미고 꽃나무를 심으려 한다. 글쎄… 언제 그 세월을 맞을런가는 알 수 없지만…. 이따금 찾아올 지도 모를 내 손주들을 위하여….

**** 이즈음 한국 소식을 들으며 밑둥까지 잘라낸 내 뒷뜰  등나무가 자꾸 생각나는지. 갈등의 밑둥이 아니라 갈등의 원인을 송두리째 뽑아버릴 기회는 어느 민족 어느 개인에게나 주어지기 마련아닐까?

비 맞으며 필라 친구들과 함께 하고 온 날 밤에.

2-25-17

 

단상(斷想) – 미국과 한반도

지난 주에 가게 손님 몇 분들이 제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지? 19세기도 아니고 이해를 못하겠어. 넌 (그들과 같은) 한국인으로 어떻게 생각해?”라는 물음이었습니다. 지난 주초에 말레이시아에서 피살된 김정남과 북한 정권에 대해 묻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이는 친절하게도 관련 기사가 실린 신문을 건네기도 하였습니다.

이런 질문을 받을 때면 난감해진답니다. 비단 저 뿐만이 아닐 것입니다.

어제 AP통신은 지난 주에 특유의 격정적 언어로 쏟아낸 트럼프의 연설에 대한 팩트 체크를 확인하는 기사를 실었습니다.

마약중독의 대담성(뻔뻔함?)<The audacity of hype> 제목의 그 기사 가운데 하나랍니다.

TRUMP: “To be honest I inherited a mess. It’s a mess. At home and abroad, a mess.”

THE FACTS: A mess is in the eye of the beholder. But by almost every economic measure, Obama inherited a far worse situation when he became president in 2009 than he left for Trump. He had to deal with the worst downturn since the Depression.

트럼프는 전임 오바마대통령으로 부터 모든 것이 엉망인 채로 혼란 투성이인 정부를 물려 받았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을 따지고 보면 오바마가 8년 전에 공화당 정권으로부터 물려 받았던 정부의 모습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도 없이 처참 했다는 것입니다.

지금의 상황을 엉망으로 보는 것은 그렇게 보는 사람의 시각이라는 것이지요.( A mess is in the eye of the beholder.)

세상 돌아가는 일들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느냐는 사람마다 다 다를 수 있거니와 그 모든 것을 옳고 그름으로만 편갈라 나누는 일은 마뜩지 않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분명히 ‘아니오’라고 할 만한 상황이 있습니다. 바로 무엇인가를 우상화하는 상황이나 일을 마주할 때입니다. 그것이 종교적 신념에서 비롯될 수도 있겠지만, 역사 이래 사람들이 살아오며 깨친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김정남에 대한 기사들을 훑어 보다가 눈에 뜨인 단어가 ‘백두혈통(白頭血統)’입니다. 구차한 설명이 필요없는 전근대적인 우상화로 유지되고 있는 북한체제의 실상을 전해주는 말입니다.

이에 반하여 질서와 법규를 앞세워 상징조작으로 대중의 눈을 속이는 지금의 트럼프 정권의 행태 역시 우상화의 한 범주입니다.

어떤 이념이나 질서를 앞세워 극단적으로 나(또는 우리)와 다른 사람들을 배척하고 부정하는 구조악(構造惡)이라는 개념으로 본다면 지금의 미국이나 남북한이나 별다른 차이가 없는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돈과 권력이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믿음이 팽배해진 사회는 이미 우상을 이고사는 사람들의 집합체일 뿐일겝니다.

이즈음 미국사회가 겪고있는 극심한 계층 또는 집단간의 대립이나 한반도 남쪽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의 모습들을 보면서 옳고 그름의 싸움이 아니라 선과 악의 싸움으로 제가 치부하는 까닭입니다. 그 싸움조차 허락치 않는 한반도 북쪽은 논외로 치고 말입니다.

미국은 현재 제가 이고 사는 세상이고, 내 인생의 전반부 30여년을 살았던 한반도 남쪽 사람들에게 <돈과 권력이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믿음을 심어주어 우상이 된 이는 박정희라는 제 오래된 생각인데, 이즈음 그쪽 소식들을 보면 그 생각이 더욱 굳어진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