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미의 이름

움베르토 에코의 역사추리소설 <장미의 이름> 끝부분에  나오는 한 대목이다.

“가짜 그리스도는 지나친 믿음에서 나올 수도 있고, 하나님이나 진리에 대한 지나친 사랑에서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 중략 – 진리를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자를 경계하여라. 진리를 위해 죽을 수 있는 자는 대체로  많은 사람들을 저와 함께 죽게 하거나, 때로는 저보다 먼저, 때로는 저 대신 죽게 하는 법이다.”

소설속에서 도저히 풀릴 것 같지 않던 연쇄 살인 사건의  진범(호르헤)이 드러나자, 범인  호르세는 모든 살인 사건들의  비밀이 담겨 있는 도서관에 불을 지르고 도서관과 함께 재로 변한다. 이 광경을 바라보면서 윌리엄 수사가 그의 제자이자 소설의 주인공인  아드소에게 건네는 말이다.

중세 교회시대에 신학적 교리와 교회의 권위라는 권력은 진리 또는 진실이라는 이름의 갑옷을 입고 있었다. 당시 진리와 진실을 가리는 단순한 잣대는 선과 악이었다. 그리고 권력은 늘 선의 자리에 놓여 있었다.

소설 <장미의 이름>의 무대는 1327년 11월, 이탈리아에 있는 수도원이다.

2017년 3월 탄핵당한 박근혜 전 대통령이 했다는 “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믿는다”는 말에 떠올린 소설 <장미의 이름>이다.

20세기 이래, 일본 식민 지배를 근대화로 위장하고, 남북 분단을 권력 유지의 수단으로 삼는 무리들이 내세운 진리 또는 진실이라는 깃발 아래서 그 무리들 대신에 먼저 간 이들을 생각해본다.

‘진실’ 이라는 이름으로 아직도 헛된 꿈을 이어가는 이가 어찌 박근혜  하나 뿐일가? 이제 ‘진실 또는 진리’라는 이름으로 한반도를 지배해 왔던 거짓 권력들을 불태워 재로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장미의 이름으로.

사람살이란 한 판 놀이

홍길복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 – 9

제 3강 – 3 : 어떻게 ? (How ?) – 인문학 방법론 3

인문학을 연구하는 사람에게는 위와 같은 구체적 방법론이 아무리 잘 훈련이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서구에서 인문학을 공부하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반듯이 갖추어야 할 5 가지 기본적 틀 (Five Basic Frameworks)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생각하는 기본 방식이며 접근하는 원칙들 입니다. 일종의 인문학적 근성이라고 보겠습니다.

(1) ‘이것은 논리적이냐? 즉 Logical 하냐? 말이 되는 소리냐?’를 반듯이 물어야 합니다.

(2) ‘이것은 합리적이고 이유가 타당한가? 즉 Reasonable한가?’를 반듯이 따져보는 소질이 있어야 합니다.

(3) ‘이것은 과학적 근거와 타당성이 있는가? 즉 Scientific하냐?’를 질문할 줄 알아야 합니다.

(4) ‘이것은 분석 가능한 것인가? 즉 Analytical한가?’를 따져보는 습관이 있어야 합니다. 중간에 포기하거나 물러서지 않고 끝까지 쪼개고 가르고 분석해 보는 태도는 인문학도가 지녀야 할 학문적 기본 자세 입니다.

(5) ‘통합 가능한 길이 있는가? Synthetic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가? 즉 아무리 쪼개고 갈라치고 분리시켜 놓았다고 하더라도 결국은 다시 이 모든 것을 통전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있는냐?’를 질문하고 이를 추구해 가려는 자세가 있어야만 한다는 말 입니다.

마지막으로 인문학을 공부하는 사람이 갖추어야 할 개인적이며 인격적 자세 입니다. 이것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문학을 하는 사람의 기본적 소양, 혹은 기초적 품성(Character)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그 무엇이든지 의심하고 질문해 보는 자세 입니다. 의심하지 않고 받아드린 것은 반드시 무너집니다,  회의(懷疑)의 과정을 거치지 아니한 진리는 진리가 아닙니다.  데카르트의 ‘방법론적 회의’도 그런 모습을 반영합니다. 가능한한 많이 의심하고 자주 의심하는 사람이 진리에 가까이 갑니다. 질문이 없는 사람은 아무 것도 배우지 못합니다.

둘째는 비판정신입니다(Criticism). 학문은 변합니다. 철저하게 따지고 묻고 저항하고 반론을 제기하는 것은 인문주의가 반드시 걸어가야 할 길 입니다. 인문학에서 비판정신은 생명과 같습니다. 비판하지 않는 인문학자는 이미 죽은 사람과 마찬가지 입니다.

지식인과 지성인은 다릅니다. PH.D를 가지고 있다고해서 지성인은 아닙니다. 핵무기를 만드는 데 참여하는 과학자나 불의한 정부에 동조하는 학자나 물질을 추구하며 물질의 많고 적음에 따라 행동하는 교수는 지식은 있어도 지성인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가 가진 지식과 경험을 통하여 개인적 사리와 사욕을 챙기고 입신양명 하려는 지식인은 지성인이랄 수 없습니다.

신학적 반성 없이 교회를 크게만 만들려고하는 목사나 승려는 진정한 종교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셋째는 자유정신입니다. 인문학의 최종적 목표 중 하나는 모든 사람을 자유케 하는 데 있습니다.

인문학자는 그 자신이 우선 일체의 모든 것들로 부터 – 물질, 권력, 명예, 종교, 신, 타인, 그리고 심지어는 자기 자신으로 부터 까지 – 자유해야하고, 그 자유를 위하여 사유하고 연구하고 말해야 합니다.

르네쌍스 이후 계몽주의 시대를 거쳐 실존주의와 현대철학에 이르기 까지 인류의 모든 정신사는 자유의 저변 확대사입니다(헤겔).

과거 한 사람의 자유로 부터 만인의 자유에 이르도록 인류의 역사는 흘러왔고 또 앞으로도 그런 방향으로 흘러 갈 것이라는 신념과 철학이 인문학의 기조입니다. 여기에는 기초적 인권으로 부터 시작하여 정치-경제적 자유와 종교-사상적 자유에 이르기 까지 일체의 모든 인간적 자유가 다 포함됩니다. 싸르트르의 주장대로 ‘태초에 자유가 있었느니라’를 실현 하려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네째는 그러면서도 겸손해야 합니다. 겸손은 종교적 덕목만이 아니라 종교와 학문과 인류 공동체 모두에게 똑같이 요구되는 기본 덕목 중 하나입니다. 벼는 익을 수록 머리를 숙이고 사람은 배울 수록 겸손해 집니다.

뿐만 아니라 학문의 목표나 이상도 변하고 그 방법론도 당연히 변합니다. 이성적 방법론이라고해서 절대적인 것도 아닙니다.

대학교육의 목표도 많은 변화를 거듭해 왔습니다. 모든 학문과 학문의 연구는 특정한 시대, 특별한 상황 속에서는 객관성을 지니지만 그 어떠한 학문도 만고불변의 진리는 아닙니다. 학문은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해 나가는 과정입니다. 만일 학문을 어떤 변하지 않는 고정된 것으로 이해하고 규정하여 학문의 성격을 획일적으로 정의하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학문하는 사람으로써 자기모순에 빠지게 됩니다.

학문이란 그 내용, 목적, 방법에 있어서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포착하기가 불가능합니다. 진리를 향한 순례는 끝없이 변하는 지적 여행입니다. 그러므로 인문학을 포함한 모든 학문연구를 마치 종교적 신념 처럼 여기고 자신의 주장이나 학설에 대하여 타협이 불가능하다는 확신을 지니게된다면 이는 학문하는 사람의 기본적 자세를 상실하게 됩니다.

겸손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 인간 지식의 어쩔수 없는 한계 때문 입니다. ‘배움이란 자신의 무지를 확인해 가는 과정 입니다.’

마지막으로는 즐기는 태도 입니다. Johan Hoizinga는 homo ludens를  주장했습니다. 모든 것이 다 놀이입니다. 인생살이란 한판의 놀이 입니다. 다행이 태초부터 인간은 놀이를 추구했고 또 놀이를 창조할 줄 알았습니다. 즐거워하고 재미있어하는 일 만이 보람과 성취를 거져옵니다. 억지로하는 일은 결코 성공 할 수 없습니다.

놀이에는 규칙이 있습니다. 놀이의 최종적 목표는 모두의 행복 입니다. 공자(孔子)는 논어(論語) 옹야편(雍也篇)에서 ‘知之者 不如好之者 好之者 不如樂之者(지지자 불여호지자 호지자 불여락지자)’ 라 했습니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는 말입니다.

인문학의 가장 좋은 방법론은 즐기면서 하는 것이요, 놀면서 하는 것입니다. 시와 노래, 춤과 그림이 곁들여지는 ‘한 바탕의 놀이’와 여유가 바로 인문학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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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눈(春雪)에 춘정(春情)을…

봄눈이 사방을 덮은 날, 장자를 읽다. 장자(莊子) 외편(外編) – 추수편(秋水篇)에 있는 이른바 호량지변(濠梁之辯) 이야기.

어느 날 장자와 혜시가 호(濠)라는 강의 다리 위에서 물고기를 구경하고 있었다.

장자가 말했다.  “피라미가 물에서 자연스럽게 유유히 헤엄치고 있는데, 저것이 피라미의 즐거움이라네” 그러자 혜자가 말했다. “자네는 물고기가 아닌데, 어떻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는가?”

장자가 대답했다. “자네 또한 내가 아닌데, 어떻게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르는지 안단 말인가?” 혜자가 말했다. “나는 자네가 아니니까, 물론 자네의 마음을 모르지. 하지만 마찬가지로 자네도 물고기는 아니니까, 자네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르는 것도, 확실하지 않은가”

그러자 장자가 말했다. “그럼 처음부터 차례대로 알아보세. 자네가 방금 내게 ‘어떻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알겠는가’라고 물었네. 지금 그 물음에 대답하지. 자네는 내가 이미 알고 있음을 알고서 나에게 물었던 것일세. 그렇다면 물고기가 아닌 내가 물고기의 마음을 알았다고 해도 이상할 것은 없지. 나는 다리 위에서 물고기의 마음을 알았던 것일세”

이 이야기에 대한 자오스린의 해석이다.(자오수린저 허유영번역, 사람답게 산다는 것에서)

논리상으로 보면 이 변론의 승자는 혜시다. 장자는 “물고기가 아닌데 어떻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안단 말인가? 라는 혜시의 논리적인 질문을 회피했다. 불교에서는 “물이 차가운지 뜨거운지는 마셔 본 사람만  알 수 있다”고 했다. 감정이란 온전히 개인적인 것이며 남은 알 수 없다는 뜻이다. 감정이란 온전히 개인적인 것이며 남은 알 수가 없다는 뜻이다. 사람도 그런데 하물며 물고기는 어떻겠는가?

그러나 미학적으로보면 장자가 이겼다. 장자는 자신이 느끼는 자유로움과 즐거움을  꼬리를 흔들며 헤엄치는 물고기에게 투사시켜 물고기가 즐거울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했다.

시인 신기질(辛棄疾; 1140년- 1207년, 중국 남송의 시인)은 “내가 청산을 보며 매우 아름답다고 여기니 청산도 나를 보면 똑같이 느끼겠지”라고 했다. 장자는 큰 덕을 가슴에 품고 세상 만물에게  봄처럼 따뜻한 정을 느꼈다. 그에게는 천지간이 모두 따뜻한 우주였다.

봄눈(春雪)에 춘정(春情)을 느끼던 날에.

莊子與惠子遊於濠梁之上(장자여혜자유어호량지상) 莊子曰(장자왈) 儵魚出遊從容(숙어출유종용) 是魚之樂也(시어지락야) 惠子曰(혜자왈) 子非魚(자비어) 安知魚之樂(안지어지락) 莊子曰(장자왈) 子非我(자비아) 安知我不知魚之樂(안지아부지어지락) 惠子曰(혜자왈) 我非子(아비자) 固不知子矣(고부지자의) 子固非魚也(자고비어야) 子之不知魚之樂(자지부지어지락) 全矣(전의) 莊子曰(장자왈) 請循其本(청순기본) 子曰(자왈) 汝安知魚樂(여안지어락) 云者(운자) 旣已知吾知之而問我(기이지오지지이문아) 我知之濠上也(아지지호상야)

춘설(春雪)

올 겨울은 눈없이 지나가나 했더니, 우수 경칩도 다가고 춘분이 코앞인데 온동네가 하얀 눈으로 덮였다. 눈속에 갇혀 하루를 쉰다. 부지런한 앞집 주인은 벌써 눈을 치우고 있다만, 나는 정지용의 춘설이나 읊고 있다.

3-14-17b

춘설(春雪)

– 정지용

문 열자 선뜻!/ 먼 산이 이마에 차라.

우수절(雨水節) 들어/ 바로 초하루 아침,

새삼스레 눈이 덮인 뫼뿌리와/ 서늘옵고 빛난 이마받이하다.

얼음 금가고 바람 새로 따르거니/ 흰 옷고름 절로 향기로워라.

옹송그리고 살아난 양이/ 아아 꿈 같기에 설어라.

미나리 파릇한 새 순 돋고/ 옴짓 아니기던 고기 입이 오물거리는,

꽃 피기 전 철 아닌 눈에/  핫옷 벗고 도로 춥고 싶어라.

3-14-17

3-14-17c

내가 들고있는 잣대는

홍길복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 – 8

제 3강 – 2 : 어떻게 ? (How ?) – 인문학 방법론 2

일반적으로 제반 학문의 방법론을 거시적으로 볼 때는 세 가지로 분류 합니다.

첫째는 ‘직관적 방법론’입니다. ‘감성적 방법론’이라고도 합니다. Emotional Methodology, 혹은 Romantic Methodology 입니다. 여기서는 직관 Intuition과 감성 Emotion을 학문 연구의 기초적 틀로 사용합니다. 이성이나 과학이 아닌 본능과 감성을 지지합니다. 가슴으로하는 연구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이는 극단적 합리주의에 대한 반동이기도 하지만 예술이나 문학이 지닌 속성에 기인한 것 입니다. (물론 우리는 윤동주나 라이나 마리아 릴케의 시를 이성적으로 분석해야만 하는가? 김소월의 진달래를 수학적으로 풀어 볼 수 있는가? Kiss 할때 kiss에 대한 생리적, 의학적 분석을 하는가? 인간의 모든 행위는 합리적이고 과학적인가?하는 질문을 할 수도 있습니다.)

둘째는 ‘과학적 방법론’입니다. 분석적이고 이론적이고 합리적인 방법론 입니다. Scientific Methodology, 혹은 Analytical Methodology입니다. 여기에서는 실험과 관찰, 분석과 조사가 연구의 기본적 틀이 됩니다. 이는 당연히 머리로 하는 연구입니다.

추론, 가설, 실험, 조사, 관찰, 입증, 이론화, 혹은 논리화의 과정이 이어집니다. (숙제로 주어진 미적분 문제를 앞에 놓고 기도한다고 답이 나온다고 보십니까? 갈릴레오나 케풀러의 천체이론에 대한 예술적 접근이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뉴우톤의 만유인력의 법칙이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이해하기 위해서 기도나 시적 상상력을 동원한다고 해서 답이 나올까요?)

셋째는 ‘합리적 방법론 입니다. ‘이론적 방법론’ 혹은 ‘이성적 방법론’이라고도 말 합니다. Logical Methodology, 혹은 Rationalistic Methodology입니다. 이것은 주로 인문학적 방법론입니다. 이 방법론은 위에서 본 두번 째 ‘과학적 방법론’과 매우 흡사한 점이 있습니다. 분명히 중첩되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문학에서는 이를 분리하려고 합니다. 인문학은 사회 과학적 방법론은 사용하지만 과학적 기재나 실험적 텍크닠을 사용하려고 하지는 않기 때문 입니다.

전통적으로 서양철학과 인문학에서 사용해 온 ‘합리적 방법론’에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있습니다.

첫째는 ‘연역적 방법론’입니다. Deductive Method입니다.

어떤 가설, 혹은 가설적 진리를 설정한 다음 그 가설에서 개별적 진리, 혹은 결론을 끄집어내는 방법입이다. Aristoteles가 대표적 주창자입니다.

연역적 방법론에서는 ‘모든 인간에게는 배우지 않아도 선천적으로 아는 어떤 선험적(先驗的)인 것, 즉 a priori 한 것이 있다’는 것을 전제 합니다. 경험하지 않고서도 알 수 있는 선험적 진리를 가설로 내세웁니다. 예컨데 ‘모든 인간은 죽는다’ ‘살인은 범죄 행위다’ 같는 가설입니다. 이 경우 죽음이나 살인은 내가 직접 경험 해 보아야만 아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가설은 오랫동안 우리가 살아온 경험을 통하여 획득한 진리입니다 .

바로 이 ‘모든 사람은 죽는다’ ‘살인은 죄다’ 라고 하는 가설적 진리에 근거하여, 홍길복은 반듯이 죽는다, 김동숙도 틀림없이 죽는다, 장담컨데 천옥영도 백퍼센트 죽는다고 말 합니다. 이들이 반듯이 죽는 이유는 한가지인데 그것은 이 셋은 모두가 사람이기 때문 입니다. 이런 과정을 통하여 연역법적으로 만들어진 방법론에서는 선험적으로 추론한 그 가설을 ‘일반적 진리’ 혹은 ‘보편적 진리’로 확정하고 그 가설적 진리를 모든 곳에 대입합니다.

Aristoteles로 부터 시작된 ‘삼단론법’ syllogism은 바로 이 연역적 방법론에서 비롯됩니다. 예컨데 이런 것 입니다.  A. – 모든 사람은 죽는다.  B. –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다.  C. – 그러므로 소크라테스는 죽는다. 여기서 A와 B는 a priori한 것입니다. 즉 선험적으로 아는 것 입니다.

그런데 핵심은 ‘모든 인간은 죽는다’고 하는 전제 A와 ‘소크라테스는 사람이라’고 하는 전제 B가 반드시, 틀림없이 맞는 전제여야만 ‘소크라테스는 죽는다’고 하는 C의 결론이 타당성을 지니게 된다는 점 입니다.

(다른 예: (1) A. 신은 존재한다. B. 모든 존재하는 것은 유한 (혹은 무한)하다. C. 그러므로 신은 유한 (무한)하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전제 A와 B가 선험적으로 타당한가 하는 것입니다.

(2) A. 모든 전쟁은 비극이다. B. 한국은 전쟁이 많은 나라다. C. 그러므로 한국은 불행한 나라다.

(3) A. 싸우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B. 우리 집은 늘 싸운다. C. 그러므로 우리 집은 불행한 집이다.

(4) A. 동물들은 늘 먹는 것에만 관심이 있다. B. 우리 남편도 늘 먹는 것에 만 신경을 쓴다. C. 그러므로 우리 남편은 동물이다.

–이 모든 예에서 우리가 반듯이 다시 검토해야 할 것은 C라는 결론이 타당성을 지니기 위해서는 A와 B가 선험적으로 보편타당성을 지니는 진리인가를 확인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둘째는 ‘귀납적 방법론’입니다. 요즘은 ‘실험적 방법론’ 혹은 ‘경험적 방법론’이라고도 부릅니다. Inductive Method, Experimental Method 입니다. 이는 ‘개별적 관찰을 통하여 보편적 진리로 나가는 방법’ 입니다. 개별적 사실들을 하나 하나씩 관찰, 조사, 수집, 조직화하여 어떤 가설을 만들고 그 가설을 진리로 확정하는 방법입니다. F. Bacon이나 J .S. Mill이 대표자 입니다.

그 과정은 다음과 같이 진행됩니다.

(1)자료 수집과 조사 및 관찰의 단계. Investigation & Data Collection. (2) 수집된 자료를 조직화하고 어떤 유형이나 pattern을 만드는 단계. Organizations. (3) 잠정적인 가설을 만드는 단계. Hypothesis Making. (4) 증명하는 단계. Verification. 잠정적으로 만든 그 가설을 증명해 냅니다.

물론 그 가설은 확인 할수도 있고 반대로 부정 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귀납적 방법론은 원래 물리학이나 과학에서 사용되던 방법이었습니다만 오늘날은 사회학, 심리학, 각종 통계학은 물론이고 윤리학이나 신학(예수 쎄미나)을 비롯한 각종 인문학과 사회과학 전반에 걸쳐 사용되고 있습니다. 촛불집회와 태극기집회, 트럼프의 취임식 인파 등을 보아도 알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나온 것이 ‘사회과학적 방법론’으로써의 ‘분석적 방법론’ Analytical Method 입니다. 귀납적 방법론은 실험과 경험의 반복을 통하여, 즉 개별적이고 특수한 현상들의 관찰이나 데이타 수집을 통하여 일반적 명제를 도출해 내는 것 입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A. 소크라테스는 죽었다. A. 플라톤도 죽었다. A. 예수도 죽었다. A. 공자도 죽었다.  A. 나폴레옹도 죽었다. A. 김일성도 죽었다. A. 박정희도 죽었다. B. 살펴보니 이 모든 이들은 사람이었다. C. 그런 걸 보니 사람이란 (통계상 거이) 죽는 것이 확실하다.

셋째는 ‘변증법적 방법론’입니다. Dialectical Method 입니다. 이는 소크라테스의 대화법 때 부터 시작되어 서양 철학사에서 꾸준히 발전되어왔지만 Hegel에 의하여 완성되었습니다.

헤겔에 의하면 역사의 발전은 변증법적으로 진행됩니다.

먼저는 ‘하나의 명제’ 즉 Thesis(正)가 만들어 집니다. 그러나 얼마 후에는 그 명제에 대한 ‘반대 명제’ 즉 Antithesis(反)가 출현 합니다. 처음 출현한 명제와 그 다음에 나온 반대 명제 사이에는 논쟁이 계속 됩니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그 둘 사이에 타협, 혹은 진보된 ‘종합 명제’ 즉 Synthesis(合)가 형성 됩니다. 이 synthesis는 시간에 흐름에 따라 또 하나의 thesis가 되고 그 thesis에 반대하는 다른 antithesis가 나타나 대립 되다가 마침내는 synthesis를 만들어 냅니다.

이런 식으로 역사는 thesis, antithesis, synthesis를 반복하면서 영원히 순환 발전되어 가는데 헤겔은 이것을 ‘역사의 발전’ Aufheben, 곧 ‘指向’ 이라고 보았습니다.

예를 들겠습니다.

(1) 正 –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다. (2) 反 – 아니다. 인간은 감정적 동물이다. (3) 合 –인간은 이성적이며 동시에 감정적 동물이다. 이런 것이 인간 이해의 발전 단계입니다.

(1) 正 –역사는 전진한다. (2) 反 – 아니다 역사는 퇴보한다. (3) 合 – 역사는 전진과 퇴보를 반복한다. 이런 식으로 역사 이해에 대한 발전단계를 설명 합니다.

 (1) 正 – 최고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다. (2) 反 –아니다. 최고로 소중한 것은 물질이다. (3) 合 –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신도 물질도 아니고 사람이다. 이는 인문학과 철학의 논리 발전 방식 입니다.

(기타 : 사랑은 영원하다. – 아니다. 사랑은 순간적이다. – 사랑에는 순간적인 것도 있고 영원한 것도 있다. / 언론에 나온 것은 사실이다. – 아니다. 언론에는 거짓 보도가 더 많다. – 언론이란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냥 재미로 보는 것이다.)

나는 오로지….

가게 손님들과 정치 이야기나 종교 이야기를 나누는 일은  장사하는 사람들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일겝니다. 세상 어디서건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걸 잘 아는 제가 손님들에게 이제껏 한번도 해보지 않았던 정치 이야기(?… 딱 정치 이야기랄 수는 없지만, 이즈음 내가 살고 있는 트럼프 치하의 미국이  한국과 유사한지라 )로 오늘 아침에 편지를 띄워 보았답니다.

행여 약간의 손해를 보더라도 손님들이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알고 싶었기 때문이랍니다. 현재 이메일 응답만으로는 긍정적 느낌의 답이 대세랍니다. 새로 맞는 한 주, 제 가게 손님들과 나눌 한국상황에 대한 응답들이 자못 궁금하답니다.

3-12

지난 주 한국인들 사이에서 가장 많이 회자된 이야기는  한국대통령 탄핵에 대한 것이었답니다.

저는 한국을 떠나 미국에 이민온지도 벌써 30년이 넘어가니 사실 오늘날 한국 상황에 대해 아는 것은 별로 없답니다. 그리고 당신도 알다시피 세탁소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제게  한국의 정치상황은 아무런 상관이 없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탄핵되었다는 뉴스에 관심을 안가질 수가 없었답니다.

저는 이번에 탄핵된 한국대통령의 아버지가 대통령이었던  시절에 한국에서 살았답니다. 그 이름이 박정희였는데 그가 대통령으로 있었을  때, 저는 초, 중, 고등학교를 비롯해 대학교를 다녔고 군대도 다녀왔답니다. 그가 자그마치 18년 동안이나 통치자였기 때문이랍니다.

제가 이십대 나이였던 그 때에 겪었던  정말 웃지못할 일들이 많았답니다. 일테면 남자는 머리를 길게 기르지를 못하고, 여자는 짧은 치마를 입으면 안되는 것들이었답니다. 제가 스무살 무렵의 일이었는데 거리에서 머리를 길게 기른  젊은이들을 경찰들이 잡아 머리를 가위로 짧게 짤라버리고, 짧은 스커트를 입은 젊은 여자들을  경찰들이 붙잡아 치마를 가위로 자르는 일도 있었답니다. 이번에 탄핵된 한국대통령의 아버지가 대통령이었던  시절에 있었던 일이었지요.

그 무렵에 제가 읽었던 책 가운데 헨리 데이빗 소로우(Henry David Thoreau)의 ‘시민불복종(Civil Disobedience)’이 있었는데, 당시 한국에서는 금서로 지정되어 있었답니다. 그 책에 있는 말 들 가운데  하나이지요.

<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내가 떠맡을 권리가 있는 유일한 의무는, 어는 때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행하는 것이다. – 중략- 나는 오로지 이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여기 온 것이 아니라 좋건 나쁘건 여기서 살려고 온 것이다.>

한국뉴스를 보면서 떠올린 오래 전에 읽었던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말이랍니다.

좋고 나쁘건 여기 살려고 온 내가, 이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아주 작은 일 하나라도 할 수만 있다면 삶에 큰 뜻이 있지 않을까요?

사람들이 아니라 사람, 사람 하나하나가 모두  귀하여 여겨지는 세상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으로…

당신의 세탁소에서


It was the impeachment of the Korean president that became a much-talked-about issue among Korean people last week.

As I came to America over 30 years ago, I cannot say that I know well about the situation in Korea at the present day. And, as you may know, I’ve been busy at the cleaners so that the political situation in Korea has not attracted my attention particularly. However, I cannot but pay attention to the news about the impeachment of the president of Korea.

I lived in Korea during the reign of the impeached Korean president’s father. He is President Park Chung-hee. While he was the president of Korea, I went through the elementary, middle, high school and the university. I even completed my military duties, while he was the president of Korea. All these were possible because his reign lasted for no less than 18 years.

When I was in my twenties, many things about which I could not laugh happened in Korea. For example, they restricted men from having long hair and women from wearing a short skirt. Around the time when I was about twenty years old, the policemen caught young men with long hair and cut their hair short with scissors. They also caught young women with a short skirt and cut the skirt. This kind of unthinkable things had happened when the father of the president who was impeached the other day had been the president of Korea.

One of the books which I read in those days was “Civil Disobedience” by Henry David Thoreau, which was banned in Korea at that time. The following is from the book:

We should be men first, and subjects afterward. It is not desirable to cultivate a respect for the law, so much as for the right. The only obligation which I have a right to assume is to do at any time what I think right… I came into this world, not chiefly to make this a good place to live in, but to live in it, be it good or bad.

Those words came to my mind, while I was watching news about Korea.

If we can do something, however small it may be, “to make this world a good place to live in, be it good or bad,” wouldn’t it be meaningful in life?

I hope that this world will become one in which every single individual as oneself, instead of the mass, is valued and respected.

From your cleaners.

속좁은 고집을 버려야

홍길복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 – 7

제 3강 – 1 : 어떻게 ? (How ?) – 인문학 방법론 1

인문학도 여러가지 학문 중에 하나 입니다. 인문학은 종교적 수행이나 명상이 아닙니다.

우선 학문이란 무엇입니까? – 학문에 대한 서구의 전통적 이해는 Aristoteles가 그 기초를 놓았습니다.

그에 의하면 ‘학문’(academy), 혹은 ‘학문연구’(academic study)란 “자연, 인간, 인간사회에서 나타나거나(현상) 감지되거나(느낌) 경험(관찰)되거나 생각(사유와 판단)되는 그 어떤 현상, 운동, 행위, 경험, 사유, 판단, 주장에 대하여 이론적으로, 과학적으로, 합리적으로, 그리고 객관적으로 연구, 설명, 증명, 토론, 정리, 정돈, 응용하는 인간의 일체 이성적 행동”입니다. (여기에는 반드시 이론적이며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논증이 필요합니다. 학문의 세계에서는 감정적 설교나 설득, 종교적 명상이나 기도, 혹은 주관적 자기체험을 일반화하거나 객관화 할수 없습니다.)

Aristoteles는 학문의 영역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첫째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으로 만져지지는 현상계(現象界)입니다. 즉 우리의 오관(五觀)으로 경험되는 세계가 첫 연구의 대상 입니다. 이것을 그는 형이하학(形而下學)이라고 했습니다.

Physics, 즉 눈 앞에 나타나는 자연 현상을 다루는 물리학, 수학, 화학, 천문학, 기하학, 지리학, 의학, 농학을 비롯하여 이를 응용한 제반 정치학, 경제학, 사회학, 법학, 등 제반 사회과학을 포함하여 모든 자연현상과 사회 현상을 다루는 학문 일체를 형이하학 이라는 이름으로 묶었습니다.

초기에는 단순히 물리학과 천문학, 수학과 기하학에서 출발했던 형이하학은 시간의 흐름과 더불어 세분화 되었습니다. (의학, 농학, 정치학, 법학 등은 지나치게 세분화되어서 같은 학문들 사이에서도 서로 소통이 않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최근엔 융합학이 대두되고 있습니다)

둘째는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고 손으로 감촉되지 않는 세계, 즉 현실적으로 경험되지 않는 분야를 학문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전면에 나타나지 않고 뒤에 있는 이면의 세계’를 Metaphysics 라고 불렀습니다. 그는 물리학, 즉 physics 뒤에 meta 놓여 있는 학문 philosophy이 모든 학문의 본질을 다루는 근본학이라고 보았고 이를 ‘형이상학(形而上學)’ Metaphysics 혹은 ‘제일 철학’ Proto Philosophia 이라고 이름했습니다.

학문을 하는데 있어서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은 그 접근하는 방법이 어떻게 다를까요? 예를 들어 봅시다.

(1)  2004년 Mexico만에서는 Hurricane Charlie가 Florida를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Orlando시에서는 엄청난 폭리가 있었습니다. 2불 짜리 ice bag 하나가 10불로, 40불 짜리 모텔 방 하나가 200불이 되었습니다.

이 경우 미 의회와 행정부를 포함한 정치인들과 법조인들이 취 할 수 있는 조치는 ‘재난 발생 지역에서의 가격 폭리 처벌 특별법’의 제정 입니다. 이것이 형이하학의 세계에서 다룰수 있는 최선입니다.

그런데 인문학자들과 철학자들은 이런 현상을 보면서 보다 근본적인 질문을 제기 합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성은 선한가 악한가?’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과연 정의를 실현하는 것은 가능한 일인가?’ ‘인간성 속에 있는 이기심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은 있는가?’(M. Sandel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2) 이명박 정부는 막대한 세금을 들여서 거대한 토목공사 사업인 4대강을 개발했습니다.형이하학적 접근을 하는 사람들은 노동력의 증가, 실업자의 감소, 산업의 활력, 국토의 개발과 같은 이론을 들고 나왔습니다.

그러나 인문학자들과 철학자들은 이렇게 묻습니다.

‘자연이란 무엇인가?’ ‘자연이란 한번 파괴하면 다시 복원이 가능한 것인가?’ ‘ 우리에게 주어진 자연은 우리 후손 들에게도 물려주어서 고루 함께 써야 할 인류 모두의 유산이 아닌가?’

(3) 최근 박근혜 정부는 헌법과 법률이 정한 권력을 비선 실세와 함께 부당하게 남용하였다는 혐의로 국회에서 탄핵 소추를 당하여 헌법재판소의 심리에 의해 파면되었습니다.

이 대통렬 파면 과정 속에서 많은  국민들과 정치인들은 여러가지 개인적 이해관계나 친소 관계를 따라 촛불이니, 태극기니 하면서 의견을 달리하기도 하면서도 또 법을 지키자, 법질서대로 하면 된다고 말 합니다. 그러나 이런 접근은 형이하학적 접근법입니다.

인문학자들은 근본적으로 ‘정치란 무엇인가?’ ‘정치의 목표는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사람은 정직할 수 없는가?’ ‘인간의 본성은 무엇일까?’하는 질문을 던집니다.

(4) 어느 나라나 비슷하지만 요즘 한국에서 대통령 후보에 나서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일자리 창출, 실업자 구제, 복지 수당 증액, 경제 안정을 이야기 합니다. 이것은 모두 정치에 대한 형이하학적 접근법입니다.

인문학자들은 ‘사람은 과연 밥만 먹고 사는가?’ ‘돼지의 행복도 행복인가?’ ‘진정한 행복과 참된 평등을 이루는 벙법은 무엇일까?’ ‘물질 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는가?’ 같은 것을 화두로 제시 합니다.

– 기타 우리는 Boat people 이나 asylum seeker 문제, 혹은 FTA 문제, America First, Brexit 같은 정치-사회적 잇슈들을 가지고서도 인문학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접근하는지를 살펴 볼 수 있겠습니다.

모든 학문은 저마다의 방법론이 있고 그 방법론에 따라서 세운 가설과 목표를 향하여 연구, 추진 하게 됩니다.

방법론은 학문 마다 다르게 마련이고 또 같은 학문 사이에서도 여러가지 차이가 있읍니다. 원리는 하나라고 하더라도 방법은 다양 합니다.(One Principle, Many Methods) 방법론의 차이와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어떤 방법론을 사용하는냐에 따라서 얼마든지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습니다. 이것을 알고 인정하고 받아드리는 것이 인문학 공부의 첫 출발입니다. (대부분의 종교인들이나 동양적 가부장적 사고를 지닌 이들은 여기에서 가장 큰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어느 날 외식

아내와 주말 저녁 조촐한 외식을 즐긴다. 식사를 하며 내가 말했다. “혹시 우리 이거… 박근혜  탄핵 기념 외식?” 아내의 응답. “그것도 괜찮네!”

이어지는 아내의 물음. “어머니 아버지꺼 하고, 울 아버지꺼랑 시켜서 배달해 드리고 가자!” 시간을 확인한 후 내 대답. ”시간상 아버지 어머니는 늦었고, 장인 것만 하나 시켜가자구. 아버지 어머니는 내일 따로 들리자구.” 그렇게 아내는 장인 몫으로 따로 주문을 해 놓는다.

식사를 마치고 계산을 하려는데 아내가 놀라며 하는 말. “아니, 얘네들이….. 아버지꺼로 주문한게 이게 아닌데… “  이미 가져갈 음식은 테이블에 놓여 있었으므로, 아내의 화는 조금 도가 높아 있있다.

서빙하는 친구를 불러 뭔가 잘못되었다고 항의하는 사이, 매니저가 다가와 물었다. “무슨 문제가 있으신가요?” 젊은 동양처자였는데 그녀의 가슴에는 눈에 익은 뱃지가 달려 있었다. 노란 세월호 뱃지였다.

주말 저녁 꽉찬 테이블에 한국인(동양인)이라고는 우리 부부 밖에 없었으므로, 노란 세월호 뱃지로 연결되는 그 매니저와 우리 부부 사이의 연은 정말 남다른 것이었다.

내가 대답했다. “문제는 무슨…. 그냥 당신 가슴에 달린 노란 뱃지가 고마워서….”

그 거리

<결국 피청구인의 위헌 위법 행위는 국민의 신임을 배반한 것으로, 헌법 수호의 관점에서 용납될 수 없는 중대한 법 위배 행위라고 봐야한다. 피청구인의 법위배 행위가 헌법 질서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과 파급효과 중대함으로 피청구인을 파면 함으로써 얻는 헌법 수호의 이익이 압도적으로 크다고 할 것이다. 재판관 전원 일치 의견으로 주문 선고한다.> – 헌재 박근혜 탄핵심판 판결문에서

1979년 10월 27일 아침,  거리에는 호외신문들이 뒹굴고 있었다. <박정희대통령 피격서거被擊逝去>라는  대문짝 같은 제목이 달린 호외였다. 그 무렵 나는 작은 출판사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그게 말이 출판사이지 생업이라고 할만한 수준의 것이 아니어서 실제로는 준실업자 상태였다는 것이 맞는 말일 것이다. 아무튼 그날 아침 출근길에서 그 호외를 마주했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 내 출판사 사무실로 담당형사가 찾아왔고 당분간  함께 지내게 되었노라는 통보와 함께 내 동선에 늘 함께 하는 그림자가 되었다. 당시 내 집과 사무실이 모두 마포구에 있었으므로 마포서 정보과에 속한 형사들이었는데 그 중 한 명과는 호형호제를 할 정도로 친하게 지냈던 기억이 있다. 종종 다니던 학교가 있던 구역인 서대문서 정보과 형사들도 손님으로 오곤했었지만, 늘 붙어다니던 양반들은 주로 마포서 직원들이었다.

지금와서 돌이켜볼수록 웃음이 나온다. 도대체 이십대 중반 어린 나이, 게다가  준실업자에 다름없는 나를 감시하는 담당형사가 있었다는 사실에  나오는 웃음이다. 아무튼 그땐 그랬었다.

그리고 며칠 후  11월 3일 아침, 집을 나서려는데 일찍감치 내 집 앞에 진을 치고 있던 담당형사 둘이  “오늘은 집에 있어야겠다”며 나를 막아섰다. 그들과 꽤 긴 흥정 끝에 나는 그들과 함께 광화문 비각쪽 거리에 설 수 있었다.

그날은 박정희 전 대통령 장례식 날이었다. 집을 나서지 못하게 막는 담당형사들에게 “이건 참 역사적인 날이다. 당신들이나 나나 그 역사적 현장에 함께 서 있다는 것만 하여도 얼마나 의미있는 일이냐? 내가 도망칠 일도 아니고 당신들과 함께 서서 그 현장을 보고  다른 일 안하고 누구도 만나지 않고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 될 일 아니냐?”

그렇게 우리들은 광화문 사거리 비각쪽에 서서 박정희 장례행렬과 그곳에 인산인해로 모인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나는 그날 광화문 거리와 그곳에 모였던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지금도 기억한다. 몇해전이던가 김정일이 죽어  장례행렬을 이루던 평양 모습을 담은 동영상을 보았던 일이…. 적어도 내 기억엔 김정일 장례행렬이 이어지던 평양거리와 1979년 박정희 장례행렬이 있었던 서울 광화문 거리 모습은  거의 똑같았다.

바로 며칠 전 자기 딸 나이 또래 젊은 처자들을 앉히고 술마시다 부하의 총에 정말 말같지도 않은 죽음을 맞은 박정희는 그날 그 거리에서는 왕을 넘어 신이었다. 그렇다. 이제 내 이 나이 60대 중반, 이 세월에 이르기까지 그는 신이었다.

광화문 거리는 박정희 만큼이나 내겐 추억이다. 박정희가 쿠데타를 일으키던 해 나는 국민학교 2학년이었다. 그리고 그의 치하에서 초, 중, 고, 대학을 마치거나 다니고 군생활을 했다. 내 어리고 젊은 시절 추억은 모두 그 시절의 일들이다. 광화문 비각에서부터 내자동, 청운동, 효자동에 이르는 거리는 골목골목들을 기억할 만큼 내겐 숱한 추억들이 묻어있다. 중, 고등학교 6년 동안 나는 그 거리를 등하교길로 오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2016년, 해가 저물 무렵부터 광화문 그 거리를 매운 사람들은 2017년 3월 마침내 신의 형상을 부수기 시작하였다.

<국민의 신임을 배반한 것으로, 헌법 수호의 관점에서 용납될 수 없는 중대한 법 위배 행위라고 봐야한다. 피청구인의 법위배 행위가 헌법 질서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과 파급효과 중대함으로 피청구인을 파면 함으로써 얻는 헌법 수호의 이익이 압도적으로 크다.>는 2017년 헌재의 판결문이 1979년 10월 김재규가 쏜 총알 대신 그때 박정희를 향할 수 있었다면, 지금쯤 어떤 세상이 되었을까?

오래 전에 떠나 온 그 거리에서  전해지는 소식에 꿈이라도 꾸어보는 것이지만, 이제라도 신의 형상을 한 우상을 무너뜨리고  그 자리에 너, 나, 우리라는 사람이 설 수 있는 광장, 나라, 공동체로 나가는 걸음을 내딛는 소식에 그저 들뜬 마음으로.

 

이민(移民)과 시민(市民)

초기 미국의 정신 가운데 한 사람 헨리 데이빗 소로우(Henry David Thoreau)가 그의 글 ‘시민불복종(Civil Disobedience)’에 남긴 말입니다.

<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내가 떠맡을 권리가 있는 유일한 의무는, 어는 때든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행하는 것이다.

군인들은 자신이 행하고 있는 일이 저주받을 짓임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원래는 모두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 존재인가? 도대체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가? 아니면 권력을 가진 어떤 사악한 자가 부리는 움직이는 작은 요새나 탄약고인가?

이 나라 국민은 노예 소유와 멕시코에 대한 전쟁을 멈추어야 한다. 설령 그렇게 하여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존재하지 못하게 되더라도 말이다.

아마 나는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쪽에 표를 던지겠지만, 옳은 쪽이 반드시 이겨야 한다고 목숨을 걸지나 하지는 않는다. 옳은 쪽에 투표하는 것도 그것을 위해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정의가 승리하기를 바란다는 소망을 사람들에게 희미하게 표명하는 것일 뿐이다. 현명한 사람이라면 정의를 운수에 내맡기려 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다수의 힘을 통해 승리하기를 바라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오로지 이 세상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 여기 온 것이 아니라 좋건 나쁘건 여기서 살려고 온 것이다. 한 사람이 모든 일을 다 할 수는 없으며 그 중 어떤 일만 하면 된다.>

우리들은 이 땅의 이민자이자 이 땅의 시민입니다. 물론 서로 다른 다양한 처지와 모습으로 삽니다. 어떤 모습으로 살든 마땅히 사람으로서 존중받는 삶을 살 권리가 있습니다. 그 권리를 위해 따르는 의무 또한 다하며 삽니다.

우리 시대의 자유인 작가 유시민이 최근 개정판을 낸 <국가란 무엇인가>에 쓴 맺음말 가운데 남긴 말입니다.

<어떤 훌륭한 지도자가 나타나서 정의를 실현할 능력 있는 국가를 만들어주기를 기대하는 것은 헛된 일이다. 아무리 뛰어난 개인도 혼자 힘으로 훌륭한 국가를 만들지는 못한다. 훌륭한 국가를 만드는 것은 주권자인 시민들이다. 어떤 시민인가? 자신이 민주공화국 주권자라는 사실에 대해서 대통령이 된 것과 같은 똑 같은 무게의 자부심을 느끼는 시민이다. 주권자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가 무엇이며 어떤 의무를 수행해야 하는지 잘 아는 시민,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설계하고 책임지면서 공동체의 선을 이루기 위해 타인과 연대하고 행동할 줄 아는 시민이다. 그런 시민이라야 훌륭한 국가를 만드는데 기여할 수 있다.>

그리고 오늘 내가 살고 있는 여기에서, 시대를 고민하며 사는 필라델피아 친구들이 뜻있는 자리를 마련하였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이 지역에서 인권변호사로 잘 알려진 정학량변호사가  이 땅을 이민자로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오늘 우리들이 처한 현실에 대해 이야기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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