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 만나기

홍길복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 – 14 

제 5강 – 1 : 인문학의 주제 – 사람(Saram) (1)

♦ 이제 인문학의 핵심 주제인 ‘사람이란 무엇인가?’라는 topic을 가지고 함께 생각을 나누어 보려고 합니다. 크게 세가지로 나누어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데 첫째는 서구 인문학에서 보는 인간문제를 살펴 보기로 하겠습니다. 두번째로는 동양 인문학에서 보는 인간 문제를 이야기해 보고 마지막 세번째에는 종합적으로 ‘인간의 품격’( The Road to Character, David Brooks)을 읽으면서 ‘균형잡힌 인간형’에 대한 생각을 나누어 보기로 하겠습니다.

첫번째 주제를 취급함에 있어서 추가로 추천해 드리는 책은 김현경지음, ‘사람 장소 환대’ 입니다.(문학과 지성, 2015년) 먼저 서론적인 이야기를 드린 후, 주로 이 책을 중심으로 현대 서구 인문학이 관심하는 ‘사람 이야기’를 이어가겠습니다.

♦들어가는 말 – 서양의 정신사에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입장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역사를 이어왔습니다.

하나는 유대적 전통과 사고를 대변하는 ‘헤브라이즘’(Hebraism)이고 다른 하나는 그리스적 전통과 사고를 반영하는 ‘헬레니즘’(Hellenism)입니다. 헤브라이즘은 종교적, 심미적, 신앙적이고 헬레니즘은 이론적, 합리적, 이성적입니다. 신과 인간, 신앙과 이성을 제각기 앞세우려고 하는 이 두 가지 사상은 때로는 충돌하고 때로는 타협을 하면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생명의 기원과 인간의 의미에 대해서도 이 두 사상은 서로 다른 입장을 갖습니다. 헤브라이즘에서는 생명은 창조된 것이고 따라서 인간이란 하느님의 피조물이라고 주장 합니다.

유대교와 그 뒤를 이어받은 기독교의 성경과 이슬람교의 코란은 물론이고 히브리적 세계관에 기초한 고대인들 역시 대부분 모든 생명은 조물주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신앙을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 사람들은 자연을 관찰 하면서 먼지나 흙 같은 데서 벌레들이 기어 나오고 작은 미생물들이 생겨나는 것을 관찰하면서 생명의 창조설이 아니라 ‘자연 발생설’을 믿게 되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것을 이론화하였고 그 후 뷔퐁(Buffon 1707-1788 확율과 통계 이론)과 라마르크(Jean Lamarck 1744-1829 용불용설)를 거쳐 다윈(C. Darwin 1809-1882 진화론)에 이르러 이 생명의 자연 발생설은 진화론으로 발전, 확립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이론의 우열을 비교 하거나 비판하지 않고 주로 인문학적 입장에서 헬레니즘의 주장을 살펴 보려고 합니다.

♦ 다음 10개의 예문을 읽으면서 ‘사람을 설명하는 여러가지 방법들’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 나는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이 가는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 나는 정치하는 ‘사람’과는 가까이하지 않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 그는 전라도 ‘사람’입니다. 그는 안동 ‘사람’입니다. 그는 충청도 ‘사람’입니다.

– 일을 시키려고해도 어디 ‘사람’이 있어야지요?

– 돈 좀 있다고 해서 ‘사람’을 무시하지 마십시요.

– 야 이 ‘사람’아 우리가 어디 남이가?

– ‘사람’ 팔자 시간 문제다

– ‘사람’이면 다 사람인가 사람같아야 사람이지

– ‘사람’과 산은 멀리서 보아야 아름답고 좋게 보입니다.

–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났나?

♦ 이제 인류의 진화 모델 중 몇가지만 살펴보시겠습니다.

(1) 지금의 인간과 어느 정도 유사한 형태의 유인원(類人猿)의 출현은 기원 전 약 500-700만년전 아프리카로부터 시작이 되었다고 봅니다.

(2) 그 다음은 ‘오스트랄로피테쿠스(Australopithecus)의 출현인데 지금부터 약 300-400만년 전 이라고 봅니다.

(3) 이어서 발견된 화석을 ‘호모 하빌리스’(Homo habillis,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라고 하는데 이는 약 100-200만년 전입니다.

(4) 이를 전후하여 출현한 것이 ‘호모 이렉투스’(Homo erectus)인데, 두 발로 서서 걷는 인간, 즉 직립원인(直立猿人)입니다. 이때는 약 100만년 전입니다.

(5) 현재의 인간과 가장 유사한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라고 명명된 화석은 인간의 출현을 약 20만년 전이라고 추측 합니다. 화석 연구에서는 이들을 ‘네안데르탈인’ 이라고 부릅니다. 언어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돌이나 나무를 가지고 사냥을 위한 도구를 만들었다고 봅니다.

(6) ‘크로마농인’이라고 이름하는 ‘신인간’의 출현은 지금 부터 약 3-4만 년 전이라고 봅니다. 이들이 현재의 인간과 비슷한 두개골과 골격 구조를 지녔다고 봅니다.

♦ 사람에 대한 일반적 이해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사람은 포유류과에 소속된 영장류입니다. 포유류(哺乳類)란 Mammalia에 속하는 동물로써 새끼에게 젖을 먹이는 동물을 말합니다. 암컷에게는 젖이 나오는 유선이 있고 대부분 몸에는 털이나 가시나 비늘이 있습니다. 영장류(靈長類, Primates)란 가장 뛰어난 능력을 지닌 존재라는 뜻으로 주로 인간을 가르킵니다.

영장류의 특징은 가슴에는 보통 한쌍의 유방이 있고 사지는 물건을 잡기에 알맞고 손가락과 발가락이 각기 5개씩 있으며 손톱과 발톱이 있습니다. 눈은 앞을 바라보고 후각은 발달되지 않았고 뇌와 이빨이 발달되어있으며 종류에 따라서는 꼬리가 있고, 비교적 많지 않은 새끼를 낳고, 새끼를 키우는 데는 시간이 많이 걸리는 동물입니다.

(2) 두 발로 일어서서 움직이며 일하는 직립원인(直立猿人) 혹은 척추동물(脊椎動物)입니다. 따라서 손이 발달되었고 손으로 여러가지 일을 합니다.

(3) 도구를 만들어서 사용할 줄 아는 공작인(工作人)입니다.

(4) 언어를 만들고 그 언어를 사용하여 의사를 소통하는 동물 입니다.

(5) 생각을 하고 그 생각에 따라 말하거나 행동하는 ‘생각하는 존재’요 ‘이성적 동물’입니다.-

(6) 무리를 지어서 이동하거나 집단을 형성하여 삶을 유지하는 공동체적 존재요 사회적 동물입니다.

그들은 무지한 사람들을 사랑한다

홍길복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 – 13

제 4강- 4 : 생각하기 시작하다 (Starting the Thinking) – 인문학의 출발

♦나가는 말 – 폴 부르제(Paul Bourget 1852-1935, 프랑스의 소설가, 비평가))의 말을 새겨두어야 합니다. ‘부탁입니다. 꼭 기억해 두십시오. 당신이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결국 당신은 사는대로 생각하게 될 것 입니다.’

인문학의 출발점은 생각하는 태도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테오도어 아도르노(Theodor L. Adorno 1903 -1969 독일의 사화학자, 철학자. 발터 벤야민, 헤르베르트 마르쿠제, 위르게 하버마스와 함께 비판이론을 주도한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대표자 중 하나)는 이 세계에서 제일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서 사는 사회’를 미국이라고 보았습니다.

물론 이것은 꼭 미국 만이 아니라 미국과 같은 형태의 사회 구조를 지닌 나라들을 이르는 말입니다. 오늘날 미국을 포함하여 신자유주의 시장경제를 추종하는 나라들은 거의가 사람들로 하여금 생각하기 보다는 그냥 주어졌거나 정치가 조작해낸 대중문화를 따라기도록 합니다. 아무 생각없이 스포츠와 영화, 각종 게임과 향락을 따라 갑니다.

‘생각은 당신들이나 하시오. 우리는 그냥 인생을 즐기면서 살고 싶소’가 이 시대 사람들의 삶의 행태입니다.

트럼프는 선거유세 때 내놓고 말했습니다. ‘나는 무지한 사람들을 사랑한다.’ 이런 ‘사유하지 않음으로 생기는 대중의 무지’가 우리 시대의 사회와 문화의 토양이 되고 있습니다.

(참고 서적 – 마르쿠제의 ‘일차원적 인간’ 에리히 프롬의 ‘자유로부터의 도피’ 아도르노의 ‘계몽의 변증법)

(김기춘이나 조윤선만 잘못된 사람들인가? 물론 그들은 잘못된 정책을 결정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과 함께 국가로부터 봉급을 받으면서 일한 과장, 국장, 실장, 차관보들은 ‘영혼 없는 기계들 입니까?

총회장이니 담임목사들, 혹은 총무원장이나 주지 스님만이 오늘의 종교계를 혼란하게 만들어 놓는 사람들인가? 다른 평신도들과 불자들, 장로들과 보살들에게는 책임이 없는가?

세월호 사건에서 우리는 보았습니다. ‘어른들이 하라는 대로 말없이 순종만 하면 우리 모두 죽는다’ ‘움직이지 말고 가만히 있으라고 해도 절대로 가만히 있으면 안된다’

기성 세대의 정치인, 교수, 언론인, 목사, 신부, 스님들이 하라는 대로 하면 다 죽습니다. 그들이 입다물고 가만히 있으라고 해도 떠들고 소리 지르고 반항하고 소란을 피워야 합니다. 그게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 세월호는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결정하는 자 만이 산다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 Comments & questions.
  • Sharing – 무엇이 우리를 의심하고 생각하지 못하게 하는 것들일까요? 그 리스트를 만들어 봅시다. 어떻게 그런 것들을 극복해 내고 끝까지 의심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우리가 맞을 아침

이제껏 살아오면서 한국 대통령 선거에 참여했던 적이 단 한번도 없다.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첫번째 대통령 선거는 박정희와 윤보선이 경쟁했던 1963년의 일이다. 아버지의 인쇄소가 놀이터였던 까닭에 또래들 보다 일찍 한자를 깨우친 나는 당시 동아일보의 냄새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국민학교 시절이었다.

박정희와 윤보선이 두번째로 맞붙었던 때에도 나는 여전히 미성년자였다.

박정희와 김대중이 나섰던 1971년 대통령 선거 때에 나는 김대중의 ‘대중경제론’에 빠졌었다. 김대중의 ‘대중경제론’을 주도해 만든 박현채선생님께 일년 동안 경제학 강의를 들었던 때는 1979년이었고, 내 삶 속에 누린 축복 가운데 하나이다. 아무튼 1971년에도 나는 여전히 투표권이 없는 십대였다.

내가 선거권을 가질 무렵 이후로 대한민국 국민들은 대통령을 직접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빼앗겼고, 다시 직선제로 바뀐 1987년에는 나는 이미 대한민국을 떠났으므로 당연히 대통령 선거를 해 본 적이 없다.

내가 첫번째로 대통령선거에 참여했던 것은 부시(George Walker Bush)와 고어(Albert Arnold “Al” Gore Jr)가 맞붙었던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였다. 이 때에 나는 ’80-20 Initiative’라는 아시안 정치 참여 단체에 속해 고어를 위한 선거운동을 했었고, 그 결과를 아파하며 통음을 했던 기억이 있다.

나와는 무관한 일이 되어버린 한국 대통령 선거가 다시 가깝게 느껴지게 된 것은 인터넷 때문이다. 2002년 노무현 당선은 마치 내가 투표한 것처럼 가깝게 다가왔다. 그날 밤 우리 집에서는 몇몇 뜻이 엇비슷한 사람들과 믿기지 어려울 만큼 변한 한국 사회를 이야기하며 만취했었다. 그들 중 몇은 당시 새 행정부에서 요직을 맡기도 하였다.

이후 설마했던 이명박, 박근혜의 당선은 지난해 트럼프(Donald John Trump)의 당선만큼이나 내겐 참 낯선 결과였다.

그리고 이제 다시 코앞에 다가온 한국대통령 선거에 대한 뉴스들을 훑어보며 스치는 몇 가지 생각들이 있다.

대통령 선거에서 누구를 선택하든 “사회계약은 어느 한 사람의 추상적인 공동체가 아니라 사회의 다수파에게 권력을 양도하는 것”이라는 로크(John Locke)의 말처럼, 선택한 그 시대 그 곳에 사는 공동체의 몫이라는 것이다. 내가 이 땅에서 지금 트럼프를 보며 살 듯, 이명박, 박근혜의 권력을겪었던 사람들이 어떤 선택하든 그 공동체의 몫이다. 다만 한국인들의 선택에 크건 작건 내 생활에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는 한국계 이민자이기에 비록 투표권은 없지만, 내 관심이 이어지는 것이다.

바라기는 마이클 샌델(Michael J. Sandel)이 미국사회가 정의로운 공동체가 되기를 기원하며 이야기한 ‘공동선의 정치’를 펼칠 만한 인물이 뽑혀지기를 기대해본다. 시민의식, 희생, 봉사, 시장의 도덕적 한계에 대한 깨달음, 불평등, 연대, 시민의 미덕, 도덕적인 참여 정치 등의 고민을 가진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램이다.

이쯤 살다보니 사람의 생각이나 행동이 제 본성과 살아온 과정을 배제한 채 바뀌기란 좀처럼 힘든 일임을 알게되었다. 특히 정치인들은 더욱 그렇다. 정치꾼들이 조작한 상징에 빠져 자신들이 겪어내야만 하는 세월을 맡기지 않는 시민의식이 크게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내가 참 좋아한 연기인 김영애선생과 황금찬시인의 부고 소식도 크게 다가온다. 내가 사는 동네 70넘은 올드 타이머가 종종 모주꾼이었던 고등학교때 국어 선생님 이야기를 하곤한다. 바로 황금찬 시인이다.

또 다시 아침을 그리며


아 침

  • 황금찬(黃錦燦)

 

아침을 기다리며 산다./ 지금은 밤이래서가 아니고/ 아침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침을 맞으면/ 또 그 다음의 아침을/ 기다리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수없이 많은 아침을/ 이에 맞았고 또 맞으리/ 하나 아침은 기다리는 것이다.

 

이미 맞은 아침은/ 아침이 아니었고/ 이제 맞을 아침이 아침일 것 같다./ 아침을 기다리는 것은/그 아침에 날아올/ 새 한 마리가 있기 때문이다.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악이다

홍길복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 – 12

제 4강- 3 : 생각하기 시작하다 (Starting the Thinking) – 인문학의 출발

♦생각의 탄생’

미시간 주립대학 교수인 로버트 루트번스타인과 역사학자이며 시인인 그의 부인 미셀 루트번스타인이 함께 쓴 ‘생각의 탄생Spark of Genius(2001)’을 검토해 보겠습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종래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관심을 모았지만 지금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느냐?’로 촛점이 바뀌어졌다고 봅니다. 이것이 그가 말하는 ‘창조적 생각하기’이며 ‘생각을 다시 생각하기’입니다.

루트번스타인 부부는 이 책에서 레오나르드 다빈치, 아인슈타인, 피카소, 마르셀 뒤샹, 버지니아 울프, 제인 구달, 스트라빈스키, 마사 그레이엄 등 역사상 위대한 인물들의 ‘생각하기’를 살펴봅니다. 그들은 도대체 ‘생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을 했는지’ 그리고 생각하는 방법은 어떻게 배웠는지를 기술합니다.

동시에 저자는 이들 역사상 소위 뛰어난 인물들만이 ‘창조적 생각’을 했던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도 ‘생각하는 방법을 바꾸기만 하면’ 창조적 생각을 할 수 있다고 말 합니다.

untitled예컨대 르네 마그리트의 ‘이미지의 배반’(1929)을 생각해 봅시다. – 실제로 그 그림은 파이프입니까, 아니면 파이프의 개념이라고 보십니까? ‘이것은 사과가 아닙니다’라는 이미지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럴 경우 우리는 ‘실재’(Reality)와 ‘이름-개념’(Name, Concept)을 어떻게 구분 할 수 있을까요? 이 둘은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일까요, 아니면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걸까요?

루트번스타인은 ‘생각과 대상’ ‘사고와 도구’를 분리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음과 같은 13 가지 단계를 통하여 ‘우리의 생각이 탄생된다’고 봅니다. 모든 ‘생각하기’는 반듯이 어떤 대상의 존재와 그 존재에 대한 주체자의 관찰로 부터 시작된다고 보았습니다.

‘창조적 생각’의 단계입니다.

(1) 관철하기 – 시각, 청각, 후각, 미각, 등 모든 감각적 접근과 경험하기가 첫 단계입니다.

(2) 형상화하기 – 관찰에서 얻은 것들을 이미지로 형상화하는 단계입니다. 그러나 이 형상화는 모두가 같을 수는 없습니다. 예컨데 장미 꽃을 관찰한 후, 그 아름다움을 시각적인 그림이나 글로 형상화 할 수도 있고, 그 향기를 따서 향수를 만들어 후각적으로 형상화 할 수도 있고, 그 아름다움을 음악으로 형상화 할 수도 있습니다.

(3) 추상화의 단계입니다. 관찰한 대상에서 일체의 껍데기들은 다 벗겨버리고 최종적인 본질만 보는 단계입니다. 피카소의 그림들은 아주 단순합니다. 본질만 그렸기 때문 입니다. 겉으로 나타난 형상은 다 걷어버리고 사물의 핵심만을 추상화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간단히 제목만 열거하겠습니다.

(4) 패턴 알기 단계 (5) 패턴 만들기의 단계 (6) 유추 단계 (7) 몸으로 생각하는 단계 (8) 감정 불어넣기 단계 (9) 차원을 바꾸어 보는 단계 (10) 모형을 만들어 보는 단계 (11) 놀이와 즐기는 단계 (12) 변형의 단계 (13) 통합의 단계.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Eichmann in Jerusalem)

유대인으로서 독일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1963년에 출간한 책입니다.

내용은 나치 정권 아래에서 수많은 유대인들을 학살하는데 앞장 섰던 아이히만이 1960년 아르헨티나에서 체포되어 1961년부터 2년 동안 예루살렘에서 진행된 아이히만의 재판에 직접 참관한 재판 기록 입니다.

원래 이 책의 처음 제목은 <A Report on the Banality of Evil> 이었습니다. Banality라는 단어의 뜻은 ‘너무나 흔하고 흔하여 아주 쉽게 예측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말로는 흔히 ‘악의 평범성’이라고 번역해 왔습니다. 악의 일상성, 악의 진부함, 악의 흔함이라고도 해석 할 수 있겠습니다.

아렌트는 이 책에서 자신이 본 아이히만은 그렇게 수 많은 사람을 죽일 만한 악한 사람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보통 사람이요, 그 개인적 성품을 놓고 보면 참으로 착하고 선하고 책임감이 강하고 친절한 사람이었다고 말 합니다.

아이히만은 주장합니다. ‘나는 운이 없어서 나쁜 정부의 공무원이 되었을 뿐이지 사실 나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여기에서 아렌트는 두가지를 지적 합니다. 첫째는 ‘악의 평범성’ –The Banality of Evil- 입니다. 사실 ‘악’이란 어떤 특별한 것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것이요, 평범성 속에서 일어나는 것이라는 관찰입니다. 아렌트는 ‘모든 사람들이 아주 당연하게 여기고 별 ‘생각없이’ 평범하게 행하는 일들이 악이 된다’는 점을 지적 합니다. 악이란 특별한 사람이 특별히 악한 생각이나 악한 의도를 갖는 데서 출발되는 것이 아니라 그 누구든지 그 어디서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겁니다.

아이히만은 독일 국민들에 의해서 정당하게 투표로 선출된 히틀러 정권 아래에서 공무원으로써 그에게 주어진 책무에 성실하게 일한 사람입니다. 그는 공무원 수칙에 어긋난 일을 한 사람이 아닙니다. 아이히만은 말합니다. ‘그 일은 사실 내가 아니라 누가 그 위치에 있었더라도 책임감을 가지고 해야만 했을 일 입니다’ 그는 상관의 명령에 충실하게 복종했고 반항을 하거나 뇌물을 주거나 그 어떠한 불의도 행하지 않았습니다. 아렌트는 여기서 악과 불의는 착하고 선한 사람도 넉넉히 저지를 수 있는 ‘평범성’을 가지고 있다고 말 합니다.

두번째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악을 행한다’는 지적 입니다. 자기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주어진 일을 기계적으로 행하는 것은 개인적 악일 뿐만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에게 비극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적시 합니다.

아이히만은 착한 사람이었지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었습니다. 여기서 아렌트는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악이다’라는 유명한 명제를 던집니다. 1962년 5월 31일 교수대에서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아이히만은 ‘자신의 악과 죄를 인정하거나 후회하지 않고’ 죽었습니다. 그는 성실했고 진실했지만 ‘생각하는 것’은 거부한 사람입니다.

생각하지 않는 것은 가치를 판단하지 않는 것이고 정의와 불의를 분별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렌트는 말합니다. ‘아이히만은 투철한 준법정신과 성실한 삶의 태도를 지닌 사람입니다. 그것들은 결코 죄가 되지 않습니다. 그가 유죄인 이유는 오직 생각하지 않은 것이요, 생각하지 않고 복종한 것입니다. 자신이 하는 일의 의미, 그것이 미치는 결과를 생각하지 않은 것이 악이고 죄입니다’ ‘나는 그저 나에게 주어진 일을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서 했을 뿐입니다’라고 아이히만은 말했습니다.

결국 아이히만의 죄는 첫째, 생각하지 않고 말하고 생각하지 않고 일 한 것이며 둘째, 주어진 일에 대하여 주체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맹목적으로 순종한 것이며 셋째, 주어진 일에 대하여 ‘아니오’라고 말하지 않은 것입니다.

제 2차 세계 대전은 물론 모든 전쟁과 오늘날도 계속되는 공무원들의 ‘영혼 없는 공직 수행’과 개별적 항거를 무시하고 자행되는 집단적 행동들은 인간에게서 ‘생각할 수 있는 자유’를 앗아가는 무서운 범죄 행위입니다.

아렌트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 자 이제부터는 생각하고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고 생각하고 믿으시겠습니까, 아니면 그냥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고 성실하게 임하시겠습니까?’

생각의 시작

홍길복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 – 11

제 4강- 2 : 생각하기 시작하다 (Starting the Thinking) – 인문학의 출발

♦ 생각이란 무엇일까요?

(1) 어떤 현상이나 사건에 대하여 의구심을 가지고 이상하게 여기는 것

(2) 지난 날 어떤 사람이 한 말이나 일 혹은 일어난 사건에 대하여 기억해보는 것

(3) 어떤 일에 대하여 관심을 갖거나 그 일을 하려고 마음을 먹는 것

(4) 어떤 일이 앞으로 일어 날 것이라고 상상해 보는 것

(5) 어떤 일이나 사람에 대하여 느낌이나 의견을 가지는 것

(6) 어떤 사람이나 사물에 대하여 머리를 써서 헤아리고 판단하는 것

(7) 어떤 일에 대하여 사리를 분별하는 것

(참고 : 생각과 마음의 차이점은 무엇일까요? 생각이나 마음은 비슷한 측면이 있습니다. 생각이나 마음은 똑같이 인간의 느낌과 의지를 표현하는 본질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은 말이나 글, 그림이나 춤 같은 동작으로 그 느낌이나 주장, 의지나 결심을 일정 부분 표현 할 수 있는데 마음은 언어나 문장, 예술이나 동작으로는 그의 의견이나 결단을 충분히 표현 하기가 어렵습니다.)

 ♦ 서양에서는 인간들이 언제부터 생각하기 시작했을까요?

(1) 언제부터였나요? – 기원전 6세기 후반부터 4세기 후반기에 일군의 사람들은 날마다 눈 앞에서 전개되는 자연 현상의 변화에 대하여 의아하게 생각하기를 시작하였습니다. 그 전 까지는 눈 앞에서 전개되는 자연 현상의 변화에 대하여 두려움과 공포심이 가득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숭배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이런 자연의 변화에 대하여 ‘이상하게’ 생각하고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왜 그렇지?’ ‘이상한데?’ ‘아무래도 뭔가 다른 게 있어!’ 이것이 바로 자연 현상에 대해 ‘신화적 응답’만 해 왔던 사람들이 ‘합리적 대답’을 시도한 인류 최초의 변화였습니다. 소박하지만 미신에서 이성으로 서서히 바뀌어가는 첫 발자국은 이렇게 출발이 되었습니다.

(2) 그들은 어디에 살던 사람들이였나요? – 지중해를 생각해 봅시다. 동쪽에는 팔레스타인과 레바논이 가로막고 있습니다. 남쪽에는 이집트를 중심으로 북 아프리카가 있습니다. 서쪽으로 가면 멀리 스페인을 지나 대서양으로 이어집니다. 북쪽에는 그리스의 수도 아테네와 그 아래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부터 동편에 있는 에게 바다를 건너 드넓은 소아시아와 특히 이오니아 땅이 펼쳐저 있고 그 북쪽으로는 흑해로 연결이 됩니다.

여기 지금의 터키 땅 서쪽에는 밀레토스(Miletus)라고 하는 도시국가가 있었습니다. 바로 이 밀레토스를 중심하여 몇몇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들을 ‘이오니아 학파’ 혹은 ‘밀레토스 학파’라고 부릅니다.

(3) 그런데 왜 이 지역에 살던 사람들이 이렇듯 ‘생각하기’를 시작하게 되었을까요? 이유는 경제적으로 ‘먹고 살 만 했기 때문’입니다. 기원 전부터 이 지중해 북쪽에 살던 사람들이 여유로운 삶을 누릴 수 있었던 이유는 지중해성 기후로 인한 따뜻한 날씨와 거기에 따른 풍족한 삶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입니다.

포도나무와 올리브나무는 심는대로 열매를 맺었고 밀을 비롯한 각종 곡식들과 과일들은 사람들의 생활을 부유하게 했고 여유롭게 만들어 주었습니다. 거기에다 앞마당 같은 지중해는 아시아와 유럽과 아프리카가 만나는 곳으로 각종 해상 무역을 가능하게 했습니다.

하여튼 기원전 6 세기 이후 지중해 북쪽에 살던 사람들에게는 먹고 사는 일에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에게는 부와 여유가 주어지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 까요? (1) 각종 쾌락을 추구하게 되고 도덕적으로 부패해 지게 되거나 (2) 각종 예술 – 음악과 미술, 문학 – 시와 연극을 비롯하여 스포츠가 발전 되거나 (3) 여러 가지 지적 호기심이 일어나서 학문이 발전하게 됩니다.

(4) 출발점은 무엇이었나요? – 그런데 그들이 이렇듯 자연의 변화 앞에서 무엇인가 의혹을 갖고 생각을 하게 된 데는 몇 가지 동기들이 있었습니다.

그 첫째는 ‘경이로워하는 마음wonder’ 혹은 ‘호기심curiosity’ 입니다. 사람은 자연이든 사물이든 인간이든 그 무엇에 대해서든지 놀라워하고 경이로워하고 호기심의 발동되어야만 생각하는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이것을 흔히 ‘관심 concern’ 혹은 ‘흥미interesting’ 라고 합니다.

둘째는 ‘의심doubt’ 하고 ‘질문question’ 하는 단계입니다. 의심하지 않는 사람은 아무 것도 물어 볼 것이 없고 물어보지 않는 사람은 아무 것도 알 수 없습니다. 의심하지 않는 사람은 생각이 없는 사람이고 질문하지 않는 사람은 이성이 없는 사람입니다. 말 같지 않는 것을 가지고서라도 물어보는 사람이 말 되는 것을 가지고서도 물어보지 않는 사람 보다는 훨씬 더 진리에 가까이 갈 수 있습니다.

사실 종교나 인문학이 지향하는 목표는 비슷합니다. 진리를 찾아가는 겁니다. 그러나 이 둘은 전혀 상반된 방법으로 접근 합니다. 종교는 말없이 믿음으로 진리를 찾을 수 있다고 하고 인문학은 끝까지 의심함으로 진리에 가까이 간다고 말합니다. 목표가 동일하다면 싸우지 말고 서로 ‘당신은 그 길로 가고 나는 이 길로 갈 테니까 우리 훗날 진리의 바다에서 만납시다’ 라고 말할 수는 없을까요?

(5) 옛날 그리스 사람들은 처음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 Thales를 비롯하여 소크라테스 이전까지의 초기 그리스 철학자들은 주로 우주와 만물의 ‘본질Arche’ 이 무엇인지를 질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따로 시간이 주어지면 검토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생각에 대한 동서양의 차이

홍길복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 – 10

제 4강: 생각하기 시작하다 (Starting the Thinking) – 인문학의 출발

  1. 생각에 대한 동서양의 차이

지난 3 시간을 통하여 우리는 인문학의 개론을 살펴보았습니다. (1) 인문학을 하는 이유와 목표 설정 (2) 인문학의 정의와 역사적 흐름 (3) 인문학은 어떻게 하는가? 인문학의 방법론을 함께 공부했습니다. 이제부터는 인문학 각론을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그 출발점입니다. ‘생각이란 무엇이고 또 생각은 어떻게 생각하게 되는가?’ ‘생각에 대해 생각하는 것’ 부터 시작해 보겠습니다.

  • 들어가는 말

(1) 먼저 질문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서양철학에서는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라고 말합니다. 다른 동물들과 달리 오직 사람만이 생각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고 여겨왔으며 동시에 이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이성적 존재’라고 여겨왔습니다. 인간은 진정 이성적 동물이라고 확신 하십니까?

(2) 두번째 질문 입니다. 로댕의 조각품 ‘생각하는 사람’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다고 보십니까? 곧은 낚시줄을 드리우고 세월을 기다리는 강태공의 모습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이 둘을 비교해 볼 떼 당신은 무슨 생각을 하시게 됩니까?

(3) 세번째 질문입니다. ‘이 문제, 혹은 이 사건에 대해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나 사건에 대하여 당신은 당신의 입장과 견해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아니면 판단(생각)을 보류하시겠습니까? (예컨데 지난 주일 당신네 교회 목사의 설교나 신부의 강론에 대해서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트럼프가 주장하는 America First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 대한민국 대통령 탄핵 심판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 ‘나도 문신을 하겠다’, ‘그 남자 친구와 함께 몇 년 정도 살아보고 나서 결혼 할지 안할지를 생각해 보겠다’, ‘나는 그 흑인 청년과 결혼하겠다’고 말하는 당신 자녀에 대하여 당신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4)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이기는 하지만 ‘항상’ ‘모든 경우에 있어서’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많은 경우에 있어서 우리는 생각하고 말하거나, 생각하고 난 후에 행동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습관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경우에 주로 생각하고 말하거나, 생각하고 행동하게 됩니까? 소위 ‘생각하는 것’은 언제 일어나는 일일까요? (일상적이고 ‘친숙한 일’에 대해서도 생각을 하십니까? 아니면 갑작스런 일이나 기대하지 않았던 어떤 ‘낯섦’과 부딪치게 되었을 경우에만 생각을 하시는 편 입니까?)

‘생각’에 대하여 서양과 동양은 제 각기 달리 이해해 왔습니다. 서양은 긍정적, 적극적이고 동양은 소극적, 부정적입니다. 서양은 인문학적이고 기능적인데 반하여 동양은 종교적, 혹은 도덕적이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생각하라’ – ‘생각하지 말라’ 생각에 대한 동서양의 다른 입장을 정리해 봅시다.

  • 생각하라 – 서양 인문학의 기본 틀 – ‘생각하기’

파스칼(Pascal)은 말했습니다. ‘인간이란 하나의 갈대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도 자연 가운데서 가장 연약한 갈대이다. 그러나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매 순간 마다 생각하고, 생각을 통하여 판단하고, 판단을 통하여 결정하고, 결정을 통하여 행동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모든 행위는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데카르트(Descartes)의 말입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Cogito ergo sum) 그는 존재가 생각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인간을 존재하게 한다고 보았습니다.

모리스 메를로-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1861, 프랑스 철학자)의 말도 비슷합니다. ‘나는 존재하는 동안은 생각하고 생각하는 동안은 존재한다. 존재가 멈추어지면 생각도 멈추고 생각이 멈추면 존재도 멈춘다’

서양의 인문학은 생각 Thinking, 사색 Speculation, 사유 Meditation를 인간 만이 지닌 독특한 기능이요, 인간을 인간되게하는 특징이라고 여겨왔습니다. 그리고 이 생각하게하는 능력이 바로 이성 Reason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생긴 것은 사람처럼 보이는데 생각하는 능력이 없다면 그는 이성이 없는 존재로써 간주 되거나 동물 중 하나라고 여겼습니다.

  • 생각하지말라 – 동양사상의 최종적 목표 – ‘생각하지 않기’

채근담에는 ‘무년무상無念無想’이란 말이 있습니다. ‘아무 것도 마음에 담아두지 말아라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말아라’ ‘생각이 많으면 번민이 많고 염려가 많으면 고통도 많다’고 합니다.

신학적이라기 보다는 인문학적이라고 할 수 있는 고대 유대교의 지혜문학에도 이런 말씀들이 이어집니다. 동양이나 서양의 종교인들이나 성현들이 가르치는 교훈은 비슷합니다.

특히 동양에서는 ‘무상無想을 무상無相’과 동일시 했습니다. 무상無相에는 4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아상我相, 곧 자신의 생각과 생각의 뿌리인 고집을 버리는 것이요, 둘째는 인상人相, 곧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그 어떤 다름과 차이를 구별을 하지 아니하는 것이요, 셋째는 중상衆相, 곧 인간성 속에 있는 자연스런 본능, 식욕, 성욕을 포함한 일체의 욕구를 모두 버리는 것이요, 넷째는 수상壽相, 즉 살고 싶어하는 생존의 요구를 포함하여 오래 살고 싶어하는 욕망을 버리는 것 입니다. 자기도 생각지 말고 남도 의식하지 말고 욕망에 매이지 말고 오래 살고자하는 마음 까지도 바라지 않는 것이 바로 무념무상無想無念이라고 했습니다.

인간이 무엇인가를 생각한다는 것은 결국 자기를 생각하는 것이요, 자신의 탐욕을 이루려는 생각이라는 것이 근대 이성주의에 앞선 고대 동양인들의 마음가짐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생각해서는 안된다. 인간이 무엇을 생각한다는 것은 소유욕과 연결되는 범죄 행위와 속결된다. 잊어버려라. 잊어버렸다는 사실 까지 잊어버려야 그게 진정으로 잊어버린 것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무심無心이라 했습니다. 무심이란 마음이나 생각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일체 모든 일에 마음을 쓰지 않는 상태, 곧 집착執着을 버린 상태를 말합니다. 동양에서는 인간이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는 상태를 최고의 이상적 단계라고 보았습니다.

지독하게 속이면…

오늘 아침에 눈을 떠 서성이다가 책장 속 평소 눈길조차 제대로 주지 않던 곳에 꽂혀있는 책 하나 눈에 뜨였다. 오래 전 도서출판 청사(靑史)에서 펴낸 ‘칠십년대 한국일지’라는 책이다. 1970년부터 1979년까지 10년 동안 남한(대한민국)에서 일어났던 일들을 실록을 엮듯 날자 별로 정리해 놓은 책이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이던 때로부터 대학생활, 군생활, 실업자생활, 사회생활, 다소 엉뚱했던 신학생생활을 이어갔던 내 인생에 있어 가장 찬란(?)했던 시절의 남한(대한민국) 실록이다.

후루룩 넘기는 책갈피에 숨겨진 세월의 거짓들을 읽는다.

2017년 이 봄에 내가 까닭없이 슬퍼지는 이유가 짚을 듯 하다.

이어 시집을 꺼내든다.

그것하고 와서 첫 번째로 여편네와/ 하던 날은 바로 그 이튿날 밤은/ 아니 바로 그 첫 날 밤은 반시간도 넘어 했었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그년하고 하듯이 혓바닥이 떨어져나가게/ 물어제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지간히 다부지게 해줬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이게 아무래도 내가 저의 섹스를 槪觀(개관)하고/ 있는 것을 아는 모양이다/ 똑똑히는 몰라도 어렴풋이 느껴지는 모양이다/ 나는 섬찍해서 그전의 둔감한 내 자신으로/ 다시 돌아간다/ 연민의 순간이다 황홀의 순간이다/ 속아 사는 연민의 순간이다

나는 이것이 쏟고 난 뒤에도 보통 때보다/ 완연히 한참 더 오래 끌다가 쏟았다/ 한 번 더 고비를 넘을 수도 있었는데 그만큼/ 지독하게 속이면 내가 곧 속고 만다


 남에게 犧牲(희생)을 당할만한/ 충분한 각오를 가진 사람만이/ 殺人(살인)을 한다

그러나 우산대로/ 여편네를 때려눕혔을 때/ 우리들의 옆에서는/ 어린놈이 울었고/ 비오는 거리에는/ 四十(사십)명가량의 醉客(취객)들이/ 모여들었고/ 집에 돌아와서/ 제일 마음에 꺼리는 것이/ 아는 사람이/이 캄캄한 犯行(범행)의 現場(현장)을/ 보았는가 하는 일이었다

—아니 그보다도 먼저/ 아까운 것이/ 지우산을 現場(현장)에 버리고 온 일이었다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것을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언론의 자유라고 조지훈이란 시인이 우겨대니/ 나는 잠이 올 수밖에/ ‘김일성 만세’/ 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 인정하는 데 있는데/ 이 것을 인정하면 되는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한국/ 정치의 자유라고 장면이란 관리가 우겨대니/ 나는 잠이 깰 수밖에.


 

내 아버지 세대의 사람 시인 김수영의 시편들, 곧 “성(性), 罪(죄)와 罰(벌), 김일성 만세”이다.

아마 2017년을 사는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미친 놈>일 뿐. 김수영의 삶에 대한 솔직함은 끼어들 틈 조차 없이.

허나, 나는 2017년 4월에 김수영이 노래하는 “지독하게 속이면 내가 곧 속고 만다”에 꽂힌다.

세상이 온통 제 스스로에게 지독하게 속고 있는 듯한 2017년 서울이 아직도 이루지 못한 1960대 김수영의 솔직함이 통하는 세상으로 바뀌기를 꿈꾸며.

기게스의 반지(Ring of Gyges)

‘리디아의 왕을 섬기던 목동 기게스(Gyges)는 어느 날 지진으로 갈라진 땅 틈에서 발견한 반지를 끼고 투명인간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평소에는 남의 눈을 의식해 상상하지도 못했던 일을 할 수 있게 된 그는 왕궁에 들어가 왕비를 유혹해 간통하고, 왕을 죽인 뒤 자신이 왕에 올랐다.’

철학자 플라톤의 저서 《국가》에 나오는 가공의 마법 반지, 바로 기게스의 반지(Ring of Gyges)이야기다.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글라우콘은 이 이야기를 하며 스승에게 물었다. “이런 반지가 두 개 있어서 하나는 도덕적인 사람에게 주고 다른 하나는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준다면 어떻게 될까요?” 스승에게 이 질문을 던졌던 글라우콘은 기게스의 반지(Ring of Gyges)를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제 욕심만으로 가득찬 삶을 살 것이라는 예단이 있었다.

2017년 내가 뉴스로 접하는 세상들은 마치  기게스의 반지를 끼고 자기 욕망으로만 사는 사람들로 넘쳐나는 듯 하다. 글라우콘의 의심이 결코 예단이 아니라 이른바 진실이 아닐까하는 믿음이 들 정도이다.

신에 대한 나의 믿음조차 흔들리는 순간, ‘그게 아니다’라고 소리치며 내게 다가오는 사람들이 있다. 뱃사람들을 위해  예수선교를 하는 Philadelphia 에 있는 Seamen’s Church의 David Reid 목사도 그 중 하나이다.

기게스의 반지(Ring of Gyges)가 이끄는 유혹에 눈길조차 건네지 않는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세상, 바로 신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만드는 세상이다. 어쩜 그것은 진실로 사람에 대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만들어 나가는 세상일게다.

David Reid목사가 ‘세월호 참사 3주기’를 함께 기억하자며 세상을 향해 던지는 초대 글이다.


David Reid가 초대합니다.

4월 16일 일요일에, 필라델피아 소재 Seamen 교회 예배당(Seamen’s Church Institute Chapel)에서, 3년전 대한민국 페리 “세월호”가 연안에 침몰하여 목숨을 잃은 304명을 위한 추도 예배를 제가 주도할 예정입니다. 그날 아침 270명의 고등학생이 목숨을 잃었고, 그들은 수학여행길이었습니다. 저는 한인회와  ‘세월호 유가족과 연대하는 필라델피아 사람들 (Philadelphia SESAMO)’과 협력하여, Seamen 교회 예배당에서 부활주일 오후에 개최될 예배 절차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뉴저지주 포트리에서 오는 세 명의 한국인 고등학생들이 한국의 전통적인 북을 연주하는 특별 음악 공연 순서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다음 유튜브에 링크하시면, 그들의 음악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m-utvfhZEg&feature=youtu.be.

우리는 또한 다음 유튜브 링크를 사용하여, 한국어로 주기도문을 암송할 것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OEX9x5VUqQ4

예배 마지막에는, 세월호 희생자 부모들로 구성된 ‘416 합창단’이 부르는 노래 영상을 보여드릴 것입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PRAjZsVNh2U

다음은 그 노래의 감동적인 가사입니다:

약속해

우리가 너희의 엄마다/ 우리가 너희의 아빠다/ 너희를 이 가슴에 묻은/ 우리 모두가 엄마 아빠다/ 너희가 우리 아들이다/ 너희가 우리의 딸이다/ 우리들 가슴에 새겨진/ 너희 모두가 아들 딸이다

그 누가 덮으려 하는가/ 416 그 날의 진실을/ 그 누가 막으려 하는가/v애끓는 분노의 외침을/가만히 있지 않을거야/ 우리 모두 행동할거야/ 이 마저 또 침묵한다면/ 더 이상의 미래는 없어/ 끝까지 다 밝혀낼거야/ 끝까지 다 처벌할거야/ 세상을 바꾸어 낼거야/ 약속해 반드시 약속해

*** 이 사건은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해양재난이었으며, 대한민국 전국적으로 큰 충격을 주었으며, 완전한 조사 요구에 대해 전세계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MIT 대학원에 재학 중인 한국학생 권이석이 행한 독립적 분석에 따르면, 2000년 James Reason이 발표한 “스위스 치즈 파라다임(Swiss Cheese paradigm)”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안전장벽이 구조적 결함이 있었다고 합니다.

**** David Reid는 Seamen 교회의 자원 사제이며, Claremont Lincoln University에서 범종교 활동 전공 석사 과정을 밟고 있고, 펜실베니아주 사제사회 회원입니다.


Invitation From:  David Reid

On Sunday April 16th, at the Seamen’s Church Institute Chapel in Philadelphia, I will be leading a service of remembrance for the 304 people who lost their lives three years ago when the Korean ferry “Sewol-Ho ” sank off the coast of Korea. 270 high school students died that morning, they were on a school field trip. I am working with the Korean-American community and the Philadelphia People in Solidarity with the Families of Sewol Ferry (Philadelphia SESAMO) group on the order of service that will be held on Easter Sunday afternoon at the Seamen’s church chapel. We will have a special music presentation by three Korean high school students from Fort Lee, New Jersey, who play traditional Korean drums. You can listen to their music on the following YouTube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tm-utvfhZEg&feature=youtu.be .  We will also be saying the Lord’s Prayer in Korean using the following YouTube link, https://www.youtube.com/watch?v=OEX9x5VUqQ4

At the end of the service we will show the following video of the song sung by the 416 Choir, whose members are the parents of the victims: https://www.youtube.com/watch?v=PRAjZsVNh2U

 

Here are the inspiring words of that song in English:

We are your mothers, we are your fathers,/ we all are your mother and fathers who buried you in our hearts./ You are my sons, you are my daughters,/  you all are our sons and daughters who will live in our hearts. / Who are those trying to cover up the truth of the April 16, / Who are those trying to block up these desperate, furious cries

We won’t stay put/ We all will stand up/ If we still keep silent, there will be no more future/ We will search for the truth to the end,/ We will bring those accountable to justice/ We will change this world/       We promise you, promise you on our conscience.

*** This was the worst maritime disaster that South Korea has ever experienced and it sent shock waves through the nation, there is now a worldwide community of support calling for a full inquiry. Independent analysis done by a Korean graduate student Yisug Kwon at MIT has already shown that there was a systemic failure of safety barriers, the classic “Swiss Cheese paradigm”  that James Reason wrote about in 2000.

**** David Reid : Volunteer Chaplain – Seamen’s Church Institute, Graduate Student – M.A. In Interfaith Action, Claremont Lincoln University, Member – PA Society of Chaplains


 

눈(雪)과 봄(春)

시간이 바뀌며 낮시간이 제법 길어졌다. 주중 일터에서는 크게 느끼지 못했는데 일요일 한낮의 길이가  생각보다 많이 길다. 교회를 다녀온 아내와 함께 집을 나선다. 화창한 봄날인 줄 알고 노란 꽃잎 내민 개나리가 서 있는 곳은 눈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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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눈밭을 뚫고 잔디들은 이미 봄을 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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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가게 일을 도와주는 미얀마 출신  Lou가 알래스카에 사는 동생이 보내주었다며 선사한 양념된 훈제 연어를 들고 부모님을 찾았다. 가려움증으로 오래 고생하시는 어머니가 새로 처방받은 약이 잘 듣는다며 모처럼 화사하게 웃으신다. 아버지는 ‘마침 잘 왔다’며 나를 컴퓨터 앞으로 끄신다. 컴퓨터에 이상이 있다는 말씀이었는데 아무 문제가 없었다. 단지 아버지가 다룰 줄 몰랐을 뿐.

이 겨울이 시작할 무렵에  병원에 들어가셨던 장모가 세상 뜨신 지도 벌써 백일이 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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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모 계신 곳에서 가까이 눈에 닿는 거리에  부모님과 우리 부부가 누울 곳이  마련되어 있다. 이 곳은 이미 완연한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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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내외 먹을 거리 장을 보고 돌와왔건만 아직도 한낮이다.

오늘 아침에 손님들에게 보낸 장자 이야기에 대한 응답들을 보며 저녁을 맞는다.


오늘은 동양의 고전 가운데 하나인 장자에 나오는 이야기 하나 소개해 드립니다.

어느 날 장자와 혜시가 호(濠)라는 강의 다리 위에서 물고기를 구경하고 있었다.

장자가 말했다.  “피라미가 물에서 자연스럽게 유유히 헤엄치고 있는데, 저것이 피라미의 즐거움이라네” 그러자 혜자가 말했다. “자네는 물고기가 아닌데, 어떻게 물고기의 즐거움을 아는가?”

장자가 대답했다. “자네 또한 내가 아닌데, 어떻게 내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르는지 안단 말인가?” 혜자가 말했다. “나는 자네가 아니니까, 물론 자네의 마음을 모르지. 하지만 마찬가지로 자네도 물고기는 아니니까, 자네가 물고기의 즐거움을 모르는 것도, 확실하지 않은가”

당신은 두 사람의 생각 중 어느 쪽이 맞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이 이야기를 들은 옛날 시인 한사람은 이런 시귀를 남겼답니다. “내가 청산을 보며 매우 아름답다고 여기니 청산도 나를 보면 똑같이 느끼겠지!”

이제 봄이 다가옵니다.

보이고 느끼는 모든 것들이 아름답고 재미있고 즐거운 한 주간이 되시길 빕니다.

당신의 세탁소에서

Today, I would like to share a story from “Zhuangzi,” one of the old Oriental classics:

Zhuangzi and Huizi were strolling along the bridge over the Hao River. Zhuangzi said, “The minnows swim about so freely, following the openings wherever they take them. Such is the happiness of fish.”

Huizi said, “You are not a fish, so whence do you know the happiness of fish?”

Zhuangzi said, “You are not I, so whence do you know I don’t know the happiness of fish?”

Huizi said, “I am not you, to be sure, so I don’t know what it is to be you. But by the same token, since you are certainly not a fish, my point about your inability to know the happiness of fish stands intact.”

Which one do you think is right?

Having heard this story, an old poet left the following line of a poem: “As I regard nature very beautiful when I see it, nature must feel the same about me when it sees me!”

Now, spring is just around the corner.

I wish that all that you see and feel will be beautiful, joyful and amusing this week and beyond.

From your clean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