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문화생활 – 신에게 가까이

<4월 16일 이전에도 세상은 언제 침몰할지 모르는 지옥이었고, 우리는 세월호 탑승객이었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비로소 끔찍하게도 잔인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는 눈을 떴다. 생명과 안전보다 돈과 이윤이 우선하는 세상을 보았다. 부패한 정치권력의 무능과 무책임을 보았다. 왜곡과 오보를 남발하는 언론의 현실을 보았다. 그리고 총체적으로 국가가 실종되었음을 보았다. 우리는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목소리를 어떻게 철저히 묻어버리고 은폐하며 억압하는지 똑똑히 보았다. 우리는 끔찍하고 잔인한 세상의 목격자이고 증언자이다.>

‘4.16연대’라는 단체가 자신들의 정체를 밝히고자 선포한 <4월 16일의 약속 국민연대 규약>에 있는 글의 일부이다. 자신들을 <끔찍하고 잔인한 세상의 목격자이고 증언자>라고 규정한 이들이 6편의 독립영화들을 제작했단다. 이름하여 <망각과 기억2 : 돌아 봄>이라는 주제로 만든 영화들이란다.

나는 어제 필라델피아에 올라가 그 여섯 편 가운데 세 편의 영화를 보았다.

첫번 째 상영된 영화 <승선>은 세월호에 승선했다가 ‘생존자’라고 분류되어진 한 사내의 이야기였다. 그랬다. 세월호에서 살아남은 후, 그는 분류되어 버린 인간이 되었다. ‘일반인’ 그리고 ‘생존자’라는 딱지가 그것이었다. 물론 세상 사람 누구도 그에게 그런 딱지를 붙었다는 이는 하나도 없을 것이다. 어찌하리! 그는 분명 그 딱지를 붙이고 살았던 것을. 영화는 그가 그 딱지들을 떼어내는 과정들을 쫓아가고 있었다. “공감과 연대”라는 이름으로 함께하는 이들을.

두번 째 영화 <잠수사>는 세월호를 만나 스스로 짧은 생을 마감할 수 밖에 없었던 잠수사 김관홍과 그 주변 인물들을 기록한 영화였다. ‘김관홍’ – 그는 참 사내였고 참 사람이었다. 영화는 이 간단한 명제를 증명한다. 그는 타고난 그의 재능과 일에 충실하였다. ‘사람을 살리는 일’이 그의 재능이자 일이었다. 그런 그가 아파했다. 어느 순간 그가 하는 일이 ‘사람을 살리는 일’ 대신 ‘죽은 자를 건져내는 일’로 전락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그는 끝내 절망에 이르렀다. 그나마 ‘죽은 자를 기다리는 얼굴들을 외면할 수 밖에 없는 처지로 내몰린’ 자신을 바라본 까닭이다. 영화는 잠수사 김관홍의 잃은 아내와 아이들을 쫓아간다. “공감과 연대”라는 이름으로 함께하는 이들을.

세번 째 영화 <세월 오적(五賊)>은 세월호 참사를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지워버리려고 온갖 수단을 동원했던 다섯 권력 기관에 대해 고발하고 있다. 바로 박근혜, 김기춘, 우병우 라는 이름으로 기억되는 청와대, 해수부, 해경으로 대변되는 행정부권력, 남재준이라는 이름으로 우스개가 된 정보기관 국정원, 조중동, 한경오, KBS, MBC 등등의 언론, 그리고 국해가 되어버린 국회, 이 다섯 권력의 축들의 그 때 그 모습들을 기록한 영화이다. 그들을 고발하는 카메라의 눈 역시 “공감과 연대”라는 이름으로 함께하는 이들의 것이었다.

나는 <끔찍하고 잔인한 세상의 목격자이고 증언자>들이 만든 세 편의 다큐멘타리 영화를 보면서 안도와 희망과 섭리를 보았다.

안도(安堵) – 지난 달 한국의 정권이 바뀐데서 온 안도였다. 영화를 보며 지난 달 정권이 바뀌고 난 후에 세월호 유가족들과 잠수사 김관홍 가족들이 느꼈을 안도가 내가 다가오던 것이었는데, 나는 그 순간 이 안도의 시간들이 오래 이어지기를 기도하였다.

희망 – 희망보다는 소망이 낫겠다. <세월 오적(五賊)>으로 명시된 이른바 권력에 의해 보호받지 못한 지경을 넘어, 권력의 이름으로 무참히 짓밟혔으나 하소연은 커녕 숨소리 한번 제대로 내지 못하고 스러져 간 사람들을 기억할 수 있는 계기가 이제야 마련되었다는 생각에서이다. 세월호 참사를 보며 <끔찍하고 잔인한 세상의 목격자이고 증언자>들이 만들어낸 세상이다. 멀리는 제주 4.3 항쟁에서 가까이는 광주 항쟁까지. 이제는 목격자들과 증언자들이 큰 숨으로 제 소리를 낼 세상이 되어야한다. 과거로부터 미래까지. 더는 오적(五賊)으로 불리우는 권력들을 용납하지 않는 세상에 대한 소망과 희망으로.

그리고 섭리 – 예수쟁이인 나는 결국 성서로 돌아간다. 지금 여기에서 아프고 한맺힌 삶을 사는 이들을 위한 법전인 신명기법전을 이야기하는 성서로 돌아간다. 모세에서 예수까지, 아니 지금 우리들의 삶에 이르기까지. 성서는 모든 법이 있기 전에 삶이 있었다고 증언한다. ‘하나님 앞에서 이웃과 더불어’사는 삶을.

그렇다. <끔찍하고 잔인한 세상의 목격자이고 증언자>인 그들로 하여 세상은 조금은 더 성서에 가까이 다가가고 있을게다.

산에 언덕에

새 정권이 들어선 한국에서 전해오는 소식들을 보고 느끼는 감정들은 사람마다 다를 것입니다. 누군가는 기대와 설렘으로 소식들을 마주합니다만, 어떤 이들은 염려와 불안의 시선을 감추려 하지 않습니다.

무릇 모든 ‘역사는 본질상 변화이며, 운동이며, 혹은 진보’라고 선언했던 어느 역사학자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사는 이들에겐, 정권의 뒤바뀜이나 세상 변화는 모두 역사 발전의 한 과정일 뿐입니다. 나아가 ‘역사란 하나님 나라의 확장사’라는 고백을 하는 이들에겐 믿음입니다.

그 모든 과정 또는 믿음을 이어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살과 뼈를 저미는 아픔과 슬픔으로 곰삭은 한(恨)을 안고 이고 살아내어 역사의 맥을 이어온 사람들입니다.

반세기 전인 1963년에 시인 신동엽은 한반도 남쪽 들녘에 핀 꽃들을 보며 그 역사의 맥을 이어온 사람들을 노래했습니다.

산에 언덕에

– 신동엽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화사한 그의 꽃/ 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 맑은 그 숨결/ 들에 숲 속에 살아갈지어이.

쓸쓸한 마음으로 들길 더듬는 행인아,

눈길 비었거든 바람 담을지네./ 바람 비었거든 인정 담을지네.

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 울고 간 그의 영혼/ 들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2017년 6월 4일 오후 4시 여기 필라델피아에서 우리들이 모여 <승선>, <세월오적>, <잠수사> 등 짧은 영화들을 함께 보려는 까닭은 세월호 참사로 아파하는 이들이 이어가는 역사를 확인하고자 함입니다.

꽃을 보며 ‘울고 간’ 영혼들을 떠올린 시인은 되지 못할지언정, 영화라도 보며 ‘다시 피어나고’, ‘다시 살아가는’ 역사의 맥을 잇는 사람들의 모습을 확인코자하는 작은 몸짓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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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餘裕)

모처럼 맞은 연휴, 습관으로 이른 아침에 일어나 서성이다가 창문을 여니 새소리와 풍경소리, 후두둑 떨어지는 비소리로 집안에 여유가 가득찬다.

무릇 신앙이란 치열해야 마땅한 일이지만 그 역시 삶의 한 부분일 뿐이니, 때론 소소한 감사에 취해도 족하다. 아침 뉴스 속 세상사가 온통 옳고 그름의 싸움처럼 다루어지지만, 사람살이가 매양 그렇게 치열한 것만은 아니다.

오늘 아침 내가 누리는 이 여유는 아마 엊저녁에 함께 시간을 보낸 벗들에게서 비롯 되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삶에서 누리는 소소한 감사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 이야기 속에서 신을 확인하고 고백했다. 한 주간 부딪혔던 일상의 치열함은 각자의 몫일 뿐, 서로가 털어놓은 아주 작은 감사에 모두가 여유로웠다.

그 여유로 우리는 이웃 마을 필라델피아로 진출하여 식도락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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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에 개업해 4대 째, 거의 백 년에 가까운 역사를 자랑하는 deli sandwich 식당의 sandwich 크기는 어마무시해서 허리띠를 풀고 즐겨야만 했다. 음식 뿐만 아니라 주인이나 종원업, 인테리어 까지 지나온 세월만큼 여유로웠다.

느긋한 포만을 즐기며 가는 비 내리는 도시의 밤거리를 걷는 재미를 누려본 적이 언제였던지 가물거렸다.

엊저녁 포만이 이어져 여유로운 아침에 장자 한편을 읽다.

무릇 눈과 귀를 밖이 아닌 안으로 통하게 하고 마음의 작용을 안이 아닌 밖으로 쏠리게 하면 귀신마저도 머무는데, 하물며 사람에 있어서는 두말 할 나위도 없지 않은가!

夫徇耳目內通(부순이목내통) 而外於心知(이외어심지) 鬼神將來舍(귀신장래사) 而況人乎(이황인호)

 

이 나이에 눈물…

이 나이에 TV를 보며 운다. 흐르는 눈물을 감추려 하지도 않는다. 그냥 운다.

광주 항쟁 37주년 기념식 대통령 문재인의 연설을 들으며 운다.

그 때, 서울내기인 우리는 몰랐다. 광주의 아픔을. 그저 우리, 아니 단지 나의 아픔이었다. 쫓기던 나는 그 해 5월과 6월, 합수부 지하실에서 알몸의 수치와 치도곤으로 시간을 보냈었다.

그리고 아픔은 그 때 뿐, 나는 그 날 이후 오늘까지 부끄러움을 안고 살았다. 그저 건강한 생활인으로. 더더우기 멀리 멀리 미국까지 흘러와 이젠 미국시민으로, 딴나라 사람으로.

그렇게 나이 들어가던 내가 운다.

오늘 내 울음은 부끄러움이 아니다. 부러움이다. 자랑스러움이다.

대통령 문재인의 연설은 부러움이자 자랑스러움으로 내 눈물이 되었다.

겪어낸 아픔을 마주보고 치유할 때임을 대통령 문재인이 선언하였기 때문이다.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때와는 다른 알 수 없는 아주 강력한 힘이 그와 함께 하였다. 그게 내 눈물의 원인이었다.

아마 그럴 것이다.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나와 당신 뿐만이 아니라 그 누군가가 하나 둘 늘고 있다는 사실.

바로 그 힘.

이 저녁, 이 나이에 흘리는 눈물이 부끄럽지 않은 까닭이다.

사람다운 사람이란?

홍길복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 – 18

제 6강 – 2 : 인문학의 주제 – 사람(Saram) (2)

 ♦ 오늘의 담론은 ‘동양적 사람 이해’ 혹은 ‘동양적 사람 이해의 방식’입니다.

1. 최근의 경향은 많이 변하고 있지만 전통적으로 서양에서는 사람을 존재론적으로 이해해 왔습니다. 사람은 사람의 형태로 출생하여 ‘여기 이렇게 사람의 모습으로 존재’하면 그것으로써 일단 ‘사람’입니다.

아무리 사람 같지 않은 말과 행동을 해도 일단 사람의 모양을 갖추고 있으면 그는 여전히 사람입니다. 따라서 인간은 ‘인간의 모양을 지니고 있기만 하면’ 그 누구를 막론하고 동등하고 동일한 인권을 갖습니다.

그러나 동양인들은 일찍부터 사람을 실존론적으로 이해하여 왔습니다. 우리 말의 ‘사람’이란 ‘삶’과 ‘앎’의 결합이며 ‘삶을 알므로’ 비로소 사람이 된다고 보는 겁니다. 삶이란 무엇인지, 산다고 하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를 모르는 사람은 아직 사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동양인들이 자주 ‘사람이면 사람인가? 사람다워야 사람이지’라고 말하는 것은 바로 이것을 나타냅니다. 서양에서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비록 사람답지 못한 말과 행동을 한다고해도 그는 여전히 사람입니다.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아래 사람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서구적 인간이해를 그 바탕에 깔고서 하는 말입니다. 개인주의와 평등주의적 사상은 이런 서구의 인간이해에서 부터 비롯되었습니다. 여기에 동양과 서양 사이에 생기는 인간, 인간의 권리, 인간의 자유, 인간의 조건에 대한 여러가지 차이점들이 발견됩니다.

2. 먼저 한국을 포함한 동아시아에서는 사람을 표면적으로만 이해하거나 규정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내면적으로 이해합니다.

얼굴은 사람의 탈을 쓰고 있어도 마음과 인격은 마치 짐승과 같은 인면수심형人面獸心形의 인간이 있다고 봅니다. 동양에서는 아무리 사람으로 태어났고 또 사람의 모양을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사람은 무릇 그의 생각과 삶의 행태에 따라 여러가지 다른 사람으로 등급이 먹여지고 심한 경우에는 아예 사람으로 취급되지 않는 케이스도 있습니다.

동양의 고전인 사서삼경四書三經은 사람다운 사람이란 어떤 존재인지를 규정하고 설명하며 동시에 사람다운 사람이 되도록 교육하는 책들입니다. 사서四書는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을 이르고 삼경三經은 시경詩經, 서경書經, 역경易經(주역周易)을 말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사서삼경 중에서 인간에 대한 동양적 이해에 도움이 될만한 내용들을 간추려 보려고 합니다. 사서삼경을 통한 사람공부라 할 수 있겠습니다.

3. 동양에서의 인간이해는 모든 인간을 상호 ‘관계’ 속에서 봅니다. 서양 철학은 인간을 독립적, 주체적으로 봅니다만 동양은 인간을 상호 관계적으로 이해 합니다. 서양에서의 인간은 개인입니다. 개인주의적 인간이해 입니다. 그러나 동양에서는 집단적, 혹은 공동체적으로 사람을 이해 하려고 합니다.

동양의 인간관에 의하면 인간은 결코 독립적이거나 독단적이지 않습니다. 인간은 인간들 사이에서 뿐만이 아니라 사회와 자연, 생물과 무생물, 심지어는 존재와 비존재 까지도 포괄하는 일체 모든 것들 속에서 더불어 함께 존재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서구 문명이 주도하는 사회 구도 속에서 인간 관계를 포함하여 모든 관계의 위기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관계의 황폐화 현상’은 개인과 가정, 사회와 각종 공동체, 국가와 지구를 넘어서 전 우주적 현상으로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모두들 자기만 살려고 하고, 자기 가정만 지키려고 하고, 자기 회사, 자기 사업, 자기 학교, 자기 교회, 자기 나라만 번성시키려고 안달을 하는 사이에 모두가 함께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아주 빠른 속도로, 전 지구적, 전 우주적으로 확산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인문학의 정신 중 하나인 동양의 ‘고전’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지금부터 2천 5백여년 전 동양의 성현들이 가르처준 사서삼경四書三經 중에서 오늘은 사서四書에서 몇몇 예문들을 살펴봄으로 ‘관계 속에 있는 사람’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4. 먼저 핵심개념부터 한마디씩 정리해보고 시작하겠습니다.

대학大學의 중심 개념은 덕德입니다. 대학大學에서 가장 바람직한 인간이란 덕스러운 사람이요 가장 아름다운 인간관계란 후덕한 삶의 태도입니다.

논어論語의 핵심은 인仁입니다. 인은 긍휼과 자비를 포함하는 개인과 개인 사이를 이어주는 인간관계의 핵심개념 입니다. 인생을 어질게 사는 것이 바로 사람과 사람 사이를 매끄럽게해 주는 윤활유라고 봅니다.

맹자孟子의 중심은 의義입니다. 의란 정치적 개념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인과 함께 균형을 이루어가는 공동체 개념입니다. 의롭지 못한 어짐, 어질지 못한 정의는 모두가 잘못된 것입니다.

중용中庸의 핵심은 정도正道와 적중的中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산술적으로 혹은 기계적으로 균형을 마추는 것이 아니라 사실과 진리에 어긋나지 아니하는 정의롭고 아름다운 상태를 이릅니다.

바로 이 덕德과 인仁과 의義와 균형均衡과 조화調和, 이 네 가지가 사서四書의 중심개념입니다.

5. ‘대학大學’은 공자의 제자 중 하나인 증자曾子(기원전 506-436)가 쓴 것이라고 알려지고 있지만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증자가 스승인 공자의 말씀을 편찬하고 해설을 덧붙인 것이라고 보면 좋겠습니다.

대학은 유교의 경전 중 하나입니다. 대학은 그 시작에서부터 대학의 목적, 유교의 목표, 사람됨의 의미를 이렇게 말합니다.

‘대학지도大學之道 재명명덕在明明德 재친민在親民 재지어지선在止於至善’이라고 했습니다. (주희는 친민親民을 신민新民으로 고쳤습니다) 이것을 대학의 삼강령三綱領이라고 합니다.

대학의 목표는 밝은 덕을 더욱 더 밝게 하는 것이며, 백성을 사랑하고 백성들 사이에 사랑이 이루어지게 하는 것이며, 더 나아가 백성을 새롭게 하는 것이고, 그리하여 마침내는 최고의 선에 도달하려는 데 있습니다.

이 3가지는 결국 ‘평화로운 세상’ ‘평화로운 인간관계’를 만들려는데 있습니다.

대학은 우리가 이 세가지를 이루어가기 위해서 구체적으로 해야 할 일을 팔조목八條目이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8가지가 포함됩니다.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입니다.

격물格物은 세상의 모든 이치를 찬찬히 살펴보고 사물을 깊이 있게 탐구하는 자세를 이릅니다.

치지致知란 단순한 지식을 넘어서 지혜의 극치에 이르는 단계를 말 합니다.

성의誠意란 마음과 생각을 바르게 하고 의지를 굳게하는 단계입니다.

정심正心이란 자신의 마음을 바로잡고 다스리는 단계입니다.

수신修身은 글자 그대로 몸가짐 까지도 늘 단정히 함으로 수양을 쌓는 것을 말 합니다.

제가齊家란 가정에 대한 의무를 다하여 식솔들에게 평안과 화목을 주는 것입니다.

치국治國이란 그런 후에 한 지역이나 공동체나 나라 전체를 올바르게 다스리는 것입니다.

마지막 평천하平天下는 드디어 그가 사는 시대와 온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 주는 사람이 되는 겁니다.

* 결론 : 이것이 동양에서 보는 이상적 인간의 모습입니다. 더불어 평화를 만들어가고 평화롭게 사는, 사람 사는 세상입니다.

사람 – 그 사랑과 아픔

홍길복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 – 17

제 6강 – 1 : 인문학의 주제 – 사람(Saram) (2)

♦ 人文學의 핵심이며 제 1 주제인 ‘사람’에 대한 두번째 이야기 입니다.

종교나 하느님 문제 까지를 포함하여 이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문제는 결국 사람 문제로 귀결이 됩니다. 사람이 우리에게 기쁨도 주고 사람이 우리를 슬프게도 합니다. 우리를 불행하게 만드는 사람은 대부분 우리 가까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실제로 탄핵된 박근혜 보다는 마약으로 교도소에 있는 우리 아들이 나를 더 불행하게 합니다.

소포클레스의 말대로 ‘이 세상에는 이상한 것이 정말 많지만 그 중에서도 제일 이상한 것이 사람입니다.

‘우리는 50년을 함께 살아온 우리의 배우자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 자식은 우리가 배 아파서 낳은 자식이니까 잘 안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지금 우리 곁에 앉아있는 <인문학의 친구>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지난 시간엔 주로 서구적 입장에서 보는 ‘사람’을 살펴보았습니다만 오늘은 동양적 사유를 바탕으로 하는 사람에 대한 이해에 초점을 맞추어 보고자 합니다.

오늘의 추천 도서는 신영복선생이 성공회 신학대학 인문학 교실에서 한 강의를 책으로 출판한 ‘담론 – 신영복의 마지막 강의’(돌베개 2015)와 그 분의 다른 책인 ‘강의 – 나의 고전 독법’(돌베개 2004)과 ‘감옥으로 부터의 사색’(돌베개 1998)입니다.

♦ 들어가는 말 – 우리가 무엇을 인식하고 이해하는 데는 어떤 ‘인식의 틀’, ‘인식의 도구’(The Frame of Knowledge, The Structure of Understanding, The Tool of Cognition)가 있게 마련 입니다.

그런데 서양, 혹은 서양 사람들은 이 인식의 틀과 도구를 주로 ‘문사철文史哲’ –문학과 역사와 철학- 로 여겨왔습니다. 사람들이 남겨놓은 문학작품들, 역사적 흔적들, 그리고 그들의 생각을 담은 철학을 추적해 보면 그들의 사상과 인식의 틀이 나타난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을 흔히 ‘이성적 인식 방법론’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동양, 혹은 동양인들은 이 인식의 방법을 시서화‘詩書畵’ –시와 글씨와 그림- 이라고 여겼습니다. 시와 글씨와 그림이라고 했습니다만 이는 시와 그림과 소리를 뜻하는 겁니다.

즉 동양인들은 시를 짖고 그림을 그리고 (대부분의 동양화를 보면 시에는 그림이 있고 그림에는 시가 깃들입니다) ‘소리’를 하는 곳에 인간의 온갖 흔적들이 묻어난다고 보았습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감성적 인식 구조’를 여실히 보여 줍니다.

동양에서는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결정하는 요소를 머리라고 보지않고 가슴이라고 본 것입니다. 동양인들은 말 잘하고 머리 좋고 똑똑한 사람 보다는 마음씨 곱고 인정이 깊고 생각이 바른 사람을 보다 더 좋은 사람으로 여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문사철文史哲에서 시서화詩書畵로 가야한다’, ‘서양에서 동양으로 가야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동양인들이 지닌 사고의 틀이요, 인식의 구조입니다.

*** 다음 글은 ‘동양적 사람 이해’ 혹은 ‘동양적 사람 이해의 방식’으로 이어집니다.

그가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차마 말 한마디, 글 한 줄 쓰지 못하고 맘 졸이며 새로운 시작을 기원하였다. 떠나와 사는 자로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기도 뿐이었다. 무릇 기도란 이미 이루워진 것이라는 믿음 위에서였다. 마침내 들려오는 소식들에 기뻐하였다.

내가 때때로 떨쳐내지 못하는 의심의 눈초리로 바라보는 신(神)이지만 그는 늘 신실하였다.

아직도 악한 마음으로 거짓된 입을 열어 사람들을 속이고 미워하고 저주하는 말들을 쏟아내는 이른바 언론과 명망가들의 소리가 높을지라도 언제나 신(神)은 신실할지니.

오늘, 아파하고 슬퍼하거나 궁핍하고 상하여 시름하는 이들 나아가 그들과 공감하려 기도하는 모든 이들과 함께 하는 것을 믿나니.

단지 시늉일 뿐이라도 이러한 신(神)의 정의(正義)와 함께 하려는 권력을 축복할지니.

하여 성서에 기록된 이 혹독한 저주는 오늘도 여전히 유효할지니.

내가 찬양하는 하나님이여 잠잠하지 마옵소서.

그들이 악한 입과 거짓된 입을 열어 나를 치며 속이는 혀로 내게 말하며 또 미워하는 말로 나를 두르고 까닭 없이 나를 공격하였음이니이다.

나는 사랑하나 그들은 도리어 나를 대적하니 나는 기도할 뿐이라.

그들이 악으로 나의 선을 갚으며 미워함으로 나의 사랑을 갚았사오니 악인이 그를 다스리게 하시며 사탄이 그의 오른쪽에 서게 하소서.

그가 심판을 받을 때에 죄인이 되어 나오게 하시며 그의 기도가 죄로 변하게 하시며 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 그의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의 아내는 과부가 되며 그의 자녀들은 유리하며 구걸하고 그들의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

고리대금하는 자가 그의 소유를 다 빼앗게 하시며 그가 수고한 것을 낯선 사람이 탈취하게 하시며 그에게 인애를 베풀 자가 없게 하시며 그의 고아에게 은혜를 베풀 자도 없게 하시며 그의 자손이 끊어지게 하시며 후대에 그들의 이름이 지워지게 하소서.

여호와는 그의 조상들의 죄악을 기억하시며 그의 어머니의 죄를 지워 버리지 마시고 그 죄악을 항상 여호와 앞에 있게 하사 그들의 기억을 땅에서 끊으소서.

그가 인자를 베풀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가난하고 궁핍한 자와 마음이 상한 자를 핍박하여 죽이려 하였기 때문이니이다.

그가 저주하기를 좋아하더니 그것이 자기에게 임하고 축복하기를 기뻐하지 아니하더니 복이 그를 멀리 떠났으며 또 저주하기를 옷 입듯 하더니 저주가 물 같이 그의 몸 속으로 들어가며 기름 같이 그의 뼈 속으로 들어갔나이다.

저주가 그에게는 입는 옷 같고 항상 띠는 띠와 같게 하소서. 이는 나의 대적들이 곧 내 영혼을 대적하여 악담하는 자들이 여호와께 받는 보응이니이다. – 시편 109편 1-20

나는 사람일까?

홍길복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 – 16

제 5강 – 3 : 인문학의 주제 – 사람(Saram) (1)

♦ 다음은 오늘의 주교재인 ‘사람, 장소, 환대’를 중심으로 서구 인문학에서 보는 ‘사람됨’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

(1) 김현경에 의하면 아무 것도 걸치지 아니한 순수한 몸은 사람이 아닙니다. ‘몸’이 사람으로 인식 되려면 의복만이 아니라 여러가지 문화적 기호들을 입어야만 합니다. 문화가 제공하는 다양한 소품과 도구로 몸을 변형하여 전시 가능하게 만들어야만 사람이 됩니다. 공공 장소에서 나체를 금지하는 것은 순수한 몸 그 자체는 언제나 불완전한 사람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2) ‘인간’은 태어난 후 일정한 ‘사회적 성원권’ (Social Membership)을 얻음으로 드디어 ‘사람’이 됩니다. ‘인간’이란 존재는 자연적 ‘사실’에 지나지 않습니다. 사회적 인정을 받지 않아도 ‘인간은 인간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사회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사회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고, 그에게 자리를 마련해 주어야 사람이 됩니다.

‘사람’이란 일종의 ‘자격’이고 ‘인정’이고 ‘승인’입니다. 사람은 ‘사회적 성원권’을 통해서만 ‘사람’이 됩니다. 이것을 그는 ‘사회적 환대’(Social Hospitality)로 보았습니다. 사회적 환대를 받지못한 인간은 아직 사람으로써 인정이 안되었다고 봅니다.

(3) 김현경은 전통적으로 ‘인간’이기는 하지만 ‘사람’으로는 쳐주지 않았던 group, 즉 사회적 환대를 받지 못해온 집단을 5개로 나누어 설명합니다.  첫째는 태아, 둘째는 노예, 셋째는 여성, 넷째는 군인, 다섯째는 사형수 입니다.

(4) 애기는 태어나는 순간 ‘인간’이긴 하지만 아직 ‘사람’은 아닙니다. 태아가 ‘사람’이 되는 데는 그의 부모와 가정이 기뻐하고 축하하고 법적, 행정적 절차를 통하여 사람들이 사는 사회 속으로 들어와야 ‘사람’이 됩니다. ‘유산’이 된 애기나 강간에 의해서 태어난 애기를 낙태 시키고 일정한 애도의 의례를 행하지 않는 것은 이런 이유들 때문 입니다.

태어난 애기는 이름을 지어주고 이름을 불러주고 사회가 그를 인정하고 환대함으로 ‘사람’이 됩니다. 신생아는 태어나서 사회적 환대라는 통과의례를 거침으로 사회 속으로 들어옵니다. 식구들과 친구들의 방문과 축하, 감사의 기도, 세례식, 백일잔치 같은 공동체의 의식을 통해서 ‘사람’이 되는 겁니다. 만약 그 이전에 죽으면 태아는 사산을 한 것 과 같이 여겼습니다. 아기에게 아직 이름도 지어주지 않고 여전히 배내옷을 입히는 동안은 아기가 세상에 들어온 것이 아니라 ‘문지방 단계’에 있다고 여겼습니다. 물론 오늘날은 대부분의 나라에서 아기가 태어나는 즉시 국가가 개입합니다. 출생 자체를 통과의례로 보고 사람으로 승인하고 사람으로 보호를 받습니다만 예전에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5) 전통 사회에서는 노예도 ‘사람’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노예는 태어날 때나 죽을 때나 일체 아무런 통과의례를 치루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는 ‘사람’이라고 보지 않았기 때문 입니다.

노예에게는 얼굴(체면 Face), 명예(Honor), 이름(Family Name은 물론이고 개인의 이름도), 권리, 의무가 없었습니다. 그는 ‘사람’이 아니라 ‘물건’이었기 때문 입니다. 물론 사고 팔 수 있었고 같은 노예 사이에서 애기를 낳아도 그 애기의 소유권은 주인에게 있었습니다. 노예는 잘못해도 피고가 되지 않았고 주인이 모든 민사상 책임을 집니다. 집에서 기르는 개가 잘못했다고해서 개를 재판에 걸지 못하는 것과 같은 이유였습니다. 노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Orlando Patterson, Slavery and Social Death, Harvard Uni. Press, 1982)

(6) 유교적 전통 사회에서는 여자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출가외인出嫁外人이라는 말은 여인을 집단 사회에서 제명 처분했다는 뜻 입니다. 여자는 시집에서 쫓겨나도 다시 친정으로 돌아 갈 수 없었고 일체의 종교의식(제사)에 참석 할 수 없었고 재산을 물려받을 수도 없었습니다. 여자는 친정이나 시집, 그 어는 쪽으로 부터도 가정의  성원권(Family Membership)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이름도 족보도 없는 존재였습니다. ‘시집살이는 종 살이’였고 여자는 애 낳는 기계로 여겼습니다. 서양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대 히브리인들도 여자는 남자가 마음대로 처치 할 수 있는 물건 중 하나였고(아브라함과 사라 등) 로마 시대 이후 여자는 남자의 소유물건 중 하나로 여겼습니다.

(7) 과거는 두 말할 것도 없고 현대전에서도 군인은 ‘사람’이 아니라 ‘물건’입니다. 적군을 죽이는 것은 살인이나 범죄행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으로써의 군인이 한 행동이 아니라 ‘국가라는 기관’이 한 일이라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군인은 전투 중의 살인에 대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못하도록 규정하고 법적인 추궁을 당하지 않습니다. 군인은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물건을 파괴하는 기구이기 때문입니다. (1914년 크리스마스 때 서부전선에서 있었던 자발적 휴전은 그 후 어떻게 처리 되었나요?)

뒷골목의 깡패들에게는 싸워도 명예나 규칙이나 위신이 있습니다만 군인에게는 인격, 명예, 위신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사람’으로 치지 않았기 때문 입니다.(초기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백인들이 대표자의 맞대결도 없이 무조건 대포를 쏘고 무차별적으로 쳐들어오는 것을 보고 이것은 ‘전투’가 아니라 ‘학살’이라고 보았습니다.)

(8) 죤 로크 이후 사형수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국가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물건’을 폐기처분 한다고 여겼습니다. 사형수는 사형이 집행되기 전에, 먼저 ‘너는 사람이 아니다. 너는 이미 사람의 자격이 박탈되었다’는 점을 확인 시키고 난 후 국가는 국가의 이름으로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한 때는 사람이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쓸모없고 유해한 물건이 되어버린 물건을 폐기한다고 선언했습니다. ‘국가가 살인을 하면 안되지! 국가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인간의 자격을 상실한 물건을 폐기처분 할 뿐이다’ –이것이 사형수를 사람으로 보지 않고 처형할수 있는 근거였습니다.

(9) 모든 사람은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사회적 성원권을 갖고 그가 속한 사회로부터 환대를 받을 때 마침내 ‘사람’이 됩니다. 그 이 전에는 ‘인간’의 모습을 지닌 존재이기는 하지만 아직 ‘사람’이 된 것은 아닙니다. 사람이란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로부터 환대를 받음으로 ‘사람이 되어가는 것’ 이라고 보는 겁니다.

(10) 그런데 문제가 있습니다. 내가 스스로 ‘사람’으로 인정 받으려고 노력하고 투쟁을 한다고 해서 누구나 쉽게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인간들은 다른 사람을 ‘사람’으로 받아드리지 않으려는 존재이고 먼저 자신이 사람으로 받아드려진 집단 속에 다른 인간을 받아드려 자신과 동일한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을 원치 않는 존재이기 때문 입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인간은 인간을 배제 시키고 거부하고 자기와 다른 존재를 구별하고 빗금을 긋고 차별화 하려고 합니다.

먼저 어떤 club의 member가 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들과 똑같이 member로 가입하려고 하면 여러가지 규정과 제도를 만들어서 제한 하려고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앞에서 소개한 Orlando Patterson은 이런 인간의 심리와 역사를 ‘타이모크라시’(Timocracy)라고 했습니다. 이는 ‘노예제도와 명예에 집착하는 문화’를 말 합니다. 여기에는 남보다 우월해 지려는 욕망, 권위를 앞세우고 그 권위를 행사하려는 욕망, 권력에 대한 욕망, 군인다움을 높이고 군인정신을 높이 사는 태도, 물질에 대한 집착 같은 것들이 포함 됩니다.

패터슨에 의하면 행복이란 성원권이고 존재란 곧 소속이 되는 것 입니다. 그래서 그는 ‘사람’이란 저절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즉 사람으로써의 성원권을 갖고 사람들 속에 끼기 위해서는 치열한 투쟁의 과정이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나도 끼워주십시오. 나도 당신들과 같이 먹고 자고 놀고 살고 싶습니다. 우리도 당신들 집단의 member로 받아주십시오. 나도 제발 사람으로 쳐 주십시오’라고 부르짖는 성원권 투쟁이 바로 인권운동이요, 사람으로 인정 받기 위한 투쟁이라고 보는 겁니다.

(11)  한편 법률적으로 ‘사회적 성원권’(Social Membership)을 갖고 그 사회로부터 외형적 환대를 받는다고 해서 진정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그 사회 속에 소속이 되느냐 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입니다.

예컨데 우리들 중 많은 사람들이 정당한 절차를 밟아서 호주에 이민을 왔습니다. 호주에 도착한 후 당당하게 일도하고 세금도 내고 이 나라의 법규도 지킵니다. 공공의 장소에서는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환대를 받습니다. 식당에 갔을 때는 영주권이 있느냐, 어느 나라에서 왔느냐, 국적은 어디냐 하는 것을 묻지는 않습니다. 이 경우의 환대는 사회적 성원권과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 사회에서 우리의 주장과 권리를 당당하게 행사하고 어디에서든지 차별을 받지 않고 사람으로써의 기본적 권리를 행사하고 있느냐 하면 그렇지 못한 경우가 허다합니다. 인간성 속에는 진정 지구의 종말이 와도 극복해 낼 수 없는 편견과 편당심과 이기심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 입니다.

트럼프나 폴린 핸슨은 도처에 있고 은근히 그들을 편들어주고 지지하는 이들은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흑인들이나 아시아 이민자들이나 히스패니아 계통의 이민자들의 경우, 진정으로 ‘사람다운 사람’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가? 의구심을 갖게 됩니다.

21세기가 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종교적으로 ‘불가촉 천민’의 문제를 지닌 인도의 인종 차별이나 일본이 계속하는 재일 조선인에 대한 차별 정책이나 홈랜드를 잃어버린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원주민 문제나 세계도처에서 진행되는 여성의 차별 문제등은 실로 사람이란 무엇이고 ‘사람이 된다’ 거나 ‘사람으로 대접을 받는’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를 여실히 증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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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간으로 태어났고 또 인간의 몸과 얼굴을 지니기는 했지만 아직도 ‘사람’으로 여겨지지도 않고 ‘사람’으로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리스트를 만들어 봅시다. 세계적으로든 아니면 우리 주변에서든 각자가 돌아가면서 그런 사람들을 이야기를 나누어 봅시다. 그리고 이렇듯 사람으로 인정 받지 못하는 이들을 위하여 우리와 내가 할 수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를 토론해 봅시다.

(2) 나(우리)는 호주라고하는 다문화 사회(이민자의 땅)에서 사람으로 환대받지 못한 경험있는지? 어떤 경우, 왜 그랬는지? 인문학을 공부하는 우리들로써 이를 개선해 나갈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의견을 나누어 봅시다.

아니다!

홍길복의 시드니 인문학 교실 – 15

제 5강 – 2 : 인문학의 주제 – 사람(Saram) (1)

♦ ‘사람’이라는 개념의 의미 – 사람을 부르는 말은 나라마다 다릅니다.

우리 말의 ‘사람’이라는 말은 우리 고유의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영어로도 Saram이라고 표기했습니다. ‘사람’은 ‘삶’과 ‘앎’의 합성어라는 것이 지금 까지의 지배적인 주장입니다. ‘사람’이란 자신의 ‘삶’을 인식하고 그 삶의 의미를 ‘아는’ 혹은 ‘알아가는’ 존재라고 봅니다.

사람은 자신의 출생과 성장, 자신의 목표와 죽음을 알고 자신은 그런 과정을 통과해서 살아가는 존재라는 사실을 아는 데 그의 사람됨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우리도 흔하게 쓰기는 하지만 일본 사람들이 먼저 사용한 ‘人間’(닝겐)이란 개념은 ‘사람과 사람 사이’를 말합니다. 여기에는 일찍부터 그들의 집단의식, 혹은 집단적 이해가 깔려있다고 보겠습니다. 인간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 사이’에서 존재하는 상호의존적 존재라는 생각입니다.

그런가하면 중국인들은 사람을 ‘인류人類’라는 개념으로 씁니다. 이는 대륙적 성격을 나타내는 표현이라고 봅니다. 사람을 하나나 둘 혹은 몇몇 사이의 관계 개념으로만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적이며 우주적인 포괄적 개념으로 이해합니다. 땅위에 존재하는 온갖 유인원類人猿 모두를 사람의 범주에 포함시킵니다.

한국어 – 사람  / 라틴어 – Homo  / 영어 – Human, Human race 혹은 Mankind  / 독일어 – Mensch  / 중국어 – 人類  / 일본어 – 人間  / 히브리어 – Adam / 그리스어 – androphos  / 학명은 라틴어로 표기합니다. – homo sapiens

♦ 라틴어 homo를 머리로 하는 여러가지 인간의 모습들을 살펴보는 것도 재미있습니다. homo sapiens – 생각하는 인간 , 혹은 지혜로운 인간 / homo habilis – 도구를 쓰는 인간 / homo erectus – 직립하는 인간 / homo sexual – 동성애자 / homo ludens – 놀이의 인간 / homo movens – 이동하는 인간 / homo demens –광기의 인간 / homo academicus –학문하는 인간 / homo aestheticus – 심미적 인간 / homo artex – 예술적 인간 / homo biblos – 기록하는 인간 / homo consumes – 소비하는 인간 / homo economicus – 경제적 인간 / homo culturalis – 문화적 인간 / homo duplex – 이중적 인간 / homo ecologicus –생태적 인간 / homo viator –떠도는 인간 / homo technicus –기술적 인간 / homo superior – 초인, 영웅적 인간 / homo symbious – 더불어 사는 인간  / homo solus – 외로운 인간 / homo socies – 사회적 인간 / homo sexcus  – 섹스하는 인간, 몸으로 교감하는 인간 / homo sacer – 성스런 인간, 혹은 벌거벗은 인간 / homo religious –종교적 인간 / homo resistance – 저항하는 인간 / homo politicus – 정치적 인간 / homo nomad – 유목민, 떠돌아 다니는 인간 / homo knowledgian – 신지식인 / homo hundred – 백세까지 사는 인간 등등이 있습니다.

♦ 과거에는 사람과 다른 동물들 사이를 구별해 주는 것이라고 여겼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사례들도 퍽 많습니다.

(1) 사람만이 사회적 동물이다. – 아니다. 개미나 꿀벌들도 공동체를 형성하고 질서와 상하계층과 역할분담을 통하여 그들 사회를 조직화하고 있다. 뿐만이 아니라 이들도 경우에 따라 집단 속에서 ‘반란이나 ‘혁명’’을 일으키기도 한다.

(2) 사람만이 문화를 형성하고 정치적 행동을 한다. – 아니다. 돌고래나 침팬지나 까마귀들이나 다른 포유류들도 그들 세계에서 독특한 문화를 창조하고 같은 종들 사이에서는 동맹을 맺기도 하고 다른 집단들과 전쟁을 한다. 그들도 인간과 마찬가지로 소수의 리더를 형성하여 다수의 개체를 다스리며 통치하는 국가나 정부체제를 가지고있다. 오히려 이들은 인간들 보다 훨씬 더 민주적이다.

(3) 사람만이 약육강식의 이론에 사로잡혀있다. – 아니다. 약육강식의 논리는 사람들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여타의 동물계에도 존재한다. 특정 국가나 엘리트들이 다른 나라나 다른 사람들을 억누루고 지배하듯이 동물들도 개체 사이나 혹은 다른 개체에 대해서 똑같이 침략하고 정복하며 지배하고 억압하는 형태와 체제를 가지고 있다.

(4) 자유, 평화, 사랑, 신뢰 같은 가치는 사람만이 추구하는 것이다. – 아니다. 다른 동물들도 포위, 체포, 죽음 앞에서는 심각한 스트레스를 받고 자유로운 삶을 갈구한다. 평화를 사랑하고 종족을 보존하고 자신과 자신의 공동체를 지키려는 본능과 의도적 노력을 기울인다. 이를 위하여 집단 사이의 단결을 유지하고 외부의 적을 막아내기도 한다. 이 안에는 자손을 번식 시키고 후손을 남기려는 본능도 포함된다. 우리는 이들 동물의 세계가 오히려 인간 세계보다 훨씬 더 규율적이고 도덕적인 면들을 보여 줌으로 ‘짐승 보다도 못한 인간과 인간 세계’를 목도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5) 동물들에게는 종교가 없다. – 아니다. 심리학자 스키너의 연구에 의하면 비둘기를 포함한 몇몇 동물들도 인간들과 유사한 종교적 제의행위를 한다.

(6) 자살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 아니다.  돌고래도 자살하는 것이 종종 보고된다. 자식을 잃은 곰이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스스로 벽에다 머리를 찧어 자살을 한 사건도 보고 되었다.

기억에

자신의 개인적 발전을 도모하는 데 각별히 근면한 점을 제외하고 아이히만은 어떤 동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근면성 자체는 결코 범죄가 아니다. 그는 상관을 죽여 그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살인을 범하려 하지는 않았다. 이 문제를 흔히 하는 말로 하면 그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했을 뿐이다. (중략)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를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로 만든 건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였다. (중략) 이러한 무사유가 인간 속에 존재하는 모든 악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대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 이것이 사실상 예루살렘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었다. –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중에서

유태인 수백만 명을 학살한 전범으로 교수형을 받고 처형된 아이히만(Otto Adolf Eichmann)은 자신은 단지 상부의 명령에 충실했을 뿐이라며 끝내 자신의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그런 아이히만에게 ‘순전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의 죄를 묻고 있다. 철학자 강신주는 “아렌트는 더불어 살아가는 삶에서 ‘사유’란 하지 않아도 상관이 없는 ‘권리’가 아니라 반드시 수행해야만 할 ‘의무’를 강조”했다고 해석한다.

어쩌면 우리는 아직 ‘순전한 무사유’에 빠진 이들이 아닌, ‘악의적 사유에 빠져 범죄를 저지르는 자’들과의 싸움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여 지극히 평범하게 살아가는 우리들만이라도 ‘사유’ 곧 생각하며 사는 일을 의무로 여기며 살아야 한다고 다짐할 일이다.

잊지않고 기억하는 일이 소중한 까닭이다.

2017년 4월 16일 부활주일, 필라델피아 세월호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모임의 뜻을 새겨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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