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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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누님댁에 들르다. 코스모스가 이웃집과 담장이 되어 춤춘다. 강원도 평창 사람 매형이 고향 생각으로 심었을 터이다. 나도 잠시 내 고향 신촌으로 돌아간다. 고향은 그리움으로 가꾸는 지금 여기에 있다.

옛 생각

이민 보따리를 꾸리며 처분했던 물건 가운데 주소와 전화번호들을 빼곡히 기록해 놓은 공책과 명함첩들이 있다. 벌써 서른 해를 넘어선 저쪽 일이다. 그것은 내 유소년 그리고 청년과의 결별이었다. 이 땅에 건너와 살면서 인근 대도시를 중심으로 한 고등학교, 대학교 동창회를 한 두어 번 기웃거린 적은 있다만 모두 이민 초기의 일일 뿐, 이제껏 무관하게 살았다.

인터넷 세상이 열린 후 간간히 이름깨나 팔리게 된 옛 벗들의 소식을 들을 수 있었고, Social Media가 판치는 스마트한 세상이 되자 늙지 않으려는, 아니 젊게 살려는 옛 동무들의 모습들과 느닷없이 마주치곤 한다. 이럴 때면 이따금 오래 전에 버린 주소록과 명함첩들이 생각나곤 한다. 비록 이미 다 변해 버렸을 주소와 전화번호일 터이지만.

이달 초 마광수 형의 부음으로 하여 나는 오래 전 신촌 시절을 더듬고 있었는데, 그로부터 며칠 후 후배 페북에 올려진 옛 동무 딸아이 결혼식 사진은 나를 며칠 동안이나 1970년대 신촌 거리로 내몰았다.

딸아이 혼례를 치른 옛 동무는 함께 마셔 댄 신촌 시장 주막집 막걸리 동이가 제법 되는 진짜 어깨 동무 개 동무였다. 그와 마지막 술 잔을 나누었던 곳은 그의 단칸 신혼방 이었는데 동네는 어디였는지 가물 가물하다.

문득 그 시절 동무들이 그립다.

마광수 형은 그 때도 그랬다. 음담패설을 이용한 우스개는 단연 뛰어났다. 나는 그의 학문이나 문학에 대해 논할 만한 지식이 전무하다. 다만 70년대 청년 마광수에 대한 인상은 아직도 또렷하다. 신촌 목로주점 아니면 북한산을 오르던 길이었을게다. 그는 말했었다. ‘우스운 일이야! 참 우스운 일이라고!’ 그가 고등학교 때 대학교 백일장에 응모해 시 부분에서 장원을 했던 일을 우리들에게 이야기하던 끝에 뱉은 말이었다.

‘그 시가 말이지, 여기서 조금 저기서 조금 남의 것들 베껴서 조합해 놓았단 말이야. 그게 장원이었다니까! 우스운 일이야! 참 우스운 일이라고!’

나는 당시 광수 형이 기성 체제에 대해 항거하거나 비틀어 조롱했다고 단언하지는 못하지만, 그는 당시 이미 자유인이었다. 그는 그렇게 자유인 청년 마광수로 삶을 접었다. 그리 살며 느껴야만 했던 외로움 역시 오롯이 그의 몫으로 품고 갔다.

구글링을 통해 광수형의 길을 쫓다가 낯익은 이름들도 만났다. 대학에서 광수형과 척진 곳에 서있었다는 이들이다. 이미 다들 은퇴 이후이다.

모두 1970년대 신촌거리에서 아주 멀리 왔다.

먼저 떠난 이에게는 안식을, 아직 산 자들에게는 강녕을.

주일 아침, 시 한 편

매 주일 아침에 가게 손님들에게 이 편지를 띄운 지도 제법 오래 되었습니다. 한 주간 세탁소 일을 마치고 하루 쉬는 일요일 아침에 제가 느끼는 짧은 생각들을 손님들께 보내왔습니다. 이 편지를 쓰는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들여 고르는 것이 편지 말미에 첨부하는 시입니다.

제가 워낙 시를 좋아하는 까닭이기도 하지만, 제가 쓰는 편지 보다는 누군가의 시 한편으로 이 편지를 읽는 분들께 아주 짧은 시간이나마 편안함과 삶에 대한 감사를 나누자는 생각으로 시를 고르곤 한답니다.

편지를 쓰고 시를 고를 때마다 제가 소원하는 마음이 있답니다. ‘단 한 사람만 이라도’ 제 편지와 제가 고른 시를 읽고 그 순간만이라도 평온한 마음으로 서로의 삶을 감사하는 마음을 나누었으면 하는 바램이랍니다.

오늘도 그 마음으로 시 한편을 소개 드립니다. 해마다 이 맘 때 가을의 문턱에 이르면 제가 즐겨 읽는 시인의 시랍니다. 한국어로 쓰여진 이 시의 참 맛을 그대로 전해 드릴 수가 없어 안타깝지만 시의 느낌만이라도 전해 드리고 싶답니다.

가을로 들어서는 문턱에서 꼭 일요일이 아니더라도 짧은 쉼을 누리는 시간들에 감사할 수 있는 우리들의 삶이 늘 이어지기를 빌며.

당신의 세탁소에서

일요일의 미학(日曜日의 美學)

–       김현승

노동은 휴식을 위하여
싸움은 자유를 위하여 있었듯이,
그렇게 일요일은 우리에게 온다.
아침 빵은 따뜻한 국을 위하여
구워졌듯이.

어머니는 아들을 위하여
남편은 아내를 위하여 즐겁듯이,
일요일은 그렇게 우리들의 집에 온다.
오월은 푸른 수풀 속에
빨간 들장미를 떨어뜨리고 갔듯이.

나는 넥타이를 조금 왼쪽으로 비스듬히 매면서,
나는 음부(音符)에다 불협화음을 간혹 섞으면서,
나는 오늘 아침 상사에게도 미안치 않은
늦잠을 조을면서,
나는 사는 것에 조금씩 너그러워진다.
나는 바쁜 일손을 멈추고
이레 만에 편히 쉬던 神의 뜻을 이제야 알 것 같다.

나의 남이던 내가,
채찍을 들고 명령하고
날카로운 호르라기를 불고
까다로운 일직선을 긋는 남이던 내가,
오늘은 아침부터 내가 되어 나를 갖는다.

내가 남이 될 수도 있고
또 내가 될 수도 있는
일요일을 가진 내 나라 — 이 나라에
태어났음을 나는 언제나 아름다와 한다.


I’ve been sending this letter to my customers every Sunday for quite a long while. In the letters, I have told you my small thoughts which came to my mind in Sunday morning, resting after a long week of work at the cleaners. In fact, I usually spend more time on selecting the poem attached at the end of the letter than writing the letter itself.

It’s not just because I like poetry so much, but because I wish that the poem, more than the letter, will give the readers comfort and gratitude for life, however short or long it may last. With this wish in my mind, I try to select a poem each week.

While I’m writing this letter and selecting a poem, I also have in mind a wish that the readers share gratitude for life with someone else in a feeling of peace and serenity, whether just one person, and whether just for a moment.

Today, I would like to share a poem with you with my wishful mind. It is one written by the poet whose poems I like to read around this time of year, at the threshold of autumn, every year. I know that I cannot help you really appreciate the poem in translation, as it was written in Korean. But, still I want to impart its feeling to you.

I wish that at the beginning of fall, we can feel gratitude for a time of rest, whether it is Sunday or just some moments, and that it will always continue.

From your cleaners.

Aesthetics of Sunday

–       Hyun-seung Kim

As work for rest, and
Fights were for freedom,
Like that, Sundays come to us.
As morning bread was baked
For a hot soup.

As mother for son,
Husband is happy for wife,
Like that, Sundays come to our house.
As May left,
Dropping off red wild roses in the green woods.

While I’m wearing a necktie somewhat tilting leftward,
While I’m occasionally mixing discordant notes in the music,
While I’m oversleeping this morning
Without feeling sorry to superiors at work,
I become lenient in living a life gradually.
The God’s will, who stopped His busy work and rested on the seventh day,
Now I think I know.

I, who used to be my other,
Give commands with a lash in hand,
Blow the shrill whistle,
I, who used to be others drawing a fastidious straight line,
Have become myself and have myself since the morning today.

On which I can become others,
Or become myself
Sundays has my country – born in this country
I always cherish it as beautiful.

처음처럼 – 그 배신에 대하여

따지고 보면 연휴를 맞은 느긋함 탓이었다. 크거나 작거나 장(場)을 볼라치면 사야할 물건 목록표를 들고 다녀야 마땅할 일이지만, 오늘은 예외였다. 모처럼 대도시 나들이에 예정에 없던 장보기였으므로.

빵집 순례에서 넉넉히 장바구니를 채운 아내는 한국장을 보면서 내게 큰 선심을 썼다.

“여기 소주도 있고 막걸리도 있네, 골라보셔!”

그 소리에 내 머리 속은 빠르게 움직였다. 막걸리로 40년을 되돌려 볼까, 아무렴 오늘 한 잔은 쐬주 아닐까 하는 생각은 돈 계산보다 빠르지 못했다. 내가 사는 동네에서 막걸리는 구경도 못하거니와 소주는 2홉들이 한 병에 거금 10불은 주어야 하므로 큰 맘 먹지 않고서는 입에 대지 못하는데, 소주병에 붙여진 가격표에 우선 반할 수 밖에 없었다. 2홉들이 6병 한 박스에 24불 – 이건 거의 공짜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게다가 소주병에 그려진 빨간 딱지라니! 이게 도대체 몇 십년 만이냐! 아내는 그 순간에 내가 느낀 감격을 전혀 이해할 수 없었을 게다. 오호 빨간 딱지라니!

한달음에 집으로 달려온 세 시간 드라이브 길에 아내는 물었었다. ‘쉬지 않고 그냥 가?

‘쉬긴 뭘…’하던 내 응답에는 예의 그 빨간 딱지의 유혹이 숨어있었다.

집에 돌아와 마주 앉은 늦은 저녁 상, 반주를 핑계로 뚜껑을 따, ‘크 한 잔’ 빨간 딱지의 소주를 입에 털어놓은 내 입에서 나온 말 한마디. “이런…..ㅉㅉㅉ “

30도 짜리 혀끝에서 목구멍까지 훅 쏘던 그 맛, 빨간 딱지 쐬주는 어디가고 복숭아 주스 맛 14도 가짜 와인 맛이라니! 오, 이 ‘처음처럼’의 사기 맛이란…

소주가 변한 것일까? 내가 변한 것일까? ‘처음’과 ‘지금’ 사이에.

아니면 ‘처럼’의 사기질일까?

아니다. 그 순간 내가 돋보기를 쓰지 않았던 탓이다.

노동과 쉼

‘노동’과 ‘근로’ – 말 하나 어찌 쓸까로 여전히 다투고 있다. 새삼스럽지 않은 오랜 다툼이다.

그런 다툼을 일찌감치 세계 노동자의 날인 May Day를 버리고 9월 첫 월요일을 Labor Day로 정리한 미국은 영악스럽다 할까?

아무려나 부지런히 일한다는 근로 보다야 먹고 살기 위해 들여야만하는 정신적 육체적 노력으로써의 노동이 썩 적합하지 않겠나? 그래야만 ‘쉼’의 뜻이 깊어지는 법. 그게 성서가 쓰여진 까닭이기도 할 터이고.

어찌 부르고, 어떤 날을 기념하던 앞서 고민했던 이들 덕에 연휴를 즐겼다.0903171913a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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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친구들과 밤바람 맞으며 맛난 것으로 배를 채우고, 그저 일상의 이야기로 편안함을 나누며 쉼을 만끽했다. 때로 쉼에 있어 아내의 흥은 필요충분조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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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이 아들 내외는 홀로이신 제 외할버지와 잠시 시간을 함께 했노라 했고, 예비사위는 딸아이를 위해 깜작쇼를 펼치며 즐겁게 했노라는 소식을 전해 왔다.

연휴 쉼을 정리하는 시간, 알량한 찹쌀떡과 아이들의 대견한 소식으로 노부모와 장인에게 건강하심에 감사를 드리며…. 아직은 노동이 필요한 내일을 위해!

춤과 꿈 그리고…

아내는 북치며 춤을 추고 나는 상추를 씻고 고기를 굽는다. 오늘 저녁 내 집안 풍경인데, 이즈음 이따금 우리 부부가 저녁을 맞는 모습이다. 물론 북치고 춤추는 아내 모습은 한결 같지만, 나는 상추를 씻는 대신 된장찌개를 끓이거나, 고기를 굽는 대신 생선을 튀기기도 한다.

나이 육십대 중반으로 들어선 나는 아직도 꿈이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은 철부지다. 어찌하리, 환갑 나이 아내도 여전히 하고 싶은 일들이 많은 것을.

아내는 더 늦기 전에 춤을 한번 추고 싶다며 춤을 배우겠다고 했다. 춤 배우러 한국에 갔다 오겠노라고도 했다.

올 봄 어느 날이던가, 아내는 동영상 두 개를 보여주며 어떤 춤을 추면 좋겠냐고 물었다. 태평무와 진도북춤이었는데 솔직히 나는 둘 다 마뜩치 않았다. 춤과는 거리가 아주 먼 내가 뭘 알아서가 아니었다.

태평무(太平舞)는 그냥 내 체질이 아니라는 느낌이었다. 무릇 춤이란 흥이여야 하는데 하나부터 열까지 그저 만들어낸 동작 같아서 ‘아니다’ 하였다. 진도북춤은 춤으로써는 대만족이었으나 아내가 저걸 과연 흉내낼 수 있을까?하는 의구를 떨칠 수 없어 차마 둘 중 어느 하나도 선뜻 집지 못하였다. 경쾌하고 빠른 춤사위가 이어지는 진도북춤을 아내가 흉내내다 자칫 자빠지거나 넘어질까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아무튼 아내는 그렇게 진보북춤을 배우기 시작했다. 한국까지는 아니고 주말이면 몇차례 왕복 하루길인 북부 뉴저지를 오가며 춤을 배우고 있다. 나는 운전 기사와 촬영 기사가 되어 그 길을 함께 한다. 녹화된 연습 동작들을 보며 아내는 저녁이면 춤 연습을 한다. 오늘 저녁도 그렇게 보냈다.

아내에게 춤을 가르치시는 선생님은 이렇게 말했었다.

‘진도북춤은 한 잔 마시고 세상사 희로애락을 춤으로 풀어내는 그런 춤인 것 같아요.’

이제 곧 아내는 자기 흥으로 진도북춤을 여러 사람들 앞에서 추게 될 것이다. 그게 춤으로써는 그저 흉내에 불과할지라도 아내의 몸짓과 맘짓은 온전히 꿈을 이루는 행위라고 나는 믿는다. 아내의 꿈과 삶에 얽힌 희로애락을 풀어내는 춤으로써.

그리고 나는 춤추지 않고 가만히 앉아서 한잔 그 힘만으로도 삶의 희로애락을 느낄 터.

내 없으면 어때

오늘, 영화 <노무현입니다>를 보다.

영화 말미에 유시민이 노대통령과 나누었던 대화를 곱씹는 장면에서 나오는 말 한마디.

‘내 없으면 어때’ – 노대통령이 했던 말이란다. 노무현이 꿈꾸던 세상이 왔을 때 비록 노무현 자신이 없더라도 오기만 한다면…

살아생전 그의 간절한 소망이 담긴 한마디였을 터이다.

세상사 얼핏 둘러보면 죄다 자신들의 삶 속에서 누리는 자들만의 세상 같아도, ‘내 없으면 어때’하며 꿈으로 사는 이들이 만들어 나가는 게 사람살이 이야기 곧 역사 아닐까?

오늘도 살아 숨쉬며 ‘내 없으면 어때’ 그 꿈으로 살아있는 숱한 노무현들을 생각하며.

영화 <노무현입니다>를 보고 온 날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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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에

뉴저지나 뉴욕시 쪽 나들이를 나섰다 돌아오는 길에 이 다리를 만나면 ‘집에 다 왔다’하는 생각이 든다. Delaware Memorial Bridge이다.

필요와 의미 둘 중 어느 것이 먼저인지는 모르겠으나, 북쪽에서 델라웨어주로 들어오는 길목에 반드시 필요한 다리였기에 세웠을 터인데 누군가를 기념한다는 뜻이 있단다.

이차 세계대전, 베트남전쟁, 걸프 전쟁 그리고 한국전쟁의 희생자들이 바로 그 누군가들이다. 델라웨어주 쪽 다리 부근에 그들을 기리는 탑이 서있다.

내가 이 다리를 오고 가는 길에 오늘처럼 꽉 막힌 것은 처음 겪는 일이었다. 그저 생각없이 빠르게 다리를 건너 뉴욕 쪽으로 페달을 밟거나, 내려오는 길엔 ‘옛날엔 75전이었는데 4불씩이나!!!’ 걷는 통행료에 혀차며 이내 잊고 마는 아주 짧은 시간에 건너는 다리이다.

오늘 그 다리 위에서 한참을 서 있었다. 다리가 까닭없이 주차장이 되었기 때문이다.

벌써 20년? 그렇구나! 저쪽 전쟁 기념탑에서 주지사와 주 의원 몇몇, 한국전쟁 참전자들 그리고 십 수 명 한인들이 모여 한국전을 기렸던 일이 있었다. 그랬던 일이 있었다. 그 이전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없는 일이었다.

누굴 탓하랴. 돌아보면 아픈 구석이 어디 한둘일까?

Memorial!

3분이면 건넜을 다리에서 반시간을 보냈던 오늘. 내가 기억해야 마땅한 것들을 돌아보며.

물음과 답

내 가게 손님들에게서 한반도에 관련한 질문을 받을 때면 늘 곤혹스럽다. 물론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다. 이따금 한반도 관련 뉴스들을 보여주며 질문을 던지는 이들도 있지만 수많은 손님들 중에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일 뿐이다. 대부분 무관심이다.

그런데 지난 주간엔 전쟁과 한반도에 대해 묻는 이들이 제법 있었다. 넘쳐나는 뉴스들 탓일게다. 이런 상황은 솔직히 좀 난감하다. 무엇보다 내 앎의 한계 탓일 터이지만, 물음을 던지는 상대의 의중을 모르니 더욱 그러하다.

하여 쉬는 날 아침, 손님들에게 편지를 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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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간에 손님 몇 분들이 제게 이런 질문들을 하셨답니다. ‘북한은 도대체 왜 이러는 것이냐?’, ‘너 북한에 가본 적이 있느냐?’, ‘이러다 북한과 전쟁하지는 않겠냐?’ 하는 물음이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뭘 안다고 이런 질문에 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제게 질문을 던지신 분들도 제게 무슨 정답을 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남한과 북한이 갈라져 서로 대결 구도를 이어온 지가 70년입니다. 그러니 남북이 한 나라였던 시절의 경험을 갖고 있는 한국인들은 나이 많은 이들 뿐이랍니다. 당연히 저 같은 남한 출신들은 북한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답니다. 다만 북한이나 남북한 관계에 대한 남한 사람들의 생각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는 부분도 있다고 생각한답니다.

일 테면 지난 주간 북한과 미국간의 첨예한 갈등 국면을 소개하면서 남한 사람들의 이해할 수 없는 듯한 행태를 소개한 LA Times 기사 같은 것입니다. 기사 제목이 “South Koreans are surprisingly blase about civil defense. Why?”입니다.

전쟁이 곧 일어날 것 같은 상황에서도 아무 일 없다는 듯이 태연하게 생활하는 남한사람들의 모습을 전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이런 모습을 저는 이해할 수 있답니다. 왜냐하면 저도 그들 남한사람들과 같은 경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남북이 갈라진 지 70년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나면서부터 남한과 북한 사이에 곧 전쟁을 할 것이라는 소리를 듣고 살았답니다. 해마다 적어도 한 두차례 씩은 전쟁이 곧 날 것 같다는 뉴스를 보며 살아온 것이지요.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 한반도에서 전쟁은 없었습니다. 이것을 아주 단순하게 말한다면 ‘전쟁이 곧 날 것 같다’라는 말을 남한 사람들은 경험적으로 믿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런 태도에 대한 옳고 그름을 떠나 태어나면서부터 줄곧 ‘곧 전쟁이 일어 날 것’이라는 소리를 듣고 살지만 평생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을 본 적이 없다면 그 태도를 이해할 수는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엄밀히 따지자면 그런 상황이나 태도는 슬픈 것이지요. 더구나 전쟁이란 생각하기도 싫을 만큼 슬픈 일이겠고요.

바라기는 세탁기에서 나온 옷들이 먼지와 때를 벗고 깨끗해 지듯, 이 여름을 지나며 남한과 북한 그리고 미국 또는 그 어느 나라이건 전쟁이라는 말이 쓰이지 않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의 세탁소에서


 

Last week, some customers asked me questions like these: “Why is North Korea acting like this?”; “Have you been to North Korea?”; and “At this rate, won’t war with North Korea break out?” But, how can I answer these questions, as I don’t have any expert knowledge? Surely, they should not expect to get the right answers from me.

South and North Korea were divided and have kept a mode of confrontation for about seventy years. So, only old people have an experience of the time of one unified Korea. Most of the people from South Korea like me don’t know much about North Korea. However, I have my opinion about the South Korean people’s thoughts about North Korea and the relations between South and North Korea.

An example may be the LA Times article which introduced seemingly incomprehensible attitudes and behaviors of the South Koreans, while covering the acute tension between America and North Korea. Its title was “South Koreans are surprisingly blase about civil defense. Why?”.

It reported that people in South Korea are living and acting calmly as if everything is fine, under the situation in which a war may break out soon. I think that I can understand that. That’s because I myself have the same experience as those people in South Korea.

I told you that the division of Korea into South and North happened seventy years ago. Thus, most of the Korean people have been living with the story that a war may break out soon since they were born. They have heard this news at least twice every year. But, a war has never broken out since the Korean War. Put in simple terms, people in South Korea have come not to believe the story because of their experience. When they have heard that a war may break out soon, but it has never happened for their life time, isn’t it understandable, whether such an attitude is right or wrong?

However, I think that it is sad to have to think about such a situation and attitude. Moreover, a war is so sad and terrible enough I hate even just to think about.

Hopefully, I wish that the word “war” will not be used in this world, whether in South and North Korea, America, or any other countries during this summer and after, as the clothes from the cleaning machine will become clean without dust and dirt.

From your cleaners.

우리 사이에

주일 오후, 방 정리를 하다가 눈에 뜨인 오래 전에 쓰던 공책 하나. 내 나이 마흔 중반 어간의 기록들이다. 거의 스무 해 전에 끄적였던 낙서 가운데 하나가 오늘도 여전히 유효하게 다가선다. 아마 뉴스 탓일게다.


우리 사이에

그가 ‘우리 사이에’라 했지만
안경 너머 번득이는 동자엔
사이 뿐
우리는 없다
 
사이
그 틈으로 이미 회오리 일고
그 틈으로 어느새 깊은 강물 흘러
닿을 수 없다
 
그는 거푸 ‘우리 사이에’라 했다
 
눈물 쏟아 차라리
그 사이에 흐르는 강물 넘쳐
넘쳐 흘러
우리 잠기면 그 날
우리 될까
우리 사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