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다림

일요일 아침 산책길에 누리는 축복들을 눈에 담다. 내가 피울 봉우리들을 위하여. 그 맘으로 편지 한 장 띄웠다. DSC00659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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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지 곳곳엔 아직 녹지 않은 눈들이 쌓여 있고, 쌩쌩 부는 바람에 아직 외투나 점퍼를 벗을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이번 주에도 눈이 한차례 내린다는 일기예보입니다. 봄은 아주 더딘 걸음으로 오나 봅니다.

그러나 제 아무리 찬바람이 불어도, 눈이 더디 녹아도 이제 곧 크로커스, 수선화, 히야신스, 튜울립 같은 꽃들이 대지 위에 얼굴을 내밀 것입니다. 아직은 차가운 땅 속에서 꽃을 피우기 위해 온 힘을 다하여 애쓰는 꽃뿌리들의 노력을 저는 보거나 느끼지 못하지만, 시인들의 눈에는 그 애쓰는 모습들이 다 보이는 모양입니다.

봉오리는
모든 만물에 맺는다
꽃을 피우지 않는 것들도
모든 것들은 내면으로부터 스스로를 축복하며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시인 Galway Kinnell의 시 <St. Francis And The Sow>의 일부입니다.

< 꽃을 피우지 않는 것들도/  모든 것들은 내면으로부터 스스로를 축복하며 꽃을 피우기 때문이다> 라는 Galway Kinnell의 선언을 읽노라면, Ralph Waldo Emerson이 말한 잡초에 대한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잡초란, 아직 그 가치를 발견하지 못한 식물이다”

화사하고 아름다움은 꽃들 뿐 만이 아니라 길가에 피어 오르는 이름없는 잡초일지라도 그 스스로 축복 속에서 뜻 깊게 삶을 노래한다는 시인들의 성찰입니다.

이제 곧 봄은 올 것입니다.

살아 숨쉬는 모든 것들에게서 사랑스러움과 축복을 느끼는 아름다운 한 주간이 되시길 빕니다.

봄이 오는 길목, 당신의 세탁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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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 snow in the shade still remains non-melt and the wind howls through the trees, I don’t dare to take off a thick coat or heavy jacket yet. According to the weather forecast, we’ll have snow once this week. It seems that spring comes at a slow pace this year.

However, no matter how hard the cold wind may blow and no matter how slowly snow may melt away now, spring flowers, such as crocuses, daffodils, hyacinths, and tulips, will come out of the soil soon. Though I cannot see or feel the great efforts to bud and bloom of those plants in the cold soils, poets seem to see them all.

The bud
stands for all things,
even those things that don’t flower,
for everything flowers, from within, of self-blessing;

This is a part of a poem, “St. Francis And The Sow,” written by the poet Galway Kinnell.

When I read Galway Kinnell’s proclamation, “even those things that don’t flower,/for everything flowers, from within, of self-blessing,” Ralph Waldo Emerson’s definition of a weed came across my mind:

“What is a weed? A plant whose virtues have not yet been discovered.”

Cheer and beauty can be found not just in flowers, but in any plants which sing their lives meaningfully, of self-blessing, though they may be unnamed weeds and may flower at the roadside. That’s poets’ reflection.

Spring will come very soon.

I wish that you’ll feel love and blessing from everything which is living and breathing this week and beyond.

From your cleaners at the corner of spring’s coming.

춘설(春雪)

경칩(驚蟄) 지난 삼월에 오신 춘설(春雪). 가게에서 손님으로 오시는 눈 구경하다 집에 돌아와 쌓인 눈 치우노라니 허리가 휜다. 이럴 때면 살림 차려 나간 아들놈이 그립다. 이웃집 눈사람 쳐다보다 웬지 설운 생각이… 춘설(春雪)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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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설(春雪)

− 정지용

 

문 열자 선뜻!
먼 산이 이마에 차라.
 
우수절(雨水節) 들어
바로 초하루 아침,
 
새삼스레 눈이 덮인 뫼뿌리와
서늘옵고 빛난 이마받이하다.
 
얼음 금가고 바람 새로 따르거니
흰 옷고름 절로 향기로워라.
 
옹송그리고 살아난 양이
아아 꿈 같기에 설어라.
 
미나리 파릇한 새 순 돋고
옴짓 아니기던 고기 입이 오물거리는,
 
꽃 피기 전 철 아닌 눈에
핫옷 벗고 도로 춥고 싶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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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월

이월 – 이 나이에도 여전히 봄을 기다리는 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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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慾心) 에

달포 전 일이었다. 잠자리에서 일어 났는데 몹시 어지러웠다. 멀쩡하게 잠 잘자고 일어나서 이게 뭔 일인가 싶었다. ‘괜찮아지겠지’ 하며 조심스레 아래층으로 내려왔는데 영 서있지 조차 못할 지경이었다. 이어지는 심한 구토 증세로 그만 소파에 눕고 말았다. 그렇게 두어 시간 누워 있고 나서야 어지럼증은 가셨다.

아내가 family doctor에게 전화를 해 증상을 이야기했더니 일주일 후에나 오라고 했다. 딱히 emergency로 병원을 찾을 정도는 아닌 듯하여 정해진 시간에 의사를 찾기로 했었다.

느닷없이 처음 맞는 내 몸의 이상 증세에 나는 좀 당황했었다. 솔직히 나는 내 몸에 대해서는 너무나 무지한 편이다. 계절 따라 이따금 찾아오는 감기 몸살이나 어쩌다 한 번 씩(? 이제껏 평생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지만) 앓아 본 적 있는 복통 정도가 내 몸이 알고 있는 병의 전부였기에 그저 시간이 지나면 몸은 늘 정상으로 돌아온다는 무지한 믿음을 신봉하는 편이었다.

이웃간의 대화 속에서 흔히 듣는 병명이나 약명들에도 나는 거의 무지하다. 약명은 커녕 그 흔한 바이타민 종류에도 무지하다. 그나마 최근에 이르러 아내가 챙겨주는 바이타민을 이따금 먹기는 하지만 그게 무언지도 모르거니와 아내가 잊으면 그만이다.

그런데 이른 아침에 느닷없이 찾아온 어지럼증에 나는 좀 쫄고 있었다. 말이 family doctor이지 의사란 나와는 참 거리가 멀었다. 내가 찾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에 찾아온 thyroid 증세와 나이 들어 함께 하는 혈압 문제로 아내가 자주 찾아야만 하는 아내의 의사였을 뿐이다.

몇 해전 봄에 뒷 뜰 잡목들을 정리하다가 poison ivy로 온몸에 번진 두드러기와 가려움 증상으로 의사를 찾았을 때, 의사는 몇 가지 기본적인 몸에 대한 검사를 받아 볼 것을 내게 권유했지만 나는 poison ivy를 치료하는 약을 받아오는 것으로 그 권유를 가볍게 무시했었다. 이제 나이도 있고하니 바이타민 c던가 d, 아니면 e던가를 권유하는 의사의 소리도 한 귀로 흘렸었다.

아무튼 일주일 후에 찾아간 의사는 이런 저런 검진 후에 내 몸에 느닷없이 찾아왔던 어지럼증은 단순 바이러스 감염 현상이라는 판단을 내리며 혈액검사를 비롯한 몇가지 기본적인 검사를 받아 볼 것을 권유했었다.

그 검사 중에는 colonoscopy가 있었다. 집에 돌아와 colonoscopy 곧 대장 내시경 검사가 뭔가하고 찾아보니 하루 전에 온 종일 굶고 뱃속에 있는 모든 것들을 빼내고서야 받는 검사란다.

마침 오래전에 계획했던 여행이 코 앞에 있었던 터라 검사는 좀 뒤로 미루자 하였다.

그리고 어제, 나는 그 검사를 받았다. 결과는 아주 작은 양성 종양이 발견되어 제거했고 대체로 양호하다는 판단이었다.

어제 그 검사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환자복으로 갈아 입고 대기실에 누워 혈압 체온 등 이런 저런 검사와 수액 주사를 놓던 피부색이 까만 간호사와 흰색 보조 간호사 모두 매우 수다스러웠다.

나에 대한 기본 정보들과 나와 가족 병력을 묻고 난 그녀들은 내게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그녀들의 묻는 의도를 모르는 것은 아니었으되 나는 내가 사는 동네 이름을 대었다. 그녀들은 소리내어 웃더니 내 본래 고향이 어디냐고 물었단다. 그제서야 나는 ‘한국’이라고 답했다.

이어지는 그녀들의 물음은 ‘동계 올림픽’과 ‘서울’에 대한 것들이었다. 물음을 이어가는 앞뒤 이야기로 보아 그 전날에 있었던 Super Bowls 중계 때 전파를 탄 평창 동계 올림픽 광고 영향이 컷던 듯 하였다.

한국뉴스를 보면 내가 이해 못할 것들이 참 많다만, 평창 올림픽은 평범한 미국 시민들에겐 한국을 가까이 알리는 참 좋은 기회가 될 듯 하다. 아무렴 잘 치루어 졌으면 좋겠다.

수다스런 그녀들이 ‘잠시만 기다리라’는 소리와 함께 사라지고는 의사가 나타가기 까지 한참이나 시간이 지났던 것 같다.

병실 침대에 누워 그렇게 오랜 시간을 누어 있기는 처음인 것 같다는 내 말에 의사는 복되게 살았단다.

그 길었던 시간, 순간으로 찾아온 욕심이 하나 있었다.

언젠간 내게도 다가올 그 시간, 눕지않고 서서 더 큰 욕심으로는 걸으며 그 알 수 없는 시간을 맞을 수 있었으면 하는 욕심이었다.

내 몸에 대한 내 무지함에 비해 나는 아직 괜찮다.

욕심(慾心) 에.

일상을 위하여

‘여행은 떠나는 것이 아니라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한 것이다.’ – 어제, 오늘 내 가게 손님들이 나를 깨우친 생각이다.

짧은 여행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온 우리 부부를 정말 반갑게 맞아 준 이들은 내 가게 손님들이었다. 바로 우리 부부의 일상이었다.

손님들은 저마다의 경험으로 지난 시간들을 꺼내어 ‘오늘’, ‘여기’에서 우리들의 일상을 함께 했다.

“내 마누라에게는 너희들 여행 이야기는 하지 말아줘! 마누라가 또 가자고 할지 모르니…”

“거긴 아주 형편 없는 곳이었지, 이태리가 정말 좋았어!”

“출장 길에 딱 하루 들렸었지. 언제간 나도 시간 내서 가보고 싶은 곳 중 하나야.”

아련하게 옛 기억을 떠올린 이는 1970년대 동계 올림픽 메달리스트였다. 이젠 할머니가 된 옛 소련 출신 피겨 선수였던 그녀의 기억이다. “모나리자 앞에 서 있었단다. 마침 나를 알아 본 관광객이 있었단다. 그 이가 내게 사인 요청을 했단다. 모나리자 앞에서 사인을 해 주었었지”

그랬다. 무릇 여행이란 일상으로 돌아오기 위한 것이다.

내게 파리는 역사 속에서 오늘을 바라보며 내일을 꿈꾸게 하는 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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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 콘서트

“표 파는 게 정말 힘드네요.”, “열심히 다닌다고 다녔는데 표를 못 팔았어요.”, “’아직도 세월호냐?’고 묻는 사람에게 표 파는 일이 참 쉽지 않았어요.”

애초 시작할 때부터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만 하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나선 일이었다. 내 이야기는 아니고, 어느새 4년 세월이 흐른 세월호 참사 이후 ‘이 일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일대 사건’이라는 생각으로 동아리가 된 사람들 이야기다. 이름하여 <세월호를 기억하는 필라델피아 사람들의 모임(약칭 ; 필라 세사모)>이다.

이들이 아직 봄을 기다리기엔 이른 2월 초에 작은 음악회를 준비하고 사람들에게 함께 하자고 나선 까닭이다.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희망을 이루기 위해 죽은 자와 산 자가 자연스럽게 만나 대화하는 기억의 공간을 만들고, 아픔을 보듬어 서로가 서로를 일으켜 세우는 공동체를 만들어가고자 합니다. 참여와 실천 속에서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사회, 모두가 존중 받는 국가, 서로가 협력하고 환대 받는 평화와 우정의 세계를 만들기 위한 의미 있는 행진으로 우리의 미래를 만들고 싶습니다.” – ‘4·16재단 설립 추진 대회’ 제안문 중에서

나는 믿는다. <기억과 희망이 흐르는 밤>을 위한 티켓을 파는 이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 ‘쉽지 않다’, ‘힘들다’는 소리로 하여 기억은 더욱 새로워 질 것이며,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희망은 이루어 질 것임을.

비록 음악회 자리가 차지 않을지라도.

기억, 즉 역사는 과거의 잘못을 찾아내는 수단이며, 오늘 힘들고 어려운 아픔을 보듬어 언젠가는 서로가 서로를 일으켜 세우는 공동체를 이룩해 내는 도구임을 믿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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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 성과 속

이즈음 세상에 외국 여행 한번도 못했다면 ‘촌스럽다’라는 말 듣기 딱 십상이다. 허나 어찌하리! 그게 내 모습인 것을. 딱히 여행 경험 유무로 따지는 촌스러움이 아니더라도 어쩌면 ‘촌스러움’은 늘 내게 붙어 다니는 수식일 수도 있겠다.

어쨌든 나는 큰 맘 먹고 첫 번 째 외국여행을 다녀왔지만 평생을 함께 한 촌스러움을 벗지는 못할 것이다.

그랬다. 정확하게 내 인생의 반은 한국에서, 나머지 반은 미국에서 살았다만 두 곳 모두 내게 외국은 아니다. 한국이나 미국이나 내 일상을 이어가는 삶의 터전이었고, 현재도 마찬가지다. 하여 이번 여행이야말로 첫 외국 나들이였던 셈이다.

내 나이 스무 살 무렵에 어지간히 싸돌아 다녔었다. 그래봐야 한반도 남쪽이었지만 웬만한 명산과 바닷가에 작은 발자국 꽤나 찍고 다녔던 때가 있었다.

서른을 넘어설 즈음 생활인이 된 내게 싸돌아 다닐 여유는 이미 사치였다. 미국 이주 이후 삶은 작은 사치도 허락하지 않았다. 변변한 재주가 없는 내게 이민은 그저 일상을 이어가는 일이었다. 그래도 차마 버리지 못한 버릇으로 돌아 다니기는 했으나 그 역시 미국을 벗어 나지는 못했다. 그나마 어찌하여 작은 여유를 부릴 기회가 오면 연어처럼 한국을 찾곤 했으므로 해외 여행은 차마 꿈꾸지 못하였다.

시간은 늘 생각과 무관하게 흘러 어느새 은퇴 시기를 저울질 하는 나이가 되었다. 몇 해 전 일이다. 아직 무릎이 쓸만할 때 다녀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밀려 왔었다. 그 생각 끝에 속다짐을 했다. 아직 걸을 만 할 때, 해마다 며칠 동안 만이라도 싸돌아 다니며 걸어 보자고….

그 다짐의 하나로 짧게 해외 여행을 다녀왔다. 짧은 여정이었지만 내 체력이 딸릴 만큼 어지간히 걸었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눈이 내려 앉은 뒤뜰을 바라보며 짧았던 여행길을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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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聖, 性, 城, 成)과 속(俗, 贖, 速, 屬)들을 확인할 수 있었던 여행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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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전(宣傳)에

<프로파간다는 참 재밌습니다. 건망증을 목표로 하니까요. 무슨 말이냐고요? 프로파간다는 국민에게 무언가를 잊게 만드는데 목표를 둔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미국 국민의 경우에는 잊을 것도 없는 것 같습니다. 애초부터 진실을 알지도 못했으니까요.>

과거의 역사에 무지한 채, 권력이 쏟아내는 선전에만 귀를 기울이는 미국국민들을 향해 던진 하워드 진 (Howard Zinn)의 말이다.

그가 세상 뜨기 전인 2004년에 한 말이다. 그런데 그의 말은 2018년 오늘도 미국민들에겐 여전히 유효하다. 그런 미국민들이란 그저 평범한 내 이웃들이다.

한국계인 내게 친근함을 나타내려고 평창올림픽과 북한에 대한 신문기사를 보고 말을 건네는 이웃들은 따지고 보면 내 개인적으로는 참 고마운 일이다.

문제는 전형적인 미국민들에게 북한이나 남한이나, 아니 베트남, 필리핀, 쿠바, 아프카니스탄, 이라크 등등의 나라들에 대해 권력들이 만들어낸 선전 이상 무엇을 알고 있을까? 하는 물음이다.

이런 관점으로 보자면, 이즈음 한국(남한) 뉴스들을 통해보는 그 곳 세상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여전히 시민들에게 무언가를 잊게 만들려고 온갖 힘과 꾀를 다하는 권력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특히나 언론과 돈의 권력들.

다만 건망증과 싸우며 부단히 기억을 살려내고자 하는 시민들이 예전과 다르게 많고, 그들의 노력이 치열하다는 소식에 희망을…

어머니와 스웨터

모진  추위 속 오래 전 어머니가 짜 주신 스웨터를 보며….


매서운 추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또한 연일 이어지는 추위 속에서 작건 크건 일상을 허무는 일들이 없었으면 하는 바램과 비록 평시와 조금 어긋나더라도 마음은 늘 넉넉한 하루 하루가 되시길 빕니다.

문득 내가 살아오면서 가장 추웠던 겨울은 언제 였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당신의 기억 속에 가장 추운 겨울은 언제 였는지요?

저는 아주 오래 전에 제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무렵이 생각난답니다. 한국전쟁이 끝난 지 채 십년이 지나지 않았던 때여서 그저 가난이 평범했던 시절이었답니다. 허름한 집 구조나 난방시설 등을 이즈음 우리들이 누리고 있는 것들과 비교해 설명드릴 수가 없을 만큼 가난했던 때였답니다.

물론 저희 가정만 그런 가난을 안고 산 것은 아니고, 제 친구들 대부분의 생활은 거의 비슷했답니다.

제겐 그 때의 겨울이 가장 추웠답니다. 일테면 방안에 있는 그릇 속에 물이 얼고, 벽에는 하얀 성에가 낀 방을 상상하실 수 있겠는지요? 그 때의 겨울이 그랬답니다.

그 때 그 매섭게 추운 겨울에 저를 따뜻하게 감싸 주었던 것은 어머니가 짜 주셨던 스웨터 였습니다. 어머니께서 털실로 짜 주신 두툼한 바지와 자켓은 그 겨울을 이겨낸 힘이었습니다.

중학교를 들어가고 고등학교를 다니며 제가 더는 털옷을 입지 않았지만, 어머니는 겨울이면 털옷을 짜 주셨답니다. 그리고 제가 대학을 들어가던 그 해 겨울을 마지막으로 어머니는 더 이상 털옷을 짜지 않으셨답니다.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짜 주신 털옷을 제가 입었던 기억은 거의 없답니다. 그러나 그 털옷은 45년이 지난 지금도 제가 고이 간직하고 있답니다.

몹시 추운 겨울날 아침, 오래 전 어머니가 짜 주신 털옷을 보며, 모든 추위와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었던 힘을 생각해 본답니다. 어머니의 사랑 말이지요.

매서운 추위로 시작한 2018년입니다.

올 한 해 내내 비록 어머니 아니어도 누군가의 사랑을 넘쳐나게 받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어머니의 사랑을 나눌 수 있는 따듯함이 이어지시길 빕니다.

당신의 세탁소에서


The bitter cold continues. I wish that, above all, you’ll stay healthy. I also wish that, in spite of the continuing biting cold, you’ll manage to keep everyday life in control and to maintain an easy mind every day, though things may not work out exactly in the same way as usual.

Casually, one question crossed my mind: when was the coldest winter in my life? When was the coldest winter in your memory?

For me, about the time when I was in elementary school came to my mind. I could say that the winters in those days were the coldest in my life. As it had not been less than ten years since the end of the Korean War, poverty was normal in Korea at that time. The housing conditions, including the heating systems, in those days were beyond explanation, especially compared with the comfort which we are enjoying now.

For example, the water in a container in the room was frozen and the walls in the room were covered with frost overnight in the bitter cold days of winter. Can you imagine that?

Of course, it was not just my family which lived in such a shabby house, but most of my friends also lived in a similar condition.

What wrapped me up warmly in the cold winter at that time was a sweater which my mother had knitted. Thanks to the thick jacket and pants which my mother had knitted, I could go through the cold winter.

Though I rarely put on those knitted clothes when I was in middle school and high school, my mother still knitted those clothes for me every winter until I entered a university. Since then, she stopped knitting my clothes.

I don’t remember when I wore the last one which my mother knitted, or how many times I had worn it. But I still keep it carefully though it is 45 years old now.

In this morning of a bitter cold day, I’m thinking about the strength to overcome the cold and difficulties, while looking at the sweater which my mother knitted for me a long time ago. I mean mother’s love.

It is the year 2018 which began in the bitter cold.

I wish that throughout this year, you’ll continue to have the warmth enough to win someone’s overflowing love like my mother’s love and also to share this type of mother’s love with someone.

From your clean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