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오후

일요일 아침이면 눈을 더 일찍 뜨는 까닭은 무엇일까? 며칠 동안 비가 이어 내리는 날씨 탓인지 몸이 무겁다. 밖은 어두운데 비는 그쳤나보다. 그냥 습관으로 일어나 가게로 나간다. 두어 시간 가게 정리를 마치고 나오다, 아기들 위해 세상 구경 나온 오리 가족들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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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족은 아이들이 여섯, 다른 가족은 넷이다. 생각해 보니 내 어머니 형제는 여섯이었고 나는 넷이다.

비가 이어졌던 게 사흘 이었나? 나흘 이었나? 겨우 며칠인데 오후에 반짝하는 햇빛이 참 반갑다. 창문을 여니 새소리가 먼저 집안으로 들어온다. 창밖 잎새에는 어느새 여름 햇빛이 앉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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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날 오후엔 헨리 데이빗 소로우가 참 제격이다. 난 이런 일요일 오후가 좋다. 아내는 아직 교회에 있고, 집안엔 새소리와 시계침 소리가 있는…

<조직과 인간들의 사회제도를 염두에 두고, 과학의 관점에서 자연을 생각해 보는 것도 중요하다. 그러나 여기서 한발자국 더 나아가 우리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을 무시하거나 잊어버리고 자연의 본원적이고 편견없는 시각에서, 초기의 인류와 모든 어린 아이들, 그리고 자연인들이 그랬듯이 자연이 주는 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도 그 못지 않게 중요하다.>- Henry David Thoreau

미안함

‘젠장, 이젠 늙었군!” – 이즈음 툭하면 혼자 뱉어내는 말이다.

아직 칠십이 먼 나이에 깝친다는 소리 듣기 딱 십상이다만, 어찌하리, 나오는데야. 일테면 평시와 조금 다른 강도로 일을 마치고 온 날이면 만사가 귀찮아진다든가, 집을 나서거나 가게 문을 닫고서 한참을 운전하고 가다가는 ‘아이구, 문을 안잠궜나 본데…”하며 다시 돌아가는 경우에 나오는 소리인데 점점 그 빈도가 늘어간다.

까닭없이 옛 생각에 잠기거나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옛 경험들을 주저리 주저리 늘어놓는 내 모습을 뒤늦게 발견하고는 “쯔쯧, 나도 이젠 정말 갔구나!”하는 생각이 들곤 한다.

엊저녁에 나는 또 한번 한 물 간 늙은 내 모습을 보았다. 이번 토요일에 이웃 마을 필라에서 광주항쟁 38주년 기념행사를 한다는 소리를 듣고서였다. 나는 그 소리에 급격히 스물 후반 언저리 나이로 돌아갔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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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 당시 나는 도피 중이었다. 솔직히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우스운 일이다. 지금 세상 같으면 도피란 참 가당치도 않은 일이기 때문이다. 당시에 도대체 숨을 만한 일을 한 기억이 없다. 그럼에도 나는 분명히 도피 중이었다.

그해 봄 나는 복학을 했었다. 70년대 이른바 운동권으로 찍혀 제적되었던 많은 학생들이 박정희가 죽자 학교로 돌아갔고, 나도 그들 중 하나였다. 따져보자면 그것이 내가 80년 5월, 도피했던 까닭의 전부이다.

복학 후 3월 한달 잠잠했던 대학가는 4월로 접어들면서 전두환 신군부 타도 시위가 연일 이어졌다. 시위는 이른바 서울역 회군이라고 알려진 5월 15일까지 전 대학에서 이어졌다. 지금 곰곰이 다시 그 때를 생각해 보아도 내가 특별히 한 일이란 없다. 나는 투사도 아니였거니와 무슨 운동의 선봉장은 더더욱 아니었다.

아무튼 나는 5월 15일 이후로 내 집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누군가의 눈에 띌까 두려워 하며 도피 생활을 했다. 아마 5월 20일이 지나서였을 게다. 당시 내게 일본어를 가르쳐주던 일본인 친구가 있었는데 그는 요미우리 신문 기자였다. 그가 내 아버지를 찾아와 신신당부를 했더란다. 어떻하든 당신 아들과 연락을 해서 남쪽 광주로는 가지 말라고 일러 주라고 말이다.

1980년 5월 광주는 그렇게 내게 처음 다가왔었다.

6월 들어 나는 계엄사 합수부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 내가 체포되기 전 내 아버지는 치안본부에 잡혀가 아들의 행방을 닥달하는 놈들에게 치도곤을 당하셨다. 그 치도곤으로 평소 화랑 무공훈장을 자랑하시던 상이군인 내 아버지가 이듬해 미국으로 이민을 왔다.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도 나는 그때 특별히 한 일이 없다. 그저 이십 대 후반 늦깍이 복학생이었을 뿐이다.

몇 년 후 나도 아버지를 쫓아 미국으로 왔고 이제 한 세대가 훌쩍 넘는 시간이 흘러, 어느새 툭하면 깜박하는 나이가 되었다.

광주항쟁 38주년 기념행사 포스터를 보며 떠올려 본 옛 생각이다.

‘그래, 머릿수 하나 채우자!’ 그 맘으로 토요일 행사장을 찾아보려 한다.

그리고 이어지는 생각과 그림들.

아주 어릴 적 외할머니는 큰 외삼촌이 6.25 때 국민방위군에 끌려 갔다가 피골이 상접한 채로 거지 중에 상거지가 되어 돌아온 그날을 되새기며 몸서리를 치곤 하셨다.

내 불알친구 병덕이 형인 병모형, 교사 자격증 받기 직전 연좌제에 걸려 동네 구멍가게 주인이 되었다. 아이구 그 형님도 이제 칠십이 훌쩍 넘으셨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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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상(殘像)

참 힘들어 보이는 일들을 아주 쉽게 하는 이들이 있다. 게다가 누가 시켜서 하는 일도 아니거니와 저 하나 먹고 사는 일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들을 즐거운 얼굴로 하는 사람들을 보면 때론 경이롭다. 내 주변에 그런 이들이 살고, 그들과 알고 지낸다는 일만으로도 이미 내가 누리는 복이다.

그 복을 누리는 나는 쉽게 그들과 함께 하지는 못한다. 내게 핑계거리는 차고 넘친다.

어제는 어머니 주일, 샌드위치 가운데 놓인 우리 부부는 이런 날이면 바쁘다. 자식 시늉한다는 아들 며느리 딸들의 인사 받 일은 뒤로 미루더라도, 우리 부부가 자식 시늉은 해야겠기에 어머니 아버지 찾는 일, 장모 묘소 찾고, 눈 수술 하신 장인 찾아 보는 일 등 하루 해가 짧다.

와중에 짬을 내어 필라를 다녀왔다. 세월호 유가족들이 필라를 방문하여 함께하는 행사에 얼굴이나 비추자고 나섰던 길이다.

나는 그 행사를 준비한 이들을 제법 안다 말할 수 있다. 거의 다 나와 처지가 비슷한 이들이다. 어쩌면 내 처지가 그들보다 나을 수도 있겠다. 아직 아이들을 키우는 이들이 대부분이어서 시간의 여유로 따지자면 내가 더 풍족한 편일 수도 있다.

세월호 가족들을 맞이하는 일, 영화 <그날, 바다>를 함께 보기 위해 영화 파일을 구매하고, 영화관을 대여하는 일, 세월호 ‘세’자만 나와도 고개를 가로 젖는 이 곳 동포사회에서 사람들을 동원하는 일, 뒷풀이 행사로 장소와 음식을 준비하는 일 등등 그 만만치 않은 일들을 정말 쉽게 웃으며 하는 그들의 경이로운 모습을 다시 한 번 확인한 어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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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므로 모두 제 주머니 털어 하는 일이고 보면 내가 그들을 향해 치는 박수란 참으로 공치사일 뿐이다.

그리고 오늘, 세월호 관련 행사 때면 먼 길 마다치 않고 기록을 남기는 일을 감당하는 이가 찍은 어제의 사진들을 본다.

사진들을 보며, 잔상으로 남아있던 세월호 가족들에 대한 어제의 미안함이 진하게 차오른다.

영화 <그날, 바다>가 끝난 후 영화 관람자들과 유가족들과의 대화의 시간이었다. 유가족들은 짧은 일정에 뉴욕에 이어 필라델피아, 워싱톤을 잇는 여정 중이었으므로 몹시 피로하였을 터였다. 나는 푹신한 관람석 의자에 몸을 완전히 맡기고 편하게 눕듯이 앉아 있었는데, 그들 유가족들은 영화관 스크린 앞에 내내 서 있었던 것이었다. 나는 그 시간 유가족들에게 몹시 미안한 생각이 들어 빨리 그 시간이 지나가기를 바랐지만 행사를 준비한 이들에게 차마 한마디 말을 건네지는 못했다. 그들의 노고를 이미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리고 지금 보고 있는 사진 한 장. 어쩌면 세월호 유가족들이 지나온 세월과 앞으로 그들이 헤쳐 나가야 할 길들을 보여주는 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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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을 푸는 일, 역사를 바꾸는 일들은 승전보를 울리는 팡파레와 함께 등장하는 영웅들로 부터가 아니라, 안락한 의자에 관람자로 앉은 대중 앞에 비록 초라하고 지친 모습으로 서 있을지언정 아픔 속에서 솟아오르는 희망을 전하는 이들에게서 비롯된다는 역사적 진실 하나, 그리고 그 진실의 촛불 하나 함께 들고자 애쓰는 내 이웃들이 고마운 저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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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無知)에

그림에 대해 나는 문외한(門外漢)이다. 내가 모르는 게 비단 그림 뿐만이 아니겠지만, 그림에 관한 한 거의 완벽할 정도로 무지 무식한 편이다. 이런 나의 무지 무식을  종종 고등학교 때 미술 선생 탓으로 돌리곤 한다. 나는 그를 거의 선생으로 여기지 않았는데 딱히 그에게 엄청 두들겨 맞았던 기억 때문만이 아니다.

그의 수업 시간은 아주 독특했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미술시간은 일주일에 두시간이었다. 한시간은 그림을 그리는데, 미처 못다 그린 그림은 다음 시간까지 숙제로 남았었다. 그리고 다음 시간엔 열 명 씩 교단에 올라가 서서 각자가 그린 그림을 들고 서서 그의 평가를 받았다. 그는 우수 가작 선외 낙선 등으로 학생 하나 하나의 그림을 평가했는데 내 그림은 언제나 선외 거나 낙선이었다. 물론 그에게 엄청 두들겨 맞은 이후에 받은 평가들이다.

약이 오른 나는 옆 반 친구가 우수작 평가를 받은 그림을 빌려 들고 평가를 받았었는데 여지없이 그는 ‘낙선!’이라고 외쳤던 것이다. 그날 이후 그는 내게 더 이상 선생이 아니었다. 물론 그림 역시 나와는 아무 상관이 없게 되었다.

그저 내 기억일 뿐, 내 타고난 솜씨 없음이나 게으름에서 오는 무지 무식을 가리려는 수작 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나는 제 아무리 유명하다는 그림 앞에서도 아무 생각이 없다. 그게 잘 그린 건지, 못그린 건지, 왜 유명해졌는지 등등에 대한 느낌 자체가 없다는 말이다.

이따금 미술관이나 박물관 등을 찾아 그림 앞에 서기도 한다만, 솔직히 그저 사치일 뿐이다. 그림에 대한 아내의 식견 역시 내 수준을 크게 웃도는 것은 아니지만, 솔직한 성격의 아내는 그림이나 미술 그 자체를 있는 대로 즐기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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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브르 박물관을 찾은 일도 미술이나 예술에 밝아서가 아니라 파리에 가면 한번은 들려 보아야한다는 사치성 발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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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한가지 제법 위대한 발견을 하게 되었다. 그림과 그림 사이에 다름을 발견한 것이었는데, 사실 눈 달린 사람이라면 누구나 쉽게 알아챌 수 있는 일일 수도 있겠지만 ‘나도 그림 보는 눈이 있다’는 자신감을 얻은 일대 사건이었다.

그림들이 시대순으로 주욱 전시되어 있었는데 어느 순간 그림들의 색감, 구도, 인물의 표정 등등이 확연하게 다름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어서 이미 지나 오며 보았던 그림들을 다시 보았었다.

명암이 극도로 대비되어 밝은 쪽에 있는 탐욕스런 얼굴들과 어둠 속에 있는 찌든 얼굴들, 종교에 얽매어 찌든 시대 곧 중세의 그림들과 사람 사는 모습들이 자연스럽게 표현되어가는 르네상스 이후 시대의 그림들의 차이는 그렇게 내게 다가왔다.

그 그림들의 대비는 시간이 지났지만 지금도 또렷하게 기억된다.

사람들이 살아 온 모습들을 보면 미술이나 예술 쪽은 비교적 진보가 빠른 편이다. 종교적 틀이나 제도를 벗고 신 앞에 홀로 선 신앙인을 내세웠던 키에르케고르가 고민하던 시대는 19세기이고, 그가 사람들에게 인정 받은 일은 20세기였다. 그리고 21세기인 오늘에도 여전히 중세로 살아가는 이들은 차고 넘친다. 종교에.

종교 같은 이념도 공허하거나 더디기는 마찬가지다.

남북한 정상회담 이후 오래 전에 유행하던 데탕트(détente)라는 말이 뉴스에 등장하고, 각종 해설과 의견들이 쏟아진다.

남북, 북미, 한미 또는 일 중 러 등등의 문제들에 너나없이 모두 해박한 지식들이 넘쳐나는 이들의 소리가 높다. 솔직히 허공을 치는 공허한 소리들이 넘친다.

키에르케고르, 하이데거, 불트만 등등의 서구 생각들을 두루 섭렵한 이후 예수 곧 종교란 민중이 주인이 되어 일으킨 사건이라고 주창한 이는 안병무선생이다. 예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 새 시대를 이루는 주인공은 민중이라는 선생의 선언이었다.

쏟아지는 신 데탕트 뉴스 속 진정한 주인공은 민중이요, 시민이요, 인민 이어야 한다. 분단에 얽매어 찌든 시대를 벗고 진정 자유롭게 홀로 서서 떳떳한 나라의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 이들은 바로 인민이요, 시민이요, 민중 이어야 한다.

무지하거나 무식한 것은 아무 문제가 아니다. 분단의 굴레를 벗어내야 한다는 생각 하나 만으로 족할 따름이다.

그 생각 하나 세우려고 70년을 헤맨 일인데 그리 서두를 일도 아니다. 제 생각 하나 바르다면.

내 무지한 생각으로.

안식(安息)에

봄비 오락가락하는 흐린 일요일. 뜰 정리를 하다 보니 어느새 출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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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간 아내가 돌아오기엔 아직 이른 시간, 친구 농장에서 온 두릅과 돌나물을 씻어 무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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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친 김에 무친 오이와 더덕도 넣어 국수 한 그릇 뚝딱. 막걸리가 딱인데, 아쉬운대로 와인 한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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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게으른 낮잠을.

신이 주시는 안식의 축복이라니!

그 사이에

일요일 아침, 사진에 글을 얹어  가게손님인 이웃들에게 편지를 띄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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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간 며칠 동안은. 봄이 어느새 가고 벌써 여름이 온 듯이 날이 더웠습니다. 엄마와 함께  prom dress를 고치려고 가게를 찾는 10대들을 보면 아직은 봄이지만, 졸업 가운을 다려 달라고 찾아오는 20대들을 보면 어느덧 여름 같았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고 사계절을 나누어 말하지만 정확히 언제부터 언제까지가 봄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이를테면 5월 6일 오후 9시에 봄이 끝나고 여름이 시작된다고 하지는 않는다는 것이지요.

물론 봄의 첫날이니 여름의 첫날이라는 말들을 쓰기는 하지만 사람들이 딱 그 날짜에 정확한 선을 그어 계절을 느끼는 것은 아니지요. 그래서 봄인지 알았는데 어느새 여름이네, 여름인지 알았는데 어느새 가을이 되었네 하는 말들을 쓰는 것이지요.

봄과 여름 사이에 어떤 시간들이, 어떤 느낌들이 있다는 생각을 해본 것은 지난 목요일 더운 날 오후였답니다.

보일러 스팀을 사용하는 세탁소 사정상 여름 더위는 제 직업이 주는 어려움 가운데 하나랍니다. 해마다 느끼는 일이지만 그해 첫번째 오는 더위는 몸을 몹시 피곤하게 한답니다. 아직 몸이 적응되기 전에 찾아온 더위 때문이지요. 그런 날엔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 꼼짝하기가 싫답니다.

그날도 지쳐 집으로 돌아왔는데 뜰에 핀 꽃들이 제 피로를 덜어주었답니다. 만개한 봄꽃과 이제 막 꽃잎을 피우는 여름 꽃을 보며 제 머리 속에 떠오른 말이 ‘봄과 여름 사이’였답니다. 특별히 ‘사이’라는 말이 오랫동안 제 머리 속에 남아 있었답니다. 그날 제가 사진으로 찍은 ‘봄과 여름 사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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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계절 뿐만 아니라 많은 일들, 특히 사람 사이의 관계 등은 딱 금으로 그어 나눌 수 없는 어떤 ‘사이’들이 있는게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 것이랍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어떤 하모니가 이루어진다면 봄이나 여름처럼 홀로 이름 불리우는 시간보다 더욱 아름답고 귀한 순간들이 될 수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덤으로 올들어 처음으로 더웠던 그날에 대한 감사를 느낄 수도 있었답니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오월입니다. 자연과 이웃들 사이에 하모니가 잘 이루어져 아름답고 귀한 시간들을 만끽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당신의 세탁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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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few days in the last week were hot as if spring had passed already and summer has come. When I saw teenagers come to alter their prom dresses with their mothers, I thought that it was spring. But, when I was asked to press graduation gowns by youngsters in their twenties, I asked myself whether it was already summer.

Though we identify four seasons, spring, summer, fall and winter, we don’t say that spring is exactly from such day to such day. For example, nobody would say that spring ends and summer begins at 9:00 pm, May 6.

Sure, we use the words like the first day of spring or the first day of summer, but it is not like people feel the season at those dates. That’s why we say that it is already summer, though I’ve thought that it is spring, or that autumn is already in the air, I’ve thought that it is summer.

It was hot in the afternoon last Thursday when I thought that a certain time and feeling might be there between spring and summer.

Summer heat is one of the difficulties to cleaners like me, as I have to use steam from a boiler. While I feel it every year, the first heat wave of the year always makes me utterly exhausted. That’s because the heat has come before my body gets adjusted to hot weather. On such days, I don’t want to move an inch after I return home after work.

Last Thursday, I felt exhausted when I came back home. But, flowers in the yard relieved my fatigue. While I was watching full-blown spring flowers and buds of summer flowers, the words, “a gap between spring and summer,” came to my mind. Especially, the word, “a gap between,” stayed long in my mind. These are the pictures that I took at that time, “a gap between spring and summer.”

I’ve wondered whether there might be gaps not just between seasons, but also between many things and incidents, and human relations.

And, I wondered that if there is nice harmony in the gaps, a gap of time between spring and summer might become even more beautiful and precious than spring or summer itself. In that way of thinking, I could feel gratitude on that day when it was hot for the first time this year.

It is May, the queen of seasons, now. I wish that all of you will enjoy a beautiful and precious time as there is nice harmony with nature and neighbors.

From your cleaners.

옛 생각 하나

동네 사람들 누군가가 나를 또라이로 더러는 빨갱이 또는 전라도(이 세 마디가 서로 등치 되는 세상이 정말 웃긴다만)라고들 수근거린다는 소리가 내 귀에 꽂혔을 때 나는 그저 웃었었다. 나는 부산 태생 서울 사람이고, 빨갱이가 될 수 없는 예수쟁이이며 정신상태가 지극히 정상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나는 동포 신문을 발행하고 있었다. 내가 발행하는 신문은 남쪽으로는 워싱톤 DC, 볼티모어, 북으로는 필라델피아와 뉴욕 지역 한인 동포들에게 배포되었다. 그 무렵은 북한의 제 일차 핵실험이 있었고, 기대했던 6자 회담이 유명무실해 지던 때였다.

나는 한국계 미국시민으로 동포사회가 할 수 있는 일을 모색했다. 특히 동포 신문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찾고 있었다. 생각의 끝은 간단했다. 바로 만남과 대화였다. 서로를 이해하는 길을 찾아보자는 생각이었다. 결론에 이르자 나는 조금은 무모해 보이는 일에 도전했었다.

무모해 보인다 하였지만 따져보면 아주 단순한 일이었다. 미국 상하원 의원들 가운데 이른바 지한파 의원 몇몇과 미국에 나와있는 남북한 정부 대표들과 동포사회가 한자리에 모여 한반도의 평화를 주제로 이야기해보는 일이 그리 어렵지만은 않아 보였다.

다행히 내 거주지 출신 Joe Biden이 당시 상원 외교위원장 이었는데 그와 안면도 있었거니와 그의 보좌관들 중에는 북한에 정통한 이들이 있어 그들의 도움을 받고, 우리 동네 부지사를 지낸 중국계 우씨가 워싱톤 정가의 마당발이어서 그의 도움도 받을 수도 있었다.

워싱톤 주재 한국 대사관에는 몇 갈래의 연이 있었고, 안 풀리면 한국정부에 직접 연을 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문제는 북쪽이었다. 나는 미국내 통일운동가들과 북쪽과 가까운 인사들을 찾아 나섰다.

그렇게 나는 워싱턴과 뉴욕을 분주히 돌아 다녔다. 멀리 서부 LA쪽 인사들과의 연도 동원했었다.

내 제안에 대해 미 상하의원 몇 명이 동조해 주었고, 워싱톤 주재 대사관 쪽도 북쪽이 나선다면 주미대사가 나설 수 있다는 응답을 받았다.

분주히 유엔 주재 북한대사관의 문을 두드린 결과 나는 북쪽 대사와 마주 앉을 수 있었다. 그에게 나의 계획과 제안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함께 미 의회 쪽 인사들과 남쪽 대사관 입장을 전했다.

그는 일주일 정도의 말미를 달라는 요구과 함께 이런 말을 내게 남겼었다. “김선생, 우리 사회주의 국가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일주일 후 그의 전화를 받았다. 몇차례 미안하다는 말을 반복하며 그가 말했다. “김선생, 우리 사회주의 국가를 이해하셔야 합니다.”

그렇게 내 무모한 꿈은 헛되게 끝났었다.

다만 주미 한국 대사와 몇 차례 북한을 방문했던 Biden의 보좌관과 동포들과의 만남으로 그 헛된 꿈을 조금 달랠 수 있었지만.

2018년 남북정상회담 소식과 함께 숱한 뉴스들과 해설들을 보고 들으며 하루 해를 보내다가 문득 떠오른 십 수년 전 내 경험이다.

그렇다. 문제는 정상(頂上)들과의 만남과 회담, 서약과 선언이 아니다. 민(民)과 민(民) 서로간의 이해가 문제이며 먼저이다.

인민 또는 시민, 민중 또는 씨알이 먼저 서로를 이해하려는 마음(의식)이 우선이다.

내 귀에 더는 또라이, 빨갱이, 전라도라는 동네 사람들의 말이 들리지는 않는다. 어느새 세월이 흘러 잊힌 사람이 된 탓이겠지만 내 생각은 그 때나 지금이나 변함 없다.

기도

주일 아침 기도처럼 이 땅에 함께 사는 이웃들에게 편지를 띄우다.


어제는 제 어머니의 92회 생신이었습니다. 93세로 나이가 제일 많으신 제 아버지부터 지난해 태어난 어머니의 증손녀까지 온 가족이 함께 모여 어머니의 생일을 축하했습니다.

보행기 없이는 걷기 힘드신 아버지는 한국전 참전용사입니다. 그 전쟁에서 수류탄 파편이 다리에 박힌 채 평생을 살아오셨습니다. 이제는 홀로 사시는 장인 역시 한국전 참전용사입니다. 장인은 전쟁 당시 KATUSA라고 미군에 배속된 한국군이었습니다. 이젠 은퇴한 노인이 된 매형은 월남전 참전용사입니다.(모두 한국군으로 전쟁에 참여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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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함께 모여 오늘도 여전히 우리 가족의 중심축인 어머니의 생신을 축하한 것이지요. 많은 이야기들을 함께 나누던 중 지난 주에 있었던 남한의 대통령 문재인과 북한의 리더인 김정은 두 정상의 회담이 화제에 올랐답니다.

저는 문재인 대통령과 학교는 다르지만 같은 해 대학에 입학을 했었고, 당시 군사정권에 반대하는 시위로 인해 학교에서 제적 당하고, 구속되었다가 군대에 강제 징집되는 같은 경험을 했답니다. 물론 서로 아는 사이는 아니랍니다. 당시엔 그런 젊은이들이 많았답니다.

미공군에 다녀온 제 아들과 북의 김정은은 같은 나이 또래 랍니다.

북한이 고향이었던 장모는 고향에 한번 가보고 싶다는 평생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두 해 전에 돌아가셔 Kirkwood highway 선상에 있는 묘지에 누워 계시답니다.

남북의 정상들은 이제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전쟁을 끝내고 평화로운 시대로 나가자고 선언을 했습니다만 그 일이 이루어지기 까지는 많은 난관들을 풀어 나가야 합니다. 그 중 하나이자 가장 중요한 이벤트는 곧 다가올 북의 김정은과 트럼프 대통령과의 만남입니다.

어머님의 생신에 함께 모인 가족들이 바라본 남북정상의 회담에 대한 생각들은 서로 같지는 않았답니다. 그러나 한 가지 점에서는 모두가 같은 의견이었답니다. 바로 평화로운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는 같았습니다.

비단 한반도 뿐만 아니라 사람사는 세상 어디나 평화가 넘치는 세상이면 좋겠다는 바램이었답니다.

참 좋은 4월의 마지막 일요일 아침입니다. 평화로운 하루, 평화로운 한 주간, 한 달, 한 해 온 삶이 되시길 빕니다.

당신의 세탁소에서

*** 이번 남북정상회담의 마지막 순서로 평화를 소원하는 영상쇼 상영이 있었답니다. 그 영상쇼를 당신과 함께 나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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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sterday was my mother’s 92nd birthday. From my father, who is 93 years old, the oldest, to a great-granddaughter, who was born last year, all the family members gathered together and celebrated my mother’s birthday.

My father, who has difficulty in walking without a walker, is a Korean War veteran. He has been living with shrapnel lodged in his leg from a grenade during the war. My father-in-law, who is widowed, is also a Korean War veteran. During the war, he was a member of KATUSA (Korean Augmentation To the United States Army) which consisted of Korean soldiers who augmented US forces. My brother-in-law, who is retired now, is a Vietnam War veteran. (All of them served in the wars as Korean soldiers.)

All of them gathered together to celebrate my mother’s birthday. She is still the central axis in the family. While we talked about many things, the South-North Korean summit between South Korean President Moon Jae-In and North Korean leader Kim Jong Un, which was held last week, came up in conversation.

Although the universities were different, I entered the university the same year in which President Moon did. While I was in college, I participated in student demonstrations against the late President Park’s dictatorship. For that reason, I was expelled from the university, was placed under arrest, and was conscripted into the army. Though President Moon had a similar experience, I don’t know him personally. In fact, quite a few young people in those days had a similar experience.

North Korean leader Kim is the same age as my son, who served in the US Air Force.

My mother-in-law, whose hometown was in North Korea, passed away two years ago and was placed in the cemetery on Kirkwood Highway without attaining her life-long dream of visiting her hometown once.

Though the leaders of South and North Korea announced their agreement, which commits the two countries to the complete denuclearization of the Korean Peninsula and continuing talks to bring a formal peace treaty ending the Korean War, there may be many hurdles to overcome, I think. One of them, and the most important event, may be the meeting between President Trump and North Korean leader Kim which will be held in the near future.

All the family members at my mother’s birthday party didn’t have the same views and thoughts about the South-North Korean summit. However, all of them agreed on one thing which was the hope of peace in the Korean Peninsula.

It was the hope of peace, not just in the Korean Peninsula, but also everywhere in the world.

It is a really pleasant morning on the last Sunday in April. I wish that you will have a peaceful day, a peaceful week, month, year, and life.

From your cleaners.

*** The last segment of this South-North Korean summit was the performance to express the wish for peace. I’d like to share it with you.

만남

주말 오후, 친구 부부와 우리 내외가 함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펜실베니아  Swarthmore 마을의 소극장에서 락오페라 Jesus Christ Superstar를 보았다. 아주 작은 일이라도 이젠 틈나면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일들을 하며 살아보자는 배포가 맞는 친구의 생각이었다.

Swarthmore는 인구 6천을 조금 웃도는 아주 작은 마을이다. 이곳에 있는 소극장 Players Club of Swarthmore는 107년의 오랜 역사를 지닌 곳이다. 비교적 한적한 주택가 마을에 위치한 소극장은 마치 초등학교 강당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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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장 입구 제법 너른 로비에는 107년의 역사를 말해주는 게시물들이 벽을 채우고 있었는데, 음료수와 간식들을 파는 매대는 아이들 소꿉놀이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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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장 입구에서 표를 받고 안내하는 이들을 보니 나는 아직 시퍼런 청춘이었는데, 내 나이는 300여석의 공연장을 거의 매운 관객들의 평균 연령 쯤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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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전에 각종 안내를 하는 사내도 내 또래였는데, 그가 소극장 클럽 멤버들을 위한 안내를 한다면서 멤버들은 손을 들어 보라고 하니 객석의 약 1/3정도가 손을 들던 것이었다. 소극장을 위해 연회비를 내거나 기부하는 멤버들의 연령 역시 대부분 내 나이 또래 중늙은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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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이 시작되고, 오페라에 무지한 내 눈과 귀의 수준으로 보면 배우들의 연기와 음악성은 놀랄만큼 대단했다.

내 무지함 탓이 우선이지만 이따금 내가 공연에 매몰되지 못했던 까닭은 바로 내 앞자리에 앉아있는 아이 때문이었다. 옆자리 제 엄마와 함께 공연을 보고 있던 아이는 덩치가 제법 큰 십대 나이 즈음의 정신 신체 장애아였다.

무거운 음악이 흐르거나 노래가 고음으로 불려지거나 조명이 갑자기 어두어지거나 하면 아이는 몸을 뒤틀며 제 앞자리나 옆자리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찌르거나 머리를 만지거나 하곤 했는데, 그럴 때 마다 아이의 엄마는 아이를 꼭 끼어 안고는 했었다. 그런 모자의 모습이 무대를 향한 내 시선을 뺏곤 하였다.

사실 내가 그보다 더 놀라운 시선을 보낸 관객들은 따로 있었다. 중간 휴식 시간이었는데 스물 언저리 처자를 양쪽에서 붙들고 걷는 중년 부부, 아마 가족일 듯한 일행이 그들이었다. 처자는 앞을 못보는 소경이었다.

아이들 소꿉장난 같던 로비의 매대는 중간 휴식이 되자 제법 붐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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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esus Christ Superstar의 극 내용은 익히 아는 것이었고, 내 젊은 시절 70년대의 파격적인 예수나 유다의 해석이 오늘날에야 전혀 놀랄 일도 아니었지만, 나는 어제 그 자리에서 새롭게 예수를 만났었다.

연극이 끝나고, 배우들을 향한 이어지는 박수 소리도 끝나고 객석의 관중들이 일어난 후의 일이었다. 내 앞자리에 앉아있던 지체아에게 시달림(?)을 받았던 주변의 사람들은 너나할 것도 없이 아이와 엄마에게 인사를 건네던 것이었다. “연극 잘 보았니?”, “재밌었니?”하며 아이의 손을 잡고 아이 엄마에겐 따듯한 눈길을 보내며 한두 마디 씩 인사를 건넸는데 그게 결코 건성이 아니었다.

어쩜 예수를 재해석하고 만나 얼싸 안는 일이란 무대 위에서가  아니라 객석에서 벌어지는 것이 아닐까?

아무튼 나는 모처럼 문화인 흉내를 내보았다.

세월

봄이라고 벌써 반바지에 반팔 차림으로 가게를 드나드는 젊은이들도 있다만 어느새 노년 할인을 받게 된 나는 아직도 겨울 점퍼를 걸치고 있다.

해는 이미 길어져 일 끝내고 돌아와도 한낮이다.

“얘야, 아직도 추운가 보다. 바람 소리가 맵구나!” 전화 속 목소리만은 아직도 정정하신 아흔 둘 내 어머니가 들으신 그 매운 바람에 뒷뜰 개나리, 이웃집 자목련 꽃잎들이 떨어져 날린다.

앞뜰 나이 오래 된 나무가 내민 꽃망울이 내게 말을 건넨다. “이 사람아, 봄은 이제 시작이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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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는 한반도 종전(終戰) 운운하는 소식을 전하는데… 그것도 종잡을 수 없는 바람같은 Trump가 “They do have my blessing to discuss the end of the war”라고…

고목에 피는 꽃은 봄기운 때문이 아니라, 세월을 이겨낸 나무 스스로의 오랜 염력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