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정(事情)

장인과 사위 사이를 이룬 지 서른 다섯 해가 지난 오늘 처음 깨달은 사실 하나.

물론 알곤 있었지만 깨달은 것은 처음.

장인과 나는 똑같이 일남 삼녀

쯧,

철없을 조건은 똑같이 갖추었다는.

나는 장인이 있고, 비록 먼저 떠나셨지만 장모도 있었고

남북 이산가족이자 외톨이였던 내 장모 덕에 평생 장인 장모를 모셔보지 못한

내 장인은 사위였던 적이 한번도 없었다는 사실.

딱히 추석이랄 것도 없이 오늘은 장인, 내일은 내 부모와 함께 할 요량이다만

우리 모두 그저 저마다의 사정을 안고 살 터.

뉴스에

뉴스들이 넘쳐나는 빠르기를 미처 쫓아가질 못한다. 주말로 들어서며 일을 마치고 조금은 느긋한 마음으로  뉴스들을 쫓다가 돋보기를 흐리게 하는 눈물 한 점, 또 그 놈의 나이 탓이다.

경기도 포곡면 유운리 유실 마을은 내 할머니의 고향이자 아버지의 고향이다. 당시 할머니의 동생들 곧 내 아버지의 외삼촌들이 살고 계셨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여름이나 겨울방학이면 그 곳에서 몇 주간을 지내곤 했었다.

내가 어릴 적에 서울 신촌에서 용인 유실 마을까지는 족히 하룻길 거리였다. 내가 고등학교에 입학할 무렵에 전기가 이어졌을 만큼 촌이었다. 내가 이제껏 호롱불과 반딧불의 추억을 안고 있는 곳이다.

1972년 내가 대학교에서 첫 여름방학을 맞아 유실 마을을 찾았던 그 때 유실 마을은 이미 예전에 유실 마을이 아니었다.

유실 마을 산 너머 땅들은 이즈음 에버랜드로 유명해 진 삼성가의 자연농원이 막 들어섰다. 자연농원이 들어 선 이후 유실마을은 변해갔다. 이웃한 궤밀마을도 마찬가지였다. 유실마을 일대의 농토에 물을 대주는 저수지 위쪽에 대단위 돼지농장이 들어선 것이 그 때 쯤이었다.

그즈음 돼지 똥들로 저수지와 마을의 시내와 개천들은 썩어가고 있었다.

내 아버지가, 아니 내가 어린 시절 멱을 감고 피래미를 잡던 그 맑던 물들이 코를 감싸쥐고 얼굴을 돌려야 하는 폐수가 되어 갔다.

1972년, 그해 여름 7월 4일 남북공동성명이라는 당시엔 경천동지라고 할 만한 뉴스를 유실마을에서 라디오를 통해 들었다.

유실마을과 궤밀마을에  흩어져 살았던 내 일가 친척들은 그 후 모두 용인 땅을 떳다. 그 땅들은 삼성가의 땅이 되었다.

그 해 가을 이른바 시월 유신으로 대학문이 닫히고 긴 방학에 들어 간 이후, 내가 대학을 마치기까지 십 여년 동안 학기를 제대로 마친 기억이 없다.

짧은 세월 참 많은 것들이 변했다.

능라도 5.1 경기장 행사가 담긴 동영상이 눈물로 흐릿해지며 떠오른 옛일들이다.

참 고맙다.

그 세월 속에서 반듯하게 정권을 잡고 행사하는 권력자 하나 나온 남쪽이나, 삼대 세습이라는 미개한 터에서 반듯한 정신으로 민民 앞에선 권력자 하나 있는 북이.

정말 고맙다.

첫째,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둘째,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해야 한다.

셋째, 사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

7.4 공동성명이라는 이름으로 회칠했던 권력자들의 명제들을 민民의 힘으로 이끌고 나아가는 이즈음의 세월들이.

바라기는

15만 능라도 경기장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 단 한사람 만이라도 ‘아니오’하는 사람 나오는 북이 되길…

70년 분단의 이름 팔아 배 채어 온 단 한 놈 만이라도 과감히 이른바 혁명적으로 정리하는 남이 되길….

사람 이종국

이즈음 나이 육십에  ‘평생 운운’ 한다면 욕먹기 딱 십상일 터. 허나 어찌하리, 그에겐 평생 처음인 것을… 아직 환갑에 이르지 못한 나이에.

내가 후배인 그에게  존경이라는 말을 마다치 않는 까닭은 그의 담백함 때문이다. 그는 매사 참 담백하다.

화려한 수사를 즐기는 내게 ‘시민 운동’에 대해 이야기하라고 한다면 헨리 데이빗 소로우로 시작하여 어지간히 기름칠 할 일이 많겠다만, 내 후배 이종국은 그냥 담담하게 그의 삶이 시민운동인 사람이다.

그가 오늘 평생 처음인 일을 해 내던 날, 그의 맏딸 혼인날이었다.

생각지도 않게 내 아들 며느리가 함께 해 잠시 놀랐었는데, 우리 아이들과 후배의 딸 아이가 같은 교회에 다닌다는 사실을 깜박 했었던, 모두 다 내 나이 탓이다.

후배 이종국에게 ‘시민 운동’은 뭐 거창한 일이 아니다. 아니 ‘운동’도 아니다. 그냥 숨쉬는 삶이다. 지금 여기에서 소외된 삶들을 향해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들을 실천해 나가는, 마치 숨쉬는 것처럼 그냥 해내는 것이 당연하다는 사람이다.

내가 그를 안지 십 수년 동안 그의 한결 같은 모습이다.

오늘도 한결같았다. 딸아이 시집 보내는 날, 그는 오늘도 덤덤하였다. 나는 그런 그가 참 좋다.

그의 덤덤함으로 삶에 불을 지피는 일들이 이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잠시 해보았던 오후였다.

그리고 모처럼 얼굴 인사를 나눈 선후배들, 오늘 자신들이 이고 있는 아픈 먹구름들을 이야기하면서 웃을 수 있는 이들, 모두 얼마만큼씩은  후배 이종국에게 빚을 지었을 터.

아직 환갑에 이르지도 못한 내 후배 이종국, 오늘 하루만은 ‘평생 운운’은 온전히 그의 것!

몇 잔 와인으로 취기 오른 날에.

 

 

배움에

올 초에 프랑스 혁명에 대한 책 몇 권을 읽었다. 알베르 소불의 ‘프랑스 혁명사’, 마르크스의  ‘프랑스 혁명사 3부작’, 노명식이 쓴 ‘프랑스 혁명에서 파리 코뮌까지’, 육영수가 쓴 ‘혁명의 배반 – 프랑스 혁명의 문화사’와 앙드레 모로아의 ‘프랑스사’ 들이었다.

딱히 이 나이에도 아직 버리지 못하고 있는 지적 허영 때문만은 아니었다. 일주일 여 짧은 일정으로 돌아 보았던 파리 여행에 들였던 내 시간과 발품에 대한 예의랄까? 아무튼 여행 시간보다 몇 배 많은 시간을 들여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후반까지 약 백 여년의 프랑스 혁명사를 읽었던 적이 있다.

책을 덮고 여행을 돌아보며 서너 가지 정리했던 생각들이 있었다.

우선은 나이 들면 고집 뿐이라는 말이 정말 옳다는 생각이었는데, 내가 살아 오면서 쌓인 내  생각에 대한 신뢰였다. 이른바 신앙이다. 내가 믿고 고백하곤 하는 성서적 역사관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뜻인데, 역사란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 곧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 이루어 나가는 과정이라는 내 믿음에 확신을 주었다는 말이다.

백 여년에 걸친 혁명과 반혁명 또는 역사의 진보와 반동은 나선형을 그리며 나아가는 역사 발전 곧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가는 과정이라는 생각이었다.

또 다른 하나는 여성, 인권, 노동, 복지, 동성애, 난민 등등 지금 우리들이 살고 있는 세상의 갈등과 고민들 역시 당연한 논쟁과 투쟁의 과정일 뿐이라는 사실을 확인 시켜 주었다는 것이다. 어쩌면 프랑스 혁명이나 파리 코뮌은 이 백 여년 전에 끝난 일들이 아니라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당시 내가 새롭게 깨달은 사실은 사람 사는 모습에 대한 근래의 역사들을 돌아 봄에 있어 십년 단위로 끊어서 역사를 정리해 읽고 그 시간들을 다시 연결해 보는 생각을 익혀 보는 일이었다. 그것은 내가 오늘, 사람 사는 세상을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어쩌면 이 새로운 깨달음이 파리 여행과 프랑스 혁명사를 읽으며 내가 얻었던 가장 큰 수확일 것이다.

이즈음 나는 몇 권의 책들을 틈틈히 시간을 내어 읽고 있는 중이다. 19세기 말 부터  20세기 중반 까지 한반도에 대한 생각들을 기록한 책들이다. 내가 겪어 보지 못했지만 오늘의 내 생각들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시간들에 대한 기록들이다.

나는 십 년 단위로 이 시대의 이야기를 끊어 읽고 다시 연결해 보기도 할 것이다.

살며 때때로 ‘내가 이런 복을 누릴 만한 자격이 있을까?’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내가 믿는 신께 감사를 드리곤 한다. 이즈음이 그렇다.

이 나이에 가르쳐주는 선생을 만나고 함께 배우는 뜻 맞는 좋은 벗들이 있기 때문이다.

주일 편지 – 9/9

계절이 바뀌어가는 주일 아침에 편지를 띄우다. –  9. 9. 18

DSC02874AB

(가게 앞에서 – 9. 8. 18 아침에)

엄마와 함께 세탁소에 오곤 하던 아주 작은 꼬마 아이 하나가 어느 날인가 거인이 되어 나타났습니다. 물론 제가 작고 야윈 탓이기도 하지만 그의 체구는 제 두 배가 족히 넘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작고 귀여운 계집아이를 이끌고 제 세탁소를 찾아와 말했답니다. ‘ 제 딸입니다.’

또 다른 중년의 사내가 있었답니다. 그는 비지니스 여행이 매우 잦았답니다. 미 전국은 물론이고 유럽과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을 다닌다고 했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그가 말했습니다. ‘나 이제 은퇴 한단다.’ 이즈음 이따금 세탁소를 찾는 그의 허리는 굽었고 걸음걸이는 느리답니다.

미스 델라웨어였던 예쁘고 쾌활한 처녀도 있었습니다. 그녀에겐 이미 자기보다 커진 큰 아이를 비롯해 아들이 셋이랍니다.

지난 삼십 여년 동안 제 세탁소에서 일어났던 변화들이랍니다.

지난 주 제 편지에 응답을 주신 노신사도 한 때는 회사의 중역으로 매우 바빳던 중년이었습니다. 이제는 은퇴 이후 그와 동행이 된 관절염과 함께 지내는 이즈음의 모습을 이렇게 전해 주었답니다.

“내가 앓고 있는 관절염을 달랠 최상의 해독제는 꾸준히 움직이거나 내가 좋아하는 일에 몰두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단다. 일테면 내가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한다면 매 네 시간 마다 통증을 가라앉히는 약을 먹어야 하지만, 몸을 움직이는 일에 몰두해 있을 땐 일곱시간 정도는 약 없이 거뜬히 견딜 수 있단다.”

지난 주 일요일이나 휴일들을 어떻게 보내느냐는 제 물음에 대한 노신사의 답은 이렇게 끝난답니다.

“어쨌든 바빳을 때 늘 행복했었단다. 아직도 바쁘게 지낼 수 있는 약간의 인센티브는 남아 있단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노신사와 함께 하는 관절염은 아니더라도 우리들 모두에겐 몸과 마음에 원치 않는 동행자들이 하나 둘 씩은 함께 하지 않을까요? 남녀노소 누구라도 말입니다.

그리고 누구에게라도 좀 더 행복해질 수 있는 인센티브가 주어진 것을 아닐까요? 그것이 어떤 형태인지는 모르지만 말입니다.

어느새 아침 공기가 시원해졌습니다.

하루 하루 쾌적한 잠을 즐기는 날들이 이어지시길 빕니다.

당신의 세탁소에서

DSC02880AB

(뉴저지 열방교회 뜰에서 – 9. 8. 18 오후에)

One day, a little boy who used to come to the cleaners with his mother became a giant and visited the cleaners. Though I am small and slender, he looked more than twice as big as me. Not much later since then, he came to the cleaners with an adorable little girl and said, “She is my daughter.”

And there was a middle aged gentleman. He went on business travels frequently. He told me that he’s traveling not just all over America, but also to many countries in Europe and Asia. Then, one day, he said, “I’m going to retire.” He, who still comes to the cleaners once in a while, is somewhat bent with age and walks with a slow gait.

There was a beautiful and cheerful young lady who had been Miss Delaware. Now she is a mother of three sons, one of whom is already taller than her.

These are some of the changes which have happened in my cleaners for the past 30 years.

The old gentleman who gave me a response to last week’s letter had been a busy middle-aged man as an executive of a company. After retirement, he has been living suffering from arthritis which has become a companion. He told me about his life these days:

“I have found that the best antidote for my arthritis is steady movement or work on a project that absorbs my attention.  If I’m just sitting, I have to take my prescription medication for arthritic pain relief every four hours.  If I’m busy on a physically active project, I can and have gone as much as seven hours without it.”

Regarding my question last week, “How do you spend Sundays or holidays?” his answer ended like this:

“I’ve always been happier when I am busy anyway, now I just have a little extra incentive to keep busy.”

When we think about it, all of us, whether man or woman, young or old, may have at least one or two unwanted companions in our bodies and minds, though it may not be degenerative arthritis like the old gentleman. Don’t you think so?

And, an incentive to become happier may be given to us all, though we may not have figured out what it is yet. What do you think?

The air in the morning has become cool and pleasant already.

I wish that you’ll enjoy comfortable rest day after day.

From your cleaners.

참 좋은 세상인데

저녁상 물리고 느긋하게 세상 뉴스들을 훑다가 저절로 흐르는 눈물을 훔친다.  이럴 때 보면 나도 참 나이  헛먹었다.  오마이뉴스에 실린 <처음부터 터져 나온 이금희의 눈물 “이럴 것 같았다. 노회찬은 진짜였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읽으면서 일어난 일이다.

그렇게 눈물을 훔치며 기사를 읽고 있는데 셀폰에서 경고음이 울렸다. 놀라 확인해 보니 밤 12시 30분 경부터 홍수주위보를 발령한다는 메세지와 함께 홍수 피해 예상 지역 주민들은 대비하라는 경보였다.

세상 참 많이 바뀌었다. 내 기억 속에 1980대 후반 부터  2000년 초,중반 까지 한국에 대한 것은 빠져 있다. 그만큼 한국은 내게서 멀었다. 딱히 이렇다할 정보를 얻을 방법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거니와 여기서 오늘을 사는 내 관심의 우선순위에 있어 앞자리에 있지 않았었기 때문이다.

홍수주위보를 알려주는 셀폰의 기능은 지금 여기서 사는 내가 겪고 있는 세상의 변화이다. 이 땅에 적응하기도 바쁜 내게 급변하는 디지털 세상의 변화는 쫓아가기엔 좀 벅차다. 나름 세상 변화에 적응하노라고 애쓰며 살지만 아무래도 늦되다.

이른바 social media를 사용하는데는 더욱 그렇다. 말 그대로 상호 오가는 media 사용이라야 먹고 살기 위해 내 가게 손님들과 오고가는 이메일과 텍스트 메세지가 거의 전부이다.

그저 일기처럼 사용하는 블로그질은 오래 되었지만 그저 골방 샌님 놀이일 뿐이고, 트위터, 페북, 인스타그램, 링크드인 등등은 사용법에 대해 익히 알고는 있지만 그리 즐겨 하지는 않는다. 더더군다나 빤히 아는 사이가 아니라면 댓글을 다는 일도 거의 없고 좋아요를 누르는 일도 남사스런 생각에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러니 social media의 social 하고는 거리가 멀다.

카카오톡이나 텔레그램 같은 것들도 마찬가지다. 카카오톡은 가족들 끼리만 사용할 뿐이고, 텔레그램은 한군데 모임과 연관되어 있어 사용하지만 그 역시 특별한 일 아니고서는 하루 한 두차례 pc로 사용할 뿐이다. 사실 내가 셀폰을 사용한지는 아직 이년이 채 되지 않았다.

내 아내의 표현대로 한다면 나는 그저 골동품이다.

카카오톡을 즐겨 사용하는 아내가 오늘 오후 짜증스런 목소리로 혼자 쭝얼거렸다. ‘아니, 이 아줌마는 자꾸 이런 걸 보내고 그러지, 딱하기도 하고….’

왜 그러냐고 묻는 내게 던지 아내의 답이다. ‘아이구  그 지긋지긋한 가짜 뉴스지 뭐, 박근혜 이명박 찬양하고 문재인 빨갱이 노래하는 거…. 오늘은 김정은이 한테 트럼프 문재인이 놀아나고 있다나 뭐나…’

참 좋은 아주머니신데  뉴스 선택에 있어서는 아내와는 상극인 셈이다.

아마 그 아주머니는 내가 오마이뉴스에 눈물 흘리는 모습을 보면 가짜뉴스에 홀렸다고 혀 차지 않을까 싶다.

참 좋은 세상인데…. 참 좋아진 세상인데….

이즈음 나는 하늘을 보면 하늘을 사진에 담고 싶다. 오늘 오후에도 그랬다.

DSC02864A DSC02867A DSC02871A

하늘은 뉴스들 보다 셀폰 보다 더 많은 세상을 품는다.

손 할머니

오랜 옛 일들은 또렷한데 최근의 일일수록 기억이 희미하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나는 내 나이를 수긍하곤 한다. 이즈음 제 아무리 ‘신 중년’이라는 말로 치장하더라도 그저 화장일 뿐, 모든 일에 내 나이에 걸맞는 생각과 행위로 측정해 보자면 어쩔 수 없이 나도 이미 노년이다.

모처럼 아무 생각없이 즐기던 연휴 오후,  게으른 긴 낮잠에서 깨어 일어나 아내를 재촉했다. 아내 편에서 보면, 목소리 톤만 높아가는 주제에 제 생각에 빠져 재촉하기 일쑤라고 핀잔주는 일이 당연하고 마땅할 것이다. 솔직히 이런 아내의 모습에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내 피곤을 더할 만큼 미련하지는 않은 나는 조용히 차 시동을 걸고 기다릴 뿐이었다.

그렇게 아내를 재촉해 집을 나서 찾은 곳은 필라 외곽 지역에 있는 노인 요양원이었다.

벌써 너 덧 해가 지났나 보다.  당시 어머니는 곧 돌아가실 듯 하셨다. 응급으로 병원에 실려 가셨던 어머니는 평소에 ‘난 죽거든 화장으로’라는 말씀을 ‘매장으로’ 바꾸셨다. 유언처럼.

그 때 그렇게 마련한 것이 어머니 아버지 묘자리부터 우리 형제들 묘자리 까지, 누울 순서까지 다 정한 우리 가족 장지였다. 누울 묘자리 순서를 정하는데 가장 입김이 센 것 역시 어머니셨다.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 자리가 정해진 나는 혼잣 말로 웅얼거렸었다. ‘죽어서도 이 자리라니, 피곤하고만…’

그러다 병원에서 퇴원하셨던 어머니가 일주일 가량 머무르셨던 곳이 동네  요양원이었다.

올 초엔 동네 지인 한 분이 계신 뉴저지 양로원에 위로 방문을 다녀 오신 후, 어머니 아버지는 고개를 가로 저으시며 선언하셨었다. ‘얘야, 우린 요양원이나 양로원에는 안 갈란다!’ 그 선언으로 우리 형제들은 언젠간 맞게 될 시간에 대한 준비를 마치었다.

어머니는 오늘도 정정하신 모습으로 내 오른 편에,  아내는 당연히 팔팔하게 내 왼 편에서 나를 지탱한다.

그리고 어제 찾았던 요양원에 누워 계신 분은 손 할머님이시다. 할머님은 어제 또렷하신 목소리로 아흔 둘이라고 하셨다. 그게 만 나이라면 내 어머니와 같다.

손 할머님은 필라세사모 모임의 최연장자이시다. 나는 아흔 두 해 그녀의 삶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다. 다만 이웃의 아픔에 대한 진한 공감으로 살아오셨음은 몇 번의 만남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갑작스런 통증과 함께 병원에 실려갔던 손 할머님이 요양원으로 옮겨지신 것은 이틀 전이었다. 손 할머님 곁을 지켰던 젊은 필라세사모 친구들이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손 할머님을 위로 방문해 달라는 통문을 보내 온 것도 그 때 쯤이었다.

아내와 내 손을 꼭 잡으시고 ‘고맙다’를 몇 번이고 되뇌이시던 할머니는 ‘이젠 곧 일어날 것 같다’고 하셨다.

한 시간 여 짧은 자식 노릇을 마치고 나온 요양원 앞 뜰에는 꽃밭을 바라보며 어린 사슴들이 놀고 있었다.

DSC02848A DSC02852A DSC02853A

손 할머니는 몇 해 전 내 어머니처럼 다시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이건 우연이다. 노년과 죽음 그리고 오늘을 살아야 하는 까닭들에 대한 책들을 내게 권하는 호주 홍 목사님의 편지를 받은 것은.

주일 편지 – 9/2

아침에 세탁소로 나오면서 한 동안 보지 않았던 스쿨 버스들을 다시 만난 지난 주간이었습니다. 어느새 아이들의 방학이 끝난 모양입니다. 그리고 주초 며칠 동안은 몹시 더운 날들이 이어졌었습니다.

지난 목요일 아침, 가게 문을 열 때 찍은 사진이랍니다. 해가 떠오르면서 이글거리는 느낌이었답니다. 그리고 잠시 후, 미처 카메라에 담지는 못했지만 캐나디언 구스들이 소리를 내며 떼를 지어 천천히 날아갔답니다. 순간 캐나디언 구스들의 소리가 제게 이렇게 들렸답니다. ‘덥다고? 이제 여름 다 갔어!’

구월입니다. 내일은 노동절이고요. 내일은 세탁소 문을 닫습니다. 저희 부부도 모처럼 이틀을 쉽니다.

한가지 궁금증이 일어 당신께 물어 본답니다. 휴일엔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특히 모처럼 맞는 이런 연휴에는 어떻게 지내시는지요?

제 경험들을 가만히 뒤돌아보면 제대로 휴일을 만끽했던 경우가 거의 없었던 것 같습니다. 노동도 쉽지 않지만 쉰다고 것도 그리 쉽지 만은 않은 듯 합니다. 연휴가 다가오면 이런 저런 계획들을 세우곤 하지만 막상 휴일이 되면 그 계획대로 다 이룬 적도 별로 없는 듯합니다.

딱히 그런 생각 때문은 아니지만, 이번 연휴에 저는 아무 계획도 없이 아무 일도 않고 그냥 쉬려 한답니다. 먹고 싶을 때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아무 걱정도 하지 않고 말입니다.

목사이자 베스트셀러 작가인 Wayne Muller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모든 삶의 핵심에는 이 비어 있음이 자리하고 있다. 이 비어 있음은 신의 입김이 들어와 삶이라는 음악을 만들어 내는 텅 빈 갈대 같다. 모든 창조는 이 비어 있음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이건 아주 동양적인 사고인 듯 합니다.

Wayne Muller의 말처럼 깊은 생각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그냥 노는 날 푹 쉬는 즐거움을 맛보려 한답니다.

구월입니다.

하루하루 바쁜 일상 속에서도 새로운 것은 창조해 낼 만한 여유로운 쉼이 늘 함께 하시길 빕니다.

당신의 세탁소에서

9-2-a

Last week, on the way to the cleaners one morning, I began to see school buses which had not been on the roads for a while. Before I knew it, summer vacation for school kids might be over. And the heat continued to beat on for some days earlier last week.

Here is a picture which I took in the morning when I opened the cleaners on Thursday. I felt the rising sun was blazing.

DSC02842A

A little bit later, a flock of Canadian geese flew over slowly with lots of noise, of which I could not take a picture. At that moment, I felt as if they were saying, “Did you say it is very hot? Now, summer is almost over!”

It is September now. Tomorrow is Labor Day and the cleaners will be closed. My wife and I will have two days off for a change.

I’m asking a question, because I’m just curious. How do you spend Sundays? Especially, on long weekends like this week?

Looking back, I think that I have almost never really enjoyed holidays. To me, working is not easy, but neither is resting. When a long weekend was approaching, I made this and that plan. But, when it came actually, I hardly ever completed the plan.

Though it was because of that thought, I decided just to take a rest without any plan and without doing anything this long weekend. Simply, I’ll eat when I want to, and sleep when I want to without worrying about anything.

Wayne Muller, a pastor and best-selling author, said:

“All life has emptiness at its core; it is the quiet hollow reed through which the wind of God blows and makes the music that is our life. Emptiness is the pregnant void out of which all creation springs.”

It sounds like Oriental thinking to me.

Though it is not like what Wayne Muller implied, I’ll try to enjoy the pleasure of complete rest on the off-days.

It is September now and the days have gotten a lot shorter already.

I wish that you’ll always have a leisurely rest out of which your new creation springs in spite of a busy everyday life.

From your cleaners.

 

연휴 아침에

아무런 계획도 없이 연휴를 맞는다. 아니, 계획 없음이 계획이다. 그저 몸과 맘이 원하는 대로 이틀을  보내려 한다.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자고, 마시고 싶으면 마시고, 걷고 싶으면 걷고. 무엇보다 아무 걱정 없이.

이른 아침 눈을 뜨는 것은 그냥 습관이다. 주일 아침이면 늘 그러하듯 가게 손님들에게 편지 한 장 띄우고 집을 나선다.

가을은 이미 동네 어귀에 이르렀다.

DSC02847A

다가선 것은 가을 뿐만이 아니다. 이번 목요일(9/6)은 민주당 예비경선일이다. 11월 본선거에서 어떤 선택을 하던 민주당 예비경선에서 투표는 해야겠다.

DSC02843A

살며 감사하는 일들 가운데 하나는 사돈내외와 의견이 일치하는 때가 많다는 점이다. African American인 사돈 내외와 우리 부부는 정치적 견해나 종교 특히 교회관에 있어서 뜻이 맞다. 하여 참 편하다.

capture-20180902-094729

비록 트럼프 뿐만 아니라 주류 언론들은 물론이거니와 민주당 내에서도 폄하하는 시선이 역력한  사회주의자  Alexandria Ocasio-Cortez에 대한 시각에서도 거의 일치한다. 그녀와 지지자들이 얻을 결과가 어떠할 지는 모르지만 우리들은 미국의 새로운 변화에 대해 매우 긍정적이다.

capture-20180902-095102

다만, 오는 11월 선거에서는 의견이 일치하지 않을런지도 모르겠다. 우리 부부 선택에 있어 최우선 순위는 트럼프가 한반도 분단 해결의 단초를 이루어 내는냐에  맞추어져 있기 때문인데, 평화라는 관점에선 언제나 의견이 일치하는 사돈내외도 우리부부와 함께 하지 않을런지.

오늘 저녁은 아들 며느리와 저녁을 함께 해야겠다. 아이들이 허락한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