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 첫 일요일에

휴일 오전 내내 서중석이 지은 사진과 그림으로 보는 한국 현대사를 읽다. 1945년8월 15일 부터 박근혜 정권이 들어서는 순간 까지를 기록한 책이다. 내가 초등학교 입학 하기 바로 전 해인 1959년까지 읽다가 책을 덮었다.

몇 가지 생각들이 스치었다. 아무리 백세 시대라고 하여도 나도 꽤 살았구나 하는 생각이 첫째요, 내가 한국 현대사 운운하며 책을 읽고 이야기하던 시절의 현대사란 19세가 말에서 해방 공간까지 곧 내가 살아온 시절의 이야기가 아니었는데 이젠 내가 살아온 시절들이 현대사의 중심이 되었다는 사실이 둘째요, 마지막으로 놀라운 민(民)의 힘을 다시 깨닫고 확인하는 책 읽기 였다는 생각이다.

이즈음 우리 동네 한국학생들 가운데는 한국 드라마를 보기 위해 한국어를 배우고자 등록하는 영어권 미국인들이 제법 있다. 이들을 성인반으로 분류하여 한국어를 가르치는데 그 반들 중 하나를 내 아내가 맡고 있다.

그 학생들 중 하나가 주정부에서 일을 한다는데 어제 아내에게 선물을 주었단다. Longwood Gardens이라고 미 동북부에선 제법 알아주는 관광명소 가운데 하나인데, 그 곳 입장권 두 장을 주더란다. 물론 작은 부탁을 겸한 것이었으므로 부담없이 받을 수 있는 선물이었다.

하여 오후에는 Longwood Gardens 나들이에 나섰다. 이미 여러차례 가 보았던 곳이라 새삼스러울 것이 없었다만, 오늘 놀라운 사실을 발견한 것은  집에서 고작 16분거리, 내 가게보다도 가깝다는 사실이었다. 전에는 4-50분 정도 걸리는 길이었는데 그것이 그렇게 단축된 까닭은  놀랍게 발전된 GPS 덕이었다. GPS는 산속 지름길로 우리를 16분만에 그 곳을 찾게 하였다.

아내와 함께 꽃과 분수(噴水) 사이에서 휴일 오후를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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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오르간 공연도 있어 문화생활(?)도 누렸다. 연주 제목들이 불꽃 춤, 성(聖) (누군가?)의 종소리, 무슨 변주곡 등이었는데 음악엔 영 무식 덩어리인 나는 짜장면, 우동, 짬뽕을 다 맞본 기분이라고 아내에게 내 느낌을 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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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가을, 그 곳의 주인은 다람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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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부호 DuPont이 그의 아내를 위해 만들었다는 Longwood Gardens을 오늘 우리 부부도 즐길 수 있게 되었지만  본디 주인은 다람쥐와 여우, 사슴 등이었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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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뒤적여 본다는 뜻도 본디 주인인 민(民)을 찾는 일 아닐까?

가을, 주일 편지

뉴스 이외에 한국 TV 프로그램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본 것은 오랜만이었다. 엊그제 일이었고 ‘알쓸신잡’이라는 프로였다. 편집의 힘을 어느 정도 감안한다 하여도, 출연진들은 이 시대에 대단한 입심을 보유한 지식들이었다. 시청 후 머리속을 떠나지 않는 생각 하나 있어 주일 아침 편지를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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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부모님은 Pike Creek 에 있는 노인 아파트에, 장인은 Wilmington 시내에 있는 노인 아파트에 살고 계십니다. 아흔 줄 연세 노인들의 가장 큰 일과 가운데 하나는 한국 드라마를 보고 즐기는 일입니다.

한국 TV 방송을 직접 시청할 방법이 없으므로 온라인 사이트를 이용해 드라마들을 시청하십니다. 그러니 노인들이 드라마를 즐기기 위해서는 인터넷과 컴퓨터 그리고 TV 모니터가 필요하답니다. 이 세 가지들이 아무런 이상이 없을 때는 노인들에게 참 좋은 친구들이지만, 셋 중 하나라도 이상이 생기면 노인들의 일상을 망가뜨리는 물건이 되고 맙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재미있는 사실은 노인들을 찾아 뵐 때가 되었다 싶으면 인터넷과 컴퓨터 그리고 TV 모니터 셋 중 하나에 문제가 생기곤 한답니다. 그리고 그 대부분의 경우 그것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노인들의 오작동이나 기기들을 다루는 것이 서툴러서 생긴 일이랍니다.

지난 주에 가게 문을 닫은 후, 하루는 장인에게 다른 하루는 제 부모님에게 같은 일로 들리게 되었답니다. 대부분의 같은 경우처럼 문제를 해결하는데 채 10분도 걸리지 않는 일들이었고 이런 저런 사는 이야기들을 나누다 돌아왔답니다.

엊그제 부모님 집에 들렸다가 돌아 온 늦은 밤, 평소에 잘 보지 않던 TV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답니다.

Italy Florence에 있는 유럽 최초의 보육원이라는 Ospedale degli Innocenti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프로였습니다. 보육원이 생기게 된 배경과 과정 500년에 이르는 긴 세월 동안 그 곳을 거쳐 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최근에 그 보육원에서 지냈던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동영상에 담아 방문객들에게 보여 주기도 한답니다.

그 중 한 여성의 이야기가 제 머리 속에 깊이 박혔답니다. 보육원과 그녀를 입양한 양부모, 그리고 다시 만난 친부모 밑에서 성장한 그녀가 말하는 ‘가족’에 대한 정의였습니다. 그녀는 ‘진정한 가족’이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라고 말했답니다.

세상은 많이 바뀌었고, 바뀌어 나간다고들 합니다. 가족에 대한 개념도 마찬가지인 듯 합니다. 그러나 예나 지금이나 서로 간의 깊은 배려 속에  함께 만들어 나가는 가족이 있는 한 세상은 따듯할 듯 합니다.

물씬 가을 냄새가 나는 때입니다. 딱히 피붙이들이 아니어도 따듯한 세상을 만드는 이웃 가족들이 함께 하는 가을이 되시길 빕니다.

당신의 세탁소에서


 

My parents live in a senior apartment in Pike Creek and my father-in-law also lives in a senior apartment, but in Wilmington. They are in their nineties. One major part of their routine or entertainment is to watch and enjoy Korean dramas.

As there is no other way to watch Korean TV here, they watch Korean TV programs through the internet site. So, in order to enjoy Korean dramas, they need a computer, internet connection and a TV monitor. When there is no problem in any of these devices, they are good friends to them. But, when there is a problem in any of them, they become troublesome machines which break their everyday lives.

Looking back, interestingly, whenever I thought that it was about time to see my parents or father-in-law, they called and asked me to fix a problem which arose in the devices. Actually, in the majority of cases, the problem came up, not because any of the devices malfunctioned, but because, understandably, they were not good at dealing with these technical devices.

Last week, after closing the cleaners, I had to stop by at my parents’ apartment one day and at my father-in-law’s another day, for such a reason. In most such case, it did not take even 10 minutes for me to fix the problem. But I stayed and talked with them for a while.

A couple of days ago, when I stopped by at my parents’ and came back home late at night, I happened to watch a TV program which I had not watched usually.

It was a story about “Ospedale degli Innocenti” in Florence, Italy, which was the first orphanage in Europe. The program covered the background of its establishment and those who passed through since it had founded about 500 years ago.

According to the program, the orphanage shows videos about those who used to live there recently to visitors.

One woman’s story among them was stuck deeply in my head. She grew up in the orphanage, under adoptive parents, and later under her real parents who she met again later. She said that “a real family” is not something given, but something molded.

They say that the world has changed and is changing. So is the concept of family, I think. However, as long as families are molded in mutual consideration and care, the world will stay warm, I believe.

The fragrance of fall pervades the air. I wish that you’ll be with neighbor families who make the world warm, though they are not your flesh and blood, this fall.

From your clean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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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곳은 떨어져 있고 먹고 사는 방법도 서로 다르지만, 생각이 서로 맞닿아 소식을 나누고 사는 친구들이 있다.

그들 가운데 하나가 저녁 한 끼 쏘겠노라고 번개 모임을 제안하여 넉넉한 시간을 보내고 돌아온 늦은 밤, 인성(人性)에 대한 생각에 빠진다.

세상은 빠르게 변해왔고, 이제껏 변화해 온 속도보다 훨씬 더 빠르게 변화하는 오늘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변치 않는 사람들의 숙제 – 바로 인성(人性)에 대한 물음 아닐까?

오늘 밤 나는 맹자(孟子)에게 한 표 꾹 누른다.

돌이켜 나를 관찰하자면 옛날 양주(楊朱)가  ‘공동체 보다 내가 우선’이라는 주장보다 더욱 이기적이며,  순자(荀子)가 말한 혐오스럽고 가증한 인성보다 더하게 부끄러운 성품임에 틀림없다만, 오늘 저녁 번개 모임에서 만난 이들과 함께 일 땐 맹자가 옳았다.

하여 나는 이들과 함께 하는 게 좋다. 더하여 이런 공동체가 더욱 커졌으면 좋겠다.

그 맘으로 피켓을 들고 사진 한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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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유(餘裕)

무엇이 그리 바빴을까? 왜 그리도 허둥거렸을까? 모든 시간이 내 선택에 달린 일이었는데…

집과 가게에서 딱 10여 분 거리. 오가며 숱하게 지나쳤던 공원.

아내는 아이들 초등학교 시절 이후이니 20여년, 나는 처음이었다.

여유(餘裕)란 늘 코 앞에 있었거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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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맞이하며. – 10/3/18

위로에

시월 초하루이자 월요일.

하루 노동의 피로 위에 짜증을 더하는 뉴스를 접다. 신앙이나 신념의 이름으로 이웃을 해치는 일들을 보면 사람 본성이 진보하는 속도는 참 더디다. 그래도 나아가기는 하는 법. 아무렴 그래서 믿음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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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그제 박물관 산책길에서 만났던 노부부의  뒷모습에서 찾은 위로 한마디.

‘하찮은 일을 가지고 심각한 일인 것처럼 다루는 자들 보다 더 어리석은 자들은 없다’

에라스무스 였다던가

팔불출

세상 많이 바뀌었다해도 참 창피한 일이다만 오늘은 팔불출이 되련다.

아무리 불출(不出)이어도 감사해야 할 얼굴들은 먼저 기억해 두어야  눈감아 줄 사람 하나 둘은 있지 않을런지.

내가 오늘 감사를 드려야 할 이들은 델라웨어 한인회와 델라웨어 한국 학교를 섬기고 봉사하는 이들이다. 그리고 지난 세월 두 단체의 이름을 이어 온 이들이다. 오늘 면면을 보니 어느새 이민 삼, 사대에 이른다. 참 고마운 일이다.

추석을 즈음하여 열리는 델라웨어 한인 축제를 우리 마을에서 빼놓지 못할 연례행사로 자리매김 해 준 한인회장 김은진님과 한국학교장 조수진님께 드리는 고마움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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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행사에서 마주하는 올드 타이머들의 얼굴들은 더할 수 없이 반갑고 고맙다. 초대 한국학교 교장이신 배성호 목사님 내외분도 그들 가운데 하나이다.

아무렴, 진짜 고마운 이들은 이세, 삼세, 사세 아이들이다. 눈에 띄는 스물 서른 안짝 나이에 이 행사를 위해 뛰는 아이들을 보면 참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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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특별히 감사를 드려야 마땅할 두 사람이 있다. 이 감사를 드린 후에야 나는 불출 노릇을 할 수 있을 터.

뉴저지의 안젤라 정 선생과 필라델피아의 케이트 김 선생이다. 두 분은 오늘 아내와 함께 소고춤을 추었는데, 두 분은 선생님이고 아내는 학생 사이인 셈이다. 몇 번의 연습과정과 오늘의 공연을 보며 내가 두 분, 정선생과 김 선생에게 드리는 감사는 정말 커야 마땅하다. 우리 마을 행사에서 내 아내를 돋보이게 하기 위한 두 분의 애씀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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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쯤 나는 팔불출.

애초 나는 ‘하겠나?’ 싶었다. 돌고 돌고를 반복하는 춤사위에 앉았다 일어나기를 거듭하는 소고춤을 아내가 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 때문이었다. 동작이 느리거나 여유와 쉼이 있는 춤사위가 아니어서 아내에겐 참 버거워 보였다. 게다가 최근 서너 달 어깨 통증으로 물리 치료를 받고, 침을 맞고, 약을 먹는 처지라 되겠나 싶었다.

아내가 춤을 출 때, 내 머리 속 생각 하나. ‘에이고, 제발 넘어지지만 말아라!’

안젤라와 케이트 두 분 선생 덕에 아내의 꿈은 또 하나 이루었다. 정말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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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왕 팔불출인데…

내 아들이다. 제 어멈 행사라고 열 일 제치고 함께 해 주었다. 내가 뭘 더 바라랴! 행사를 마치고 집에 오니 문 앞에 꽃 병이 배달되어 놓여 있었다. 오늘 직장 일로 함께 못한 며늘아이가 보낸 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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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선 길에 완벽히 불출로가자, 오늘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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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에서 찍은 사진으로 인사하는 딸아이로.

대화

추석을 앞두었던 지난 주 온라인 모임으로 만난 이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다문화가정을 이루고 사는 이가 문화의 차이에 대한 재미있는 경험을 나누어 주었다. 그녀의 이야기가 머리에 꽃여 지난 일요일 내 가게 손님들에게 문화의 차이에 대해 짧은 편지를 보냈었다.

손님 가운데 Charlie가 내가 보낸 편지의 두 배나 되는 긴 답장을 보내왔다. 그는 나보다 나이는 네 살 위지만 손주가 다섯이고, 대기업 간부로 있다가 은퇴한 내가 만난 전형적인 미국 중산층(우리 동네 중심이겠지만…) 백인이다.

그가 우리들이 함께 살아가는 세상을 바라보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누군가 단 한사람에게 만이라도 그의 생각을 전하고 싶어 그에게 제안을 했다.

“당신 답신을 번역해 내 한글 블로그에 번역해 올려도 되겠느냐?”고 물었더니 이내 답변이 왔다. “오, 기대되는데….”

그와 내가 주고 받은 편지의 길이를 합치니 제법 길어졌다만, 인종에 관계없이 내 세대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의 한 단면일 터이니… 누구가에겐 꼰대스러울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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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 어느 모임에서 만난 이에게서 들은 말이랍니다. 그녀는 한국계 미국인이고 남편은 백인(코카시언, 유러피안 아메리칸, 당신이 무어라 부르든…)입니다.

결혼한지 오래되어서 이제는 매사 생각하는 관점이 비슷해 졌지만, 젊은 시절 결혼 초기에는 사소한 것에서 부부 사이 의견이 충돌하곤 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그녀가 예를 든 상황들에는 이런 것도 있었답니다. 어느 날 식당에서 있었던 일이랍니다.

그녀가 말했답니다. “이 음식은 한국사람들이 아주 좋아하는 것이예요.” 그 말을 들은 남편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물었답니다. “아니 어떻게 한국사람들이라고 단정 지을 수 있지? 한국사람들 모두는 아니겠지?”

저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한국인들의 독특한 언어습관을 떠올렸답니다. 일인칭 단수인 ‘나’를 쓰기 보다는 복수인 ‘우리’라는 말을 많이 쓴다는 것입니다. 일테면 ‘우리 집, 우리 학교, 우리 교회, 우리 나라’ 등입니다. ‘우리 오빠, 우리 누나, 우리 아들, 우리 딸’ 등도 자주 쓰는 말들입니다. 여기까지는 그저 그럴 수도 있겠다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우리 남편, 우리 아내’라는 말은 어떠신지요? 실제로 제 또래 정도만 하여도 입에 붙어 다니는 말들이랍니다.

말의 습관도 세월 따라 변하기 마련이어서 이즈음 젊은이들은 우리 남편, 우리 아내 대신에 내 남편, 내 아내라고 한다고들 합니다.

‘나’보다는 ‘우리’라는 말을 많이 쓰는 언어습관은 오랜 농경사회에서 대가족 중심으로 살아온  공동체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보는데 그저 제 생각일 뿐이랍니다.

월요일인 내일은 한국인들에겐 일년 중 가장 큰 명절인 추석입니다. 한국인들의 추수감사절이랍니다. 각자 ‘나’로 살던 가족들이 함께 모여  ‘우리’가 되는 날이지요.

재미있는 사실은 형제 자매들이 부모와 함께 모이는 이 명절 전후에(특히 명절 후에) 부부 싸움을 하는 이들이 많다고 한답니다.

누구나 ‘나’와 ‘우리’로 살아갑니다. ‘나’로 살 때와 ‘우리’로 살 때, 그 어느 순간이라도 넉넉하고 너그러운 한 주간이 되시길 빕니다.

At a gathering last week, I talked with a woman. She is a Korean-American whose husband is white (Caucasian, European American. Whatever you may call this race!).

As they have been married for a long time, their ways of thinking or viewpoints have become similar now. But, early in their marriage, trivial things caused conflicts of opinion between them so often, she said.

One among the instances which she told me about was what happened at a restaurant one day.

She said, “This is food which Korean people like very much.” In response to her words, her husband tilted his head and asked, “How can you say ‘Korean people’ so surely? Not all the Korean people, right?”

While I was hearing about the instance, one of the unique linguistic habits of Korean people came across my mind. Koreans so often use the first-person plural, “우리 (woori, meaning ‘we or our’)” instead the first-person singular “나 (nah, meaning ‘I or my’)” where the latter should be used, especially in English. For example, Koreans usually say “our house, our school, our church, our country,” and so on. Even, expressions like “our brother, our sister, our son, and our daughter” are used quite naturally. Thus far, you may say, “Strange! But it could be.”

How about the expression “our husband or our wife”? In fact, for many Korean people, at least those in my generation, it is quite a natural expression.

As the linguistic habits also change over time, nowadays young people use the words, “my husband and my wife” instead.

The linguistic habit of using “we or our” instead of “I or my” may come from the community culture in agricultural society which lasted for a long time. It is just my thought.

Tomorrow, Monday, is “Chuseok,” the biggest holiday in Korea. It is like Thanksgiving Day in America. It is the day in which family members who have been living individually as “나 (nah, meaning ‘I’)” gather and become “우리 (woori, meaning ‘we’).”

What is interesting is that around this holiday (especially after it) in which brothers, sisters and parents gather together, the quarrels between husband and wife happen in many families.

All the people live as “나 (nah, ‘I’)” at the same time as “우리 (woori, ‘we’).” I wish that you’ll be generous and broad-minded at every moment, whether you live as “나 (nah, ‘I’)” or “우리 (woori, ‘we’),” in this week and beyond.



 

Young에게,

(네가 이야기하는 것들이) 단지 한국 대 서구 문화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네! — 누군가의 대가족 성원이 되는 것, 잠재적 새 구성원 또는 불행하게 (혹은 부지불식간에) 곧 “가족”을 떠나게 되는 사람들, 이 모든 것들은 세대간의 논쟁 가능성을 일으키기에 충분하지!

어떤 가족의 경우, 주먹, 총, 칼이 등장하기까지 하지. 모든 이들을 진정시키고, 만취자를 내쫓기 위해서는 강한 인물이 요구될 수도 있지. 회사를 경영하는 것이 어렵다고? 그것이 가족 모두를 서로 행복하게 유지시키는 것 만큼 어려운 것은 아니라네.

자네가 언어사용에서 문화간의 미묘한 차이가 의견 충돌을 일으킬 수 있다고 지적했는데, 그러한 것들이 (고등학교 때 배웠듯이)  서구문화에서 전쟁을 촉발시키기 까지 했다지.

내 첫번째 정식 직장은 뉴욕주 서부에 있는 영국과 캐나다 사람들이 소유한 엔지니어링 컨설팅 회사였네. 미국내 첫번째 지사로, 내가 17번째로 채용된 직원이었지. 불과 5년동안에, 직원은 220명으로 불어났고, 정확히 50개 국가 출신 직원들과 함께 일하게 되었지.

때로는, 문화(의 차이)가 문제가 되었었네. 거의 모든 사람들이 화합하며 일하여, 정해진 시간과 예산으로 모든 (업무) 계약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함께 해결해 나가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지. 실제 잘 되어나갔지만, 노력이 필요했었다네.

(그 때의 경험은)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을 소개받는 기회였으며, 거의 모든 사람들은 동일한 것, 일테면 행복한 결혼생활, 자랑스러운 자녀, 생활수준의 향상, 개인적 성취감 등을 원한다는 것을 꽤 일찌기 깨닫게 해 주었지.

이후 직장에서는 동부 유럽과 아시아의 가혹한 문화에서 탈출했고, 그러기 위해 극심한 위험과 고난을 겪어야 했던 사람들과 일했다네. 이 지역에 거주하는 한 사람은 어느 중동 국가 사람들이 발견한다면, 그와 가족들은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처지에 여전히 놓여 있었다네. 그렇지만, 그와 가족들이 미국으로 건너와서 추구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목표들이라네. 그 가족 중 일부는 고국을 탈출하지 못했고.

어딘가에서 온 이웃 혹은 인근 지역 사람들에 대해서 앎으로써 평화롭고 화합하며 함께 사는 삶은 우리 모두에게 달려있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그 만큼 그들도 우리를 도울 수도 있기 때문이라네.

하지만, 내 장인은 어렸을 때, 다리 건너 다른 지역에 가면 심하게 얻어터지거나 심지어 죽는데, 장인이 알았던 아이들 몇몇이 “있어야 할 곳”에 머무른 사람들에게 이것이 사실임을 입증했다고 내게 말씀하셨었네. 새롭게 도착한 문화가 이 나라에 완전히 받아들여지는데 수십년이 걸리고, 어떤 문화는 더 많은 세월이 걸린다네. 그것은 마찰을 일으키고.

진실은 우리 모두는 정말로 같은 것을 원하며, 만일 우리가 우리와 다른 점 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기여할 수 있는 것에 보다 더 초점을 맞춘다면, 모두가 유복해 진다는 것이지.

나아가서, 이 같은 태도가 가정에서도 필요한데, 열린 태도는 각 개인이 이기적이거나 무례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하는 것이 요구된다네.

갈등을 일으키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학대 행위를 용인하지 않는 것을 학교에서 가르치는 경우에 한해, 교육이 도움이 될 걸세.

사람들이 변화에 마음을 터놓게 하는 것, 대화 중에 차이점을 끝까지 듣도록 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만, 가정이 그 방법을 배우는 좋은 출발점이라고 생각하네.

가족모임은 자녀와 잘 지내는 방법을 가르쳐주며, 가족의 ‘어른’은 다른 가정과의 관계에서 열린 태도를 고무시켜야 할 걸세. 하지만, 모든 가정이 그렇게 하지 않고, 그리고 어떤 문화는 그것을 옹호하지 않는다네.

중동 문화의 아주 많은 것들이 수 세기에 걸쳐 지속되온 부족적 행태이므로,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중동 사람들에 대한 문제로 보고 있다네. 부족적 관점은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다르게, 아마도 위험하거나, 어떤 경우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바라보지.

역사적으로 볼 때, 일단 사회가 부족적 행태를 넘어서서 여러 혹은 다수 민족의 “국가 (national)” 문화가 된다면, 우리의 꿈을 이루는 진전은 성취가능성이 더욱 높아져 가는 경우가 많다네.

불행히도, 현재 이 나라에서는 갈등 수준이 대단히 높은 것 같네.

역사상 처음으로, ‘대화’의 대부분은 마주 보면서가 아니라, 비인격적인 인터넷 플랫폼에서 주로 이루어지고, 어떤 집단은 그 플랫폼을 이용하여 갈등을 부추기고 있지. 모든 관계자들이 함께 힘을 합쳐서, 모두가 원하는 목표를 향해 노력하는 것이 어려운 일 일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네. 그렇지 않으면, 모두가 패배하게 될테니까.

Charlie


Young,

Not just in Korean vs. Western culture! — getting anyone’s extended family, plus the prospective new members, plus those who may be unhappily (or unknowingly) soon leaving “the family” — creates a situation ripe for generation of arguments!  In some families, fists, guns or knives come out. It can take a strong personality to keep everyone calm and throw out the drunks.  Running a company is tough?  Not as hard as keeping an entire family happy with each other.

You point out that just subtle differences in use of language between cultures can generate some disputes, and such things supposedly (so we’re told in high school) have started wars in Western cultures too.

My first professional job brought me into a consulting engineering organization owned by a mix of British & Canadian people, with the office based in western NY state.  First American office, I was the 17th person hired.  Within five years, we had 220 people in that one office — and there were exactly 50 different nationalities working together with me.  In some instances, culture became an issue.  Almost everyone realized that this was something we all had to work together on to create working harmony and complete our contracts on time and in budget.  It actually went well, but took work.  I realized fairly quickly that this had been a great introduction to the people of the world for me, and that most everyone wants the same things in life —a happy marriage, children they can be proud of, advancement in their living standards, and a feeling of personal accomplishment. In later jobs, I worked with people who had escaped from harsh Eastern European and Asian cultures, and had endured great danger and hardship to do so. One man living in this area still has a standing death sentence for him and all his family if a certain Middle Eastern people find them.  Even then, these same goals were what he and his family sought in coming to the United States.  Some of his family didn’t make it out of their home country in the escape effort.

It is up to all of us to want to live together in peace and harmony by learning about the people next door or across town who came from somewhere else, because those very people might be able to help us just as much as we can help them.  Yet my father-in-law told me that as a child he couldn’t walk across certain bridges into other neighborhoods without be severely beaten or killed – and some of the kids he knew proved that to be true to those who stayed “where they belong”.  It takes many decades for any newly arriving culture to be fully absorbed into this country, some longer than others.  Many people do not like change, but others realize it is an opportunity.  That generates friction.

The truth is that all of us really want the same things and if we focused more on what the other person can contribute and less on their differences from us, everybody is better off.  By extension, the same attitude is needed in families, but an open attitude requires that each person understand what people want, and not be selfish or rude.  Education helps only if the school teaches about what causes conflict and does not tolerate abusive behavior.  I know it is not easy to open people up to change and hearing out differences in talking with others, but the family is a good place to start learning how.  Family gatherings teach how to get along to their children and the family ‘elders’ should encourage an open attitude in their relationship with other families.  Not every family does that, and some cultures don’t promote it.

This is the problem many people see in the Middle East, as so many parts of those cultures are based on tribal behavior that has existed for many centuries. A tribal outlook inherently looks at others as different, possibly dangerous, and in some cases unacceptable.  History suggests that once a society gets past tribal behavior to become a “national” culture of several, or many peoples, progress in obtaining our dreams becomes more achievable.

Unfortunately, right now we have an unusually high level of conflict in this country.   For the first time in history, much of the ‘ dialog  is taking place on the largely impersonal Internet platform rather than face-to-face, and some parties are using that platform to encourage conflict.  It may be difficult to get all the parties working together and working towards the goals everyone wants, but it needs to happen. Everyone will lose if it does not.

Charlie

단순함에

대구에서 목회하는 후배가 있다. 그가 기특하기도 하고 존경스럽기도 하다. 그와 대구의 이미지 – 모두 내 머리속에 남아있는 허상일 터이지만- 가 영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욱 그가 기특하고 존경스럽다. 비록 내 머리 속 허상일지라도, 그의 이미지와 대구의 이미지가 하나가 된다면 썩 좋은 세상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 때문이다.

오늘 아침, 그가 페북에 “심플하게 산다”라는 책 내용 일부를 소개한 글을 읽고 일터로 나갔다.

“걸을 때든 요리할 때든 활력이 넘치게 하자. 요컨대 ‘힘차게’ 살자. 그러기 위해선 스트레스, 불안, 걱정, 분노, 슬픔을 경계해야 한다. 그런 것들은 당신의 적이다. 활력은 비싼 화장품보다 피부에 더 좋다.”

단순하게 살자거나 힘차게 살자거나 피부건강을 지키자거나 내심 작심이나 결심해 본 적은 없지만, 최근 수 년 들어 몇 가지 새로운 일들을 하며 산다.

일테면 집안에 물건들을 줄이는 일도 그 중 하나이다. 정들었던 물건들일지라도 딱히 필요 없는 물건들은 버리거나 때 되면 찾아오는 이들에게 기부하고,  우리 두 내외에게 꼭 필요한 것들이 아니한 사지 않는 일이다. 이 일로 종종 아내와 다투곤 한다.

가게 일을 줄인 것은 올해 들어서 시작한 일이다.  주 중 이틀은 오전 12시면 아내와 함께 가게를 나선다. 처음엔 이래도 될까 싶었는데, 아무 일 없이 가게는 잘 돌아갔다.

공짜 시간을 마련한 처음 얼마간은 아내나 나나 하고 싶은 것들은 많고, 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이 그저 게을러지기만 했다.

반 년 쯤 지나자, 나름 그 시간들이 아주 귀하게 우리들의 시간이 되어간다. 아내와 함께 걷는 일도 그 중 하나이다. 오늘은 참 걷기 좋은 오후였다.

그러고보니 대구에서 목회하는 후배는 아내의 친구이기도 하다.  텃밭 농사짓는 그의 교인 하나가 고추 서른 근 거두어 열 근을 가져다 주었다 하여, 내가 ‘그건 착취가 아니냐?’ 농을 했다만, 그도 머리 허연 연륜 깊은 목사님이시거늘….

아무렴, 대구에서 목회하는 내 후배인데, 서른 근도 심플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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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역설

오늘 유엔 연설에서 자화자찬으로 웃음거리가 된 트럼프에 대한 ABC의 트윗에 달린 댓글들이 크게 웃음을 준다. 한 아낙의 뿜는 모습에 담긴 조롱이 가관이다.

트럼프는 정말이지 독특한 캐릭터이다.

한 두어 달 전에 플로리다에서 낯선 풍경에 놀랐던 경험이 있다. 트럼프를 찬양하는 거리의 대형 입간판과 트럼프를 응원하는 스티커를 부착하고 달리는 도로의 자동차들이었다. 우리 동네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이었다.

역사학자 하워드 진은 쿠바를 비롯해 하와이 버진 아일랜드, 푸에르토리코를 위시하여, 베트남 등의 인도차이나, 한반도, 아프카니스탄, 이라크에 이르기까지 미국이 한 일들을 미국민들은 애초부터 이제까지 진실을 모른다고 일갈했었다.

역사의 역설이랄까?

평생 치열하게 싸웠던 하워드 진이 결코 이루지 못했던 워싱톤의 가면을 들추어 내는 일을 트럼프가 해 내는 것은 아닐까?

이 참에 정말이지 한반도 문제만이라도….

편지 – 사는 맛

이민 와서 어쩌다 시작하게 된 세탁소 주인 노릇이 어언 30여년이다. 한 땐 네 곳의 세탁소와 픽업 루트까지 이 업으로 남 못지 않게 바빳었다. 세탁소를 하기 싫어 한 눈을 팔다 폭삭한 적도 있었다. 나름 미 전역 이 업계에서 내 이름 석자를 기억해 주는 이들도 몇몇은 된다.

누구에게나 그 때가 찾아오듯 일이 좀 버겁다는 생각이 들 무렵에 이르러 일을 줄였다. 한참 때에 비하면 이즈음 세탁소 일은 그저 놀고 쉬는 셈이다.

바램이 있다면 아내 덕에 30여년 지켜온 이 세탁소에서 일할 수 있는 날까지 하루 해를 보내는 것이다.

그 바램에 금이 가기 시작한 일이 생긴 것은 올 초였다. 내 세탁소가 있는 샤핑센터의 건물주는 삼대 세습을 받은 젊은 친구다. 그의 할아버지와 계약을 맺고 들어 가 그의 아버지를 거쳐 젊은 새 주인에 이르기까지 이어온 가게란 많은 입주자들 가운데 Acme나 Kmart 등 큰 체인점들을 제외하면 내 세탁소가 유일하다.

젊다는 것은 꿈이 있다는 뜻. 젊은 주인이 몇 년 동안  꿈꾸어 온 샤핑센터 리모델링 계획안이 시市 의 승인을 받은 게 올 초였다. 그 사이 젊은 주인과 두 차례 만나 그의 계획을 듣고 내 세탁소 임대 연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문제는 그의 계획안에 따르면 내 세탁소 자리가 없어지는 것이었다.

아직 잔여 임대 기간이 넉넉하고 계획안이 실행 되려면 아직 많은 시간들이 남아있기에 좀 느긋했었다. 그런데 아직 계약기간이 몇 년 남아 있다던 Kmart가 다음 달인 10월에 폐업한다는 발표가 몇 주 전에 있자 젊은 주인의 리모델링 실행이 급물살을 탓다.

젊은 주인은 올 11월 까지 새로 꾸미는 건물로 이전할 것을 권유해 왔다. 말이 좋아 권유이지 통보였다. 하여 이런 저런 생각이 많은 이즈음이다. ‘십 년 만 젊었으면 일 한번 벌려 볼텐데…’ 와 ‘나이가 십 년 만 더 들었다면 그냥 손 털고 말텐데… ‘그 사이에서 어중간한 생각들이 수없이 오고간다.

하여 우선 내 가게 손님들에게 저간의 사정을 설명하는 편지를 띄운 것은 지난 일요일이었다. 지난 한 주간 내 세탁소를 드나든 많은  손님들이 ‘걱정 말라’며 해 준 말에 몇 년은 젊어졌다. 그들이 해 준 말이다. ‘너희 부부가 어디로 가던 나는 쫓아 간다.’

짧은 메세지를 보낸 이들도 많았다. 일테면…

I wish you luck in whatever your decision will be. Your letters are so heartwarming! – Sara Carley

I’ve enjoyed your weekly messages for years. No matter where you move you will have my business. Thank You, – Francis Poole

Thank you so much for this information. I greatly appreciate your service to so many. I have prayed for you and God’s very best plan for you and your future. Thanks again, – Cami Seward, your grateful customer

No matter where you move…..my wife and I will still be loyal customers. Thanks for you service… – Rick and Valerie Stephens

just let us know, we will follow you – EDWARD WALKER

As a business owner I completely understand your challenge! I learned of your store when I was in high school, and have been coming every since (over so 25 yrs) and thus if you move near Acme I will follow! Leave the decision in prayer, but know that you have support! Thank-you, – Shannon Marchman Clark

등등.

사는 맛이다.

그리고 손님들에게 보냈던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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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저희 세탁소에 오셨던 분들은 Kmart에 내 건 “Store Closing”라는 커다란 사인판을 보셨을 것입니다.

Kmart가 문닫다는 소식에 여러 손님들이 저희 부부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지십니다. “너희는 어떻게 되는거니?” 하는 물음입니다. 사실 Kmart가 갑자기 문을 닫는다는 소식에 저희 부부도 조금 놀랐었답니다. 한 두어 달 전에 샤핑센터 건물주를 만났을 때만 하여도 Kmart 임대계약이 2년 넘게 남아 있음으로 그 때까진 영업을 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었기 때문이랍니다.  Kmart의 갑작스런 폐업은 그 본사의 결정인 듯 합니다.

이제 제 세탁소가 있는 쪽 건물에는 Pep Boys와 저희 K&L Cleaners만 남게 되었습니다. 어쩌면 손님들의 물음은 아주 당연한 일인 듯합니다.

30여년 영업을 해 온 이 자리에서 제가 일을 그만 둘 때까지 이 세탁소를 계속 할 수 있었으면 하는 제 소망은 이루어 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올 들어 두차례 landlord를 만났었답니다. 그가 최근에 하고 있는 샤핑센터 리모델링에 대한 계획을 듣고 향후 제 세탁소 리스 연장에 대한 일을 논의하고자 한 일입니다.

그는 샤핑센터 리모델링에 대한 그의 꿈을 담은 청사진을 저희들에게 보여 주며 이렇게 권유했답니다. “지금 너희 세탁소가 있는 자리는 녹지로 변경될 것이다. 그러니 현재 ACME가 있는 쪽 건물로 이전했으면 한다. 다만 현재 남아 있는 리스 기간인 내년 8월 말 까지 현재 장소에서 영업을 할 수 있지만 가급적 올 11월 까지는 결정을 내려 주길 바란다.” 물론 새로운 계약조건 등 몇 가지 부대 조항들에 대한 설명도 있었지요.

솔직히 우리 부부는 이즈음 어떤 결정이 최선의 것인지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답니다.  Acme 쪽으로 옮길지? 가까운 인근에 다른 장소로 이전을 해야 할지? 이전 시기는 언제가 가장 좋을지? 등등의 고민이지요.

그런 고민들 가운데서 아주 확실하게 결정하고 최선을 다하려고 하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답니다. 무엇보다 우선은 걱정스런 고민은 하지 말자는 것입니다. 우리 부부가 최종에 어떤 선택을 하던 그 환경에서 최선을 다해보자는 다짐이랍니다. 두 번 째는 현재 제 가게 손님들이 가장 편안하고 만족할 선택을 해 보자는 것이고, 그럼으로 현재에 충실하자는 생각이랍니다. 마지막으로는 우리 부부가 일 할 수 있을 때까지 다시 옮기지 않을 곳이었으면 하는 바램인데 이건 소망일 수 밖에 없는 것이 우리들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일어날 수도 있겠기에 기도의 영역으로 넘기는 것이랍니다.

바램이 있고 기도할 것이 있는 한, 삶은 살만한 것이기도 하고 행복을 느낄만한 여지가 있는 것 아닐까요?

당신의 기도와 바램들도 하나 하나 이루어지는 계절이 되시길 빕니다.

당신의 세탁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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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me of you who came to the cleaners recently might have seen the big sign, “Store Closing,” at K-mart.

Because of the news of K-mart closing, many customers asked the same question to my wife and me: “How about you? What will happen to you?” In fact, my wife and I were somewhat surprised at the news, too. That’s because the landlord of the shopping center told us that K-mart would continue business until the end of the lease which would end over two years later, when we met him about a couple of months ago. It seems to me that the sudden closure of the K-mart was the headquarters’ decision.

Soon, on my side, just Pep Boys and K&L Cleaners will be left. So my customers’ question is only natural.

I don’t think that my hope, which is to run the cleaners until I retire at the same spot as the past almost 30 years, will be realized.

This year, I met the landlord twice to hear about the remodeling plan of the shopping center and to discuss the extension of my lease.

The landlord showed us the blueprint which reflects his dream of remodeling and told us: “The area where your cleaners is located will become a green area. So I want to suggest that you move to a space on the Acme side. Though you can continue your business at the current place until the end of the lease term, August, 2019, I ask you to make a decision by November, if possible.” Of course, he also told us new lease conditions and some other strings attached.

Frankly, my wife and I have been scratching our heads over what will be the best decision. Should we move to the Acme side? How about finding a new place nearby and moving there? If we move, when will be the best time?

While we are worrying about the near future, my wife and I set up three basic principles. First of all, instead of falling into worrying itself, we made a resolution that we’ll do our best, whatever the environment will be after our final decision. Second, the decision should be the one which will make our current customers feel most comfortable and satisfied. The third one is our wish that we will not move again until my wife and I cannot work anymore. But, unfortunately, it will be beyond our control, so we will move it to the prayer territory.

If we have dreams and wishes and something to pray for, life may be worthy of living and have room for feeling happy. Don’t you think so?

I wish that your prayers and dreams will be realized one by one in this season.

From your clean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