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쟁이

‘언제 어디로 옮기느냐?’ – 이즈음 내 가게 손님들에게 자주 받는 질문이다. 이 물음에 대한 우리 부부의 대답은 ‘아직..’이다. 이래 저래 생각이 많은 이즈음이다. 은퇴하려니 아직은 아니고, 어느 정도 더 일을 할 것인지, 가게 이전에 어느 정도 비용을 투자해야 적절한 것인지, 이전 장소로 어디가 가장 적합할 것인지 등등 모두가 ‘아직…’이기 때문이다. 다만 확실한 것은 올 겨울이 지나면 가게를 옮겨야 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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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위치에서 30년 세탁소를 하면서 아이들을 키우고, 우리 가족이 먹고 살 수 있었던 것에 대해 건물주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없지는 않다만, 리모델링 후 우리에게 이전할 장소를 권하면서 그들이 요구하는 렌트비 30% 인상은 분명 내 감사의 크기를 뛰어 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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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부터 아내와 나는 틈나면 근처 건물이나 샤핑 센터 빈 자리를 찾곤 했지만 눈에 딱 들어오는 장소를 찾기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중 한 군데 현재 위치에서 약 5마일 떨어진 곳에 마음이 끌리는 곳이 있어 그 곳 건물주에게 여러 번 연락을 해 보았지만 무응답이었다.

그리고 몇 주 전에 손님 가운데 한사람, 일흔을 코 앞에 둔 꽃 가게 주인이 던진 말로 상황이 급전하였다. 그는 이따금 그가 꽃배달 하면서 겪은 이야기들로 우리 부부 배꼽을 빼곤 하는 사내다.

그에게 들은 이야기 중 하나 – 뉴저지 어느 곳에 꽃배달을 갔었단다. 주말 오후, 배달 간 곳은 한적한 마을 개인 주택이었는데 차들이 꽤 많았더란다. 도어 벨을 누르니 한 사내가 문을 열어 주는데, 얼핏 눈에 들어 온 집안 풍경에 아연했었단다. 남녀들이 모두 벌거 벗고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좀 더 자세히 볼려고 고개를 내미는데 사내가 급히 문을 닫더란다. 그 때의 아쉬움을 말하며 킬킬거리는 그런 노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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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그가 우리 부부에게 던진 말 – ‘이제 너흰 어디로 옮기니? 혹시 우리 건물로 올 마음 없니?’ 늘 허름한 점퍼 차림으로 작업복 세탁이나 맞기며 킬킬거리던 노인이 말한 ‘우리 건물’은 바로 내가 건물주를 만나기 위해 여러 번  연락을 해 보았지만 무응답이었던 바로 그 샤핑센터였다. 약 30만sf(약 8,500평)면적의 제법 규모 있는 건물주가 바로 그였던 것이다.

사실 그 동안 몇몇 손님들이 자기 소유 건물로 이전이나 매입을 권유하였지만 세탁소 장소로 적합하지 않거나 내겐 다소 버거운 곳들이었다.

그 이튿날, 그는 그 건물 관리 직원을 보냈고, 이후 몇 차례 리스 조건들 조정에 대한 이야기들 오갔다. 그리고 며칠 후 꽃가게 주인은 우리에게 아주 파격적인 조건을 제시해 우리를 혹하게 했다.

마음이 급해진 나는 손님들에게 설문조사를 시작하였다. 리모델링이 끝난 후 현 샤핑센터내로 이전하는 것과 꽃가게 주인 소유의 샤핑센터로 이전하는 것 중 어느 곳이 당신에게 편리한가? 라는 질문과 만일 우리가 당신이 편리하지 않다고 대답한 곳으로 이전한다면, 그래도 내 세탁소를 이용할 것인지?를 묻는 것 이외에 몇 가지 물음을 더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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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주간 동안 실시한 이 조사에서 응답한 이들은 편리한 쪽을 묻는 질문엔 정확히 반반으로 갈리었고, 나머지는 어느 쪽이나 같다는 선택을 하였다. 어느 쪽으로 가든 내 세탁소를 계속 찾겠노라는 응답은 거의 100%였다.

지난 주에 우리 부부는 현 샤핑센터 주인을 만나 저간의 사정을 설명하고 꽃가게 주인 소유의 건물로 이전할까 한다고 전했다. 젊은 주인은 주저함이 없었다. ‘그래? 30% 인상은 없던 것으로 하고, 그 쪽에서 제시한 조건에 걸맞는 조건으로 우리 건물에 그냥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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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우리 부부의 결정은 ‘아직’이다.

젊은 건물주를 만나고 돌아 오는 길, ‘이거 다 내가 착하게 살았기 때문 아닐까?’하는 내 말에 아내와 나는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아내의 웃음은 비웃음이었고, 내 웃음은 가당치 않은 내 말이 겸연쩍어 터진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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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곳 건물주와 내 세탁소 손님들이 같은 목소리로 우리 부부에게 크레딧을 부여한 첫 번 째 조건은 30년 동안 한 자리에서 세탁소를 이어 왔기 때문이란다.

딱히 특별한 재주와 능력이 없어 한 자리에서 고만한 세탁소를 꾸려온 이력도 쓸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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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 난 평생 동네 세탁쟁이 이다.

  • 주말, 동네 Winterthur 박물관에서 찍은 사진들

가을비

‘난 괜찮아!’, ‘아무렴, 괜찮치!’, ‘진짜 괜찮다니까!’ –  연이은 그의 ‘I’m Okay!’ 소리를 나는 그렇게 받았다. 충혈된 그의 눈엔 어느새 눈물이 맺혀 있었다. 나는 그의 손을 잡았다. 내 작은 손으로 그의 큰 손을 잡았다기 보다는 그저 그의 손등에 내 손을 얹었을 뿐이었다. 내 작은 손보다 더욱 안쓰러웠던 것은 그에게 건넬 말 한마디 마땅치 않은 내 짧은 말솜씨였다.

Mr. Early 는 얼추 25년 여 내 가게 단골이다. 성씨 답게 그는 늘 이른 아침에 내 가게에 들른다. 폴란드계인 그들 부부는 자잘한 농담과 일상 이야기로 이른 아침 밝은 웃음을 남기곤 했다. 나보다 몇 살 위인 그는 작은 건축 컨설팅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넌 언제까지 일할꺼니? 난 내년이나 후년에 은퇴할 건데…”라는 그의 말을 들은지 거의 칠 팔 년이 지났건만 그의 같은 농담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최근 몇 년 동안은 주말에 그의 손자를 앞세우고 내 가게를 찾기도 한다.

그리고 지난 주말 아침, 카운터를 보던 아내가 눈물을 흘리며 내게 전한 말이었다. “어떡해? Early씨 가 왔다 갔는데… 아들이 죽었데….이제 서른 하난데…. 차마 할 말이 없어 뭐라 말도 못했네… Early 부인은 그래도 덤덤한데… 남편이 그냥 우는데….”

가을비가 추적이는 오늘 아침, 충혈된 눈에 웃음을 담고 떠나는 그를 바라보다 눈에 들어 온 가게 밖 풍경.

삶은 때론 참 을씨년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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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일흔 세 해를 함께 살고 있는 부부가 몇 이나 될까? 여전히 티격태격 다투다 언제 그랬냐는 듯 환하게 웃으며 딴소리들 하시는 일흔 세 해 차 부부, 내 부모님 이시다.

어제도 여전한 모습들이었다. 모처럼 먼 길 오가는 일이 두 분들에게 만만치 않으셨나 보다. 모시러 갔더니 두 분은 이미 한 판 중이셨다. ‘가시겠다’, ‘못 가시겠다’ 로 붙은 다툼의 시발은 막내 딸년이 주문한 드레스 코트 탓이었다. 평소엔 전혀 먹히지 않는 삼녀 일남, 환갑 넘어 칠순을 바라보는 외아들의 입김이 먹히는 순간은 이 때였다.

‘아니! 그 아이는 먼 길 오가시는 노인들에게 불편한 한복 타령을 했다니…’, ‘쯔쯔쯔…’ 과하게 혀까지 차면서  두 노인들의 다툼에 무승부를 선언한 결과였다.

그렇게 오간 뉴욕 Flushing 금강산 연회장이었다. 한국에서 결혼식을 치룬 조카 아이가 여기서 피로연을 치루는 자리였다.

오가는 길, 두 노인들이 입을 모아 여러 번 반복한 말… ‘이젠 둘 남았구나…’ 아직 결혼 안 한 손주 둘을 말씀 하신 것인데, 그 중 하나가 내 딸이다. 나는 차마 입 안에서 뱅뱅 도는 그에 대한 내 뜻을 말하지는 아니하였다.

뉴욕 가는 길 운전은 내가, 돌아 오는 길은 내 아들 녀석 몫이었는데 부모님 집에 이르러 두 분이 함께 하시는 말씀. ‘운전은 아들보다 손주가 한 수 위다. 오는 길 아주 편하게 왔구나!’하시며 손주에게 사례금을 하사하시다.

바라기는 올 겨울도 티격태격 하시다 한 목소리로 아들 놈 꾸지람 이어가시길. 내 아들 , 며느리와 아내에 대한 고마움은 덤으로 그 티격태격에 묻혀 있을 터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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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어 가는 가을, 숲 속 정원 길을 걷다.

시간이 바뀌어 밤이 부쩍 길어진 날, 동네 Mt. Cuba Center에서 – 11/ 4/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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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부부가 미술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이가 있다. 그녀는 실제 미술 선생으로 오랜 교단생활을 마치고 은퇴한 이다.

그녀의 남편 역시 미술 선생이었고 우리 두 아이 고등학교 시절의 미술선생님이기도 하다. 내 눈에 미술에는 영 재간이 없어 보이는 우리 아이들을 많이 부추겨 주신 선생님이다. 그 시절 내 아이들이 그린 소묘들은 지금도 내 방에 걸려 있다. 내 아이들 만큼도 못한 내 눈에는 그게 참 대견해서이다.

다시 그녀의 이야기로 돌아가자. 이제 70대인 미술선생님은 우리들이 처음 만났을 때처럼 늘 화장기 없는 민낯이다. 까맣던 머리칼들은 이젠 백발이지만, 한번도 그녀가 염색을 한 모습을 본 적은 없다. 그런 그녀는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변함없이 아름답다. 내가 어릴 적 한국에서 미모로 이름 꽤나 날리던 여배우의 친 언니라는 수식어는 그녀에게 가당치도 않은 아름다움이다.

어제 낮에 그녀가 내 가게에 들렸었다. 그녀는 최근 십 수년 만에 방문했던 한국에 대한 이야기들과 여기 사는 우리들의 모습들을 말했고, 우리 부부는 그녀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말한 차이와 다름과 낯설음 등에 대해 더욱 강조했던 것은 오히려 내 쪽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엊저녁에 필라델피아 작은 소극장 Painted Bride Art Center에서 그녀를 다시 만났다. 필라델피아 한국문화 재단과 남부 뉴저지 한국학교가 공동 주관한 Heart of Korea라는 연주회 공연에서였다. 우리 부부는 아들 며느리와 함께 였다.

집단 북 치기 공연을 시작으로 한복 패션 쇼, 태평무, 홀로 큰 북 치기, 판소리, 진도 북 춤, 가야금, 칼춤, 사물놀이 등이 이어졌는데, 역시 우리넨 흥으로 타고 났나 보다.

그 곳에서 생각지 않던 얼굴들도 몇 만났다. 그 중 하나 이즈음 한국 현대사를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이었다. ‘남편은 어쩌고 왜 혼자시냐?’는 내 물음에 그녀가 한 대답이었다. ‘함께 하려 했는데 남편은 피츠버그에서 일어난 유태계 참사 추모하느랴 그 곳에 가서요….’

그랬다. 역사 선생님과  미술 선생님의 남편은 유럽계, 내 며늘 아이는 아프리카계… 우린 모두 이따금이지만 한국계로 서로 통한다. 어쩜 흥으로… 모든 길들이 서로 만나곤 헤어지듯이.

공연이라 카메라를 들고 가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어, 오늘 오후 동네 공원길을 걸으며 어제 생각으로 길들을 담았다.

이제껏 걸어 왔고, 지금 걷고 있고, 언제 일지 모를 그날까지 걸으며 만났거나 만나거나 만날 모든 사람과 사물들을 위하여

10/28/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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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망

이른 아침 내 일터를 밝혀주던 달과 가로등.

해 뜨자 이내 사라져 바빴던 하루 기억 속에 남아 있지 않다. 이런 건망은 딱히 새삼스런 일도 아니다.

지난 숱한 세월 그것들은 내 일터의 아침을 위해 그 곳에 있었을 터이다.

어쩜 내가 기억하지 않거나 기억 못하는 신과 가족들과 이웃들의  따스함처럼.

시월, 어느 안식일

한 주간 쌓인 피로의 무게에 눌려 엊저녁 일찍 자리에 누웠더니, 몸이 ‘피로의 무게’란 단지 맘이란 놈의 생각 이었을 뿐 아직은 견딜 만하다며 새벽녘에 눈을 뜨다.

어제 필라 지인이 했던 부탁이 떠올라 컴퓨터 앞에 앉다. 오는 11월 6일 중간선거 투표와 입후보자들의 약력과 정책공약 등을 알리는 한글 안내 번역 교정을 보다.

가을 점퍼를 꺼내 입다. 아침 바람이 어느새 차다. 휴일 아침 커피 맛은 일하는 날의 그것보다 깊고 달다.

모처럼 교회 한 번 가지 않겠느냐는 아내의 제안에 따라 나서다. 목사님의 말씀 ‘착하게 살자’. 딱 고만큼의 거리와 간격에서 만나는 이들과의 인사도 때론 살가운 법이다.

오후엔 아내와 함께 가을 길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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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새를 일하고 하루를 쉰 안식일은 역시 신의 한수다.

저녁상을 물리고 이즈음 한국 현대사를 가르쳐 주시는 선생님이 보내주신 해방 이후 빨치산에 대한 연구 논문들을 읽다. 민(民)에 대해 천착하는 연구자의 시각이 가슴에 닿다.

참다운 안식일 하루를 만드는데 사람들이 고민하고 투쟁해 온 역사는 거의 육천년.

우리 세대의 70년 고민은  이제 시작이다.

내일은 손님들이 떨구고 간 빨래감들과 뒹굴 터.

또 다른 안식일을 위하여

연식年食

이젠 조금 과한 노동은 버겁다. 예전에 비할 바는 아니나 그래도 메뚜기 한철이라고 가게 빨래감이 밀린다. 바쁘게 움직이다가 문득 가게 밖에 머문 가을에 끌려 일손을 멈추고 하늘을 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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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떠난 어느 천재는 신은 없다고 했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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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탁쟁이인 내가 천재의 고뇌와 고백에 고개 끄덕일 수 있음은 그만큼 연식年食이 쌓였다는 증표다. 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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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신의 자리에 올려 놓은 ‘자연발생적 우연’에서 나는 신을 고백한다. 그런 내 모습에도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 또한 살아온 연식 탓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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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테면 사람과 신 사이에서 제 배 채우는 이들이 말하는 신은 없음에 분명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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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이들이 도움을 청하며 부르는 이름의 신은 분명 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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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담는 내게 오늘에 대한 감사를 토해 내게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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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낮에 내겐 신이 함께 했다. 내 일터에서.

득템

크게 음미할 틈도 없이 숨가쁘게 책장을 넘겼다. 손에 잡힐 듯 엊그제 같은 세월에 대한 기록이어서 일게다. 역사의 기록, 그 행간에 숨어 있는 숱한 얼굴들과 어느 곳에도 남겨지지 않을 이름들이 숱하게 스쳐 갔다.

돌이켜 우린 – 아니, 내 세대는- 참으로 선동적 구호와 함께 살아왔다. 슬로건의 시대였다.

책들을 덮으며 내심 빙그레 웃음을 감추지 못한다.

구호에 동원되고, 슬로건에 대상이 되었던 , 역사의 기록 그 행간에 이름없이 숨겨진 이들이 끝내 역사의 흐름 그 큰 줄기를 이끌어 나간다는 사실을 다시 득템한 까닭이다.

한국 현대사를 쓴 서중석의 마지막 바램.

<이제 어느 때 보다도 민주주의와 인간존중의 사회, 평화와 통일을 위해 능동적으로 참여해 삼천리 강산을 모든 인간이 더불어 인간답게 사는 땅으로 일구어 내야 하겠다.>

그 바램 역시 역사에 이름을 남기지 않는 주인공들의 힘을 믿기 때문일게다.

북한현대사를 지은 이들은 해방 이후 김정은 정권이 들어서기 까지를 돌아본 후 이런 말을 남긴다.

<이 체제는 능동적이든 수동적이든 간에 인민의 동의 속에 작동하는 것임에는 틀림이 없다. 이 체제가 장기간 존속할 수 있는 요인은 단순히 물리적 강제력이나 교육, 선전과 같은 지배체제의 일방적 메커니즘만으로만 설명하기는 어렵다. 따라서 정치, 이데올로기, 경제, 사회문화, 대외관계 등 모든 요인을 고려해야 한다.>

바야흐로 상호 이해가 절실한 때이다. 더는 구호에 물든 눈으로 내일을 축성하지는 말진저.

고집에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들 한다. 생각 또는 생각의 틀을 바꾸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더더우기 신앙이나 신념이라는 말로 포장된 생각들을 바꾸는 일이란 가히 혁명과 같다. 게다가 노인들의 생각에 이르면 이는 변하지 않는 진리가 된다.

그게 이젠 남 이야기가 아니라 내 이야기가 되었다.

하여 웬만해서는 내 또래나 웃어른들과는 신앙이나 신념에 이르는 주제의 이야기들은 그저 피하고 사는 편이다. 어차피 바꾸지 않을 생각들을 나누고 다투는 일을 토론이라고 포장하더라도 서로 간의 아까운 시간 낭비라는 생각 때문이다.

만나는 이들의 폭이 워낙 좁다보니 나보다 나이 어린 이들과 의견을 나눌 수 있는 기회가 아주 적다만, 어쩌다 기회가 있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생각은 나이와 아무 관련이 없다는 사실에 직면하곤 한다.

신앙이라는 면에서는 여전히 내 또래보다 더 중세(中世)에 갇혀 사는 젊은이들도 만날 수 있거니와, 신념에 이르러서도 케케묵은 이념이나 견강부회나 곡학아세의 틀에 갇혀 저 홀로 독야청청인양 목청 높이는 이들을 만날 수 있다. 이건 딱히 나이와 상관 없는 일이다.

어쩜 내 모습이기도 하고.

다만, 이따금 나 홀로 추스려 다잡는 생각 하나. 세상 지고지선 그 절대란 절대 없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사람이나 체제를 절대라는 위치에 올리는 일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아니다’라는 그 생각 하나.

철들어 굳어진 그 생각 하나 늙막에 내 고집으로 안고 살아야 할 터. 신앙이나 신념의 이름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