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日常)에

전화벨이 울린다. 낯선 전화번호가 뜬다. 망설이다 받아 본다. 대뜸 들리는 소리 “저예요, 오랜만이죠!.” 내 응답, “누구신지?”. 큰 웃음소리와 함께 들여오는 소리, “아이~ 제 목소리도 기억 못해요?”

끝내 그가 이름을 대기까지 나는 스무고개를 넘어야했다. 참으로 내 감이 무뎌졌다. 그래서는 안되는 일이었는데 그에게 미안했다.

그가 다시 물었다, “어떻게 지내세요?”. 내 응답, “뭐 그냥 그 때나 지금이나 똑같지 뭐.”

오랜만에 만나거나 목소리 듣는 이들이 곧잘 묻는 물음, “이즈음 어떻게 지내느냐?”에 대한 내 응답은 마냥 같다. “똑같지요, 뭐” 아님 “그냥 숨쉬고 살지요.” 둘 중 하나다.

나만 그러하지 않을 것이다. 누구나 다 엇비슷하게 특별한 일 없이 똑같은, 지나가고 나서야 아쉬운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게 아닐까?

바로 일상(日常)이다.

누군가는 그 일상에 대한 도전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도 하고, 때론 그 몸짓으로 역사를 바꾸는 사람들도 있고.

돌이켜보면 그 일상의 틀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던 모습의 연속이었다. 내 지난 시간들은.

이즈음은 틀에 박힌  내 일상이  점점 다르게 다가온다. 그날 내가 누리는 돌아올 수 없는 시간으로.

하여 예나 지금이나 똑 같은 내 응답, <“똑같지요, 뭐” 아님 “그냥 숨쉬고 살지요.”> – 그 속내는 예와 지금이 사뭇 다르다.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초가을 오후, 아내와 함께 정원 길을 걷다.

이른 아침, 다시 첫 서리 하얗게 내린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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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내 세탁소 한 쪽 벽면엔 가족 사진 몇 장과 내가 찍은 사진 몇 장 더하여 내가 좋아하는 시 몇 편이 장식으로 걸려 있다.

오늘 거기에 작은 소품 몇 개를 더했다. 천조각들과 실을 이용해 만든 내 바로 아래 누이동생의 작품이다.

내겐 누나 하나 동생 둘 그렇게 누이가 셋이다. 부모들에게 아리지 않은 자식이 어디 있겠느냐만, 우리 네 남매 가운데 어머니 아버지에게 가장 아픈 손가락은 아마도 세 째 였을 게다. 한국전쟁 통에서 다 키워 잃었던 맏딸 몫까지 온전히  받아 안았던 내 누나는 내 부모의 기둥이었고, 막내는 어머니 아버지의 재롱이자 기쁨이었고, 아들 하나인 나는 늘 걱정거리였다. 세 째에겐 늘 아린 구석을 내비치시던 내 부모였다.

거의 오 분 거리 한 동네에서 사는 나와 누나와 막내와 다르게 세째는 멀리 떨어진 남쪽에 산다.

그 동생이 나를 깜작 놀라게 한 것은 달포 전이었다. 바느질 일을 하며 살았던 동생이 가게를 접은 지도 꽤 오래 되어 그저 손주들 보며 사는 줄 알았는데, 천과 실을 이용한 작품들을 만들어 작은 전시회를 열고 작품집도 만들었다는 소식이었다.

동생의 작품집을 받아 들었던 날, 나는 내 부모님들께 감사한 마음 일어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 한 방울 찔끔했다.

동생의 작품집은 자연, 사계절 그리고 가족이라는 주제로 꾸며 있었다. 나는 그 주제들이 참 좋았다.

이젠 우리 남매 모두 노년의 길로 들어섰다. 이 길목에서 조촐하게 주어진 삶 속에서 신이 내려 주신 은총과 살며 만들어 나가는 관계 속에서 느끼는 감사를 드러내며 살 수 있다는 기쁨을 잠시라도 나눌 수 있음은 우리 남매들이 누리는 축복일게다.

아내와 매형, 매제들은 덤이 아니라, 이 관계의 실제 주인일 수도 있을 터.

*** 엊그제 막내가 내게 보낸 신문 기사 하나. 아틀란타 조지아 Gwinnett County 공립학교 올해의 교사상 semifinalist에 조카 아이 이름이 올랐다고.  열심히 사는 아이들에게 그저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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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

온종일 비가 내린다. 이런 날은 왠지 나른하게 게을러지고 싶다. 더더욱이나 오늘은 일요일이다. 허나 몸과 맘이 늘 함께 하지는 않는다.

바뀌는 계절에 따라 필요한 이런저런 집안 정리와 내 하고픈 일들로 종일 바쁘게 짧은 하루 해를 보냈다.

낮에 얼핏 창밖을 바라 보다가 나무들이 비를 맞으며 가을 옷을 바꿔 입는 풍경을 보았다.

그 풍경을 눈에 담아 하루의 감사를 곱씹었다.

계절이 내게 건네는 느낌을 만끽하는 오늘은 그저 감사다.

  • 다만 뉴스들은 언제나 그렇듯 비오는 날을 우울하게 만든다.
  • 한국뉴스는 더더욱 그러하다. 욕조차 아까운 인간들이 권력의 이름으로 판치는 세상처럼 우울한 일이 어디 있을까 싶다.
  • 허나 세상 모든 일에 다 계절이 있는 법, 좋은 소식 듣는 때가 또 오겠지. 어느 날엔가 문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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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과 모국어

이즈음 내 목소리는 참 싫다. 듣는 일은 물론이고 내는 일도 마찬가지다. 내 것 같지가 않다. 소리는 점점 가늘게 높아지고, 쓸데없이 빨라지는 내 목소리를 느끼는 순간 나는 움찔하며 입을 닫곤 한다.

말도 마찬가지다. 영어야 원래 그렇다 치더라도 한국말도 이젠 참 어눌해져 내 머리 속 생각을 차분히 내어 놓는 일이 쉽지 않다. 하여 말수는 점점 줄어 든다.

그렇다고 불편한 일은 없다. 비록 돋보기 도수도 점점 올라가 글을 오래 보는 일조차 버거워 지기는 하지만,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새롭게 느끼는 촉은 예전보다 예민해 지는 것 같기도 하고, 무언가 한번 꽂히는 일을 곱씹고 되새겨 보는 즐거움들이 새로 그 자리를 채우기 때문이다.

그래 다 저마다 제 자리에서 살기 마련일게다.

아침마다 스쳐 지나가곤 하는 옥수수 농장에 가을걷이가 시작되었다. 농장에 봄꽃 가득하던 게 그야말로 바로 엊그제였는데…

맞다! 나는 여름을 너무 쉽게 잊곤 한다.

그 여름을 보내는 내 뜰도 가을을 맞이했다.

나도 이젠 시간을 쫓아 계절을 맞는다.

시인처럼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워 보는 시간을.

목소리도 말도 글도 아닌 온 몸으로 느끼는 사람 됨으로. 어차피 모국어란 신에게 닿아 있는 부호일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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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하루 사이에 긴 팔 옷을 찾아 입었다. 계절은 늘 그렇게 바뀐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쯔쯔쯔…  비단 내가 모르는 것이 계절 뿐일까?

내 뜰에 있는 나무들에게 계절 옷 입힌다고 삽질을 하고 있는데 아내가 보낸 카톡 영상을 받았다.

에고, 울 아버지, 내 아버지!  내겐 목사 이전에 참 사람으로 느껴지는 배목사님이 보내 준 영상이었다.

아버지에게 나는 늘 모자란 아들이었다.

모자란 나는 늘 아버지가 못마땅 했었다.

그 모자람과 못마땅의 차이는 내 세대에서는 흔히 널려 있는 그저 그런 평범한  아버지와 아들 관계  일 터이다.

그런 아버지가 ‘하늘나라 가시면 누구 보시게요?’라는 목사님의 질문에 답하신다. ‘그거 말 못해….’

아이고, 이제사 아버지 뜻 조금은 헤아릴 나이가 되었나 보다. 내가.

열린 내일을 감히 말할 사람 누가 있으랴!

아버지의 가르침.

그 가르침을 깨쳐준 배목사님께 감사 드리는 밤.

하늘엔 구름 한 점 없이 푸르른 초 가을날에.

9. 24. 22

해질녘>

일을 마치고 돌아와 저녁 하늘을 보는 즐거움이 점점 줄어든다. 이제 곧 어두워진 밤하늘을 보며 집에 돌아 오리라. 그렇다 하여도 짧아져 가는 해를 탓할 일은 아니다. 내게 허락한 오늘 하루 하늘이 주는 아름다움에 족할 수 있다면.

저녁상 물리고 옛사람의 일기장 꺼내 읽으며.

<해질녘의 드라마는 결코 싫증이 나지 않는다. 매일 오후면 어떤 새로운 그림이 하늘에 그려질까, 또 어떤 새로운 광경이 펼쳐질까 하는 호기심에서 해지기 전 약 15분 정도 서쪽 하늘을 바라본다. 워싱톤거리나 브로드웨이에서도 이처럼 멋진 광경을 볼 수 있을까? 매일 하늘에는 위대한 예술가가 고른 듯한 빛으로 새로운 그림이 그려져 반시간 가량 걸려 있다가 그것이 사라지면, 이내 밤의 장막이 내린다. –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저널> 1852. 1, 7.>

We never tire of the drama of sunset. I go forth each afternoon and look into the west a quarter of an hour before sunset, with fresh curiosity, to see what new picture will be painted there, what new panorama exhibited, what new dissolving views. Can Washington Street or Broadway show anything as good? Every day a new picture is painted and framed, held up for half and hour, in such lights as the Great Artist chooses, and then withdrawn, and the curtain falls. – <Henry David Thoreau’s <JOURNAL> January 7,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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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해 떠오르는 일터의 아침 하늘을 바라본 아주 짧게 누린 느긋함이 건내 준 하루의 은총(恩寵).

그 은총은 일터를 향해 무거운 걸음을  떼던 늙은 노동자나, 먼 길 떠날 준비로 든든한 아침 밥상을 즐기던 오리 떼들이나, 늘 같은 아침이건만 하늘 바라보는 여유를 잊고만 사는 내게나 똑같은 크기로 아침마다 다가올 터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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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聽松)

 <신촌 연세대 뒷산은 내 어린 시절의 놀이터였다. 매미와 잠자리들을 잡으며 놀다가 상감(어린 우리들은 학교 수위를 그렇게 부르곤 했었는데 거기에 마마를 붙여 상감마마라 부르기도 했었다. 일제시대에 쓰던 산감(山監)을 그리 불렀던 것이다.)에게 잡히면 호되게 곤욕을 치루기도 했었다. 1960년 대 초였으니 어느새 육십 여년 전 일이다.>

지난해 이즈음 어느 날 내 일기장에 남겨 둔 글의 일부이다.

대현동 쪽 간호대 기숙사에서 연대 후문에 이르기까지 포플러와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기병대처럼 자갈밭길 양쪽에 도열해 있었다. 그 후문을 들어서면 만나게 되는 곳이 청송대(聽松臺)였다. 그곳엔 말 그대로 소나무들이 그득했던 내 유년의 놀이터였다.

청송대(聽松臺) – 솔바람 소리 들리는(또는 듣는) 언덕이라는 이름을 알게 된 것은 훗날 머리 굵어지고 나서의 일이었고, 그 이전에 내가 먼저 알게 된 이름은 청송당(聽松堂) 이었다.

청송당(聽松堂) 바로 솔바람 소리 들리는(또는 듣는) 집이라는 택호가 붙어있는 집터가 청와대 뒷산  북악산 기슭에 있는 내 모교 경기상업고등학교 교정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나무가 학교의 상징일 정도로, 학교 본관 앞에는 솔바람 소리 내는 동시에 사람 소리 듣는 모습의 소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종종 그 시절을 추억하는 일은 아픔이기도 하고 그 아픔을 몇 배나 덮을 만큼 즐거운 일이기도 하다. 잊고있었는데 개교 백 주년을 맞는다고 한다. 허긴 내가 졸업한 지가 오십 년 전 일이 되었다.

그리고 다시 만났던 연세대 청송대. 내 유소년의 추억과 함께 청년의 꿈이 묻힌 곳이 되었다. 야외수업이 이루어진 곳인 동시에 젊은 축제의 현장이기도 하였고, 그 시절 은밀한 이야기를 숨겨놓은 곳이기도 하였으며 민주 통일 역사 하며 차마 손에 닿지 않는 속앓이를 끓였던 내 젊었던 일천 구백 칠십년대가 내 기억 속에 박제되어 있는 곳. 바로 청송대이다. 그 시절 그 곳에서 들었던 솔바람 소리는 기억나지 않는다. 소나무조차.

지난 해 이맘 때쯤 뒷 뜰에 세월을 먹고 웃자라 족히 삼사십 피트 크기가 넘는 나무들 열 댓 그루를 잘라내었다. 소나무와 전나무 일곱 그루에는 차마 손을 대지 못하였다. 내가 이 집에서 산지 이십 오 년 동안 그냥 늘 그 모습대로 내가 눈치채지 못하게 함께 해 왔으므로.

나무를 잘라내고 난 뒤, 뒤뜰 한 켠이 늘 휑하니 허전한 듯하여 울타리 나무로 향나무들을 심었다.

그러다 생각난 청송이었다.

비롯 늦었지만 이제라도 솔바람 소리, 소나무와 사철 푸른 나무들이 전하는 소리 듣고, 향나무가 전해주는 세상 향 음미하는 시간을 누릴 수 있으려나?

청송 – 아직은 꿈을 꿀 수 있어 좋은…. 푸른 솔바람소리 듣고 향을 느끼는 세상!

  • 청송– 그시절을함께한후아직도한결같은모습으로사는친구들의소식을듣노라면참좋다. 비록내부끄러움은커질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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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추석 또는 한가위 – 이제 내겐 거의 잊혀져 가는 명절이다. 누워 계신 아버지에게 ‘추석이예요!’라고 해도 ‘음, 그렇구나…’ 그저 덤덤하실 뿐이고, 함께 명절 밥상 나누시던 어머니와 장인 장모에겐 꽃 들고 인사 드리러 가는 날 일 뿐.

다들 살기 바쁜 아이들 뿐만 아니라 나 역시 아직은 살기 바쁜 탓에 한가위 명절은 그저 옛 생각 이나 더듬어 보는 시간일 뿐.

초저녁, 뒤뜰을 환하게 비추는 보름달은 그저 차분히 고요할 뿐.

보름달을 향해 속삭이는 풀벌레 소리도 요란하지 않고 그저 단순하고 작은 기도소리로 들릴 뿐.

* 사위, 며느리 사돈들께 그저 인사라도 나눌 수 있어 아직은 좋은 명절에.

** 단순함과 감사를 일깨우는 명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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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휴(連休)에

“다음 연휴는 언제 일까?”하며 아내가 달력을 넘겼다. 연휴를 마치고 일을 다시 시작한 어제 가게에서 였다. 연휴를 맞아 즐기는 맛보다는 다시 그 시간들을 기다리며 꿈꾸는 멋진 상상들이 어쩌면 더욱 삶에 기운을 북돋는 흥일 수도 있을 터.

노동절 연휴에 애초 내가 세웠던 계획은 울타리 나무들을 심는 것이었는데 이런 저런 까닭으로 미루게 되었다. 하여 온전한 쉼을 즐기는 쪽을 택해 시간을 보냈다.

엊그제 일요일이었다. 교회에 간 아내가 전화를 했다. “신권사님 내외가 오셨네! 예배 마치고 점심 식사하러 가는데 함께 안하시려나? 오랜만이잖아?”.

‘신권사’ – 그의 이름을 듣자 그가 서부시대 마차에 보따리 짐 바리바리 싣고 황금을 캐러 서부로 향했던 옛사람처럼, 밴트럭에 가득 짐을 싣고 동네를 떠나던 날이 생각났다. 얼추 스무 해 전 일이었다.

신권사 내외는 남도(南道)의 흥으로 사는 이들이었다. 그의 집 문턱은 매우 낮아서 누구나 무시로 드나들 만큼 넉넉하였다. 십 수년 한 동네에서 살며 또래들이 신앙으로도 차마 채울 수 없는 이민 생활의 헛헛함을 채우는 우물 같은 역할을 하곤 했었다.

그 무렵 그의 집에 자주 모였던 이들 중 이 동네에 남아 있는 이들은… 글쎄… 떠오르질 않는다.

나는 아내의 권유를 물리쳤고, 그 날 저녁 신권사 내외와 이젠 교회와 동네 터주가 된 오랜만에 만난 이장로 내외와 옛 이야기 나누며 꽤 오랜 시간을 함께 했었다.

이곳을 떠나 캘리포니아에서 십년, 시카고에서의 십년 – 그가 지낸 시간들의 이야기를 듣고, 같은 마차를 타고 이 동네에서 달려 온 이장로와 내 이야기를 섞어 나누고 들으며 모처럼 맞은 연휴의 뜻을 새기는 시간을 보냈다. 모처럼 내가 말 많이 한 밤이었다.

제 마음대로 할 일 다 해도 하늘의 뜻에 거스를 일 없는 나이라 하여 공자왈 일흔 나이를 종심(從心)이라 하였다던가?

살며, 쌓인 한 없는 사람이 어디 있을 것이며, 한 점 부끄럼 없는 인생이 또 어디 있을까? 또한 감사함 하나 꼽을 수 없는 삶은 없을 터.

하여 그저 감사함으로. 스무 해 만에 만나 얼싸 안으며 반가운 사람 하나 있어 감사! 하늘의 뜻 거스를 일 없는 나이에 품은 흥 넘치는 남도(南道) 사내 내외의 꿈을 위하여 빌 수 있는 믿음 하나 있어 감사!

연휴의 마지막 날, 아내와 함께 가을이 오는 소리가 들리는 꽃길 걸으면서 미처 생각치 못했던 소원 하나 비는 밤.

‘이젠 달력이 전해 주는 연휴를 벗어나 연휴를 만들어 가며 사는 여유를 허락해 주시길…. ‘

그 또한 감사하는 맘 위에 살포시 얹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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