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리브해에 있는 아루바(Aruba)가 자기 고향이라고 하는 가게 손님이 있다. 아일랜드계 이민으로 뉴욕에서 낳고 학교를 다닌 그녀가 그렇게 말하는 까닭은 초등학교 초기까지의 유년 시절을 아버지의 직업 때문에 그곳에서 보냈기 때문이란다. 그녀는 여행을 참 좋아한다. 여행을 다녀 올 때면 늘 작은 선물을 잊지 않아 우린 늘 미안하다. 그런 그녀가 가지 않는 곳, 바로 그녀의 고향 아루바다. 이따금 뉴스들 속에서 만나는 아루바를 보면 자신의 기억속에 있는 고향과 너무나 다르단다. 아름다운 추억들이 새겨진 고향 아루바를 찾는 순간 평생 간직해 온 고향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모두 잃어 버릴 것 같아 결코 그 곳을 찾는 일은 없을게란다.
나는 그런 그녀를 백번 이해한다. 나는 이미 수 년 전 내 고향 신촌을 찾았을 때 그녀의 염려를 맛보았기 때문이다.
이즈음 매 주 한차례 한국 근현대사를 배우고 있다. 19세기 말부터 훑기 시작한 이야기가 어제로 1960년 4월 혁명 전후 시절까지 이어져 왔다. 1960년 어간 한국의 정치, 경제적 상황들을 설명하는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잠시 내 고향 생각에 빠졌었다.
그리고 첫 눈 치고는 제법 눈이 많이 내린 오늘, 손님 발길이 뚝 끊긴 가게에서 내 고향 신촌 생각을 이어갔다.
1960년 4월, 나는 왼쪽 가슴에 크고 하얀 무명 손수건을 달고 국민학교에 입학을 했다. (내 아버지가 아직도 소학교라고 하시듯 나 역시 국민학교가 맞다. 소학교나 국민학교나 일본식이라고 하여도 우린 그때 그렇게 불렀으므로. 물론 내 이야기가 아닌 한 초등학교라고 부르려 애는 쓴다.)
아마 몇 안되는 내 유년의 기억 가운데 가장 또렷한 것이 1960년 4월 19일일 것이다. 전쟁 후 태어난 아이들은 많고 학교수는 적고,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누었어도 한반에 70명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싶다. 한 울타리 안에 국민학교와 뒤늦게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위한 공민학교가 함께 였다. 아무튼 당시엔 4월에 새학기가 시작되어 막 입학한 나는 운동장에서 ‘앞으로 나란히’, ‘옆으로 나란히’같은 유희 반 질서 교육 반의 교육을 마치고, 교실을 배정받아 책 걸상에 처음 앉아 보는 날이었다. 그날이 4월 19일이었다.
오후반이었던 나는 ‘이놈아, 늦겠다! 어여 빨리 가라!’는 어머니의 채근을 뒤로 하고 학교로 향했다. 신촌 노타리 앞 큰 행길을 건너야 학교를 갈 수 있었는데, 내가 그 행길 앞에 섰을 즈음 내가 볼 수 있었던 것은 거대한 시위 행렬이었다. 연대생들이 문안(우린 그 때 사대문四大門안이라는 뜻으로 서울시내를 그렇게 불렀었다.)으로 향하는 시위 행렬이었다. 나는 그 행렬을 구경하노라고 뒤늦게 텅빈 학교를 찾았던 기억이 지금도 또렷하다.
그날 밤이든가 이튿날 저녁이든가 고등학교 다니던 동네 형 하나가 총에 맞아 죽었다는 이야기로 골목이 흉흉하였던 기억도 남아 있다.
6.3항쟁, 3선 반대 시위, 교련반대 시위, 그리고 유신 후 여러 시위들과 1980년 봄 그날의 시위까지 나는 그 거리에서 돌멩이와 최루탄 냄새를 맡으며 유, 소년과 청년 시절 30여년을 보냈다. 때론 구경꾼으로 때론 그 시위대의 한 가운데서.
올들어 몇 권의 역사책들을 읽었다. 몇 권의 프랑스 혁명사와 미국사 및 미국 민중사 그리고 한국 근현대사와 일본 현대사들이 그것들인데 2018년 올 한 해가 내게 참 소중히 기억될 연유이다. 더하여 가르쳐 주는 선생도 만났다.
나는 읽고 배우는 과정을 통해 이제껏 내가 살아오며 생각해 온 세상보는 눈(觀點) 이랄까, 믿음(信仰)이랄까, 그게 거창하다면 그저 내가 지금 사는 모습이 크게 엇나가지 않았다는 안도를 느꼈다.
그것은 또한 사람 살아온 세상, 지금 사는 세상, 앞으로 사람들이 살아갈 세상이란 결국 어제보다는 나은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내 믿음에 대한 확신이었다.
이런 내 믿음의 바탕은 바로 내 고향 신촌 그 거리 거리에서 만났던 내 고향 사람들일 터이다.
그렇다. 고향은 찾아가야만 하는 곳이 아니라 마음에 간직하는 곳이다. 생각날 때면 언제나 첫눈 같은 설램으로 마주하는 사람들이 기다리는 바로 그 곳.
아루바 또는 신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