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에

최근에 본 일본 영화 Departures. 십여 년 전 영화이건만 내겐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무릇 모든 삶이 존엄하 듯, 모든 죽음 또한 그러하다는 것이 내 평소 생각이다. 그런 내게 영화는 죽음을 존엄하게 만드는 것은 산 자의 몫이라는 강한 울림을 주었다. 영화는 또한 죽음을 존엄하게 기억하는 산 자들이 누릴 수 있는 삶의 존엄을 일깨워 주었다.

직업상 신분계급이 여전히 남아있는 일본사회에서 주검을 다루는 염습사(殮襲師)는 여전히 천대받는 직업이라고 영화는 말한다. 전 첼로리스트였던 주인공의 현 직업이 바로 염습사였고, 영화는 그가 첼로리스트보다 더욱 멋지게 죽음과 삶의 존엄을 연주하는 염습사가 되어가는 과정을 그려냈다.

영화의 울림은 잔잔하게 제법 오래 동안 내게 머물렀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세월호 유가족 사찰 의혹을 받던 중 투신하여 떠난 전직 기무사 군인의 주검을 두고 제 배 채우려는 정치쇼를 벌리는 일단의 무리들에 대한 신문기사를 읽다. 오늘 그들의 직업이란 일본사회에서 한 때 천한 직업으로 괄시 받았다던 염습사(殮襲師)보다 못하다.

그들의 삶이란 단지 냄새나는 주검일 뿐, 존엄과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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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음에

어릴 적 어머니는 말했다. “니 놈은 어찌 그리 뻐스만 타면 자냐!”.

“이젠 생각이 나지 않아서…”라는 말씀을 입에 다신 어머니는 이즈음도 뻐스 이야기만 나오면 “아이고, 아범은 뻐스만 타면 졸았어!’라고 하신다.

버스를 뻐스라 하면 늙은이겠지만 어찌하리, 나 역시 이미 늙은이이고 내 입엔 뻐스가 베인 것을.

곰곰히 생각해 보면 어머니와 내가 함께 뻐스를 타곤 했던 기억은 어머니의 친정 곧 내 외가 나들이를 했을 때였다. 내가 혼자서 외가를 찾곤 했던 첫 무렵이 국민학교 오륙 학년 쯤일 터이니 그 이전의 이야기일일 게다.

당시 뻐스는 차체 벽면을 따라 길게 평상의자가 놓여 있었고, 대다수의 승객들은 차안에 서서 가는 형태였다. 신촌에서 한남동을 가는 것이었는데 서울역 어간에서 한 번 갈아 타야만 했었다.

그런데 나는 서서 가거나 앉아 가거나 상관없이 뻐스만 타면 잤단다. 그 복잡하고 시끄러운 곳에서.

그리고 오늘, 나는 동네 백화점 food court에 앉아 또 졸았다. 단지 food court에서만이 아니었다. 샤핑하는 아내를 기다리는 사이 사이 간의 의자에 앉기만 하면 졸았다.

“아이고, 또 주무셨어요?” 아내의 비아냥 반 물음에 난 내게 묻는다.

어머니가 말씀하시는 그 때도  난 느꼈을까?

웅웅거리는 소리와 함께 밀려오는 나른한 잠에서 오는 행복함을.

그리고 문득 눈에 들어 온 백화점 천장 밖 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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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그림자

단언컨대 내 장모는 여전히 꽃이다. 오늘도 그녀를 그렇게 기억하는 이들이 있음으로.

델라웨어 한인 침례교회 이홍 목사님의 기억이 그러하였고, 그 기억에 고개 끄덕이는 공동체들로 하여 오늘 장모는 여전히 꽃이 되었다.

장모 돌아가신 지 두 해, 이홍목사님과 교회는 잊지 않고 이 주기 추도예배를 드렸다. 우리 부부는 목사님과 그 교회 식구들에게 미안하고 부끄러운 마음으로 예배에 함께 했다.

사실 돌아가신 장모나 점점 기력이 쇠하여 지는 장인에게나 딸인 아내나 사위인 나보다 그 교회 식구들이 더욱 가까운 가족이어서 우린 그저 부끄럽고 미안해야 마땅하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가장 큰 까닭은 잊혀진다는 것 아닐까?

한 송이 꽃처럼 아름다웠던 여인, 미운 사람을 안고 살지 않았던 여인으로 기억하는, 그리고 그런 여인과 함께 했던 세월에 감사하는 이들이 있는 한, 내 장모는 여전히 꽃다운 삶이다.

살아 생전 장모가 유일하게 미워했던 사람이 장인이었다는 나와 동갑내기 이홍목사님의 지극히 인간적인 우스개에 이목사를 향한 내 존경은 더해졌다.

예배 후 찾은 장모 계신 곳. 내 어머니와 아버지, 장인, 아내와 나의 자리가 모두 예약되어 있는 곳을 두루 둘러보다.

단 한 사람만에게라도 꽃같은 삶으로 기억될 수 있는 삶이었으면…

오늘 하루의 삶에 감사를 느끼게 해 준 이홍목사님과 침례교회 식구들을 생각하며.

특별히 장모의 그림자를 아름답게 수놓아 주신 이목사님께 감사를.

12/ 2/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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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

일을 마치고 집에 들어 온 우리 부부는 한참을 웃었다. 집사람은 웃으며 거의 넘어갈 지경이었다. 우리 부부를 그렇게 웃게 한 것은 두어 주 전에 있었던 교통사고  경찰 기록이었다.

크게 다친 데는 없지만 이런 저런 사고 후유증들은 계속되고 있다. 우선 내 차는 폐차 처리가 되었으며 아내와 나는 어깨와 허리 통증으로 의사와 물리 치료사를 찾곤 한다.

내 쪽과 상대편 보험회사와 사고 처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가장 중요한 기록은 사고 당시 경찰 기록이었다. 어느 쪽 과실이냐는 판단의 근거이기 때문이다. 경찰 리포트를 조회하려고 20달러 비용과 함께 조회 신청을 한 것이 열흘 전인데 오늘에서야 그 리포트가 배달되었다.

경찰 리포트에 따르면 100% 상대편 운전자의 과실이었다.

우리 부부가 그 리포트를 보다가 웃음을 빵 터트린 까닭은 양쪽 운전자들의 신상내역 때문이었다.

상대편 운전자는 26세 백인 여성이었다. 그리고 내 신상명세에 기록된 Race 항목엔 American Indian/Alaskan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그 기록을 남긴 경찰관은 30대 백인 남성이었다. 그의 눈엔 내가 아메리칸 인디언으로 보였던가 보다.

따지고보면 아메리칸 인디언이나 알라스카 인디언이나 모두 아시아에서 건너 온 이 땅의 주인들일 터이니, 그 젊은 백인 경찰관은 내 얼굴에서 이 땅 주인들의 조상을 보았을 터.

웃으며 한주간을 마감할 수 있게 한 그 젊은 경찰관에게 감사를.

11/ 30/ 18

동네 Valley Garden 공원을 걷다.

겨울이 성큼 다가오나 싶더니 따스한 햇살 온기에 걸음을 늦춘 모양이다. 걷기에 딱 좋은 아침이었다.

교통사고 이후 조금은 어수선했던 한 주가 지났다. 충격에 놀란 허리와 어깨 등이 아직 풀리지 않아 약간의 통증을 이고 있다만, 생각할수록 그저 감사다. Thanksgiving Day를 함께 한 가족들 하나 하나 떠올려 감사를 이으며 공원길을 걸었다.

가게 이전 위치와 시기를 확정 짓고 그를 알리는 편지를 오늘 아침에 손님들에게 보냈다. 그 편지에 대한 손님들의 답신들을 읽으며 감사의 크기가 더욱 커졌다.

어쩜 내가 살아 온 길이 오늘 아침 감사를 곱씹어 본 공원 길 아니었을까. 그저 무심하게 덤덤히 스쳐 지나왔던 그 길들이.

감사에.
11/25/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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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달

아침 바람에 몸이 시린 아침.

자동차 온도 계기판은 화씨 16도를 가르키고 있음에도 벌써 겨울은 아닐 것이라며 나는 날씨가 아닌 나이 탓을 한다.

문득 지붕 위 보름달이 눈에 들어와, ‘어느새 또 보름이네…’ 던진 내 말에 아내가 딴죽을 건다. ‘보름은 어제 였다구요!’

살며 내 생각이 맞았던 때는 얼마나 될까?

아마 달이 보름달, 반달, 그믐달, 초승달로 불리는 것은 모를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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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에

해마다 이맘 때면 내가 읊조리는 시가 있다.  Shel Silverstein이 읊은 관점(Point Of View)이다.

추수감사절 만찬은 슬프고 고맙지 않다
성탄절 만찬은 어둡고 슬프다
잠시 생각을 멈추고
칠면조의 관점으로 만찬 식탁을 바라본다면.

주일만찬은 즐겁지 않다
부활절축제도 재수 없을 뿐
닭과 오리의 관점으로
그걸 바라 본다면.

한때 나는 참치 샐러드를 얼마나 좋아 했었던지
돼지고기 가재요리, 양갈비도
잠시  생각을 멈추고 식탁의 관점에서
식탁을 바라보기전까지는.

Point Of View

Thanksgiving dinner’s sad and thankless
Christmas dinner’s dark and blue
When you stop and try to see it
From the turkey’s point of view.

Sunday dinner isn’t sunny
Easter feasts are just bad luck
When you see it from the viewpoint
Of a chicken or a duck.

Oh how I once loved tuna salad
Pork and lobsters, lamb chops too
‘Til I stopped and looked at dinner
From the dinner’s point of 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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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 – 그 서로 다름을 이해하고 더불어 살아가야만 한다는 생각이 맞닿을 때 우린 가족이다. 그래서 감사다.

구십 대 내 아버지들과 어머니, 칠십 대 매형, 이 삼십대 내 아들과 며느리와 딸, 그리고 육십대 우리 부부가  함께 둘러 앉은 추수감사절 저녁 몇 시간.

한가지  말을 때론 엉뚱하게 서로 제 입맛에 맞게 이해하며 거기에 덧붙어 자신들의 이야기들을 이어 가곤 하지만, 웃음이 끊이지 않았던 까닭은 가족이기에.

지난 한 해에 대한 감사와 함께 맞이 할 또 다른 한 해 동안 우리가 마주칠 모든 일들에 대해 감사할 수 있기를.

비록 칠면조의 관점이나 식탁의 관점 에서라도…

시인이 읊은 슬픔이나 우울함이 아닌 그 관점이어서 더욱 좋고 즐거운….

가족의 관점으로…

2018. Thanksgiving Day 에

찰나에

아내의 비명과 함께 차는 빙 돌아 우리가 달려오던 쪽 갓길에 처박혔다. 순간 세상이 정지된 느낌이었다. 엊그제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서 였다. 그 찰나의 순간은 지금 느린 영상으로 기억속에서 되풀이 되곤 한다.

생각할수록 천만다행이었다. 십 수대의 경찰차와 구급차 소방차들이 난리 법석을 부리고, 망가져 견인된 차의 형태에 비하면 우리 부부는 다친데 거의 없이 말짱한 편이기 때문이다. 이십 대 젊은 아이가 운전을 하고 제 또래 친구들이 함께 탄 차가 느닷없이 아내가 앉아 있는 내 차 passenger side를 들이 받았던 것인데, 그야말로 찰나의 행운으로 아내가 앉아있던 좌석 뒤편을 치는 덕에 크게 다치지 않았던 것이다.

놀라 잠 못 이룬 밤이 지나고  X-ray를 찍고 의사의 검진을 받고 처방전을 받고 무언지 모르게 어수선했던 하루가 지났다.

그리고 오늘 일요일 아침, 편안하고 긴 잠을 누린 아내와 나는 그 찰나의 순간을 다시 느린 화면으로 되돌려 이야기하며 감사를 되풀이 한다.

내일부터 내 일상이 아닌 일들로 조금은 번잡할 것이다. 보험회사 claim 조정관과 이야기를 나누어야 할 것이고, 의사를 찾는 번거로움과 만나기 싫은 변호사를 만나게 될 지도 모르겠다. 보험회사의 발 빠른 처리 덕에 임시 렌트카는 마련 하였다만 새 차를 구입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일로 잡힌 가게 건물주와의 마지막 협상과 메뚜기 한 철로 바쁜 가게 일들도 머리속을 뒤숭숭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 감사하다. 그 찰나의 순간에 대하여. 아내와 나는 일상을 벗어난 번거로운 일들을 누군가의 도움없이 치루어 낼 수 있는 건강을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정말 아쉬운 일이 하나 있다. 아들 며느리와 한 엊저녁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이다. 까만 얼굴 아프리칸 아메리칸인 내 며늘 아이가 한국학교에 등록한 것은 올 9월이었다. 템플대학에서 영문학을 공부하고 고등학교 선생으로 일하고 있는 며늘아이는 ‘아버님’, ‘어머님’, ‘감사합니다’ 등 몇 마디 한국말만으로도 충분히 우리와의 의사소통에 불편이 없다. 그 아이가 엊저녁 한국말로 이야기하는 대회에 참가했다.

뉴저지 해밀턴에서 열린 한국 재외동포재단이 후원하고 해밀톤 한국학교가 주관하는 한국어 말하기 대회였다.

해밀톤 한국학교 교장인 시인 강남옥선생님도 모처럼 만날 겸해서 꼭 가겠노라고 약속을 했던 터였는데, 오고가는 길 세 시간 여 밤운전이 영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며늘아이가 한국말로 자신을 표현할 정도는 전혀 아니다. 자신의 생각을 적은 영어  글을 한국 말로 옮겨 발음부호대로 외어서 대회에 나간 것이니, 솔직히 그 대회의 본래 뜻과 부합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만 내겐 아이가 참 대견한 것이었다.

그 아이의 생각 가운데 하나이다.

저는 가족들과 더 많이 이야기하고 남편과 가족들을 더 많이 이해하기 위해 한국말을 배우려고 합니다. 저는 남편과 가족들을 통해서 한국인들이 어렵고 힘든 일들을 잘 이기고 견디어 왔는지를  배웠습니다. 제가 낳고 자란 문화와 환경도 비슷합니다. 제 부모님들과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어렵고 힘든 시간들을 잘 이겨 내어, 제가 오늘 여기에서 이야기 할 수 있게 했습니다. 저는 남편의 나라 한국에서 제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잘 이겨낸 이야기들과 같은 것을 많이 찾을 수 있습니다. 한국사람들이 많은 아픔과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는 제일 큰 힘은 가족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어제 렌트카를 빌려 돌아오는 길에 장을 보았다.아들과 며느리, 모처럼 집을 찾는 딸, 부모님과 장인과 내 누이네들이 함께 할 Thanksgiving Day 저녁상을 위한 장보기였다.

사고 위로를 겸해 서울 처남이 보내 준 한국영화를 즐기면서 오늘은 그날 저녁상을 위해 느긋하게 만두를 빚을 것이다.

찰나에 대한 감사를 위해. 어쩌면 모든 것들이 찰나일 터이니.

첫 눈 그리고 고향

카리브해에 있는 아루바(Aruba)가 자기 고향이라고 하는 가게 손님이 있다. 아일랜드계 이민으로 뉴욕에서 낳고 학교를 다닌 그녀가 그렇게 말하는 까닭은 초등학교 초기까지의 유년 시절을 아버지의 직업 때문에 그곳에서 보냈기 때문이란다. 그녀는 여행을 참 좋아한다. 여행을 다녀 올 때면 늘 작은 선물을 잊지 않아 우린 늘 미안하다. 그런 그녀가 가지 않는 곳, 바로 그녀의 고향 아루바다. 이따금 뉴스들 속에서 만나는 아루바를 보면 자신의 기억속에 있는 고향과 너무나 다르단다. 아름다운 추억들이 새겨진 고향 아루바를 찾는 순간 평생 간직해 온 고향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모두 잃어 버릴 것 같아 결코 그 곳을 찾는 일은 없을게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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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런 그녀를 백번 이해한다. 나는 이미 수 년 전 내 고향 신촌을 찾았을 때  그녀의 염려를 맛보았기 때문이다.

이즈음 매 주 한차례 한국 근현대사를 배우고 있다. 19세기 말부터 훑기 시작한 이야기가 어제로 1960년 4월 혁명 전후 시절까지 이어져 왔다. 1960년 어간 한국의 정치, 경제적 상황들을 설명하는 선생님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잠시 내 고향 생각에 빠졌었다.

그리고 첫 눈 치고는 제법 눈이 많이 내린 오늘, 손님 발길이 뚝 끊긴 가게에서 내 고향 신촌 생각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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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월, 나는 왼쪽 가슴에 크고 하얀 무명 손수건을 달고 국민학교에 입학을 했다. (내 아버지가 아직도 소학교라고 하시듯 나 역시 국민학교가 맞다. 소학교나 국민학교나 일본식이라고 하여도 우린 그때 그렇게 불렀으므로. 물론 내 이야기가 아닌 한 초등학교라고 부르려 애는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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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 몇 안되는 내 유년의 기억 가운데 가장 또렷한 것이 1960년 4월 19일일 것이다. 전쟁 후 태어난 아이들은 많고 학교수는 적고,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누었어도 한반에 70명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싶다. 한 울타리 안에 국민학교와 뒤늦게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을 위한 공민학교가 함께 였다. 아무튼 당시엔 4월에 새학기가 시작되어 막 입학한 나는 운동장에서 ‘앞으로 나란히’, ‘옆으로 나란히’같은 유희 반 질서 교육 반의 교육을 마치고, 교실을 배정받아 책 걸상에 처음 앉아 보는 날이었다. 그날이 4월 19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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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반이었던 나는 ‘이놈아, 늦겠다! 어여 빨리 가라!’는 어머니의 채근을 뒤로 하고 학교로 향했다. 신촌 노타리 앞 큰 행길을 건너야 학교를 갈 수 있었는데, 내가 그 행길 앞에 섰을 즈음 내가 볼 수 있었던 것은 거대한 시위 행렬이었다. 연대생들이 문안(우린 그 때 사대문四大門안이라는 뜻으로 서울시내를 그렇게 불렀었다.)으로 향하는 시위 행렬이었다. 나는 그 행렬을 구경하노라고 뒤늦게 텅빈 학교를 찾았던 기억이 지금도 또렷하다.

그날 밤이든가 이튿날 저녁이든가 고등학교 다니던 동네 형 하나가 총에 맞아 죽었다는 이야기로 골목이 흉흉하였던 기억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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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항쟁, 3선 반대 시위, 교련반대 시위, 그리고 유신 후 여러 시위들과 1980년 봄 그날의 시위까지 나는 그 거리에서 돌멩이와 최루탄 냄새를 맡으며 유, 소년과 청년 시절 30여년을 보냈다. 때론 구경꾼으로 때론 그 시위대의 한 가운데서.

올들어 몇 권의 역사책들을 읽었다. 몇 권의 프랑스 혁명사와 미국사 및 미국 민중사 그리고 한국 근현대사와 일본 현대사들이 그것들인데  2018년 올 한 해가 내게 참 소중히 기억될 연유이다. 더하여 가르쳐 주는 선생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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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읽고 배우는 과정을 통해 이제껏 내가 살아오며 생각해 온 세상보는 눈(觀點) 이랄까, 믿음(信仰)이랄까, 그게 거창하다면 그저 내가 지금 사는 모습이 크게 엇나가지 않았다는 안도를 느꼈다.

그것은 또한 사람 살아온 세상, 지금 사는 세상, 앞으로 사람들이 살아갈 세상이란 결국 어제보다는 나은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내 믿음에 대한 확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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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내 믿음의 바탕은 바로 내 고향 신촌 그 거리 거리에서 만났던 내 고향 사람들일 터이다.

그렇다. 고향은 찾아가야만 하는 곳이 아니라 마음에 간직하는 곳이다. 생각날 때면 언제나 첫눈 같은 설램으로 마주하는 사람들이 기다리는 바로 그 곳.

아루바 또는 신촌.

  • 첫눈 오는 날 가게 앞에서 담은 사진들

숲길

주일 아침 아내가 교회에 간 시간에 거닌 동네 White Clay Creek 공원 숲길은 이미 늦가을이었다.

낙엽 밟는 내 발자국 소리와 풀벌레 소리, 새소리에 취한 탓이었는지 생각은 자꾸 어린 시절 신촌 안산길을 걷고 있었다. 귓속말로 사랑을 나누던 노루 두 마리가 내 발자국 소리에 놀라 튀는 통에 화들짝 안산길에서 White Clay Creek 공원 숲길로 돌아왔다.

숲이 동네 가까이 있다는 것은 참 고마운 일이다. 그 고마움을 이 나이에 깨달은 내가 이즈음 대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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