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아침

아침부터 찌는 날이다. 한 주간이 이리 긴 것은 딱히 날씨 탓만이 아니다.

아내는 의사가 minor surgery라고 했다고 거듭 강조했었다. 그저 간단한 수술일 뿐이라는 말에 그저 스쳐 지나가는 하루 일과 같은 것이거니 했었다.

주초, 아내가 수술실에 들어 가기 전에 간호원은 아주 간략하게 수술에 대해 설명했다. ‘아주 간단한 어깨 수술로 마취 후 한 시간 정도 내외의 수술 시간과 30분 정도 회복 시간이 걸릴 것이다. 수술 후 집도 의사가 수술 결과에 대해 설명할 것이다.’라고…. 간호원의 설명을 듣는 시간에 아내는 이미 마취에 취해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넉넉잡아 두 시간이라…’ 나는 대기실에서 나른한 낮잠에 빠졌었다. 수술실에 들어 간 후 한 시간이 지나면서 연신 시계에 눈이 갔다. 두 시간이 지났는데도 의사는 나타나지 않았다. 더는 앉아있지 못하고 오줌 마려운 노인이 되어 엉거주춤 대기실 안에서 서성거렸다.

두 시간 반쯤 되었을 때 내 이름을 부르며 다가 온 의사는 말했다. ‘수술은 아주 성공적이었고, 12시간 정도는 수술 후 통증이 이어질 것인데, 약이 처방될 것이고… 마취에서 깨어날려면 한 시간 정도 걸릴게고…’ 준비된 대본을 읊조리 듯 이어진 그의 말이다.

그리고 한 시간 후, 내 이름이 호명되어 들어 간 회복실에서 만난 아내의 모습에 가슴이 철렁했었다.

최근 이년 사이에 수술 후 마취에서 완전히 깨어나지 전에 보았던 장모, 장인 그리고 어머니의 낯 선 모습처럼 아내가 내게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모두 minor surgery라는 말에 대책없이 느긋했던 내 탓이었다.

긴 한 주간 시간에 비해 다행히 아내의 회복 속도는 빠르다.

이른 아침 찜통 더위를 예고하는 아침풍경이 반가웠던 까닭이다.

철부지

우리 부부는 여전히 철부지다.

이른 아침 뉴저지 Englewood로 향하는 차안에서 울린 아내의 카톡에 담긴 지인의 인사. ‘지난 밤 뉴욕에 있는 딸내미는 아무 일 없지요?’

아뿔사! 이게 뭔소리? 내 채근보다 먼저 보낸 아내의 문자에 오늘따라 유달리 빠르게 응답한 딸아이의 문자. ‘간밤에 불이 나갔을 뿐, 난 아무 일 없는데…’

휴게소에 차를 세우고 뉴스 검색을 해보니 지난 밤 맨하턴에  10시간 정도 정전사고가 났었다고… 에고 남만도 못한 부모라니…

낼모레 어깨 수술 날짜가 잡힌 아내가 춤을 배우러 가는 길, 나는 또 좋다고 운전기사로 나선 아침에 있었던 일이다.

아내가 춤 연습을 하는 동안 나는 그 동네 한바퀴를 걸어 보겠다고 나섰다. 일요일 아침 조용한 동네 모습을 눈에 담았다. 나무 위 새 없는 새집, 집 앞뜰에서 유유자적하는 두더지, 더위에 익어가는 과실 등등 부촌 분위기에 빠져 걷는데 현관문 거칠게 여는 소리와 함께 나를 향해 날아오는 목청 높은 소리 하나. ‘왜 남의 집 사진을 찍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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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또래 할망구의 거친 목소리였다. 설마 도회지 부촌 할망구여서는 아닐게다. 그저 할망구 인성 탓인 게지!

어릴 적 남의 집 초인종 누르고 도망가던 때가 떠올라 웃으며 동네를 벗어나 큰 길로 나서다. 갈라진 아스팔트를 가냘픈 몸으로 가려주는 꽃들이 부촌 할망구보다 엄청 더 부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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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우연히 마주친 산책길이라니! 왈 오늘의 득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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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성 못된 부촌 할망구는 어쩜 오늘의 천사였는지도 모를 일. 산책길을 벗어나 춤 연습 하는 아내에게 돌아가는 길에서  만난 작은 것들도 모두 다 아름다웠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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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배움에 진지했지만 선생님과 동작이 같은 때는 거의 없었다. 아마 앞으로도 두어 차례 오늘은 반복되어야 할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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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걷노라고, 아내는 춤연습으로 땀을 흘리고 맞은 정갈한 밥상은 오늘 누린 즐거움 가운데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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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으로 내려오는 길에 들린 필라델피아 한국식품점에서 만난 정말 반가운 얼굴 하나. 지지난 달 다녀왔다는 우리들의 고향, 서울 신촌 이야기를 들려 주시는 강장로님. 그와 내가 신촌에서 가까이 지내던 때는 그의 나이 사십 대, 나는 이십 대. 오늘 그 이는 구십을 꼽고 나는 칠십을 꼽았다. 사관학교 출신 아직도 꼿꼿한 그가 말했다. ‘감사한 맘으로 잠들고 못 일어나 그냥 갈 수 있다면…’ 사진 찍기 몹시 싫어하는 내가 아내의 명령에 아무 저항없이 순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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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찬과 국거리 몇 가지 부모님께 전해 드리고, 과일 몇 점 양로원에 누워 계신 장인 입에 넣어 드리고  집에 이르니 오늘 운전거리 300마일.

DSC06617올 추석 한인잔치에서 춤을 추겠다는 아내는 오늘 아침까지 물었었다. 강선생님은 흥춤을 권하시는데 혹시라도 그 무렵에… 그래서 살풀이 아니면 한풀이 춤이 어떨까?

웃으며 내가 한 응답.

‘이 사람아! 그 때까지 돌아가실 이 없네!’

그리고 내 맘속으로 한 말. ‘한풀이건 살풀이건 다 흥에 닿아야 하는 것을…’

삶과 죽음이 다 흥에 닿아 있다면… 우리가 아직 철부지 소리 들어도…

감사에

하늘은 하루에도 숱하게 얼굴을 바꾼다. 오늘도 마찬가지.

일터에서 틈틈이 하늘을 바라보다 떠오른 옛 생각 하나.

정동 세실극장이었다.  이강백의 연극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할 사람 같소?’를 보고 나선 극장 밖엔 장대비가 내리고 있었다.

1978년, 암울했지만 꿈 많았던 시절이었다.

그제나 지금이나 하늘은 변화무쌍이다.

변덕에 이르면 나 역시 하늘 못지 않다.

그래도 이 나이에 문득 하늘 보며 던져보는 질문. ‘내가 날씨에 따라 변할 사람 같소?’

감사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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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에

어제 밤 On the Basis of Sex를 보다. 쉴 때 보라며 큰 처남이 권한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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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대법원 대법관인 Ruth Bader Ginsburg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보고 난 후 첫 생각, 때론 처남 녀석이 참 기특하고 고맙다. 아직 환갑 전이니 어른 취급하긴 이르고…

‘On the Basis of Sex 성별에 따라’는 ‘세상을 바꾼 변호인’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었단다.

영화 속 Ruth의 남편 Martin이 한 말 ; ‘법이란 결코 완성된 것이 아니라 진행 중인 일이며 앞으로도 계속 (변화)될 것이다. The law is never finished. It is a work in progress, and ever will be.’

또 하나 머리에 남은 Ruth의 말 ; ‘우리는 이 국가의 변화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 변화는 이 법정의 허가 없이도 이미 일어난 일이다.  We’re not asking you to change the country. That’s already happened without any court’s permission.’

성에 관계없이 인간은 누구나 어느 시대이건 동등하고 평등한 권리를 누려야 한다는 Ruth Bader Ginsburg의 삶의 족적은 그의 동료이자 남편인 Martin과 부조리함 앞에서 그 시대 상식을 가진 인간의 용기를 대변하는 듯한 그녀의 딸 Jane이 함께 그렸다.

개개인의 삶이나 하루 하루 뉴스들에 빠져 세상을 바라 보노라면 변화는 참으로 더딘 듯 하다만, 사람이 모여 사는 모습은 어느 순간 급류를 탄 물살처럼 빠르게 변하기도 한다.

우리 시대 공동체들이 앓고 있는 문제들을 지난 세월 변화해 온 과정 위에 놓고 들여다 보노라면 내일은 늘 긍정일 수 밖에 없다.

나이 들수록 진보에 한 발 걸치고 사는게 좋다.

일요일 아침 개장 시간에 맞춰 찾은 Longwood Gardens은 정말 나만을 위한 정원이었다. 두어 시간 걷기 딱 좋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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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안에 있는 Green Wall – 그 벽의 모든 문들은 화장실. 뒷간 경험이 또렷한 내 세대들이 곱씹어야 할… 진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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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

애초 세운 계획을 잊을 정도로 여러 번 생각이 바뀌었다. 모처럼 맞는 주중 휴일, 여느 해 같았다면 과감히 나흘 연휴를 즐길 법도 했다. 내 뜻 세우지 말아 할 나이에 이른건 노부모 뿐만 아닌 내 이야기다.

가까운 동네 공원을 찾아 걷다가 저녁식사나 함께 하자고 아이들에게 제안했었다. 허나 일기예보는 그 계획조차 받쳐 주지 않았다.

하여 선택한 마지막 계획, 그저 먹고 쉬는 하루를 보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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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며느리, 딸과 함께 홍합, 새우, 게를 먹고 아이스크림을 즐기다 다시 세운 계획, 간단한 바베큐 잔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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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랴부랴 장을 보고 누이네들과 부모님 모시고 저녁을 즐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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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신 못하시는 장인에게는 식사 후에 아들녀석이 과자 하나 입에 물려 드리다.

십 수년 만에 딸과 함께 집 앞 공원에서 펼쳐 진 불꽃놀이 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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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다는 거, 참 별거 아니다.

그저 맘 가는대로 시간을 맡길 수 있음은 지금 내가 누리는 큰 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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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일기예보는 완벽히 빗나갔다. 사람살이 계획을 바꾸게 하는 게 비단 일기예보 뿐이랴!)

2019. 독립기념일에

정원

숲길만 찾아 다니지 말고 꽃길도 좀 걸어 보란 뜻이었는지 모를 일이다만, 아내가 Longwood gardens membership card를 선사했다.

이젠 Longwood garden은 마음만 먹으면 일년 동안 공짜로 드나들 수 있는 내 정원이 된 셈이다.

아내가 교회 가는 시간에 맞추어 나는 내 정원을 걸었다. 집에서 20여분 거리, 드라이브만으로도 쉼을 만끽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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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긋하게 천천히 느린 걸음으로 쉼을 느끼며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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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렴, 걷기엔 잘 가꾸어진 꽃길보다 들길과 숲길이 제 격이다. 단풍나무 숲길에 빠지다. 이 길을 아내와 내 아이들과 함께 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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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 맥주와 protein bar로 땀을 식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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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정원을 노니는 산책객들 중 젊은이들 보다 노부부들에게 자꾸 눈길이 가는 까닭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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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다 내 연식 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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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얄석에 앉아 즐긴 분수쇼는 정원 주인이 누리는 덤일 뿐.

 

유월, 더운 날에

일터의 환경을 바꾼 덕인지 올 여름엔 더위가 매우 더디 찾아 왔다. 스팀 열기와 함께 해야 하는 세탁소 여름을 수십 년  보낸 탓에 내 마른 몸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 없다.

올 봄 가게를 이전하며 보일러를 사용하면서도 에어컨이 작동할 수 있도록 꾸몄더니 올 여름 호사를 누리고 있다.

바쁜 하루 일과를 시작하려는데 잠자리 한 마리 세탁소 카운터 위에서 늦잠에 빠져 있었다. 더위는 게으름을 허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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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오후 한바탕 소나기가 더위를 식히다.

차마 사진 운운하기엔 부끄러운 유치원 아동이지만 이즈음 깨달은 두 가지.

나는 렌즈를 통해 보고 싶은 것들만 본다는 것과 그나마 내가 보는 모든 것들은 빛이 결정하고 있다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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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전 병원 응급실로 실려간 장인을 기다리는 요양원 앞뜰에서 이어진 깨달음 하나.

삶도 마찬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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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 앞뜰  고목 밑둥은 새 잎을 낳다.

6/ 28/ 19

용사(勇士)

달포 전 일이다. 새벽 세 시가 조금 넘은 시간 누이의 다급한 목소리에 잠을 깻었다. 어머니가 잠자리에서 일어 나시다 넘어져 머리를 다쳐 병원엘 가야하니 빨리 와 달라는 전화였다.

어머니와 누이는 병원으로 가고, 아버지와 나는 새벽 시간을 함께 했다. 머리가 찢어져 제법 많이 피를 흘리신 상황을 설명하시며 아버지는 울음을 그치지 않으셨다. 나는 차갑게 말했었다. ‘아버지, 지금 우실 연세는 아니짆아요. 행여 어머니가 돌아가신다 한들 아버지가 우시면 안되지!’

다행히 어머니는 머리를 몇 바늘 꿰맨 후 집으로 돌아오셨고, 아버지는 그 날 하루 내 전화를 받지 않으셨다.

어머니는 이즈음 없던 일도 만들어 내시고, 조금 전 일과 옛 일을 뒤섞기도 하고, 뻔한 일도 난 모른다고 딱 잡아 떼시기도 한다. 이런 생소한 모습의 어머니와 하루 종일 함께 하시는 아버지에게 난 여전히 차갑게 다가가곤 한다.

지난 달 생신상을 받으신 아버지는 1926년생이다.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고, 소학교 4학년으로 교육은 끝냈고, 일본 탄광 노동과 6.25 전쟁 참전 그리고 다리 한 쪽 저는 상이군인 – 내 기억에 없는 세월 이야기들이 내 기억 속 시절 이야기들 보다 더욱 손에 잡힐 만큼 많이 들었던 아버지의 이야기.

당신은 이따금 그렇지 않다고 손을 내젓곤 하시지만 평생 그저 여리고 착하게 살아오신 내 아버지가 영문으로 기록한 이야기가 담긴 책을 어제 6월 25일에 받았다.

누구의 도움없이 영문 원고를 쓰시고 Amazon을 통해 스스로 발간하신 <Korean Peninsula and my Experience>다.

아직 안경없이 인터넷 검색을 하시고, 하루에 당근 세 토막 천천히 씹어 즐기시는 튼튼한 치아와 오늘 또 다시 내가 새롭게 할 수 있는 뭘까? 고민하시는 내 아버지.

그렇다. 아버지는 여전히 자랑스런 대한민국 화랑무공훈장이 빛나는 용사다.

용사 앞에 차가운 적 하나 있어야 마땅한 일이고.

Amazon 책 보기

아버지 책표지

과정(過程)

국민학교 몇 학년 때 였던가? 아마도 여름방학을 앞 둔 이 맘 때 쯤이었을게다. 신촌 신영극장 뒷길을 걷다 바라 본 하늘엔 하얀 뭉게구름들이 포근한 솜처럼 피어 있었다. 입 헤벌리고 그 하늘을 쳐다보며 걷는데 벌이 내 눈가를 쏘았었다. 그야말로 눈탱이가 밤탱이 되었던 그 여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어제 오후 가게 밖 하늘 풍경은 딱 그 때였다. 1960년대 어느 여름 신촌 그 하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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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게 문 닫고 돌아오는 길, Curtis Mill Park 숲길을 걷다. 새소리 물소리, 길가 강아지풀에 담긴 옛 생각들을 잡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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놓아 주어야 할 것이 어찌 잡은 물고기 뿐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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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하루 치매끼가 더해 가시는 노인들과 이제 막 신혼을 꾸미고 인사차 들린 처조카 내외를 보며  든 생각 하나.

무릇 삶은 놓아 주어야 할 과정의 연속.

결혼 기념일

‘이젠 해방되는 해인가?” 식사 주문을 마친 아내가 던진 말이다.

36년이라! 내가 겪지 않았던 세월을 대변하는 시간을 명시하는 세월. 그저 긴 시간을 표현하는 말. 아내와 함께 한 세월이 그만큼 흘렀다.

만나 눈 번쩍했던 시간까지 따져보니 마흔 한해다.

그래! 이젠 모든 것에서 서로 해방된 관계를 시작할 나이다.

36주년 되는 날, 우리 가게 손님에게 받은 최고의 찬사.

<God continues to bless us through you. Yours is a great work offering such beauty and goodness.>

조촐하게. 해방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