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에

잠자리에 들기 전 습관으로 온라인 신문들을 훑다가 눈에 뜨인 말.

“우연은 때로 인생의 설계를 뒤흔들어 놓지만 결국 그것을 다시 정돈하고 바로잡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인간의 의지가 개입할 수 있는 지점이 바로 그곳이다. 그러고 보면 내가 계획한 것이든, 우연이 만든 것이든, 고정된 운명이란 없는 셈이다. 그러니 어떤 상황, 어떤 경우에서도 우리가 할 일은 여전히 많다.”

시사평론가 유창선이라는 이가 한 말이란다. 난 그가 누구인지 잘 모른다. 평론가라는 직업에 그리 우호적이지 못한 나는 시사평론가란 이들의 말엔 더더욱 귀 기울이지 않는 편이다.

그의 근황을 전하는 신문기사이다.

<그는 올해 초 뇌종양 진단을 받았다. 지난 2월 서울대병원에서 종양 제거 수술을 받은 뒤 현재까지 병원에서 재활 중이다. 합병증으로 찾아온 폐렴과 어지럼증으로 인한 고비를 넘겼지만, 후유증으로 마비된 혀는 회복이 더뎠다. 모든 방송을 그만둬야 했다. 아내와의 여행은 여전히 계획에 머물러 있다.>

그가 ‘인간의 의지가 개입할 수 있는 지점’을 찾게 된 것은 바로 투병을 통해서이다.

개인으로서 또는  집단이나 나아가 국가의 일원인 시민으로서, 진정 의지를 갖고 온 몸을 던져 해야 할 일을 찾아 나설 상황이나 경우란  바로 자신이나 속한 집단 또는 국가가 심히 앓을 때이다.

개인의 삶이나 역사에 있어 혁명적 변곡은 대개의 경우 우연에서 비롯되지 않을까?

그가 세웠다는 아내와 함께 하는 꿈이 이루어지길 빌며…

책씻이

온종일 가을비 추적이다.

게으르기 딱 좋은 일요일, 책 한권 읽다. 조일준이 쓴 <이주하는 인간, 호모 미그란스>이다.

제 1부 <인류의 이주, 그 변천과 흥망의 기록>은 딱히 이민사라기보다는 인류 통사에 가까워 흥미진진하게 한눈에 읽었다.

제 2부 <국제 이주, 여전한 문제들>은 오늘을 사는 인류 앞에 놓인 이민과 난민 문제를 다루는데 그 시각이 참 따듯하다. 하여 저자이자 기자인 조일준이 쓴 기사들을 찾아 읽다.

공동체가 <집단기억>들을 어떻게 생성하고 공유해야 할까? 라는 물음을 갖다.

책을 덮으며 깊게 남은 한 줄은 저자가 인용한 아론 브레그먼의 <6일 전쟁 50년의 점령>에 나오는 말.

<역사 서술의 초점이 단 한번만이라도 개체의 운명에 맞춰질 수 있다면 민족의 대이동은 개인들의 피눈물로 얼룩지고 고통과 한이 어린 대하 드라마였을 것.>

책씻이로 홀로 한 잔 하다.

아침 신문기사를 훑다 깨달은 부모님 결혼 73주년이 생각나 노인들께 전화, 재롱을 부리다. 내친김에  노인들 수발에 늙지 못하는 누이에게도 전화 한 통으로 미안함을 씻다.

모처럼 서울 큰 처남에게도 전화 한 통 넣어 흰소리 낄낄거리며 함께 웃다.

이 가을비 그치면 서리가 내릴 터.

아무렴 이주하는 인간들에게 필요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따스함일 터이니.

가을 밤

가을이 깊어 가는 화창한 토요일 오후, 아내와 함께 숲길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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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흠… 나무들이 내쉬는 숨이 이 숲을 채우고 있다는 말이렸다!’ 아내는 어디서나 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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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어 시간 산책으로 한 주간 노동의 피로를 씻다. 날다 지친 잠자리 한 마리 내 등에 업혀 함께 걷다.

저녁 나절, 육영수가 지은 <혁명의 배반, 저항의 역사>를 훑어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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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에 대한 주류해석이 가부장적 사고방식의 산물이었다는 사실을 페미니스트 입장에서 재성찰하고….’ 책을 소개하는 저자의 말이다.

그리고 그가 에필로그에 남긴 소명과 소망.

‘일상생활정치에서 자발적으로 왕따 당하려는 용기와 독립심은 나의 특권이며 역사적 소명이다.’

‘공장 바깥에 있는 노동자, 학교 바깥에 있는 학생, 감옥 바깥에서 생산되는 품행방정 남녀들, 국가 바깥에 있는 이주노동자와 다문화가정, 이들 모두에게 혁명은 실패나 성공으로 마감되는 권력다툼이 아니라 계속되어야 할 열정 그 자체이다.’

‘너와 나의 또 다른 시작은 일상적으로 가볍지만 정치적으로 진지한 저항의 박자에 실려 비누거품처럼 온 세상에 번질 것이다. 결론적으로 권력의 여의주를 움켜진 악마가 늙을수록 뻔뻔하고 노회해지는 것에 반비례해, 우리의 연대와 투쟁은 뱀처럼 매끄럽고 모꼬지처럼 흥겹고 늠름할 것이다.’

한국 여의도 광장을 비롯해 곳곳에서 실패와 성공을 넘어 열정 그 자체로 전혀 새로운 혁명의 역사를 쓰고 있는 대한민국의 시민들을 생각하며…

가을 밤에.

평등에

봉준호의 영화 기생충을 보다.

한인들이 많이 사는 대도시에서 상영한다는 소식을 듣고 보게 되었다. 영화 한편 보자고 몇 시간을 달려 도시를 찾아갈 만큼 광(狂)이 아니므로 그저 집에서 보았다. 이럴 때 도움을 주는 친구는 큰처남이다. 내가 ‘보고 싶은 영화가 있다’하면 그는 늘 그 길을 열어준다. 이 또한 내 복이다.

영화를 본 후 떠올린 소설들이 있다. 1950대 소설인 손창섭의 ‘잉여인간(剩餘人間)’과 1970년대 소설 조세희의 ‘난쟁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다.

두 소설과 영화의 같고 다른 점들을 생각하며 흘러 간 반세기 시간을 덧붙여 보았다.

그 세월 동안 빠르게 변한 것들도 무수히 많지만, 어쩜 그리 예나 지금이나 똑같을까?라는  탄식이 일 정도로 변하지 않았거나 더디게 변한 것들을 생각케 한 영화였다.

‘냄새’ 와 ‘계단’으로 상징되는 불평등한 사회 – 그 불평등의 간격이나 폭의 크기는 접어 두더라도- 내가 코흘리던 옛 시절이나 노년의 문턱에 서 있는 지금이나 변함 없다.

영화 기생충 속 ‘박사장’의 모습은 이즈음 내가 접하는 뉴스 속 권력자 또는 가진 자들의 모습에 비하면 차라리 1950년대 인물처럼 낭만적이다. 이제 겨우 영화 개봉일에서 몇 달 지났을 뿐인데….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또 한가지. ‘냄새’로 인한 차별을 받지 않은 세상, ‘계단’이 없는 평평한 세상을 꿈꾸는 이들이 언제 어느 곳에나 살고 있다는…

지하실의 사내들이 사람대접 받으며 빛을 함께 쐬며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꾸는. 딱히 밝은 햇빛만이 아닐지라도.

*** 떠오르는 해를 보며 가게 문을 열던 게 엊그제인데, 어느새 가로등불과 달빛 아래 가게 문을 열다.

단풍놀이

알고 싶은 것을 알려주는 선생이 있다는 게 얼마나 기쁜 일인지! 게다가 알고  난 후, 맛 본 기쁨이 가늠 못 할 정도로 클 때 이어지는 감사는 또 얼마나 큰지!

몇 주 전 ‘이 맘 때 가을을 즐길 만한 가까운 곳 추천 좀 해 주세요.’라는 내 부탁에 이길영 선생님은 흔쾌히 주저없이 몇 군데를 소개해 주셨다. 그 중엔  세 시간 정도 운전해야 하지만 으뜸으로 치신 뉴욕주에 있는 Minnewaska State Park가 있었다.

이선생께서는 세 시간이라고 하셨지만 내가 사는 곳과 내 운전 실력으로 따져보니 네 시간에서 네 시간 반은 족히 걸릴 거리였다.

구글링을 통해 살펴보니 여간 매력적인 곳이 아니었다. 게다가 딸아이와 함께 가을 길을 걸어 볼 생각을 하니 딱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맨하턴 도시 생활을 하는 아이에게 좋은 선물이 되겠다는 뜻이었는데,  문제는 그게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을 뿐.

아내는 즉답을 했고 이틀을 기다려 얻은 딸아이의 응답 역시 ‘허락하마!’였다.

어제 어머니는 ‘그래, 먼 길 다녀 온다고…’하시며 노자돈 백불을 내미셨다.

그렇게 다녀 온 일박 이일 가을 단풍놀이.

두어 시간 눈이 닿는 곳마다 가득 찬 가을 길을 달려 이르른 공원에서 세 시간여 아내와 딸과 함께 걷던 가을 길은 그저 아름답고 황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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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나이 또래에 겪을 수 있는 아픔을 잘 이겨낸 딸아이와 이제 사십 년을 바라보는 함께 한 세월 그 숱한 지긋지긋한 이야기들을 낙엽에 묻고 언제나 밝은 아내와 함께 걸은 가을 길, 그저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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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다녀왔다는 내 전화 인사에 어머니는 ‘일찍 집에 들어 와서 좋구나!’ 하셨다.

그래 이길영 선생님께 특별히 드리는 감사이다.

나를 지탱해주는 세 여자, 어머니 아내 그리고 딸을 뒤쫓아 걷는 가을길에서 느낀 그 아름답고 황홀한 시간들에 대하여.

번잡한 아울렛 상가에서 아내와 딸을 뒤쫓으며 맛 본 흡족함은 덤으로 얻은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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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에

살며 새로운 것들을 보여 주거나 알려 주고 가르쳐 주는 이들이 곁에 있음은 큰 축복이다. 늦은 밤 책장을 넘기다 든 생각이다.

함께 책을 읽고 생각을 나누어 보자는 이야기가 나온 것은 어쩌면 지극히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사건(말)을 바라보는 서로 다른 생각의 차이가 컸기 때문이었다. (어쩜 이 생각 역시 나 혼자 만의 것일 수도 있겠다만…)

그렇게 함께 읽기로 한 첫 번 째 책이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이다. 솔직히 내 관심을 크게 끄는 주제는 아니었다.

허나 시간에 따라 늙어가는 몸은 어쩔 수 없더라도, 몰랐던 것들을 새로 만나고 아는 기쁨으로 인해 생각하는 맘은 때로 젊어 질 수도 있는 법. 그 생각으로 넘기던 책장이었다.

<사회정의를 위한 혁명적 운동이 그러했듯이, 우리는 해결책을 제시하기보다 문제를 규정하는 데 더 능하다.>

책장을 넘기다 번뜩 이즈음 세상 일들을 다시 생각케 한 배움이다.

결혼과 가정에 대한 이 책의 저자 Bell Hooks의 선언에 절로 고개를 끄덕이는 나는 어쩜 이미 페미니스트 대열속에 서 있는 것은 아닐지?

<평등과 존중이라는 원칙 , 그리고 동반적 관계를 실현하고 오래 지속하려면 상호 만족과 성장이 필수라는 믿음의 원칙 위에 세운 동료애적 관계의 가치를 알리는 데 힘쓸 것이다.>

필라세사모 벗들에게 감사를.

눈물에

어머니는 늘 부지런하셨다. 추석이 지나고 찬바람이 일기 전, 이 맘 때면 방문 창호지와 문풍지를 가셨다. 어머니가 연탄광을 정리하고  김장 독을 점검하는 일이 끝날 때이면 김장철이 다가오곤 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우리 네 남매 계절 옷정리도 오로지 어머니 몫이었다

딱히 내 어머니를 흉내 내자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머니처럼 부지런 하지도 않거니와 아버지처럼 꼼꼼하지도 못한 내가 어제 오늘 가게와 집, 계절 정리와 맞이로 시간을 보냈다. 애초 아내와 나는 어제 근사한 저녁을 보낼 요량이었다. 시간 계산이 오락가락하시지만 여전히 부지런하신 어머니 가 어제 급작스럽게 우리 부부의 계획을 바꾸어 주셨다.

그렇게 주말 이틀을 보내고, 일요일 늦은 밤 컴퓨터 모니터를 마주하고 앉아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을 흘린다.

그저 감사다. 그래 흐르는 눈물이었다. 모니터에는 한국 서초동에서 있었던 촛불집회 모습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뉴스들은 반반의 갈등을 부추기고, 원래 그런 이들은 그렇다 치다라도 이른바 진보연하던 이들 중 몇몇은 언제나 그렇듯 제 얼굴 드러내는 일에 충실하고….

그러나 역사란 늘 즉흥과 저항을 무기로 한, 그저 하루 걱정에 매인 사람들의 외침에 따라 흘러 왔다는 생각은 내 눈물 끝에 얻은 생각이다.

그래 또 감사다.

아침나절 내 가게 손님들에게 이 계절에 대한 감사 편지를 보냈더니 손님 하나가 제법 긴 답신을 보내와  또 눈물이다.

그의 말이다.

“너의 계절에 대한 감사에 꼭 덧붙일 또 다른 감사가 있다. 최근 몇달 동안 우리들이 살고 있는 Newark 날씨에 대한 것이다. 우리들이 아무리 더웠다한들 남쪽 볼티모어나 워싱톤 만큼 덥지 않았고, 여타의 지역처럼 허리케인 토네이도 홍수나 폭우, 거센 바람들도 겪지 않았다. 이건 사계절을 누리는 감사에 마땅히 덧붙일 일이다.”

그래 무릇 감사란 바꾸어진 환경에서 드릴 수 있어야 참 감사다. 내가 사는 NewarK이 볼티모아나 워싱톤 보다 더워도, 홍수 폭우 토네이도 거센 바람을 겪어도… 사계절을 누릴 수 없어도…

어머니의 부지런함이 부질없던 때는 없다. 그렇게 모든 감사가 부질없던 때는 없다.

어머니의 부지런함은 늘 자신을 뺀 가족 사랑이었으므로.

가족에서 이웃으로 뻗어 나가는  촛불에 흐르는 눈물은 그저 마땅할 뿐.

어제 함께 못한, 지금 가까운 이웃들 사진을 보며 눈물을 그치고 웃음을.

혼자 걷기엔 숲길이 딱 제 격이다. 동네 Middle Run Valley 숲길을 걷다. 나무 사이를 헤집고 들어오는 햇살을 타고 가을이 숲속에 내려 앉았다. 아직 미련이 많아 떠나지 못하고 있는 여름도 그 숲속에 함께 했다. 두어 시간 숲길을 걷는 사이에 온몸이 땀으로 흥건하다. 일주일 쌓인 노동의 피로와 이런저런 삶의 염려들을 땀과 함께 숲속에 내려 놓다. 오늘따라 인적이 매우 드물어 숲속을 홀로 향유한 즐거움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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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에 아내와 함께 필라 나들이를 다녀오다. 모국의 조국 정국에 맞추어 뜻 맞는 이들이 만든 행사에 머릿수 하나라도 채울 겸 해서 나선 길이다. 즉흥적으로 벌인 일이건만 준비들을 참 많이 했다. 생각이 엇비슷한 이들의 얼굴을 보는 일만으로도 살아있는 즐거움이다. 그 즐거움으로 또 한 주간의 삶을 맞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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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름

미풍에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는 가을 아침 느긋하게 즐기는 커피향이 참 좋다.

어제 오후 모처럼 아들 내외와 함께 샤핑도 하고 저녁식사도 함께 즐겼다. 한가로운 시골길을 한 시간여 달려 닿은 Lancaster, 비록 자주는 아니어도 많이 왔던 곳인데 어제는 아주 새로웠다. 내 뜻이 아니라 아들녀석이 앞장 서 가는 길을 쫓아 다녀서 일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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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운타운에 있는 작은 한식당에서 1970년대 남도 작은 소읍에서 들어섰던 다방을 떠올렸다. 음식 맛이 기대 이상이었다. 한식을 무엇이나 잘 먹는 며늘아이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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엊저녁 생각에 빠져 나오지 못한 채 훑어보는 뉴스들,  200만과 5만 숫자 논쟁이라는 허접 쓰레기 기사가 윗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어제 오후, 아내와 아이들이 옷가게 순례를 하는 동안 나는 상가 벤치에 앉아 구름이 노는 모양에 빠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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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돌아오는 길, 하늘에선 마른 번개와 천둥이 이어졋었다.

때론 게으른 일요일 아침이 정말 좋다.

흥춤에

엊그제 저녁 밥상을 나누다 아내가 내게 건넨 부탁이었다. ‘춤추기 전에 보는 사람들에게 춤에 대한 설명을 해 줬으면 좋겠는데….’

여기 저기 인터넷 자료들을 찾아봐도 ‘흥춤’에 대한 딱히 좋은 설명을 찾지 못했으니, 간략하게 한 두어 줄 정도로 안내 글을 써보라는 부탁 아닌 명령이었다.

그렇게 떠오른 내 할아버지 생각이다. 막걸리 몇 순배에 불콰해진 얼굴로 일어나 두 팔 벌려 으쓱으쓱 느린 몸동작으로 그 날의 즐거움을 맘껏 토해 내셨던 내 할아버지, 그래 흥이었다. 술 좋아하시던 내 할아버지의 흥은 술 한 방울 입에 대시지 않은 내 아버지와 어머니의 한으로 이어졌고….

그 생각으로 두어 줄 써 본 ‘흥춤’에 대한 내 생각.

<흥춤이란 신이 나서 추는 춤이라는 뜻입니다.

흥춤을 추던 옛 한국인들은 그다지 흥겹지 않은 삶을 살았던 사람들이랍니다. 가난에 허덕였고, 꿈꾸었던 일들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 하루 하루를 이어가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흥춤을 추며 어렵고 힘든 현실을 꿋꿋히 이겨내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이어져 내려 온 춤이 바로 흥춤이랍니다.

“Heung-choom (Joy dance) means “a dance in the excess of mirth or joy.”

Korean people in the old days who danced this dance were those who didn’t live very joyful lives. They struggled in poverty and lived in difficult lives in which their dreams never happened. But they withstood hardship and pain in their everyday lives with dancing “Heung-choom.” The tradition of the dance has been handed down like that.>

딱히 한국인이라고 한정 지을 일도 아니다. 그저 삶이란 한과 흥이 어우러져 이어 가는 게 아닐까?

지난 일요일에 걸었던 노란 가을 길에 대한 흥을 못잊어 오늘 아내와 함께 다시 걸었다. 겨우 한 주간 사이 노란색들은 누렇게 변해 가고 있었다.DSC07262 DSC07661 DSC07664 DSC07666 DSC07671 DSC07672 DSC07683 DSC07686 DSC07687 DSC07690 DSC07699 DSC07707

흥으로 살던 내 할아버지에게도 쌓였던 한들이 많았을 터이고, 한 많던 내 어머니 아버지에게도 흥노래 부르던 시절도 많았나니.

그렇게 또 가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