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칭에

아버지가 사뭇 진지하고 심각한 어조로 내 이름을 부르셨다. 우선 나를 부르는 호칭이 평소와 달랐다. 통상 즐겨 쓰시는 ‘아범’, ‘애비’도 아니고, 기분 좋으실 때 부르는 ‘어이 김영근!’도 아니었다. 오늘 아버지는 ‘영근아!’라고 말씀을 시작하셨다. 그렇게 이어진 아버지 이야기를 다 듣기도 전에 나는 웃고 말았다. 세상 둘도 없는 말씀을 하실 듯이 나를 부르신 아버지가 하신 말씀은 미안하다는 것이었는데 나는 그게 또 미안해서 웃고 말았던 것이다.

아버지의 말씀보다 여운이 가시지 않은 것은 ‘영근아!’라는 호칭이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를 부를 때 ‘영근아!’라고 하는 이들이란 지금은 아버지 어머니 딱 두 분 뿐이다. 물론 가게 손님들이나 여기서 살며 알게 된 이들이 ‘Young’이라고 나를 부르지만  ‘영근아!’와는 사뭇 다르다.

나를 ‘영근아!’라고 부르는 친구들과는 시간과 공간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어쩌면 내가 그들을 찾아가지 않는 한, 더는 나를 ‘영근아!’라고 부를 이를 만날 수는 없지 않을까?

그러고보니 아무리 백세 시대라 하여도 내가 보낸 시간들도 결코 만만한 것은 아니다.

그런 마음을 다 지우지 못한 채 난민과 이민에 대한 책장을 넘기다  눈에 밟힌 글귀 하나.

<사람은 나면서부터 어디든 옮겨 다닐 수 있고 자기가 살고 싶은 곳에서 살 수 있다. 누구든 살던 곳에서 자유롭게 ‘떠날’ 권리, 살던 곳에서 강제로 ‘쫓겨나지 않을’ 권리, 새 삶터에서 ‘정착할’ 권리, 그리고 살던 곳으로 안전하게 ‘돌아 올’ 권리가 있다. 또 이주와 정착 과정에서 국제사회가 여러 협약으로 인정하는 기본적 ‘인권을 보장받을’ 권리도 있다. 오늘날 이런 권리가 어떤 이유에서든 원칙적으로 보장되지 않는 나라는 폐쇄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사회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글쓴 이의 주장에 시간을 하나 덧붙인다면 우리는 영원히 폐쇄적이고 시대착오적인 사회를 살다 가는 것은 아닐까?

‘영근아! 이 짜샤!…’ 그 흘러간 저쪽 세월에 잠시 빠져버린 밤에.

숲길

가을이 편히 쉬고 있는 숲길을 걸었다. 먼 길 걸어와 노곤한 몸 따뜻한 온돌에 누인 듯 가을은 그렇게 쉬고 있었다. 이따금 이는 소슬바람과 내 발자국 소리가 가을을 깨곤 했지만 숲은 이미 가을을 깊게 품고 있었다.

횡재였다. 집 가까이 새로운 산책길을 찾은 오늘 내 운세다. 숲길에 홀려 걷다 보니 지나쳤던지 오랜만에 긴 낮잠도 즐겼다.

김진균이 쓴 ‘죽음과 부활의 신학’을 만지작 거리다 책장을 덮었다.

아침 나절 찾아 뵌 어머니는 넋 나간 눈길로 중얼거리셨다. ‘왜 이리 안 데려 가신다니…’.

아버지는 우리 네 남매 전화번호만 달랑 저장하고 있는 아이폰을 목에 걸었다 어깨에 걸었다 하시며 ‘빨리 받지를 못해요…’를 반복하셨다.

햇볕 잘 드는 창가에 놓인 쟁반에는 자른 사과 조각들이 마르고 있었다. 삐뚤빼둘 도무지 어느 한군데도 가지런한 곳 없는 조각들도 보아 아버지 솜씨였다. ‘아이고, 우리 아버지가 사과도 다 깍아서 말리시나?’하는 내 소리에 아버지는 나쁜 짓 하다 걸린 아이처럼 작은 소리로 말씀하셨다. ‘마른 사과 혹시 네 어머니가 자실까해서…’

가을이 쉬는 계절이다.

깨어날 봄을 믿으며… 숲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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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웅에

기러기 떼

먼 길 떠나는 아침

어제처럼 일을 시작하다.

배웅이 딱히

서러운 것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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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에

이즈음 하루 노동이 끝날 무렵 바라보는 하늘은 황홀하다. 하늘을 맘에 담는 내게 소로우(Henry David Thoreau)는 축복받은 삶이란다.  내 몸짓이 비록 흉내일지언정.  이미 축복이다.

<숱한 변혁들이 세상을 뒤흔들어도, 황혼 무렵 서쪽 하늘 처럼 순수하고 고요한 것을 매일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축복받은 사람일지니…( The man is blessed who every day is permitted to behold anything so pure and serene as the western sky at sunset, while revolutions vex the world. – Journal 12/27/1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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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

늦가을 비 내리어

마른 나무잎 다 떨구난 저녁

하늘도 미안했는지

제 얼굴에 단풍 물 드리다.

  1. 1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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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安息)에

일요일 오후, 아내와 함께 꽃과 대나무 향연을 펼친다는 늦가을 정원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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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꽃내음을 타고 떠오른 오래 전 친구 얼굴 하나. 고등학교 시절 원예반 활동을 하던 친구 K다. 키 작은 내가 친구하기엔 버거울 만큼 키도 훌쩍 컷거니와 늘 맑은 얼굴에 말수도 적고, 말도 느릿느릿 몇 살 터울 형같은 친구였다. 그가 속한 원예반 친구들은 국화를 참 멋지게 키우곤 했다. 당시에 이 맘 때 쯤이면 열리곤 하던 전국 국화 경연대회에서 원예반 친구들은 대상을 거머쥐곤 했었다. 원예반 여러 친구들이 함께 이룬 일일터임이 분명하지만 내 기억속엔 국화 하면 그 친구 K가 떠오르곤 한다. 옛 친구 얼굴 하나 떠올려 그 시절을 추억하는 일만으로도 오늘 산책은 그저 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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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salvia 꽃잎을 보며 말했다. ‘이 사루비아 우리 많이 먹었지? 참 달았는데…’ 사루비아, 아카시아, 까마중… 개미 똥꼬 까지. 지금처럼 복잡하고 까탈스럽지 않았던 시절 이야기로 오랜만에 이어진 손 잡고 늦가을 길을 느긋하게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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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이른 아침에 눈이 뜨여 손에 들었던 책 하나. 윤명숙이 쓴 <조선인 군위안부와 일본군 위안소제도>.

책을 쓴 윤명숙은 조선인 위안부 한 사람 한 사람 그 사람 마다 태어난 후 겪어낸 저마다의 이야기에 촛점을 맞추어 당시의 제도와 일제 식민주의의 폭력성을 들추어 나간다.

추억이란 결국 사람인 내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사람 얼굴 하나 떠올리는 일 아닐까?

역사 역시 뭐 거창한 게 아닐게다. 그 시절 거기 있었던 사람들을 돌아보는 일.

제도, 체제, 주의, 사상 등속이란 모두 헛 것일 수도… 어쩜 종교에 이르기까지.

그저 그 시절 가장 아팟던 사람들 이야기를 꺼내어 곱씹고 오늘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딱 한번 만이라도 눈길 줄 수 있다면 나는 역사 속 하루를 사는 게 아닐까?

늦은 저녁, 노부모 곁 지키느랴 애쓰는 누나에게 들고 간 생선 튀김 하나로 누나 얼굴에 함박 웃음 가득.

내가 누린 하루의 안식이여!

콩비지

짧은 해에 쫓겨 가을이 저문다. 일기예보는 어느새 눈소식을 전한다.

‘장소 옮기고 장사는 좀 어때?’ 가게 손님 Mayer씨가 내게 물었다. ‘뭐 그저 그렇지… 큰 변화는 없어. 네 장사는 어때?’ 꽃가게 주인인 그에게 되물었더니 대답이 길었다.

‘여름에 꽃장사는 젬병이거든. 가을 바람 불고 여름 휴가 끝나면 우린 좀 바빠지지. 이제부터 제 철이랄까… 날 추워지면 호시절이지! 웬지 솔직히 말해 줄까? 세상 뜨는 이들이 부쩍 늘거든! 정말이라니까!’

‘정말이라니까!’라는 그의 말에 나는 웃었다.  그나 나나 일흔이 손에 잡힐 듯 하건만…

토요일 오후 가게 문 일찍 닫고 찾은 공원엔 이미 해가 저물고 있었다. 빠른 걸음으로 공원 길을 걷지만 땀은 커녕 한기가 몸을 감싼다.

가을은 언제나 너무 짧다.

짧은 입이 더욱 짧아져 음식물을 거의 입에 대지 않으시는 어머니가 옛날에 먹던 거를 찾으셔서 콩비지 찌개를 만들어 보다.

하루 종일 잠에 취해 ‘여기가 한국이야? 미국이야?’를 되뇌시는 장인은 오늘은 좀 반짝 하셨단다.

비록 가을은 짧고 겨울은 길어도 올 겨울 꽃장사는 그리 잘 되지 않을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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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시간에

긴 한 주간이 지났다.

하루와 주간과 월, 년이 구분되어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축복인가! 그저 구분없이 이어지는 시간의 연속 뿐이라면 삶이 얼마나 피곤할까? 게다가 오늘 밤은 시간이 바뀌는 날, 한 시간 더 잘 수 있다는 여유까지 누리는 이  순간으로 하여 그 긴 한 주간의 피로를 던다.

지난 일요일, 온 종일 내리는 가을비에 집에 갇혀 어머니 흉내를 내 볼 요량으로 녹두 빈대떡을 부쳤다. 녹두 빈대떡 몇 장 들고 부모님을 찾았는데 어머니가 이상한 행동을 보이셨다. 맥없이 누워 계시던 양반이 나를 보더니 일어나 서랍 속 자잘한 물건들을 내어 미셨다. 바들바들 떠는 손으로 이런 저런 패물 들에서 동전에 이르기까지 내게 내어 미시며 ‘이젠 정말 끝이다. 이건 다 내겐 필요없다. 니 딸에게 주렴.’

이튿날 어머니를 병원에 모셔 드렸다. 누나와 막내와 나는 번갈아 밤을 병원에서 보냈다. 그리고 어제 어머니는 다시 집으로 돌아오셨다. 어머니는 지금 당신께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시간과 공간을 맘껏 누리고 계시다. 이즈음 들어 부쩍 기복이 심하시지만 그래도 지극히 건강하신 아버지가 정말 고맙다.

주로 어머니를 보살피는 누나가 내게 건냈던 말이다. ‘얘! 어머니는 그저 니 얘기만 하신다. 어쩜 그렇게 아들 뿐이시다니?.’ 엊저녁 내가 한 대답. ‘그려 그게 내겐 또 벽이라우!’

그리고 오늘, 양로 시설에 계시는 장인의 생신. 아내와 내 아들 며느리 정성 덕인지 장인 어른 최근 들어 최고조로 몸과 맘이 지극히 정상이셨다. 웃고 울고 모처럼 한 순간 장인이 살아 있던 순간이었다.

델라웨어 한인 침례교회 이홍 목사 기도빨이 생각보다 쎈게 아닐지? 우리 부부가 이목사님 내외를 비롯한 그 교회 교인들에게 진 빚이 정말 크다.

솔직히 나는 예수쟁이지만 교인은 아닌데… 이럴 때 내 미안함이 정말 크다.

툭하면 빼먹지만 그래도 한국학교에 등록해 한글을 배우고 있는 며늘 아이가 쓴 카드를 보다가 얻는 기쁨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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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되어 있던 아내와 내 건강 진단까지 겹쳐 몹시도 길고 길었던 한 주간을 보내며.

그래 또 사는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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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자(八字)에

모처럼 아들 며느리가 내 집을 찾은 토요일 오후, 나는 길이나 함께 걷자고 했다.

아이들이 찾아올 줄도 몰랐거니와, 내 집에 오기 전에 친할아버지 할머니를 찾아 뵙고, 양로 시설에 계신 외할아버지도 뵙고 왔다고 하여 내 얼굴에 크게 웃음이 피었다. 하여 함께 걷자고 했던 것이다.

낮이 많이 짧아졌다. 반나절 가게 일보고 나선 길이라 아이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짧을 듯 하여 조바심이 일었다.

동네 공원엔 시월 하순의 가을이 가득 찼다.

공원길을 걸으며 수시로 쎌폰을 확인해 본다. 딸아이가 열흘 여행에서 돌아 왔다는 소식이 도착할 시간이 지나서였다.

아내는 양로 시설에서 처음 생일을 맞는 장인을 위한 자리에 대해 말했다. 덧붙일 것 없는 나는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 함께 하고 올라가라는 내 말에 아들 며느리는 선약이 있다며 떠나고, 어머니 아버지는 손주 녀석이 찾아왔었다는 일에 감격하여 전화를 끝내시지 못하고, 스무 시간 비행 끝에 제 아파트에 돌아왔다는 딸아이 소식에 내 가슴은 은단 입에 문듯 화하게 뻥 뚫리고…

그저 감사가 이어지는 시월인데…

나는 왜 지금 이 나이에도 한국 뉴스에 속을 끓이는지?

참 팔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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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우! 부수는 건 순식간이네!’ 손님 한 분이 가게에 들어서며 내게 던진 말이다. 이즈음 내 가게가 있는 상가의 반을 부수는 공사가 진행 중인데 그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원래 내 가게는 지금 부수고 있는 상가 쪽에 있었다. 그 쪽에서 30년을 있다가 올 봄에 맞은 편에 상가가 살아남는 쪽으로 이전하였다. 내가 30년 정(情)을 붙였던 곳도 다음 주면 더는 볼 수 없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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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가 건물주는 상가의 반을 헐고 그 곳에 아파트를 짓기로 하고 공사에 돌입한 것이다. 건물주의 청사진에 따르면 아파트가 완공되면 내 가게는 그야말로 동네 최고의 명당이 될 것이라고 했다. 물론 내가 그의 말에 귀 기울였을 만큼 순진하거나 어리지 않았으므로 그저 그의 청사진이었을 뿐이었다.

당장의 내 고민은 공사로 인한 내 손님들이 불편을 감내할 수 있는 최대치와 건물주의 청사진을 이루는 시간 사이에서 내가 참아내야만 하는 어려움을 가늠하는 일이다. 그 간극은 어쩌면 내가 상상하는 이상일수도 있다. 그래 떨칠 수 없는 불안이 있기는 하지만, 믿는 것은 내 경험과 나이다. ‘내가 여기까지 온 세월이 얼마인데….’

일을 마치고 돌아와 상가 건물이 부숴지는 모습을 담은 모습을 보다 문득 떠 올린 글 하나. 단재 신채호선생이 쓰신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이다.

<혁명의 길은 파괴부터 개척할지니라. 그러나 파괴만 하려고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건설하려고 파괴하는 것이니, 만일 건설할 줄을 모르면 파괴할 줄도 모를 지며, 파괴할 줄을 모르면 건설할 줄도 모를지니라.   – 중략-

다시 말하자면 <고유적 조선의> <자유적 조선민중의> <민중적 경제의> <민중적 사회의> <민중적 문화의> 조선을 건설하기 위하여 <이족통치의> <약탈제도의> <사회적 불평등의> <노예적 문화사상의> 현상을 타파함이니라. 그런즉 파괴적 정신이 곧 건설적 주장이라. 나아가면 파괴의 <칼>이 되고 들어오면 건설의 <깃발>이 될지니, 파괴할 기백은 없고 건설하고자 하는 어리석은 생각만 있다 하면 5백년을 경과하여도 혁명의 꿈도 꾸어보지 못할지니라.>

내 나이 스물 적에 내 가슴을 마구 뛰게 했던 단재 선생의 외침이었다.

세월 흘러 역사 속 모든 혁명이란 순간적 변혁일 뿐 늘 다시 돌아간다는 생각이 굳어지고 혁명보다는 개혁을, 아니 어려운 개혁보다는 서서히 감히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는 변화가 좋은 것이라는 노회함이 어느새 익어버린 나이에 단재 선생의 선언이 떠오른 것은 아마도 이즈음 내가 한국 뉴스에 너무 몰입해 있기 때문일게다.

어쩌겠나? 이 땅에서 산 날이 한국에서 산 날보다 많을지라도 여전히 한국어로 사고하는 한 한국인인 것을.

이즈음 한국뉴스를 보면서 곰곰이 생각할수록 한국과 한국인들이 자랑스럽다.

역사 이래 어느 공동체도 감히 이루지 못한, 피한방울 흘리지 않고 아주 서서히 혁명적 변화를 이루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단재 선생께서 꿈꾸었던 혁명을 이루되 결코 혁명적이지 않은 방법으로 변화를 이루어내는 모습이 그려 지기 때문이다.

하여 여의도에 모이는 시민들에게, 나와 같은 세대로 흔치 않게 참 떳떳한 삶을 이어온 듯한 문재인 대통령과 이해찬 대표에게, 그들이 이루고자 하는 변화가 끝내 이루어지기를 소망하는 응원을 보내며…

오늘 내 가게 손님 한 분께 받은 작은 화분과 분에 넘치는 찬사보다 수 천 수 만 배 큰  박수가 여의도에 모이는 시민들과 문대통령과 그들과 꿈을 함께 하는 모든 이들에게 들리는 그 날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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