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식에

타고난 내 성격 탓일게다. 매사 극단적 사고나 선택은 피하는 편이거니와, 때론 그런 생각이나 주장에 대해 강하게 거부나 반대의 목청을 높이곤 하는 성정은 나이 들어도 바뀌질 않는다. 믿음도 예외는 아니다.

모처럼 참석한 예배 설교 시간, 그저 마음으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믿음 안에서 맞이하는 죽음을 미화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고개를 갸웃했던 것이다.

어쩌면 계절 탓인지도 모르겠다. 예수 탄생을 기다리는 이즈음,  믿음 안에서 맞는 죽음까지 아름다워야 할 까닭들도 있을게다.

아무리 그래도 누군가의 죽음이 살아있는 자들의 장식이 될 수는 없다.

그리고 오후에 아내와 함께 성탄 장식으로 화사하게 꾸며진 Longwood Garden 정원을 걸었다. 아내와 내게 주어진 오늘 하루에 감사하며.DSC09058DSC09072 DSC09085 DSC09095 DSC09111 DSC09119DSC09167 DSC09168 DSC09169 DSC09175 DSC09177 DSC09200 DSC09204 DSC09211

인형같은 어린아이들이 장식에 홀려 즐거워 하는 모습을 보며 내 자식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밀려왔다. 내 아이들이 저렇게 인형 같았을 어린 시절에 왜 이런 장식을 함께 하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 때문이었다.

그리고 떠오른 최근에 읽은 책 속 한 대목.

<자기를 하나님의 뜻에 맡기고 세상과 작별하고자 한다고 말하면서, 병에서 치료되어 계속 살기를 희망하는 것은 얼마나 감격적인 모순인가! 그러나 비록 신자(信者)라 할지라도 이것이 우리의 솔직한 모습이 아닌가?>

정원을 나서며 사무실에 들려 wheelchair 사용에 대해 묻다.

더 늦기 전에 부모님 모시고 이 정원을 함께 걸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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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기쁨

한 해 마무리를 재촉하는 주일 아침에 가게 손님들에게 편지 한 통 띄우다. 어쩌면 내게 보낸 편지일지도.


어느새 12월 중순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 새로운 꿈들을 꾸어 보는 때입니다.

연 이틀 비가 내리던 어제 오후, 가게가 한가해진 시간에 잠시 저의 한 해를 돌아보았답니다. 그렇게 시간을 돌아보며 스스로 되여 본 말은 그저 감사랍니다.

올 한 해 가게 자리를 옮겼고 그 과정에서 여러 걱정들이 있었지만 그 걱정들이 부질없었음을 깨닫게 해 준 것에 대한 감사가 첫째였습니다.

저희 부부가 이제껏 살아오며 제일 많이 병원을 드나든   였지만저희들을 그렇게 병원을 찾게 했던 노부모님들이 오늘도 살아 계심에 대한 감사가 둘째입니다.

카운터에 놓인 장미 화분을 보며 든 아내와 제 아이들에 대한 감사가 세번 째입니다. 며칠 전 생일을 맞은 아내에게 제 딸아이가 보낸 장미 화분이랍니다.

그 감사에 대한 생각 끝에 이어진 것은 아쉬움입니다. 올 한 해 이루지 못한 것들, 계획과 엇나간 일들, 여전히 이어지는 이런 저런 불안과 아픔들입니다.

그리고 어제 늦은 밤, 새로 산 시집 시들을 읽다가 번쩍 눈이 뜨이는 즐거움을 맛보았답니다.

<내비게이터를 꺼버려/ 대충 방향 잡고 돌아 오는 길/ 도로가 한갓지다. / …  / 하늘에는 멎은 듯 흐르는 넓은 구름 강물/ 있다가 없다가 다시 있는 것들의 모습

이왕 길을 벗어난 김에/ 물새들과 알 듯 모를 듯 같이 걷는 해변, 번지는 황혼/ 금빛 우려낸 빛이 사방에 어른댄다./ …  / 하늘에 희한하게 하얀 반달 하나/ 찾으면 있고. 않으면 없고.>

황동규라는 시인이 쓴 ‘내이비게터를 끈 여행’이라는 시의 일부랍니다. 시인의 나이 올해 여든 한 살인데 아직도 왕성히 시를 쓰고 있답니다.

그가 시집을 내며 하는 이야기랍니다.

<시를 좇아가다 보니 바야흐로 삶의 가을이다. 주위에 자신의 때깔로 단풍 들거나 들고 있는 사람들이 아름답다. 가득 찬 잔만큼 아직 남은 잔이 마음을 황홀케 한다. 벌레 문 자국같이 조그맣고 가려운 이 ‘사는 기쁨’ 용서하시게.>

이제 올 해도 겨우 보름 남짓 남았습니다. 뭐 크게 인생까지는 아니더라도, 올 한 해 ‘남은 잔이 마음을 황홀케’하는 시간들이 되시길 빕니다.

당신의 세탁소에서


Mid-December came so soon. It is a time to wrap up a year and to dream a new dream for a new year.

Yesterday afternoon when the store was quiet and while the rain continued for two consecutive days, I tried to look back over the year. It was just gratitude which I reiterated and listened to myself, while I was looking back on the year 2019.

This year, I moved the store and had many worries in the process of moving. But, it was like I cried before I was hurt. To get to realize it was the first gratitude.

Though my wife and I had to go to the hospital this year more often than any other year because of my father-in-law and my parents, the gratitude for their being alive today was the second.

The third was the gratitude for my wife and children, which came across when I looked at the pot of roses on the cleaners’ counter. It was what my daughter had sent to my wife as a birthday gift the other day.

What followed after the gratitude was a sense of regrets and frustration, because of the thoughts about things to be done but unfinished, things that went awry, and this and that anxiety and suffering.

Then, last night, while I was reading a new book of poetry which I had gotten recently, I enjoyed an eye-opening happiness.

<Turning off the navigator/I took the course roughly, returning/the road was deserted./… /A wide river of clouds which looks to halt but flows in the sky/the look of things which appear, disappear and appear again.

Once straying from the right path/the beach on which I walked with waterfowl as if we both knew or not, spreading twilight/the lights brewing golden light glimmered everywhere./ … /The strangely white half-moon in the sky/was there when I looked for it and was not there when I didn’t>

It is a part of a poem, “A Trip with the Turned-off Navigator,” which Dong-gyu Hwang wrote. Though he is eighty-one years old, he is still very active in writing poetry.

He wrote in the preface of the book:

<As I have followed the poetry, I now stand at the autumn of my life. Those who have turned or are turning into their own colors around me are beautiful. A still-some-left glass makes my mind thrilled as much as a full glass. Please forgive me for this ‘joy of living’ which is small and itchy like a bug bite.>

Now only about half a month is left before the end of this year.

I wish that you will have time in which a still-some-left glass makes your mind thrilled for the remaining days of this year, if not life itself.

From your cleaners.

장미에

‘결혼 기념일?’ 아님 ‘누구 생일?’. 카운터에 새롭게 놓인 장미 화병을 보며 손님 몇이 아내에게 던진 물음이란다.

어제 딸아이가 각기 12송이씩 묶은 장미 두 다발을 보내왔다. 나름 생각 깊은 아이가 숫자 놀음을 했겠다 싶지만 툭 튀어 나온 내 혼자 소리, ‘쯔쯔쯔, 돈 아까운지 모르고…. 뭘 …한다발이어도 족한데…”. 아내는 싫지 않은 듯 내 괜한 트집에 토를 달지 않았다.

내 젊은 시절 고약한 기억 가운데 하나인 12.12 사태 이전부터 아내의 생일을 함께 했으니 우리 부부가 함께 한 세월도 만만치 않다.

나는 그저 우연일 뿐이라고 우기지만 아내는 큰 연(緣)이라고 믿는 우리 가족 생일력이  그 세월과 늘 함께 한다. 생일력이란  2땡, 9땡, 10땡, 12땡으로 월과 일이 함께 하는 우리 네 식구 생일에 대한 이야기다.

딸아이 덕에 집과 가게가 장미 화병으로 화사하다.

어린 시절 한 동네에서 자라 아내의 십대 초반 어린 시절이 환하게 보이는데… 쯔쯔… 어느새 아내도 은퇴연금 수령이 가능한 나이가 되었다. 그게 웬지 또 공연히 미안하다.

이젠 제법 시간이 흘렀다만, 이민 후 살 만 하다 싶었을 무렵 내 엉뚱한 욕심으로 하여 경제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치루었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 나는 거의 삶에 대해 체념(諦念) 상태였다. 허나 아내는 늘 웃었고 우스개 소리를 끊이지 않았었다.

나의 체諦가 깨달음의 제諦가 되는 세상을 맛보게 한 것은 아내였다.

하여 살며 내가 맛보는 즐거움의 반은 온전히 아내에게서 온다.

장미를 안겨 나를 깨운 딸아이에게도 아낌없는 한 몫.

고마움을.

성탄 또는 성서에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성서 베드로전서 1장 24절(새번역에서)

설교자는 말씀하셨다. ‘어느 날 떨어지는 꽃잎처럼 삶은 유한할지언정 우리네 삶을 꽃이라 비유하신 사도들의 신앙고백은 얼마나 감사한가! 또 그런 믿음의 눈을 열어 주신 신의 은총은 얼마나 큰가! 우리 모두 언젠가 확실히 떨어지고 말 꽃들이다, 다만 그 언젠가를 우리는 가늠할 수 없기에 불확실한 존재들이다. 모든 생각들을 접고 지금 여기에 있는 우리들 모두는 꽃이다. 오늘을 꽃처럼 살자!’

그리고 설교자는  ‘아름다운 꽃처럼 설다 간 사람’이라고 내 장모를 기렸다.

장모가 세상 뜬지 오늘로 딱 만 삼년, 델라웨어 한인 침례교회 이홍목사님을 비롯해 교회 공동체들이 장모 삼주기 추모 예배 자리를 마련해 주어 함께 했다. 그저 감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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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 후 아내와 아들 내외와 함께 장모 쉬시는 공원을 찾다. 장모 계시는 곳, 바로 앞 묘지 터엔 오래 전 예약해 놓은 내 부모와 우리 부부가 누울 자리가 있다. 장인은 장모와 합장이 예약되어 있고… 묘지 공원엔 성탄이 이미 함께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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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는 날 시간을 쪼개어 준 아들 내외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전해 보낸 후, 일흔 세 해  함께 사시며 이젠 오락가락하는 정신 줄 같이 붙들고 씨름하시는 어머니, 아버지를 뵙다. ‘이젠 진짜 갈 때가 됬는데… 왜 이리 안 데려 가신다니…’ 어머니 푸념에 그저 웃으며 답하다. ‘아이고 오늘 얼굴 좋으시네!’

집으로 돌아 오는 길에 장인 누워 계신 양로시설에 들리다. 대낮에도 한밤 중이시던 양반이 잠시 깨어 묻는다. ‘김서방 나이가 몇 이야? 김서방도 나이 많지?’ 나는 또 웃으며 말했다. ‘에이 장인보단 한참 젊지요!’

양로시설 성탄 장식은 정물화(靜物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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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돌아와 휴일 낮잠을 즐기려던 계획은 수포가 되었다. 이미 해가 저물고 있었으므로. 낮잠 대신 동네 한바퀴를 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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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에도 늦은 걸음으로 성탄이 오고 있었다.

그렇게 하루 해를 보내고 마주 한 컴퓨터 모니터가 전해 준 세상 소식 가운데 하나. 비록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엇비슷한 생각으로 이즈음 삶의 결을 같이 하고 있는 벗의 모친상 소식.

하여 다시 손에 들어 보는 성서. 그리고 떠오른 안병무선생님의 말씀 하나.

<성서는 묻지 않으면 침묵한다. 그런데 어떻게 묻느냐 하는 것이 대답을 유도한다. 우리는 성서를 자명한 것으로 전제하고 이에 대답을 얻고 있다고 생각하는 동안 성서 대신 아집에 정좌하게 된다.

그렇지 않으려면 계속 성서를 향해 물어야 한다. 그런데 물을 때에는 언제나 어떤 관심이나 전제를 갖고 묻는다. 관심이나 전제 없는 성서해석은 없다. 까닭은 성서를 읽을 마음이 나는 것은 그것에 관심이 갈 때 가능하며 그 관심은 성서가 이런 대답을 줄 수 있으리라는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관심이나 전제가 묻는 자의 삶과 최단 거리에 있으면 있는 만큼 그 물음이 진실하며 그것에서 얻는 대답은 우리를 살리는 것이 된다.>

오늘, 삶 또는 죽음에 대하여.

집에서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온종일 추적추적 내리는 12월 초하루, 모처럼 내 집안에서 나 홀로 누리는 즐거움을 만끽하다.

‘내 오두막에는 세개의 의자가 있다. 하나는 고독을 위해, 다른 하나는 우정을 위해, 또 다른 하나는 세상을 위해서다.’ 얼토당토않은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흉내 짓도 이런 날 내 집에서 내 스스로에게 허락하는 일은 가하다. 이따금 내다 보는 창문 밖 풍경이 나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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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대한 큰 감사가 일다.

두 권의 책을 읽다. 홍성수가 쓴 <말이 칼이 될 때>와 윌리엄 파워스(William powers)가 쓰고 임현경이 옮긴 <속도에서 깊이로: 철학자가 스마트폰을 버리고 월든 숲으로 간 이유>들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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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수는 ‘혐오표현’이라는 말이 칼이 된 사회를 고발하며, 이어지는 ‘증오범죄’가 만연 되어가는 현실을 단숨에 읽히는 글로 엮어 놓았다.

저자 홍성수의 말마따나 ‘입법 조치나 법적 대응에 한정하지 말고 전 세계에서 고안되고 실천되어 온 거의 모든 반혐오 표현 대책을 이 책에 모두 망라해’ 놓았다. 그는 그렇게 이 책을 쓴 까닭을 ‘어떤 것이라도 시작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 우리 앞에 놓여 있기 때문’이라고 강변하며 글을 맺는다.

그는 ‘증오범죄가 발생했다면 그 사회에는 반드시 편견과 차별이 있고 혐오표현이 난무했을 것이다. 이러한 배경없이 증오범죄가 갑자기 발생하는 경우는 없다.’고 몇 차례 반복해 강조한다.

오늘을 사는 모든 이들이 한번 돌아 볼 일이다.

책을 읽으며 어느 잔치 자리에서 백인 사내가 우리 부부 테이블로 다가와 “너희 나라로 꺼려라!”했던 수 십년 전 경험과 며칠 전 내 가게에서 한 백인 여성이 “여긴 미국이야!” 소리치며 말도 안되는 불만을 터트렸던 일이 생각나 창문 밖 풍경에 위로를 받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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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현의 자유는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찾고자 하는 모든 이들의 문제, 특히 소수자의 문제이다.’라거나 ‘혐오표현 자체를 금지해야 하는 영역들은 고용, 서비스, 교육 등 자율에 맡기기 어려운 영역과 방송, 광고, 인터넷 등 공공성이 강한 영역에 한정한다.’라는 저자의 주장을 읽다가 여전히 할 일 많은 세상에 감사하다.

다수자와 가진 자들이 외치는 표현의 자유의 소리가 여전히 높고, 한정하고 규제해야 할 영역들인 고용, 서비스, 교육 등과 방송, 광고, 인터넷 등 공공성이 강한 영역에서 일어나는 숱한 혐오표현들과 증오범죄들이 여전히 난무하는 오늘이기 때문이다.

다소 답답했던 마음을 풀어 준 것은 윌리엄 파워스(William powers)가 쓴 <속도에서 깊이로>이다.

<오늘날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자유와 평등의 가치는 보편화된 읽기가 개개인에게 부여한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라는 말은 이 책에서 15세기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혁명을 설명하며 저자가 한 말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문득 예수가 했던 <가라!>라는 명령을 떠올렸다.

간음한 여인을 비롯해 앉은뱅이, 소경, 절름발이들을 용서하거나 고치신 예수는 그들에게 그들이 본래 있었 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라’고 하셨다. 그들은 모두 당시 사회에서 혐오와 증오범죄의 대상자들이었다. 성서 기록에 따르면 그들의 후일담은 없다.

예수의 ‘가라!’라는 명령은 혐오와 증오범죄가 여전히 만연하고 있는 곳으로 가라는 명령이었다.

예수의 명령은 오늘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어쩌면 예수의 명령을 들은 이들의 귀가 열리기에 1500여년이 필요했고 이제 스스로 생각하는 힘을 키우는데 또 500년이 흘렀는지도 모른다.

내 집안에서 누리는 12월 초하루의 자유를 더불어 누리는 세상으로 넓혀 나가는 일은 작은 것일지라도 살아있는 한 지속해야 할 일이다.

미안하게도 나는 겨우 몇 번 얼굴 내밀었다만, 지난 두 달여 매 주말 마다 이어온 필라세사모 벗들의 꿈도 나와 비슷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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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종일 비 내리는 12월 초하루, 집에서

딸에게

어느새 12월이 코 앞에 다가섰다. Thanksgiving day 하루를 쉬고 습관으로 이른 아침 가게로 향했다. 연휴 새벽 도로는 한산했다.

어제 밤, 딸아이가 물었었다. ‘아빤 언제까지 일해?’ 아무 생각없이 튀어나온 내 대답은 ‘일할 수 있을 때까지…’였는데 그에 대한 딸아이의 간단한 물음이 내 앞에 놓인 질문이 되었다.  딸아이가 던졌던 아주 간단한 질문은 ‘왜?’였다.

내 나이 마흔이 다 되어 낳은 딸아이가 사는 세상을 내가 모두 이해할 수 없 듯, 아이 역시 내가 사는 세상을 다 알 수는 없을게다. 어쩜 내 스스로도 모르는 일일 수도 있거늘.

간 밤에 모처럼 나눈 딸아이와 나눈 이야기를 되새기며 이르른 가게 앞 하늘 풍경에 홀려 내 눈에 담아 보았다.

동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며 열리는 아침에 홀려 아직 어둑한 상가를 덮은 추위를 잊은 채 아침 풍경을 담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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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든 생각 하나. 동 트는 아침 해를 맞기 위해  산이나 바다 등 명소를 찾아 나서지 않아도 누릴 수 있는 내 일터의 아침은 내가 누리는 큰 축복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아침 나절에 맞은 손님 한 분, 며칠 전 작고 예쁜 포인세티아 화분과 분에 넘치는 찬사를 담은 손편지를 전해 주셨던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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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손편지와 화분을 받던 날, 문득 내 눈에 들어 와 박힌 풍경은 가게 뒤편 우체국 담장 너머에 있는 단풍나무였다. 사철 푸른 나무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나무들이 누런 잎새들을 다 떨어 버리고 열반에 이른 계절에 우체국 담장 안 단풍나무는 붉은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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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렴! 우체국 나무인데…. 좋은 소식 기다리는 사람들을 위해 시들지 않는 단풍 나무 하나 오래 품고 있으니 얼마나 좋은 일이냐!

이쯤 내 딸아이에게 보내는 응답을 찾다.

내 일터에서 찾는 즐거움이 있기에… 적어도 그 즐거움을 잃는 날까지는…

다시 은총에

어느 해 부터인가 추수감사절 저녁상을 내 손으로 차리기 시작했었다. 아마 족히 십여 년은 넘었을게다. 이젠 내가 누리는 즐거움 중 하나가 되었다.

칠면조는 아들 녀석이 좋아해서 어쩔 수 없이 아주 작은 것을 굽고, 아내와 딸과 며느리는 닭이 좋다고 해서 제법 큰 놈을 골라 구웠다. 어머니 입맛에 맞게 새우젓 듬뿍 넣고 김치찜과 코다리찜도  쪄 상 위에 올렸다. 매형과 누이 생각하며 단호박도 굽고 통오징어 구이도 곁들였다. 내 몫으로 돼지갈비를 구워 와인 한잔 곁들였다. 아내는 전을 부치고 잡채를 더해 상을 풍성하게 했다.

두 해 전부터 먼저 떠난 장모가 자리를 비우고, 올핸 거동할 수 없는 장인이 함께 하지 못했다. 올해 어머니와 아버지를 모셔 오기 위해 누이와 나는 많이 망설였었다. 그러고보니 그 사이 며늘아이가 새 식구가 되었다.

식사를 시작하기 전, 나는 전도서 가운데 한 구절을 읊었다.

‘기쁘게 사는 것, 살면서 좋을 일 하는 것,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랴! 사람이 먹을 수 있고, 마실 수 있고, 하는 일에 만족을 누릴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주신 은총이다.(전도서 3: 12-13)’

몇 젓가락 입에 넣어 오물거리시던 어머니가 말했다. ‘당최 입맛이 없어 먹질 못하겠더만,,, 오늘은 입맛에 딱 맞아 많이 먹었네…’

오늘 내가 누린 은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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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의 사족 – 내 서재 한 구석에서 발견한 약 상자 둘. 웬만한 통증에는 타이레놀 하나 먹기 싫어하는 내게 달포 전 서울 큰 처남이 보내 온 보약이었다. 인삼이야 익히 아는 것이고 황보단이 뭔가 하여 검색해 보다 그 가격에 놀라다.

바라만 보아도 은총에 은총을 더하는 감사절이다.

차이에

김지혜가 쓴 <선량한 차별주의자>를 읽고, 아이리스 매리언 영 (Iris Marion Young) 의 책 <차이의 정치와 정의>를 주문하다.

연말 이리저리 할 일도 많다만, 어차피 시간이란 쪼개 쓰는 법이고 내 생각이 옳다는 것을 확인하는데 쓰는 시간이 아까울 수는 없기 때문에 또 질러 본 일이다.

무엇보다 김지혜가 소개하는 아이리스 영의 이야기에 빠졌기 때문이다.

<아이리스 영은 ‘차이’라는 단어의 용례에 주목한다. ‘다르다’는 말은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사용되지 않는다. 배제되고 억압된 사람들 만이 ‘다르다’고 지칭되고, 주류인 사람들은 중립적으로 여겨진다. ‘중립’의 사람들에게는 수많은 가능성이 펼쳐져 있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몇가지 가능성만 있을 뿐이다. 결국 ‘다르다’는 말은 ‘서로 다르다’는 상대적 의미가 아니라 절대적으로 고정된 특정 집단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차이’가 낙인과 억압의 기제로 생성되는 것이다.

마치 한국사회에서 ‘다문화’라는 말이 모든 사람이 다양한 문화를 가졌다는 뜻이 아니라, 문화적 소수자만을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때의 차이란 주류 집단인 ‘한국인’을 기준점으로 삼아서 다르다는 것으로서, 사실상 ‘정상’에서 벗어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다양성을 강조하는 말로 종종 사용되는 ‘다름은 틀림이 아니다’라는 흔한 구호도, 여기서 ‘다름’이 주류 집단의 기준에서 ‘일탈’된 무언가를 지칭하고 있다면 그 자체로 ‘틀림’을 전제로 하는 형용모순이 된다.>- 김지혜의 ‘선량한 차별주의자’에서

나는 이 글을 읽다가 문득 고대 성서 이야기를 생성한 옛 히브리 신앙 공동체가 떠올랐다. 원천적으로 차이를 배제하는 신이 온전히 개입하는 세상을 꿈꾸었던 출애굽 시대 광야에서 이루었던 신앙공동체 말이다.

어쩌면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세상이란 신 없이도 신이 온전히 개입하는 세상으로 나가는 것이 아닐까? 아이리스 영이나 김지혜가 던지는 질문들은 그 과정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 앞에 던져지는 것 들일게고….

꾸어야 할 꿈은 꾸되 현실은 내가 지금 여기서 살아가는 모습일 터이니…

내 아이들과 함께 멋진 곳에서 배 불린 안식일에.

한국학교

물론 내가 ‘싫다’하면 나서지 않을 수도 있었다만, 구태여 후환을 만들어 가며 살 나이는 아니기에 한주간 노동의 피로에 절은 토요일 오후 아내를 따라 나섰다. 뉴저지 Hamilton은 처음이었다. 해밀톤 한국학교에서 열린 ‘제 4회 한국어 말하기 대회’에 참석한 길이었다.

해밀톤 한국학교가 주최하고 한국의 재외동포 재단이 후원하는 행사로써 입양되었거나 다문화 가정 자녀들 또는 비한국계 현지 시민들이 참가해 한국어 말하기 경연을 펼치는 잔치였다.

지난해 이 행사에 내 며늘아이가 경연에  나섰음에도 함께 하지 않았었는데, 올해 꼼작 없이 함께 한 까닭은 그만큼 무언(無言)의 재촉을 하는 아내의 힘이 강한 탓이었을게다.

거의 끌려 가다시피  했던 자리였는데, 참가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돈내면서 함께 했어야 할 행사라는 생각에 이르기까지 하였다.

입양 및 다문화 가정 자녀를 비롯해 인디언 아메리칸, 코카시안, 평화봉사단으로 한국 생활을 경험했던 이까지, 모두 현재 미 동중부  저마다의 동네 한국학교에서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이들의 이야기 잔치마당이었다.   DSC08518 DSC08529 DSC08539 DSC08548 DSC08553 DSC08567 DSC08577

이경애선생의 지도로 모두 함께 한 복주머니 색종이 접기에 열심히 따라 하는 전혀 나 같지 않은 내 모습에  흠칫 놀라기도 했다. 아내는 춤을 추었다. 아내가 춤을 추는 모습을 볼 때 드리는 내 기도는 오늘도 통했다. ‘제발 넘어지는 실수만 아니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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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밀톤 한국학교 교장선생님은 강남옥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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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이 행사를 밀고 나가는 힘일게다. 그의 시편들은…

일주일에 고작/ 세 시간 하는 우리, 토요일 한국학교/ 빠진 이처럼 몇은 결석/ 띄워쓰기 다 틀린 작문같이 몇은 지각/ – 중략- 화분에 물 주듯 몇 년 같이 뒹굴었더니 / 철자법 다짜고짜 다 틀린 카드도 건네주고/ ‘썽생님, 나 누구게?’/ 일찌감치 방귀 트듯 선생한테 말 트며/ 뒤에서 슬쩍 가린 눈 풀고 지긋이/ 날 안아 주기도 한다 – (강남옥의 시 ‘토요일 한국학교’에서)

내 모국어의 속 깊은 품은 언제나/ 삶 앞에 진술 긴 나를 부끄럽게 하는/ 언어의 진국이다 – (강남옥의 시 ’깊고 넉넉한’에서)

돌아오는 길, 델라웨어 한국학교 선생님들께 깊은 감사와 격려를….

*** 아내는 이 자리에서 여고 졸업 후 처음 만난 동창 얼굴을 보다. 사십 이년 만이란다.

엇비슷한 생각들을 가진 이들이 함께 얼굴 마주 보며 이야기 나누던 중 나는 내 또래이자 같은 서울 토박이인 시인 김정환의 시집을 넘기다.

‘생각이 다른 이들과 어떻게 함께 할 수 있을까?’라는 이야기를 함께 나누고 있을 때였다.

그렇게 오랜만에 마주한 김정환의 시 ‘등’이다.

<등>

사람들이 내게서 사방으로
등을 돌리고 그 등을 통해
나는 현실을 본다 본질까지
등은 야속하지 않다 사람들이
통로일 뿐이다 갈수록
그것이 줄지 않는다 끝까지
나는 행복하다 사람들 마음에
등이 있다 그들도 행복하길 바란다

시인은 여전히 다작이란다. 모두가 행복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