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모리얼 데이 – 1

페북 소식으로 일상을 전해주는 오래된 벗이자  흙에서 사람살이 이야기를 일구는 신세대 농사꾼 오시환이 찍은 사진 한 장 얹어 손님들에게 주말 편지를 띄우다. 그림자가 있는 꽃이라니… 그래서 삶은 더욱 살만한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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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년 같으면 메모리얼 데이 연휴는 저희 부부가 손꼽아 기다리는 시간이었습니다. 일년 중 이틀을 연이어 쉴 수 있는 몇 안되는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올해는 사뭇 다릅니다. 지난 3월 이래로 쉬는 날이 많았고, 세탁소에 일을 나가도 평상시와는 다르게 한가하여 이젠 연휴보다는 일을 예전처럼 제대로 할 수 있는 날들을 기다린답니다.

엊그제 델라웨어 대학이 파트 타임 근로자 1000여명을 해고했다는 뉴스를 보았답니다. 파트 타임이라고는 하지만 바뀐 일상으로 하여 그들의 삶엔 어려움이 뒤따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이러한 문제는 딱히 파트타임 노동자에게만 국한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모두가 참 어려운 때입니다.

이즈음 자주 보거나 들을 수 있는 말 가운데 하나는  ‘COVID-19 이후 시대’입니다. 제가 살고 있는 오늘이라는 시간이 매우 비정상적임을 잘 설명해 주는 말이 아닐까 합니다. 세상이 이젠 바뀐다는 것이니까요. 어떻게 바뀔지는 저 같은 사람이 어찌 알겠습니까만은  사람살이가 늘 그러하듯, 누군가에게는 새롭게 어려움을 맞는 시간이 될 수도 있겠고, 또 다른 누군가는 새로운 기회의 순간을 맞기도 하겠지요.

예년같지 않은 메모리얼 데이를 맞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메모리얼 데이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답니다. 누군가를 기억하는 사람과 누군가에게 기억되는 사람을 한 번 생각해 보는 것이지요. 딱히 국가니 애국이니 하는 거창하고 큰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그저 제가 사는 일상에서만 놓고 보더라도 사람들은 모두 서로 얽혀 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답니다.

제가 아는 세상이 딱 고만한 크기여서 때문이겠지만, 그저 바라는 제 소망은 제 세탁소에서 만나는 모든 이들이 하루 하루의 행복을 놓치지 않고 살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랍니다. 비록  ‘COVID-19 이후 시대’에도 말이지요.

5월의 마지막 한 주간, 서로 다른 삶이지만 당신과 내가 불안과 걱정보다는 행복과 기대가 더 큰 시간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의 세탁소에서.


In normal years, the Memorial Day weekend has been one of the holidays to which my wife and I have been counting the days, because it is one of the rare occasions in which we can have two consecutive days off. But, this year is quite different. Since March, we had lots of off-days. In addition, even on the days when we opened the cleaners, we didn’t have much work to do, not like normal days, and even felt bored at the cleaners. Nowadays, we’re looking forward to working like normal days, instead of holidays.

The other day, I heard the news that the University of Delaware laid off about 1,000 part-time workers. I worried that those people might face difficulty in life because of their changed daily life. This kind of problem may not be limited to part-time workers. Really, it is a very difficult time for everyone.

One of the phrases that I hear or see most frequently in these days is “the era after COVID-19.” The words seem to say clearly that the time of today in which I’m living is extremely abnormal. That’s because it implicates that the world will definitely change. How would a person like me know how the world would change in the near future? But, as always in human lives, the new era might be difficult times for some people, and moments of new opportunity for some other people.

Perhaps because I encounter a Memorial Day which is different from it in other years, I’m thinking about it over again. I mean, I’m thinking about those who remember someone and those who are remembered by someone. Not in terms as specifically grand like a homeland and patriotism, but looking at the everyday life, I think that people are living mutually entwined with others.

That is maybe because the boundary of my life is so narrow. Anyway, I hope that the world will be one in which those who I meet at the cleaners can live without missing everyday happiness and joy, even in “the era after COVID-19.”

I wish that, though you and I may live different lives, you and I both will have happiness and expectations instead of concerns and anxiety in this last week of May and beyond.

From your cleaners.

하루 – 22, 그리고 다시 일상

어머니 마지막 길 배웅하고 돌아와 새로운 일상을 맞이할 준비를 한다. 내가 어머니 속 끓이는 일을 하곤 하면 어머니는 머리 싸매고 곧잘 누우셨다. 그렇게 몇 끼 식사 거르시곤 당신 스스로 제 풀에 일어나 ‘이 눔아!. 이눔아!’하시며 일상으로 돌아가시곤 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내 일탈된 일상을 적어 놓고 싶어 하루를 세기 시작했었다. 이제 일상으로 돌아가야지 할 무렵 어머니가 더는 일상을 이어가시지 못하게 되었다.

그렇게 어머니 떠나시고 오늘 장례를 치루었다.

이제 어머니가 늘 그러하셨듯이 일상으로 돌아가려 한다. 오늘 예식에서 내가 어머니를 마지막으로 그린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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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의 증손들은 제 어머니를 왕할머니라고 불렀습니다. 집안에 많은 할머니들 중에 연세가 제일 많으셨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어머니는 저희 집안에서 실제로 왕이셨습니다.

왕은 왕이로되 섬기는 왕이셨습니다. 넉넉치 않은 소농의 6남매 중 둘째 맏딸로 태어나신 어머니는 딸로서 동생으로 언니로 누나로 출가외인이 되어서도 왕처럼 친정가족들을 돌보셨습니다.

시집와서 꽉 찬 30년, 홀 시아버님 한복 계절마다 시치시고 다려 준비해 올리셨습니다. 제 할아버지 마지막 임종을 지키신 이도 어머니입니다.

저희 네 남매를 섬기는 일은 그냥 어머니의 즐거움이셨습니다. 딱 일년 전 아흔 둘 연세에도 저희들에게 무엇 하나라도 맛있는 것 먹일 수 있을까 그 생각으로 늘 분주하셨습니다.

손주들과 증손자들을 위한 축복의 기원과 기도는 그냥 어머니의 일상이었습니다.

73년 함께 사신 제 아버님 삼시 세끼 어머니 손 안 거친 음식 잡수신 횟수를 셀 수 있을 만큼 지극히 섬기셨습니다.

어머니의 93년 한 평생은 온전히 가족들을 위한 삶이셨습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어머니에게서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그저 감사다’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어머니의 아픔과 슬픔에 더해, 제가 눈치조차 채지 못한 어머니만의 아픔과 슬픔 모두 가슴에 묻고 오직 그저 감사로 당신의 삶을 정리하신 어머니셨습니다.

하여 오늘은 어머니처럼 모든 게 감사입니다.

먼저 어려운 때에 제 어머니 마지막 환송예배를 집례해 주신 송종남 목사님과 배성호 목사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델라웨어 한인 감리교회 믿음의 성도 여러분들께 드리는 감사도 큽니다.

저나 저희 가족들이 알지 못하더라도 어머니 살아 생전 제 어머니에게 웃음과 기쁨을 선사해 주셨던 모든 분들께 속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또한 제 가족들에게 보내는 감사도 큽니다. 어머니께서 누리신 마지막 일년은 제 누나의 극진한 정성 덕입니다. 외조 해 주신 매형과 누나에게 큰 감사를 드립니다. 매주 토요일 아침이면 전화 인사 이어와 어머니의 한 주간을 즐겁게 마치게 해 준 아틀란타 동생 내외에게 어머니가 전하는 감사 위에  형제들의 감사를 덧붙입니다. 우리 집안에 웃음과 활력을 도맡아 준 막내동생 내외 특히 우리 집안의 기도 담당 막내 매제 덕에 어머니 편하게 떠나셔 감사합니다.

어머니의 말 잘 안 듣는 집안의 유일한 골치거리이자 걱정거리였던  제가 그나마 이 만큼이라도 아들 노릇 할 수 있도록 도와준 제 아내에게 드리는 감사도 있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73년 만에 맞는 아버지의 새로운 일상에 이어질 감사의 몫은 이제 왕을 잃은 우리 모든 가족들이 나눌 일입니다. 어머니처럼.

마지막으로 오늘 온라인으로 함께 한 저희 아이들에게 주는 감사 인사입니다.

In memory of your grandmother or great-grandmother, what I want to say is two things. The first is that she lived a life of dedication and sacrifice for her family; that is, your grandfather or great-grandfather, your uncles and aunts, me, and of course, all of you. The other one is that what she said most often in her lifetime was “Always and simply be grateful.”

I believe that she will reach heaven comfortably, thanks to you all being with me today.

Thank you all.

이 모든 감사를 오늘과 어머니와 우리들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드립니다.

하루 – 21

교회 담임목사님이 장례식순을 보내 주셨다. 어머니 좋아하시던 찬송  ‘사철의 봄바람 불어 잇고’와 아버지의 뜻인 ‘이 세상 살 때에’를 모두 식순에 넣어 주셔서 감사했다. 다만 ‘고인 약력’ 순서가 내 맘에 걸렸다. 하여 목사님께 전화 부탁을 드렸다. ‘고인 약력’이라는 순서를 따로 넣지 마시고 제가 가족 인사 드릴 때 짧게 함께 말할 수 있도록 해주시면 감사 하겠노라는 부탁이었다.

솔직히 내 어머니의 약력이란 딱 한 줄로 요약할 수 있을 만큼 단촐하다. ‘무학(無學)으로 평생 가족들을 위해 당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살다 가셨다.’ 이게 모두다.

어머니가 한글 성경을 읽으시고 오랜 미국생활에서 눈치코치 의사 소통을 하실 수 있던 것은 모두 아버지의 노력이 숨어 있었다. 그렇게 한글도 깨치시고 아파트 이웃 노인들과 인사치레는 하시고 사셨다.

그런 내 어머니의 삶이 ‘고인 약력’ 소개하는 말로 덧칠해지는 게 싫었다. 신앙으로도 마찬가지다.

어머니의 증손들은 어머니를 ‘왕할머니’로 불렀다. 아이들에겐 많은 할머니들 중에 제일 나이 많은 할머니였으니 ‘왕할머니’일 수도 있지만, 진짜 어머니는 우리 집안의 왕이셨다. 어머니는 그렇게 사셨다.

소농(小農) 가정의 삼남 삼녀 중 둘째 맏딸로 태어나 출가외인이 되어서도 오빠 동생들을 챙기며 섬기는 왕 노릇 하셨었다. 73년 함께 사신 내 아버지 삼시 세끼 어머니 손 거른 일, 손가락으로 꼽아도 좋을 만큼 섬기셨다. 당신 슬하 일남 삼녀 새끼들 뿐만 아니라 우리들 뱃속에서 낳은 손주 증손들까지 당신 생각에 최선이라고 하는 데까지 이르러 섬기셨다.

그렇게 고집 세셨다.

그런 내 어머니 말년에 자주 입에 달고 사시던 말 ‘그저 감사’다.

어머니의 마지막 일년 알츠하이머 증상으로 시간이 오락가락 하실 때, 이따금 돌아가 사시던 시간은 6.25 전쟁통과 70년대와 80년 대 초 내가 젊었던 시절이었다.

전쟁통 피난길의 고난과 첫딸을 잃어 버린 아픔 그리고 남편의 부상 등이 평생 어머니의 고통으로 남아 있게 된 시절은 나도 얼핏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종종 순사들이 당신의 아들인 나를 잡으러 온다는 말엔 ‘그 일이 그렇게…’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내 스물 나이 어간에 경찰서, 중정, 계엄사 합수부 등에 몇차례 끌려가 곤욕을 치룬 적이 있지만 당시 내 또래들이 겪은 일에 비하면 지극히 경미한 일이었거니와 딱히 내가 특별히 한 일도 없어 나는 이젠 다 묻은 일이다만 어머니에겐 평생 잊지 못할 아픈 시절이었었나 보다.

그리고보니 오늘이 한국 날짜로 5월 18일이다.

내 부모가 겪어낸 한국전쟁으로부터 광주항쟁 최근의 세월호 참사에 이르기까지 어머니들의 가슴을 후려 파내어 아직도 그 상처가 아물지 않고 있는 사건들에 내가 이따금이라도 관심을 기울일 수 있는 까닭은 따지고 보면 다 내 어머니 덕이다.

거하게 무슨 신앙의 문제도 아니고 이념의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그저 내 어머니보다 더 뼈저린 아픔을 이고 살아간 그리고 또 살아갈 어머니들을 잠시라도 생각할 수 있어야 사람이라는 그 맘 하나, 내 어머니가 주셨다.

***오늘 하루 제일 기분 좋은 소식 하나. 지난 며칠 일기 예보의 변화다. 장례일에 비 예보가 80%에서 70%로 다시 60%로 줄더니 오늘은 0% 이따금 흐림으로 바뀌었다. 모두 내 어머니 복이다.

하루 – 20

‘이즈음 천국 앞 도로가 교통체증이 심해서 장례를 치르려면 좀 시간이 걸립니다.’ 장의사 직원이 하는 말이 걸작이었다. 모두가 하수상한 코로나 바이러스 시절 탓이란다. 우선 이즈음 돌아가시는 이들도 많거니와 묘지에서 안장하는 수를 극히 제한하고 있기 때문이란다.

어머니의 장지는 십여 년 전에 미리 준비해 놓았었다. 모두 어머니 생각이었다. 이왕 당신 묘 자리 마련하는 김에 너희들도 다 한 자리 씩 준비하거라 하는 말씀에 가족 묘 자리를 준비했던 터였다. 아버지 어머니 나 아내가 한열로 그 아래 열에 매형 누나 막내매제와 동생 순으로 누울 자리를 마련하였었다.

그 묘지공원에서 이즈음에 주중인 월요일에서 금요일에 낮 열 두 시 단 한차례 한사람만 모신단다. 하여 내 어머니의 입장 순서가 정해졌는데 가히 국장(國葬)급 예전(禮典)인 9일장으로 치루게 되었다.

세상 일 다 해석하고 받아들이기 나름일 터. 바이러스로 세상 일찍 떠나시는 이들과 가족들에겐 정말 송구해서 할 말은 아니다만, 그 또한 내 어머니 마지막 누리시는 복이다.

또 한가지 장의사에게 들은 설명이다. 장의사(funeral home)에서 치루는 마지막 인사(viewing)와 예배에는 참석인원 10명을 초과하지 못하고 주어지는 시간은 최장 두 시간 이내여야 하고, 묘지 안장 역시 참석인원 10명 이내여야 하고 시간은 20분을 넘지 않아야 한단다.

우리 가족들만 다 모여도 30여명인데…

어느 정도는 이미 알고 있던 사실들이기도 하여, 예식에는 우리 삼 남매 부부와 어머니의 막둥이 손자와 목사님 두 분 모시고 예식을 치루기로 했다. 머리 속에선 이즘 유행하는 zoom meeting으로 아이들과 함께 할 수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꽉차 있었다만 그래도 명색이 맏상주인 내가 zoom meeting을 한다고 왔다갔다 하기엔 그게 영 마뜩치 않아 차마 입을 열지 못하였다.

허나 그게 다 모두 쓸데없는 생각이었다. 어머니의 막둥이 손주놈에게 내 생각을 이야기 했더니 ‘걱정 말라’며 손주들 끼리 다 알아서 할머니와 가족 기록 영상도 만들고 zoom 으로 함께 할 수 있도록 할 터이니 염려 놓으란다. 하여 조지아 아틀란타 동생 식구들과 시카고, 워싱톤, 뉴욕, 필라델피아와 서울에 있는 손주와 증손들까지 모두 함께 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때때로 내 나이를 잊고 산다. 아이들이 그걸 깨닫게 해 준다.

내 어머니 최신의 소통 방법으로 인사 받으며 떠나시게 되었다. 이 또한 생각 나름. 어머니가 누리시는 복일게다.

오늘 어머니 사진 내 책상 가까운 벽에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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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하루 잘 보냈습니다.’ 인사 드린다.

이제 어머니의 하루는 새로 시작된다.

행복에

내 조로(早老) 탓인 줄 알았다. 어머니 보내고도 눈물 나지 않아 내 눈물샘 마른 줄 알았다.

만 하루 지나 터져 흐르는 눈물이 그치질 않는다. 내 눈물샘을 터트린 이는 내 신앙의 스승이자, 삶의 선생, 우리 부부의 연을 맺게 한 이, 이제 늙으막 초입에 선 나의 길동무를 자처한 사람 홍길복목사다.

어제 밤 어머니 보내고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아 독주 몇 잔 마시고 옛날에 내가 그에게 투정 부리듯 인사 몇 자 올렸더니 그가 보내온 예전처럼 따스한 위로다.

그 위로에 터진 눈물샘이었는데 눈물이 멈추지 않는 까닭은 슬픔이 아닌 넘치는 행복이 겨웠기 때문이다.

내 평생의 길동무이자 선생 하나 있어 느끼는 이 행복, 모두 어머니 덕이다.


생명의 주인이 되시는 하느님,
93년전 이 땅에 보내 주시어
삶의 한 부분을 함께 했던
주님의 딸을 어제 마침내 영원한 나라로
불러 주심에 감사를 드립니다.

오래전 조국 신촌 작은 집과 도장가게에서
가끔 뵈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심방을 가서 기도도 드리고
어려웠던 시절, 함께 음식도 나누면서
인생의 한 부분을 같이했던
그 때의 추억이 새롭습니다.

한남동이나 신촌이나 조국 땅, 그 어느 곳이 아닌
영원한 주님의 나라로 영구 이민을 떠나신 어머님,
보내주시기도 했고
다시 불러 주시기도 하시는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다시는 눈물과 아픔이 없고
시간과 공간에 매여 있지 아니할
영생의 나라, 평화의 나라에서 안식하시옵소서.

이젠 어머님이 우리에게 다시 오시진 못하고
언젠가 저희가 찾아 뵙겠습니다.

어머니가 계셨기에, 어머니의 태에서 나온
좋은 후배 영근이 부부와도
인생길의 동행자로 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모든 이별에는 슬픔이 있지만
그래도 약속 있는 이별에는 희망과 다짐이 있기에
어머님을 보내는 허전한 마음 뒤켠엔
눈물 뒤에 오는 감사와 아름다움이 있을 것이니
부디 편안히 가시옵소서.

오늘 저는 어머님께
Good Bye라고 인사드리지 않고
이렇게 인사올림니다.
See you soon !
See you again in Heaven !

신촌이나 델라웨어에서는 뵙지 못해도
주님 나라에서 다시 만나요 !

사랑과 존경을 드리며

시드니에서

신앙과 인생을 뒤 따라 가는
홍길복드림.


 

행복에.

천수(天壽)

‘이눔아! 넌 맨날 그렇게 쓸데없는 생각이 많냐?’ 어머니에게서 자주 듣던 핀잔이다. 그러고보니 참 쓸데없는 생각 많이 하고 살았다.

지난 며칠 동안 어머니 곁에서 정말 모든 쓸데없는 생각 내려놓는 맛을 보았다.

어머니의 숨소리에 얹혀져 전해 온 어머니의 세월과 나의 세월들이 그 숨소리의 강약과 편함과 힘듬과 거침과 고요함에 따라 내 생각들이 마구 뒤섞여 오갔지만 결코 쓸데없는 생각에 빠진 시간은 없었다.

오로지 어머니의 마지막 편안함을 위해 모든 쓸데없는 생각 버리고 어머니와 함께 숨 쉬었던 시간이란 따져보면 고작 몇 시간.

그 시간들을 허락해 주신 어머니와 신께 드리는 감사가 크다.

천수(天壽)를 누리신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은 고요함과 평안이었다.

변덕이 죽 끓듯 하는 내 성격에 얼마나 갈 줄 모를 일이다만 쓸데없는 생각 들 때마다 어머니 생각 하련다. 나 사는 날까지.

어머니 떠나신 밤에.

*** 어머니 마지막 숨 내쉬기 전에 아버지와 누이들과 나는 어머니 손을 잡고 기도했다. 구십 삼년 일 개월 어머니와 함께 해 주신 신에게 감사를 그리고 어머니의 영혼에 그 감사가 이어지기를…

그리고 고집 센 내 어머니의 마지막 기도… 내 아버지를 위하여.

천수(天壽)에 그리고 감사에.

하루 – 19

방은 고요하다. 어머니 곁에 앉아 함께 숨을 쉰다. 아니 엄마와 함께 숨을 쉰다. 엄마는 종이장같은 가슴을 풍선처럼 만들어 큰 숨을 내리 쉬다가 순간 가슴은 다시 평면이 되어 고요해진다. 한손으로 차가운 엄마 손을 잡고  한손으로는 엄마의 얼굴과 이마를 쓰다듬는다. 엄마가 컥 소리와 함께 목에 모아 두었던 숨을 내쉬면 나는 안도의 숨을 쉰다.

저쪽 다른 침대에 누워 이 고요와 숨소리를 허락하며 조용히 주무시는 아버지가 고맙다. 아내가 카톡으로 찬송가를 들려드리라고 음악을 보내왔지만 나는 이 고요가 더 좋다. 아내의 재촉 카톡 소리에 찬송가를 들려 드리지만 어머니는 무반응이다. 엄마도 나와 함께 숨쉬는 게 더 즐거울지 모른다.

엄마가 잠시 안정적인 숨소리를 이어간다. 일어나 창밖을 본다. 누군가 오늘이 어머니날임을 알리는 예쁜 그림과 글씨를 길에 그려 놓았다.

5-10-20

엊그제였던가? 집으로 꽃병 하나 배달이 왔다. 아내와 나는 당연히 딸아이가 보낸 것이려니 했다. 꽃에 꽂힌 카드를 열며 아내가 ‘웬일이야!’하며 소리를 높였다. 우리 내외의 예상을 깨고 아들내외가 보낸 꽃이었기 때문이다. ‘며늘아이가 시켰고만…’ 내가 던진 말이다. 곰곰 생각해보니 나 역시 다르지 않았다.

창밖을 바라보다 아들녀석 생각으로 헛웃음 짓다 떠올려 본 김광섭 시인의 시 <저녁에>이다.

저녁에

  • 김광섭

​ “저렇게 많은 별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나려다 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 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이렇게 정다운/ 너 하나 나 하나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다시 만나랴”

어디서...

화가 김환기의 그림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의 모티브가 된 시이다. 가수 유심초의 노래로 더욱 알려져 흥얼거리기도 했었다.

내 나이 스물 언저리,옛 명동 국립극장에서 본 연극의 제목이기도 하다. 소설 광장의 작가 최인훈의 작품이었고 그래서 그 연극을 함께 보았던 친구들 이름도 생각난다.

인연으로 치자면 엄마와 나는 수 억겁을 쌓은 연일 터이고 절대적인 만남의 예정이라면 신이 맺어 준 결단코 뗄 수 없는 만남이다.

고요한 방에서 그 연과 절대적 만남으로 이어진 엄마와 함께 ​숨을 쉬는 이 순간은 가늠하지 말아야 할 축복이다.

엄마의 손을 잡고 얼굴을 쓰다듬으니 입술을 달싹거리며 중얼거리시는데 소리로 이어지지는 못한다. 나는 ‘알았어  알았어’만을 반복한다.

엄마는 이제 별이 되려고 한다. 별이 되기 위해 마지막 한 모금의 숨조차 다 태우는 중이다.

정말 고마운 일 하나. 별과 사람, 하루와 천년 또는 오늘과 내일 그 공간과 시간을 넘어선 신을 엄마와 내가 믿고 있다는 사실.

허나 나는 아직 하루를 센다.

엄마 날에

하루 – 18

곡기 끊으신 지 딱 한 달 째이다. 과일즙을 끊으신 지도 한 열흘. 엊그제부터는 물까지 끊으셨다. 어머니와 헤어질 시간이 점점 다가오나 보다.

어머니는 여전히 곱다. 모두 세심히 곁에서 보살피는 내 누나 덕이다. 이따금 육이오 전쟁통으로 어머니를 데리고 가곤 하는 알츠하이머 증세조차 어머니에겐 마지막 좋은 벗일 수도 있다. 다섯 살 첫 딸을 피난 길에서 잃고, 전쟁터에 나갔던 아버지는 상이 군인으로 돌아왔던 그 시절이 어머니는 평생 아팟었나 보다. 종종 그 시절로 돌아가 우리들을 만나는 것을 보면.

날짜를 꼽아야 하는 시간이 다가왔다는 생각으로 마음이 두루 어수선하다. 허기사 늘 준비하고 있었던 터라 딱히 분주할 일은 없다.

‘하필 이 때….’라는 원망 섞인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만 만 아흔 세 해를 넘기신 어머니와 함께 하신 신에게 드릴 일은 아니다.

경기도 고양군 한지면 한강리 내 어머니가 나고 자란 고향이다. 지금의 서울시 한남동이다. 내 어릴 적 어머니는 내 손 꼭 쥐고 친정행을 하시곤 했다. 신촌 버스 종점에서 한남동 버스 종점까지 서울역에서 버스 한 번 갈아타고 가는 길, 나는 버스만 타면 졸았었다. ‘넌 버스만 타면 졸았지!’ 내가 서른이 넘을 때까지 들었던 어머니의 푸념이었다.

오늘 낮에 어머니가 가느다란 목소리로 내게 건넨 말, ‘얘야! 가지 마라.’ 나는 웃으며 답했다. ‘내가 가길 어딜 가요. 항상 여기 있지.’어머니는 이내 다시 잠이 들었다. 나는 곧 자리를 떳다.

지난 해 어느날엔가 아버지는 당신들께서 세상 떠나는 예배를 드릴 때 읽어야 할 성서구절과 찬송을 적어 내게 건내셨다. 오늘 집에 돌아와 한참을 그 기록을 찾느랴 시간을 보냈다. 잘 간직한다고 놓아두면 그 놓아둔 장소를 잊곤 한다. 딱히 나이 탓은 아니다. 예전부터 있어 온 습관이므로,

아버지가 지정해 둔 찬송은 새찬송 609장 ‘이 세상 살 때에’다. 그 1절 가사다.

<이 세상 살 때에 수고와 슬픔/  나그네 인생길 빨리 지나네/ 돌아갈 고향은 주님의 나라/ 주께서 예비한 주님의 나라>

어머니의 하루가 지고 있다.

하루 – 17

내 생각보다 빠르게 주지사의 결정이 내려졌다. 이번 주 금요일부터 그 동안 영업이 정지되었던 일부 업종들이 문을 열 수 있단다. 일부 업종이라고 했지만 거의 대부분의 업종들이 거리두기 등의 준수사항들을 지킨다면 영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다음 주부터는 내 세탁소도 정상영업을 해야겠다. 느낌이 왔었나보다. 아침 일찍부터 텃밭 만들기를 오늘로 끝내야겠다는 생각으로 부지런을 떨었다. 그리고 오후에 들은 주지사의 결정이었다.

열무, 배추, 고추, 파, 양파, 상추, 쑥갓, 들깨, 토마토, 오이, 가지, 시금치, 아욱 등의 채소와  백일홍, 금잔화, 데이지, 물망초, 칸나, 라벤다, 야생화 등의 화초 씨와 모종을 뿌리고 심는 일을 마치고 난 후 들은 소식이다.

이젠 평범한 일상 맞이를 준비해야 할 시간이다.

이런 저런 뉴스들을 훑다가 재밌는 기사 하나 눈에 뜨여 읽다가 문득 옛 생각으로 웃다.

내 눈길을 끈 것은 기사의 제목이었다. ‘듀퐁가(家)의 저택 돌담장 위엔 왜 둘쭉날쪽한 유리조각이  박혀 있을까? Why does a duPont mansion have a stone wall topped with jagged glass shards?’

내가 사는 델라웨어주는 한때 듀퐁주로 일컬어 질 만큼 듀퐁 가문의 위세가 한세기를 넘게 떨친 곳이다. 듀퐁가문의 시조격인 Alfred I. duPont이 유리조각들이 박힌 돌담장으로 둘러 쌓인 저택을 지은 때는 1901년, 당시 건축비가 2백만 달러. 오늘로 환산하자면 약 오천 삼백만 달러였단다.

제법 긴 기사를 소개할 필요는 없고, 10피트(약 3미터)나 되는 높은 담장에 유리조각들을 박은 까닭은 외부의 도적을 방지하기 위함이라기 보다는 내부의 가족들 간의 분쟁 탓이었다는 것이다. 스스로들의 감옥을 만들었다는 슬픈 이야기다. 듀퐁가는 오늘날에도 심심찮게 가족 분쟁기사들을 만들어 내곤 한다.

내가 기사를 읽으며 웃은 까닭은 내 어릴 적 기억에 남아 있는 담장 위에 박힌 유리조각들 때문이었다.

내가 살던 신촌엔 기와집들과 초가집들이 어우러져 있었고, 서교동으로 넘어가는 언덕받이에는 루핑집들 이른바 하꼬방집들이 들어차 있었다. 1960년대 중반, 제2한강교가 들어 설 무렵 그 하꼬방들은 이층 양옥집들로 바뀌면서 동네가 바뀌기 시작했다. 그리고 양옥집을 둘러싼 시멘트 담장 위엔 어김없이 유리조각들이 박혀 있거나 둥그런 가시철망들이 얹혀 있곤 했다.

내가 이리도 그 시절을 정확히 기억하는 단 하나의 이유는 내 첫사랑이 그 곳에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두 갈래로 땋은 머리카락에 흰 얼굴이 잘 어울렸던 그 아이가 사는 집 담장에도 유리조각들이 박혀 있었다.

나는 그 아이를 십 수년 전, 지금 내가 살고 있는 델라웨어에서 다시 만났었다. 그 무렵 어느 날이었다. 교회를 갔다 온 아내가  뜬금없이 건넨 말이었다. ‘자기 첫사랑이 여기 온대! 곧 만나겠네.’

사연인즉, 그 얼굴 하얀 아이의 동생 부부가 교환교수로 이 곳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동생 부부를 방문하러 온다는 것이었고, 그 동생과 아내가 언니와 나로부터 들은 이야기들을 맞추다 보니 딱 맞아 떨어지더라는 것이었다.

그 얼굴 하얗던 아이와 그렇게 만나 저녁을 함께 했었다. 그 아이의 가족들과 내 아내는 놀리기에 급급했지만, 그 아이와 수 십년 전 유리조각 박힌 돌담장 집에 살던 아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래 웃었다.

다시 돌아가는 일상의 어느 날, 내 채마밭에서 밥상이 차려지고 화단의 꽃들을 바라보며 하루를 웃는 모습을 그리며….. 또 웃다.

5-5-20

하루 – 16

<세계는 나날이 복잡해지고 있는 반면, 사람들은 세상이 돌아가는 상황에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 – 중략 – 사람들이 자신의 무지를 헤아리는 경우가 드문 이유는,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친구들로 가득한 반향실(反響室, echo chamber, 메아리방)과 자기 의견을 강화해주는 뉴스피드 안에만 갇혀 있기 때문이다. 이들의 믿음은 계속해서 공고해질 뿐 도전 받는 일이 거의 없다.> – 유발 하라리의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제15장 ‘무지’에서

오월이다. 여전이 비일상적인 생활이 계속되고 있지만 오월은 오월이다. 화사하다.

총을 차고 미국기를 흔들며 모든 가게들은 정상영업을 하고 경제활동을 재개해야 한다는 시위대 소식과 연일 늘어나는 바이러스 확진자와 사망자 소식들이 동네신문 온라인판 헤드를 함께 꾸미고 있다. 주지사는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조금은 강경한 편이다.

내 가계경제(家計經濟)와 어머니에게 주어진 시간들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에 이르면 나 역시 빨리 모든 것들이 정상화 되기를 바라지만, 공동체 사람살이로 보자면 조금은 진득해 질 때가 아닐까 한다.

아무튼 이즈음 돌아가는 상황으로 보아 빠르면 앞으로 두어 주, 길어야 한달 안짝으로 나는 코로나 바이러스 상황 이전처럼 다시 세탁소에서 많은 시간들을 보내게 될 듯하다.

마음이 급해지는 까닭은 마구 뒤집고 파 놓은 채마밭과 화단들에 대한 염려 때문이다. 뿌린 씨앗들과 심은 구근 들에서 파란 싹이 올라오고, 옮겨 심은 모종들의 하루가 궁금한 이즈음 생활을 어떻게 이어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서 오는 내 삶에 찾아 온  새로운 걱정이다.

생각컨대 아마도 내 일상은 코로나 바이러스 상황 이전으로 완벽히 돌아가지는 않을 것 같다.

달포 전 신문에 게재된 유발 하라리의 글 <코로나 바이러스 이후의 세상>을 처음 읽었을 때 떠올랐던 말은 ‘변곡점’이었다. 그것이 역사의 변곡점이든 내 개인적 삶의 변곡점이든 이즈음 내가 살아가고 있는 COVID -19  상황은 분명 하나의 큰 전환점임에 분명하다. 그 무렵 책장을 덮었던 하라리의 책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에서 느꼈던 그에 대한 생각의 연장이었을 수도 있다.

이즈음 COVID 이후 경제문제에 대한 논의들이 넘쳐나지만, 유발 하라리의 지적은 사람살이에 대한 문제였다.

나는 운 좋게도 이런 이야기들을 함께 나눌 벗들이 있다. 이건 분명 내가 누리는 더할 수 없는 축복이다.

벗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기 전에 요 며칠 동안 하라리의 글 <코로나 바이러스 이후의 세상>을 꼼꼼히 곱씹어 읽다.

혹시 관심있는 이들을 위하여 원문 링크와 번역한 글을 드린다.

무릇 이전(以前)과 이후(以後), 모든 시간들은 그 하루를 사는 이들의 몫이다.

https://amp.ft.com/content/19d90308-6858-11ea-a3c9-1fe6fedcca75 (영문)

https://docs.google.com/document/d/1lIU7c1JRVQ1D4W5n7vBY8CGCOQPJtSMlu6hfSvkmG-o/edit?usp=sharing (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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