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크

낮에 교회 담임목사께서 내 가게를 방문하였다. 그는 마스크 두 장을 우리 부부에게 건넸다. 마스크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아내에게서 들었다.

마스크는 서울시에서 뉴욕 영사관으로 보냈고, 영사관에서는 관할 지역내 각 한인회로 보냈단다. 내가 사는 델라웨어 한인회는 각 교회 등 지역내 한인 기관들을 통해 법적으로 규정된 노인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란다.

그저 고맙고 뭔지 모를 미안한 마음이 영 가시질 않는다.

먼저 서울시와 시민들을 비롯해 우리 부부의 손에 닿기까지 마스크로 이어진 모든 손길들에게 드려야 할 마땅한 감사가 있다. 삼십 수 년 서울특별시민으로 산 적은 있다만, 그 보다 더 긴 세월을 떠나 산 사람이 받는 물건에 대한 감사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미안함이 더욱 크다. 이즈음 전해지는 뉴스들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 감사에 대한 답과 미안함을 푸는 방안들을 생각해 본다. 서울시에 드리는 감사를 전하려고 서울시 홈페이지를 두루 둘러보며 저녁시간을 보냈다.

우선 마스크들은 내 아이들에게 주어야겠다. 아들 며느리, 딸 세 아이들에게 두 개를 어떻게 나누어야 할지 생각 많은 저녁에.

물소리

반 년 만에 주(州) 경계를 넘나들었다. 주 경계를 넘었다 했지만 고작 집에서 한 시간도 안 걸리는 뉴저지 남단이었다.

이제 세월은 쏜 살이 아니라 방아쇠 당긴 탄환이다. 그가 떠난 지 어느 새 일년이 되어 조촐히 한 번 모이자는 후배의 전언을 받은 것은 두어 주 전 일이다.

장광선선생님은 뉴저지 남단 조용하고 한적한, 작은 호수를 낀 언덕에서 쉬고 계셨다. Lake Park Cemetery 선생의 쉼터는 그에게 참 걸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묘지에는 오랜 동지이자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장선생님을 먼저 보내신 사모님의 지난 일년 여 시간들이 고스란히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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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함께 했던 벗들에 비하자면 내가 그를 안 세월은 짧다. 벗들은 그를 형님 또는 선배라고 부르지만 내가 그를 늘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까닭은 그를 안 세월이 짧아서가 아니라 그가 진정 내 삶의 선생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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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짧은 이력이다. <김대중 구출위원회, 5.18 진상규명, 전두환 독재타도 위원회 조직, 독립신문 편집장, 한국수난자 가족 돕기회 간사, 해외한민보 편집장 및 논설위원, 미주민주연합총무, 재미한국청년연합, 국제평화대행진 활동, 재미한겨레 동포연합 재정부장, 필라델피아 녹두회 등등>

그는 조국의 통일과 민주를 이루는 일을 자신의 업으로 여기고 살았던 사람이었다.

내가 그를 깊이 알게 된 때는 고작 스무 해도 지나지 않은 무렵이었다. 내가 아주 짧은 세월 잠시 동포신문을 발행하고 있었던 때였다. 매 주 그의 컬럼을  신문에 싣고 있었는데 내게는 그의 컬럼이 신문의 얼굴이었다.

전라도 장흥에서 태어나 장흥과 강진에서 유소년과 초기 청년기를 지냈던 그의 기억속에 남아 있는 남도의 바람과 물결, 그리고 사람들 그 터 위에 세우고 꿈꾸어 온 그의 세상을 풀어 놓은 글들이었다.

그가 꿈꾸던 통일과 민주는 모두 함께 주인 된 사람들이 사람처럼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으로 향하는 도구였다. 그즈음 나는 그의 남도 억양에서 나는 진한 사람 냄새를 맡곤 했다. 때론 그의 지나치게 과격하거나 많이 뒤쳐진 생각들이 그가 풍기는 사람냄새를 덮을 수는 없었다.

두 해 전에 후배들의 성화로 그가 남긴 글들을 책으로 펴낸 적이 있다. 그 책을 여는 그의 말이다.

<밀려가는 물>

나는 델라웨어강 하구의 작은 마을에 살고 있습니다. 강변에 마을사람들을 위한 작은 쉼터가 마련되어 있습니다. 한해 두어 차례 나는 그 곳에 나가 강변 의자에 앉아 흐르는 강물을 바라보며 이런 생각에 젖어 봅니다.

어제 지나던 물은 오늘의 물에 밀려 떠나고, 오늘의 이 물은 내일의 물에 밀려 바다로 사라지리라.

어제의 물과 오늘의 물 그리고 내일의 물은 지나간 물, 지금의 물, 새로운 물과 다른가 같은가? 다르다면 하염없이 다른 물을 받아들이는 바다는 어찌 그 많은 양의 물을 품을 수 있을까?

이제 그는 먼저 바다 되었다.

그가 흐르는 물이었던 시절에 소리쳤던 이야기들을 잊지 않으며 오늘의 물소리를 내며 흐르는 벗들과 후배들이 있다.

그의 고향 남도에서 한반도 남과 북을 넘어 전 세계에서 한국어로 느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이들이 마땅히 꿈꾸며 살아가야 하는 세상을 위해 오늘을 흐르는 물결같은 삶을 생각하며.

딱히 건강하게 오래 잘 사는 게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오늘을 어떻게 사느냐가 늘 문제일 뿐. 그가 오늘 다시 깨우쳐 주는 가르침이다.

우리들이 묘지에서 머무르는 내내 매 한 마리  높은 나무가지 위에서 함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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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광선선생님 일주기에.

폭우(暴雨)에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서 폭우를 맞았다. 비가 내리는 것이 아니라 마치 하늘에서 양동이로 쉬지 않고 물을 쏟아 붓는 듯 하였다. 천둥 번개 또한 쉬지 않고 이어졌다. 엊그제부터 이어진 열대성 폭풍우를 몰고 온 허리케인 탓이란다.

동네 슈퍼마켓 주차장이 물에 잠겼다는 뉴스도 보았고, 도로 곳곳이 쓰러진 나무들로 길이 막혔던 며칠 간이었다. 내 이웃집들도 폭우와 바람에 쓰러 넘어진 나무들로 한바탕 소란들을 피운 한 주였다. 다행이라고 말하긴 미안하지만 내 집 뒤뜰 나무들은 잘 버티어 주어  체인 톱을 손에 들지 않고 처리할 만큼만 잔가지들을 떨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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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아침만 하여도 날은 잠시 맑았었다. 가게에 도착하니 평소와 다르게 이웃 가게 앞이 분주했다.  건강 기능식품 판매점인 GNC 소매점이 이른 아침부터 마지막 가게 정리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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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옛 가게가 있었던 맞은 편 쪽에서는 공사장 굴삭기 소리가 요란한 아침이었다. 가게 문을 열고 아침 준비를 하며 잠시 지난 시간들에 빠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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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 수년 전 내가 가게를 시작할 무렵엔 지금의 샤핑센터는 이 도시에서 가장 크고 분주했던 상가였다. 식료품과 하드웨어, 생활용품, 자동차 수리 및 부품을 판매하는 유명 체인점들을 비롯하여 다양한 음식점들과 이미용실, 각종 소매가게들이 꽉 들어찬 곳이었다.

그러다 큰 된서리를 맞은 때가 2008년이었다. 이른바 리먼 브라더스 사태로 알려진 금융위기를 겪던 시절이었다. 샤핑센터에 있던 가게들 절반 이상이 문들을 닫고  떠난 후 샤핑센터는 시간이 갈수록 폐허처럼 변해갔다. 인근에 새로운 시설의 상가들이 들어서면서 샤핑센터는 나날이 황폐화되어 갔다.

그 사이 내 업종인 세탁업의 성쇠도 많은 부침을 겪었다. 한 때 우후죽순의 형태로 늘어나던 업소수는 거꾸로 폐업하는 숫자들이 늘어 이젠 손님들이 세탁소 찾기 힘들다는 말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 따져보니 내가 동네에서 제일 오래된 세탁소 점주가 된 듯 하다. 특별한 재주나 능력이 없어 얻어 낸 산물이다.

아무튼 그렇게 오늘 아침에도 세탁소 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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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봄부터 시작된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 상황은 2008년에 겪었던 충격을 훨씬 웃도는 일인 듯하다. 아직 그 끝을 모르기에 더욱 그러하다.

샤핑센터 건물주는 센터의 절반을 헐어내고 그 자리에 아파트를 세우고 있다. 상가의 상점 수는 한참 때에 비하면 그야말로 1/10 수준도 채 안된다.

이재(理財)에 그리 밝지 못한  우리 부부는 이 나이에도 하루를 일하며 보낼 수 있는 작은 일터가 있다는 것에 그저 만족하며 감사한다.

누구나 살며 그러하듯 우리 내외도 크고 작은 폭풍우와 숱한 천둥과 번개를 마주하며 여기까지 왔다.

내일이라고 크게 다를 것도 없고, 늘 그래왔듯 폭풍우란 지나가는 것이고…

아침과 저녁을 맞는 감사를 이어가는 그 날까지는.

집안정리를 하면서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해 내 서재 한구석에 쌓아 둔 상자 두개가 있다. 제법 많은 양의 VHS 테이프들이다.

당시만 하여도 제법 큰 돈을 들여 만들었던 우리 부부 결혼식 영상을 비롯해 아이들을 키우면서 담아두었던 기록들, 부모님들과 함께 했던 시간들이 담긴 테이프들이다. 80년대에 비디오를 찍는 가정용 카메라는 가히 이즈음 방송용 카메라 정도의 크기였거니와 한국과 미국을 왕복할 수 있는 비행기 값보다도 비쌀 만큼 내겐 고가(高價)였다. 과감히 그 돈을 들여 담아 두었던 기록들이다.

그냥 버리자니 너무 아깝고, 쌓아 두자니 부피도 크거니와 딱히 누가 시간 내어 볼 일도 아니어서 그냥 한구석에 처박아 둔 것이다.

VHS테이프를 디지털화해서 CD나 USB 등에 담아 준다는 광고들은 이따금 보았지만 또 다시 돈 들여 그렇게 남겨둔 들 그게 뭔 소용이 있겠나 싶은 생각에 그야말로 유기상태로 방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상자들이다.

그러다 맘먹고 내 스스로 VHS테이프 영상을 디지털 파일로 변환시켜  USB에 담을 수 있는 방법을  구글에게 묻고, 다른 사람들이 올린 경험들을 찾아본 뒤 파일 변환기와 편집기를 구입해 작업을 시작한다. 따져보니 128기가 USB 하나나 두개면 족할 듯 하다.

저 큰 상자 두개를 내 새끼 손가락 하나 크기에 다 담을 수 있는 그야말로 천지개벽 세상이다. 물론 이즈음 젊은이들에겐 싱겁지도 않은 일이겠다만.

아무튼 세상은 그렇게 변했다.

아직도 날은 뜨겁다. 이제 겨우 팔월 초입이니 이 더위는 한동안 이어질 게다. 바이러스 확진자와 사망자 수는 큰 변화없이 이어지는데 사람들은 이미 다시 느슨해졌다.

또 다시 찌는 오후에 어머니와 장인, 장모 쉬시는 곳을 찾다. 우리 부부가 기억하는 한 어머니와 장인 장모는 아직 살아 계신다. 우리 부부의 삶에서 느껴야 할 족(足)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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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차마 인정할 수 없을 만큼 빠르고 놀랍게 바뀌고 변하게 마련이지만 아주아주 오래전 먼저 깨달은 사람들의 고민들은 여전하고 답(答)도 이미 정해진 그대로다.

누구에게나 똑 같을 어제, 오늘 그리고 내일에 대한 시간 또는 신(神)의 간섭은.

하여 오늘 하루 누린 시간에 대한 감사다.

믿음에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 이후 달라진 풍경 가운데 하나는 온라인 모임인 zoom meeting의 일대 유행이다.

나는 온라인 모임 프로그램을 십 수년 전부터 사용해 왔다. 이즈음 유행인 zoom에 비하면 여러모로 부족한 프로그램을 이용했었는데 사용료는 월 120불 정도의 고액이었다.  미주 전역의 세탁인들과 정보를 나누고 대화를 잇는 목적으로 이 프로그램을 사용했었다. 내가 세탁업으로 거부가 된 사람도 아니거니와 지식도 일천하지만, 그저 세탁업이라는 직업에 자부심을 갖고 조금씩이라도 어제보다는 나은 세탁소를 운영해 가는 방법들을 함께 나누던 지난 세월 이야기다.

나이는 점점 들어가고 일이 힘에 부치기 시작한다는 생각에 하나 둘 일을 정리하면서 그 일도 접었다.

그래도 온라인 미팅은 이어와 이즈음에도 계속되고 있다. 이젠 나도 zoom을 사용하고 있고, 매주 한 번 모이는 모임에는 세탁인들이 아니라 필라 인근에 살며 세월호 가족들과 뜻을 함께 하는 이들이 모인다. 나는 이들에게서 참 많은 것들을 배우며 산다.

팬데믹 이후 아내가 나보다 zoom meeting을 더 많이 사용한다. 한국학교 수업 및 교사회의, 이사회, 한인회 등등 이즈음 아내는 가히 유행 따라 산다.

아내가 참석하는 온라인 모임 가운데 옛 친구들과 만나는 시간이 있다. 일주일에 한 차례 모이는 이 모임이 시작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어린 시절에 교회생활을 함께 했던 친구들이 족히 사십 년 넘는 세월이 흐른 후 화상으로 얼굴 맞대고 만나는 모임이다.

카톡 등으로 간간히 서로 간의 소식을 주고 받던 친구들 가운데 한 친구가  중한 병을 얻었단다. 그 친구를 위해 서로 기도해 주자고 시작한 온라인 모임이란다. 그렇게 한 주간 한 차례 씩 모여  함께 성경도 읽고 기도도 하며 사십 여년 만나지 못하고 살아 온 지난 세월들의 이야기도 나누곤 한단다.

그 친구들 몇몇은 나도 익히 기억하고 있다. 아내와 나는 한 교회를 다녔고 내게는 사 년 후배가 되는 친구들이기 때문이다.

아내에게 그 모임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내 또래 친구들을 생각했다.

한 해 후배인 종석이가 했던 말이 기억난다. ‘난 말이유,  어릴 때 주일학교라도 다녔기에 요만큼이라도 살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해본다우.’ 그를 본 지도 어느새 십년이 흘렀다. 그가 은퇴를 코 앞에 두고 있던 때였다.

최근 몇 년 사이 노부모들이 연이어 병상 생활을 하시다 한 분 두 분 떠나시며, 먼 여행길은 한 해 두 해 미루어져 왔다. 이즈음엔 한 분 홀로 남으신 아버지 얼굴 한 번 들여다 보는 일이 일과이다. 더더우기 지루하게 이어지는 팬데믹 까지 한국 여행은 이젠 계획에서 멀어졌다.

나는 아내의 이야기를 들으며 옛 벗들을 생각한다.

어찌 보냈건 흘러간 세월들에 감사를, 어떤 연으로 잇던 오늘의 소식들에서 서로 간에 위로를, 지나간 세월에 비해 턱없이 짧을 내일에 대한 소망과 희망을 나누는 만남들이 되기를 빌며.

믿음이란 딱히 극적일 까닭도 없고 절벽 끝에 서야만 만날 수 있는 것만은 아니므로.

우리 부부가 다니던 교회 이름은 대현大峴교회. 큰고개(大峴)에서 함께 뛰놀던 옛 벗들을 생각하며.

(십년 전, 딸아이와 함께 찾았던  옛 시간은 지금도 소중하다.)

상식(常識)에

이른 아침 젖은 안개가 자욱하다. 날씨는 오늘도 무척 찌려나보다. 에어컨 없이도 간밤에 편안한 잠을 누렸다. 아무렴, 버텨온 세월이 얼마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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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아침, 움직이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라는 생각에 이런 저런 뉴스들을 훑어 본다. 상식(常識)을 잃은 사회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다. 어차피 사람사는 세상에는 모든 이들에게 통하는 상식이라는 게 애초 존재하지 않는지도 모르겠다.

이슬을 밟고 뜰 정리하며 아침 땀을 흘리다. 아침은 늘 축복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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텃밭에서 거둔 깻잎, 고추, 오이 등속을 저려 우리 내외 한동안 먹을 밑반찬을 만들다. 오이 듬뿍 넣은 비빔 냉국수로 땀을 식히고, 왈 이열치열이라고 각종 야채와 오징어까지 넣은 호박전 부쳐 든든하게 배 채운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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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질하는 여유까지 부리며, 신영복선생의 ‘강의’를 음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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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작고 백성은 적다. 많은 기계가 있지만 사용하지 않으며, 백성들로 하여금 생명을 소중히 여기게 하고 멀리 옮겨 다니지 않도록 한다. 배와 수레가 있지만 그것을 탈 일이 없고 , 무기가 있지만 그것을 벌여 놓을 필요가 없다. 백성들은 결승문자를 사용하던 문명 이전의 소박한 생활을 영위하며, 그 음식을 달게 여기고, 그 의복을 아름답게 여기며, 거처를 편안하게 여기며 풍속을 즐거워한다. 이웃 나라가 서로 바라볼 정도이고 닭 울음소리와 개 짖는 소리가 서로 들릴 정도로 가까워도 백성들은 늙어 죽을 때까지 내왕하지 않는다.> -노자(老子) 제 80장

신영복선생은 노자 80장을 풀어 이렇게 설명한다. – ‘노자의 이상국가론{理想國家論}입니다. 규모가 작은 국가, soft-technology, 반전 평화, 삶의 단순화 등이 그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복결승(復結繩)’은 결승문자를 사용하던 문명 이전으로 돌아가자는 뜻입니다만 반드시 복고적 주장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간디는 ‘진보란 단순화이다(Progress is  Simplification)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무리 작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무한 시간과 무변(無邊) 공간으로 연결되어 있는 드넓은 것이라는 진리를 깨닫는 순간, 이 세상의 모든 사물은 저마다 찬란한 꽃이 됩니다. 아무리 보잘 것 없고 작은 미물이라도 찬란한 꽃으로 새롭게 태어납니다. 온 천지가 꽃으로 가득 찬 세계를 상상해 봅시다. 한마디로 장엄한 세계가 아닐 수 없습니다.’ –  화엄경(華嚴經)을 푸는 신영복선생의 가르침이다.

낯선 것도 이어지면 일상이 되는가 보다. 몹시 더운 7월의 마지막 일요일도 저물다.

석양(夕陽)에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집안 공기가 평소와 영 다르다. 후끈한 열기에 놀라 온도계를 보니 바깥 온도와 거의 맞먹는다. 에어컨 팬은 쉬지않고 돌아가고 있었다.

모든 기계 제품에 대해 문외한 이거니와  더더우기 전기와 연관된 물건이라면 손 될 엄두를 내지않는 내겐 난감한 일이 일어난 것이었다.

하필 오늘은 또 금요일 저녁이다. 사람을 부르기도 딱 쉽지 않은 날인데다 날씨는 찌는데. 아니나 다를까 몇 군데 에어컨 설치 및 수리 업체들에게 연락을 해보지만 빨라야 사흘 후인 월요일 운운이고 주말에 급점검이라며 웃돈을 요구하는 형국이었다.

심호흡 길게 한 후 조금 느긋한 마음이 되어 내 형편에서 취할 수 있는 최선에 방책에 대해 구글신(神)에게  물었다. 안타깝게도 구글신이 사용하는 용어들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에어컨과 전기에 대해서는 나는 무지하였으므로.

그대로 포기하기엔 너무 더웠다. 하여 십 수년 넘게 내 가게 기계들을 돌보아 준 이에게 전화를 넣어 사정 설명을 하고 혹시라도 내가 응급조치를 취할 수 있는 방법은 없겠느냐고 물었다. 그는 언제나 처럼 하나, 둘,  셋, 넷 그렇게 내가 할 수 있는 방법들을 알려 주었다.

그의 가르침대로 하나, 둘, 셋, 넷을 따라 점검해 보았지만 그저 땀만 더 흘렸을 뿐이었다.

그러다 문득 바라본 하늘엔 석양이 막 들어서고 있었다. 땀을 식힐 겸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다 그 하늘을 담아보았다.

구글신은 내 집에서 사용하고 있는 에어컨 시스템의 사용 가능 연령은 10년에서 20년으로 추정하며 평균 사용연령은 15년 쯤이라고 일러 주었는데 기록을 찾아보니 내가 에어컨을 새로 갈았던 것이 딱 만 15년 전 일이었다.

그렇게 잠시 생각해 본 신, 사람, 기계 그리고 하늘(자연)인데 모두가 그저 내 삶과 연결된 것들이었고, 이런 생각의 모든 시작과 끝 그리고 연결 고리는 모두 나라는 사실이었다.

앞으로 사나흘, 에어컨 없는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삶의 주인공은 그저 나일 뿐.

하늘은 늘 그렇게 아름답다. 석양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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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整理)에

폭염주의보가 내린 일요일,  온종일 집안에서 보냈다. 맞이하는 한주간 날씨예보는 연일 체감온도 100도를 오르내릴 것이란다. 정상적인 사람체온을 웃도는 수치이다. 허기사 여름인데 이런 더위를 한 두 번 겪은 나이도 아니고 이 또한 곧 지나갈게다.

이즈음 틈나는대로 집안 물건들을 정리하며 산다. 정리라곤 하지만 안고 살아 온 쓰레기들을 버리는 일이다.

두 해 전이었나, 세 해전이었나? 어느새 멀리 지난 일에 대한 기억은 비교적 정확한데 가까운 일일수록 가물하다. 아무튼 계절로 보아 이즈음 이었을게다.

필라에 사는 참 좋은 벗이자 인생 선배인 김경지형이 ‘집정리를 하는 중인데 김형(나)에게 줄만한 책들이 있어 원하면 갖다 드리려 고…’ 하는 전화를 주었었다. 그리고 며칠 후 경지형은 많은 책들을 내 집에 부리고 가셨다. 그 중 불교서적들은 이즈음도 내가 이따금 손에 들며 감사한 마음을 느끼곤 한다.

그러다 오늘 문득 그 때 집 정리하던 경지형 마음을 꿰뚫게 되었다. 그이 보다 조금 늦게 깨달은게다. 조만간 조촐하게 책장 하나 남기고 정리해야겠다.

그 맘으로 지하실에 쌓아 둔 서류뭉치들을 정리하다가 눈에 뜨인 신문 한 장이다. 따져보니 벌써 이십 오 년도 넘게 지난 세월 저 쪽 이야기다. 한인들 이야기를 실은 동네신문이었다. 당시 어찌어찌 내 가족 이야기를 중심으로 기사화 되었었다. 생각해보니 꿈 많았던 세월이었다. 당시만해도 한국 뉴스는 담쌓고 살았던 시절이었다. 내 나름으로 간직한 한국을 품고 미국시민으로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유민이 아닌 주인 되는 이민’운운 하며 살던 때였다.

누군가의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고 하지. ‘과거는 외국이다. 거기서 사람들은 다르게 산다’고.

지난 주간에 손님 둘이 각기 신문 한 장 씩을 들고 내 세탁소를 찾았었다.두 사람이 들고 온 신문은 공교롭게도 모두 ‘The Wall Street Journal’이었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둘 다 내 또래의 백인들이고 한사람은 남자 한 사람은 여자다. 둘 다 전형적인 우리 동네 중산층에 속한다.

남자가 들고 온 기사내용은 탈북자 노철민이 부패한 북의 모습을 토로하는 기사였고, 여자가 들고 온 기사내용은 박원순 서울시장의 죽음에 대한 기사였다. 어느덧 노회해진 나는 적당히 죽을 맞춰 그들의 관심에 고마움을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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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각기 남긴 말들이다. ‘북한은 역시! 근데 요즘 애들은 안 믿지…’, ‘아니, 좋은 일 참 많이 한 사람인데 그깐 스캔들 따위로 죽다니… 쯔쯔’

형편없는 대통령 트럼프가 딱 잘 한 일 하나 들자면 북한에 대한 뉴스를 안 믿는 미국인들이 많아지게 했다는 것 아닐런지… 그리고 죽음에 대한 사람마다의 생각 차이…

곰곰 따져보니 내게 외국은 비단 과거 뿐만이 아니다.

어쩌면 지금 내가 서 있는 지금 여기 말고는 모두가 외국 아닐까? 내게는…

정리는 버린다고 되는 것만은 아닌가 보다.

들꽃

며칠 전 US News & Business Report라는 신문사 기자라는 이와 전화와 이메일을 주고 받았다.

사연인즉은 그 신문사에서 코로나 바이러스 상황을 견뎌내는 Local Businesses를 다루는 기사를 준비하면서 영업주들의 이야기들을 듣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중 하나로 현재 내가 겪고 있는 사업상 이야기들을 듣고 싶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저 내가 겪고 있는 일들과 이즈음 느끼는 점들을 간단히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그 다음 날 CBS News에 실린 <세탁업의 최악 사이클: 세탁인과 재봉업자들이 겪는 코로나바이러스의 영향 – COVID 연대기 Laundry’s worst cycle: The coronavirus’ impact on dry cleaners and tailors – COVID chronicles>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았다.

기사는 이렇게 시작한다. ‘먼저 코로나 바이러스가 왔다. 그리고는 취소가 이어졌다. : 감염자가 급증하면서 주정부가 군중집회를 단속하여, 결혼식, 출장, 결혼기념일 축하 행사, 스포츠 대회, 종교적 휴일, 프롬, 졸업식 그리고 장례식 등 모든 행사들을 그만두게 되었다. 신부들과 졸업생들은 세계적 전염병이 중요한 날을 집어 삼키는 것을 지켜보았다. 또한 전국의 세탁인들과 재봉업자들은 자신들의 생계가 심각하게 무너지는 것을 보게 되었다.’

이 기사에 따르면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 초기에, 대부분의 세탁소들은 매상이 83 – 92% 감소했다고 하고, 지난 해 대비 80% 정도 매상이 감소하는 상황이 발생했다고 한다. 또한 이 기사는 여러 세탁소 주인들이 겪고 있는 저마다의 경험들을 다루고 있다.

나아가 이 기사는 전반적으로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바뀐 생활 패턴에 따르자면 세탁업의 미래는 그리 밝지 않다는 생각을 숨기지 않고 있었다.

이 기사의 마지막 부분은 뉴햄프셔주 시골지방 Littleton에서 Martin’s Cleaners를 운영하고 있는 Edward Martin의 말로 맺고 있다. “나는 사람들이 우리가 실패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우리는 끝까지 견뎌 나갈 것이다.”

내 개인적인 사정도 일반 세탁인들과 크게 다를 바 없다. 그리고 이즈음 하루 하루를 보내며 해 보는 생각도 Edward Martin씨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 부부가 일할 수 있는 날까지 최선을 다해 끝까지 견디어 보는 것이다.

이즈음 내가 누리는 즐거움 가운데 하나이다. 팬데믹이 발생한 지난 봄에 뒷뜰 언덕배미에 뿌린 야생화 씨앗들이 꽃으로 변해 내게 건네는 즐거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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몹시 무더운 날에.

흉내

아무런 계획없이 하루를 보내고자 했다. 공연히 내 감정에 기복을 일으키는 뉴스들도 보지 말고 아무 생각없이 아무 일도 않고 일요일 하루를 보내자 했다.

늦잠을 즐기는 맛도 보자고 간밤에 늦은 시간까지 앉아 있었다만 눈 뜨는 시간은 매양 같은 시간이었다. 뜰로 나가니 나보다 훨씬 부지런한 새들의 아침 수다가 한창이다. 코로나 바이러스 덕에 평생 처음 뿌려 본 씨앗들이 꽃이 되어 아침인사를 건넨다. 괜히 겸연쩍어 카메라를 찾아 들고서 꽃들의 인사를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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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맑고 아침이라지만 여름바람 치곤 기분 좋게 마르다. 모처럼 근처 공원이라도 찾아 걸어 보아야겠다는 생각으로 아내를 재촉하다.

공원길에서 이따금 마주치는 사람들이 서로 간 십여 걸음 가까워지면 마스크를 쓰곤 하는 모습들을 보면 뉴스들은 사뭇 딴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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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긋하고 여유로운 공원에서의 아침 시간들을 즐기고 돌아와 아내가 준비한 냉면 한 그릇으로 더운 몸 식히고 달고 단 낮잠의 여유까지 누리다.

일요일 오후 뒷뜰엔 여름의 열기가 가득하다. 부지런히 고추와 깻잎을 따다가 두부와 간돼지고기, 당면, 양파, 당근 등속을 다져 넣은 고추튀김과 깻잎 튀김을 만들다.

어머니 떠나신 후 감정 기복이 심하시다가 이즈음 조금 평정심을 찾으신 아버지가 몇 번이나 ‘맛있다’를 이으셨다. 누나와 막내동생도 ‘덕분에’라는 인사를 건넸다.  별다른 재주 없는 내가 늙막에 이런 어머니 흉내라도 낼 수 있어 참 좋다.

늦은 저녁, 임어당(林語堂) 선생이 전해주는 장자(莊子)의 글을 읽다.

<사람의 마음은 때로는 기뻐하고,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즐거워하고, 때로는 근심하거나 탄식하고, 때로는 변덕을 부리거나 고집을 부리고, 때로는 경망스럽거나 방종하고, 때로는 터놓거나 꾸며댄다. 이런 것들은 마치 텅 빈 악기의 구멍에서 나오는 음율처럼, 또는 습기처럼 돋아나는 버섯처럼 밤낮 교대로 눈 앞에 나타나지만 어디서 싹트는 지는 모른다.

아! 어디서 생기는지는 모르지만, 아침 저녁으로 이러한 감정의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그 연유한 바가 있으리라. 감정의 변화가 없다면 ‘나’도 없는 것이며, ‘나’가 없다면 이러한 감정을 취할 수 없다.>

아무 계획 없던 하루해가 저문다. 계획을 세우고 보내는 하루는 늘 허전한 구석이 있게 마련인데, 어쩌다 계획없이 보낸 하루는 알찬 듯하다.

오늘 내가 만든 허상(虛像) 하나일 수도. 비록 그렇다 하여도 오늘 하루에 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