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즈음 나는 많이 게으르다. 여느 해 이 맘 때이면 장사 나가는 아침은 아직 어두운 새벽이었을 터.
오늘도 게으른 아침, 이미 훤한 아침 햇살에 밀려나는 서편 구름 사이로 음력 팔월 보름달이 노닌다. 그 노는 모습에 한참을 넋 놓다. 이젠 이런 게으름이 싫지 않다. 흐음… 이젠 정말 나이 들어 가는 게다.
게으름에.
사랑하며 살아가는 세상 이야기
다른 건 몰라도 COVID-19 전염병에 이르면 한국은 내가 사는 곳에 비하면 가히 천국이다. 천국이 과하다면 그야말로 청정지역이라고 말해도 좋다. 어제 이 곳 주지사는 전염병 이차 파동을 준비해야 한다며 심각한 지금의 상황을 들어 주민들의 경각심을 일깨웠다.
지속적으로 하루 80여명 신규 확진자 수를 지속하던 상황에서 최근 한 주간 하루 110여명 꼴로 그 수가 늘고 있는 상황이란다. 마치 이즈음 한국 상황과 엇비슷해 보이기도 한다만, 여기는 인구 백만 명이고 한국은 오천 만명이니 이미 비교의 대상이 아니다.
내 가게가 있는 도시의 시의회는 며칠 전 실내 모임인 경우 12명, 실외 모임인 경우엔 20명으로 제한하는 현재의 모든 모임 인원 제한 규정을 지속하기로 결정 했단다.
특히 젊은이들이 문제란다. 규정을 어기고 이런 저런 모임이나 잔치자리들을 즐기며 확진자 수를 늘리고 있단다. 젊은이들은 전염병에 걸려도 병원신세를 지지 않고도 회복이 가능하곤 하지만 노인들이나 기저질환자들에겐 치명적이어서 문제란다.
식당업은 여전히 평시보다70% 이상의 매출 감소 상황이 지속되고 있단다. 내 업인 세탁업도 여전히 평소 매출의 50%를 넘나드는 수준이다.
이런저런 소식들을 훑다 보면 이런 상황은 생각보다 꽤 길어질 듯 하다.
은퇴 수순을 밟는다 한들 이르다 할 수 없는 나야 그리 큰 문제도 아니거니와 , 제 아무리 백세 시대라 하여도 그 역시 내 이야기가 된다는 보장도 없으므로 지금에 상황이 그리 걱정될 일은 없다. 그저 다만 아이들 걱정이지.
새들의 노래소리와 나비의 춤, 가을 꽃들의 정취에 취해 흐르는 구름과 지는 해 넋 놓고 바라보며 이런저런 시름 떨치지 못하며 맞는 시월에.
이른바 불알친구들은 제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수 십 년 만에 어쩌다 목소리를 들어도 서로간 이내 옛날 날(生) 모습으로 돌아간다. 내 경우에는 신촌 고향 친구들과 고등학교 이전 친구들이 대개 그러하다. ‘쨔샤’, ‘새꺄’ 등의 호칭이 절로 나온다.
청년 시절 이후에 만난 친구들은 아무래도 어디서 어떻게 만났느냐에 따라 각기 적당한 거리가 유지되기 마련이다. 물론 내 경우에 한한 것일 수도 있겠다.
내 스물 무렵, 1970년대 초반에서 1980년 대 초반에 연을 쌓았던 친구들이 있다. 친구 뿐만 아니라 선후배 나아가 많은 선생님들까지 대개의 경우 내 삶에 큰 스승들이었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들과의 교류는 내 삶에 누렸던 큰 축복이었다.
그 시절 우린 모두 동지(同志)였다. 유신 철페, 독재 타도, 민주화, 통일의 담론들로 뜻이 엇비슷했던 만남이었다.
세월이 흘러 그 시절 대부분의 선생님들은 세상을 뜨셨고, 친구와 선후배들도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이제 저녁 노을 길들을 걷고 있다.
그 시절 벗들을 생각하면 일찌감치 떠나와 살고 있는 나는 늘 부끄럽다.
그 숱한 얼굴들 가운데 내가 아는 한. 그 스물 무렵 모습을 거의 그대로 간직하며 살아 온 친구가 하나 있다.
내가 이민을 오던 그 무렵 그는 빈들로 나아갔다. 그리고 오늘까지 그는 빈들에서 머물고 있다. 그 곳에서 <누군가 만져주>고 <누군가의 손을/ 무작정 기다리는> 사람들 곁에서 <나무>처럼 살아 왔다. 노동자, 이주 노동자, 다문화 가정 아이들이 그 나무 아래 함께 하는 빈들에서 오늘도 머문다.
그 긴 세월 나는 그를 본 적은 없다. 종종 전해 듣는 소식은 언제나 그대로다.
그는 조금 이른 은퇴를 했다. 듣기로는 젊은 시절 겪어낸 고문 후유증으로 몸이 안 좋다고 했다. 그가 은퇴 후 시집 한 권을 펴냈다. 그의 자전 시집이란다. 시집 제목이 <바닥이 하늘이다>이다. 그 답다.
그의 시집을 넘기며 그가 부른 삶의 노래들을 듣는다. 그 중 하나이다.
<나무>
한 곳에서/ 얼마나 오랜 세월 서 있을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친구들을 지나 보낼지/ 바람을 맞을지
당신의 사랑은 그런 것인가요/ 한 곳에 서서 한 곳만을 향하여/ 항상 손을 벌리는 것….
– 중략 –
하늘이 좁아/ 가리고 싶은 마음으로/ 넓게 안테나를 세우고/ 모든 것을 끌어 안으려는 마음/ 아무도 모르게 속삭이는/ 작은 소리에도 상처 받으며/ 견디고 또 견디며/ 뿌리 내리는 것
-중략 –
누군가 만져주지 않으면/ 누구와도 사랑할 수 없는 / 외롭고 쓸쓸한 사랑
그래도 모든 것을 주기 위하여/ 긴 세월을 참으며/ 무심하게/ 누군가의 손을/ 무작정 기다리는 것/ 노래하며 춤추며/ 기도하며 바라며
긴 세월 올곧게 빈들에서 머문 그는 이미 신이 믿고 쓸만 한 거목이 되었다. 신은 그를 잘라 참 좋은 교회당 하나 지으실만 하실게다.
마루 깔고 남은 잡목으로 나 혼자 즐길 의자 하나 만들어 놓고 낄낄대는 내게 이렇게 거목이 된 벗 하나 있다는 건 오로지 내가 누리는 축복이다.
김규복목사. 그의 건강과 아직 해야 할 많은 일들을 위해 기도하며.
지금 내가 사는 곳에서 <바닥이 하늘>인 세상을 위해 나름 꿈꾸며 사는 후배들과 함께 그의 자전적 시집을 나누려 한다.
세상 소식엔 제 잘난 사람들 이야기들이 넘쳐 나지만 하늘은 이미 가을이다. 사람살이 아직은 유한(有限)이 무한(無限)을 품을 수는 없다. 어쩜 신(神)은 그렇게 영원할지도 모른다. 그 사이에서 숱한 사기질과 도적질은 이어질 것이고. 그리고 또 때가 되면 산자들은 계절을 맞는다.
달포 전 허리케인 영향으로 심한 비바람에 나무가 쓰러져 차고 지붕을 덮쳐 놀랐던 앞집 사내는 나무들을 다 잘라 버려야겠다고 했었다. 그는 아직 젊다. 하여 행동도 빨랐다. 그의 말대로 거금을 들여 나무 열댓 그루들을 잘라 버렸다.
하늘이 너무 맑아 모처럼 어머니와 장인 장모 쉬시는 곳을 찾다. 반 마일 거리 떨어져 있는 두 곳 모두 맑은 하늘과 환한 빛을 한껏 누리는 장소라 참 좋다.
주문한 지 두어 달 넘어 어머니 묘소 앞 꽃병이 마련되었다. 여기와 저기 사이 그 틈새를 이용해 도적질 하기로는 장례업종도 만만치 않을게다. 알루미늄 캐스트 꽃병 하나에 팔백 불이나 요구하는 녀석에게 난 속으로만 외쳤었다. ‘이런 도적놈들!’ 맑은 가을하늘 아래서 만나는 어머니 앞에서 그 미움 그냥 가셨다.
돌아오는 길, 모처럼 동네 공원 길을 걸었다. 공원도 사람 손길이 닿아 만들어진 곳이긴 하지만 자연에 가까워 참 좋다.
저녁 나절 뜰을 돌보다 맛 본 세상, 꽃은 그림자도 아름답다.
구월 들어 ‘가족들은 모두 평안하시지요?’라는 인사를 건네는 손님들이 하나 둘 씩 늘고 있다. 지난 삼월 이래 처음으로 내 세탁소를 다시 찾는 손님들이다. 그렇다 하여도 가게는 여전히 한가하다.
그 한가함을 달래기 위해 놀이 삼아 시작한 deck과 patio 만들기도 거의 끝나간다.
놀이를 하다 문득 떠올린 고마운 얼굴이 하나 있다. 그가 없었으면 내가 감히 이 놀이를 시작할 엄두를 못 냈을게다. 그는 참 조용한 사람이었다.
삼십 수 년 전 이민을 온 이후 한 동안 나는 이 곳에 잘 적응을 못하고 있었다. 다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을 굳힐 무렵 우연히 아파트 입구 우체통에서 한 사내를 만났다. ‘한국 분이세요?’ 그가 내게 건넨 첫 인사였다. ‘저는 조용합니다.’ 그는 그의 이름 조용하처럼 정말 조용한 사람이었다.
이튿날부터 그를 쫓아 다녔다. 주택 공사장에서 외벽을 붙이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때까지 못질 한 번 제대로 해 본 적 없는 내겐 신세계였다. 그렇게 망치와 톱을 손에 쥐고 사는 하루 하루를 즐겼다. 이년 조금 넘는 세월을 그와 함께 했었다.
남자 형제가 없는 나는 누군가를 형이라고 부르는 일이 거의 없다. 더더욱이나 이민 이후엔 아주 없다. 매형 한 분 빼 놓고는 형이라고 부르는 이는 조용한 사람 딱 한 사람이다. 내가 여기서 이만큼이라도 살고 있는데 큰 도움을 준 고마운 사람이다.
내가 deck 만드는 놀이를 가능하게 해 준 사람이기도 하다.
살며 연을 쌓은 모든 만남들이 따지고 보면 삶에서 느끼는 고마움의 원천이어야 할게다.
펜데믹으로 하여 올 봄 평생 처음 뿌려 본 꽃씨들이 꽃이 되어 내 뜰에 나비들이 노닌다.
가게 매상은 여전히 반 토막을 채우지 못하는 형편이지만 서로간 가족들 안부를 묻는 손님들을 만나는 일은 즐겁다.
‘놀라워 놀라워, 도대체 믿기질 않아! 도대체 쬐그만 당신이 어떻게 혼자 저렇게…’ 이웃집 안주인이 던지는 호들갑 인사가 싫지 않던 날에.
살며 내겐 전혀 걸맞지 않는 유혹의 소리를 들을 때가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여러 번 그 유혹의 소리들이 진짜 내 것인 줄로 알고 착각했던 때들이 있었다. 돌이켜 후회하지는 않는다. 그게 다 오늘의 나를 만든 모습이기 때문이다. 오늘의 나는 언제나 소중하고 감사의 시원(始原)이라는 생각으로.
내 세탁소 카운터 한 쪽 벽면엔 몇 개의 사진들과 시를 새겨 놓은 나무 판넬들이 걸려 있다. 사진들은 내가 찍은 풍경들이거나 가족 사진들이다. 딱 한 개는 야구의 전설적 영웅인 Babe Ruth가 빨래를 담은 hamper에서 낮잠을 즐기는 사진이다. 생각할수록 아린 옛 벗이 세탁소 잘 되라고 주고 간 것이다. 그리고 시 몇 편들은 내가 좋아하는 이해인 수녀의 시를 영역해 걸어 놓은 것들이다.
종종 손님들은 시와 사진들에 대해 묻곤 한다. 카메라의 기종을 묻기도 하고, 렌즈에 대해 묻기도 하며, 시인에 대해 묻기도 한다. 그때 마다 내가 하는 대답이다. “그저 취미이고 좋아하는 것들인데 전문적 지식이 전혀 없답니다. 그저 제 격에 맞는 싼 카메라이고, 시도 그저 제가 좋아할 뿐이지요.” 때론 그걸 팔라고 하는 이들도 있어 아주 난감할 때도 있다.
내가 또 하나 즐기는 취미 하나는 매 주 일요일 아침에 세탁소 손님들에게 띄우는 편지 쓰기다. 거의 15년 가까이 이어져 온 일이다. 이 편지에 대한 이야기는 참 많다. 언젠가 이 편지들을 정리할 여유가 있었으면 하는 바램 보다 아직은 편지 쓰기가 조금 더 이어지기를 바라는 욕심이 더 크다.
아무튼 그 편지 마무리에는 시를 한 편 씩 달려 보내곤 한다. 내가 좋아하는 시인들의 시편들이다. 때때로 편지를 쓰는 시간 보다 시를 고르는 시간에 몇 배나 많은 시간들을 쓰곤 한다. 주로 영미 시인들의 시편들이지만 때론 한국 시인들의 시를 번역해 보내주기도 한다. 아주 이따금 씩은 내가 쓴 것을 달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사족을 반드시 붙인다. ‘ 시(詩)가 아닌 제 낙서’라고.
그리고 어제 어느 손님에게서 받은 제안이다. 자신을 계간지 Dreamstreets의 편집장이자 시인이라고 소개한 그는 지난 몇 달 동안 내 가게를 드나들고 내 주말 편지를 받아 읽으며 생각 끝에 내게 제안한다고 하였다. 델라웨어 인근의 시인 등 예술가들이 함께 하는 동호인지 같은 것인데 오는 12월호인 겨울호에 내 글을 싣고 싶다는 제안과 함께 시인들이 함께 하는 모임에 참여해 줄 수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그저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난 그저 세탁소 일을 할 뿐이랍니다.’
사실 이런 제안이 처음은 아니었다.
세탁소를 시작한 이래 종종 내가 걸려 넘어져 크게 낭패를 본 사건들은 대개 ‘아이고 세탁소 할 사람이 아닌데…’라는 유혹에 혹한 결과였다.
오늘 저녁 그가 장문의 이메일을 보내 왔다. 그가 쓴 시 몇 편들과 함께.
유혹에.
노동절 연휴가 끝나간다. 여느 해 같았다면 세탁소가 활기를 띄는 계절을 맞아 마음이 분주해지는 시기이지만 올해는 그럴 기미가 전혀 없다. 가게 일은 그저 강태공이 되어 세월을 기다릴 뿐이다.
연휴 사흘 동안 빡센 몸 노동을 즐겼다. 나 혼자 들기 버거운 나무 목재들과 자갈과 모래 그리고 돌덩어리들과 땀 흘리며 씨름하며 보냈다.
지난 한달 동안 틈 나는 대로 땅을 파고 고른 땅에 지주를 세워 deck을 만들고, 자갈과 모래를 다진 땅 위에 pavestone을 깔아 patio 를 만들었다.
연휴 계획대로 정말 잘 쉬었다.
삼시 세끼와 간간히 특식까지 내 쉼의 원천이 되어준 아내에게 감사다. 한국학교 동료가 주었다는 포도는 쉼의 농도를 더해주는 설탕물이었다.
체질에 맞지 않아 잘 입에 대지 않던 맥주의 시원한 참 맛도 많이 즐겼다.
노동이 곧 쉼이고 창조이자 사랑이어야 한다고 외쳤던 이가 있었다. 신학자 도로테 죌레 (Dorothee Soelle)다.
신과 내가 노동을 통해 하나가 된다는 것은 뭔 크고 엄청난 일들이 아니다. 신과 나 사이에 중간자 없이 일에서 쉼을 맛보고 그 일을 통해 사람살이 기쁨을 맛본다면 그게 바로 천국이다.
쉼이든 일이든 신 앞에서(또는 신 앞에 선 내 모습에서) 하루의 즐거움을 느낄 수만 있다면 삶은 축복이다.
“미쳤어, 미쳤어, 모두가 미쳤어!” 가게 문을 들어서며 Rose 할머니가 내게 던진 말이다. 내 가게 30년 단골인 할머니는 부부 모두 유태계이고 남편은 은퇴 의사이다. “내가 여기로 오는 길에 바닷가로 가는 1번 도로를 거쳐왔는데 엄청 막히더라고… 아니 지금이 바다로 놀러갈 때냐고… 암튼 다 미쳤어!” 바닷가에 부부 소유 콘도가 있는 할머니의 코로나 상황에 대한 걱정이었다.
적당히 눙치며 대꾸해 주고는 그녀의 세탁물들을 차에 실어 준 뒤 눈에 들어 온 이웃 그로서리에 자리잡은 가을을 만났다. 누런 호박들과 장작들, 그래 어느새 구월이다.
눈을 드니 하늘빛도 이미 가을이다.
같은 시간 엇비슷한 공간에서 사는 사람들일지라도 생각은 정말 저마다 다르다. 그래 아직은 사람인게지.
‘공감’ – 그 폭과 크기의 확대를 위해 누가 더 최선을 다하나 하는 싸움을 보는 이즈음.
내 조촐한 아침 식사에 감사하며 내 노동의 한계를 측정하고 있다.
Labor Day 연휴에.
누가 하라고 시켰다면 손도 대지 않을 일이었다. 그저 내가 좋아 벌린 일이다. 그저 작게 시작한 일이었다. 헌 것 뜯어내고 새 옷을 입혀 보자는 생각이었다. 막상 손을 대고 보니 생각치 않던 일에 더해 욕심이 자꾸 보태진다.
애초 세웠던 계획은 어느새 기억조차 없다. 그냥 맘 내키는 대로 시간이 허락하면 하는 일이 되었다.
그렇게 땅을 파고 땅을 다지며 높이를 맞춘다. 자갈을 덮으며 또 생각이 달라진다. 어느새 그냥 즐기는 일이 되었다.
믿음 또는 교회, 사찰, 종교기관, 조직 또는 체제, 아니 이념 사상 그 무엇이라 부르든 모두 저마다 제 머리 속 크기만한 신들을 안고 살며 벌이는 일들 아닐까?
저마다 제 욕심과 이기 – 그것이 개인이든 집단이든 – 그것 빼고 나면 남는 것은 무엇일까?
세탁소에서 손님들을 맞으며 날아갈 듯 기쁨에 겨워 내 삶에 크나큰 자긍을 맛 볼 때가 있다.
일테면 ‘You have contributed to the health, welfare, and happiness of each person with whom you have come in contact here in Newark. The beautiful photographs you share with us, the poems, both those translated from Korean and those already written in English give comfort, knowledge, and enrichment to all who receive them.’ 인사치레도 기분 좋은 것이지만, 가장 큰 것은 ‘너 예수 믿지!’하는 말이다.
어쩌다 그 말을 들을 때면 하기 쑥스럽고 부끄러운 말이지만 ‘내가 잘 살고 있구나’하는 맛을 느끼곤 한다. 나는 정말 예수쟁이가 되고 싶었고 지금도 그렇다. 한땐 거창하게 허황된 꿈도 많이 꾸고 살았다만, 신이 내게 허락하신 재주 안에서 하루를 그렇게 꾸려 나갈 수만 있다면 하는 생각으로 산다.
그렇게 난 예수쟁이이고 싶다.
뭐 특별히 큰 생각 없다.
예수가 선포했듯이 신과 나 사이에 그 누구도 중간에 개입할 수 없고 중간자로 사기칠 수 없다는 믿음이다. 그것이 믿음, 교회, 종교, 이념, 사상 그 무엇으로 불리우던 간에.
신앞에 홀로 선 단독자가 될 것을 가르쳐 준 내 신앙의 스승 가운데 한 사람인 본회퍼를 능멸한 수준 이하의 잡사기꾼 전광훈이라는 놈 뿐만이 아니다. 교회와 사찰의 크기가 문제도 아니다.
신 앞에서 자기를 잃어 버리고 신과 나 사이에서 착취하는 중간자에게 정신 빠뜨리는 일이 바로 죄이고 악이다.
중간자에게 얼 빠뜨리면 사람이 망가진다. 망가지는 게 나만이 아니라 너와 함께 우리가 망가진다.
예수가 저주하며 혼낸 이들은 중간자, 가진 자, 권세 있는 자들 만이 아니다.
신 앞에서 자기를 잃어 버리고 중간자, 가진 자, 권세 있는 자들에게 얼빠져 노는 게으른 자, 무지한 자, 오만한 자들에게도 만만치 않게 저주를 퍼부었다.
이게 내 믿음이다.
날 좋은 일요일, 땅을 뒤집으며 고집으로 부려보는 욕심 하나. 정말 예수쟁이가 되고 싶다. 그냥 소소한 내 일상 속에서.
이즈음 일상 가운데 새롭게 굳어져 정해진 일과가 있다. 매 주 두 차례 아버지의 식사를 준비하고 차려 드리는 일이다.
올 봄에 어머니가 돌아 가신 후 아버지에게 제일 먼저 찾아 온 가장 큰 스트레스는 매 끼니 식사였다. 칠십 년 넘도록 어머니가 해 주시는 밥상을 받아 오신 아버지에게 혼자 밥을 해 드시는 것이 제일 두려운 듯 했다. 어머니 덕에 한국식 밥상을 평생 즐겨 오신 아버지에게 노인 아파트 식당에서 제공되는 음식은 입에 맞지 않으셨다.
하여 나와 누이들은 당번을 정해 아버지의 식사를 책임지기로 했다. 맏딸인 누나가 사흘을 나와 누이 동생이 각기 이틀씩 아버지의 식사를 준비하여 차려 드리기로 정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처음 두어 달 간은 이리저리 힘들어 하시는 모습을 보이시던 아버지는 이즈음 많이 편해 지셨고 우리들이 차려 드리는 밥상을 아주 즐기고 계신다.
돌아가신 어머니에게 이즈음 내가 고마워 하는 것 가운데 하나는 음식을 만드는 재능을 물려 주신 것이다. 아내에게 부탁을 하면 아니될 것은 아니지만, 어머니가 주신 재능으로 가급적 어머니 솜씨를 흉내 내어 아버지를 즐겁게 해 드리는 작은 즐거움을 누리고 있다.
그렇게 아버지에게 드릴 밥상을 준비하여 아파트를 찾는 저녁 무렵이면, 시원한 그늘이 진 노인 아파트 한 쪽에 할머니 몇 분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담소를 나누는 모습을 보곤 한다.
처음에는 그녀들과 가벼운 눈인사 정도를 나누다가, 이어 손을 흔들게 되었고 이즈음은 아주 지극히 가벼운 인사를 나누는 사이가 되었다.
어제도 여느 날처럼 그녀들은 환한 웃음으로 나와 인사를 나누었다.
어느새 8월의 마지막 일요일이다. 지난 봄 이후 우리들 모두에게 잃어버린 일상도 있지만 새롭게 다가 선 일상들도 있다. 어떤 일상이건 그 일상을 맞이하여 대하는 것은 바로 나다.
아버지가 살고 계신 노인 아파트에서 만나는 할머니들의 웃음으로 내가 누리는 작은 천국에 감사하는 하루다.
종종 그 아파트를 나서면 만나는 길인 Skyline Drive에 서서, 지는 석양이 주는 아름다움에 빠져들곤 한다.
웃음을 잃지 않는 한,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든 삶의 순간들은 아름답고 뜻있는 시간들이 아닐까?
이제 9월, 어느새 귀뚜라미 소리를 듣는다.
웃음이 이어지는 새로운 한 달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손님들에게 띄우다.
팔월 마지막 일요일 아침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