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그 롤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진 하루 스물 네 시간이지만 그 시간의 흐름은 저마다 다 다르다. 사람에 따라 다를 뿐만 아니라 같은 이에게도 하루 하루 각기 그 흐름의 속도는 다를 수 있다.

생각할수록 미안한 마음이 커지는 후배의 일주기 소식에 나는 ‘아니 벌써?’ 했었다만, 오늘 일주기 추모 자리에서 후배의 아내는 사뭇 길었던 일년의 시간을 이야기했다. 후배 아내의 이야기를 들으며 떠올려 본 말, 공감 – 잠시만이라도 서로간 시간이 흐르는 속도를 맞추어 보는 일이 공감 아닐까?

그렇게 필라를 다녀 온 길, 내침 김에 한국 식품 장을 보고 돌아왔다. 큰 장을 보고 온 일도 아닌데 우리 두 내외를 위한 작은 냉장고 냉동 칸이 만석이 되어 한참을 정리하였다.

냉동 칸을 크게 자리 잡고 있던 녀석은 에그 롤이었다.

이민 와서 처음 살았던 아파트에서 있었던 벌써 삼십 수년 전 일이다. 아파트 이웃 동에 한국 분이 새로 이사를 왔었다. 그의 남편은 중국인으로 제법 몸값 나가는 중식당 주방장이었다. 미국 어디를 가든 제 몸값 톡톡히 받을 수 있다는 상당한 자부가 넘쳐났던 이었다. 그 넘쳐났던 자부 덕에 미국 웬만한 도시는 두루 섭렵했다던 부부였다.

그 한국 아내가 마치 자기 어머니 같다며 내 어머니를 몹시 좋아하며 따랐었다. 종종 어머니를 초대하곤 했었는데 그 때 어머니 입맛에 딱 꽂히셨던 게 ‘에그 롤’이었다. 어머니는 그 중식당 주방장에게 ‘에그 롤’ 만드는 법을 전수(?) 받으셨다.

그 뒤로 어머니의 손주들은 어머니가 만드신 에그 롤을 간식으로 먹으며 자랐다.

그리고 지난 연말 성탄 연휴 기간에 모처럼 만난 어머니의 손주들이 돌아가신 할머니를 생각하며 할머니가 만들어 주셨던 에그 롤을 만들며 하루 해를 보냈었다.

어느새 큰 조카 아이가 사십 줄이고 막내 조카 아이도 서른을 넘어섰다. 모두 어머니 덕에 짝을 지어 어머니의 증손들도 열이다. 그 아이들이 모여 만든 에그 롤인데, 할머니 닮아 어찌 그리 손들이 큰지 우리 내외 몫으로 건네 받은 에그 롤이 차지한 냉동 칸의 자리가 그리도 컸다.

그렇다. 내 믿음이다.

스물 넘는  어머니의 손주들, 증손들이 모여 에그 롤을 만들어 먹고 나누며 추억 하는 한 내 어머니는 여전히 살아 계시 듯, 스물 넘는 이들이 모여 함께 그를 추억한 저녁 밥상에서 나는 아직도 여전히 미안한 마음 숨길 수 없는 후배를 만난 것이다.

*** 에그 롤을 만들며 할머니를 추억하는 글을 페북에 올린 참 기특한 내 아들 녀석 내외와 함께 어제 밤, 이젠 또 덤덤해 져야만 하는 연말 연시 불놀이 꽃놀이를 즐겼다.

20230106_221317 DSC05101 DSC05110 DSC05115 DSC05128 KakaoTalk_20230106_231308585

안개 속 바램

온 종일 안개가 내 눈이 닿는 세상을 덮고 있다. 이른 아침 눈을 뜰 때부터 밤이 깊어 가는 무렵까지 거두어 지지 않는 안개 속 세밑 하루를 보낸 것은 내 생애 처음이다. 하여 삶은 늘 경이롭다.

이렇게 안개 속에 2022년 한 해를 보낸다. 돌이켜 아쉬움 없이 접은 달력은 없었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 나는 감사함으로 그 아쉬움을 덮는다. 신이 내게 허락한 믿음 덕이다.

나 자신만의 일로 뒤돌아 보자면 그저 감사만이 차고 넘친 한 해였다. 코로나로 며칠 고생했던 기억도 있다만, 나나 아내나 큰병치레 없이 건강하게 보낸 시간에 대한 감사가 크다. 이젠 많이 쇠하시긴 하였으나 아직은 비교적 맑은 정신을 유지하고 계시는 아버지가 만 아흔 일곱을 세고 계시다는 감사도 크다.

아들 며느리, 딸 사위 모두 언제나 밝은 모습으로 내게 다가오는 즐거움에 대한 감사는 어디에 비하리. 그 나이에 어미 아비에게 말 못할 아쉬움과 아픔들이 어찌 없겠느냐만, 늘 밝은 내 아이들에게 그저 감사 뿐.

무엇보다 우리 내외 아침에 나가 저녁에 돌아오는 일터와 그 일터에서 만나는 사람들과의 즐거움을 이어온 한해에 대한 큰 감사는 곱씹어 마땅하다.

다만 아쉬움을 넘어 분노로 이어지던 한국뉴스들이 넘쳐난 한해에 대한 기억을 그대로 품고 새해를 맞는 답답함이 있다만…. 한국뉴스는 여기 아주 작고 좁은 한인사회 이웃관계에 그대로 영향을 미치곤 하기에 결코 먼 뉴스들이 아니므로.

아무튼 신이 허락해 주신 2023년 새해를 맞는다. 하여 이젠 돌이킬 수 없는 노년의 길로 들어선다. 길은 여전히 안개 속일 수도 있을게다.

바라기는 새해에도 아쉬움이 아무리 클지라도 그를 덮을 수 있는 감사를 찾을 수 있는 믿음을 허락하시길. 새해, 전해오는 한국뉴스들을 지금 여기 내 이웃들에게 자랑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되길.

삶은 늘 경이로움으로.

  1. 31. 2022DSC05093DSC05079DSC05070DSC0506512-17-22DSC05096

성탄 연휴

성탄 연휴, 아이들이 찾아와 사흘을 아무 생각없이 쉬었다. 갑자기 다가온 매서운 추위 때문이기도 하였고 사위와 딸이 애지중지하는 애완견과 함께 갈 수 있는 마땅한 곳도 없어 집에서 그저 편히 쉬었다.

늦은 나이에 음식 만드는 일을 즐거워 하게 된 내가 그저 대견 스럽고 감사한 연휴였다. 먹성 좋은 아들과 조금은 섬세하게 준비해야하는 며느리와 내가 결코 큰 소리치지 못하는 딸아이와 사위 입성까지 생각하며 마련한 밥상을 차려 놓고 흐믓해 하는 내 즐거움이라니!

가족들이 모이면 늘 부엌에서 하루를 보내셨던 어머니께 내가 역정을 내며 물었었다. “아니 뭘 힘들게 혼자 다 할려고 해요? 나누어 하든가 조금씩만 하든가!” 그럴 때면 하셨던 어머니의 대답, “이 눔아! 내 몸 놀려서 많은 식구들이 잘 먹는 거…. 그게 얼마나 좋은 지 넌 아직 몰라서 그래.”

그 어머니 흉내 낸 사흘이었다.

돌아보면 모두 흉내 짓으로 이어온 내 삶이지만 흉내의 대상이 결코 부끄럽지만은 않다.

그래  감사다.

아이들을 즐겁게 하는 것은 언제나 그렇듯 아내 몫이었다.

그게 또 감사다.

또 한 해를 내려놓는 즈음에.

DSC05081 DSC05091

믿음 아닌 물음에

연말연시라 고들 하지만 따지고 보면 그저 하루하루의 연속일 뿐이다. 허나 단지 그렇게 치부하기엔 삶은 때론 지나치리 만큼 역동적이기도 하고 지루하게 늘어지기도 하는 법이다. 하여 순간순간 단락 지어 되뇌이며 사는 지혜를 터득한 사람들이 만든 결과물 또는 그 지혜를 허락한 신의 은총으로 낳은 게  월력이 아닐런지?

아무튼 이런저런 연말 어수선한 일들이 많은 어제, 한 주간의 일을 마치고 ‘필라델피아 민주시민모임’이 주최한 <10.26 참사 희생자 추모 및 윤석열 퇴진 촉구를 위한  모임>에 다녀 왔다.

생각이 엇비슷한 사람들을 만나는 자리는 비록 처음 본 얼굴 일지라도 그저 즐겁다

오랜 벗들도 있고, 어제 처음 얼굴 마주 한 이들도 많았다. 어제 함께 자리하게 된 까닭들도 여러가지였다.

나는 그저 반갑고 만난 얼굴들이 고마웠다.

세상사 믿음이라는 엉뚱한 잣대로 재는 삶이 아니라, 내가 사는 삶, 내가 사는 시간, 나와 더불어 사는 우리를 묻는 물음으로 사는 얼굴들이 참 고마왔다.

엊저녁 멀리서 전해 드리는 위로가 참사 유가족들에게 전해지기를…. 하루가 다르게 뒷걸음질 하며 퇴행하는 내 모국(母國)을 위해 추운 날 거리에 나선 이들과 함께 하는 마음으로.

원컨데 넋 잃은 믿음이 아니라 더불어 사는 삶 바로 사람에 대한 물음으로.

다짐

뉴스가 비현실적으로 다가 올 때가 많다. 허긴 그래야 뉴스가 되기도 하지만. 이즈음 한국 뉴스는 더더욱 그러하다.

비현실적이라고 했지만 대개는 내 무지한 탓이지 조금만 주의 깊게 보았다면 예견할 수도 있는 소식들도 많다. 그런데 정말 꿈에서 조차 만나기 싫은 소식들을 듣거나 볼 땐 ‘아하! 다시는 한국뉴스 보지 말아야지!’하는 다짐을 놓곤 한다. 물론 그 때마다 며칠 이어지지 못하는 다짐이지만.

꼽아보니 노무현대통령 서거, 세월호 참사, 조국 교수의 무너짐 그리고 최근의10.29이태원 참사 등은 마치 꿈을 꾸듯 다가 온 비현실적 뉴스들이었다.

비록 내가 다시는 돌아가 살지 못할 곳이지만 꿈 속에서 마주해도 아파할 소식을 듣노라면 내 삶의 연은 아직은 그 땅에 닿아 있는지도 모른다.

더하여 내가 그 땅에서 살았던 시절의 구호들, 이젠 박물관의 유물로 박제되어도 마땅할 일천 구백 칠 팔 십년 대   그 낡은 구호들, 일테면 반(反)민주, 반 민중, 반 노동, 반 통일, 반 평화 정권 타도의 구호들이 다시 절실해 진 뉴스들을 보며….

나와 비슷한 생각으로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이 모이는 곳에 머리 수 하나 채워야겠다.

photo_2022-12-13_18-46-40

 

겨울비

온 종일 쏟아져 내리는 비 탓에 가게가 한산한 날이었다. 겨울철 이런 날이면 어머니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었다. ‘아이고 그저 감사하거라! 이 비가 눈이 되어 이렇게 내렸어 봐라, 여러 날 장사 망치지 않았겠니?’

그 말씀 생각나 비 탓 아닌 비 덕으로 한 해를 돌아보는 여유를 누렸다.

이즈음 내가 자주 듣는 질문이다. ‘언제 은퇴하시나?, ‘언제까지 일 하시려나?’. 그럴 때마다 내가 하는 대답이다. ‘계획 없고요.’ 또는 ‘글쎄… 그저 일할 수 있을 때 까지…’

한 해가 다 가고 이젠 일반적인 통념으로도 꽉 찬 은퇴 나이를 맞이하는 때에 이런저런 생각들이 왜 없겠느냐만, 머리를 절레절레 흔든다. ‘아직은…’

가게 한 켠엔 딸아이가 엄마 생일에 보내 준 꽃들이 아직 화사하고, 그 꽃을 보며 이야기 꽃 피우는 손님들이 있고, 내리는 겨울 비 바라보며 삶의 여유를 누릴 수 있는 일터에 아직은 그저 감사 뿐.

온종일 겨울비 내리는 날에.

DSC05045 DSC05049 DSC05053 DSC05054 DSC05055

사람 그리고 사랑에

  1. 멀리 캘리포니아 사돈께서 잘 키워 거두신 대추 한 상자를 보내주셨다. 호두알 만큼 큼직한 대추가 마치 설탕처럼 달았다.  누이들에게 크게 한 움큼씩 나누어 주고, 대추를 이용한 음식에 대해 알아본다.

성탄절에 찾아 오겠다는 아들, 사위, 딸, 며느리들을 생각하며 대추       넉넉히 들어간 갈비찜과 약식을 해 보아야겠다. 우리 내외를 위해         대추고를 좀 만들어 놓아도 좋겠다.

DSC05044

  1. 아내 생일을 맞아 아내의 사촌동생이 자신이 부른 노래를 보내왔다.  내가 그를 본지도 족히 사십년은 되었을 터. 그가 부른 ‘겨울아이’와 ‘Holiday’다.  ‘Holiday’는 아내가 어렸을 적 흥얼거렸던 게 기억나 불러 보았단다. 그도 이젠 환갑나이란다.

 

3. 어제 필라델피아 아주 낮은 곳에서 목회 하시는 이태후목사님께서 준비하신 지역사회 성탄잔치에 내가 참 좋아라 하는 필라세사모 친구들이 선물상자를 마련해 함께 했단다.

내  아들  며느리가  짝을  맺은 지가 어느새 육 년 전 일이 되었다. 당시 나는 아이들 결혼에 극심하게 반대 했었다. 그런 내게 아이들이 제안을 해 왔다. ‘우리 목사님을 한 번만 만나 주시라.’고. 나는 단칼에 아이들의 제안을 거절 했었다. “이 눔들아! 이건 목사가 해결해 줄 문제가 아니야! 이건 내가 내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문제야!”라고.

그렇게 시간은 내 부끄러움을 깨닫게 해 주었고, 이젠 까만 얼굴의 며느리가 얼마나 고맙고 사랑스러운지 말해야만 할 지경이다. 그 때 아이들이 나를 만나게 하려고 했던 목사가 바로 이태후 목사님.

photo_2022-12-11_09-45-35photo_2022-12-04_15-55-48

4. 대추상자와 함께 보내 온 캘리포니아 사돈의 카드인사.  “우리 서로 멀리 있어도, 있다는 것에 감사합니다.”

사람 그리고 사랑에.

  • 올겨울엔 불을 많이지 펴야겠다.  두루두루.

DSC05037
DSC05040

<하루 이야기>

  • 아침

우리 내외가 노인식당이라고 부르는 Perkins 앞에서 주문한 음식을 기다린다. 이른 아침이나 저녁시간에 노인들이 많아 하는 소리이지, 노인 전용식당은 결코 아니다. 아무튼 우리 내외도 자주 들리는 곳이다.

내리는 빗물에 식당안의 불빛이 춤을 춘다. 저 불빛 아래 앉아 있는 이들이나 우리 내외가 살아오며  빗물에 흘려 보낸 이야기들은 얼마나 될까?

겨울을 재촉하는 비가 온종일 내릴 모양이다.

  • 점심

세상 뉴스들이 온통 우울하게 다가오는 것은 내리는 비 탓이 아니다. 그러다 듣게 된 절규에 가까운 어느 변론에 정신이 번쩍 든다. 아무렴, 세상이 온통 우울한 것은 아니다.

어느 변론

  • 저녁

오후에 비가 그쳐 막내 동생 얼굴이 활짝 폈다. 막내 동생의 막내 아들이 장가가는 날이다. 내 어머니 아버지 소원 이룬 날이다. 손주들 모두 짝 찾아 사는 날을 소원했었다.

큰 잔치였다.

그렇게 마주하는 이야기들은 이어진다.

하루는 늘 길거나 짧다. 모든 이야기들 앞에서.

 

20221203_074258a 20221203_144927a

사랑에

“Happy Thanksgiving!” –  아들녀석의 전화 인사를 받은 후 얼마 되지 않아 딸아이의 전화를 받았다.  “ Happy Thanksgiving!”

추수감사절 휴일에 칠면조를 굽지 않았던 적이 있었던가? 곰곰 생각해 보아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올핸 아들내외는 처가집에서, 딸내외는 시댁에서 명절을 보내게 되어 명절음식을 할 까닭이 없었다.

딸아이가 물었다. “엄마, 아빠 뭐해?” 내 대답, “할아버지에게 갔다가 할머니, 외할머니, 외할아버지한테 갔다 막 들어와서 이젠 낮잠 자려고 하는데…” 딸아이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아빠 엄마 푹 쉬어, 오늘은…”

그렇게 푹 쉬었다. 칠면조 굽지 않은 추수감사절 날에.

어머니와 장인 장모 묘소를 돌아보며 아내가 말했다. “죽어서 엄마 만난다면 어떤 모습으로 만나게 될까?” 내 대답, “아마 당신이 그리고 생각하는 모습대로…”

멀리 눈에 들어 온 어느 가족들의 모습을 보며 든 생각 하나.

‘비록 얼굴 맞대지 않아도 사랑으로 연 이어 있다면 거리의 이곳과 저곳 나아가 삶과 죽음의 간격조차 무의미 한 것 아닐까?’

사랑에!

*** 뒤늦게 딸아이가 보내온 사진 한 장. 멀리 시댁에 가느냐고 맡겨 놓은 애완견 dog sitter에서 보내온 사진이란다. 암만! 어디 사랑이 경계가 있겠느뇨!

DSC05030 DSC05034

물음 또는 명령에

“이것이 과연 인간인가?”

어제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 사제단이 10.29 참사에 대해 발표한 선언문의 시작은 바로 이렇게 시작된다. “이건이 과연 인간인가? 라는 물음으로.

선언문 끝 무렵에 이어지는 주문이자 명령이었다. “울어라, 울어야 한다! 사람을 위해.”

이 선언문은 오늘을 살아가는 한국인들에게 올바른 시민의 길을 찾아 나아갈 것을 차분하지만 단호한 어조로 명하고 있다.

성서에게 삶을 묻는 신앙인들에겐 바른 신앙인의 길을 걷도록 촉구하는 선언이다.

그 신앙인의 바른 길에 대한 본 회퍼 목사의 가르침.

<부활 신앙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는 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피안’은 우리 인식 능력의 피안이 아닙니다! 인식론적 초월은 하나님의 초월과 아무런 관계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삶의 한복판에서 피안적입니다. 교회는 인간적 능력이 실패하는 곳, 한계선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을 한가운데 있습니다.> – 본 회퍼의 옥중서간에서

“이것이 과연 인간인가?”라는 오늘의 물음은 곧 오늘 우리들(인간들)이 처한 현실에서 신이 어떻게 일할 것인가를 묻는 일.

선언문은 “모든 일이 다 잘 될 것입니다.” 거듭되는 약속으로 마무리를 짓는다. 바른 신앙의 길, 깨우친 시민의 길을 걸어 갈 사람들(인간)과 신에 대한 믿음에서 우러나오는 희망일게다.

나도 그 희망을 믿는다.

작게는 내가 살고 있는 지금 여기에서 참 인간, 참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이들과 함께 하는 일이요, 멀리 참사를 겪고 아파하는 내 모국에서 인간의 길을 역행하고 있는 윤석열과 그 일파들을 타도하는 이들과 함께 하는 일에서 그 희망이 시작될 터.

unnamed (1)

unnam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