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에

뒷뜰 언덕배미 대나무 숲을 베어낸 지 두 해 째. 대나무 뿌리는 여전히 땅속에서도 푸른 대에게 생기를 불어 넣고 있다. 대나무 뿌리를 완전히 없앨 수 있다는 숱한 비법과 사례들을 구글과 유튜브를 읽고 보곤 하였지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딱히 많지 않았다.

하여 조금 긴 호흡으로 마음 다잡으며 실로 무지하게 맨땅에 헤딩하는 방법을 택하기로 하였다. 삽과 곡괭이 들고 뿌리를 들어내는 일을 시작하자 마자 ‘아차!’ 싶은 후회가 밀려왔지만, 이미 내딛은 걸음인지라 갈 데 갈지 가보자고 삽질을 잇는다.

대나무 뿌리는 아주 견고한 동맹으로 이어져 있다. 그 뿌리들의 연결 고리를 끊어 캐내는 일을 마치기 전에 내 어깨와 팔이 먼저 지쳐 포기할 수도 있겠다는 불안함이 일만큼 견고하다.

하지만 긴 싸움으로 가자고 맘 먹었으니, 비록 나도 이제 노년의 초입이지만 대나무 뿌리는 이길 수 있으리라.

군데군데 대나무 뿌리들의 연결 고리를 끊어내어 부근의 땅을 한바탕 엎어 들어낸 후, 내 가게에 넘쳐나는 종이상자를 깔고, 그 위에 새 흙을 덮어 내가 가꿀 수 있는 아주 작은 새 세상들을 만들어 본다.

대나무 뿌리를 거두어 낸 새 세상에 야채와 화초 씨와 모종을 심어 가꾸어 보는 일인데, 그 삽질이 만만치 않다.

허리와 어깨 두드리며 내게 넘쳐나는 감사하는 맘 두 가지.

큰 나무들은 아직 내가 격어보지 않아 모를 일이지만, 야채나 화초들은 고작 몇 인치 정도의 흙을 파면 잘 자랄 수 있거니와, 대나무 뿌리라고 해 보았자 그 역시 일 피트만 파면 끝이라는 사실에서 오는 감사가 첫째인데, 감사의 까닭은 신은 그리 깊은 곳에 진리를 묻어 놓지 않았다는 생각 때문.

또 하나의 감사는 이 나이에 흙을 알게 되었다는 사실. 언젠가 내가 될 흙과 미리 벗이 되어 지내는 시간들에  대한 이 큰 감사라니.

하여 내가 마땅히 없애려 하는 대나무 뿌리에게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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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사(獻詞)

여기서 산지 지난 삼십 오 년 동안 많은 한국 뉴스들을 보고 들었다. 그 가운데 내가 가장 아파하며 분노했던 뉴스는 세월호 참사 소식이었다. 21세기 대명천지에 삼백 명이 넘는 젊디 젊은,  아니 어리고 어린 아이들이 생수장 되는 현장이 실시간 영상으로 중계되는 일이 한국에서 일어났다는 사실이 당시 나는 도저히 이해를 할 수가 없었다.

아픈 뉴스는 그 이전에도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서거했던 때였다. 그 때 그 아픔은 아린 것이였지만, 세월호 참사는 분노였다.

그 날 이후 어찌어찌 인근에 사는 맘 맞는 벗들이 모여 그 사건을 잊지 말고 기억하면서 가족들을 위로하며, ‘도대체 왜?’라는 물음에 응답을 얻을 때까지 함께 해 보자고 틈나면 함께 모임을 이어왔다.

아이들이 그렇게 떠난 지 칠 년 째 되는 날을 앞두고 벗들과 오랜만에 함께 했다. 지난 해 삼월 팬데믹 이후 처음 만나는 얼굴들이 많았다.

펜실베니아 밸리 포지 국립 역사 공원(Valley Forge National Historical Park) 미국 독립 전쟁을 기념하는 상징으로 세워진 독립 기념문(The United States National Memorial Arch) 앞에서 였다.

기념문 상단에 새겨진 글귀가 썩 맘에 들었다.( Naked and starving as they are We cannot enough admire The incomparable Patience and Fidelity of the Soldiery) 독립전쟁 당시 많은 군인들이 기아 질병 영양실조 또는 헐벗음으로 죽음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를 상기하며 쓰여진 헌사이리라.

나는 그 헌사를 세월호 가족들 그리고 그 가족들과 함께 하는 벗들과 나누는 뜻으로 새겼다.

지난 칠 년 동안 헐벗고 굶주림 보다 더한 질시와 조롱 속에 이어 온 삶을 위로 한다기 보다는 , 가족들의 더할 나위없이 크나 큰 인내와 끝내 진실을 밝혀야 한다는 그 충심을 칭송하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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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記憶)에

알프레드(Alfred), 이 양반은 내 오랜 단골이지만 좀 골 아픈 손님이다. 그가 가지고 오는 세탁물이란 언제나 정장 예비군복 한 벌, 아니 대개는 바지 하나인데 늘 당일 아니면 이튿날 찾겠노라 한다. 지난 이십 수 년 간 한결같다. 여기까지야 뭐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올 때 마다 우리 내외의 시간을 턱없이 많이 빼앗곤 하기에 골 아프다. 그것도 매양 한가지 이야기로 그리 한다. 바로 한국에 대한 이야기다. 보다 정확하게 하자면 한국에 대한 그의 기억들이다.

그는 늘 한국전쟁 참전 기념 모자를 쓰고 다닌다. 아직도 걸음걸이가 꼿꼿하여 그가 칠십 년 전에  있었던 한국전쟁에 파병 되었다는 사실이 쉽게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허나 나이는 숨길 수 없어 최근 몇 년 이래 청력도 많이 잃었고, 정신도 이따금 오락가락이다. 그래도 변하지 않는 모습 하나가 우리 부부를 만나기만 하면 이어지는 “내가 한국에 있을 때는….”하며 이어지는 이야기다. 우리 부부는 그의 칠십 년 전 사진들을 많이도 보았으므로, 그의 기억을 탓하지는 않는다.

어제만 해도 그랬다. 가게 카운터 옆 벽면에 걸어 놓은 내 가족 사진들 가운데 아내와 딸이 함께 있는 사진을 가리키며 그가 물었다.  “여기가 한국의 어디니? 내가 한국에 있을 땐 …” 나는 그의 말을 급히 잘랐다. “거긴 한국 아니고요. 뉴욕주에 있는 Minnewaska State Park에서 지지난 가을에 찍은 거고요. 저도 한국을 떠난 지 너무 오래 되어서요… 오늘 맡기신 제복 내일 찾아 가시려면 제가 일을 해야되서요…” 그렇게 그를 내어밀 듯 인사를 끝내었다.

칠십 년 전 한국에 대한 기억으로 한국을 이야기하는 알프레드나 일천 구백 칠십 년 대를 위주로 한국을 기억하는 내게나 오늘날의 한국은 그야말로 외국이다.

그러나 누군가의 기억의 파편 속에 남아 있는 내 모습이 피할 수 없는 나의 단면이듯, 알프레드와 내 기억 속 한국 역시 오늘날의 한국 모습에 닿아 있을 게다.

늘 절박하고 간절한 것은 ‘오늘 그리고 여기’이지만, 그것은 언제나 ‘어제 그리고 거기’와 연결되어 있다.

알프레드(Alfred), 그를 성급히 내어 밀어 낸 미안함으로.

이즈음 내 일터 아침은 내일을 꿈꾸는 부근 건설 노동자들이 열고 있다. 내 옛 세탁소 자리를 밀어낸 터 위에서.

기억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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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 하루

봄날 하루는 짧다.

손님들의 발길이 조금씩 잦아져 아침 영업시간을 팬데믹 이전으로 돌려 놓았다. 일년 넘게 느긋한 이른 아침 시간을 즐기다보니 어느 사이 게을러졌었는데, 이즘엔 거의 다 자란 모종들에게 아침 인사를 나누곤 일터로 나가기 바쁘다.

그렇다고 가게가 이전처럼 쌩쌩 돌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일하는 시간만큼은 할 일이 연속으로 이어진다.

여전히 손님들과 아크릴 판넬을 사이에 두고 서로간 마스크를 쓰고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목청이 높아지기 일수지만 어느새 그것도 그저 그런 일상이 되었다.

백신 접종율이 높아가는 만큼 확진자 수가 늘어간다는 어제 아침 동네 뉴스는 어쩌면 당연한 현상일지도 모르겠다. 너나없이 바이러스에 대한 긴장이 느슨해 지는 탓일게다.

내 집안의 최고령이신 아흔 다섯 아버지는 일찌감치 접종을 모두 끝내셨고, 우리 부부와 아들 내외 그리고 내 형제들 모두 접종을 마쳤다. 제일 어린 딸아이가 이번 주에 예약이 되어있으니 일단은 가족 모두 접종은 마치게 되는 모양새다.

올 한 해 넘기기 전에 또 한번의 접종이 있게 될 것이고, 어쩌면 독감주사처럼 해마다 한 두차례 맞아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허기사 독감주사를 맞기 위해 긴 줄을 이어서 기다리던 시절이 그리 먼 옛날 일이 아닌 것을 생각해 보면 이즈음의 북새통도 그저 사람들 살아가는 과정이란 생각도 든다.

바이러스 치료제 소식들도 종종 만날 수 있는 것 보면, 멀지 않은 어느 시간에 오늘을 옛 일처럼 이야기할 시간을 맞게 되리라.

하여 늘 조심할 일이다. 무언가 기다리는 시간에 드리는 기도는 늘 간절한 법이다.

오후에 텃밭과 뜰에 찾아오는 봄에게 인사를 나누다가 문득 눈에 들어 온 콩 새싹에 고목처럼 굳어진 내 가슴이 콩딱콩딱 뛰다. 몇 주전에 서리 내린 땅에 뿌렸던 씨앗들이 생명이 되어 내게 건네는 인사라니!

이른 봄꽃들과 인사도 나누고, 내 텃밭과 뜰에 오시는 새 손님들 맞을 준비에 봄날 하루는 참 짧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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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바퀴

귀바퀴에 있는 콩알만한 크기의 이물감을 느낀 것은 한 열흘 전 일이었다. 통증이나 가려움증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그냥 무심히 지나갔다. 그렇게 하루 이틀 콩나물 크듯 콩알만 하던 이물은 밤톨만한 멍울이 되어 내 한쪽 귀를 마치 당나귀처럼 만들어 놓았다.

엊그제 찾아간 가정의는 아무래도 전문의를 찾아 보는 것이 낫겠다며 이비인후과를 소개해 주었다.

오늘 찾아간 이비인후과 젊은 의사 선생은 가히 물건이었다. 경쾌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넨 그는 내 귀바퀴를 만지작 거리더니만 ‘짜내면 되겠군요, 간단한 일입니다.’라며 간호원에게 몇 가지 도구를 준비하라고 시켰다.

‘왜 이런 일이 생겼을까요?’라고 묻는 내게 던진 그의 답이 나를 웃게 하였다. ‘글쎄, 나도 모르죠. 마스크를 오래 쓰셔서 그랬나? 아니면 잘 때 이 쪽 귀를 너무 누르고 주무신 건 아닌지?’하며 웃었다. 나는 어이가 없어 따라 웃었다.

‘조금 아플겝니다’라는 그의 주의를 확인이라도 하는 듯, 마취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는 내 귀바퀴 앞 뒤로  7개의  바늘 구멍을 낸 뒤 귀바퀴에 고인 물을 짜내었다. 그가 계속해서 묻는 ‘아프나?, 괜찮냐?’라는 물음에 짧은 통증보다도 웃음이 먼저 났었다.

‘다 끝났다’라는 말은 정말 거짓이었다. 정작 그와 간호원은 그 이후에 내 귀바퀴 앞뒤로 솜을 틀어막고 그것을 꿰메는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젊은 의사가 정말 물건이었던 까닭은 그가 내게 건넨 항생 연고였다. ‘뭐 별거 아니었고요. 다음 주 화요일에 다시 오면 되고요. 이 항생 연고를 귀바퀴 주변에 바르세요.’라며 건넨 항생 연고는 그의 책상 서랍에서 꺼낸 쓰다 남은 항생 연고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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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오늘 이비인후과에서 가장 많이 시간이 걸렸던 것은 내 신상에 대해 묻는 질문지를 작성하는 일과 의사를 기다리는 일이었다.

내 병력과 복용하는 약에 대한 많은 질문들과 가족 병력에 대한 물음들은 거의가 아직까지 나와는 무관한 질문들이었다. 그 순간에 느낀 감사가 아주 컸다.

그리고 이제 하루가 저무는 시간, 살며 만나지 않고 살면 좋은 직업군들인 판사 검사 변호사 의사들…

이젠 어쩔 수 없이 만날 가능성이 높아진 의사 앞에서도 늘 감사할 수 있는 날들을 이어갈 수 있기를.

너무 많은 소리를 거르다 피곤해진 내 귀바퀴를 달래며.

 

바람개비

서리가 하얗게 내려 앉은 봄날 아침이었다. 이상 기온이 아니라면 다시 겨울을 맞기까지 서리는 내리지 않을 것이지만, 언제 이상기온을 맞지 않을 때가 있었던가 싶다. 이즈음엔 더더욱.

텃밭농사 흉내에 재미 들려 이즈음 틈나면 작은 밭을 일군다. 오늘 첫 작물로 콩과 감자를 심었다. 먹을 거리로 생각하면 평소 소식(小食)인 우리 두 내외에겐 농사보단 사 먹는 것이 몇 배는 경제적일 것이다만, 재미란 경제논리와는 무관한 것일게다.

이즈음에 탐닉하고 있는 맛도 따지고 보면 그 재미 때문이다. 우연히 만들어 본 무장아찌 맛에 홀려 한 달 여, 매 끼니 함께 했다. 옛날 옛날에(?) 어머니가 만들어 주신 무장아찌 몇 젓가락으로 찬 밥 물에 말아 훌훌 넘기던 그 옛 생각 맛에 홀린 탓일게다.

아무렴, 사는 일이란 늘 진일보 하는 법. 양파, 샐러리, 파프리카, 당근, 고추 등속을 저며 달인 간장으로 장아찌를 담다.

완연한 봄날 오후를 맞아 어머니와 장모 장인에게 모처럼 문안 인사 드리다. 부활절을 맞는 장식들 중에 바람개비들이 눈길을 끌었다. 부활절과 바람개비. 이런 저런 저마다의 우김질들로 세상은 늘 시끌벅적이지만, 예나 지금이나 동서남북 어디에나 사람들 욕망은 늘 같다.

아내가 “이것 좀 봐!”라며 가르킨 어느 묘비명이었다. <LIVED AND LOVED WITHOUT HESITATION>

해 아래 그 어떤 삶이 제 맘껏 게다가 받을 사랑 다 받고 살다 간 사람이 있겠냐마는, 스스로를 그런 모습으로 기억해 주기를 바라며 마지막 순간을 맞은 사람에게 그렇게 그를 기억하며 남아 있는 단 한 사람만이라도 있다면…

봄날엔 찬 밥 한덩이 물에 말아 변변한 건건이 없이 장아찌 하나 얹어 훌훌 넘기는 한 끼도 감사다. 맘껏 살아보고 맘껏 사랑받는 시간에 대한 꿈을 꿀 수 있는 계절의 시작임으로. 겨울의 기억과 함께.

비록 바람 따라 도는 바람개비 꿈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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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맛

몸이 먼저 시간을 느끼는 나른한 토요일 오후, 손님 한 분이 빨래감을 맡기며 편지 봉투를 내어 민다. 그리고 덧붙이는 말, “내 미안한 마음을 담았는데…” 그렇게 봉투 하나 내어 밀고 내 가게를 나서는 그에게 영문 모른 채 그냥 웃음으로 주말인사를 전했다.

그리고 뜯어 본 편지 내용이다.

<아시안계 지역사회에 대한 추악하게 심한 편견과 인종 차별에 대해 당신에게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맞습니다. 한국과 중국은 다른 국가이며, 미국처럼 단지 몇 백 년이 아닌 수천년에 이르는 독자적인 역사와 문화를 각각 지니고 있습니다.

(당신이 그러하듯이) 제 고객들과 정치에 대해서는 절대 논의하지 않지만, 개인의 생명과 생계를 위협하는 사건들은 가벼이 무시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어쩌면, 피해를 입힌 다수의 잘못된 행위에 대한 정보가(피해를 입힌 다수의 잘못된 행위를 널리 알린다면) 평화와 수용의 시대를 맞게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간절히 바랄 뿐…>

며칠 전 아틀란타에서 일어난 한인들을 포함한 아시아계에 대한 폭력 만행 사건 소식을 듣고 보며 한국계인 내게 전하는 그의 속마음 인사였다. 그는 나보다 조금 아래 연배의 백인 사내였다.

편견과 인종 차별 뿐만이 아니라, 누군가의 아픔에 대해 공감하고 그 공감으로 연대하는 이들의 힘으로 세상은 느린 걸음이지만 늘 진보하는 것일게다.(나는 하나님의 나라로 가까이 가는 역사의 진행이라고 말하곤 한다만…)

우리 부부가 세탁소에서 느껴보는 삶의 맛이다.

내 뜨락에도 하루 사이에 봄 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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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지개

다시 Daylight Saving Time으로 바뀐 아침이다. 봄이다. 여전히 마스크 없이는 집을 나서지 못하는 상황이지만 봄은 어김없이 다시 왔다.

아침에 일어나 나갈 일터가 있음은 이즈음 내가 누리는 가장 큰 축복이다. 내 오랜 일터인 까닭이 우선이겠지만 내 세탁소에 대한 자부는 제법 크다.

델라웨어 대학이 있는  뉴왁시 한복판에 위치한 내 세탁소 주고객들에는 대학과 시관계자들이 많다. 대학 및 시 경찰 제복 세탁을 오랫동안 도맡아와 경찰출입도 꽤 잦은 편이다. 대학교 및 인근 뉴왁 고등학교 밴드복과 합창단 제복 등 역시 제법 긴 세월 내 세탁소 차지였다. 뉴왁 지역사회를 기반으로 영업을 하는 세탁소로써 최선을 다한다는 자부를 갖는 기반들이다.

그러나 지난 해 3월 이래 일년 여 동안 학교 세탁물들의 서비스는 중단되었다. 학교가 문을 닫았고 학생들의 활동이 없었으니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

팬데믹으로 하여 모든 사람들의 삶이 많이 바뀌었다만, 특별히 아직 교육을 받고 있는 초, 중, 고 학생들과 대학생들이 겪고 있는 팬데믹 시간들은 평생 잊지 못할 시간들로 남을 것이다. 그 어느 세대도 겪어보지 못한 장기간의 비대면 학습과 야외 및 단체활동의 제약 등을 겪어낸 아이들은 어쩌면 이제껏 보지 못한 아주 새로운 세대를 이룰 듯하다.

아무튼 그렇게 다시 맞는 봄이고, Daylight Saving Time이다.

엊그제 뉴왁 고등학교 관계자에게서 이메일을 받았다. 이메일의 첫 문장이다. ‘드디어 우리학교 밴드부 제복 세탁할 때가 되었습니다.’ 학생들을 맞을 준비로 기지개를 펴니 세탁물들을 수거해 가라는 것이었다.

물론 내가 다시 세탁물을 받아 서비스를 하게 된 것이 크게 기쁘지만, 그보다도 아이들이 다시 학교로 돌아가고 우리들의 일상이 이전으로 돌아가는 기지개를 켜는 것 같아 봄소식 치곤 최고였다.

내 집 뜰에는 지난 늦가을에 심은 구근들이 온 몸으로 기지개 피며 흙을 밀치고 나와 파랗고 붉은 움을 튀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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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이다.

그 누구랄 것도 없이, 사람들 모두 너나없이 활짝 기지개 피며 힘이 솟는 봄이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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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터의 아침 하늘은 때론 경이롭다.

이른 봄날

하루 사이에 봄이 왔다. 새떼들은 벌써 아침 햇살을 타고 무리 지어 봄놀이 나선다. 봄과 아침 기운에 마음이 날아갈 듯 가벼운 것으로 보아 아직 괜찮은 나이다.

엊저녁 배운 들숨 날숨, 숨으로 몸을 다스리는 연습과 아주 작은 몸놀림으로 아침기운을 받는 운동을 하며 일을 시작하다. 살며 좋은 선생을 만나는 일은 내가 누리는 참 큰  축복이다. 춤꾼 김정웅 선생께 감사!

오후에 텃밭 가꾸기 준비하며 삽을 들다. 나무그늘 아래 잔설이 아직 겨울이라고 우기고 있지만, 지난 가을에 심은 구근들이 뾰족히 움을 틔어 언 땅 녹이는 봄이다.

봄엔 살아볼 만한 삶의 욕심들이 쌓인다. 하여 모종판도 계획없이 늘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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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맞이

응달에는 아직 녹지 않은 눈과 얼음들이 겨울이라고 우긴다. 허긴 내가 바깥 일 하기엔 아직은 이르다. 부지런한 농부는 아니므로.

내 직업인 세탁소에 봄은 부활절 즈음에 찾아오니 아직 이르긴 하여도 그래도 경칩(驚蟄)이 지났는데, 아무렴 봄이다.

바깥은 아직 이르다는 생각으로 내 방안 봄맞이 준비를 하다가 만난 시인 윤동주의 동시집이다. 윤동주의 동시집이 내 방에 꽂혀 있는 줄 모르다 만나니 미안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다.

1999년에 도서출판 <푸른 책들>에서  펴낸 시집이다. 아마도 2000년을 맞는 그 무렵에 뉴욕 서점에서 윤동주라는 이름에 혹해 내 방으로 모셔 온 시집이었을 듯. 내 방안에 있는 줄도 몰랐으니 미안하고, 오늘 시집의 책장을 넘기다 힘을 얻어 고맙다.

윤동주의 시 <새로운 길> 전문이다.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코로나 바이러스로 어수선했던, 아직도 어수선한 그 길에서 너나없이 모두 새로운 길을 걷고 있다.

그 길은 어쩌면 여전히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이는 길 일게다.

그럼에도 내가 만나는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아무렴!

하여 흉내일지언정 모종판에 흙을.

새 봄, 새로운 삶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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