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와 딸

어머니 살아 생전에 남기셨던 말씀 가운데 하나. “네 딸 웨딩 가운은 내가 꼭 맞춰주마. 내가 할 일 중 하나다.”

어머니는 말씀처럼 언제 시집갈 지도 모를 손녀 딸 웨딩 가운 맞출 돈을 따로 남기고 떠나셨다. 그 일을 딸아이에게 이야기 해 본 적은 없다. 아내도 마찬가지다.

이즈음 딸아이는 바쁘다. 오늘, 몇 벌의 웨딩 가운을 입은 사진들을 보내며 아내와 내가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 보라고 하였다. 우리 내외는 그 중 하나로 같은 마음이 닿았다. 그러자 딸아이가 하는 말, “그 중 제일 비싼데…” 아내가 물었다. “얼만데?”

참 신기한 일이었다. 딸아이가 말한 가격은 정확히 어머니가 남기신 돈과 일치했다.

여름이 시작되었다. 이 여름이 끝날 때까지 나는 사뭇 간절한 기도를 이어갈 듯 하다. 어머니를 위해 해 본 적 없는 기도를… 딸을 위해.

어머니는 언제나 그러셨듯 똑같이 말씀하실게다.  “이 눔아! 아무렴 네 자식 위한 일인데… 그래야  당연하지!”

나이 들어도 신기한 일은 늘 이어진다.

그렇게 삶에 감사도 이어지는가 보다.

오늘

오늘 델라웨어 주지사는 질병관리통제센터(The Centers for Disease Control and Prevention)의 새로운 지침에 따라 다음 주 금요일인 5월 21일부터 야외는 물론 대부분의 실내 모임에 이르기까지 백신 접종을 완전히 끝낸 사람들은 마스크를 벗고 생활할 수 있다고 발표하였다. 거리두기 역시 제한을 두지 않고, 식당, 상점 교회 등 실내모임의 제한 인원 규제 등도  해제한다고 덧붙였다.

만 일년 이 개월 동안 이어져 온 주민들의 생활양태가 완전히 바뀌어 옛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선언이었다.

신문이 전하는 주민들의 반응은 여러 갈래다. 환호하는 축이 있는가 하면, 아직은 이른 처사이어서 당분간 마스크를 계속 쓰고 다니겠다는 이들도 많단다.

이대로 팬데믹 이전의 생활을 누리게 될런지는 아직 아무도 장담하지는 못할게다.  다만 늘 그래왔듯 사람들은 바뀐 생활양식에 쉽게 적응해 나가리라.

존 도미닉 크로산(John Dominic Crossan)이 쓴  ‘예수 – 사회적 혁명가의 전기(Jesus: A Revolutionary Biography)’를 읽다가 생활양식이라는 말에 꽂혀 몇 번이나 곱씹어 본 문장 하나.

<그것(하나님의 나라)은 미래를 향한 삶의 희망이라기 보다는 현재를 위한 생활양식이다. It(Kingdom of God) is a style of life for now rather than a hope of life for the future.>

온전히 제 뜻으로 만들어 나가는 생활양식을 통해 오늘 여기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릴 수 있다는 말.

저녁나절 새소리 들으며 마음 다스리는 짧은 시간을 누리는 이즈음의 축복이 그저 감사하고 때론 미안하다.

오늘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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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 주일 아침에

어머니 일주기에 맞는 어머니 주일 아침, 어머니 생각하며 가게 손님들에게 편지를 띄우다.


제 어머니는 문맹이셨습니다. 초등학교 교육조차 받지 못했던 어머니는 영어는 물론이고, 한글도 읽거나 쓰지 못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어머니는 지극히 상식적인 분이셨습니다. 사람은 부지런해야 한다거나, 남에게 해를 끼치거나 남의 것을 탐해서는 안된다거나 부족해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는 등의 지극히 상식적인 것들에 충실했던 분이셨습니다. 때때로 엉뚱한 당신의 고집조차 상식적인 사람살이라고 우기시는 경우도 없지는 않았지만 말입니다.

딸 셋, 아들 하나를 다 키우시고 난 뒤인 쉰 넘은 나이에 한글을 깨우치셔서 성경도 읽게 되셨고, 영어로 당신의 이름 정도는 쓰실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제일 으뜸가는 관심은 가족이었습니다. 평생 제 아버지의 하루 세끼 식사는 물론 자식들의 건강과 안녕이 가장 우선하는 그녀의 관심사였습니다. 세 딸들은 비교적 그런 어머니의 바램대로 잘 살아온 듯 합니다만, 아들인 저와는 그렇게 잘 맞는 편은 아니었습니다.

특히 젊은 시절에 저는 어머니의 속을 많이 썩였었습니다. 제 꿈이 너무 컷던 탓이었는데, 어머니는 그런 제 꿈들을 헛 꿈이라고 말하곤 하셨습니다.

어머니가 먼저 미국으로 이민을 오셨고, 어머니의 초청으로 내가 크게 내키지 않았던  미국 이민을 오던 때 어머니가 제게 하셨던 말씀이랍니다. “이놈아! 이젠 헛 꿈들일랑 다 버리고 열심히 일하고 살어! 작업복 몇 벌만 가지고 와서 열심히 일하며 살아!”

그렇게  시작된 세탁소랍니다. 그 무렵 윌밍톤과 뉴왁시 일대에는 70군데 가까운 세탁소들을 한인들이 운영하고 있었답니다. 서로 간의 정보도 교환하고 상호 이익을 위해 힘을 합쳐 보자는 생각으로 세탁인 협회를 만들고, 나아가 델라웨어 한인 사회 일을 맡아서 하고, 필라델피아 인근 한인들을 위한 신문을 만드는 저를 보며 어머니는 혀를 차셨습니다. “쯔쯔, 네 팔자다! 아직도 헛 꿈을 버리지 못하니… “

그런 어머니를 제가 이해하게 된 것은 제 나이 60이 거의 다 되어서 였습니다. 세탁소가 제 천직임을 깨달은 것도 그즈음이었습니다. 이젠 그 세탁협회도 없어지고 당시 함께 했던 사람들 중 아직도 세탁소를 하고 있는 사람은 제가 유일하답니다.

오늘 저녁 어머니를 뺀 저희 모든 가족들이 함께 한답니다. 비록 모두 함께 한자리에 모이지는 못하지만 온라인 Zoom Meeting으로 함께 한답니다. 아버지와 제 형제들과 어머니의 손주들과 증손주들이 한사람도 빠짐없이 함께 한답니다.

어머니가 떠나신 지 일년이 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저는 어머니가 헛 꿈이라고 말씀하신 그 꿈은 버리지 못했답니다. 다만 더 이상 그 꿈을 쫓지는 않는답니다.

어머니가 살아 생전 지켜왔던 상식들에게 만이라도 충실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말입니다.

제가 아직 세탁소의 하루 하루를 즐거워 하며, 오늘 아침 당신에게 이 편지를 쓸 수 있는 것은 모두 제 어머니 덕입니다. 그래 감사하는 하루랍니다.

그 맘으로 당신에게도 깊은 감사를 드리며.

당신의 세탁소에서

https://conta.cc/3eyASO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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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에

오늘 델라웨어 주지사는 지난 13개월 이래 가장 완화된 COVID-19 제한 규정을 발표하였다. 펜데믹 이후 바뀐 주민들의 생활들이 그 이전에 누리던 일상으로 많이 돌아갈 수 있을 만한 내용들이다.

오는 5월 21일 부터 적용될 변경 사항들로는 우선 6피트 거리두기 규정이 3피트로 줄고, 실내에서는 여전히 마스크 착용이 필수이지만, 야외에서는 백신 접종을 받은 사람들은 마스크를 쓰지 않아도 된단다.

무엇보다 중요한 변화는 식당을 비롯한 각종 상점들과 교회 모임에 있어 3피트 거리 두기 요건만 충족된다면 최대한 수용 가능하단다.

이는 백신 접종율이 늘어나고, 확진자와 사망자 수는 줄어들며, 날씨가 따듯해 지는 등 여러 조건들이 규정을 완화해도 좋을 만큼 나아졌기 때문이란다.

반가운 일이다.

어제 내 세탁소에 동네 보건소 직원들이 찾아와 포스터 한 장 가게에 부착해 달라며 두고 갔다. 내용인즉 동네 보건소에서 백신 접종을 하니 누구라도 예약없이 찾아와 맞을 수 있다는 홍보물이었다.

한달 사이에 참 많이 바뀌었다. 달포 전 내가 백신을 맞을 때만 하여도 신청을 하고, 수시로 확인을 하고 기다리고 하였는데, 이젠 누구나 쉽고 편안하게 접종을 받게 되었다. 이달 말 까지는 집단 면역이 이루어지는 전 주민 접종률 70%를 달성할 수도 있으리라는 전망 기사도 보았다.

그래도 아직은 좀 이르지 않을까 하는 염려도 따른다. 여전히 인구 백만명에 하루 확진자 수가 200명을 웃돌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바이러스로 인한 사망자 수는 현격히 줄었다고 한다.

제한된 일상을 제자리로 돌려 놓는 일처럼 좋은 일은 없다.

내 아이들과 가족들이 한 상에 둘러 앉아 본 지도 꽤 오래 되었다. 서두르지는 않을 일이지만 아이들을 위한 상을 준비하다. 아이들 상에 올릴 이제 막 자라는 푸성귀들을 바라만 보고 있어도 참 좋다.

이런 날은 반갑지 않은 손님인 딱다구리에게도 너그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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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주(完走)

앞뜰 수도꼭지를 바꾸려고 손을 대다보니 연결된 동파이프 까지 바꾸어야 될 듯 하였다. 잘 모르기도 하거니와 자신 없는 일이기도 하여 전기와 배관은 가게서나 집에서나 웬만해서는 손을 대지 않는다.

내일 배관공을 불러야겠다는 생각 끝에 떠오른 K였다. K는 거의 스무 해 가까이 내 세탁소의 모든 기계들을 잘 돌보아 준 기술자이다. 두 해 전에 세탁소 자리를 옮길 때 그가 해낸 몫이 거의 80% 정도였으리 만큼 내 세탁소 장비와 시설은 그의 손을 거쳤다.

그가 사는 남부 뉴저지에서 내 가게까지는 약 한 시간 남짓한 거리인데 기계나 장비에 문제가 있어 내가 전화를 걸면 그는 일단 내 이야기를 들은 후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을 판단해 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는 그는 아주 상세한  설명으로 하나, 둘 , 셋… 하면서 순서대로 처리하면 문제가 해결 될 것이라고 알려 주곤 한다. 물론 무보수다.

‘에이고, 그건 사장님이 손 델 수 없겠네요!”하면 그는 한 시간 지나지 않아 내 가게에 도착하거나, 지금 바쁘니 언제 들릴 수 있다고 말하고, 딱 그 시간이면 내 가게로 오곤 한다. 어쩌다 몇 시간씩 일을 하고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면 그는 돈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런 그가 고마워 나는 단 한번도 그가 요구하는 금액에 토를 단 적이 없다.

그와 최근에 전화 통화를 한 것은 두어 달 전이었다. 그가 문안인사라며 걸어 온 전화였다. ‘어떻게 지내세요? 에이고 힘드네요. 뭐 일이 있어야지요. 어쩌다 일해주면 돈도 잘 안 주고요. 체크 받으면 빵구나기 일수고요. 이 일도 이젠 막장인가 보내요.’ 그 때 내가 한 말이다. ‘뭐 여태 살았는데… 올 여름 지나면 나아질게야. 함 보자구.’

그렇게 떠오른 K였다. 동네 배관공을 부르기 보다 그가 시간 나면 맡기는 게 낫겠다 싶어서였다. 그의 전화는 계속 통화 중이었다. 일요일이어서 전화를 받지 않는가 보다 하였다.

한 두어 시간 지났을까? 뒷뜰에 여름 구근 들을 심고 있는데 그에게서 전화가 왔다. ‘아이구 일요일에 쉬는데 전화해서 미안하고만…’하는 내 소리에 대한 그의 응답이었다. ‘이제 없어요…’ 무슨 소리인가 싶어 내가 뱉은 소리. ‘아 이 사람아, 나 몰라? 델라웨어 김이야!’ 그러자 돌아 온 응답. ‘아빠 이제 없어요. 저 아들이예요. 아빠 이제 없어요. 아주 갔어요.’ 목소리는 분명 K였는데 띄엄 띄엄 어눌한 한국말, 그의 아들이었다.

찬찬히 그의 아들을 통해 들은 K에 대한 소식이었다. 지난 월요일 갑작스런 심장마비로 그가 세상을 떴고 어제 그의 장례를 치루었단다.

초등학교 때 아빠 따라 내 가게에 왔던 아이는 지금 군복무 중이란다.

전화를 끊고 한동안 멍하게 서있다 오늘 뜰 일을 접었다.

달 포 전 들었던 오랜 벗 H의 죽음이 떠올랐다. H는 나이 쉬흔을 맞을 무렵 마라톤 완주에 도전했었고, 네 차례에 걸쳐 완주 했었다.

오래 전 그가 처음 마라톤 완주에 도전하러 워싱톤으로 내려가면서 휴게실에서 써서 부친 손편지가 내게 도착한 것은 완주 후의 일이었다.

그 때 그가 썻던 글이다. ‘김형, 지금 나는 두렵습니다. 그래도 나는 끝내 완주할 것입니다.’

K는 이제 막 육십, H는 칠십을 몇 달 앞 두고 그들의 마라톤 완주를 끝내었다.

제 아무리 멋진 말들과 종교적 언사로 치장하여도 가까웠던 이들의 죽음은 섧다.

제 아무리 완주여도… 내게… 아직은…

바람

아직 팬데믹 이전과 같은 형편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이즈음 들어 내 세탁소도 많이 바빠졌다. 백신 접종율이 급속하게 늘어나면서 주정부가 내놓은 거리두기 완화책들의 영향도 있었을게다. 빠르게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듯한 한 주간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바쁜 세탁소의 하루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거센 봄바람에 아직 푸른 옷 제대로 챙겨 입지 못한 나무들이 휘청이며 제 몸 가누지 못한다.

가만 돌아보니 십년에 한 번 씩 겪어 온 일인 듯 하다. 거센 바람에 휘청거리며 곧 쓰러질 듯한 나무들처럼 내 생업인 세탁소 경영이 어려웠던 때가 십년 주기로 다가왔었던 것 같다.

두 번은 외적 요인으로 분 바람이었고, 한 번은 내가 일으켰던 바람이었다. 그렇게 삼십 년 넘는 세월이 흘렀고, 나는 다시 세탁소의 하루를 맞는다. 어제 보단 바쁘게.

그게 또 감사다.

저녁 나절 바람 잔 내 뜨락엔  봄이 가득하다.

뒤뜰 이웃집 담장 위엔 혼밥 만끽하는 다람쥐 한 마리 세상 부러울 게 없단다.

때론 바람에 맞서 보기도 하고, 바람을 타기도 하며 예까지 왔다. 내 생업(生業).

그래 또 감사다.

바람 몹시 분 사월 마지막 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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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해가 사뭇 길다. 저녁상 물리고 뒤뜰에 한동안 맥없이 앉아 있어도 저물지 않는다. 어미가 아이들을 부르는지 아님 아이들이 어미를 찾는지, 누군가를 찾는 저녁 새소리에 생각이 잠시 내 어릴 적  옛날로 돌아갔다 오곤 한다. 하늘엔 비행기들이 긴 발자국 남기고 연이어 날아간다. 매일 저녁 그렇게 날아갈 듯 한데 나는 마치 처음 본 일인 양 신기해 한다.

배우 윤여정에 대한 뉴스를 본 때문인지 생각이 한 동안 1970년대로 돌아가 맴돈다. 돌아볼수록 내 삶 가운데 가장 아름다웠던 시절이었다. 스물 나이라는 결코 돌아갈 수 없는 아련한 세월에 대한 추억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 무렵에 만나고 배웠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은 정말 아름답게 새겨야 마땅하다.

따지고 보면 내가 뭘 알았겠나. 반독재, 민주, 평화, 통일, 인권, 평등, 해방 등등 차마 감당 못할 거창한 구호들과 함께 했던 사람들과의 추억인데, 돌이켜 곰곰 생각해 보면 그게 그리 거창할 것도 없는 그저 만나고 생각하는 사람들 끼리 서로 사람 대접하며 사는 세상 꿈꾸는 일. 일컬어 하나님 나라.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길었던 시간이 흘러 이제 2021년, 그 때 만났던 많은 선생님들은 이미 세상을 뜨셨고, 또래 친구들 역시 이젠 사람 보다는 신(神 ) 또는 자연의 소리가 더 가까이 들릴 나이들이 되었다.

왈, 반세기만에 세상은 참 많이 좋아졌다. 배우 윤여정의 뉴스로 그것을 다시 확인한다.

팔자라기도 하고, 운칠기삼(運七技三)이라고도 하고, 또 누군가들은 신의 뜻이라고도 하더라만, 그게 다 사람이 저 자신도 모르게 제 할 일 다 하고 난 뒤에 다다른 세상이 아닐까?

날아가는 비행기 꼬리는 길지만 사라지는 것 또한 순간이다. 허나 아름다움으로 남는 것은 사라진 긴 꼬리 뿐이다.

배우 윤여정이 삶의 허기로 만든 오늘의 뉴스를 보며, 1970년대 그 시절 벗들과 선후배들 가운데 하나님 나라 그 꿈 외롭게 간직하며 사는 얼굴들을 떠올리며…

해가 사뭇 긴 탓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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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에

어느 순간 세상이 바뀌어 장사에 일정한 순환 원칙이 무너진 지 오래 되었다만,  내 생업인 세탁업은 여전히 날씨에 따라 그 날의 매상이 널을 뛰곤 한다. 하여 날씨에 매우 민감한 편이다. 그렇다 하여도 일기예보를 매일 들여다 볼 정도로 예민하지는 않다. 그저 그런가 보다 할 정도이다.

그런데 이즈음은 하루에도 몇 번씩 그 날의 일기 예보는 물론이요, 한 주간의 날씨 나아가 한 달 예보까지 들여다보기 일쑤이고, 때론 시간대 별 예보까지 챙기기도 한다. 물론 내 생업과는 전혀 관계없이 생긴 습관이다.

얼치기라면 차라리 중간이라도 가는 법이지만, 이건 생짜 초보가 마구잡이로 땅을 헤집어 놓는 형국이라 하늘과 땅의 흐름에 귀라도 기울여야 마땅하다는 생각 때문에 이리 되었다.

유튜브나 구글신이 가르쳐 주는 것은 터무니 없을 정도로 수 많다만, 따지고 보면 모든 결과는 오로지 나에게 달린 일이어서 매사 겁 많고 생각 많은 내가 쳐다보는 것이 하늘이 되었다.

손바닥 만한 채마밭과 화초밭 가꾸는 일에 이리 소심한데도, 이 나이까지 이만큼 산 것은 모두 내가 믿는 신(神) 덕이다. 이 덕담 만큼은 살아있는 한 부끄럽지 아니 할 일이다.

못된 내 성정이 늘 그래왔듯, 결과에 대한 두려움은 그리 없다. 그저 흙을 뒤엎고, 새 흙을 섞어 내 뜻대로 고른 그 한 뼘 땅 위에 싹을 틔우고 잎과 꽃과 열매를 맺는 그 지속되는 순간 순간들 속에서 느끼는 기쁨과 즐거움을 만끽해 보자는 내 욕심에 충실할 뿐이다. 그 욕심 속에서 문득 문득 마주하는 신(神)을 만나는 기쁨이라니. 하여 하늘을 본다.

화초와 채마는 욕심을 부려도 그리 후회될 리 크게 없을 듯 하여 마구잡이로 용기를 내었다만, 아직 나무는 이른 것 같아 올해는 화분에 작은 묘묙들을 키워 볼 요량이다.

그렇게 오늘 오후에 흙을 만지며 스쳐 간 생각 하나.

신(神)은 믿어야 할 나의 대상이 아니라, 나를 향해 묻고 있는 그의 뜻을 헤아려야 할 물음  – 바로 그 물음 자체일 수도.

날씨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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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과 사월

내 젊은 시절의 4월은 늘 추웠다. 어쩌면 어린 시절부터 추위를 느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1960년 4월 국민학교에 입학했다. 당시엔 새학기가 4월에 시작되었다. 왼쪽 가슴에 커다란 흰색 손수건을 달고 운동장에서 ‘앞으로 나란히’ 등의 제식과 체조, 그리고 동요 등을 배우다 처음 교실을 배정받아 들어가던 날, 바로 4월 19일이었다.

전쟁이 막 끝날 무렵에 태어난 우리 또래들에게 학교와 교실은 많이 부족했다. 본교와 분교로 교사(校舍)가 나누어져 있었고, 더하여 오전반과 오후반으로 나누어 등교를 하였다. 나는 오후반이었는데, 그날 어머니가 내게 빨리 서두르라고 재촉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렇게 나섰던 등교길인데 내 걸음은 신촌 노타리(당시엔 노타리가 아닌 버스 종점이었다.)에서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무수한 대학생들이 어깨 걸고 문안(당시엔 시내를 문안이라 했다.)으로 달려가는 행렬이 내 앞을 가로 막고 이어졌기 때문이었다.

그 행렬이 끝나고서야 향했던 학교 운동장은 휑하니 텅 비어 있었다.  아이들은 이미 배정된 교실로 다들 들어간 후였기 때문이었다. 내가 운 기억은 없다. 그저 서늘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았었을까.

그날 밤이던가 그 이튿날이던가, 내게 자전거를 태워 주곤 하던 고등학생 동네 형이 문안에 나갔다가 죽었다는 소식에 동네 아줌마들이 혀를 차던 일도 기억난다.

머리 굵어진 어느 해 4월부터 나는 벗들과 함께 어깨 걸고 매캐한 최루가스로 가득한 그 신촌 거리를 뛰어 다녔다. 1980년 4월, 이미 나이 든 축에 속한 나는 여전히 그 거리를 뛰었었다. 그리고 정말 아팠던 5월을 맞았던 기억들이 새롭다.

그랬다 젊은 시절 내가 겪은 4월은 늘 추었다.

이제 늙막의 선을 딛고 선 나이에도 4월 소식은 여전히 몸 움추려 드는 서늘함이 이어진다.

그래도 언제나 4월엔 꽃들이 핀다. 내 젊은 시절의 신촌이나 오늘 여기 내가 서 있는 델라웨어나 꽃들이 핀다.

꽃은 추웠던 4월의 기억을 잊게 하곤 한다. 오늘은 꽃들이 내 4월의 추억들을 되새겨 놓았지만.

<꽃과 과일은 언제나 더할 나위 없는 선물이다. 꽃은 세상의 모든 쓸모 있는 것들을 넘어서는 아름다운 빛으로 도도하기 때문이다. Flowers and fruits are always fit presents; flowers, because they are a proud assertion that a ray of beauty outvalues all the utilities of the world.”> – 미국이 처음 시작할 무렵에 큰 생각으로 노래하던 사람, 시인 랄프 왈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의  노래이다.

에머슨의 노래처럼 꽃의 도도한 아름다움에 세상 모든 사람들이 취하기 위해, 4월이 더는 춥지 않았으면 좋겠다. 세상 어느 곳에 사는 누구에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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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6일, 죽음 또는 삶

매사 늦된 나는 육십 대에 이르러서야 죽음에 대한 생각을 조금은 진지하게 생각 할 수 있게 되었다. 나이 육십이 지날 무렵부터 처부모와 부모들이 이런 저런 노환을 만나게 되어, 한 분 두 분 떠나시는 모습을 보면서 그리 되었다. 이즈음은 아흔 다섯에 막 하나를 더 하시는 아버지를 가까이 보며 그 죽음이란 것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진다.  그렇게 지나가는 내 육십 대를 통해 죽음은 내게도 이젠 낯설지 않은 이웃으로 다가온다.

어머니 떠나신지도 어느새 일년이 가까이 다가와 이즈음 가족들끼리 조촐히 온라인 모임으로 나마 일주기를 기리려고 이런 저런 준비를 하고 있는 중에, 꺼내 든 책 한권 김진균이  쓴 <죽음과 부활의 신학>이다.

<성서가 말하는 영원한 생명은 죽지 않고 끝없이 연장되는 삶의 시간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희망과 사랑 안에서 이루어지는 새로운 삶을 가리킨다.

그것은 시간의 끝없는 연장이 아니라, 하나님 안에서 이웃과 교통하며 하나님의 의와 사랑을 세우는 삶의 깊이 내지 ‘삶의 질’을 말한다. 영원은 현재의 삶의 끝없는 연장에서 경험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강도에서 경험된다. 이 세상에서 가장 신빙성 있는 것은 사랑이다…… 이 세상의 연약한 피조물들에 대한 사랑 안에서 영원한 생명이 현재적으로 경험된다.>

<영원한 생명은 자기 안에 폐쇄되어 있는 개인의 고립된 내적 삶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피조물들 안에 있음이요, 그들 존재와 함께하는 참여다.

그러나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고통을 당하며, 그들의 생명이 눈에 보이지 않게 파괴되고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이 현재적으로 경험하는 영원한 생명은 모든 피조물들의 생명이 회복되고 구원 받는 것을 동경하며, 그들의 생명을 파괴하는 죽음의 세력에 맞설 수 밖에 없으며, 그것을 극복하고자 노력할 수 밖에 없다. 예수도 그러하지 않았던가!

다른 피조물들이 당하는 고난과 죽음에서 눈을 돌리고, 자기 혼자 하나님과 수직적 관계 속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의 착각이다.>

그러고보니 오늘이 4월 16일.

세월호 아이들이 부활하는 사건을 만들어 내는일, 그것이 예수쟁이 흉내라도 내려는 내가 삶과 죽음을 생각하는 태도가 아닐런지….

죽음 또는 삶에.

내 책상 머리에서 쯔쯔쯔 혀 차시는 어머니 목소리 들으며.

‘이 눔아! 너만 잘 해봐!’

>>> 함께 세월호 아이들과 가족들의 아픔을 나누다가 먼저 떠난 이들도 생각난다. 그 이들의 춤과 가락은 살아있는 우리들에게 또 하나의 힘으로 살아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