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

내 속 좁은 탓이겠지만 세상일들을 바라보는 시각의 폭이 그리 넓진 않다. 판단의 경우는 더더구나 그러하여 내 경험의 한계 안에 머무르곤 하는 편이다. 내 믿음에 이르면 그 한계의 지경이 더욱 쪼그라든다.

어쩌면 내 믿음 안에서 바라본 오늘의 뉴스 한 조각에 대한 내 판단일 수 있겠다.

지금이야 할 수 있는 한 새롭게 사람들과 연을 맺는 일을 극도로 자제하는 편이다만, 한때는 참 여러 사람들 만나는 일을 즐기던 때도 있었다. 아마 한국에 이명박이 대통령이었던 시절까지는 그러했던 것 같다.

한국에서 짧게는 일년에서 길게는 수년 동안 머무르다 돌아간 이런저런 사람들을 많이 알고 지냈던 시절이었다. 연수차 또는 안식년으로 아니면 교환교수라는 이름으로 이 동네에서 머물다간 공무원, 정치인, 언론인, 교수들이 많았다. 이즈음도 뉴스에 오르내리곤 하는 선배나 내 또래부터 한참 어린 후배들 까지 그 무렵 스쳐 지나간 인연들이 제법 된다.

그 중 여럿의 자녀들이 어떻게 이른바 sky라는 대학에 입학하게 된 사연들도 제법 들어 알고 있다. 특히나 이명박 시대에 교육부장관을 하던 이는 너무나 잘 알고 있고, 그의 교육관, 입시에 대한 생각들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편이고, 그와 그의 자제들에 대해서도 익히 그리고 깊이 알고 있는 편이다.

그런 얼굴들을 떠올리며 오늘 본 조국교수 따님에 대한 뉴스를 보며 든 생각이다. 딱히 내가 연을 이었던 이들은 아닐지언정, 오늘날 한국 사회의 이른바 기득권들에 대한 생각인데, 우선 떠오르는 말은 비겁함이다. 정말이지 참 비겁하다.

아니, 비겁함에 더해 잔인하다.

더욱 더 안타까운 일은 한 땐 올곧게 산다던 이들이 변심해 부리는 비겁함과 잔인함이다.

역사 이래 늘 있어 온 사람 군상들 속에서 꿋꿋이 심지 깊게 제 갈 길 걸어 간 사람들도 많았으니…

조국선생과 그의 가족을 위해 기도하며.

https://www1.president.go.kr/petitions/600801

말씀에

이즈음 틈나는 대로 묵자(墨子)에 빠져 지낸다. 예수쟁이라면 한번은 깊게 맘 담구어 마땅한 큰 못이라는 생각이다. 기세춘(奇世春)선생님과 문익환, 홍근수 목사님이 남기신 묵자에 대한 해설은 그 못의 깊이와 넓이를 헤아리는데 큰 도움이 된다.쉽고 간결하기로는 신영복선생님의 ‘강의’인데, 묵자에 대한 언급이 지나치게 부분적이고 짧아 아쉽다. 아무튼 신영복선생님의 가르침 하나.

<성공회대 정보과학관 휴게실에 ‘겸치별란兼治別亂’ 이란 액자가 걸려 있습니다. 내가 쓴 글씨입니다. 겸애하면 평화롭고 차별하면 어지러워진다는 뜻이며 물론 묵자의 글에서 성구(成句)한 것입니다.

묵자의 겸(兼)은 유가의 별(別)에 대한 비판입니다. 이 별(別)이야말로 공동체적 구조를 파괴하는 가장 근본적인 해악이라는 것이지요. 나와 남의 차별에서 시작하여 계급과 계급, 지역과 지역, 집단과 집단과의 차별로 확대되는  것이지요. 가(家)와 가, 국(國)과 국의 쟁투가 그것입니다. 세상을 어지럽히는 가장 큰 해악이 바로 서로 차별하는 교벌자(交別者)라고 묵자는 주장합니다.

조금 전에도 예시문을 들어 소개했듯이 “큰 나라가 약소국을 공격하고, 큰 가(家)가 작은 가를 어지럽히고, 강자가 약자를 겁탈하고, 다수가 소수를 힘으로 억압하고, 간사한 자가 어리석은 자를 속이고, 신분이 높은 자가 천한 사람들에게 오만하게 대하는 것, 이것이 천하의 해로움이다”라고 주장합니다. 오늘날의 세계 질서와 우리 사회의 현실을 이야기하고 있다는 생각을 금치 못합니다.>

2500여년 전 옛사람이 오늘의 뉴스들을 보며 던진 말씀 같다는 생각에.

내 뜰엔 마지막 여름 꽃이 자태를 뽐내고.

어른들의 말씀과 꽃의 아름다움은 늘 곁에 있다만 나는 언제나 그렇듯 잊고 지내다 어느 한 순간 잠깐.

신생왕(新生王) 장광선선생

어제 장광선 선생님 떠나신 지 두 해를 맞아 그를 기리는 조촐한 모임이 있었다. 아직도 그의 숨결과 손길을  느낄 수 있는 뉴저지 최남단 펜스빌(Pennsville) 선생님 댁에서였다. 변하지 않는 영원한 동지들인 선생의 가족들과 그를 따르던 선배, 동료 그리고 그의 뜻을 따르고자 애쓰는 후배 몇몇이 함께 한 자리였다.

그를 기억하는 이들은 장선생님을 미주 한인들이 이어온 한반도 통일 민주 민중 운동의 커다란 한 축이었던 사람, 또는 필라델피아를 중심으로 한 미국 동북부 한민족 자주 통일 민주 민중 운동의 선구자라고들 한다.

나 역시 그런 그의 모습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만, 그를 그렇게만 기억하진 않는다. 나는 그를 참 예수쟁이였던 사람으로 기억한다.

그는 생전에 많은 글들을 썼다. 내가 그를 알게 된 까닭도 그의 글 때문이었다. 한 동안 그는 지금은 없어진 한겨레신문 블로그였던 한토마에 그의 생각들을 거침없이 쓰곤 했다. 한토마를 비롯해 여러 지면에 글을 쓰면서 몇 개의 필명을 사용했던 그가 가장 많이 사용했던 필명은 신생왕이었다.

신생왕 바로 새로 태어난 왕이 바로 장광선선생이었다. 내가 그를 참 예수쟁이로 기억하는 까닭은 그가 말한 신생왕은 그 자신일 뿐만 아니라 사람, 사람들 바로 너와 나 그리고 그들 모두가 신과 사람 앞에서 왕이 되는 존재라는 생각으로 살았던 이었기 때문이다.

생전에 그는 오늘날 교회 모습에 대해 그야말로 신랄한 언사들을 마구 쏟아 내었다만, 나는 그의 말 속에서 그가 얼마나 예수쟁이로 살려고 애쓰는 지를 느끼곤 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이 예수를 따른다는 뜻이고, 따른다는 것은 예수와 자신이 동일하다는 생각으로 사는 것일게다.  예수 시대에 예수가 살았던 것 처럼 장선생은 그가 살았던 시절에 예수처럼 살려고 애썼던 사람이었다.

바로 사람답게 사는 삶을 생전 끝까지 쫓으려 했던 사람이 장광선선생이었다.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해서’ 온 몸으로 그 삶을 추구하며, 이웃을 똑같이 그런 사람들로 바라보려 애썼던 사람이었다.

그의 민중, 민주, 통일 그리고 자주라는 뜻도 사람, 사람 하나 하나가 모두 신생왕이라는 그의 마음가짐과 눈높이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남도 장흥 사람 장광선선생, 그가 품었던 남도에서 백두까지 나아가 미주에서 전 세계까지 사람살이 마주치는 사람마다 모두가 신생왕이 되는 세상을 꿈꾸는 씨앗 뿌리고 떠난 사람.

그를 기리며.

  1. 15. 2021

*** 지난 주에 텃밭에 뿌린 아욱과 근대들이 파랗게 싹을 틔우다. 한국 뉴스 속엔 광복회장 김원웅이 던진 말 돌멩이 맞은 이들이 난리 맞은 모양새다. 김원웅이 큰 물꼬 하나 텃다. 누군가들은 또 그 터진 물꼬 막으려 애쓸 것이고, 때론 예전보다 더 큰 뚝이 생길 수도 있겠다만 한번 터진 물꼬인데….언젠간 큰 물길 생기기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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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고문

‘올 여름 겪는 마지막 더위겠지?’ 라는 내 스스로의 위로도 크게 힘이 되지 않을 만큼 지친 며칠이었다. 체감온도가 거의 110도에 이르는 몹시 습한 바깥 날씨에 세탁소 안 보일러 열기를 더해 그야말로 찜통 속에서 보낸 한 주간이었다.

이젠 확실히 한 물 갔다. 늙었다는 말을 아직 받아 들이기 어려워 해보는 말이다만, 몸이 느끼는 피로감이 머리 속 생각에 비해 도를 넘게 크다.

게다가 내 일터는 이즈음 한참 공사중이다.  샤핑 센터 거의 2/3에 달하는 건축물들을 헐어내고 아파트와 부속 건물들을 새로 짓는 공사가 한창이다. 날은 덥고, 공사판 무질서는 연일 이어지고, “공사 중에도 영업은 합니다.”란 게시물이 왠지 모르게 내 피로를 더하는 2021년 여름의 끝물이다.

이 공사가 끝나면 내 가게는 곧 대박이 날 것 같은 건물주의 청사진을 받아 들었던 것은 오래전 일이다만, 현재는 찜통 더위보다 더한 가히 고문이다. 아파트 수백 가구가 내 잠재적 손님이 된다는 희망 따위로 오늘 웃을 수 있을 만큼 여유로운 더위는 결코 아니다.

그렇다 하여도 더위 속 오늘 하루를 열심히 살았다. 비록 온 몸에 진이 빠졌을지라도.

한 주간 미루어 두었던 이런저런 뉴스들을 훑어보다가 든 생각 하나. “역사상 가장 긴 희망고문으로 치자면  예수가 말한 ‘하나님 나라’아닐까?” 예수가 말한 하나님 나라는 그를 고백하는 사람들이 오늘 여기에서 누리는 나라임으로.

한국뉴스들 중에 내가 챙겨 보려고 애쓰는 두 가지. 세월호 가족 소식들과 조국 전 장관과 가족 뉴스들. 내가 이즈음 한국이라는 사회를 이해하는 큰 잣대이기 때문이다.

이 한주간 그 두 가족들(세월호 가족들과 조국 전 장관 가족 가족들)에 대한 뉴스들을 보며 다시 곱씹어 보는 희망고문이라는 말.

비록 짧은 세월 살아보며 절실히 느껴 고백해 보는 말이다만, 희망을 바라보며 오늘의 고문을 이겨낸 이들로 인해 사람살이는 늘 조금씩 나아져 왔다는 사실이다.

며칠 더위에 지쳐 나와 내 가족 먹고 사는 일로 희망고문 운운하는 내 부끄러움이라니!

결코 짧지 않은 세월 동안 이러저런 사회적 고문에도 불구하고 지치지 않고 한과 원을 풀어 마침내 희망을 손에 잡고자 오늘도 이어지는 고문들과 싸우는 세월호 가족들과 조국 전 장관 가족들.

그리고 그 가족들과 함께 손잡고 나가고자 아주 짧은 한 순간 한 순간 손 내밀어 함께 하려는 이들을 생각하며.

비록 오늘은 희망고문이어도.

오직 희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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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식(舊式)에

내가 셀폰을 사용한 지는 그리 오래 되지 않았다. 그나마 그저 장만해서 들고 다니는 정도이지 거의 쓰지 않는다. 생활 자체가 단촐하다보니 누군가와 개인적인 일로 전화할 필요도 별로 없고, 숱한 기능을 탑재한 셀폰을 사용할 일도 그리 많지 않다. 가게 일은 가게 전화를 사용하면 되는 일이고.

페북이니 텔방이니 카톡이니 이른바 sns 등은 아침 저녁 딱 정해진 시간에 컴퓨터 앞에서만 사용할 뿐이라서 내 셀폰의 용도는 그리 많지 않다. 아주 싸구려지만 내가 활용하는 가치에 비하면 매우 비싼 물건이기도 하다.

그나마 셀폰이 내게 아주 유용한 물건이 된 까닭은 좋아하는 음악이나 뉴스를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셀폰이 전해주는 속보는 때론 유용할 때가 많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소식을 거의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기 때문인데, 허나 때론 그게 모르니만 못할 때도 숱하다. 그래 그 유용은 곧 무용과 상쇄되어 셀폰이 내게 크게 대접을 못 받는 편이다.

한마디로 나는 이미 구식(舊式)이다.

오늘 낮의 일이다. 셀폰이 알림으로 뉴스  속보를 전했다. 가까운 메릴랜드주에서 발생한 강도 2.1의 지진으로 내 가게와 집 동네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 지진을 감지하고 놀랬다는 기사였다. 지진이 일었다는 그 시각 나는 가게에 있었지만 아무런 이상스런 느낌 조차 없었다.

아무튼 속보를 보고 혼자 소리로 내 뱉었던 말, ‘에고 이젠 지진까지’였다.

그리고 저녁나절 다시 알려 온 뉴스 속보 ‘지진이 아니라 폭발 때문’이었다고.

컴퓨터로 찾아 본 신문 뉴스엔 ‘지진’과 ‘폭발’이라는 기사들이  같은 크기, 거의 같은 시간대 기사로 동시에 떠 있었다.

누구가는 지진이라고 믿을 터이고, 누군가는 폭발이라고 믿을 터이고.

사람살이 예나 지금이나 그리 크게 변한 게 없다.

하여 사는 거 그저 구식이라도 괜찮다.

 

반복(反復)에

여러 날 전에 가게 손님 한 분이 자기 셀폰을 열어 사진을 보여주며 한 말이었다.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펜실베니아 지역에 내 소유의 샤핑센터가 있다우. 거기 있던 세탁소가 문을 닫아서 이런 저런 장비들이 놓여 있다우. 여기 사진들이 그것들인데… 혹시 당신이 관심이 있다면 가져다 쓰실라우?”

그래 틈나면 한번 가서 보겠노라고 답하고는 차일피일 하다가 오늘 다녀왔다. 딱히 내가 쓸 만한 물건은 없었다. 덕분에 아내와 함께 모처럼 필라델피아 한국 시장에 들러 장을 보았다.

몇 달러 짜리 물건 하나 들고서 들었다 놨다를 거듭하며 ‘먹곤 싶은데 뭐가 이렇게 비싸?’하는 아내에게 나는 퉁명스럽게 말을 던졌다. ‘아, 이 사람아! 먹고 싶으면 그냥 사!’. 허긴 이즈음 가는 곳마다 물가가 보통 오른 게 아니다.

오후에 이런 저런 뉴스들을 훑다가 눈에 들어 온 두가지.

하나는 어제 날짜 LA Times에 실린 한인 세탁인들의 이즈음 모습에 대한 짧은 르포 기사. 남가주 한인 세탁인들 몇 명의 어제와 오늘 그리고 그들이 바라보는 내일을 이야기하는 기사였다. 그저 내 이야기이기도 하고, 내 주변에 있는 한인 세탁인들의 이야기이기도 하여 고개 끄덕이며 읽었다. 기사에 나오는 낯익은 이름이 반갑기도 했고.

기사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문장. “The dry cleaning business ends with me,” Roh said. “That’s OK, because my children are doing something better.”

어느 세대건 내일의 희망으로 사는 것이지만, 저무는 한 세대에 속한 이들 모두에겐 회한이 묻어 있게 마련.

연합 뉴스 발 또 다른 뉴스 하나는 나를 잠시 거의 반백 년 전으로 되돌려 놓았다.

박정희의 유신이 한참 기승을 부릴 때 여차저차 하여 군에 들어 간 나는 81mm 박격포 소대 말단 소총수였다. 당시 중대 일반병들 가운데 대학 재학 또는 졸업자는 내가 유일했다. ‘저 놈은 곧 다른 좋은 곳으로 갈 것’이라는 말과 함께 거의 왕따로 시작했던 81mm 소대 생활은 만 34개월 이어져 그 곳에서 제대를 했다.

81mm 박격포의 무게는 60kg가 조금 넘었다. 포다리, 포열, 포판으로 삼등분해서 행군할 때면 우린 그걸 메고 다녔다. 삼등분한 포 무게 20kg에 소총과 배낭과 철모 등, 그렇게 나는 내 몸무게의 반이 훨씬 넘는 무게를 이고 지고 20km, 30km, 100km 행군을 했었다.

우리들이 지고 메고 다녔던 박격포는 1940대 초 제작한 무기로 이차 대전과 한국전쟁 때 쓰던 것들이었다. 그걸 21세기 최근까지 젊은 애들이 이고 지고 다녔다니 그게 참 믿기지 않았다.

이젠 참 놀랄 만한 앞선 나라가 되어 자랑스런 고국인 동시에 이국이 된 내 정든 고향 소식들인데 종종 너무 더딘 변화엔 곤혹스럽기까지 하다.

아직도 박정희 흉내가 먹히는 세상에 이르면 때론 분노가 앞서기도 한다.

저녁나절, 아내가 주문한 작은 펌프 분수를 바라보며 든 생각 하나. ‘사람살이 어찌 보면 똑같거나 엇비슷한 반복의 연속, 그 반복을 바라보는 생각 하나 바뀌어 어느 날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거’

새소리와 익어가는 텃밭 작물들을 보며 반복의 주체들은 늘 변한다는 위로를 받는 팔월 초하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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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미 소리

한낮에 내 일터는 여전히 눅눅한 더위와 겨루는 싸움터이지만 일터로 향하는 이른 아침 바람엔 이미 마른 찬기가 담겨있다.

이 나이에도 아직 급한 성정을 버리지 못하고 저녁 나절 매미 소리 가득한 내 뜨락에서 가을맞이를 궁리한다.

장자(莊子) 왈 부지춘추(不知春秋)라 했다던가.

하루살이가 한 달을 알지 못하고, 여름 한 철 울다 가는 매미가 일년을 어찌 알겠느냐는 가르침이라지만, 매미가 땅속에서 오랜 시간 짧은 생명을 위해 버텨낸 시간에 대해선 장주(莊周)선생은 알지 못했을지니.

하루살이는 하루살이, 매미는 매미 답게 제 삶을 사는 것이고.

내 생각속에서 꿈꾸고 즐길 수 있는 시간은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길고 큰 것이니, 그를 즐기는 짧은 여름 날 저녁 한 때에 대한 감사함이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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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에

거의 일 년 반 만에 아들 내외와 딸아이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였다. 게다가 이제 새 식구가 될 예비사위까지 함께 한 아주 특별한 저녁 시간이었다.

결혼예식을 두어 달 앞둔 딸과 예비사위, 아들 내외와 함께 한 저녁은 오롯이 즐거움과 기쁨 뿐이었다.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다가 아내가 여러 날 전에 내게 들려 준 작가 이민진의 소설 대목을 들려 주며 아들과 딸아이에게 물었다.

<케이시는 평생 집, 세탁소, 교회만 오가는 부모님의 삶이 한심했다. 이민 온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영어는 늘지 않고 손님들에게 바보 취급을 받았다. 사십대에 머리가 하얗게 된 엄마 리아는 일주일 내내 더러운 셔츠를 분류하고, 떨어진 단추를 달고, 10대 고객에게 미스, 미스터 존칭을 붙여 불러가면서 값비싼 디자이너 청바지 단을 줄였다. >

“너희들은 자라면서 어땠어? 세탁소하는 엄마 아빠 보면서?”

내 물음에 두아이들은 아주 밝게 웃으면서 말했다. “우린 엄마 아빠가 자랑스러운데!” 며느리와 예비사위는 덩달아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행복에

어느새

오늘도 일터의 아침 해는 떠오르면서 이글거렸다. 가게 건너편 공사판 일꾼들은 나보다 먼저 더위를 맞고 있다.  이젠 게으름이 아니라 느긋함으로 치장된 일상을 시작하며 보일러를 켠다. 그 느긋함으로 눈치챈 사실 하나, 해는 어느새 분명 짧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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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일터의 아침이 참 좋다. 한땐 이 아침을 피해보려고 많이 질척이던 때도 있었다만, 이젠 그저 감사다.

그렇게 하루 노동을 끝내고 돌아와 이즈음 친한 벗이 된 호미와 함께 놀며 저녁 한 때를 보낸다. 새소리, 매미소리, 풀벌레소리에  더위는 이미 겁을 먹은 듯하다.

자리에 눕기 전, 장자(莊子)를 손에 들다.

<대지인 자연은 나를 실어주기 위해 그 몸을 주었고, 나를 일 시키기 위해 삶을 주고, 자연을 즐기도록 늙음을 주고, 나를 쉬게 하려고 죽음을 주고 있다. 그러므로 만일 힘써 일하는 내 삶이 좋다고 한다면, 당연히 휴식인 내 죽음도 좋다고 하게 되리라.> – 장자(莊子) 대종사(大宗師)편 제 7장에서

자연으로 읽든 신이라 읽든 아님 내 스스로라고 읽든, 아직 죽음도 좋다고 할 만한 지경엔 이르지 못했다만, 그저 하루 일과 쉼에 감사할 나이엔 이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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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무더위에

세탁소의 스팀 열기와 연일 백도를 넘나드는 더위에 진이 빠질 대로 빠져 축 처졌던 어느 날 저녁, 아내가 ‘이거 한 번 들어 보셔!’하며 읽어 준 대목이다.

<케이시는 평생 집, 세탁소, 교회만 오가는 부모님의 삶이 한심했다. 이민 온 지 한참이 지났는데도 영어는 늘지 않고 손님들에게 바보 취급을 받았다. 사십대에 머리가 하얗게 된 엄마 리아는 일주일 내내 “더러운 셔츠를 분류하고, 떨어진 단추를 달고, 10대 고객에게 미스, 미스터 존칭을 붙여 불러가면서 값비싼 디자이너 청바지 단을 줄였다. >

아내가 이즈음 읽은 소설 <파친코 Pachinko>의 저자 이민진이 쓴 자전적 소설 <백만장자를 위한 공짜 음식>을 소개하는 글 가운데 한 대목이란다.

나는 그날도 미스, 미스터 뿐만 아니라 써, 맴을 입에 달고 지냈었다. 비록 이십 대 아이들일지언정. 뿐이랴! 캔이나 윌은 거의 쓰지 않는다. 큐드와 우드를 입에 달고 산다.

그날 밤, 내 아이들에게 갑자기 미안한 생각이 들어…. 한 잔 찐하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