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 대물림

김우중 전 대우회장의 몰락과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의 죽음으로 숨가쁘게 한국의 개발경제시대를 이끌어 온 한 세대가 끝났다. 정주영 – 그에 대한 평가가 어떠하든 그는 일세를 풍미한 입지전적 인물임에 틀림없다.

늙으막 소떼와 막걸리통을 싣고 북행하였던 그의 모습에서 고향에 대한 강한 귀소본능을 엿보았듯, 수 많은 조문객들과 검소를 강조한  그의 마지막 길 떠난 모습에서 현대차가 이 땅 미국에 이리도 많이 굴러다니는 까닭을 알 수 있을 듯하다.

“부자 삼대 없다”는 속담은 대물려 부를 유지하기가 썩 수월치 않음을 말한다. 정주영회장이 이룩한 현대왕국도 오늘날 한국경제가 짊어진  짐들 가운데 하나인 것으로 보아 그 앞날이 썩 순탄해 보이지만은 않는다.

화신백화점을 비롯한 해방 이후 부자 첫세대들은 당대에 깃발을 내렸고 박정희 개발독재시대에 부를 이루었던 부자들도 대부분은 당대에, 더러는 다음대에 부의 명성을 잃었으며 어쩌다 삼대 째 내리 그 부를 누리는 집안도 있지만 선대에 비하면 초라한 듯하다. 왜 부자 삼대가 그리 힘들까?

“어기여라 톱질이야, 당겨주소 톱질이야” 흥부와 그의 아내가 신나게 톱질을 한다.

첫째 박을 타서 나온 쌀로 밥을 지어 남산만큼 쌓아 놓고 아들 스물 다섯을 불러낸다.(째지게 가난했어도 엄청나게 새끼 욕심은 많았나보다) 궁기에 찌들었던 놈들은 총알처럼 밥더미를 파고들어 아그적 아그적 그 많은 밥을 먹어 치운다.

여기까지는 좋다. 착한 성정의 흥부 일가네가 일차적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큰 축복은 그 착함에 따른 당연한 응보일 수 있다.

문제는 두 번째 박을 타면서 시작된다. 없는 것이 없게 다 나오는 둘째 박에 이어 셋째 박을 타면서 흥부는 졸부가 된다. 치부(致富)한 흥부는 넓고 큰 누각과 창문만도 천 개가 되는 거대한 호화 주택을 짓고 별당엔 천하절색 양귀비를 첩으로 들여 앉힌다. 겉치장으로 부를 한껏 과시한 흥부는 일자무식인 자신과는 격에 맞지않게 큰 책방을 짓고 시경, 서경, 사서삼경에 고문진보등 책으로 그 방을 꽉 채운다. 무식을 감추려는 허세를 부려 본 것이다.

졸부가 된 이후의 흥부의 놀아나는 꼴로 보아 스물 다섯이나 되는 아들들에게  부를 물리기는커녕 당대에 거덜이 났을 듯 싶다.

겉으로 부를 과시하고 치장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질이 한국에 대물린 부자가 드문 현상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닐까?

십년이 넘도록 도처에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던 시절, 보릿고개가 해 마다 찾아 와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었던 세월,  인천항에 구호미가 산더미처럼 입항했다는 기사가 신문의 머릿기사이던 그 60년대를 지나 “잘 살아 보자”는 깃발 아래 모여 허리띠 조이고 땀 흘린 댓가로 70년대을 넘어서며 절대 빈곤이라는 일차적 가난을 이겨 내었다. 거기까진 좋았다.

그 뒤 더 잘 먹고 더 잘 입고 더 좋은 집을 갖고 마침내 더 좋은 외제 차를 타야 직성이 풀리는, 겉보기에 높아지려는 사회적 분위기는 마침내 파국을 맞았다.  그 뿐인가? 바탕이나 기초도 없이 인격적인 치장을 하자니 온통 허세 뿐이지 않았나? 이 다리 허전하게 바탕없는 외형 치장 성향이 부가 붕괴되는 사회현상, 부자가 삼대 못가는 현상이 생기도록 한 것은 아닐런지.

잘 사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분수에 맞게 살고 그 남은 부나 재물을 사회에 되돌리는 풍토가 정착된 사회에선 부의 대물림이 몇 대인들 내려 가지 않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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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가장 길게 부를 대물림 했던 가문은 경주 최진사댁이라고 한다. 최진사댁은 해마다 1만 석 이상의 남는 재물을 주변의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가통(가통)이 있었다.  그 가통 때문에 십대 만석꾼, 십대 진사의 유례없는 부를 누릴 수 있었다고 한다.

고 정주영회장의 남은 후대들 뿐만 아니라 오늘 부를 누리고 사는 모든 집안들이 그 부를 대물림 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 수 있다면 한국의 미래는 진정 밝을 것이다.

***오늘의 사족

2001년 3월 29일의 일기였다. 그로부터 12년 후인 오늘.

최진사댁이 세운 대학을 가로챘다는 의심을 받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따님께서 권력을 대물림하였다.

딱하다.

부끄러움을 넘어서

일본의 교과서 왜곡파동으로 시끄럽다.

일본 문제가 불거질 때면 등장하는 반일 구호와 현수막, 탑골공원의 궐기대회 사진과 함께 온통 반일 민족주의자들 뿐이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면 언제 그랬나 싶게 모두가 잠잠하다. 그러고 또 다시 애국적 저널리즘과 프랭카드, 반 세기 동안의 반복다.

이 점 일본도 마찬가지다. 적당히 눈치보며 과거를 정당화하다가 세 불리하면 슬그머니 꼬리를 뺀다. 그러다 가시 보수 우익을 앞세워 과거 찬양의 목청을 높인다. 때린 자의 부끄러움과 맞은 자의 부끄러움을 진정 헤아리지 못한 탓이다.

긴 역사의 눈으로 볼 때 먼저 그 부끄러움을 청산하고 이겨내는 민족이 앞설 것이다.  가해의 역사를 기록한 민족이 그 부끄러움을 청산하지 못하면 역사에서 사라져 버린다. 피해의 역사를 가진 민족이 그 부끄러움을 깨닫지 못하면 그 또한 맥이 끊긴다. 그것이 역사의 교훈이요, 종교적 역사관이다.

한민족의 역사를 훑다보면 일본 식민지 35년(일제 36년 – 이것 부터 고쳐야 한다. 만 35년에서 열 나흘이 빠지는 기간이다)보다 더 험난했던 세월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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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후기 13세기에 있었던 몽고족의 침략기간이 바로 그 때였다.

1206년 징키스칸이 몽골국가를 일으킨 후 그와 그의 군대가 지난 가는 곳마다 피바다를 이루었다. 징키스칸의 아들이 전장에서 죽자 그 지역 주민을 단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죽였다는 기록이 있고보면 그 잔인함이 오죽했으랴!

징키스칸의 아들 오코타이가 태종왕이 된 직후인 1231년, 장수 살레타이를 앞세워 한반도를 유린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1273년 4월 김통정 이하 70여명의 삼별초군이 제주도에서 최후의 항쟁으로 전멸하기까지 여섯 차례에 걸친 몽골군의 침략은 한반도 전체를 유린한 일대 사건이었다. 그리고 14세기 초 몽골족이 세운 원(元)나라가 망하기까지 100여년 간 한반도는 처참하였다.

(한반도의 역사보다 이스라엘 역사에 박식한 기독교인들은 바벨론 시대의 유대를 상상하면 될 것이다.) 고려인들 특히 가진 것 없었던 백성들과 천민들은 목숨이 다하도록 몽골족과 맞서 싸웠다. 당시 무신정권의 권력층들이 강화도로 피신하여 제 뱃속 차리기에 여념이 없어 그 곳에서도 권력다툼으로 나날을 보냈 때 그 정권 아래서 핍박받던 백성들은 목숨을 마다치않고  침략자들에게 대항하여 싸웠다.

삼별초 – 권력의 호위병들이었던 그들이 민족의 초병이 되어 마지막 한사람까지 침략자에게 대항하다가 죽은 역사는 세계사에 보기 드문 기록이다.

그 시절 가장 큰 피해자는 여성들이었다. 잔인한 적들과의 긴 싸움으로 많은 반도의 고려 여인들이 몽골인들에게 성을 유린 당하였다. 이것은 전쟁의 아픔 중 가장 큰 것이었다. 살아남은  자들의 가정마다 파괴될 상처였다.

도대체 제 몫을 못했던 당시 임금들 가운데 그나마 원종(元宗)임금이 왕 노릇 한 번 하였다.

“호수만복(湖水滿服) – 커다란 연못을 파고 “이 물에 몸을 씻으면 모든 더러움이 깨끗해 진다.”라고 선언한 임금의 명령으로 많은 여성들과 가정이 살아 남았다는 역사적 사실은 얼마나 거룩하기까지 한가?

그것은 종교다. 그것은 역사다.

요단강 강물에 흠뻑 담갔다 나온 몸이 깨끗해졌다는 믿음, 세례수 한 방울 머리에 떨어짐으로 다시 태어났다는 믿음이 종교이듯, 더러워진 몸 연못에 들어갔다 나옴으로 깨끗해졌다는 사회적 약속, 또는 믿음 그것이 새 힘을 낳는다. 그것이 부끄러움을 털어 버리는 일이다. 제 부끄러움을 알고 털어버리는 의식, 그것이야말로 부끄러움을 넘어서는 일이다.

한국이든, 일본이든 먼저 하는 자가 이긴다. 민족뿐 아니다. 장삼이사(張三李四) – 평범하게 이 땅을 살아 갈 우리도 마찬가지다.

*** 오늘의 사족

2001년 3월 22일의 글이다.

얼핏 세상은 완전히 거꾸로 흐르는 느낌이다. 2013년 이즈음엔. 숨기고 감추고 뻔뻔하게 덧칠하는 세력들이 더욱 판치는 세상인 듯 하다. 모든 세(勢)들이 그리로 모이는 듯 하다.

그러나 아니다!

무릇 역사는 긴 호흡으로 보아야한다.

쌀값이 얼마인고?

묻노니 ‘스님, 불법(佛法)의 참 뜻이 무엇입니까?’ 답하노니 ‘요즈음 여릉(廬陵)의 쌀값이 얼마나 하는고? 중국 선불교의 고승 청원(靑原)행사선사(行思禪師)의 선문답(禪問答)이다.

행사스님(? – AD740)은 달마대사로 부터 시작된 중국 선종(禪宗)을 크게 꽃피운 제6조 혜능조사(慧能祖師)의 제자로서 남악스님과 더불어 선종사의 초석을 놓은 거목이다.

그에게 어느날 신회(神會)라는 스님이 와서 묻는다. ‘불법대의(佛法大意) 곧 부처님의 참 뜻이 무엇입니까?’ 이에 대한 행사스님의 답은 그야말로 엉뚱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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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즈음 여릉의 쌀값이 얼마나 하는고?’ 일컬어 <여릉의 쌀값>이라는 유명한 화두(話頭)이다.

행사스님이 계셨던 청원사로 들어 오려면 거쳐야 했던 여릉지방은 당시 쌀이 많이 나는 중국의 곡창지대이었다. 부처님의 길을 묻는 제자에게 한 대답  ‘여릉의 쌀값’은 곧 그 쌀이 존재하는 곳 바로 그 곳에 부처의 길이 있다는 뜻이다.

쌀은 예나 지금이나 대표적인 일상용품이다. 쌀값의 오르내림에 따라 울고 웃는 그 일상성을 되묻는 것으로 답을 대신한 행사스님의 큰 뜻은 바로 일상적인 것 속에 부처의 길, 불법의 참 뜻이 있다는 것이었다.

현실세계를 벗어나 이상적인 불법을 찾아 헤매는 제자에게 일상생활을 살아가는 구체적인 삶 속에서 불법의 참 뜻을 찾아 보라고 설파하시는 행사스님 말씀은 오늘을 곱씹게 한다.

도(道)란 원래 평상적 일상속에 두루 존재한다는 것이 동양사상이다. 노장(老莊)에선 이를 ‘도재평상(道在平常)’이라고 한다. 먹고, 마시고, 심지어 싸고 눕는 그 일상속에 도가 있다는 말이다.

예수는 삼년간 그의 공생애를 사는 동안 병든 자를 고치는 기적들을 많이 행하였다. 예수 당시의 병자는 몸이 아픈 사람 이전에 신으로 부터 저주받은 사람들로 사회로 부터 버림받은  자들이었다. 눈먼 자, 문둥병자, 정신질환자, 십지어 곰배팔, 절뚝발이까지  육체적 결함은 곧 신의 저주나 신 또는 조상의 죄의 댓가때문이라고 당시의 사람들은 믿고 있었다.

예수의 기적은 병고침 뿐만 아니라 신의 저주에 대한 거부, 나악 죄로부터의 해방까지 선포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교훈은 병 고치는 기적 이후에 한 예수의 행태이다.

“예수께서 그 사람을 집으로 보내시며… (마가복음 8:26)”

벳새다의 눈먼 자를 고치신 예수께서는 그를 집으로 보냈다는 이야기이다.

‘눈을 떳으니 나와 함께 가자’, ‘눈을 떳으니 이젠 천국으로 가자’, ‘눈을 떳으니 이제 나를 위한 전도만 하라’가 아니라 ‘집으로 보냈다’는 것이다. 곧 일상성으로 돌려 보냈다는 것이다.

자! 이제 기적에 의해 눈을 뜬 이는 집으로 돌아가 보이지 않았을 때의 그 답답함과 죄 때문이라는 속박에서 해방되었다. 그러나 그는 밝게 보이는 세상을 통해  새로운 도전과 번민을 맞게 되었을 것이다.

바로 그 고뇌가 뒤따르는 일상성의 회복이야말로 ‘하나님 나라’로 가는 지름길이었기에 예수께서 그리 명령하시지 않았을까?

지난 해 말 통계에 따르면 미국에 거의 3,000여개의 이르는 한인 교회들이 있다고 한다.

천주교 성당이나 불교사찰은 포함되지 않았으니 그 수가 또 얼마나 될지?

많을수록 좋다는데 자꾸자꾸 세우면 또 어떠하리.

다만 오늘, 여기, 이 땅의 삶을 업수이 여기는 믿음, 교회나 사찰이 오늘의 삶에서 동떨어져 안주하는 방주로 여기는 믿음, 평상심(平常心)과 분리된 열광만이 믿음이라는 독선만은 말았으면 하는 생각으로…

묻노니, 여보!  20파운드 쌀값이 얼마지?

 

*** 오늘의 사족

2001년 3월 15일에 쓴 글인데 어쩜 오늘도 그대로 유효한지…

일상성을 버린 믿음이란 무릇 공허하다.

 

여유(餘裕)

입춘도 지나고 내일 모레면 대동강물도 녹는다는 우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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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번의 겨울이 이렇게 지나간다. 세월이 참 빠르기도 하여라. 주(週)단위의 이 곳 생활이 시간의 빠름을 더욱 재촉한다. 엊그제가 일요일이었던 것 같은데 벌써 한 주일이 지났다. 그 빠른 시간에 쫓기며 살다보면 무엇 하나 제대로 마무리 짓지 못하고 엄벙덤벙 생활의 켜만 늘어간다. 한참 일할 나이에 삶의 여유 운운은 자못 사치일 수도 있지만 때론 조금은 쉬었다 갔으면 하는 생각 간절하다.

업종에 따라 생활양식과 시간 씀씀이가 다르겠지만 영세 소규모 업종이 주를 이루는 많은 동포들의 삶은 큰 차이없이 엇비슷 할 것이다. 세탁소 10년은 초등학교 시절 생활계획표보다 더욱 단순하게 하루를 묶고 생활에 틈을 주지 않는다.

급한 성정(性情) 탓도 한 몫이지만 눈뜨기 무섭게 고양이 세수하고 가게로 나가 보일러를 켠다. 빨래를 하고 뒷 일 처리하다 이따금 아내가 자리를 비우면 손님들과 싱갱이도 하다가 옷배달 하다보면 어느덧 하루가 맥없이 끝나 버린다. 게다가 동네 일 한답시고 이렇게 저렇게 나선 일에 짬을 내다 보면 그야말로 하루 해가 눈 깜작할 사이다. 하여 이렇게 짬 내는 일조차 내겐 공연한 사치가 아닐까하는 생각도 해 보는 것이다.

가까이 계시는 부모님들께 얼굴 한 번 제대로 비추지 못하고 매일 전화 인사드리는 것으로 자위하고, 결혼 15주년 때 아내에게 약속한 여행계획은 20주년으로 미루었건만 눈 앞에 다가 온 20주년도  무망할 것이라는 예감이고, 아이들 내 품 떠나기 전 함께 해야 할 일들도 그냥 늘 계획일 뿐 하루 해, 일주일과 함께 또 내일로 미루어지기 일쑤이다.

수녀 이해인 시집을 들척이다가 두 아이들을 부른 것은 달포 전 주일 저녁이었다. 그녀의 영역시 몇 편을 골라 아이들에게 타자를 부탁하였다. 잠시 후 아들 녀석은 제 애비 부탁이라 마다치 못하고 억지로 건성건성 타자한 시편들을 건냈으며, 딸아이는 제법 맵시있는 활자체까지 선택하여 예쁘게 일을 마치었다.

딸아이와 마주 앉아 포스터용지에 시편들을 오려 붙이고 지난 가을 앞뜰에서 주어 온 잘 마른 낙엽 두어장과 아내가 벽단장한 마른 장미 두 가지를 가지런히 붙여 근사한 시화지를 만들어 이튿날 가게 카운터 옆 빈 벽에 딸아이와 함께 만든 작품(?)을 전시했던 것이다. 간혹 손님들이 ‘누가 쓴 시냐?’, ‘참 좋다’며 복사해 달라고 하며 관심을 보일 땐 내가 제법 대견한 생각을 하였군 하며 자족하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토요일 아침, 아내는 한국학교 교사 일로 자리를 비우고 빨래하랴, 손님 맞으랴 반은 얼 빠져 일하는데 손님 한 분이 기다리는 사이 그 시편들을 읽다가 <내 혼에 불을 놓아/ Kindle my spirit>라는 시를 가르키며 눈물까지 글썽이면서 “어쩜 이렇게 맑은 영혼이 있을까? 이 시를 함께 나눌 수 있게 한 너에게 감사한다. 그리고 네가 누리는 여유가 부럽다.”고 한 마디하고 떠난 후 그 여유(餘裕)란 말이 머리 속에 오래 남아 떠나지 않는다.

늘 정신없이 어지럽게 쳇바퀴 돌듯 살아가는 내 삶 속에도 이웃이 보기에 ‘여유’가 있다는데야?

그렇다. 스스로 눈치 채지 못하였을 뿐 내가 얼마나 많은 여유를 누리며 사는가. 정신없이 바쁘다는 핑계로 신이 내게 주신 ‘여유의 은총’을 느끼지 못하고 살아 온 것이다.

구걸할 힘만 있어도 은총이라는데 신이 주신 이런저런 작은 여유들을 찾아 감사해 보는 일도 바쁘고 바쁜 이민 생활을 이겨내는 삶의 한 지혜일 듯 싶다.

*** 오늘의 사족

내가 윗글을 쓴 것은 2001년 2월 15일이었다. 그로부터 만 12년 일개월이 흘렀다.

우리 부부는 여전히 변함없는 세탁소의 하루를 보내고 있다. 두 아이들은 이미 장성하였고, 연로하신 부모님들은 병원출입이 잦으시다.

아내는 토요일이면 여전히 한국학교를 나가고… 교장을 맡고 있는데 이제 임기만료가 다 되어간다.

나는 여전히 손님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시를 보낸다. 마치 삶의 여유가 있는듯이…

진달래와 개나리

“꽃샘추위” – 추위까지 사람인양 새암을 부려 꽃피는 것을 시샘한다는 생각에서 만든 이 말이야말로  우리 선조들의 자연관이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말인가? 이에 대응하는 영어라야 “March Wind”(삼월바람, 삼월에 부는 찬 바람) 정도랄까? 자연을 관리 대상으로 삼았던 서구사상 또는 기독교 사상과 자연과 사람이 하나인 동양사상 또는 도교사상을 깨놓고 비교할 수 있는 듯하다.

‘겨울 다 갔지!’하였더니 눈이 제법 내려 이틀 장사 망치고 말았다. 그리고 옷 배달 길, 그 잔설(殘雪)입은 나무가지에 봄눈 튀운 것 보았다. ‘꽃샘추위였군’ 혼잣말하며 이미 봄이 왔음을 느낀다. 이 눈 녹으면 우리집 앞뜰 관상수(?) 개나리 노오랗게 활짝 피고 뒷뜰 진달래 붉게 물들리라. 더하여 빨래감 잔뜩 쌓이는 세탁소 제 철 만나리라 꿈이라도 꿈꾸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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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히 묏등마다 그 날 스러져 간 젊음같은 꽃사태가 맺혔던 한이 터지듯 여울여울 붉었네> – 70년대 이후 한국 대학가에서 소위 데모노래로 유행했던 ‘진달래’의 가사이다.

‘가시는 걸음 걸음’ 뿌렸던 소월의 님에 대한 한이 젊음의 한, 민족의 한으로 나아가는 소재로 쓰인 진달래꽃이다.

70년대 한 때는 진달래를 노래하는 것조차 불온시하던 시절이 있었음을 기억하는 이 얼마나 될까? 내 고향 서울 신촌 안산에 조차 흐드러지던 그 진달래를…

산철쭉, 참꽃나무, 두견화(杜鵑花), 영산홍(迎山紅) 등으로 불리는 진달래는 한반도 및 만주지방 산간 양지 바른 곳에 잘 자라 이른 봄 정취를 한껏 드러내는 꽃이다. 옛 기록에 의하면 진달래 꽃으로 기름을 짜기도 하고 탕을 만들어 먹거나 화전(花煎)을 부치거나 나물을 무쳐 먹기도 했다고 한다.

특히 삼월 삼짓날 음식은 이 진달래꽃 음식이 주를 이루었다. 진달래로 만든 음식 가운데 특히 유명한 것으로는 진달래꽃과 뿌리를 섞어 빚은 두견주(杜鵑酒)를 들 수 있겠는데 이 술은 약주로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진달래는 약용으로도 쓰여 민간 및 한방에서 강장, 이뇨, 건위 등에 다른 약재들과 함께 처방하여 쓰기도 한단다.

그러나 무엇보다 진달래는 봄이면 온 산하를 붉게 물들이는 ‘더불어 정신’ 곧 함께 뽐내는 자태에서 제 맛을 느낄 수 있으며 모진 추위와 가뭄에도 거뜬히 이겨내는 강인한 생명력이 그 멋을 더해 준다 하겠다.

‘나리 나리 개나리’- 여기서 나리는 홀로 피는 서양꽃이요, 개나리는 무리지어 피는 우리 꽃이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어서인지 개나리를 귀하게 여기지 않지만 이 개나리야말로 한국이 원산(김태정이 쓴 책 ‘우리꽃 백가지’에서)인 식물로 한민족이 자랑할 수 있는 한국 고유의 특산물이다.

봄이면 어디서건 노오란 꽃잎 내밀어 제 있음을 자랑하는 개나리는 생명력이 대단히 강해 가지가 땅에 닿기만 하여도 곧 뿌리가 내리고 가지를 잘라 놓으면 그 마디에서 뿌리가 나온다. 개나리 또한 한방이나 민간에서 약재로 써 종창, 임질, 이뇨, 치질, 부스럼, 해독 등에 다른 약재와 함께 처방하여 쓴다. 이 또한 내 고향 신촌에 흐드러졌었다.

우리집 앞뜰 관상수라 했다.

이 땅에도 어디서건 볼 수 있지만 내 뜰 개나리는 신촌 안산의 개나리다. 뒷뜰 흐드러질 진달래는 소월의 진달래요, 그 묏등마다 스러져갔던 내 젊음의 이야기들이다.  더하여  그 끈질긴 생면과 이웃에게 베풀 약용, ‘더불어 함께 해야만’ 아름다움은 우리 다음세대에게 넘길 꽃의 아름다움이다.

아직 오지 않은 봄, 우리 세대 아니면 다음 세대 아니 그 다음 세대라도 무리지어 필 진달래, 개나리꽃을 기다리며.

(2001. 3. 1.)

*** 오늘의 사족

이 땅, 이 이민의 땅을 살아가는 모오든 내 피붙이들이 힘들고 어려워도 개나리, 진달래처럼 생명력 강한 삶들을 이어 가길…

들사람(野人)이 그립다

들사람(野人)이 그립다

하루 저녁 술값으로 수백만, 수천만을 쓴단다. 천만 단위의 옷을 심심풀이로 산단다. 값비싼 외제를 제 때 손에 못 넣으면 비행기 타고 가서 사 온단다. 그리고 당당하게 말한단다.

“IMF가 한 번 더 왔으면 좋겠다. 그래야 있는 놈, 없는 놈 구별이 확실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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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서울 강남을 활개치고 다니는 그들을 일컬어 ‘황금족;이란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 어쩌다 제 놈 배부른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웃 등가죽 붙는 꼴 보고 싶은 생각 들었을까? 분 삭히고 곰곰 생각하면 여기 사는 우리라서 자유로울까?

예수 살아 생전에 제일 미워하던 이들은 바리새인이었다. 오죽 미워했으면 “화 있을진저!”, “회칠한 무덤”, “독사의 새끼들” 하였을까? 그들이 누구였나? 율법학자라고? 아니다. 이른바 소시민 계층으로 율법을 헌신적으로 따른 자들이었다.

그런데 예수가 왜 그들을 그토록 미워하고 저주했을까? 당시의 사회경제적 여건으로 율법 특히 안식일법, 십일조법은 밥깨나 먹는 자들이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만큼 그들은 누렸다는 것이다. 바리새인은 거기에 만족하지 않고 교만하였다. 그들보다 못한 자들에 대한 비정함과 교만이 예수의 미움을 샀다. 제 잘난 맛에 만족하지 못하고 저보다 뒤쳐진 이웃을 뭉개려고 하는 그 맘보가 예수 보기에 악마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개하라’한 것 아니겠는가?

그 보다 먼저 들사람 세례요한이 있었다.

‘회개하라, 회개하라’ 광야에서 외친 그 소리가 어디 그 곳으로 몰려든 지치고 찌든 인생들에게 한 소리였겠는가? 예의 그 바리새, 귀족, 제사장들 그 때 있고 누린다는 자들에게 한 소리였지. 그리고 그의 목이 날아갔다. 여우라 불렸던 헤롯이 그 광야의 소리 막고자 요한의 목을 친 것이다.

유대 역사의 기록자인 요세푸스는 AD70년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2000년간 유대인들이 나라없이 떠 돌게 된 원인(遠因)은 바로 이 들사람 요한의 처형에서 비롯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들사람 소리, 들사람 정신 죽이자 나라가 없어졌다는 말이다.

역사 이래 930여 차례의 외침과 전쟁을 치루면서도 한반도에 한민족이 꿋꿋이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까닭이 무엇일까? 바로 들사람의 얼 곧 야인정신, 예언자정신과 함께 했던 민중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멀리 갈 것도 없다. 해방 후 백범이 있었고, 죽산이 있었다. 장준하가 뒤를 이었고 늦봄 문익환이 그 길을 갔다.

그들이 외쳤던 소리는 “더불어 함께 가야만 하는 민족”이었으며, “사람이 사람됨 찾자”는 정신운동이었다. 그 소리 누가 없앴는가? 그 정신 누가 죽였는가? 그 얼 누가 땅에 묻었는가?

“오직 잘 살아 보자”는 구호와 “하면 된다”는 그 군대정신에 눈 먼 우리 모두가 죽였다. 무엇보다 본래 도둑심보인 정권이 죽였다. ‘때려잡자 공산당’과 ‘까부수자 미제 괴뢰’의 그 얼 빠진 구호에 혹했던 남북 우리 모두가 죽였다.  권력이 다 무엇인가? 허가낸 도둑 아니겠나? 오죽하면 야훼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나라 세우지 말라 일렀겠나? 그러면 백성(인민)들이 알아 차려야 할 일이다.

아직도 김씨정권, 노씨정권, 전씨정권 탓하는가? 이씨정권 아니 아무개정권이 들어선들 무에 달라지겠나? 거기 사는 백성(인민)들이 정신 차려야 할 일이다.

그 들사람, 그 얼, 그 정신 언론이 죽였다. 교묘한 언설로 무지한 백성들 눈 가리고 이리저리 우우 몰려 다니게 해 놓곤 제 몸둥이 키우기에 바빳던 언론이 죽였다. ‘민족이 하나여야 한다’는 들사람 소리를 ‘공산당과 하나 되잔다’고 나발불며 뻘건 칠해서 죽였다. ‘잘 사는 것 보다 옳게 사는 것이 먼저다’는 들사람 소리 뚝뚝 잘라 ‘잘 사는 게 나쁘단다’ 통단으로 뽑아 돌팔매 유도해 죽였다.

아니다. 그 소리 종교가 죽였다. ‘이 땅은 잠시 뿐’이라며 보이지도 않는 하늘만 가르켜 모두 얼 빠져 쳐다보는 사이 제 놈 첨탑만 높이고, 국보급 사찰 소유에 급급했던 종교가 죽였다. 이 땅 별 볼 일 없으면 제 놈이나 하늘나라 먼저 가지 않고 이 땅에 발 붙여 살아야 할 백성들 홀려 구름같은 하늘타령이나 한 종교가 죽였다.

아니다. 아니다. 우리가 죽였다. 우리 모두가 죽였다. 죽기 아니면 살기다 사생결단식으로 ‘잘 살아 보자’고 달려 온 우리 모두가 죽였다.그러다 여기까지 왔다. 어디 ‘황금족’이 서울 강남 땅에만 활개 치겠는가? 한반도 전체 세계 구석구석 들사람 죽인 정신으로 살아가는 민족들이 황금족 되지 말라는 법 있겠는가?

위만 바라고 아래를 짓밟는 사람들이 ‘바리새’라  하였다.

나를 추스리고 내 민족을 추스릴 소리, 들사람 소리 살려 내야 한다.

모가지 드리워 붉은 피 흘릴지라도 크게 외칠 들사람 소리가 그립다.

한반도에.

여기서 한반도로 사는 우리에게.

(2001. 2. 22)

*** 오늘의 사족

그랬다. 2001년 어느 날 한국신문을 읽다가 황금족에 대한 기사를 보았다. 그리고 써 본 글이다.

오늘 2013년 어쩜 이 글이 아직도 유효할 수 있는지? 솔직히 나는 한국이나 조선을 향해 무어라 할 처지와 입장이 아니다.

여기 이민의 땅에 뼈를 묻을 것이고, 이 이민의 땅이 내 나라인 사람이다.

어찌하리! 그럼에도 한민족인 것을.

여우 헤롯, 이천년 전에도 동물에 비교된 권력자가 있었고 그가 나라를 말아 먹었단다.

참 아프다. 때론.

포기하지 말자

DSC_0515_600w제 스스로에게 해보는 말입니다.

몇년 전 Daum에 블로그를 만들고 한 일년 반 글을 올린 적이 있었답니다.  하다보니 별로 재미가 없었답니다. 그래 그만 두고 그 뒤로는 주로 카페(http://cafe.daum.net/kimyoungkeun )와  종이잡지인  세탁정보에 글을 써왔답니다.

세탁인들을 상대로 한 이야기를 하다보니 아무래도 그 업에 종사하는 분들 위주로 글을 쓰거나 연을 맺고 살아 온 것이지요.

이제 좀 자유롭게 하루의 일기를 기록하듯 편한 제 공간을 이 곳에 엽니다.

우선 지난 글들을 이 곳에 정리하는 일부터 시작하려합니다.

Don’t give up! 제가 Daum 블로그를 접으며 마지막 쓴 글의 제목이랍니다.

살다보면 자의건 타의건 하던 일을 접는 경우가 생기는 법이지요.

모든 상황이 정말 어쩔 수 없는 경우 – 그 조차 그 길 밖에 없다고 단정질 수 없거나 시간이 흐른 뒤 후회하는 일도 있지만 – 를 제외하고는 어쩌면 내 안의 마음이 먼저 포기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을까요.

이제 다시 시작해 봅니다. 시작은 언제나 새로운 것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