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우중 전 대우회장의 몰락과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의 죽음으로 숨가쁘게 한국의 개발경제시대를 이끌어 온 한 세대가 끝났다. 정주영 – 그에 대한 평가가 어떠하든 그는 일세를 풍미한 입지전적 인물임에 틀림없다.
늙으막 소떼와 막걸리통을 싣고 북행하였던 그의 모습에서 고향에 대한 강한 귀소본능을 엿보았듯, 수 많은 조문객들과 검소를 강조한 그의 마지막 길 떠난 모습에서 현대차가 이 땅 미국에 이리도 많이 굴러다니는 까닭을 알 수 있을 듯하다.
“부자 삼대 없다”는 속담은 대물려 부를 유지하기가 썩 수월치 않음을 말한다. 정주영회장이 이룩한 현대왕국도 오늘날 한국경제가 짊어진 짐들 가운데 하나인 것으로 보아 그 앞날이 썩 순탄해 보이지만은 않는다.
화신백화점을 비롯한 해방 이후 부자 첫세대들은 당대에 깃발을 내렸고 박정희 개발독재시대에 부를 이루었던 부자들도 대부분은 당대에, 더러는 다음대에 부의 명성을 잃었으며 어쩌다 삼대 째 내리 그 부를 누리는 집안도 있지만 선대에 비하면 초라한 듯하다. 왜 부자 삼대가 그리 힘들까?
“어기여라 톱질이야, 당겨주소 톱질이야” 흥부와 그의 아내가 신나게 톱질을 한다.
첫째 박을 타서 나온 쌀로 밥을 지어 남산만큼 쌓아 놓고 아들 스물 다섯을 불러낸다.(째지게 가난했어도 엄청나게 새끼 욕심은 많았나보다) 궁기에 찌들었던 놈들은 총알처럼 밥더미를 파고들어 아그적 아그적 그 많은 밥을 먹어 치운다.
여기까지는 좋다. 착한 성정의 흥부 일가네가 일차적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큰 축복은 그 착함에 따른 당연한 응보일 수 있다.
문제는 두 번째 박을 타면서 시작된다. 없는 것이 없게 다 나오는 둘째 박에 이어 셋째 박을 타면서 흥부는 졸부가 된다. 치부(致富)한 흥부는 넓고 큰 누각과 창문만도 천 개가 되는 거대한 호화 주택을 짓고 별당엔 천하절색 양귀비를 첩으로 들여 앉힌다. 겉치장으로 부를 한껏 과시한 흥부는 일자무식인 자신과는 격에 맞지않게 큰 책방을 짓고 시경, 서경, 사서삼경에 고문진보등 책으로 그 방을 꽉 채운다. 무식을 감추려는 허세를 부려 본 것이다.
졸부가 된 이후의 흥부의 놀아나는 꼴로 보아 스물 다섯이나 되는 아들들에게 부를 물리기는커녕 당대에 거덜이 났을 듯 싶다.
겉으로 부를 과시하고 치장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질이 한국에 대물린 부자가 드문 현상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닐까?
십년이 넘도록 도처에 전쟁의 상흔이 남아있던 시절, 보릿고개가 해 마다 찾아 와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었던 세월, 인천항에 구호미가 산더미처럼 입항했다는 기사가 신문의 머릿기사이던 그 60년대를 지나 “잘 살아 보자”는 깃발 아래 모여 허리띠 조이고 땀 흘린 댓가로 70년대을 넘어서며 절대 빈곤이라는 일차적 가난을 이겨 내었다. 거기까진 좋았다.
그 뒤 더 잘 먹고 더 잘 입고 더 좋은 집을 갖고 마침내 더 좋은 외제 차를 타야 직성이 풀리는, 겉보기에 높아지려는 사회적 분위기는 마침내 파국을 맞았다. 그 뿐인가? 바탕이나 기초도 없이 인격적인 치장을 하자니 온통 허세 뿐이지 않았나? 이 다리 허전하게 바탕없는 외형 치장 성향이 부가 붕괴되는 사회현상, 부자가 삼대 못가는 현상이 생기도록 한 것은 아닐런지.
잘 사는 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분수에 맞게 살고 그 남은 부나 재물을 사회에 되돌리는 풍토가 정착된 사회에선 부의 대물림이 몇 대인들 내려 가지 않으리.
한국에서 가장 길게 부를 대물림 했던 가문은 경주 최진사댁이라고 한다. 최진사댁은 해마다 1만 석 이상의 남는 재물을 주변의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는 가통(가통)이 있었다. 그 가통 때문에 십대 만석꾼, 십대 진사의 유례없는 부를 누릴 수 있었다고 한다.
고 정주영회장의 남은 후대들 뿐만 아니라 오늘 부를 누리고 사는 모든 집안들이 그 부를 대물림 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 수 있다면 한국의 미래는 진정 밝을 것이다.
***오늘의 사족
2001년 3월 29일의 일기였다. 그로부터 12년 후인 오늘.
최진사댁이 세운 대학을 가로챘다는 의심을 받는 박정희 전 대통령의 따님께서 권력을 대물림하였다.
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