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촌연가 7

<그리운 얼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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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빠르게 변하고 지금도 변화의 연속인 곳이 대한민국입니다만 그 변화무쌍한 것들 가운데 빼 놓을 수 없는 것이 교육정책과 입시제도일 것입니다.

나이가 한 삼년 차이만 나면 아마 다른 교육정책과 입시제도 아래서 성장을 했을 것입니다.

제가 고등학교 입학을 할 때부터 달라진 것은 이른바 동일계 진학이라고 해서 인문학교의 경우 고등학교를 무시험으로 그대로 그 학교로 진학을 하는 것입니다. 일테면 A중학교를 나왔으면 한 울타리에 있는 A고등학교로 무시험 진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업계 고등학교는 입학시험을 치루게 되어 있었지요.

그런데 문제는 중학교만 있는 경우였지요. 한 울타리에 고등학교가 없으니 갈 데가 없는 것이지요. 그래 각 인문학교의 학급 수를 조금 늘린 것이지요. 그렇게 늘린 숫자만 입학전형을 통해 학생을 선택하였던 것이지요.

지금도 생각해보면 도대체 어떤 짱구가 그런 입시제도를 생각해 냈는지 이해를 못하는 것이지요. 평등, 형평이라는 개념이 탑재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이었지요.

어쨋거나 제가 다니던 중학교 한 울타리에 같은 모표를 쓰는 고등학교는 경기상업고등학교였답니다. 중학교 동창들 가운데 거의 많은 아이들이 별 선택없이 한 울타리 안에 학교를 선택했지요.

물론 제 짝궁 상태처럼 비좁은 경쟁을 뚫고 당시 일류학교라는 인문계 K학교에 입학을 한 경우도 있으니까 다 제 탓이겠지만, 공정한 게임은 아니었다라는 생각이지요.

한국의 돌아가신 두 분 대통령님께서 상업고등학교 출신이셨지요. 두 분 다 정말 제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분들이시지만 두 분들께 따라다니는 수식어 “똑똑했지만 가난했기 때문에” 상업학교를 나왔다는 말에는 불만이 좀 있답니다.

똑똑한 아이들도, 가난한 아이들도, 잘 사는 아이들도, 덜 똑똑한 아이들도 갈 수 있는 곳이 실업계 학교이고, 실업계학교가 대우받은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는 생각입니다. 제가 상고를 나와서가 아니라 아이들을 위해서 국가를 위해서 실업계를 보는 눈이 달라져야 건강한 사회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을 쓰다가 올 초에 받은 “도상(道商) 45회” 수첩을 꺼내 보았습니다.  이젠 다들 중늙은이가 되었습니다. 참 좋았던 때였습니다.

그 시절에 제 평생에 영향을 끼친 몇 분들을 만났습니다.

우선 신촌 대현교회의 황인기목사님이십니다.

“고난받는 예수”를 가르쳐 주신 분입니다. 영문학을 전공하신 분답게 늘 영어로만 하셨지요. Suffering Jesus라고요.

그리고 또 한 분. 박대위교수님입니다.

까까머리 고등학교 남학생들을 모아 놓고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이 아이들에게 지혜를 주십시요. 이 아이들이 이 나라의 앞날입니다. 지금은 공부할 때입니다. 아이들 잘 때 빤스 속으로  손 집어 넣지 않게 해 주십시요.”

그리고 고등학교 담임선생님 김기영선생님입니다.

제가 공부를 지지리 못했습니다. 우선 주판이 싫어서 주판으로 스케이트 타다가 선생님께 꿀밤 맞기 일수였고, 타자시간에는 소설책 읽다가 걸려서 인도산 고무라는 롤라로 머리 터지기 다반사였지요.  성적은 늘 뒤에서 세어야 빨랐고요.

영어선생님이시던 김선생님께서 고등학교 이학년 어느 날 저를 부르셔서 하신 말씀이지요. “니 아직 안 늦었다. 공부해서 대학가라. 니 글을 쓰던 언어학을 하든 대학가라.” 그렇게 아주 구체적으로 제 길을 선택해 주셨지요.

그 김선생님 훗날 제가 졸업한 후 전근 가신 곳이 제 아내가 다니고 있던 고등학교였답니다. 그래 제 아내의 영어선생님이시기도 하지요.

아! 제 아내의 얼굴을 교회가 아닌 하교길 버스 안이나 길에서 종종 마주친 것도 그 무렵이었지요. 아내는 중학교 또뽑기 학번이라 세검정 꼭대기에 있는 중학교를 다녔기 때문이지요.

백년대계라는 교육정책만이라도 일관성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 시절 “대망의 70년대”라는 플랭카드가 신촌, 이대앞 구름다리를 비롯한  신촌 곳곳에 내 걸리기 시작했답니다.

 

신촌연가 6

<말표 운동화>

신작로(新作路), 문(門)안.

신촌 우리 또래들이 쓰던 말 가운데 제2한강교가 들어선 후 빠르게 사라진 말들입니다. 사방으로 새로운 길들이 열리거나 넓혀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사대문(四大門)안이라고 해서 “문안에 들어간다”던 말도 잃게 되었습니다. 이젠 시내(市內)라는 말을 쓰게 되었고 신촌은 이미 시내 중심으로 변해가고 있었습니다.

딱지치기, 구술치기(다마치기라고했지요), 다방구, 술래잡기,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비석치기등 동네 놀이에서도 졸업을 하게되었습니다.

중학교시절엔 이렇다 할 추억이 별로 없습니다.

중학교 정문 앞에서 일어난 1.21사태라는 무장공비 사건이 있었군요. 자하문 앞이지요. 저희 학교 학생 하나가 목숨을 잃었지요. 지금 그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그해 여름에 그 친구의 이야기를 주제로 한 반공영화를 학교에서 찍은 기억이 납니다. 땡볕에서 몇 시간이나 전교생들이 서 있었지요. 몇몇 아이들은 더위에 지쳐 쓰러지기도 하고…

그즈음에 제 즐거움은 서대문에 있는 4.19도서관에 가는 일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인쇄소는 날이 갈수록 번창했습니다.

옵셋 인쇄기가 들어오고 부터는 총천연색 인쇄물을 찍는 진짜 인쇄소가 되었답니다. 그즈음부터 아버지의 인쇄소는 제게서 멀어졌습니다. 제 또래의 사환 아이도 들어오고 인쇄기술자와 도장을 파는 견습생까지 달린 아버지의 가게에서 마땅히 제가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지요.

상태라는 단짝 친구가 있었습니다.

친구의 집은 독립문 부근이었지이요. 아직 사직터널이 생기기 전이었으므로 상태와 저는 방과후 신문로까지 꼭 함께 걸었답니다. 그리고 거기서 각자 신촌과 독립문으로 가는 버스를 탓었지요.

어느 날인가 누구랄 것도 없이 서대문까지 걸어가자는데 뜻이 통해 좀 더 걷다가 발견한 곳이 바로 4.19 도서관이었습니다.  거기서 만난 것이 소설책들입니다. 학교가 파하자마자 그 곳으로 달려가기 시작했습니다. 친구 상태와도 멀어졌지요. 춘원 이광수에서 시작하여 정비석, 장용학에 이르기까지 학교 수업시간에도 어제 읽었던 그 소설에 빠져 있곤하였답니다. 뭔 소리인지도 모르고 읽은 헷세의 데미안에서부터 카네기 인생론, 간디… 제 즐거움이었지요.

신촌 동네친구들은 주로 교회 중심이었습니다.

그런데 동네친구들 사이에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층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국민학교 때까지는 몰랐는데 일류학교, 이류학교, 삼류학교의 계층이 생기기 시작한 것입니다. 거기 더하여 잘 사는 아이들, 못 사는 아이들이라는 계층 형성이 시작된 것입니다.

운동화.

그즈음 제 신발은 줄기차게 까만 말표운동화였습니다.

물론 학교에서도 단화라고 부르던 학생구두를 신고 다니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이 저처럼 까만 말표운동화였답니다.

그런데 주일 날 교회에 가면 이야기가 달라졌지요.

단화에서부터 그 무렵 쏟아지기 시작한 각종 무늬의 이른바 이즈음의 스포츠 운동화들을 아이들이 신기 시작한 것이었지요. 교회 모임이 끝나면 아이들은 새로 생긴 분식집으로 몰려가곤 했지요.

저는 꾸준히 말표운동화이었고, 삼시 세 때 어머니가 해 주신 밥만 먹고 살아야 정석인 줄 알았지요.

어느 날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 놀고 있는데 얼굴 하얀 계집아이가 저를 향해 한 마디 던졌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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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쟤는 촌스럽게 맨날 말표운동화야!”

아이들은 그 말 한마디에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고요.

그래 어쨋냐구요?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말표운동화로 그냥 쭉 나갔답니다.

대학교 때는 말표 하얀 고무신 신고 학교를 갔고요.

 

신촌연가 5

<첫번 땡땡이에 대한 추억>

헐렁한 검정 무명제복 걸친 까까머리 중학생이 되었습니다.

코 앞에 있는 학교를 걸어 다니다가 버스를 타고 등하교를 하는 일은 썩즐거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이대앞에서 신문로까지 버스를 타고 다시 광화문 네거리에서 효자동까지 전차를 갈아타야 하는 아침의 새로운 일상은 제겐 고역이었습니다. 특히 버스 타는 일은 전쟁이었습니다.

버스가 정류장에 도착하자마자 우르르 몰려 드는 사람들 틈에 끼어서 버스에 올라타는 일이란 작은 체구의 제겐 진짜 진을 빼던 것이었습니다. 게다가 막판에 간신히 버스 차문 한 쪽 끝을 잡고 한 다리를 올려 놓으려는 순간 억센 차장 아가씨가 머리에서 빙빙 도는 헐거운 모자를 홱 낚아 채서는 버스 밖으로 날려 버릴 때의 그 참담함은 그냥 슬픔이었습니다.

그래 그 전쟁 피하자고 제가 생각해 낸 꾀가 새벽밥 먹고 일찍 집에서 나서는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피해자는 제 어머니와 누나였습니다.  평소보다 한 시간  일찍 누나와 나는 이른 아침으로 배를 단단히 채우고 집을 나섰지요.

오호!  버스는 텅텅.

앉아 갈 빈 자리도 늘 있게 마련이었답니다.

이게 습관이 되어 결석은 꽤 있어으되 지각이라는 말은 제 사전에 없던 중,고등학교 6년 세월을 보냈답니다.  때론 학교 문이 아직 열려 있지를 않아 담 넘어 학교로 스며든 일도 제법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일찍 새벽에 서두르는 결심을 하게 된 결정적 이유는 제 첫 번째 땡땡이 사건 때문이었습니다.

그렇게 버스를 타야하는 새로운 생활이 시작된 지 얼마 안되어서의 일이었습니다.

버스에 올라타는 일에 몇 번이나 실패를 거듭한 후 가까스로 버스에 올랐답니다. 전차를 갈아타려 거의 뛰다싶이 했건만 효자동에 내렸을 때는 이미 등교시간을 넘긴 지각이었습니다.

학교에 들어 가기가 그렇게 싫었습니다.

“지각”이라는 게 무슨 붉은 딱지 이마에 붙이는 것 같은 낙인같았습니다.

그래 다시 전차 종점으로 돌아갔지요.

그 날 하루 효자동에서 마포 종점을 몇 번이고 전차를 타고 왔다 갔다 했는지 모릅니다. 아이들이 파할 시간에 맞추어 집으로 돌아갔답니다. 한 달에 한 번씩 새로 만드는 전차 승차 패스포드가 있었기 때문이었지요. 그게 주머니에 있는 전 재산이었으니까요.

아주 어렸던 시절 제가 새벽형 인간이 된 까닭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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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경험은 제게 일석이조의 득이 되었답니다.

어느 날 전차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광화문에서 효자동까지도 다시 버스를 타야하게 된 것입니다. 전차는 한 달치씩 돈을 내고 패스포드를 끊었지만 버스비는 그날 그날 어머니에게 타서 썼었지요.

하루에 왕복 네 번 타는 버스비를 받게 된 것입니다.

신문로에서 내려 청운동까지 걷기 시작했지요. 방과 후에도 똑 같기 걸었지요. 버스비 삥땅을 치기 시작한 것이지요. 제 용돈 만들기였습니다.

    그 때의 전차 풍경

중학교 일학년 때 제2한강교가 개통이 되었지요.

신촌은 그 날 이후 더 이상 촌(村)이 아니게 된 것입니다.

신촌연가 4

<할아버지의 추억>

신촌에서 보낸 제 사춘기의 일기에서 할아버지는 빼 놓을 수 없는 분이시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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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께서 이 글을 읽으신다면 대노(大怒)하실 일이시겠지만 제가 알고 있는 한 할아버지는 머슴의 굴레를 벗어 벗어나고자 몸부림치셨던 평생 머슴이셨습니다.

1901년생이셨던 제 할아버지의 기억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신 분이셨습니다.

억세게 힘이 좋은 고주망태 할아버지셨습니다. 그렇게 저희와 며칠 또는 두어 달 함께 계시다가 어디론가 떠나곤 하셨습니다. 그러다 찬바람 일면 다시 한 식구가 되곤 하셨습니다. 들며 나실 때마다 집안에 한바탕 소란이 일곤 했었답니다.

제가 중학교 들어 갈 무렵부터 돌아가시기까지 한 십년 동안 겨울이면 저와 한 방에서 동거하셨던 우리 할아버지는 경기도 평택의 가난한 농가의 세 아드님 중 막내이셨습니다.

“어째 니들은 외탁을 해서… 쯧쯧쯧”

제 아버님과 저를 향해 늘 하시던 말씀이셨습니다. 아버님과 저는 작고 여린 체구인데 비해 할아버지는 이른바 통뼈이셨습니다. 힘이 엄청 좋으셨답니다. 젊어 한 때 평택, 용인 씨름판 황소 차지하셨던 분이셨습니다.

나이 스물에 용인 유실마을 문씨 문중에 데릴사위로 들어가셨답니다.

일에는 이골이 나서 누구못지 않은 최고의 머슴이셨답니다. 그런데 사단은 그 힘과 술이었답니다. 씨름판 황소끌고 와 그 날로 술판으로 끝내 버리셨던 분이랍니다.

아버님이 채  열살이 되기 전 약수동 고모님 두 살 때, 제 할머님께서 세상을 뜨셨답니다.  할아버지의 본격적인 방랑생활이 시작되었답니다. 아버님과 고모님은 용인 유실마을 외할머니 손에서 자라셨답니다.

훗날 저와 한 방을 쓰면서 할아버지가 제게 들려 주셨던 그 단순, 용감, 무지한 방랑의 한 평생은 어린 제가 듣기에도 측은한 것이었습니다.

할아버지의 방랑끼는 저와 한 방을 쓰셨던 그 무렵에도 변치 않으셔서  아지랑이 이는 봄날이면 두루마기 자락 휘날리시며 잘 벼린 낫 한자루 춤에 끼시고 “벌초 다녀오마” 그 한 말씀 남기신 후 어디론가 떠나셨습니다. 그리곤 찬 바람 일고 김장철이 될 쯤이면 고주망태의 모습으로 돌아 오시곤 하셨습니다.

어느 해던가 , 아마 제가 대학 1학년이던 해의 겨울이었을 것입니다. 돌아 오셔야 할 할아버지가 소식이 없으셨습니다. 아버지와 저는 할아버지를 찾아 나섰답니다. 용인 유실마을, 궤밀마을, 평택, 진천 등지로 아버지의 기억을 쫓아 나선 것이었지요.

“니가 재봉이 손자여” 만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께서 제게 하셨던 말씀이지요.

할아버지는 제게 말씀해 주신 그대로의 모습으로 많은 이들에게 기억되어 있었습니다. 끝내 찾지 못하고 신촌집으로 돌아 왔을 때, 할아버지는 만취가 되어 제 방에 누어 계셨답니다.

그 할아버지의 여름, 겨울 한복의 수습은 어머니의 몫이었고, 술 취해 누워 계신 할아버지를 대야 물 받아 닦아주셨던 분은 제 아버님이셨습니다.

1976년 봄.

마지막으로 한 달.

신촌 노고산동 제 방에서 할아버지는 앓아 누우셨습니다. 그렇게 한 달포 동안 오래 누우셨던 일은 당신 평생 처음이었답니다. 할아버지 머리맡에서 우리 아버지 무릎 꿇고 기도하고 찬송을 끊이지 않으셨답니다.

“아부지, 예수 믿고 돌아 가세요. 그래야 천당가세요” 그 말씀 쉬지 않고 하셨지요.

그 때 제 할아버지 하신 말씀.

“이 눔아!  베룩이두 낯짝이 있지…”

제 아버님은 거의 음치에 가까운 분이십니다. 그래도 쉬지 않으시는 아버님의 그 찬송소리가 지겨우셨는지 아님 아버님의 기도에 하나님께서 응답을 하셨는지 돌아가시기 사흘 전 “그래 믿자” 그 한마디 할아버지 말씀에 목사님을 부르고 할아버지의 입교식이 이루어졌답니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묘비에 빨간 십자가 하나 그려 놓으셨지요. 우리 아버님께서.

신촌연가 3

전쟁 후 쏟아져 나온 베이비 붐 첫 세대인 우리들을 모두 수용하기에 학교는턱없이 비좁았지요. 한 학급에 70명 가량이 그것도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누어 수업을 하였으니까요. 교문을 들어서면 오른편 임시막사 건물에는 창천공민학교라는 간판이 따로 있었지요. 입학적령기를 놓친 늦깍이 학생들을위한 교실이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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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흥동 쪽으로는 창천국민학교 분교가 있었지요. 그만큼 교실이 모자랐던탓이었지요.

삼학년으로 올라가면서 학교는 분가를 했답니다. 신촌 노타리에서 연세대로 난 신작로를 경계로 왼편에 있는 동네 곧 서교동, 동교동쪽 아이들은 창서국민학교라는 새로운 학교로 옮기게 된 것이지요. 당시 잘 살고 공부 잘하는 아이들은 창서, 못살고 뒤쳐지는 아이들은 창천이라는 유언비어도 있었답니다. 그 쪽은 신흥동네이었으니까요.  제 아내가 다니던 학교였지요.

국민학교때 저는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인 아이였답니다. 뭐 특별하게 개구장이라거나, 그렇다고 뛰어나게 공부를 잘 했다거나 그런 눈에 띄는 것 없는 그저 고만고만한 아이들 가운데 하나였지요.

학교가 파하면 아버지의 인쇄소가 제 놀이터이었고요.

그즈음 이화여대, 연세대의 사무처에서 쓰는 각종 서식들과 고무직인들은 아버지의 독차지였습니다. 그거 배달하는 일은 제 몫이었지요. 인근의 한국전력도 아버지의 주고객이었고요. 당시 어머니는 밤을 새워 등사판을 밀곤 하셨지요.

국민학교 오학년 때의 일이었지요.

아버지는 며칠동안 출장길에 나섰답니다. 물론 조수인 저도 따라 나섰지요. 서대문 네거리에 있던 농협중앙회 로비 한쪽 구석에 아버지의 임시도장포가 세워졌답니다. 당시 무슨 일이었는지는 몰라도 농협과 거래가 있는 모든 사람들이 새로 꾸며야 하는 서류가 있었고 거기 도장 날인을 하게 되었던가 봅니다. 아버지는 아침 판을 벌리면서부터 농협이 문닫는 시간까지 며칠동안 쉬지않고 막도장을 파 대셨답니다.  저는 그 옆에서 손님들 이름을 받아 적어 아버지에게 건네고 손님들에게 돈을 받고 거슬러 주는 일을 했었지요.

그 일이 끝나고나자 우리 가족의 셋방시대도 막을 내리게 되었답니다.

노고산동에 방이 자그마치 네개씩이나 있는 우리 집을 갖게 된 것이지요.  대문가에는 우물도 있고, 앵두나무도 있었지요. 다만 수도가 연결되지 않아 물지게를 지는 일이 제 몫이긴 하였지만 그건 그리 큰 문제가 아니었지요.

무엇보다 저를 설레게 했던 것은 제 방을 갖게 된 일이었지요. 겨울이면 심심초를 즐겨 태우시던 할아버지와 동거를 하긴 했지만 말입니다. 할아버지는 이른 봄이면 나가셨다가 늦가을이면 돌아 오시곤 했지요.

개도 키우고 닭도 치고 했었지요.

우리집이었으니까요.

그 시절에도 사교육 바람이 불어, 있는 집 아이들과 없는 집 아이들 편을 가르기 시작했지요. 우주당이니 지구당이니 그런 이름이 붙은 사설학원들이 생겼답니다. 중학교 입학시험을 앞 둔 아이들을 겨냥한 학원들이었지요.

턱걸이를 단 한 번도 하지 못하는 제게 아버지는 말씀하셨지요.

“너는 학원 안 다녀도 턱걸이 여섯 번만 하면 어느 중학교라도 갈 수 있다”

마당에 철봉이 세워지고 턱걸이에 제 중학교 입학 시험에 모든 것을 걸었답니다.

그러나 중학교 일차 시험에서 보기좋게 낙방을 하였답니다.

어머니는 지금까지도 제가 실력이 안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신 채 “그 놈의 턱걸이 때문에…”라고 굳게 믿고 계시답니다.

약수동 고모님은 재수를 시켜야한다고 강력히 훈수를 두셨지만 “애 버린다”시며 이차 시험을 보게 하셨지요.

저의 새로운 육년 –  청운동 학교생활이 시작된 것이었지요.

신촌연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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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신촌노타리

제 유년과 소년 그리고 청년을 보낸 신촌은 제 부모님들께는 네 남매를 키워 낸 치열한 삶의 현장이었지요.

아버지를 따라 나들이를 나선 제 최초의 기억은 네 살 무렵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지팡이에 몸을 의지하신 상이군인이었지요. 안양유원지였습니다. 그 곳에서 도장포(圖章鋪)를 하시는 친구분을 만나러 나선 길이었습니다. 그 분도 상이군인이었는데 아버지보다 형편이 아주 안 좋으셨답니다. 두 다리를 다 쓰지 못하셨지요. 아버지는 그 친구 분에게 도장 파는 기술을 전수 받았지요.

굴레방다리 경기공업고등학교 정문 옆 굴레방 시장 입구에 아버지의 도장포가 들어 선 것은 그로부터 얼마 안되서의 일이었지요. 도장포는 이동식 간이 점포였습니다. 나무 상자 안에서 아버지는 도장 파는 도구들과 함께 온 종일을 사셨습니다. 저녁이면 이동점포는 시장안 안면있는 분의 가게에 맡겼지요.

아버지의 도장포는 일취월장이었습니다. 신촌 기차역 시장입구 버스 정류장 앞, 목  좋은 곳에 “신촌 도장포”의 간판이 올라간 것은 제가 국민학교  들어 갈 무렵이었지요.  그리고 간판이 “신촌 인쇄소”로 바뀌는데는 고작 이 년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도장 새기는 일과 프린트라고 부르던 등사인쇄, 그리고 명함과 청첩장등을 찍을 수 있는 작은 활판인쇄기가 있었지요.

아버지는 엄청 부지런 하셨지요. 그리고 틈만 나면 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셨답니다. 일제시대 소학교  4학년이  교육의 전부이셨지요. “소야 영문법”이라는 일본인이 쓴 영어책과 한영사전, 영영사전을 그냥 통째로 외우는 일을 하셨지요. 당시에는 서예와 한자 공부에 아주 열심이셨습니다.

기억컨대 그런 아버지에겐 친구가 한 분도 안 계셨지요.

훗날  “너희들 키우려고….” 하시며 그까닭을 말씀하셨지요.

그 사이 우리 가족은 이사를 세 차례 하였답니다.

첫 번째 이사는 창천동 면철이네 문간방에서 안방 할머니 문간방으로 옮긴 일이지요. 지금도 있는지 모르지만 십년 전에 한국에 나갔을 때 형제갈비집과 맞은 편에 조선옥이라는 설렁탕집이 있었는데 바로 그 조선옥 뒷 골목에 있던 집들이었지요.

그리고 다음에 옮긴 집이 이대 후문 대신동에 있는 대신동장님 댁이었지요. 이 집에 살 때 그것도 꽤 큰 빽이었답니다. 쌀배급을 동회에서 했었지요. 그 집 셋방 사는 것만으로 순서가 바뀌는 빽이었지요.

다음은 이대 육교 건너 대흥동 태균이네 문간방이었지요. 한 반이었던 태균이보다 제 성적표가 조금 낫다는 이유만으로도 주눅들어 하셨던 어머니의 눈물이 밴 곳이지요.

우리 어머니.

그 때까지 한글을 깨지 못하신 그냥 억척이셨지요. 삼시 세 때 뜨거운 밥과 그날 그날 장을 보아 신선한 반찬, 어머니의 몫이었지요.

아! 프린트. 그 등사판 팔 떨어지게 미는 일도 어머니가 감당하신 일이랍니다.

그렇게 이사를 갈 때마다 식구들이 늘었답니다. 우선 제 아래로 동생 둘이 생겼답니다.  더하여  평생 한량, 노래와 춤을 좋아하시고 거기 마땅히 술이 있어야 좋으신 제 할아버님이 방랑을 멈추고 저희와 함께 하셨기 때문이지요.

아버지의 간판이 도장포에서 인쇄소로 바뀐 국민학교 이학년 무렵 문(門)안 출입은 제 차지였지요. 명동성당 옆에 있었던 시사문화사, 단성사 뒷골목에 있었던 청조사에 가서 활자 사오는 일과 을지로 지물포에서 종이 전지를 8절, 16절지로 재단해서 들고 오는 일들이었답니다.

꼼꼼하셨던 아버지는 명조체니 고딕체니 귀에 못이 박히게 설명을 하셨고, 한자(漢字)  하나 하나를 그려주시고 “꼭 확인해라”는 말씀을 후렴처럼 붙이셨지요. 제가 한자공부를 하게 된 건 다 아버지 덕이었지요. 그 문안 나들이는 제게 큰 즐거움이었지요. 사춘기로 접어 들기 전까지 말이지요.

그러다  어머니, 아버지의 꿈인 우리집을 갖게 되었지요.

아직 제가 국민학교(초등학교라고 하지만 자꾸 입에 붙어 놓질 못합니다. 이따금 제 아버님께서 아직도 소학교라고 하시는 것처럼) 졸업하기 전 일이었지요.

신촌연가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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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가게 문 닫고 돌아 오는 길에 아내와 내기를 하였답니다. 제 세탁소에서 집까지는 평균시속 50마일로 달리면약 17분 정도의 거리입니다. 각자 다니던 초등, 중, 고, 대학교 교가를 얼마나 아는가 하는 시합이었습니다.

이 내기가 시작된 까닭은 제 블로그에 댓글을 남겨주신 분이 저희 부부의 고향인 신촌을 강력히 떠오르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 옛날 초등학교 시절 이야기를 하다가 그리 된 것이지요.

처음엔 우리 부부 둘 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였지요. 그러나 아무래도 음악적 소질이나 총기로 봐서 아내가 저보다 백배나 나았습니다. 아내는 그걸 거의 다 기억해 내었습니다만 저는 대학교, 고등학교, 중학교는 거의 한 소절도 기억해 내지 못했답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국민학교(우린 그게 더 편하지요) 교가 처음 두 소절이 정확히 기억나는 것이었습니다.

“노고산 솟은 뫼는 튼튼한 몸을 창천의 맑은 물은 정직한 마음….” 그리곤 영영 감감이지만…

창천국민학교.

당시에 신촌에서는 유일했던 국민학교였지요.

염창동쪽으로 한서국민학교가 있었고, 염리동쪽으로 용강국민학교, 저쪽 수색쪽으로 수색국민학교 아마 그랬을 겁니다. 대현동 위쪽으로 이대부국이 있긴 했지만 그 때 거기 다니던 아이들은 아마 그 시절 특수층(?)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고…

신촌이 버스 종점이었던 시절이지요. 제이한강교가 놓여지고 강 건너와 사통팔방이 된 일이 제가 그 국민학교를 졸업한 이후의 일이니까요.

1953년생들이니까 전쟁후 쏟아진 첫세대였지요.

그 땐 학기가 4월에 시작이 되어서 한 살 어린 저도 그 축에 끼게 되었지요.

당시 아이들 중에 사투리를 쓰는 아이들은 거의가 이북 사투리였지요. 충청, 전라, 경상 그 쪽 사투리는 거의 들어 본 기억이 아니 나지요. 그러니까 토박이들과 피난민들이 살던 곳이지요. 고래등 기와집과 초가집 그리고 루핑집이라거나 하꼬방이라고 부르던 집들이 공존하던 시절이었지요.

“노고산 솟은 뫼는…”하는 창천국민학교 뒷산에는 아카시아 나무들이 많았고, 때론 해골바가지들이 튀어나와 제법 용맹을 자랑하던 아이놈들은 그걸로 축구도 하곤 했었지요. 땅굴을 파고 가마니 거적대기를 대문삼아 살던 친구도 있었던 시절이지요. 물론 그 시절에도 이른바 지방토호들이 있었지요. 그 자식들과 땅굴에 살던 아이들과 다들 동무였지요.

“창천의 푸른 물은…” 신촌 창천동에는 창천 – 바로 맑은 물이 흘렀었지요.

아아! 아니에요. 당시만 해도 맑은 물은 아니었어요. 이화여대 쪽으로부터 신촌 기차역 앞을지나 신촌시장 쪽으로 흐르던 창천 위에는 통나무와 짚으로 엮은 다리들이 몇 개 놓여 있었지요. 개천 옆에서 까마중을 입이 까맣토록 따 먹곤 했지만 그 물에선 논 기억이 없으니까요. 당시 어머니와 동네 아주머니들은 빨래를 이고 모래내로 나갔지요.

가마솥에 양잿물 풀어 푹 삶은 옷들.

모래내 맑은 물에 빨아 이고 오시면 하룻길 이었지요.

신촌.

아직 현대판 새마을이 되기 전에 일이지요.

그래봤자 고작 사십 오륙 전의 일이지요.

삶이란?

참! 쩝! 쯥!

개에게 길을 묻다

당(唐)나라 고승(高僧) 조주선사(趙州禪師: AD:778-897)의 일화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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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학승(學僧) 하나가 선사에게 물었답니다.

“개(犬)에게도 불성(佛性)이 있습니까?” 개도 깨달으면 부처가 될 수 있느냐는 물음이었지요.

선사 왈. “없다”

그런데 어느 날 다른 제자가 와서 똑같이 물었답니다.

“개에게도 불성이 있습니까?” 이번엔 선사 왈. “있다”

제자가 다시 물었답니다.

“아니 그럼 부처는 그만 두고 사람이 되지 왜 개로 그냥 있습니까?”

조주선사 호통을 치시며 “얌마! 그건 개한테 가서 물어 봐!”

뭐 당나라 때 뿐이겠습니까?

제 맘 하나 다스리지 못하고, 제 안에 있는 부처 하나 느끼지 못하는 처지에 남이 무얼 하건, 개새끼가 무얼하건 그게 도(道)닦는 것과는 뭔 상관이냐는 조주선사의 가르침은 오늘에도 그대로 유효한 것이지죠.

순례자든 방랑자든 아님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저 같은 사람이든

진리가 뭐 별거 있겠어요.

때론 화살이 되기도 하고 과녁이 되기도 하고

그게 삶이지요.

눈 뜨면 일어나 세탁소로 나가 보일러를 켜고, 일하며 배고프면 먹고,

집에 들어와 아내와 함께 가요무대 보며 세월도 한탄하고 흥얼거리기도 하고, 그러다 자고…

그 일상적인 바로 나의 삶에 도(道)가 있는 것이지요.

따지고 보면

심심하면 제가 글질하는 이 짓도 다 저를 위한 것이고요.

그게 때로는 누군가에겐 화살이 되기도 하고

누군가에겐 따듯한 모포 한 장이 될 수도 있고…

과녁이 된 그가 하지 말란다고 아니 할 수도 없고

모포 한 장 더 달란다고 줄 여유도 없고

나도 때론 과녁이 되고

내미는 손도 되고…

그렇지 아니한가요?

무릇 도(道)라는 놈이….

그러다 다투기도 하고 표표히 떠나기도 하는.

다시

화살이 되고

과녁이 되는.

죽 한 그릇

조선조 말기 사람 김병연(金炳淵:1807-1863)은 일명 김삿갓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홍경래가 일으킨 난리가 나자 당시 선천부사로 있던 병연의 할아버지 김익순(金益淳)은 홍경래에게 항복한다. 이 죄로 김익순은 죽고 그 후손들은 벼슬 길이 막히는 폐족(廢族)을 당한다.

벼슬길도 막히고 심한 차별을 느낀 김병연은 스무 살 무렵부터 큰 삿갓으로 얼굴을 가리고 전국을 떠돌다가 그가 방랑생활을 하며 읊었던 시(詩)들을 모은 ‘김립시집(金立詩集)’ 한 권을 남긴 채 쉰 여섯 나이에 그답게 객사(客死)하고 만다. 민중들의 애환을 노래하고 권력자들을 풍자하며 조롱하는 그의 시들로 인해 오늘날 그를 조선시대 민중시인이라 부른다.

예의 그 방랑길의 김삿갓, 끼니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하고 여러 날 산길을 걸어 기진한 삿갓의 눈에 외딴 오두막집이 들어온다. 지친 걸음을 재촉해 오두막 집에 다다른 김삿갓이 끼니 구걸을 해 보지만 그 집 주인 역시 이 떠돌이 삿갓만큼이나 찢어지게 궁기든 사람인지라 변변히 나그네를 대접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래도 다리 뻗을 오두막집이라도 가진 이 집 주인은 나그네를 대접할 요량으로 소반 위에 멀건 죽 그릇을 내밀고는 어쩔 줄을 몰라한다. 말이 죽이지 하늘에 떠있는 구름이 비칠 지경이니 낟알 하나 제대로 찾을 수 없는 맹물같은 죽이었다.

이 맹물죽 한 그릇 대접받은 김삿갓 그냥 있을 수 없어 시 한 수 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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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반 위엔 머얼건 죽이 한 그릇/ 뜬구름 그림자가 함께 오가네/ 주인은 미안해서 쩔쩔매나니/ 나야 본시 풍류객 상관이 있오> < 四脚松盤粥一器/ 天光雲影共徘徊/ 主人莫道無顔色/ 吾愛靑山倒水來>

이름하여 ‘죽 한그릇(粥一器)’이라는 시이다.

이 얼마나 멋들어진 정경인가? 이 얼마나 사는 맛 나는 장면인가? 내 입 풀칠하기도 바쁜 형편에 지친 나그네 그냥 보낼 수 없어 낟알 몇 알 두고 끓인 멀건 죽 한 그릇 내 놓고 미안해 쩔쩔매는 주인의 훈훈한 마음, 그 죽사발을 하늘로 받고 감사하며 또 다시 하늘을 담아 주인에게 바치는 김삿갓의 시 한 수.

풍류하면 제 밥벌이 걱정없이 펑펑 돈 깨나 뿌리며 주지육림에 빠져 음풍농월(吟風弄月)하는 것으로나 아는 사람들에겐 이런 풍류의 맛이 시원치 않겠다만 이것이 진짜 세상 살아가는 풍류이다.

주린 배 참다 참다 기진한 채 오두막 등불 하나 만나길 고대하며 발길 옮기는 사람들이 어디 김삿갓 뿐이겠나? 결코 수월치 않은 삶의 길목들, 더하여 때론 산길을 헤매는 듯한 이민(移民)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 속에도 그 지친 삿갓의 모습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어디 경제의 궁핍뿐이랴! 겨우 몸과 마음의 다리 뻗을 오두막 한 채 가졌으나 여전히 궁기에 빠져 있는 모습 또한 우리들의 모습일 수 있다. 이런 모습들로 어우러져 살아가는 것이 바로 우리가 사는 세상이다.

주인과 나그네가 멀건 죽 한 그릇 사이에 두고 하늘을 나누어 갖는 정겨운 모습에서 사는 맛을 느낄 수 있듯 오늘 여기 우리 한인 이민 사회가 서로의 하늘을 나누어 갖는 맛과 멋이 어우러진 사회가 되길 꿈꾸어 본다.

그것이 비록 멀건 ‘죽 한그릇’일지라도…

*** 오늘의 사족

나는 오늘도 죽 한그릇은 나누었다. 좋다.

골프와 장치기(杖球)

지나간 십 수년  동안 이 곳 지방 신문인 The News Journal지에 한국관계 기사나 한국인을 다룬 기사가 1면이나 2면을 장식한 일은 손에 꼽을 정도이다. 기억하기로는 전두환, 노태우씨의 구속기사, V자로 꺽였던 성수대교 붕괴사건과 삼풍백화점 붕괴사건 기사,  “정부 수립 후 첫 정권 교체”라는 제목을 단 김대중대통령 당선 기사와 그의 노벨상 소식 그리고 이 곳 DuPont Country Club에서 있은 맥도날드 컵 대회에서 우승한 박세리선수에 대한 기사가 전부이다.  그리고 지난 일요일판 스포츠면에 박세리의 사진과 함께 그녀에 대한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렸다.

골프채를 잡아 보기는 커녕 “골프는 이민(移民)을 망치게 한다”는 생각으로 사는 내가 골프 이야기를 한다는 것이 좀 우습기도 하다. 이젠 많이 숙련되어 어떤 모임이건 의례 나오는 골프 화제에 입 꼭 다물고 들을 수 있게까지 되었지만 한 때는 어떤 모임이건 화제가 골프로 옮겨지면 슬그머니 자리를 뜨곤하였다.  어쨋거나 남한(the South Korean)의 박세리”로 소개 되었지만 그녀로 하여 가게 손님들과의 화제거리가 되니 반가운 일이다.

기록에 의하면 골프는 15세기 무렵에 네델란드에서 시작되어 스코들란드로 전래되어 퍼졌다고 한다. 경기의 규칙이 성문화되기는 1754년의 일이고, 오늘날과 같은 기구와 규칙이 적용되기는 19세기 중엽부터라고 한다.

오늘날의 골프와 아주 흡사한 경기가  한국에 있었다. 조선조(朝鮮朝) 초기 역사기록인 <태종실록: 13년(서기 141년)>, <세종실록 : 3년(서기 1421년)>, 세조실록: 1년(서기 1455년)>등에는 뚜렷한 경기법칙 아래 행해졌던 장구(杖球)경기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장구는 몇 사람이 좌우 두 편으로 갈라서서 승부를 겨루게 되는데,  공을 치는 막대기는 숟가락과 같으며, 공을 치는 끝은 손바닥처럼 넓적한데 이것은 물소의 가죽으로 만든다. 가죽이 얇으면 공이 높이 솟아 오르고, 가죽이 두터우면 공은 멀리 가지 않는다. 또한 곤봉(袞俸)도 사용하는데 공같이 둥그런 것이 달려있는 이 곤봉으로 공을 치면 공이 뱅글뱅글 돌면서 뛰어 오르지 않고 자리만 이동한다. 이 모두 두텁고 얇은 정도와 크고 작은 모양에 따라 명칭이 달랐다 한다.

공은 나무로 만들거나 차돌을 사용했고 그 크기는 계란만 했다 한다. 땅을 파서 주발 모양같은 구멍을 만드는데 이것을 와아(窩兒)라 불렀다. 이 와아는 전각(殿閣)을 사이에 두고 파 놓기도 하고, 층층대 위에 파 놓기도 하며 또는 평평한 땅에 얼마만큼 동떨어지게 파 놓아 공이 들어 갈 자리를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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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쳐서 구멍에 들어 가면 2점을 얻는다. 한 번 쳐서 들어가지 못했으면 공이 멈춘 곳에서 다시 쳐 들어가면 1점을 얻는 방법으로 경기가 진행된다. 세종 때와 세조 때와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대체로 엇비슷한 방법으로 경기가 진행되었는데 주로 궁궐 안에서 임금과 종친들이 즐기던 것이었다. 일반 서민층에서도 이와 유사한 경기가 유행하였는데 이를 얼레공치기라 하였다.

이 얼레공치기는 최근세까지 전래되어 지난 세기 초까지만 하여도 그 그림자가 남아 있었다.

1931년 2월 5일자 동아일보에는 “장구 얼레공 대회 개최”라는 제하의 기사를 사진과 함께 보도하고 있다. 그 장구경기, 얼레공치기의 기술이 살아나 박세리, 김미현등의 별들이 한국의 이름을 빛내는 것은 아닐런지.

***오늘의 사족

당시의 박세리는 오늘날 김연아였다.

아니 적어도 내가 사는 동네에서는 오늘의 김연아 이상이었다.

한반도나 한인들의 긍정적 뉴스를 듣거나 이야기를 전해 듣는 날은 참 기분 좋다. 이민 이후 줄곧….

 

 

(2001. 4. 26)